전(殿) 지붕 위에 올라가 ‘상위복(上位復)’이라고 세 번 부르니 대신 이하가 곡하고 나왔다

2022. 12. 19. 14:05대륙조선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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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27년 기축(1649) 5월 8일(병인)

27-05-08[01] 상이 창덕궁 대조전 동침에서 승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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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창덕궁(昌德宮)의 대조전 동침(東寢)에서 승하하였다. 미시에 상의 병이 위독하므로 세자가 의관에게 하령(下令)하니, 의관들이 약을 받들고 달려 들어갔다. 약방 도제조 김자점(金自點), 제조 조경(趙絅), 부제조 김남중(金南重), 주서 이후(李垕), 검열 서필원(徐必遠), 조사기(趙嗣基) 등이 희정당 동쪽에 들어와 앉고, 이윽고 좌의정 이경석(李景奭)도 들어왔는데, 어의(御醫)들이 다 증후가 위독하다고 하였다. 세자가 월랑(月廊)에 자주 나와 어의에게 상의 증후를 말하면 죽력(竹瀝)ㆍ청심원(淸心圓) 등의 약을 잇따라 바쳤다. 신시에 세자가 하령하기를,

“상후(上候)가 이에 이르렀는데 중전(中殿)께서 현재 경덕궁(慶德宮)에 계시니 서둘러 모셔왔으면 한다.”

하니, 대신이 함께 아뢰기를,

“하령이 매우 마땅하십니다.”

하고는, 목메어 울었는데, 사관ㆍ의관 등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승지 박장원(朴長遠)ㆍ가주서 이만길(李晩吉)ㆍ검열 조귀석(趙龜錫)ㆍ병조 참의 김수익(金壽翼)으로 하여금 가서 중전을 맞이하여 오게 하였는데, 내시가 안에서 잇따라 나와 매우 급하게 재촉하니, 중외가 황급하였다. 대신이 내관에게 말하기를,

“힘써 진정하고 일체 동요하지 말라.”

하고, 물러나오려 할 때에 내시가 말을 전하기를,

“동궁께서 머물러 기다리라 하십니다.”

하였다. 호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밖에서 와서 말하기를,

“예조 판서 자리가 비었으니 빨리 차출하소서.”

하고, 대신이 김육(金堉)을 예조 판서로, 정세규(鄭世規)를 공조 판서로 권차(權差)하기를 청하니, 세자가 그리하라고 답하였다. 대신이, 대장(大將)들은 궁성(宮城)을 호위하라는 뜻을 원두표에게 말하여 내보냈다. 세자가 하령하기를,

“대신은 들어오라.”

하여, 대신과 제조들이 들어가려 하는데, 조사기가 동열(同列)에게 말하기를,

“우리들도 따라 들어가야 한다.”

하니, 이경석이 말하기를,

“사관은 들어올 것 없다.”

하였다. 조사기가 말하기를,

“어찌 대신이 안에 들어가는데 사관이 따르지 않는 이치가 있는가.”

하고, 이후도 말하였다. 그래서 이후ㆍ서필원ㆍ조사기 등이 따라 들어가 침전(寢殿)에 이르니, 상은 이미 말을 하지 못하였다. 김자점ㆍ이경석이 방 안에 들어가니, 세자가 말하기를,

“사관은 들어오지 말라.”

하므로, 사관 등은 드디어 문 밖에 서고 조경ㆍ김남중도 문 밖에 있었다. 세자가 상의 귓가에 대고 말하기를,

“들리십니까? 신이 누구입니까?”

하기를 세 번 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못하였다. 김자점ㆍ이경석도 말하기를,

“신들이 여기 왔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또한 답하지 못하였다. 대신들이 다 물러나왔는데, 김육이 밖에서 들어와 말하기를,

“빙궤고명(憑几顧命) 등의 일을 빨리 거행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김자점이 그렇다고 하였다. 이경석이 말하기를,

“대제학은 빨리 유교(遺敎)를 지어야 하겠습니다.”

하였으나, 그때 조경이 대제학인데 불가하다 하며 말하기를,

“유교가 없었는데 굳이 거행하려 한다면 곧 명을 사칭하는 것입니다.”

하니, 김자점도 그렇다고 하여 드디어 그만두었다. 세자가 또 대신을 불러 김자점ㆍ이경석과 조경ㆍ김남중ㆍ이후ㆍ서필원ㆍ조사기 등이 들어가 침방 안에 이르렀는데, 울부짖는 소리가 이미 궁중에서 났다. 세자의 왼 손가락에 피가 줄줄 흘렀는데, 이는 세자가 손가락을 잘랐으나 대군(大君)의 도움으로 뼈가 절단되지는 않은 것이었다. 중전이 경덕궁에서 돈화문(敦化門)을 거쳐 협양문(協陽門)으로 들어와 대내(大內)에 돌아올 때에 상이 승하하였는데, 일관(日官)이 막 유시(酉時)를 알린 때였다.

이날 아침에 김자점이 이경석에게 말하기를,

“산천에 기도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므로, 이경석이 글로 김신국(金藎國)에게 묻기를,

“임금의 질병에는 반드시 기도를 거행하는데, 선조(先朝)의 고례(古例)는 어떠하며 종묘에 비는 축문(祝文)의 머리말은 또한 어떻게 써야 합니까?”

하니, 김신국이 답하기를,

“전에 들으니, 인종(仁宗)께서 동궁(東宮)에 계실 때에 중종(中宗)을 위하여 기도하였는데 축문의 머리말에 인종의 어휘(御諱)를 썼다 합니다. 이 일이 《회재집(晦齋集)》에 실려 있다 하는데, 그 상세한 것은 기억할 수 없습니다. 백관(百官)이 기도하는 경우는 전례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이경석이 이 말을 세자에게 아뢰니, 조경을 시켜 글을 짓게 하였다. 이 날 중신(重臣)을 보내어 세자를 대신해서 사직과 종묘에 기도하게 하려 하였으나, 미처 거행하지 못하였다.

김자점ㆍ이경석ㆍ조경ㆍ김육ㆍ김남중 등이 곧 들어가 대행왕(大行王)의 침상 앞에 이르렀는데, 원두표도 들어왔다. 대신이 내시를 시켜 대행왕의 침상을 옮겨 머리를 동쪽으로 할 것을 청하고, 이어서 속광(屬纊)을 행하였다. 속광이 끝나고 내시 두 사람이 전(殿) 지붕 위에 올라가 ‘상위복(上位)’이라고 세 번 부르니 대신 이하가 곡하고 나왔다. 정원(政院)ㆍ옥당(玉堂)ㆍ춘방(春坊)의 관원이 옷을 갈아 입고 합문 밖에서 곡림(哭臨)하고,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인정전(仁政殿) 뜰에서 곡림하였다. 내관 나업(羅嶪)이 안에서 나와 무예 별감(武藝別監)을 거느리고 들어가 호위하였다. 함릉군(咸陵君) 이해(李澥)를 수릉관(守陵官)으로, 금림군 이개윤(錦林君李凱胤)을 대전관(大奠官)으로, 이경석(李景奭)을 총호사(摠護使)로 삼았다. 세자의 영으로 구인전(具仁廛)과 정선흥(鄭善興)을 불러 대내에 들어와 상사(喪事)를 돌보게 하였는데, 두 사람은 다 내척(內戚)이다.

닷새가 지난 5월 12일에 의례(儀禮)대로 대렴(大殮)하고, 엿새가 지난 13일에 의례대로 성복(成服)하고 세자가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고 뭇 신하를 거느리고 ‘헌문 열무 명숙 순효(憲文烈武明肅純孝)’라는 시호를 올리고 ‘인조(仁祖)’라는 묘호(廟號)를 올렸다. 다섯 달이 지난 9월 20일에 장릉(長陵)에 장사지냈다. 좌의정 이경석(李景奭)이 행장(行狀)을 지어 바치고, 대제학 조경이 지문(誌文)을 짓고, 대사헌 조익(趙翼)이 시책(諡冊)을 지어 바치고, 제학 김광욱(金光煜)이 애책(哀冊)을 지어 바쳤다.

【원전】 35 집 351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 / 어문학-문학(文學)

[-D001] 속광(屬纊) : 

임종(臨終) 때의 한 절차. 햇솜을 코 밑에 놓아 숨졌는지를 알아보는 것.

[-D002] 상위복(上位) : 

초혼(招魂)의 한 절차로 ‘상감은 돌아오소서.’라는 뜻. 임금이 평소에 입던 옷을 가지고 지붕마루 위에 올라가 왼손으로 깃을,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 북향하여 이렇게 세 번 부른다. 《오례의(五禮儀)》 흉례복(凶禮復).

 

 

조선왕조실록 > 순조실록 > 순조 34년 갑오 > 11월 13일 > 최종정보

순조 34년 갑오(1834) 11월 13일(갑술)

34-11-13[12] 복을 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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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復) 【내시(內侍)가 상시에 입고 있는 상의(上衣)를 왼쪽에 메고 앞 동류(東霤)부터 올라가서 왼손으로 옷깃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허리를 잡고 북쪽을 향하여 세 번 상위 복(上位復)을 불렀다. 복을 마치고는 옷을 가지고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위에 덮고 연궤(燕几)로써 철족(綴足)하였다.】 을 행하였다.

【원전】 48 집 415 면

【분류】 왕실(王室)

 

 

 일성록 > 정조 > 정조 즉위년 병신 > 3월 5일 > 최종정보

정조 즉위년 병신(1776) 3월 5일(병자)

00-03-05[02] 복(復)하였다.

[DCI]ITKC_IT_V0_A00_03A_05A_00020_2003_001_XML DCI복사 URL복사

○ 내시가, 평상시에 입으시던 상의 상복(上服)을 왼쪽에 매고 앞의 동쪽 낙수받이로부터 올라가 왼손으로는 옷깃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허리를 잡아 북쪽을 향해 세 번 외치기를,

“상위(上位)는 복(復)하시오.”

하였다. 마치고 내려와 그 옷을 가지고 들어가서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위에다 덮어 두고 연궤(燕几)로 발을 고정시켰다.

ⓒ 한국고전번역원 | 조동영 (역) |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