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2. 19:41ㆍ대륙조선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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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잡록 3 본조(本朝)
죽계별곡(竹溪別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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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竹嶺) 남, 영가(永嘉 안동의 옛이름) 북, 소백산(小白山) 앞, 천재(千載) 흥망(興亡). 풍류도 한결같은 순정(順政)의 성읍(城邑)이라. 딴 세대(世代)에 숨지 않을 취화봉(翠華峰).
천자(天子)의 태(胎)를 감춰, 중흥(中興)을 빚어내니 경기 어떠하니잇고.
청풍(淸風) 장각(壯閣), 양국(兩國)의 직함(職銜)이라. 그래서 산수는 청고(淸高)하니 경기 어떠하니잇고.
숙수루(宿水樓) 복전대(福田臺) 승림정자(僧林亭子) 초암동(草菴洞) 욱금계(郁錦溪) 취원루(聚遠樓) 위에 반은 취하고 반쯤 깬 홍백화(紅白花) 산비 속에 피고, 고이 절에 노니 경기 어떠하니잇고.
고양(高陽)의 주도(酒徒)와 주리(珠履)가 삼천(三千), 손에 손잡고 상종(相從)하니 경기 어떠하니잇고.
채봉(彩鳳)은 날고 옥룡(玉龍)은 도사린 벽산(碧山) 송록(松麓)이요, 지필봉(紙筆峰) 연묵지(硯墨池)에 모두들 향교에 들어와 마음은 육경(六經)에 달리고 뜻은 천고에 다하는 부자도(夫子徒 공자의 교를 배우는 사람)들, 봄에는 글 외고 여름에는 거문고 타니 경기 어떠하니잇고.
해마다 3월이면 기나긴 길에 소리치고 길 비켜라 호통치는 행차 맞이하니 경기 어떠하니잇고.
초산(楚山) 새벽 꽃구름 산원(山苑)의 좋은 절기, 꽃은 무르녹아 그대 위해 피었으며, 버들 그늘 골짜기는 다시 오기 기다리네. 홀로 기댄 난간에는 꾀꼬리 소리 얼싸안아, 한 포기 녹음(綠陰)이 드리웠다. 천생(天生) 요염(妖艶)으로 복사꽃 붉었을 제 천리(千里)에 상사(相思)한들 또 이를 어이하리.
붉은 살구꽃 분분(紛紛)하고 방초(芳草)는 무성하다. 술단지 앞에 기나긴 해 푸른 그늘 어둑어둑 화각(畵閣)이 침침한데. 거문고에 훈풍(薰風) 곡조 황국(黃菊)에 단풍(丹楓)이라, 금수 청산에 기러기 날아간 뒤 눈과 달의 빛 서로 어울리니 경기 어떠하니잇고. 중흥 성대(中興聖代)에 장락 태평(長樂太平)이라, 사절(四節) 놀이 가사이다.
[주-D001] 고양(高陽)의 주도(酒徒) :
이는 진(秦) 나라가 멸망할 때에 한고조(漢高祖)를 도운 역이기(酈食其)라는 사람인데 그는 술이나 먹고 난봉 부리던 사람이었다. 한고조를 만난 뒤에 큰 공을 많이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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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잡록 3 본조(本朝)
주세붕(周世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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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태백산과 소백산의 모든 절을 보니 그 기둥과 집은 신라 시대로부터 흘러 전한 것이요 그들의 받드는 바는 곧 삼강(三綱)을 침체시켜 없애는 귀신이다. 그런데도 그 무리들이 믿고 지킴은 이와 같은데, 하물며 문성공(文成公)이 학교를 창시하고 삼강을 밝혀서 우주의 기둥과 대들보를 붙들어 세운 것이랴. 그러나 그 고향 마을의 한 사당을 오히려 길이 보존하지 못한다면 또한 문헌(文獻)있는 옛나라의 부로(父老)나 사문(斯文)의 큰 부끄럼이 되지 않겠는가. 진실로 모든 부로와 모든 사문으로 하여금 한 마음으로 여기에 공경을 바친다면 나는 그 사당이나 그 서원이 영구히 보존될 을 믿어 의심하지 않노라. 말이 거듭되고 글이 중복되어도 스스로 그칠 줄을 알지 못함은 오히려 그 지키는 자가 삼가지 못하여 태백산과 소백산의 모든 중들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워해서이다. 동상
○ 풍기(豊基)의 〈고적기(古跡記)〉에, “풍기군(豊基郡)은 본래 신라의 기목진(基木鎭)으로 흙으로 쌓은 옛 성터가 있는데 주위가 매우 크다. 전하는 말에 성서천(城西川)에는 예전에 다리 누각이 있었으므로 다락다리[樓橋]라 칭했으며, 성 북쪽 큰 길은 곧 저자의 거리로써 욱금동(郁錦洞)을 끊어서 점방산(占方山)에 가로 걸쳤는데 그 위에는 사장(射場)이 있다 하여 그를 북청천(北廳川)이라고 칭했다 하나, 어찌 그 때 냇물 위에 활 쏘는 청사가 있었겠는가. 삼국(三國) 초에 고구려가 가장 강하여 영남의 여러군 즉 급벌산(及伐山)순흥(順興) ㆍ내기(奈己) 영천(榮川) ㆍ옥마(玉馬) 봉화(奉化) ㆍ매곡(買谷) 예안(禮安) ㆍ임하(臨河)ㆍ진안(眞安) 진보(眞寶) ㆍ청기(靑己) 청송(靑松) ㆍ안덕(安德)ㆍ우시(宇尸) 영해(寧海) ㆍ시홀(尸忽) 영덕(盈德) ㆍ아혜(阿兮) 청하(淸河) 같은 곳이 모두 그에 속하였으나, 홀로 기목(基木)만은 계림(鷄林)과 거리가 가장 멀면서도 우뚝히 막는 울타리가 되어서 적아(赤牙) 은풍(殷豊) 의 서쪽을 마침내 털끝만치도 동요시키지 못하게 했으니, 그 웅장하고 강함은 천 년이 되어서도 가히 상상할 수 있다. 일찍이 《삼국사기》를 상고해 보건대, 아달왕(阿達王) 3년인 병신년에 계립령(鷄立嶺)의 길을 열었고 5년인 무술년에 죽령(竹嶺)의 길을 만들었다 하는데, 곧 한(漢) 나라의 환제(桓帝) 12년이다. 상원봉(上元峰)에 옛 길의 흔적이 있는데, 전하는 말에는, ‘상원사(上元寺)는 곧 옛 원의 터전이라.’ 한다. 죽령의 길이 트이지 않았을 적에는 고구려가 반드시 이곳으로 길을 잡았을 것이다. 죽령의 구부러져 나간 남쪽에는 두솔봉(兜率峰)이 있어서 극히 높게 솟았는데 기도하면 곧 응험이 있었다. 그 한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고을과의 거리가 5리 정도에서 불쑥 큰 길에 임박한 것은 등강성(登降城)이라 하는데,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이 산에 오른 지 7일 만에 백제(百濟)가 항복한다는 글이 왔기 때문이며, 태조의 초상이 지금도 용천사(龍泉寺)에 있는데 단정하고 엄숙하며 온화하고 명랑하여 바라보면 애착할 만하니 참으로 하늘 같은 얼굴이었다. 한 번 노(怒)하여 삼국을 통일하고 만세에 힘입었으니 왕씨(王氏)가 미약하였다면 우리는 그 어육(魚肉)이 되었을 것이다. 사문(斯文) 임제광(林霽光)이라는 이가 고을을 위하여 사당을 짓고 이를 봉안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서 불이나 초상은 완전했지만 사당집은 다시 일으키지 못하였으니, 탄식할 만한 일이다. 우리 문종(文宗)의 태(胎)가 명봉산(鳴鳳山)에 매장되었고 소헌왕후(昭憲王后 세종비(世宗妃))의 태 및 고려(高麗) 세 왕의 태가 모두 소백산(小白山)에 안장되어 하나의 산에 어태(御胎)를 안장한 곳이 네 곳에 이르고, 한 고을에 어태를 안장함이 다섯 곳이니 다른 고을에는 있을 수 없는 바이다.
내가 보니 소백산은 북쪽에서 오다가 서편으로 뛰어서 그 결구된 것이 지극히 웅대하여 검푸른 빛이 하늘의 반을 가로질렀고 모든 봉우리의 안에 있는 것은 또 모두 빼어나게 피어서 마치 푸른 물결이 다투어 솟구치는 것 같아 한 번 바라보니 울울창창하여 그 기르고 도움이 무궁함을 알겠도다. 그 휘돌아 동쪽으로 온 것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져 높이는 아홉 길에 미치지 못하며 거북이 엎드린 것 같은 것은 영구(靈龜)라 이르니, 곧 문성묘(文成廟)의 진산(鎭山)이다. 묘(廟)에서 산의 서쪽으로 몇 리 떨어진 곳에 은행나무 고목이 있는데 전하는 말에, ‘이는 죽주(竹州)의 남은 터라.’ 하여, 그 자취가 완연하였으나 나라 역사[國乘] 및 지지(地誌)에는 모두 상고할 수 없으니, 대저 문헌을 고증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이 많다. 순흥(順興)은 급벌산(及伐山)으로부터 급산(岌山), 순정(順政), 순안(順安), 흥녕(興寧), 흥주(興州), 순흥(順興)으로 모두 7번이나 이름을 고쳤다가 마침내 이보흠(李甫欽)에서 그쳤고, 풍기(豊基)는 기목(基木)에서 연유하여 기주(基州), 기천(基川), 영정(永定), 안정(安定)으로 다섯 번 이름을 고쳤다가 지금 이름으로 되었으니, 앞일을 우러르고 다음 일을 굽어볼 때 나는 그 몇 번이나 폐하고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이 한 고을을 들추어 보면 천하의 일을 알 만하다. 슬프다. 세상에는 눈을 가로 뜨면서도 스스로 영리만 생각하는 자가 있으니, 역시 그 무슨 마음인지 알지 못하겠다. 아울러 이것을 기록하여 착한 것에 향하는 자를 위하여 권면하노라.” 하였다. 《죽계지(竹溪志)》
○ 풍기의 풍속을 숭상하는 기문(記文)에, “풍기군은 영남(嶺南) 일원에서 가장 높은 등성마루에 있고 그를 덮은 것은 소백산이요, 그 흐르는 것은 3강인데 순흥(順興)이 옮겨져 속함으로부터 더욱 시서를 돈독히 하여 교학(敎學)에는 안 문성공(安文成公)ㆍ문정공(文貞公)ㆍ문경공(文敬公) 등 제공의 유풍(遺風)이 있어서 사람의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효도하며 공순함으로써 근본을 삼고 선비된 자에 이르러서는 염치있고 곧고 발라서 스스로 지켜 힘쓰지 않음이 없어 그 풍속을 보건대 잘 순화되었으며 아직 이리처럼 사납고 불손하며 탐내서 의리를 잊은 자가 있음을 듣지 못했는데, 유독 괴상스러운 것은 여지지(輿地志)에는, ‘풍속은 강한 이리와 같다.’ 하였으니, 어느 시대의 기록인지 모르겠으며, 풍성한 땅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욕됨을 받게 하였으니, 또한 거짓이 아니겠는가. 아울러 오늘날 풍속의 숭상함을 기록하여 뒤의 풍속을 채취하는 자로 하여금 취사할 것을 알게 하는 바이다.” 하였다. 동상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1년 을묘 > 3월 7일 > 최종정보
영조 11년 을묘(1735) 3월 7일(정축) 맑음
11-03-07[12] 원자의 태봉을 찾은 결과를 보고하는 관상감 제조의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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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빈이 관상감 관원이 전하는 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원자(元子) 아기씨의 태봉(胎峯)을 찾으러 본감의 지관 이기홍(李器弘)을 각 도에 파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강원도 원성현(原城縣) 치악산(雉岳山) 아래, 주천면(酒泉面) 복룡산(伏龍山) 아래, 홍천현(洪川縣) 올운산(兀雲山) 아래, 평창군(平昌郡) 사자산(獅子山) 아래와 질아산(質峨山) 아래에 각기 한 곳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이어 산의 기맥을 따라가 경상도 순흥부(順興府) 소백산(小白山) 기슭에 한 곳, 영천현(永川縣) 태백산(太白山) 아래 한 곳, 풍기현(豐基縣) 소백산(小白山) 아래 문종대왕(文宗大王) 태실 국내(局內) 한 곳, 예천현(醴泉縣) 소백산 아래 한 곳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옮겨 가서 충청도 보은현(報恩縣) 속리산(俗離山) 아래 내외에 각 한 곳을 찾아 도합 12곳인데 그 가운데 경상도 풍기현 소백산 축좌 미향(丑坐未向), 예천 소백산 자좌 오향(子坐午向), 강원도 원성현 치악산 오좌 자향(午坐子向)의 땅이 가장 좋다고 합니다. 이 세 곳을 의망하고 가려 정하여 태를 묻을 땅으로 삼되 그 나머지 찾은 곳은 각 도의 해당 고을에 분부하여 토민이 침해하거나 차지하여 매장하는 폐단을 금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1년 을묘 > 3월 10일 > 최종정보
영조 11년 을묘(1735) 3월 10일(경진) 맑음
11-03-10[37] 원자의 태를 낙점한 태봉에 안장하는 일과 관련하여 윤4월로 택일하여 거행하겠다는 관상감 제조의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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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규가 관상감 관원이 전하는 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이번 원자 아기씨의 태봉(胎峯)을 경상도 풍기현(豐基縣) 소백산 기슭 명봉산(鳴鳳山) 아래 축좌 미향(丑坐未向)으로 낙점하였습니다. 태를 안장하는 법은, 남자의 태는 다섯 달 만에 안장한다고 하는데 오는 윤4월이면 다섯 달이 차고 또 길한 달입니다. 이대로 택일하여 거행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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