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18. 14:04ㆍ대륙조선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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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집 제12권 / 비(碑)
부장 증 병조 참판 관란 허공 신도비명 병서 〔部將贈兵曹參判觀瀾許公神道碑銘 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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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이 일어났던 임진년이 다시 돌아오매, 내가 그 당시의 충성스러웠던 선비들을 추념해 보니, 그때에는 의병을 일으켜서 왕을 위하여 적개심을 불태운 사람들이 저처럼 많았었는데, 어찌하여 요즈음 사람들은 위축되어 떨쳐 일어나지를 못하고 와신상담(臥薪嘗膽)하려는 뜻이 없는가? 가슴속에 치솟는 의분을 이길 수가 없구나.
하루는 진양(晉陽 진주(晉州))의 사인(士人) 허균(許▼(禾+勻))이 찾아와서 그의 선조로서 병조 참판에 추증된 관란 허공의 행록(行錄)을 보여 주면서 비석에 새길 명문을 청하였다. 아아, 공은 바로 임진왜란 때의 의사(義士)이며, 초유사(招諭使) 김학봉(金鶴峯) 선생의 막료였다. 그의 위대한 업적을 상고해 보니 이송암(李松巖)의 일기 속에 모두 적혀 있으므로 믿을 만한 증거가 있다.
공의 휘는 국주(國柱), 자는 중간(仲幹)으로 관향은 김해(金海)이다. 고려 말에 전리 판서(典理判書)를 지낸 휘 옹(邕)이 있었고, 이분이 휘 소주(少㕀)를 낳았는데 사헌부 장령을 지냈으며 부모님의 상을 잘 치러서 정려되었다. 우리 왕조에 들어와서 휘 추(錘)가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는데, 이분이 공의 증조이다. 조부의 휘는 공작(公綽)인데 음보(蔭補)로 현감을 지냈으며, 부친의 휘는 유(裕)로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를 지냈다. 모친 숙인(淑人) 함종 어씨(咸從魚氏)는 진사 득한(得漢)의 따님이며, 대사헌 관포(灌圃) 득강(得江)의 종녀(從女)이다.
공은 가정(嘉靖) 무신년(1548, 명종3)에 진주의 승산리(勝山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고 신의로써 널리 알려졌다. 의지와 기개가 우뚝하여 개연(慨然)히 손자(孫子)와 오자(吳子)의 병법을 사모하였으며, 일찍이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부장(部將)에 천거되었으나, 마침내 불우한 처지로 여러 해 집안에만 계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김 선생이 본도를 초유(招諭)하자, 공은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서 가산을 기울여 의병을 모집하니 군중이 6, 7백 명이나 모였다. 약속을 엄히 하고 대오(隊伍)를 정돈하여 적과 더불어 함께 죽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이때에 김면(金沔)은 거창(居昌)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박사겸(朴思兼)과 박사제(朴思齊)는 삼가(三嘉)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 무리가 각각 8, 9백 명이 되었다. 단성(丹城)의 권세춘(權世春)과 초계(草溪)의 전치원(全致遠)과 이대기(李大期)도 의병을 일으켜 응해 오니 초유사가 크게 기뻐하여 그날로 장계를 올렸다. 본주의 판관 김시민(金時敏)도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에서 소식을 듣고 와서 회동하니 모인 병사가 수천 명이었다.
분장을 의논하여 성을 지키는데,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고 손승선(孫承善)을 수성 유사(守城有司)로 삼으며 하천서(河天瑞)를 조도(調度)에 임명하고, 강덕룡(姜德龍)은 갑옷과 무기 수선을 담당하고 신남(申楠)은 취사와 군량을 담당하였다. 공과 정유경(鄭惟敬)은 복병장(伏兵將)이 되었다. 이때에 초유사가 명령하기를,
“진양이 없으면 호남(湖南)도 없고,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할 수 없다. 적이 탐내는 곳이 바로 여기이니 수비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공은 한결같이 초유사의 통제를 따라서 일에 맞추어 계획을 세웠으며, 적진에 임하여서는 선봉이 되고 보루를 마주하여서는 복병이 되었다. 정유경과 더불어 남강 밖에서 분탕질하는 왜적을 공격하여 적을 많이 베어 죽였으니, 그 공으로 본도의 병마우후(兵馬虞候)가 되었다. 그 후에 선무 공신(宣武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나 공은 조용히 물러나 공로를 자랑하지 않았다.
물러나서는 염강(濂江) 가에 정자를 짓고 관란(觀瀾)이라고 편액하였다. 노파(蘆坡) 이흘(李屹),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독촌(獨村) 이길(李佶)과 더불어 소요하면서 술 마시고 시를 읊조리는 것으로 말년의 계책을 삼았다. 또한 독촌 등 여러 명사(名士)들과 더불어 호음(湖陰)과 정암(鼎巖) 사이에서 기로회(耆老會)를 운영하여 풍류와 운치가 강우(江右 경상 우도)를 빛내었다. 회갑이 되던 해(1608, 광해군 즉위년) 3월 29일에 별세하였다. 처음에는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는데, 순조(純祖) 임신년(1812, 순조12)에 많은 선비들의 요청으로 병조 참판으로 올려 추증되었다.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참의에 추증된 사형(思亨)의 따님이고, 수찬 효빙(孝聘)의 증손녀이다. 만력(萬曆) 어느 해 7월 13일에 돌아가시니, 진주 동쪽 용봉리(龍鳳里) 청원(淸源)의 묘좌(卯坐) 언덕에 합장하였다.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 감(玵)은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지내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딸은 유형춘(柳亨春), 조이곤(曺以坤), 현감 윤보벽(尹輔辟)에게 출가하였다. 서자〔餘男〕는 용(瑢)이다.
참판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병마사 동립(東岦)과 현령 중립(仲岦)이다. 병마사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통덕랑 서(曙), 부사 성(晟), 통덕랑 만(晩)이다. 현령은 딸 넷을 두었는데 참봉 이익화(李翊華)와 이현주(李玄柱), 권두첨(權斗瞻), 송지식(宋之栻)에게 출가하였다. 증손 이하는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조용히 공의 행록을 살펴보니 다만 초두에 의병을 일으켜 성을 지킨 행적만이 서술되어 있고 그 후의 일은 도리어 자세하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 혹여 당시에 막부의 여러 사람들이 다른 진으로 나뉘어 배속되어 가면서 공도 그 가운데에 있었는데, 오장원(五丈原)에 별이 떨어지고 형주(荊州)의 성이 함락될 때에 그 기록을 가져다가 지키지 못했기 때문인 것인가? 또 이미 우후(虞候)가 되었다면, 우후는 부장보다 높은 벼슬인데도 공신녹권(功臣錄券)에는 어찌하여 부장(部將)으로 기록된 것인가? 고대의 문헌과 전적(典籍)에 대해서는 태사공(太史公) 또한 소루(疏漏)함을 탄식하였으니,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 도리어 어떻게 널리 수집하여 그 빠진 글을 보충할 수 있겠는가.
아아, 바야흐로 강력한 이웃 나라가 몰래 쳐들어오던 날에 저 웅번(熊幡)을 안고 호부(虎符 병부(兵符))를 차던 자들도 도리어 성을 버리고 달아나 숨는데, 오직 조정에 앉지도 못하고 진연(進宴)에 참여하지도 못했던 사람이 홀로 피를 튀기고 울음을 삼키면서 장대를 들고 나무를 베어서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들을 치는 의리를 세우고, 북쪽을 향하여 죽음으로써 싸우는〔北首爭死〕 계책을 이루었으니, 비상시에 쓸 인재를 평상시에는 기르지 않는다〔所用非所養〕는 말이 이것을 두고 이름인저!
큰 고을에 성주가 있고 용감한 의병이 사방에서 모이매, 재능을 따라서 임무를 부여할 때에 가장 어려운 것은 복병만 한 것이 없다. 저 왜적들이 승승장구 유린해 들어올 때에, 그 흉악하고 모질며 교묘한 속임수에는 진실로 당당한 깃발과 질서정연한 진형(陣形)만을 전적으로 사용하여 제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기병(奇兵)을 설치하고 매복을 설치하여야만 제지할 수가 있다. 공이 이 임무를 맡아서는 사양하지 않았고 주장(主將)이 이 임무를 맡기고는 의심하지 않았으니, 공의 지혜와 용기가 여러 장수들보다 특출하고 기이한 계책이 적을 억제하여 승리하는 데에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강수(江水)와 회수(淮水) 사이를 보호하고 지키며 흉악한 칼끝을 저지하여 막아서 수복(收復)하는 업적을 도와서 이룩한 것은 누구의 공인가? 그 당시에는 비록 큰 나무 밑이나 지키고 있거나 양을 도살하는 것에 만족하였다 하더라도, 높은 충절과 성대한 공적이라야만 능히 백년토록 역사의 기록을 빛낼 수가 있는 것이다. 나라에서 한 번 추증하였는데 거듭 추증한 것은 덕 있는 이를 높이고 어진 사람을 숭상하는 것이니, 국가의 공의(公議)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사라지지 않음을 볼 수 있다. 그러니 어찌 그리도 성대한가. 명은 다음과 같다.
씩씩한 진양성은 / 額額晉城
국가의 울타리이며 방패로다 / 有國藩蔽
태평세월 백 년에 / 昇平百載
문관들은 안일하고 무관들은 놀기만 했네 / 文恬武嬉
교만한 오랑캐가 멋대로 날뛰니 / 天驕陸梁
변방의 요새가 와해되었네 / 鎖鑰瓦解
위풍당당한 초유사께서 / 堂堂招諭
충성과 정절을 다하였네 / 克篤忠貞
왕께서 말씀하기를 “네가 가서 화합시켜 / 王曰汝諧
남쪽 고을을 안정케 하라.” 하시기에 / 乃奠南服
설욕의 눈물로 격문을 날리니 / 雪涕飛檄
의로운 군대가 구름처럼 일어났네 / 義旅雲興
아흔아홉 고을에 / 九十九坊
몸을 떨쳐 일어나 / 能無一士
크게 부르짖을 한 선비가 없으랴 / 奮挺大呼
오직 우리 허공은 / 曰惟許公
문무를 겸비하여 / 文武全材
활 쏘고 말 몰아 일찍이 천거되니 / 射御宿薦
사람들이 모두가 믿고 복종하였네 / 人人信服
한 부대도 오히려 많다 여겨 / 一旅爲多
부대와 진지가 정돈되고 가지런하며 / 部陣整齊
약속과 맹세가 엄격하고 긴밀했네 / 約誓嚴密
초유사께서 돌아보고 웃으며 / 招諭顧笑
“그대들과 함께 맹세하리라.” 하였네 / 曰爾同盟
왕께서 서쪽 변방에 계시매 / 王在西方
바로 장계를 올려 알렸네 / 立以馳啓
관군들도 이날에 / 官軍是日
또한 다시 돌아왔네 / 亦復來之
위기일발 위태한 성을 / 一髮危城
힘을 합쳐 굳게 지켰네 / 合勢固守
수많은 충직한 용사들이 / 林林忠勇
각기 임무를 맡으매 / 各職其官
군량을 조달하고 / 饔餼爾調
갑옷과 무기를 수리했네 / 兵甲爾理
가장 어려운 것은 매복으로 / 最是設伏
더욱 적임자를 얻기가 어려웠네 / 尤難其才
공이 이 일을 담당하여 / 公乃承當
밤낮으로 힘을 아끼지 않으셨네 / 晝宵殫力
남강 밖의 사나운 왜적들이 / 江外豕突
자취를 감추고 도망하였네 / 斂跡以亡
이에 중영으로 승진하여 / 迺陞中營
계획하고 도움에 부지런히 힘쓰셨네 / 畫贊密勿
공적을 이루고는 자신은 물러 나와 / 功成身退
영원히 은둔하리라 맹세했네 / 永矢考槃
쇠로 만든 궤짝에 공훈을 새겨 넣고 / 金匱勳盟
재상으로 봉하여 증직하셨네 / 卿月封贈
앞 임금과 뒤 임금들께서 / 前聖後聖
“두터이 생각하여 잊지 않겠노라.” 하셨네 / 曰篤不忘
내 남강 가에 와서 / 我臨長江
한 자루 칼로 혼을 부르네 / 一劍招侑
장사는 죽지 않으니 / 壯士不死
공께서도 여기 오소서 / 公亦來些
읍하고 당에 오르니 / 揖而之堂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네 / 龍飛鳳舞
번창한 귀한 자손들이 / 振振玉葉
해마다 제사를 받들어 올리네 / 歲執豆籩
모두가 우리 왕의 신하이니 / 莫非王臣
고금에 구별이 없네 / 無今無古
붓을 달려 권면하는 글을 쓰니 / 奮筆以勸
한 편의 《춘추(春秋)》일세 / 一部春秋
[주-D001] 왜란이 …… 돌아오매 :
임진왜란이 일어난 임진년은 선조 25년인 1592년이고, 향산이 맞이한 임진년은 고종 29년인 1892년이다. 왜란이 일어난 지 꼭 300주년 되는 해이다.
[주-D002] 이송암(李松巖) :
송암은 이로(李魯, 1544~1598)의 호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즉시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귀향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며,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막료로 활동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용사일기(龍蛇日記)》를 남겼다. 이것은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이다.
[주-D003] 부장(部將) :
조선 시대 5위(衛)의 각 부(部)를 통솔하던 무반의 종6품 관직이다. 1457년(세조3)에 중앙군을 5위 25부로 개편하고 모든 군사를 병종별로 오위에 분속시키면서 오위 체제가 갖추어졌는데, 이때에 부장이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주-D004] 오장원(五丈原)에 별이 떨어지고 :
삼국 시대 촉(蜀)나라의 제갈량(諸葛亮)은 선주 유비(劉備)의 유언을 받들어 중원을 정벌하기 위하여 여섯 번이나 위(魏)나라를 정벌하는 군사를 일으켰으나 결국은 성공하지 못하고 오장원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삼국지》 배송지(裴松之)의 주(注)에 《진양추(晉陽秋)》를 인용하여 “삐죽삐죽하고 붉은 별이 동북에서 서남으로 제갈량의 진영 위에 흘러가더니, 세 번을 떨어졌는데 두 번은 되돌아갔으나 세 번째는 돌아가지 않더니 조금 후에 제갈량이 죽었다.”라고 기록하였다. 《三國志 卷35 蜀書 諸葛亮傳》 여기서는 진주가 함락되고 관민 이하 모든 사람들이 전사하던 위급한 상황을 말한 듯하다.
[주-D005] 형주(荊州)의 …… 때 :
삼국 시대 촉나라의 대장 관우(關羽)는 형주를 지키고 있었는데 위나라와 전쟁하는 틈에 오(吳)나라 대장 여몽(呂蒙)의 습격을 받고 형주를 빼앗긴 뒤에 맥성(麥城)으로 패주하였다가 전사하였다. 《三國志 卷36 蜀書 關羽傳》 여기서는 진주성이 함락되던 날을 말한 듯하다.
[주-D006] 우후(虞候) :
조선 시대에 각 도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밑에 두었던 무관직으로, 병마우후는 종3품, 수군우후는 정4품이다.
[주-D007] 고대의 …… 탄식하였으니 :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이 말하기를 “내가 기산(箕山)에 올라가니 그 꼭대기에 허유의 무덤〔許由冢〕이라는 것이 있었다. 공자께서 오나라 태백(太伯)이나 백이(伯夷) 같은 고대의 인성(仁聖)과 현인(賢人)을 차례대로 설명한 것은 자세하다. 나는 허유(許由)나 무광(務光)의 의리가 지극히 높다고 들었는데 그들에 관한 글은 조그마한 것도 본 적이 없으니 이것은 어찌된 일인가?”라고 하였다. 《史記 卷61 伯夷列傳》
[주-D008] 웅번(熊幡) :
웅식주번(熊軾朱幡)의 준말로 곰 모양의 수레 앞턱 가로나무와 붉은 깃발을 가리키는데, 한나라 이후에는 지방 장관인 자사(刺史)의 행차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여기에서 전이되어 지방관을 ‘웅번’이라고 하였다.
[주-D009] 조정에 …… 사람 :
《예기(禮記)》 〈단궁(檀弓)〉의 ‘조부좌(朝不坐)ㆍ연불여(宴不與)’의 소(疏)에 “조정에서는 대부는 위에 가서 앉고 대부 이하는 모두 아래로 가서 서며, 연례(燕禮)에는 사(士)가 마루 위에 올라갈 수 없다.”라고 한 구절이 있는데, 지위가 낮으면 대접하는 예절도 박하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허공(許公)이 조정의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 낮은 신분이었음을 말한 것이다.
[주-D010] 장대를 …… 의리 :
맹자가 양혜왕에게 말하기를 만일 인정(仁政)을 시행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효제충신을 닦게 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몽둥이를 들고도 진나라와 초나라의 강병을 두들겨 맞싸우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孟子 梁惠王上》
[주-D011] 북쪽을 …… 계책 :
한나라 무제(武帝) 때의 장군인 이릉(李陵)이 5천 명도 안 되는 보병들을 이끌고 흉노 땅 깊이 들어가서 천 리를 행군하며 싸웠는데, 화살이 떨어지고 도로가 막혔는데도 군사들은 빈주먹을 휘두르고 칼날을 무릅쓰며 북쪽을 향하여 죽기로써 적과 싸웠다. 《漢書 卷54 李廣傳》
[주-D012] 비상시에 …… 않는다 :
《사기》 권63 〈한비열전(韓非列傳)〉에 나오는 말이다. 유학자는 글로써 국법을 어지럽히고 협객은 무술로 금령을 범하는데, 임금은 평상시에는 명예를 중시하는 유학자를 총애하지만 비상시에는 갑옷 입은 무사를 등용하여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평상시에 기른 유학자가 비상시에 소용되지 않고, 비상시에 소용되는 무사를 평상시에는 기르지도 않는다고 한비는 생각하였다.
[주-D013] 큰 나무 …… 지키고 :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를 도와 후한을 일으킨 장군 풍이(馮異)는 별명이 대수장군(大樹將軍)이었다. 그는 사람됨이 겸손하여 자기 공을 자랑하지 않았다. 여러 장군들이 둘러앉아 전공을 논할 때에도 그는 항상 홀로 큰 나무 아래에 가서 서성거렸다. 유수가 사졸들을 분정하려 하면 모두가 대수장군의 부대로 들어가려 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卷17 馮異列傳》
[주-D014] 양을 …… 만족하였다 :
도양열(屠羊說)은 초나라 소왕(昭王) 때에 시정에서 양을 잡아 파는 도살업자였다. 소왕이 나라를 잃고 도망갈 때에 도양열도 달아나 왕을 모셨다. 소왕이 다시 돌아와서 그에게 상을 주려고 하니 그는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대왕께서 나라를 잃었을 때 신도 도살장을 잃었습니다. 대왕께서 나라로 돌아오시니 신도 도살장을 되찾았습니다. 대왕께서 신을 상 주실 일도 없고, 신도 대왕의 상을 받을 일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莊子 讓王》 여기서는 허공이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지 않았음을 비유한 이야기이다.
[주-D015] 재상 :
원문의 ‘경월(卿月)’은 재상의 지위와 임무를 나타내는 말이다. 경사(卿士)가 1년 중의 월(月)을 살피도록 되어 있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書經 洪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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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집 제9권 / 서(序)
동명 황공의 문집에 대한 서문〔東溟黃公文集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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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鄭)나라 때 “대수(大隧)에서 그 즐거움이 펴지도다.”라고 노래한 것은 영(穎) 땅에 봉해진 사람의 효심 덕분이었다. 진(晉)나라에서 금용성(金墉城)에 유폐하는 일이 일어났을 때 공경(公卿) 중에는 아무도 간쟁하는 자가 없었는데, 장화(張華) 한 사람만이 올바른 의론을 조금 간직하고 있었으나 그 또한 끝내 의견을 바꾸었다. 이에 대하여 사신(史臣)이 “삼강(三綱)의 윤리가 끊어졌으니 이적(夷狄)이 되는 재앙이 없기를 바란다 하여 가능한 일이겠는가.”라고 논평하였다.
아아,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서궁(西宮)의 변고는 바로 대수나 금용성의 일과 같다. 공경과 백집사(百執事) 가운데 간쟁한 이들을 갑자기 헤아릴 수 있겠는가마는, 당시에 동명 황공이 대간(臺諫)으로서 대비(大妃)께 효성을 다하기를 임금께 주청하였다가 이 일로 인하여 파면되었으니, 그 마음이 영(穎) 땅에 봉해진 사람의 효심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삼강의 윤리가 위에서는 끊어졌을지라도 아래에서 이를 부지하였으니 마땅히 그러한 재앙이 없었어야 하는데, 그 재앙이 혼암(昏暗)한 군주에서 시작되었지만 끝내 명철한 군주의 시대에까지도 화를 입은 것은 또 어째서인가.
더구나 당초에 공이 승정원에 있을 때 밖으로는 적국에 기미책(羈縻策)을 쓰고 안으로는 전쟁에 대비할 것을 주청하였는데, 만일 이 말이 시행되어 적국을 기미하는 가운데 전쟁에 대비하는 방도가 함께 행해졌더라면 어찌 훗날 중국보다 앞서 피해를 당할 이치가 있었겠는가. 피해를 당해서는 또 구차스러운 임시방편의 미봉책을 썼으니, 그 계책이 도리어 어떠했던가. 미봉책을 쓰자고 한 저 사람들은 편안하고 부유해지고 높아지고 영화로워졌으나 황공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배척당했으니, 대성인(大聖人)께서 관대하게 포용해 주신 도량이 아니었다면 거의 〈회사부(懷沙賦)〉를 불렀던 유배객 신세가 됨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사군자(士君子)가 국가의 성쇠 사이에서 처세하는 것이 이렇게나 어렵단 말인가.
아아, 박학통달(博學通達)한 학문이나 나라를 개창하고 세상을 구제할 만한 재주, 끊임없이 펼쳐진 바다 같은 문장은 대해(大海)와 해월(海月)의 집안에서 동명 선생 한 분에 이르러 넉넉히 갖추어졌으니 실로 하늘이 호씨(胡氏)와 여씨(呂氏)의 세업(世業)을 도운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공의 유문(遺文)과 고사(故事)가 수백 년 동안 재앙을 겪으며 절반 이상 산일되어, 장차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성문벽지과(聲聞辟支果)와 뒤섞이게 됨을 면치 못할까 하는 것이다. 8대손 황수(黃洙)가 이를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선인(先人)의 유지를 받들어 흩어지고 없어진 것들을 거두어 모아서 모두 다섯 책으로 만들어 인쇄에 부쳤다. 그 체제를 살펴보니 비록 완전히 갖추어지지는 않았지만 유문과 편독(片牘)들 사이에서 은은한 채색 구름의 빛이 흘러나와 다시 하늘을 환히 비추며 도는 듯하였다.
문집 전체에서 중요한 것을 들면, 두 선정(先正)을 변무(辨誣)하기 위하여 쓴 소는 정사(正邪)를 구분하는 내용이니 대간으로 있을 적에 지은 소장과 함께 참고하여 보도록 하고, 〈은사일록(銀槎日錄)〉은 《춘추(春秋)》 대일통(大一統)의 의리를 밝힌 것이니 승정원에 있으면서 올린 계(啓)와 함께 참고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상수(湘水)에서 지은 것들은 모두 성화(聖化)의 재조(再造)에 감격하여 지은 것인데, 때때로 식규(息嬀)의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것도 있다. 이 문집이 한번 나오면 공의 마음과 자취가 청천백일 아래 환히 드러날 뿐만 아니라, 모든 흥망성쇠가 일어나는 까닭에 대해서도 귀감이 될 수 있으리라.
[주-D001] 동명(東溟) 황공(黃公) :
황중윤(黃中允, 1577~1648)으로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도광(道光)이며 호가 동명이다. 사헌부 지평을 거쳐 1620년(광해군12)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가서 자문(咨文)을 올렸으며, 1621년 후금(後金)이 선천(宣川)에 침입하였을 때, 겉으로 유화책(宥和策)을 쓰면서도 안으로 수비를 튼튼히 할 것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조반정 후 탄핵을 받아 변방에 위리안치되었다가 1633년(인조11) 유배에서 풀려났다. 《동명선생문집(東溟先生文集)》이 전한다.
[주-D002] 정(鄭)나라 …… 덕분이었다 :
정나라 장공(莊公)이 아우 공숙단(共叔段)의 반란을 평정한 뒤에 공모한 어머니 무강(武姜)을 성영(城穎)에 유폐하고는 “황천(黃泉)에 가기 전에는 서로 만나지 않겠다.”라고 맹세하였으나 이내 후회하였다. 영곡(穎谷)에 봉해진 영고숙(穎考叔)이 장공과 음식을 먹다가 어머니께 드리겠다며 고기를 따로 모으니, 장공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자신의 심경을 하소연하였다. 이에 영고숙이 “물이 나는 곳[黃泉]까지 땅을 파고 들어가 굴속에서 만나면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자 그 말대로 하였다. 어머니를 만난 장공은 “대수 안에서 그 즐거움이 화락하도다.[大隧之中 其樂也融融]”라고 노래하고, 어머니 강씨는 “대수 밖에서 그 즐거움이 펴지도다.[大隧之外 其樂也洩洩]”라고 노래하니, 마침내 모자 사이가 처음처럼 되었다. 《春秋左氏傳 隱公1年》 대수(大隧)는 관(棺)을 묻기 위하여 경사지게 묘혈(墓穴)로 낸 길을 말한다.
[주-D003] 진(晉)나라에서 …… 바꾸었다 :
금용성(金墉城)은 위(魏)나라 명제(明帝) 때 만든 성으로, 제왕들이 유폐된 장소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讀史方輿紀要 河南府 洛陽縣》 진 혜제(晉惠帝) 때 가후(賈后)가 민회태자(愍懷太子)를 폐출하려 하였는데 장화(張華)가 회의 석상에서 반대 의사를 개진하였다. 그 후 가후가 폐출되고 장화도 결국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晉書 卷36 張華列傳》
[주-D004] 서궁(西宮)의 변고 :
광해조에 일어난 폐모론(廢母論)을 가리킨다. 선조(宣祖)의 계비(繼妃) 인목대비(仁穆大妃)는 영돈녕부사 김제남(金悌南)의 딸이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어머니이다.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광해군을 왕세자의 지위에서 폐하려 했던 소북(小北)의 유영경(柳永慶) 일파가 몰락하고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이 득세하였다. 1613년(광해군5) 대북파의 모략으로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김제남 등과 함께 죽고, 끝내 폐모론이 일어나 인목대비는 1618년에 서궁 즉 경운궁(慶運宮)에 유폐되었다.
[주-D005] 대비(大妃)께 …… 파면되었으니 :
황중윤은 1616년(광해군8) 대비에게 효도를 다할 것을 청하는 〈청진효대비소(請盡孝大妃疏)〉를 올리면서 “전하께서 매일같이 《효경》을 읽고 우러러 순 임금의 효성을 본받으신다면 어찌 종사(宗社)와 만백성들의 끝없는 복이 아니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가 파직되었다. 《東溟先生文集 卷5 請盡孝大妃疏》
[주-D006] 그 …… 어째서인가 :
황중윤이 대비에게 효도할 것을 광해군에게 아뢰었는데도 불구하고, 인조 즉위 후 사간원에서는 “황중윤이 이이첨의 심복이 되어 폐모론에 대해 소매를 걷어붙이고 그 일을 맡았습니다.”라고 탄핵하여 그를 유배 보냈다. 《承政院日記 仁祖 1年 4月 13日》 혼암(昏暗)한 군주는 광해군을, 명철한 군주는 인조를 가리킨다.
[주-D007] 밖으로는 …… 주청하였는데 :
기미책(羈縻策)은 굴레와 고삐를 가지고 힘센 소나 말을 제어하듯 나보다 강한 적을 명분, 실리 등 다양한 요소로 제어하여 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다. 1621년(광해군13) 후금(後金)이 선천(宣川)을 침범하였을 때 황중윤이 “안으로는 전쟁에 대비하고 밖으로는 기미하는 정책을 써서 우선 눈앞의 위급함을 늦춘다면 또한 안 될 것도 없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東溟先生文集 卷5 政院啓辭》 그러나 이 때문에 훗날 황중윤은 “중국과 관계를 끊고 오랑캐와 통호(通好)하자는 주장까지 하였다.”라는 비난을 받고 유배를 당하였다. 《仁祖實錄 1年 4月 13日》
[주-D008] 피해를 …… 어떠했던가 :
후금은 1627년(인조5) 조선을 1차 침입하여 형제의 맹약을 맺게 하였는데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이후 형제의 맹약을 ‘군신의 의(義)’로 개약(改約)하자고 강요하는 한편 무리한 세폐(歲幣)와 병력을 요구하다가 끝내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주-D009] 대성인(大聖人)께서 …… 것이다 :
대성인은 인조를 가리킨다. 〈회사부(懷沙賦)〉는 초(楚)나라 충신 굴원(屈原)이 소인의 참소에 의해 쫓겨난 뒤, 한을 품고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죽을 때 지은 것으로 《초사(楚辭)》에 수록되어 있다.
[주-D010] 대해(大海) :
황응청(黃應淸, 1524~1605)으로 황중윤의 조부 황응징(黃應澄)과 형제간이다.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청지(淸之)이며 호가 대해이다. 진보 현감(眞寶縣監)을 지냈으며, 월천(月川) 조목(趙穆),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황중윤의 장인인 대암(大庵) 박성(朴惺)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 《대해집(大海集)》이 있다. 평해의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주-D011] 해월(海月) :
황여일(黃汝一, 1556~1622)로 황중윤의 부친이다. 자는 회원(會元), 호는 해월헌(海月軒)ㆍ매월헌(梅月軒)이다. 예천 군수, 길주 목사 등을 지냈다. 평해의 명계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조천록(朝天錄)》, 《해월집》 등이 있다.
[주-D012] 호(胡)씨와 …… 것이다 :
호씨는 호인(胡寅, 1098~1157)으로 역사에 관심이 많아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읽고 주요 역사 사건마다 자신의 견해를 기록한 《독사관견(讀史管見)》 30권을 엮었다. 여씨는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 1137~1181)으로 주희(朱熹), 장식(張栻)과 친하여 세상 사람들이 이들을 ‘동남삼현(東南三賢)’이라 불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치란 득실(治亂得失)을 논술한 주해서 《동래좌씨박의(東萊左氏博議)》 등을 지었다. 황중윤의 문장이 이 두 사람에 비견될 수 있다는 말이다.
[주-D013] 정법안장(正法眼藏) :
학문의 핵심이자 정수라는 의미이다. 원래 불가의 말로 석가가 깨달은 최고의 묘리를 가리킨다. 우주를 밝게 비추는 것을 안(眼), 모든 덕을 포함하는 것을 장(藏)이라 하며, 정법(正法)은 이 안과 장을 구비하는 것이다.
[주-D014] 성문벽지과(聲聞辟支果) :
성문이나 벽지는 대승(大乘) 측에서 소승(小乘)의 수행 경지를 폄하하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으로, 석가의 가르침을 듣고 깨우치는 자와 부처의 가르침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깨우치는 자를 각각 가리킨다. 과(果)는 불과(佛果)로 불도를 닦아 이르는 부처의 지위이다.
[주-D015] 두 …… 소 :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비방하는 소를 올려 두 학자의 문묘 종사를 저지하려 하였는데, 황중윤이 1611년(광해군3) 유생의 신분으로 소수(疏首)가 되어 상소문을 작성, 이를 논변하였다. 상소 내용 중에 “정론이 막히고 사설(邪說)이 횡행하니 금수나 이적의 세상이 되어 인류가 망한다면 전하의 나라 또한 위태롭지 않겠습니까.”라는 등의 말이 나온다. 이후로 황중윤은 상소를 두 번 더 올렸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東溟先生文集 卷5 申辨晦齋退溪兩先生被誣再疏, 三疏, 四疏》
[주-D016] 은사일록(銀槎日錄) :
1598년(선조31)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무고하였다. 이것을 변무(辨誣)하기 위해 황중윤의 부친 황여일(黃汝一)이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와서 쓴 기록이 〈은사일록〉으로 황여일의 문집인 《해월집(海月集)》에 수록되어 있다. 황중윤의 문집에는 〈서정일록(西征日錄)〉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1620년(광해군12) 금군(金軍)을 정벌한 조명군(助明軍)의 주문사(奏聞使)로 1620년 3월 26일부터 8월 17일까지 요동(遼東)에 다녀온 일기이다. 《東溟先生文集 卷6 西征日錄》 여기서는 향산이 〈서정일록〉을 〈은사일록〉으로 통칭한 것인지, 실제 〈은사일록〉을 가리켜 말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주-D017] 대일통(大一統)의 의리 :
천하의 모든 나라가 중국 황제에게 복속되어 그 문물과 제도를 따르는 것을 말한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은공(隱公) 원년 기사의 “왜 ‘왕 정월’이라고 하였는가? 대일통을 표시하기 위해서이다.[何言乎王正月 大一統也]”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주-D018] 승정원에 …… 계(啓) :
《동명선생문집》에 수록된 황중윤의 계는 1621년(광해군13) 후금이 선천을 침범하였을 때 승지로서 올린 계 한 편뿐이다. 당시 후금(後金)이 선천(宣川)을 침범하였을 때 황중윤이 “안으로는 전쟁에 대비하고 밖으로는 기미하는 정책을 써서 우선 눈앞의 위급함을 늦춘다면 또한 안 될 것도 없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東溟先生文集 卷5 政院啓辭》 그러나 이 때문에 훗날 황중윤은 “중국과 관계를 끊고 오랑캐와 통호(通好)하자는 주장까지 하였다.”라는 비난을 받고 유배를 당하였다. 《仁祖實錄 1年 4月 13日》
[주-D019] 상수(湘水)에서 지은 것 :
상수는 초나라의 충신 굴원이 간신들의 참소로 조정에서 추방되었다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빠져 죽은 곳으로, 후세에는 유배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황중윤이 유배지에서 지은 시들을 가리킨다.
[주-D020] 성화(聖化)의 재조(再造) :
인조반정을 통해 인조가 즉위하여 광해군의 혼란한 정치를 종식하고 새 세상을 열면서 황중윤을 사면하여 다시 살 수 있도록 해 준 것을 가리킨다.
[주-D021] 식규(息嬀) :
춘추 시대 진(陳)나라 여자로 식후(息侯)의 부인이었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초 문왕(楚文王)이 식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식규를 데리고 돌아가자 할 수 없이 문왕의 부인이 되어 도오(堵敖)와 성왕(成王)을 낳았으나 끝내 문왕과 말하지 않고 살았다. 문왕이 그 이유를 묻자 “나는 한 여자로 두 남편을 섬겼으니, 비록 죽지는 못할망정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春秋左氏傳 莊公14年》
[주-D022] 때때로 …… 있다 :
《동명선생문집》에 수록된 서문에는 이 뒤에 “만일 이것을 모두 삭제하고자 한다면 이 또한 사사로운 뜻이 들어간 것이다.[如欲盡刪之 則亦私意也]”라는 말이 이어진다. 황중윤이 식규처럼 두 임금을 섬긴 혐의가 없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그런 시들을 삭제하고 문집을 만드는 것은 올바르고 공정한 태도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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