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폐하를 탈탈(脫脫)의 군중에서 뵈었습니다.”

2022. 9. 20. 11:50이성계의 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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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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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양(金時讓) 찬

 

우리나라의 동해에는 조수(潮水)가 없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선유(先儒)들 중에 이것을 논한 이가 없다………

 

임진왜란에 대가(大駕)가 서도로 떠나게 되니, 조정의 신하들은 세자(世子)를 세워 인심이 의지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선조가 그 의견에 따라 드디어 둘째 아들 광해군 이혼(李琿)을 세자를 삼았다.

맏아들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은 광패(狂悖)하여서 인심이 그를 따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그를 제쳐두고 이혼을 세웠으니, 인심을 따른 것이다.

계사년에 환도(還都)한 뒤에 여러 번 사신을 보내 중국 조정에 이혼을 세자로 책봉하기를 주청(奏請)하였다. 그러나 만력 황제(萬曆皇帝  신종 明神宗) 둘째 아들인 복왕 상순(濮王商洵) 사랑하여 진정한 마음은 태창제(泰昌帝)에게 있지 않았으므로 예부(禮部)에서는 번번이 형제의 차례를 뛰어넘었다고 예(禮)에 의거하여 들어주지 않았으니, 이는 태창제의 처지를 위함이었다.

신축년 겨울에 예조에서 다시 사신을 보내어 세자 책봉을 주청하고자 하니, 선조는,

“왕후(王后)의 자리가 오래 비어 있는데, 왕비의 책봉은 주청하지 않고 이것을 먼저 주청하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이때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승하(昇遐)한 지 이미 1년이 지났기 때문이었지만, 조정에서는 비로소 상의 뜻이 광해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병오년 봄에 영창대군(永昌大君) 이의(李㼁)가 출생하였는데, 계비(繼妃) 김씨의 소생이었다. 영상 유영경(柳永慶)이 세종 때의 광평대군(廣平大君)과 임영대군(臨瀛大君)의 전례를 인용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陳賀)하니, 항간에서는 영경이 상의 뜻에 영합하여 자기의 지위를 굳게 만들 계책을 한다고 비난하였다.

정미년 겨울에 상의 병환이 위급하자,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여 모두 임해군이 불측한 뜻이 있다고 의심하므로, 병조 판서 박승종(朴承宗)이 주청하여 도감군(都監軍)으로 행궁(行宮)을 호위하게 하였다. 상이 밀갑(密匣 밀부(密符)를 넣어 두는 상자)을 내려 대신들을 불렀는데, 그때 시임(時任)ㆍ원임(原任) 대신 등이 상의 병환이 위급한 까닭으로 대궐 안에 들어와 있었다. 영경이 여러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밀부(密符 비밀 명령)를 내린 것은 시임 대신만 부른 것이오.”

하니, 여러 대신들이 다 일어나 나갔다. 상이 동궁(東宮)에게 전위(傳位)하고 싶다고 하교하니, 영경이 좌상 허욱(許頊), 우상 한응인(韓應寅)과 함께 회계(回啓)하였는데,

“지금 이 전교는 뭇 사람들의 생각 밖에서 나왔습니다.”

하는 등의 말이 있었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영경이 두 마음이 있다고 말하여, 원근에 그 말이 전파되었다.

……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대략 이런 이야기가 있다.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우고, 재신(宰臣) 조증광과반(趙胖)이 중원(中原)에서 생장하였다고 하여 주문사(奏聞使)를 삼아 보냈다. 조반이 한인(漢人)의 말을 쓰니, 황제가 말하기를,

“네가 어떻게 중국말을 아느냐?”

고 하였다, 조반이 말하기를,

“신은 중원에서 생장하였으며, 일찍이 폐하를 탈탈(脫脫)의 군중에서 뵈었습니다.”

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경은 실로 짐의 벗이로다.”

하고, 이어 빈객을 대하는 예절로 대우하고, ‘조선(朝鮮)’ 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보냈다는 것이다.

하곡(荷谷) 허봉(許篈)이 그 사실을 《해동야언(海東野言)》 우리 태조기(太祖紀)에 썼다는데, 대명 태조(大明太祖)가 탈탈의 군중에 있지도 않았으며, 조반이 명 나라 태조를 볼 수도 없었음을 내가 이미 《자해필담(紫海筆談)》에 썼다,

홍무(洪武) 경오년(1390)에 고려 공양왕(恭讓王)이 조반을 보내어 중국에 가서 윤이(尹彛)ㆍ이초(李初)와 예부에서 변쟁(辨爭)하여 밝히고 돌아와서 청주(淸州) 옥사가 있었다.

우리 태조가 임신년 7월에 개국하고 밀직사사(密直司事) 한상질(韓尙質)을 중국 서울에 보내어 주문하기를,

“배신(陪臣제후의 신하가 천자에게 대하여 자기를 일컫는 말) 조임(趙琳)이 예부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왔길래 성지(聖旨)를 공경히 받드니, ‘국호(國號)를 무엇으로 고쳤느냐? 급히 달려와 아뢰라.’ 하옵기에, 조선(朝鮮)ㆍ화령(和寧) 등의 국호를 써서 성지를 받드니, ‘동이(東夷)의 호는 조선이란 칭호가 아름답고 또 그 유래도 오래이니, 그 이름에 근본하여 본받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였으니, 조반을 보내 주문한 일은 없는데, 용재(慵齋)는 어디에서 듣고 이처럼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을 지어서 국가의 전고(典故)를 삼았는가. 그리고 하곡이 또한 이것을 취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두 공(公)은 모두 문장이 박아(博雅)하다고 일컫는데 이런 실수가 있었으니, 이는 우리 나라 풍속이 비록 널리 여러 가지 서적을 보는 이라도 본국의 문자는 즐겨 보지 않기 때문에 본국의 사례에 대해서는 대부분 어둡기가 이와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