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9. 16:15ㆍ이성계의 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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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증(范增 초한(楚漢) 때 항우(項羽)의 모사(謀士))의 선조는 마니산(摩尼山)에서 났고, 손권(孫權 삼국시대 오(吳)의 왕)의 선조는 묘향산(妙香山)에서 났고, 고환(高歡 북제(北齊) 헌무제(獻武帝))의 선조는 청천(菁川)에서 났으며, 동두란(佟豆蘭)은 악비(岳飛 남 송(南宋) 때 무장)의 7세손이다.” 한 대목이 있으므로, 내가 덧붙이기를, “규염객(虯髥客)은 개소문(蓋蘇文 고구려의 연개소문)이었고 창해역사(滄海力士)는 검천(黔川) 사람이며, 한(汗 청 태종(淸太宗))의 어머니는 청회 간씨(淸淮簡氏)였고, 명 태조(明太祖)의 선조는 삼척(三陟)에서 났다.” 하였다. |
청장관전서 제62권 / 서해여언(西海旅言)
초8일(임술) 새벽에 출발하여 오목천(梧木川)에서 아침밥을 먹고 광탄(廣灘)을 건너 애정(艾井)에서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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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천(梧木川) 점인(店人)에게 길을 물었더니, 점인이,
“오늘 밤 애정촌(艾井村)에서 자면 내일은 조니포진(助泥浦鎭)까지 댈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애정이 무슨 군인가?”
하고 물었으나, 촌 사람이 알 리 없었다. 기다리던 객이,
“애정은 장연군(長淵郡)이고 장연은 불법을 숭상하는 곳이어서 풍속이 손님 접대를 잘합니다.”
하기에, 내가 웃으면서,
“만약 불법을 숭상해서 손님 접대를 잘한다면 지난번 전지방(篿池坊) 백성들은 왜 둔전 별장(屯田別將)을 생매장하였답니까?”
하였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전지방은 풍속이 사나워 장연 사람들이 매우 부끄러워합니다. 절대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군마령(郡馬嶺)을 넘는데 구불구불한 길에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낭떠러지마다 호랑이가 뛰어나올 듯하고 모퉁이마다 도적들이 있을 만하였다. 재 아래는 상군마리(上郡馬里)로 띄엄띄엄 집들이 별처럼 보였고 땔나무가 수북하였으며, 남자나 여자가 소박한 편인데 얼굴은 원숭이 같았다. 보리밭에다 거름을 푸는데 군데군데 돌무더기가 있었다. 약 20리 길을 갈지자 걸음으로 걸어서 중군마(中郡馬)ㆍ하군마(下郡馬)를 거쳤는데, 둥글고 높다란 토산(土山)이 가끔 가다 중간이 벌어져서 자갈무더기를 이루고 있는 것이 마치 자루가 터져서 콩알이 쏟아진 듯 고기 배가 터져서 알들이 튀어나온 듯하였다. 서쪽으로 협구(峽口)를 나가니 돌들이 다 귀피(鬼皮)나 마아(馬牙)처럼 울퉁불퉁한 것이 겁날 만하고, 길은 겨우 말 한 마리가 통과할 만한데 아래는 긴 냇물이 넘실넘실 산협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광탄 남쪽에 주막이 있는데 거기서 자려니 아직 20리를 갈 만한 해가 남았는데다, 또 새벽에 물을 건너자면 마부의 다리가 시릴 것이며 물이 차가워 뼈라도 다친다면 우리 말도 불쌍하니 차라리 애정 마을까지 가서 자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마부도 그것이 좋겠다 하여 즉시 옷 뒷자락을 걷고 버선을 벗은 다음 말을 뒤에서 모니, 말은 귀를 간들거리고 코를 흔들며 뚜벅뚜벅 계단을 건너듯이 걸어갔고, 나는 팔뚝에다 말고삐를 감고 옷 뒷자락은 앞으로 거머잡고 안장을 꼭 잡은 채 도사리고 앉아서 등자[鐙]에다 발을 딛지 못했다.
광탄 이북은 장연 땅인데 낭떠러지 사이로 시냇물이 들어가고 밭이 길고 마을은 평평하여 낚시질하거나 유람할 만하였다. 저녁 날씨가 싸늘한데 띄엄띄엄 연기가 자욱한 것이 뚜렷한 한 폭의 그림이었다.
한평생 와보지 못한 곳 / 平生不到處
해질 무렵 홀로 걷네 / 落日獨行時
했던 당 나라 시인은 지금의 나를 위하여 미리 이 시를 지어놓은 듯하였다.
마부가,
“애정이 어디 있습니까? 날은 춥고 해는 저문데 어디 가서 잘 것입니까?”
하였다. 홀로 가던 선비가 마부를 불러 가르쳐 주기를,
“너는 내가 가리키는 곳을 보아라. 저 서쪽에 느릅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푸른 연기가 자욱한 아래에 집이 있지. 정씨(鄭氏)가 살고 있는데 손님 접대를 잘하는 집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그곳으로 가 말에서 내렸더니 논두렁에는 콩깍지가 쌓여 있고 두 아이가 비질을 하는데, 한 선비가 창가에 붙어 있다가 멀쑥한 전관(氈冠 털실로 짠 갓) 차림으로 마루에 올라와 장읍(長揖)을 하였고 두 아들들은 곁에 서 있었다. 등불을 밝히고 인사를 나눈 후 여종에게 빨리 밥을 지으라 하고 말에게는 꼴과 콩을 주었으며, 마부도 따뜻한 방으로 안내하는 등 분에 넘치는 환대였다. 내가 돈으로 보답하려고 세 번이나 청하였으나 세 번 다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전지의 완악한 백성들이 별장(別將)을 생매장하여, 국인(國人)들이 ‘장연을 모조리 매몰시켜야 한다.’ 하니, 이는 농서(隴西)의 수치와 같습니다. 내 비록 불민(不敏)하지만 차마 어떻게 돈을 받겠습니까?”
하였다.
주인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호)의 후예였다. 내가 우스갯소리로,
“나는 후릉(厚陵 정종(定宗)의 능호)의 후예지만 지나간 일은 뜬구름 같은 것이니 말할 게 뭐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주인도 웃으면서 말하기를,
“포은의 아들도 국조(國朝)에 벼슬하여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지냈는데, 공(公)과 나야 무엇을 혐의롭게 여기고 무엇을 의심할 것입니까. 고려가 망할 때 포은이 임금에게 고하기 위하여 선죽교에 도착하자, 조영규(趙英珪)가 말을 달려 동으로 오고 전추(前騶)가 갈도(喝道 소리를 질러 통행을 제한하는 것)하니 포은은 일이 잘못되어 가는 것을 알고 갈도를 그치게 하였습니다. 영규가 내리쳐서 왼쪽 귀를 떨어뜨리고 3일간 목을 효수했는데, 녹사(錄事)도 함께 죽었으나, 역사에는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하면서, 말을 마치고는 추연(愀然)히 눈물이 흐를 듯하였다. 또,
“장단(長湍)에다 장례를 모시려 하였는데 널이 움직이지 않아 지전(紙錢)을 불태우며 빌었더니, 그 재가 남으로 날아가 용인(龍仁) 고을 어느 언덕에 떨어졌습니다. 그 언덕에다 장례를 모실 것을 고했더니 그제야 널이 움직였다 합니다. 임진왜란 때 포은의 후예 - 원문 빠짐 - 가 그 화상(畫像)을 안고 연일(延日)로 피난하여 바위 틈에다 모셔 두고는 전 식구가 칼을 맞아 죽었는데, 그 후 한 선비의 꿈에 포은이 나타나 그 바위 틈을 가리켰으므로 꿈을 깨서 찾아갔더니 과연 화상이 있어, 그 길로 서원(書院)을 세워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내가 성년(成年)이 된 뒤로는 하루도 서책을 안 보는 날이 없었고, 서책이 혹 이어지지 못할 때는 비록 역일(曆日)이나 장부(帳簿)라도 뒤적여보고야 말았는데, 집을 떠난 지 닷새가 되도록 글자 한 자도 보지 못했으므로 마음이 편하지 못하였다. 주인의 책상 위에 전 장연 부사(長淵府使) 신경준(申景濬)이 쓴 《동문고(同文考)》가 있기에 반가워 집어들고 등불 곁으로 가 한눈에 다 보았다. 그 속에,
“범증(范增 초한(楚漢) 때 항우(項羽)의 모사(謀士))의 선조는 마니산(摩尼山)에서 났고, 손권(孫權 삼국시대 오(吳)의 왕)의 선조는 묘향산(妙香山)에서 났고, 고환(高歡 북제(北齊) 헌무제(獻武帝))의 선조는 청천(菁川)에서 났으며, 동두란(佟豆蘭)은 악비(岳飛 남 송(南宋) 때 무장)의 7세손이다.”
한 대목이 있으므로, 내가 덧붙이기를,
“규염객(虯髥客)은 개소문(蓋蘇文 고구려의 연개소문)이었고 창해역사(滄海力士)는 검천(黔川) 사람이며, 한(汗 청 태종(淸太宗))의 어머니는 청회 간씨(淸淮簡氏)였고, 명 태조(明太祖)의 선조는 삼척(三陟)에서 났다.”
하였다.
隴西
本文
隴山之西也。今稱甘肅爲隴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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