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8. 12:27ㆍ이성계의 명조선
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16년 무인 > 3월 9일 > 최종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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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군 가운데 적을 이기는 데 뜻을 세워 황제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흙을 지고 사졸(士卒)을 앞에서 몸소 이끌었던 경우도 있었고, 백성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에 뜻을 세워 백금(百金)을 아껴 노대(露臺)를 쌓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우리 고황제(高皇帝)께서는 온갖 정무(政務)에 힘쓰시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에 뜻을 세우셨으니, 진실로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작은 종이에 적어 - 원문 빠짐 - 누더기 같았습니다. 만약 시행하지 않았으면 끝내 풀어 놓지 않았으며, 전각(殿閣)의 사이에 그림을 그리지 않아 - 원문 빠짐 - 《대학연의(大學衍義)》와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조회(朝會)를 파한 여가에 손에 받들고 읽어 한 가지 정책과 한 가지 법령이라도 체득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홍무(洪武) 연간이 상란(喪亂)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음에도 백성들이 안주하였고 물산(物産)이 풍부하였으며 천하는 안락하였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 영조실록 > 영조 44년 무자 > 5월 10일 > 최종정보
영조 44년 무자(1768) 5월 10일(정유)
44-05-10[02] 《대학연의》를 강한하고 입시한 유신들에게 아마를 하사하다
여러 유신을 명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가지고 입시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고황제(高皇帝)가 《대학연의》를 전랑(殿廊)에서 썼었는데, 내가 이날을 만났으니, 《대학(大學)》을 강론하여야겠다.”
하고, 이어 친히 경 일장(經一章)을 외었다. 하교하기를,
“지금 《대학연의》를 강하면서 직접 본문을 외운 것은 옛날을 뒤따라 추모하는 뜻이다. 입시한 다섯 유신에게 모두 아마(兒馬) 한 필씩을 특별히 하사하라.”
하였다.
【원전】 44 집 286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사급(賜給)
총서
태조가 무인이면서도 문인과 경사를 토론하고 《대학연의》를 즐겨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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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본디부터 유술(儒術)을 존중하여, 비록 군중(軍中)에 있더라도 매양 창[戈]을 던지고 휴식할 동안에는 유사(儒士) 유경(劉敬) 등을 인접(引接)하여 경사(經史)를 토론(討論)하였으며, 더욱이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 보기를 좋아하여 혹은 밤중에 이르도록 자지 않았으며, 개연(慨然)히 세상의 도의(道義)를 만회(挽回)할 뜻을 가졌었다.
【원전】 1 집 11 면
【분류】 인물(人物) / 역사(歷史) / 왕실(王室) / 사상(思想) / 출판-서책(書冊)
[주-D001] 진덕수(眞德秀) :
송(宋)나라의 유학자. 주자 학파(朱子學派)의 학자로서 서산선생(西山先生)이라 일컬었으며
고전번역서 > 동사강목 > 동사강목 제15상 > 최종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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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千興)을 좌시중(左侍中)으로, 우리 태조를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삼았다.
우리 태조가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자 이로부터 왕의 의지가 더욱 무거워져 밀직부사로 임명하고 단성양절익대공신(端誠亮節翊戴功臣)의 호를 내렸다. 태조는 장수 구실을 함에 있어 호령이 명확하고 신뢰할 수 있으며 마음씀이 활달하고 너그러웠다. 전쟁이 없는 여가에는 이름난 유학자들과 함께 경사(經史)를 토론하되 특히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즐겨 보고 개연히 세도(世道)를 만회할 뜻을 두었다. 용기와 지략이 일세를 덮었으며 영특함과 예기가 뛰어나 일시 물망이 모두 우리 태조에게 쏠렸다.
고전번역서 > 양촌집 > 양촌선생문집 제33권 > 책제류 > 최종정보
양촌선생문집 제33권 / 책제류(策題類)
전시(殿試) 책문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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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말하노라. 《대학(大學)》은 성현들이 만세에 물려준 법으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리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 선유(先儒) 진씨(眞氏 이름은 덕수(德秀). 송 나라의 유학자)는 이를 더욱 부연하고 보완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저술하였으니,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하는 왕이나, 학문에 뜻을 둔 선비들이라면 마땅히 이를 참고하고 연구하여야 될 줄 안다. 부덕한 내가 임금자리에 있으면서 치도(治道)를 배워 기필코 세상을 안정시키고자 하므로, 정사를 보살피는 여가에 전부터 읽어 왔다. 그 글 내용의 절차에 대하여 의심스러운 것이 많으나 그 조목을 다 들어 논하지는 못하고 우선 큰 것만을 들어 말하노라.
《대학》의 팔조목(八條目)은 격물(格物)과 치지(致知)가 시(始)가 되고,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가 종(終)이 되는데, 이는 ‘혼란될 수 없는 순서이고 빠뜨릴 수 없는 공부’ 라는 것이다. 그러한데 진씨의 글에서는 격물의 위에 제왕의 정치 순서를 앞세웠으며, 그 다음으로 제왕의 학문 근본을 놓은 뒤에야 격물과 치지의 요법을 말하였고, 다시 그 다음에 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ㆍ제가(齊家)의 요령을 열거하면서 치국과 평천하의 요령에 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으니 이는 무슨 이유에서인가.
그러나 소위 치국과 평천하란 곧 제왕의 정치하는 일인데, 정치하는 방도는 꼭 학문으로부터 출발하게 되므로, 《대학》에서는 먼저 격물과 치지의 학을 말하여, 치국과 평천하하는 일에까지 미친 것이다. 그런데 진씨의 글에서는 정치하는 차서를 학문하는 근본보다 앞세웠으니 이 또한 무슨 이유에서인가. 학문하는 방법과 정치하는 요점에 대하여 자대부(子大夫)들은 강구한 지 오래일 것이니, 만약 치국과 평천하의 요점을 말하여 진씨가 갖추지 못한 것을 보충한다면 그 말할 점은 어디에 있겠는가. 내가 왕위에 오른 이래 밤낮으로 조심하고 정성을 다하여 국사를 도모하며 오늘에 이르렀으나, 3년 동안에 수해와 한발이 계속되고 재변이 누차 일어났다. 이것은 내가 비록 《대학연의》를 읽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바가 미치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인가. 아니면 정치와 법령이 현실에 맞지 않은 바가 있어서 이러한 것인가. 자대부들은 이를 남김없이 말하여 나의 훌륭한 정치를 원하는 마음에 부응케 할지어다.
[주-D001] 《대학》의 팔조목(八條目) :
즉 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를 가리킨다.
조선왕조실록 > 태종실록 > 태종 1년 신사 > 윤 3월 23일 > 최종정보
태종 1년 신사(1401) 윤 3월 23일(임자)
01-윤03-23[01] 경연에서 불교 폐지론 등에 관해서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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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經筵)에 나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講)하다가, 배연령(裵延齡)이 탁지(度支)가 되었을 때의 일에 이르러서,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사복시(司僕寺)에 신참(新參)의 말값[馬價]을 바치는 법이 있다는데, 있는가?”
하니, 시독관(侍讀官) 등이 대답하기를,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에 이 법을 세운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예전에 참외관(參外官)은 말을 타지 못하고, 배참(拜參)하여 말을 준 연후에야 탈 수 있었기 때문에, 그 값을 바치는 것입니다. 지금은 말을 주[賜馬]는 법은 없어지고 값을 바치[納價]는 법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말을 주고 그 값을 바치게 하는 것도 틀린 일인데, 하물며, 말을 주지 않고 값을 바치게 하는 것이겠는가? 의정부(議政府)에 내리어 없애도록 하라.”
하였다. 《대학(大學)》의 생재(生財) 일절(一節)을 강(講)하다가, 임금이 말하기를,
“예전의 백성은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뿐이었지?”
하니, 사관(史官) 민인생(閔麟生)이 나아가서 말하기를,
“지금은 유수(遊手)는 많고, 재물을 만들어내는 백성은 적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유수가 참 많다.”
하니, 인생이 말하기를,
“유수(遊手)는 이단(異端)과 같이 많은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헌부(憲府)에서도 또한 오교(五敎)ㆍ양종(兩宗)의 명리(名利)의 중[僧]을 파(罷)하고, 사사(寺社)ㆍ토전(土田)ㆍ장획(臧獲)은 모조리 공가(公家)에 붙이고, 오직 산문(山門)의 도승(道僧)에게 맡겨두기를 청하였는데, 나도 역시 그 불가(不可)함을 알고 꼭 파하려고 하나, 태상왕(太上王)께서 바야흐로 불사(佛事)를 좋아하시기 때문에 차마 갑자기 혁파하지를 못한다.”
하고, 또,
“예전에 불씨가 어느 시대에 처음으로 일어났으며, 부처를 좋아한 것은 어느 시대이며, 부처를 배척한 것은 어느 시대인가?”
하였다. 시독(侍讀) 김과(金科)가 역대(歷代)의 부처를 좋아하였으나 마침내 패망하고, 부처를 배척하였어도 마침내 잘 다스린 것을 명확히 아뢰기를, 《통감(通鑑)》에 실려 있는 것과 같이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헌부(憲府)의 소장(疏狀) 가운데에도 또한 이 말을 썼는데, 반드시 유관(柳觀)의 말일 것이다.”
하였다. 유창(劉敞)이 말하기를,
“불씨의 화복(禍福)의 설(說)은 허탄(虛誕)하여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강(講)이 끝나매, 강관(講官)에게 궁온(宮醞)을 내려 주었다.
【원전】 1 집 201 면
【분류】 역사-편사(編史)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 왕실-국왕(國王) / 왕실-경연(經筵) / 사상-불교(佛敎) / 교통-육운(陸運) / 출판(出版)
고전번역서 > 동문선 > 동문선 제8권 > 칠언고시 > 최종정보
동문선 제8권 / 칠언고시(七言古詩)주상(主上)의 거가(車駕)가 송헌(松軒) 이 시중(李侍中 李成桂)의 저(邸)에 임행(臨幸)하시매 조정의 여러분들이 다 시를 지어 하례하옵는데 기(幾) 자 운(韻)을 얻고서[伏覩車駕臨幸松軒李侍中第薦紳諸公咸作詩以賀得幾字][DCI]ITKC_BT_1365A_0080_010_0250_2002_001_XML DCI복사 URL복사윤소종(尹紹宗) 당말에 열린 이 나라가 명이 흥할 때에 이르러 / 唐季開國到明興 현릉께서 곰(아들을 얻을 꿈)꿈ㆍ뱀(딸을 얻을 꿈)꿈 못 꾸어 / 玄陵夢斷維熊虺 31대에 왕통이 끊어지고 / 三十一朝統中絶 신씨 2대를 만인이 분해하던 차 / 辛氏二世人憤悱 상공께서 강후와 양공의 충성을 일으키시어 / 公奮絳侯梁公忠 신손이 반정하여 임금 위에 오르시니 / 神孫反正御丹扆 하늘에 계신 열성들이 다시 제사를 받고 / 在天神聖復血食 혼돈이 거듭 열려 하늘의 해가 밝았네 / 混沌重開天日暐 어진 정치 새로 이루시니 바로 창업과 같고 / 訏謨更化同刱業 충성된 마음 광명하여 흐림이 없어라 / 赤心光明無晻霼 사전을 개혁하여 경계가 바루어지고 / 私田害革經界正 양식 풍족, 군사 증강, 봉록을 올리고 / 食豐兵雄增俸菲 서울이나 지방에나 학당을 설치하여 / 置學京坊盡鄕縣 교관을 뽑아 세우니 문교가 빛났네 / 選立師官文敎煒 서도ㆍ북도에도 모두 글 읽는 소리 / 西鄙北鄙絃歌聲 동왜ㆍ남만이 공물을 바치네 / 東倭南蠻琛厥篚 해륙의 운수가 40년에 다시 트여 / 漕斷陸輓四十年 어렴의 이가 통해 유민들이 모여들고 / 漁鹽利通來流鬼 전쟁에 시달렸던 연변 백성들도 / 萬戰四散沿邊民 고향에 돌아와서 폐허를 개간하고 / 咸還鄕墟墾荊葦 경연의 대유들을 조석으로 모셔서 / 經筵大儒侍朝夕 이제 삼왕을 부지런히 강설하네 / 二帝三王陳亹亹 성덕을 보양하여 날마다 새롭게 하니 / 輔養聖德日日新 주공 뒤에 이런 분 몇이 있었던고 / 周公之後曾有幾 서산연의를 동궁에 내놓고 / 西山衍義進東宮 명덕ㆍ신민을 자초지종 아뢰니 / 明德新民窮首尾 보ㆍ부(벼슬 이름 태보(太保)와 태부(太傅))와 빈우들이 모두 기와 용(요순(堯舜) 때의 어진 신하)이니 / 保傅賓友盡夔龍 출입 기거에 어찌 소인을 친하랴 / 出入起居寧比匪 만세 대업을 공께서 여시니 / 萬世大平開自公 중흥의 정치를 하늘이 도우시네 / 中興致治實天棐 천자께서 갸륵히 여겨 특히 봉호내리시니 / 帝嘉匡復特勞賜 삼한 충의공 그 이름 빛날씨고 / 三韓忠義公有斐 배사공의 저택과 조보의 당도 / 裴司空第趙普堂 삼대 같은 거룩한 명주 못 모셨으나 / 未擧明主三代韙 상공께서 절하시고 낮을 점쳐서 만세수를 드리오니 / 公拜卜晝獻萬壽 공훈이 이ㆍ주와 함께 길이 크시나이다 / 宗勛永與伊周偉 [주-D001] 강후(絳侯) : 한(漢) 주발(周勃)인데 고조(高祖)가 죽고 여후(呂后)가 여주(女主)로서 나라를 어지럽히다가 여후가 죽고 여씨(呂氏)의 당이 난을 일으키자 주발이 대장(大將)으로서 그들을 다 죽이고 한실(漢室)을 편안하게 했다. [주-D002] 양공(梁公) : 당 나라 무후(武后)가 당실(唐室) 이씨(李氏)를 제거하고 무씨(武氏)의 종묘(宗廟)를 세웠는데 적인걸(狄仁傑)의 무리가 중종(中宗)을 받들어 반정(反正)하여 당실(唐室)을 회복시켰다. 적인걸을 양공(梁公)에 봉하였다. [주-D003] 서산연의(西山衍義) : 송(宋) 나라 진덕수(眞德秀)의 호는 서산인데, 대학을 해설하여《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지어 임금께 올렸는데, 이때에 경연(經筵)에서 그 책을 강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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