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5. 08:42ㆍ이성계의 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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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1년 을묘(1735) 5월 26일(을축) 아침에는 맑고 저물녘에는 비가 옴
11-05-26[20] 각 도의 구관 당상을 인견하고, 소대를 행하여 《자치통감강목》을 강하고 청군이 우리 변경을 침입하는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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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未時)에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갔다. 소대(召對)에 각 도의 구관 당상(句管堂上)이 함께 입시한 자리이다. 참찬관 이일제(李日躋), 검토관 유건기(兪健基), 가주서 이성중(李成中), 편수관 오명계(吳命季), 기사관 이석복(李錫福), 예조 판서 김취로(金取魯) - 관동 구관 -, 호조 판서 이정제(李廷濟) - 경기 구관 -, 형조 판서 조현명(趙顯命) - 영남 구관 -, 좌윤 송진명(宋眞明) - 관서 구관 -, 행 부사직 이유(李瑜) - 호남 구관 -가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구관 당상은 먼저 나아오라.”
하니, 김취로가 나아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차대(次對)를 했는데, 차대는 다른 일이 많다. 때문에 오늘 특별히 경 들을 부른 것은 각 도의 소문을 들으려고 해서이다. 여러 도의 농사 형편은 어떠한가?”
하니, 김취로가 아뢰기를,
“신은 강춘도(江春道)를 구관하고 있는데 별도로 아뢸 것이 없습니다. 농사 형편은 4월 이전에는 가물었고 5월 이후로는 비가 적당히 내리고 있습니다. 도신이 보고한 장계를 보니 묵혀서 버리는 곳이 매우 적고 각종 곡물도 무성하다고 합니다. 농사 형편은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계로 보고한 것 외에 다른 들을 것은 없는가?”
하니, 김취로가 아뢰기를,
“그동안에 이미 물으셨기 때문에 신들도 상세히 알고자 하여, 만약 물을 만한 사람을 만나면 그때마다 물었는데 상세히 알기는 어려웠습니다. 무릇 농사 형편은 장계의 보고에서 열거한 것보다는 더 나은 듯합니다. 군역의 일도 대단한 폐단은 없습니다.”
하였다. 이정제가 아뢰기를,
“신은 경기를 구관하고 있습니다. 근일에 신병이 있어 집에서 휴식하였기 때문에 기내 사람들을 많이 만나 물어보고 본도에서 올린 장계를 참작하였는데 농사 형편에 걱정이 없다고 합니다. 무릇 올해의 농사 형편은 초여름에는 비록 가물었지만 전답의 각종 곡물이 모두 일찍 경작하는 조생종이라 5월 이래로는 비가 적당히 내리고 또 폭우도 없기 때문에 초반에 누렇게 말랐던 것도 모두 회생하여 지금은 이미 흑청색입니다. 이후로 재해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걱정이 없습니다. 군역청의 일은 나라에서 큰 변통이 없기 때문에 감사가 봉행하여 극진하게 하지 않음이 없는데 별로 큰 효험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막 물으려고 하였다. 착실한지 여부는 논할 것 없고 이미 모두 바꾸어 정하였는가?”
하자, 이정제가 아뢰기를,
“경기 고을의 군액(軍額)은 3000여 명이고 나라에서 공급하는 수어청ㆍ총융청의 아병(牙兵)과 각 읍에서 모은 양정(良丁)으로 겨우 그 숫자를 채우는데, 삭녕(朔寧)은 아병이 가장 많습니다. 이정(移定)한 뒤로는 백성들이 자못 고생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백성들 실정이 이와 같은 것은 초역(初役)보다 무거워서 그런가?”
하니, 이정제가 아뢰기를,
“아병이 쌀을 바치는 것은 양역(良役)이 베를 바치는 것보다 가볍기 때문에 백성들 사정이 스스로 이와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였다. 송진명이 아뢰기를,
“듣건대 양 청의 아병들을 태거(汰去)하여 충정(充定)한 후임은 충급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천(私賤)을 얻기 어려운 것이 양정보다 심한가?”
하자, 송진명이 아뢰기를,
“양정 1명 대신 사천 2명을 충급하기 때문에 얻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이유가 아뢰기를,
“이는 모두 옛 법입니다.”
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신은 경상도를 구관하고 있습니다. 본도는 이달 초 이전에 가뭄이 심하여 기우제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이달 4일에 비로소 비가 와서 9일에 봉계(封啓)하였는데 농사가 다행이라고 했습니다. 그 후에는 다시 장계의 보고가 없습니다. 그런데 전하는 말을 들으니 중도(中道) 이상 산골짝 고을은 빗물이 흡족하고 대구(大丘) 이하는 부족하다고 합니다. 대체로 앞으로는 다른 재해만 없으면 가을 수확을 기대할 수 있다고 합니다. 군액은 이미 다 채워 정하였는데, 고성(固城)만 충원을 못하였습니다. 도신의 장계도 고성을 우려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70여 주(州) 중에 한 읍만 어찌 충액하지 못하였는가?”
하자, 조현명이 아뢰기를,
“고성은 통영(統營)이 소재한 읍으로, 통영과 우후(虞候) 소속이 매우 많습니다. 또 임자년(1732, 영조8)의 흉년이 더없이 심해서 백성들이 많이 유랑하였기 때문에 양정을 얻기가 더없이 어렵습니다.”
하였다. 송진명이 아뢰기를,
“신은 평안도를 구관하고 있습니다. 관서의 지세는 산읍(山邑), 강읍(江邑), 해읍(海邑)의 차이가 있는데, 피차간에 모두 온전할 때는 매우 드뭅니다. 올해는 산읍과 강읍에 우박, 수재, 충재를 입었고 해읍은 한해가 특히 심하며 또 해일의 변고도 있어 이앙(移秧) 시기도 늦어졌습니다. 비록 앞으로 진휼을 베풀지 여부를 알지 못하지만, 지금 농사는 매우 걱정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서도 이앙법이 있는가?”
하자, 송진명이 아뢰기를,
“이앙법은 매우 간편해서 실로 금지하기가 어렵습니다. 관서에는 일찍이 이 법이 없었다가 지금은 행하는데 다른 도와 차이가 없습니다. 올해 농사 형편은 관서와 관북이 가장 참혹한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서가 어찌 북도와 같은 지경이 되었는가?”
하니, 송진명이 아뢰기를,
“평안 감사의 장계에 이르기를 ‘우심재읍(尤甚災邑)에 환곡을 규정 이상 더 분급해 주고 보리를 대신 바치는 일을 좌상과 우상이 모두 의당 북도의 예에 따라서 하라고 했는데, 묘당의 여러 논의가 한결같지 않으니 반대하는 내용으로 아뢴 것과 시행을 허락하라는 것 중에 속히 처분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원래의 장계를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김취로가 아뢰기를,
“관서의 지세는 신도 알고 있습니다. 산에 있는 밭이 원래 많은데 연해의 토양은 비옥하여 항상 전체적으로 흉년이 들 때는 적습니다. 또 북도는 해마다 흉년이 들었지만 관서는 작년에 흉년이 들지 않았으니 북도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신이 ‘관서는 작년에 약간 풍작이고 북도는 해마다 흉년이 드니 똑같이 비교할 수는 없다.’라고 아뢴 것이 옳다. 이 장계는 대신이 읽어 보고 그냥 놓아두었는가?”
하자, 송진명이 아뢰기를,
“대신은 시행을 허락하고자 하는데 묘당의 논의는 질질 끌며 미루기 때문에 우선 놓아두었습니다. 오늘 의당 결단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하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김취로가 아뢰기를,
“창고에 남겨 둔 것을 규정 이상 더 분급해 주는 것은 일이 매우 중대하고 어려워 나라에 소요를 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신은 일찍이 몹시도 안타깝게 생각했는데, 관서가 비록 재난을 당했지만 참혹한 정도에는 이르지 않았으니 가벼이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또 서도는 다른 지역과 달라서 더욱 견고하게 지켜야 합니다. 신의 본래 견해가 이와 같은데 전후가 어찌 다르겠습니까.”
하고, 이정제가 아뢰기를,
“신의 의견도 본래 이와 같아서 전후로 여러 차례 아뢰었는데, 일이 의당 변통해야 하면 어찌 변통할 수 없겠습니까. 지금은 보리를 이미 수확하였는데, 보리농사가 비록 흉작이지만 그래도 지탱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송진명이 아뢰기를,
“보리가 참혹하게 흉작이어서 농가의 식량이 끊어지고 종자도 나올 곳이 없기 때문에 절박하다고 합니다.”
하니, 이유가 아뢰기를,
“농사가 흉년이라 참으로 곡식을 아껴야 하는데 관서에 비축한 것은 더욱 굳게 지켜야 합니다.”
하였다. 김취로가 아뢰기를,
“의당 지켜야 할 곳에서 지키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이정제가 아뢰기를,
“종자가 만약 끊어졌으면 구관 당상이 도신과 상의하여 다른 도의 곡물을 옮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다른 도는 곡식이 있는가?”
하니, 조현명이 아뢰기를,
“여러 해 풍년이 든 뒤라 옮길 수 없습니다.”
하였다. 송진명이 아뢰기를,
“신하들의 말은 대체로 모두 좋으나 도신이 청한 것은 한 도를 들어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더욱 심한 곳만 가리킨 것이니 이는 지나치게 외람된 청이 아닙니다. 이미 북관에 허락을 했다면 서북도 다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서는 북도와 다르다. 승지는 일찍이 서읍(西邑)의 수령을 지냈으니 반드시 알 것이다. 산군(山郡)은 곡물을 많이 비축해 두었는가?”
하자, 이일제가 아뢰기를,
“산군은 곡물이 아무리 많더라도 사방이 막힌 지역이라 옮길 길이 없으니, 만약 흉년을 당하면 외부로부터 곡식을 옮기기가 지극히 어렵습니다. ‘깊은 곳에 곡식을 보관하라’는 것이 옛사람의 말입니다. 변방은 비록 일이 있더라도 곡물을 비축해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재상이 아뢴 관서의 일은, 대개 관서는 다른 곳과 달라서 파종하는 절기를 놓치면 가을의 수확이 결국 유리하지 않기 때문에 3, 4월 사이에 가뭄이 들면 서도 백성들이 더욱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서는 북관과 다르다. 어제 대신이 진달하지 않은 것은 반드시 생각이 있어서이다. 이 장계는 우선 앞으로의 상황을 살펴보고 그 다음에 처리하라.”
하였다. 이유가 아뢰기를,
“신은 전광도(全光道 전라도)의 농사를 구관하고 있습니다. 이번 달 19일의 소식을 들으니 이미 이앙을 다 마쳤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재는 영남보다 나은가?”
하자, 이유가 아뢰기를,
“농사는 우선 걱정할 만한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역은 어떠한가?”
하니, 이유가 아뢰기를,
“군액은 1만 5천여 명인데 흥양(興陽) 한 고을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원을 채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원을 채운 사람은 모두 정예병인가?”
하니, 이유가 아뢰기를,
“여러 해 동안 편안하게 별다른 사달이 생기지 않았으니 아직 알 수는 없지만 흥양의 군정(軍丁)은 정수를 채우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감영과 묘당에서 여러 가지로 안배하여 300여 명을 구해 주었습니다. 유복명(柳復明 전임 전라 감사)이 반드시 정비하려고 하다가 끝마치지 못하고 올라오고 서종옥(徐宗玉 현임 전라 감사)이 부임해 갈 때 반드시 수습하겠다고 말했는데 그 뒤로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직 인원을 채우지 못했다면 봉납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가?”
하니, 이유가 아뢰기를,
“틀림없이 아직 봉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고, 조현명이 아뢰기를,
“흥양은 의당 별도로 변통의 방도가 있어야 합니다. 신이 전라 감영에 재직하고 있을 때 올린 상소를 기억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시임(時任) 현감 심해(沈瑎)는 평소에 정사를 잘 다스려 바야흐로 군정(軍政)에 마음을 다하였는데도 어찌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흥양은 고을은 작고 군사는 많기로 본래 유명합니다.”
하였다. 이정제가 아뢰기를,
“군액은 다른 곳으로 나누어 옮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이유가 아뢰기를,
“남김없이 찾아 모아야 하는데 어찌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였다. 김취로가 아뢰기를,
“다른 도로 이송하는 것이 비록 어렵기는 하지만 우선 앞으로의 상황을 살펴보고 약간 헐한 다른 도로 이송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른 도로 이송하는 것도 어렵다. 이웃 고을의 관리도 오히려 싫어하는데 하물며 다른 도이겠는가?”
하였다. 이유가 아뢰기를,
“해서의 군정(軍丁)은 삼남보다 쉽습니다.”
하니, 김취로가 아뢰기를,
“관서와 해서는 모두 삼남보다 낫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까 승지가 아뢴 말을 들은 대로 산군에 비축한다는 얘기가 옳다. 관서는 군액을 이송하는 것이 옳지 않다.”
하니, 송진명이 아뢰기를,
“관서는 본래 군역이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비록 나라에서 관할하지는 않더라도 그곳에서 관에 부역하는 사람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하니, 김취로가 아뢰기를,
“서도의 한정(閑丁)은 매우 수월하여 삼남과는 다르고, 또 바치는 것도 다만 1필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해서는 어떠한가?”
하니, 김취로가 아뢰기를,
“해서는 땅이 넓고 인구는 드문데 역사(力士)가 많이 나서 6량의 화살을 멀리 쏘는 사람이 해서에서 나옵니다.”
하였다. 송진명이 아뢰기를,
“삼남과 경기는 대대적으로 조사하여 바로잡은 뒤에 군액을 일신하여 도망가거나 죽은 자의 자리를 모두 충원하여 인징(隣徵)과 족징(族徵)의 폐단이 차츰 그치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두 정수를 채웠는가?”
하자, 송진명이 아뢰기를,
“신이 남쪽 고을에서 수령을 맡았을 때 보니 거의 다 충원하고 빠진 인원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남과 호남은 박문수(朴文秀)와 이광덕(李匡德)이 대대적으로 조사하여 바로잡은 뒤에 도망가거나 죽은 자에 대한 폐단이 이전보다 더 나아졌는가?”
하니, 송진명이 아뢰기를,
“신이 막 이 일을 아뢰려고 하였습니다. 군액을 조사하여 바로잡은 뒤에도 반드시 바로 다스리기를 멈추지 않고 무너지는 대로 바로 수리하는 것처럼 한 뒤에야 거의 영구한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박문수와 이광덕이 비록 일신하여 조사해 바로잡았다고 하더라도, 감사가 만약 예전처럼 마음을 쓰지 못하거나 수령이 간혹 잘 다스리지 못하고 아래 아전의 손에 맡겨 둔다면 여러 가지로 탈하(頉下)가 있을 것이니, 조정에서 반드시 해마다 감사와 수령을 신칙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망가거나 죽은 사람은 해마다 있을 뿐만 아니라 틀림없이 달마다 있을 것이고, 달마다 있을 뿐만 아니라 틀림없이 날마다 있을 것이다. 지금 비록 바로 다스리더라도 반드시 차츰차츰 조사해서 보완한 다음에야 백성들이 지탱하고 보존할 수 있으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하니, 송진명이 아뢰기를,
“비록 신이 들은 함양(咸陽) 한 고을의 일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김광(金洸)이 부사로 있을 때 도망가거나 죽은 사람이 7, 8백 명은 되었는데 모두 부유한 사람으로 대신 정하여 문서를 완성하고 마감하였습니다. 허정(許晶)이 그 후임으로 교대하였는데 그 사람은 청렴결백하고 다스리는 것도 꼼꼼하고 간소하였으나 아래 아전들에게 속임을 당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김광이 징발하여 정한 것이 대부분 탈하되어 600여 명에 이르렀기 때문에 도망가거나 죽은 사람의 숫자가 다시 전날과 같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하였다. 이정제가 아뢰기를,
“허정은 고을을 잘 다스리는 수령입니다.”
하니, 조현명이 아뢰기를,
“허정은 청렴결백하여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일을 잘 알지 못하여 고집스러운 병통이 있습니다.”
하였다. 김취로가 아뢰기를,
“허정은 본디 청렴결백하고 잘 다스리지만, 재상이 이미 이 일을 경연에서 아뢰었으니 조정의 체모에 있어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한번 조사하여 조처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도의 구관 당상도 이 일을 들었는가?”
하자, 조현명이 아뢰기를,
“신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다만 호남의 일로 말하자면 이광덕이 대대적으로 조사하여 바로잡은 뒤에 많은 곳에서 탈하되어 신이 조사해 보니 함부로 탈하시킨 것이 거의 5분의 4나 되었습니다.”
하였다. 이유가 아뢰기를,
“이 때문에 군정(軍丁)을 거두어 징발할 때에 고을 안에 쌀은 흔하고 돈은 귀하니 이것이 바로 뇌물이 행해지는 까닭입니다.”
하니, 김취로가 아뢰기를,
“본도의 구관 당상과 다른 도의 당상을 논할 것도 없이 재상이 이미 수백 명이 탈하되었다고 아뢰었으니 결코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록 본도의 구관 당상의 말과는 다르지만 중신이 아뢴 것은 일리가 있다. 허정의 일을 비변사로 하여금 본도에 조사하여 묻게 하라.”
하니, 유건기가 아뢰기를,
“허정의 일은 이미 경연에서 아뢰었으니 그냥 두고 논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허정은 일찍이 도신이 장계로 보고하여 파직되었는가?”
하니, 조현명이 아뢰기를,
“허정이 칠곡 부사(漆谷府使)였을 때 청렴결백하고 잘 다스렸는데 고집이 병통이 되었기 때문에 진휼을 마친 뒤에 장계를 올려 진휼을 잘 하지 못했다고 하였지만, 청렴결백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하였다. 송진명이 아뢰기를,
“이 일은 알기 쉽습니다. 김광이 징발해 정한 것이 얼마이고 허정이 탈하한 것이 얼마인지를 물어보기만 하면 함부로 탈하한 것이 얼마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상이 이르기를,
“여러 도의 도신에게 이미 별유(別諭)를 내렸다. 지금 내린 비가 비록 다행이더라도 농민들이 이때를 틈타서 부지런히 힘쓴 다음에라야 가을의 결실을 바랄 수 있다. 여러 도의 권농 소식을 경들은 들었는가?”
하니, 이정제가 아뢰기를,
“지난번 하교하신 뒤에 신들도 각별히 타일러 경계시켰습니다. 경기도는 멀리 있는 도와는 달라서 여러 고을의 수령들을 자주자주 만나 보기 때문에 신이 성상의 뜻을 각별히 타일렀는데, 수령들은 ‘이렇게 단비를 만나 스스로 농사에 힘써야 하는데 어찌 수고스럽게 하교하실 때까지 기다린단 말입니까. 농사의 형편이 이와 같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다만 가을걷이를 우러러 기다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임 경기 감사는 나의 뜻을 잘 체득하여 다스리는 데에 부지런히 힘썼다. 신임 감사가 대궐을 하직할 때 내가 한가하게 누워 지내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는데, 경은 이미 본도를 구관하고 있고 사는 곳도 경기 감영과 가까우니 자주 보면서 면려하는가? 그는 비록 품계가 높은 중신이지만 지금은 일개 관찰사에 지나지 않고 경은 구관 당상이니 만약 들은 바가 있으면 아뢰지 않아서는 안 된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구임 감사와 비교하여 얼마나 부지런한가?”
하니, 이정제가 아뢰기를,
“신은 직무가 너무 번다해서 자주 가서 보지는 못하였는데, 지금 감사는 병세가 가볍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전의 병이 낫지 않았는가? 각 고을의 공문도 처리하기 어려운가?”
하니, 이유가 아뢰기를,
“숙환뿐만 아니라 다른 증세가 더하여 병세가 가볍지 않다고 합니다.”
하자, 이정제가 아뢰기를,
“조명익(趙明翼 전임 경기 감사)은 십분 면려하여 정말 잘 다스렸습니다. 비록 하교가 없어도 신은 본디 도신과 함께 모든 일을 경영하였는데, 지금 도신의 병세는 부지런한지 여부를 논할 것도 없이 정신이 혼미하여 공무를 보지 못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기의 일은 이미 들었다. 영남과 호남의 관찰사가 대궐을 하직할 때 모두에게 유시하였는데, 영남 관찰사에게는 전 이조 판서의 일로 유시하였다. 경은 그것을 들었는가? 대체(大體)는 구임 관찰사의 치적을 잘 이어받았는가?”
하니, 조현명이 아뢰기를,
“민응수(閔應洙 경상 감사)는 내려간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자못 시책을 시행한다고 들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시책을 시행한다는 것은 어떤 일인가?”
하니, 조현명이 아뢰기를,
“민응수가 부임해 갈 때에 신이 몇 년 전에 영남을 맡아 다스릴 때 시책을 시행하고자 했던 것을 이미 이룬 것이나 미처 이루지 못한 것이나 막론하고 조목별로 열거하여 써 주었는데, 근래에 보낸 서신에 일일이 거론하여 제시하였습니다. 이를 보고 애쓰고 유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이 미처 하지 못한 것을 모두 하였다는데 다른 소견은 없었는가?”
하니, 조현명이 아뢰기를,
“대체는 서로 다르지 않고, 별다른 서계(書啓)도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아까 아뢴 것은 그 규모가 어떠한가?”
하니, 조현명이 아뢰기를,
“이것은 권장하는 일이라 역시 조목별로 열거한 것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직접 만났을 때 그는 이 조목을 더욱 좋게 여겼는데, 그 뒤로 서신을 왕복하면서 매번 이 한 절목을 더욱 좋게 여겨 두서(頭緖)가 차츰 안정된다고 하니 마음을 다하여 시행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이정제가 아뢰기를,
“영남은 지금 크게 흥기하고 있는데 김성탁(金聖鐸)이 내려간 뒤로 더욱 한층 배가하여 흥기한다고 합니다.”
하니, 조현명이 아뢰기를,
“영남은 마땅히 이 도로 다스려야 하는데, 신이 각별히 이 도에 유념하였기 때문에 사림에 권장이 되었습니다. 그 형세를 따라 잘 인도하는 것이 성인의 다스리는 법입니다. 무릇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정치가 다른 것은 성인의 도가 달라서가 아니고 그 풍속이 같지 않아서입니다. 영남은 원래 유학의 고장이어서 아직도 전현의 유풍이 남아 있는 것이 다른 도와 다릅니다. 여러 고을 안에 반드시 하나의 큰 유학자가 있으니 이것으로 그 습속이 유학을 숭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민응수가 부임해 갈 때 이 도로 인도하도록 면려하였는데 그가 과연 잘 해내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날 달랐던 풍습이 조금 나아졌는가?”
하니, 조현명이 아뢰기를,
“비록 3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지만 이는 탐문해 본 일이 아니니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의 장주(章奏)로 보건대 서로 현격하게 달랐는데 지금은 어떠한지 모르겠다.”
하니, 김취로가 아뢰기를,
“조정에서 영남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을 신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좋다. 그러나 내가 물은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선현의 유풍이 남아 있는 고장이기에 풍속에서 숭상하는 것이 어떠한지 알고자 한 것일 뿐이다.”
하니, 이유가 아뢰기를,
“신이 몇 해 전에 일찍이 영남 사람과 서북 사람을 똑같이 명하여 거두어 썼던 일을 아뢴 바가 있습니다. 성상의 뜻은 본래 멀리 있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 의도에서 나왔습니다마는, 별도로 거두어 쓰는 것에 대해 소견이 어떠하십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말할 필요 없다. 나는 인심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 아니고, 그 풍습을 알고 싶을 뿐이다. 재신(宰臣)이 지금 호남을 구관하고 있는데, 호남의 풍습은 더없이 안타깝다.”
하니, 김취로가 아뢰기를,
“호남과 영남은 풍속이 비록 같지 않으나 그 형세를 따라 잘 인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남의 학문은 그 형세를 따라 인도할 수 있지만 호남의 좌도 역시 그 형세를 따라 인도할 수 있는가?”
하니, 이유가 아뢰기를,
“호남은 정여립(鄭汝立)이 나온 뒤로 선비들이 모두 스스로를 버려서 습속이 아직도 이와 같습니다.”
하자, 김취로가 아뢰기를,
“반드시 이와 같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여립은 호남 사람인가?”
하니, 이유가 아뢰기를,
“정여립은 전주(全州) 사람입니다. 호남 사람들은 다만 음악을 일삼아서 그 노인들에게 물으면 역시 이것에 연유한다고 말합니다. 형세를 따라 잘 인도한다는 말은 호남에는 적용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김취로가 아뢰기를,
“신이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호남과 영남의 일을 조서 사이에 자주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웃으며 이르기를,
“호남과 영남은 불행하게도 과거에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경의 말이 이와 같은데, 내가 물은 것은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대체로 호남의 풍습이 옛날에는 어찌 이와 같았겠는가. 어떻게 하면 확연히 크게 안정되게 할 수 있겠는가?”
하자, 송진명이 아뢰기를,
“산천과 풍토가 모두 좌도를 숭상하는 형상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 영남과 같이 학문을 지향하는 사람이 없겠는가?”
하니, 김취로가 아뢰기를,
“이와 같이 비교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은 대체가 좋다. 훈육하여 풍속을 교화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인데 영남과 호남의 옛 관찰사가 마침 입시해 있기 때문에 물었을 따름이다. 내가 또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에게 물은 것은 경이 아까 영남과 호남의 다스리는 규범이 다른 점을 아뢰었기 때문이다. 경이 만약 오래 유임되었다면 베풀어 시행하고자 했던 것을 잘 펼 수 있었겠는가?”
하니, 조현명이 아뢰기를,
“신이 영남에 있을 때는 본보기를 세운 바가 있었기 때문에 성공의 효과가 느린지 빠른지는 논할 것 없이 모든 일에 준칙이 있었는데, 호남을 다스릴 때는 영남에서 본보기를 세운 것과 같이 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오래 유임되었다면 다스리는 규범이 어떠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틀림없이 영남에서 다스렸던 법으로 다스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각각 그 풍속을 따라 다스린다는 것은 그 의도가 매우 좋다. 도신은 의당 이와 같아야 한다. 나는 일찍이 덕량(德量)이 있는 사람이라야 호남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니, 김취로가 아뢰기를,
“방백의 임무는 매우 중하니, 반드시 중후하고 덕이 있는 사람이라야 한 도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후하고 덕이 있는 사람은 참으로 좋기는 하다. 다만 중후한 사람은 역시 부족한 점이 있다.”
하니, 김취로가 아뢰기를,
“중후하고 질박함이 많아야 실패하는 일이 드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무릇 지방의 폐단은 모두 재주가 많은 사람 때문에 일어납니다. 신이 방백의 직임을 겪었기 때문에 그 폐단을 더욱 상세하게 압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팔도의 관찰사 직임을 모두 맡았던 사람이 있는가?”
하니, 송진명이 아뢰기를,
“고(故) 판돈녕 홍만조(洪萬朝)가 7도의 방백을 지냈는데 한 도는 재임하였고, 고 판서 이세화(李世華)도 6도의 방백을 지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홍만조는 연로한 뒤에 빈객으로 잠깐 만나 보았는데, 당시에는 남들보다 별다른 점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관찰사의 재능은 넉넉하였는가?”
하니, 김취로가 아뢰기를,
“그 사람은 다방면에 능숙하였습니다.”
하고, 송진명이 아뢰기를,
“법을 다스리는 데 폐단이 없었습니다.”
하고, 이정제가 아뢰기를,
“특별히 신기한 일을 좋아하지 않았고 이르는 곳마다 폐단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김취로가 아뢰기를,
“선왕조에 사람을 등용하는 법은, 감사가 된 사람은 오래도록 감사를 지냈고 병사가 된 사람은 오래도록 병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관리의 기강이 이전과는 크게 달라서 반드시 순환하여 지내고 있으니 신은 일찍이 이를 개탄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말이 옳다. 홍만조는 세상을 떠난 지 이미 오래되었는가?”
하자, 신하들이 함께 아뢰기를,
“신들은 모두 함께 그가 살았을 때 입조(立朝)하여 반열에서 서로 보았습니다.”
하였다. 이유가 아뢰기를,
“방백이 되는 도는 대체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명신인 구봉서(具鳳瑞)가 영남을 맡아 다스렸을 때에는 영남 사람들이 지금도 그 신명(神明)함을 칭찬하지만, 호남을 맡았을 때는 낭패를 당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가?”
하자, 이유가 아뢰기를,
“이것은 영남과 호남의 풍속이 다른 데에 연유한 것입니다.”
하였다. 김취로가 아뢰기를,
“구봉서는 총명하기기 남들보다 뛰어나서 다스리는 것이 평상적인 것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때때로 간혹 낭패를 당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광덕은 호남 사람인데 신명하다고 생각하는가?”
하니, 조현명이 아뢰기를,
“대소의 백성들이 만약 감사를 대하게 되면 번번이 이광덕의 다스림을 칭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전들은 어떻게 여기는가?”
하니, 조현명이 아뢰기를,
“이광덕을 체임(遞任)한다는 소식이 내려오자 아전들 중에는 매우 기뻐하며 일어나 춤을 추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하자, 상이 웃으며 이르기를,
“아전과 백성들에게 모두 편하게 하기는 과연 어렵다.”
하였다. 이정제가 아뢰기를,
“홍만조는 능히 아전과 백성들을 모두 편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애매모호하게 처리한 병통은 없었는가?”
하자, 조현명이 아뢰기를,
“이르는 곳마다 혁혁한 소문은 없었지만 떠나간 뒤에는 남들이 미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와 같다면 좋다.”
하였다. 이정제가 아뢰기를,
“도신은 참으로 사람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교화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것은 오로지 지방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방을 바르게 하는 도는 실로 조정을 바르게 하는 데에 달려 있으니, 조정이 바르게 된 다음에 사방을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말이 좋다. 경이 비록 말을 다 하지는 않았으나 조정을 바르게 한다는 말 앞에 또 그 근본이 있으니, 아뢴 뜻을 미루어 알 수 있다.”
하였다. 유건기가 아뢰기를,
“신은 아뢸 말이 있습니다. 호남은 비유하자면 중국의 오(吳)ㆍ초(楚) 지역과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서가 더욱 번화할 것이다.”
하자, 김취로가 아뢰기를,
“관서는 기생과 풍류가 여러 도에 으뜸입니다.”
하였다. 유건기가 아뢰기를,
“호남의 풍속이 비록 진실하지는 않지만 영남의 풍속도 이전과는 다릅니다. 감사와 수령이 만약 잘 다스린다면 영남과 호남의 풍속이 어찌 다르겠습니까? 예로부터 백성의 풍속은 오직 한 시대의 숭상하는 바에 달려 있으니, 지금 진강하는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으로 보더라도 징험할 수 있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궁중에서 높은 상투를 좋아하면 사방에서는 상투 높이가 한 자나 된다.’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한 시대의 풍습은 오직 어떻게 인도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방백은 흐름을 받들어 교화를 펴는 데에 지나지 않으니, 조정에서 만약 교화를 하지 않으면 방백이 어떻게 받들어 펼쳐 부양하겠습니까? 신은 영남과 호남을 크게 변화시키는 것은 도신에게 달려 있지 않고 조정에 달려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신(儒臣)이 아뢴 말이 좋다. 만약 윗자리에 있는 사람의 교화가 없으면 방백도 어떻게 받들어 펼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서로 의존한다는 것에 비유하자면, 사람을 택하는 도리 역시 폐할 수 없는 것이다.”
하고, 이어서 구관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오늘 경들을 불러 물은 것은 내가 실로 뜻이 있어서이다. 모두 비국의 다른 당상들과 다름이 없는데, 오직 경기의 구관 당상이 아뢴 것이 조금 낫다. 또 내가 단지 농정(農政)과 군정(軍政)만 물은 것도 뜻이 있다. 경들은 모름지기 이 뜻을 깊이 받들어 각 도의 도신들에게 단단히 타일러 경계하도록 하라. 관서의 구관 당상은 환곡을 청하는 일로 조심스럽게 주달(奏達)하면서도 구관의 뜻이 있다. 도신과 함께 한 몸이 되어 마음을 다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취로가 아뢰기를,
“당초에 구관에게 나누어 명을 내릴 때 각자 자기 도에 사사로이 하지 말라고 면려하셨습니다. 송진명이 아뢴 것도 오히려 이런 뜻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각자 자기 도에 사사롭게 하는 것은 참으로 잘못이다. 범범하게 서로를 잊으면 대단히 옳지 않다.”
하였다. 김취로가 아뢰기를,
“송진명은 일찍이 관서의 방백을 지냈고 또 현임 방백이 친절하기 때문에 능히 본도의 일을 잘 알고 있어 이와 같이 아뢰었습니다.”
하니, 이정제가 아뢰기를,
“구관에게 나누어 명을 내린 뒤에 만약 그 도의 모든 일을 듣게 되면 자연히 다른 도의 일과는 다르게 됩니다.”
하였다. 김취로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그 도의 수령으로 만약 잘 다스리지 못한 자가 있으면 들은 대로 아뢰라고 하교하셨는데, 강춘도 수령이 잘 다스리는지 여부를 유심하여 물었더니 특별히 잘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없었으면 거의 잊어버릴 뻔했다. 영남과 호남의 수령이 유능한지 여부를 경들은 알고 있는가?”
하자, 이유가 아뢰기를,
“비록 평소에 아는 사람이 하직하고 떠날 때 서로 만나게 되더라도 애초에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소식도 서로 접하지 않고 얼굴도 서로 모르는 것처럼 하는데, 군을 잘 다스리는지 여부는 실로 상세히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김취로가 아뢰기를,
“이미 구관하라고 명을 내렸으니 해당 도의 수령은 의당 두루 하직 인사를 해야 합니다.”
하니, 이정제가 아뢰기를,
“이전에 지방의 수령은 으레 모두 비국 당상에게 두루 하직 인사를 하였습니다. 근년에 조정에서는 수령들이 이 때문에 머물러 지체되는 것을 염려하여 비당(備堂)에서 하직하는 것을 면제하였기 때문에, 그 후로는 비국 당상에게 두루 하직 인사하는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구관 당상을 내었으니 다른 당상과는 차이가 있어 두루 하직 인사하게 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였다. 송진명이 아뢰기를,
“구관하라는 명은 성상의 뜻이 들어 있으니 수령들이 하직할 때와 지방에서 올라온 차원(差員)을 아울러 두루 보게 하면 다스리는 도를 면려하고 물정을 캐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두루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사람이 유능하지 여부를 알 수 있겠는가. 이후에는 하직하는 수령과 차원으로 올라온 수령에게 그 도의 구관 당상을 두루 만나 보게 하도록 거조를 내어 신칙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조현명이 아뢰기를,
“신은 지금 어영대장의 직임을 띠고 있기 때문에 어영군이 상번일 때 약간 물어보아서 비록 들은 바가 없지 않으나 특별히 지적하여 아뢸 만한 것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크게 다스려지지 않은 것이 없는가?”
하자, 조현명이 아뢰기를,
“크게 다스려지지 않은 것은 없다고 합니다.”
하였다. 이유가 아뢰기를,
“전주부의 성을 쌓은 뒤 일을 감독한 장교들에게 회계(回啓)하여 가자(加資)하였는데 유신이 상을 지나치게 주었다고 말했기 때문에 감할 수 있는 사람은 감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비록 묘당에서 서로 논의하였지만 지적하여 빼내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하니, 김취로가 아뢰기를,
“이 일은 대신이 입시한 뒤에 여쭈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유가 아뢰기를,
“이미 대신과 서로 논의하였기 때문에 감히 아뢴 것입니다. 그중에 약간 차이가 나는 사람을 가리니 김극협(金克協)과 정선(鄭銑) 두 사람을 빼 낼 수 있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후일 대신이 어전에 나왔을 때 여쭈어 정하라. 그런데 약간 명을 빼내는 것은 도리어 긴급하지 않다.”
하였다. 김취로가 아뢰기를,
“이 일은 김약로(金若魯)가 일찍이 상을 주는 법이 너무 지나치다고 아뢰어서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감하게 하라는 명이 있게 된 것입니다.”
하니, 유건기가 아뢰기를,
“김약로가 아뢸 때 신도 마침 짝지어 입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논의한 바가 있었습니다. 약간의 납속(納粟)을 하면 금관자나 옥관자를 얻는데, 이미 성 쌓는 수고를 하였다면 어찌 규례에 따른 포상을 아끼겠습니까. 신의 생각은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십여 인 중에 지나치게 가자한 사람을 많이 빼내면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다만 유신의 말에 따라 한두 사람만 빼내면 색책(塞責)하는 것과 같으니 어떨지 모르겠다.”
하니, 김취로가 아뢰기를,
“만약 인순(因循)하여 그냥 둔다면 처분이 전도되어 버릴까 걱정입니다.”
하였다. 이유가 아뢰기를,
“신은 감히 또 평소에 마음에 걸린 것을 아뢰겠습니다. 공명첩(空名帖)이나 풍락목(風落木)은 함부로 쓸 수 없고 마땅히 신중하게 아껴야 하기 때문에 신이 일찍이 아뢴 바가 있습니다. 작위를 상으로 주는 것은 의당 고무시키는 자료인데 평상시에 쉽게 써 버리면 혹시 급하게 써야 할 때를 당하여 어찌 뒤늦게 후회하는 일이 없겠습니까. 전주부의 성 쌓는 일에 상전을 베푸는 것은 조현명과 여러 차례 상의하여 회계하였습니다. 지금 일의 체모는 빼내지 않아서는 안 되니, 의당 대신이 어전에 나왔을 때 시행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입시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이 비국에서 초기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이르기를,
“구관 당상은 더 이상 아뢸 것이 없으면 모두 나가도록 하라.”
하니, 김취로 등이 차례로 물러 나갔다. 유건기가 《자치통감강목》 제6편의 ‘삼년춘정월(三年春正月)’부터 ‘사후토(祠后土)’까지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가 읽으라.”
하니, 이일제가 ‘오년춘정월(五年春正月)’부터 ‘사봉세작관내후(賜奉世爵關內侯)’까지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주서가 읽으라.”
하자, 이성중이 ‘삼년춘삼월(三年春三月)’부터 ‘위소양왕(爲小陽王)’까지 읽었다. 읽기를 마치자, 유건기가 글의 뜻을 아뢰기를,
“초판에서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내조(來朝)하니 오랑캐의 군장(君長) 수만 명이 길 양옆에서 만세를 불렀다.’라고 말한 것은 선제(宣帝)의 위령(威靈)이 멀리까지 뻗쳐 나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사람의 이목을 혁연(赫然)하게 하는 데만 힘쓰고 ‘덕을 드러낼 뿐 무력을 과시하지는 않으려는’ 뜻은 전혀 적었습니다. 이는 선제가 비록 총체적으로 핵심을 살피는 다스림을 한 데서 기인하였다고 하더라도 본래 학술의 공부가 없어서 그랬습니다. 그래서 임금의 덕은 성학(聖學)을 힘쓰는 것을 으뜸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유건기가 아뢰기를,
“2판의 강(綱)에서 ‘봉황이 신채(新蔡)에 모였다.’라고 말했는데, 호씨(胡氏 호삼성(胡三省))는 사평(史評)에서 말하기를 ‘어찌 선제가 그 정사를 스스로 기뻐하였겠는가. 신하들이 그 은미한 뜻을 엿보고 상서라고 다투어 말하여 화려하게 치장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말이 매우 좋습니다. 성왕(聖王)의 다스림은 공효가 빨리 나타나는 것을 바라지 않고 다만 마땅히 행해야 할 이치를 준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제는 스스로 패도를 뒤섞은 공리(功利)의 습관에 젖어 빠른 효과를 보려고 하여 과시하고 자랑하는 마음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신하들이 영합하여 다투어 상서라고 아뢰었습니다. 이러한 곳은 성상의 마음에 깊이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말이 좋다.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이일제가 아뢰기를,
“유신의 말이 좋습니다.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왕도와 패도 두 가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왕도는 그 공을 따지지 않고 그 이익을 도모하지 않는데 패도는 공을 숭상하고 이익을 쫓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인과 의를 빌려 와서 욕심을 이룬 뒤에는 번번이 자랑하고 자만하는 우환을 부르게 됩니다. 이 때문에 제 환공(齊桓公)의 규구(葵丘)의 회맹(會盟)이 성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선유들은 규구의 회맹을 달이 가득 찬 것과 같다고 여겼으니, 이는 환공이 스스로를 옳다고 여긴 뒤 자존망대(自尊妄大)하여 스스로 기뻐한 것입니다. 선제의 이 일도 이와 유사합니다. 또 낙수(洛水)의 거북이와 기산(岐山)의 봉황이, 성인이 어찌 일찍이 구하는 뜻이 있어 이르렀겠습니까. 후세에 이른바 상서라는 것은 모두 이 신채의 봉황과 같은 종류입니다. 비록 지금의 옹정제(雍正帝) 조정으로 말하더라도 기이한 상서의 징조들이 여러 차례 자주 나타나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속으로 웃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근래에 저들이 말하는 ‘황하가 맑아지고 오성(五星)이 모였다.’라는 현상이 어찌 이 봉황 현상과 다르겠는가.”
하였다. 유건기가 아뢰기를,
“원(元)나라 말기에도 황하가 맑아졌으니 이 일이 성인이 일어난 징조가 아님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황하가 맑아지고 오성이 모이는 것이 과연 귀속되는 바가 있으면 좋겠지만, 나는 이 봉황 현상과 가깝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유건기가 아뢰기를,
“5판에서 반고(班固)가 선제의 정치를 찬양하면서 은(殷)나라 고종(高宗)이나 주(周)나라 선왕(宣王)과 덕이 비슷하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너무 지나칩니다. 은 고종의 〈열명(說命)〉의 글은 모두 학문을 논하는 말이고 주 선왕이 몸을 기울여 수행한 것도 학문의 일인데, 선제는 일찍이 이러한 공부가 있었습니까? 반고의 말은 심하게 추어올리고 과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연 너무 지나치다. 그런데 원제(元帝) 같은 경우에는 잔약하고 나약하기가 너무 심하였으니, 현인을 훌륭하게 여기면서도 등용하지 못한 것은 곽공(郭公)이 나라를 망친 것과 같다.석현(石顯)이 관을 벗고 사죄한 것은 어찌 그리도 빈번하였는가. 이는 소인이 영합하고 속여 가리는 것과는 또 다르니, 다만 원제를 손아귀 안에 놓아둔 것이다.”
하였다. 유건기가 아뢰기를,
“경방(京房)은 현자(賢者)라고 할 수 있는데 학술은 밝지 못했습니다. 고공과리(考功課吏)의 법은 시험해 써 보지 못했는데 문제(文帝)가 가의(賈誼)와 조조(鼂錯)를 등용하지 못한 것은 실로 후세에 개탄하는 바이며 경방이 화를 당한 것도 족히 한탄스러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 오원(吳瑗)이 유신이 진강할 때 마침 가의의 일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나는 가생(賈生 가의)과 동상(董相 동중서(董仲舒))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동중서는 끝내 왕도를 견지하였지만 가의는 지나치게 날카로움을 면하지 못하였다. 만약에 등용해 본다면 반드시 동중서가 폐단이 없는 것만 못할 것이니, 가생의 재주는 너무 날카롭기 때문이다.”
하였다. 유건기가 아뢰기를,
“재주가 날카로우면 참으로 폐단이 있으니 말세에는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풍원군이 아까 지방의 폐단을 말했는데 모두 재주가 많은 사람들로 말미암은 것이니 이 말이 옳다. 내가 일찍이 이것을 군신간에 서로 힘써야 할 점으로 여겼는데 그는 과연 이와 같음을 알고 있다.”
하였다. 유건기가 아뢰기를,
“조현명은 역시 세상에서 말하는 인재입니다만 근래에는 재주가 날카로워서 실로 큰 폐단이 있기 때문에 그의 말이 이와 같았습니다. 이미 보고 들은 것이 있으면 숨기지 않고 곧바로 말하니 이것이 취할 만한 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래의 폐단이 이와 같기 때문에 지난번에 ‘욱욱문재, 오종주(郁郁文哉, 吾從周)’라는 제목을 내가 직접 내어서 선비를 시험한 것은 대체로 깊은 뜻이 있어서였다. 나는 문(文)을 취하려는 것이 아니고 실로 질(質)을 숭상하는 뜻을 내어서 유생들의 답이 어떠한지를 보려고 하였는데 모두 문을 숭상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다만 저 입시한 주서만이 능히 나의 뜻을 잘 알고 문 가운데 질을 취하였기 때문에 내가 친히 비점을 더하고 ‘가득제(可得題)’ 세 글자를 특서한 것도 역시 뜻이 있어서였다.”
하자, 유건기가 아뢰기를,
“과장의 공령(功令)의 글은 원래 일정한 투식이 있으니 다만 제목의 말에만 입각해서 지어 나갑니다. 그래서 과장 안의 선비들이 소견이 넓지 못하고 단지 ‘빛나는 문[郁郁之文]’에만 주의를 기울인 것입니다. 이성중이 홀로 능히 문 가운데 질을 취하는 뜻을 안 것은 대체로 유래한 바가 있습니다. 이성중의 부친 이현모(李顯謨)는 경학이 질박하고 충실해서 세상에서 추앙되는 바입니다. 그래서 이성중이 비록 나이는 어려도 원래 연원이 있으니 보고 들은 것이 일반 세속과는 다른 점이 있어 평소에 경서를 잘 익혔기 때문에 이 제목의 뜻을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성상의 이 하교는 실로 문을 멀리하고 질을 숭상하는 뜻에서 나왔으니 신은 더욱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오종주(吾從周)’의 제목에서 능히 질을 취하는 뜻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이성중은 집안 대대로 본래 경학을 받들고 실질을 숭상하였으니, 그도 역시 평소에 학술과 식견이 있기 때문에 제술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그때 과거의 제술에서 비록 문과 질을 겸하여 말한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모두 이성중의 글이 착실한 것만 못하였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조조와 가의는 어떠한가?”
하니, 유건기가 아뢰기를,
“조조는 다만 재능이 가의보다 훨씬 못합니다.”
하였다. 이일제가 아뢰기를,
“조조와 가의는 비교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가의의 〈치안책(治安策)〉과 《신서(新書)》는 충분이 격절(激切)하여 조조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조조는 지모가 뛰어난 사람에 지나지 않고 7국의 일도 모두 선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위상(魏相)이 일찍이 가의와 조조의 장주 중에 행할 만한 것을 취하여 선제에게 올려 채용했기 때문에 후세에 가의와 조조의 말이 능히 선제의 다스림을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의는 과연 학술 하는 선비로서 조조보다 낫다.”
하였다. 유건기가 아뢰기를,
“가생의 재주는 기이하여 천고에 짝이 없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동중서에 비하면 크게 양보할 점이 있습니다. 동자(董子)의 도를 밝히는 정의(正誼)의 학문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도 순정한 유학자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원제 때에는 어찌 그리 사면이 많았는가? 아무 일이 없는데도 내리는 사면까지 있었다.”
하자, 유건기가 아뢰기를,
“사면은 비록 너그럽게 베푸는 은전이지만 또한 소인에게는 요행이 되므로 예로부터 밝은 임금은 반드시 사면을 신중하게 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책을 덮었다. 유건기가 나아와 아뢰기를,
“지평 김상로(金尙魯), 장령 허집(許集) 등이 모두 인혐하여 물러났습니다만, 좌기(坐起)를 파하고 대청(臺廳)에 나아가는 것이 형세상 조금 늦었는데 성상께서 깨우치고 면려해 주시는 하교를 어찌 꼭 혐의로 여깁니까? 서둘러 좌기에 나와서 이미 잘못한 바가 없는데 깨우치고 면려하는 하교를 억지로 혐의할 필요가 없으니 청컨대 지평 김상로와 장령 허집을 모두 출사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자, 유건기가 물러 나갔다. 상이 승지에게 나아오라고 명하니 이일제가 나아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해 하교에 이미 뜻한 바가 있었는데 이번에 이 직책을 제수한 것도 뜻한 바가 있다. 이후로 상세하게 물어볼 날이 있을 것이니 오늘은 날이 매우 무덥고 곧 저물어 가니 우선 약간만 물어보겠다. 몽고(蒙古)는 원나라 종족인가? 어떤 사람은 원나라 종족이 아니라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신은 본래 고루하니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작년에 사명을 받들었을 때 변방의 일을 상세하게 탐문하려고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저들과 우리의 언어가 통하지 않아 분명하게 의사를 소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복명한 뒤에 부사 조상경(趙尙絅)이 실정에 지나치게 아뢴 일로 인하여 그때에는 역시 억지로 대답하였습니다. 대체로 몽고는 바로 원나라의 여족(餘族)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나라 사람은 금(金)나라 사람의 종족인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청나라와 금나라는 뿌리는 같고 파가 다른데, 여진(女眞)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는 생여진(生女眞)인가, 숙여진(熟女眞)인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렇듯이 상세하니 신은 감히 허실(虛實)과 상략(詳略)을 논하지 않을 수 없어 낱낱이 들은 바를 아뢰겠습니다. 중국은 한(漢)과 당(唐) 이전에는 오랑캐를 정벌하는 전쟁이 대부분 서북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옥관(玉關), 소관(蕭關), 운중(雲中), 태원(太原) 등이 매번 군사를 출동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수(隋)와 당 이후로는 마침내 동방 정벌의 전쟁이 있게 되어 바다를 건너 동방을 정벌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바다를 건넌 일은 잘 모르겠다. 안시성(安市城)은 어느 곳에 있었는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봉황성(鳳皇城)을 안시성이라고 칭하는데, 혹은 복주(復州)의 경내에 있었다고 합니다. 요(遼) 지역은 낮고 더러우며 황하의 물이 느려서 행군 길이 통하기 어렵기 때문에 관중(管仲)이 늙은 말을 풀어서 돌아갈 길을 찾은 것이 본디 연(燕)의 경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당 태종(唐太宗)이 요를 지나면서 역시 말꼬리에 섶을 매달아 진창길을 건넜다고 하니 그 험난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다를 건너는 전쟁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여진은 송(宋)나라 말기에 일어났는데 그 소굴은 백두산의 북쪽에 있으니 숙신씨(肅愼氏)의 옛 지역입니다. 평소에 ‘여진족이 1만 명을 채우면 천하를 횡행한다.’라고 일컬으니, 그들이 점점 강성해져서 마침내 중국에 들어가 주인이 되고, 원나라 사람이 금나라를 몰아내게 되어서는 금나라 사람이 다시 옛 지역으로 돌아가서 우리나라 서북 양 경계의 건너편 변방에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무릇 우리나라와 저들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은 압록강과 두만강 하나 사이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백두산 남북을 한계로 하여 한쪽은 우리나라 경계이고 한쪽은 저들 지역입니다. 저 사람들 중 강을 따라 늘어서 사는 자들을 혹은 생여진이라고 하고 혹은 숙여진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북쪽과 서쪽에 있는 자들을 번호 야인(藩胡野人)이라고 부르는데 북쪽은 이탕개(尼湯介)가 가장 강성하고 서쪽은 이만주(李滿住)가 가장 강성했습니다.
대체로 들으니 영고탑(寧古塔)은 육진(六鎭)의 북쪽에 있는데 함경도 한 지역은 고려 때에 저들 지역에 빼앗겼다가 우리 태조대왕이 북방에서 나라를 일으키면서 동국의 영토로 차지하게 되었고, 태종조 이후로는 철령(鐵嶺) 이북을 잃고 때로 차지했다 때로 잃었다 했습니다. 세종조에 이르러서 김종서(金宗瑞)에게 육진을 개척하라고 명하였는데 무산(茂山) 지역에 있는 노토(老土) 부락의 경우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하였으니, 이것이 장백산(長白山) 이남에 일찍이 여러 보(堡)를 설치한 까닭입니다. 서도로 말하자면 강계(江界)와 폐사군(廢四郡)은 이른바 건주위(建州衛)라는 청인(淸人)과의 거리가 300리도 채 안 되게 가깝습니다. 건주위 사람들이 한창 강성하게 되어 모련위(毛憐衛), 좌위(左衛), 우위(右衛) 등의 부락이 빈번히 폐사군에 침입하였기 때문에 세조조에 사군 지역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그 지역이 폐해진 것이 대개 이 때문입니다.
건주위 추장 동산(董山)은 황조(皇朝)의 이성량(李成樑)에게 피살되고 동산의 아들 노랄적(老剌赤)은 몸을 탈출하여 건주로 도망해 갔는데, 차츰 강성해져서 백두산 동서쪽 여러 지역을 모두 차지하고 마침내 개원(開元)하여 심양(瀋陽)으로 들어갔습니다. 심양에서부터 요동을 평정하였는데 건주는 흥경(興京)이라고 부르고 심양은 성경(盛京)이라고 부르고 요동은 동경(東京)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삼경(三京)을 걸터앉아 차지하고 바야흐로 중국으로 뛰쳐 들어가려 하는데 우리나라가 그들의 근거지에 바짝 가까이 있기 때문에 뒤를 돌아보아야 하는 우려를 끊어 버리려고 마침내 정묘년(1627, 인조5)과 병자년(1636)에 국경을 침범한 우환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건주위는 지금 부락이 없는데 영고탑은 역시 별도의 종족이 있는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건주위 사람과 영고탑 사람은 비록 다 같은 여진이나 그 종파는 원래 다릅니다. 영고탑은 금나라 사람의 옛 소굴이고 건주위는 바로 청나라 사람이 기반을 일으킨 곳입니다. 듣건대 건주위의 성궐(城闕)과 부고(府庫)의 웅장함은 성경에 버금간다고 합니다. 우리 동국 사람은, 매번 저 청나라 사람들에게 일이 생기면 장차 우리나라에게 길을 빌려서 영고탑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크게 근심으로 여기는데, 신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청나라의 뿌리는 본디 건주위에 있기 때문에, 들으니 영고탑의 장군을 선창(船廠)으로 옮겼다고 하니 영고탑을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으로 여기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그 지형으로 논하더라도 백두산은 횡으로 천 리에 뻗쳐 있고 그 꼭대기에는 한 줄기 물이 있어 세 갈래로 나뉘어 흐르는데 그 동쪽은 토문(土門)이고 그 서쪽은 압록이고 그 북쪽은 바로 혼동강(混同江)입니다. 북쪽으로 흘러서 송화강(松花江), 흑룡강(黑龍江) 여러 물과 합류하여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갑니다. 오라진(烏喇鎭), 선창 등의 지역은 혼동강의 동서쪽에 있는데, 지금 들으니 오라진과 선창은 강희제(康熙帝)가 새로 설치하여 황폐한 지경을 변화시켜 번화한 곳으로 만들었으며, 또 성경에서 오라까지의 거리는 700리이고 오라에서 영고탑까지의 거리도 700리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가령 청나라 사람은 여진인에게 내몰리게 되거나 몽고인에게 쫓기게 되면 의당 성경과 흥경을 돌아갈 곳으로 여길 것이며, 그렇지 않고 반드시 영고탑으로 가려고 하면 선창과 오라의 길을 따를 수 있으니 어찌 꼭 남의 나라 지경을 넘어서 길을 빌리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고탑 가는 길을 만약 우리나라 지역을 따르면 길이 빠르고 쉽다고 하여 그런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연전에 목극등(穆克登)이 와서 서북 지역을 살폈는데 어떤 사람은 훗날 길을 빌리는 데에 그 뜻이 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지도를 만들려고 지형을 살펴본 것이라고 합니다. 두 설이 어느 것이 옳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목극등이 말을 타고 강물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가 절치(折齒)에 이르러 돌아갔는데, 강 연안 일대는 경로가 험준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내지(內地)를 통과하여 들어가서 혹은 설한령(雪寒嶺)을 따라가거나 혹은 양덕(陽德)과 영흥(永興)의 교차 지역을 따라가게 되면 그 길이 멀 뿐만 아니라 선창의 곧은길에 비해 곱절 이상이 됩니다. 무릇 행군의 법에 어찌 패잔병을 거느리고서 갑자기 이웃 나라의 잘 모르는 길로 들어가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이는 그렇지 않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또 신의 구구한 근심은 여기에 있지 않고 다른 데에 있습니다. 대체로 청나라 사람이 중국을 석권하여 들어갈 때에 서북 두 방면의 여러 종족이 모두 따라서 남쪽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우리나라 변방이 백 년 동안 소요가 없었던 것은 실로 여기에 힘입었을 따름입니다. 지금 들으니 저 나라의 관문 밖의 난민들이 다수가 적당(賊黨)을 결성하여 채집과 사냥을 업으로 삼으며 강변을 왕래하는 자들의 숫자가 매우 많다고 합니다. 이들은 저 사람들이 말하는 이른바 투산적(投山賊)으로, 우리나라의 양계(兩界) 변방 백성들이 모두 이 무리와 형제처럼 의를 맺었습니다. 무릇 우리나라 관방의 허술함과 무기의 낙후함과 병력의 쇠잔함을 저들이 모르는 바가 없어 항상 탐욕을 부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우선 감히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것은 다만 옹정제의 명령이 약간 행해지고 있기 때문일 뿐입니다.
대체로 우리나라 사신이 연경(燕京)으로 들어갈 때에 복장이 깨끗이 빛나고 술과 음식이 끊이지 않으며 방값이나 잡물을 물 쓰듯 사용하기 때문에 동팔참(東八站) 서쪽의 사람들은 모두 우리 동국을 재화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나라로 보고서 한 번 와서 보고자 합니다. 강변의 호상(胡商)들은 백 리 밖의 요동 벌판으로 곡식을 운반하는데 수수 아니면 기장이어서 생계가 초라하지만, 우리나라 국경은 반드시 큰 사발에 밥을 먹는데 배가 불러야 그만두니, 산에다 곡식을 쌓아 둔 것이 가는 곳마다 구름과 같기 때문에 저들이 바라보고서 부러워해 마지않습니다. 만일 중원에 일이 생겨 옹정제의 명령을 변방에서 이행하지 못하게 된다면 옹정제가 동쪽으로 나오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저들 몇십 명의 기병들이 풀을 엮어 떼를 만들어 갑자기 국경을 넘어오게 된다면 여러 진(鎭)이 바람 앞에 와해될 것이니, 지금 초도(椒島)의 일과 같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강계 한 고을로만 말하더라도 강변에서부터 고을의 치소에 이르기까지, 고을의 치소에서 적령(狄嶺)에 이르기까지 숨 한 차례 쉴 정도의 경각에 불과한 일이니, 우리나라 사람 중에 성품이 모질고 난리 피우기를 생각하는 자가 앞잡이가 된다면 원나라 말기에 홍두적(紅頭賊)이 전철의 경계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평안 감사 박사수(朴師洙)가 매번 이 일로 깊이 근심하고 있습니다. 신이 서읍에 있을 때 그가 구획한 것을 보고, 만약 평원의 넓은 들에서 갑자기 천병만마가 깊이 쳐들어오는 상황을 당한다면 구구한 성벽과 해자는 참으로 막아 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랑캐 유격 기병이 마구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것은 비록 크게 성과 해자를 쌓을 필요가 없더라도, 만약 험준한 요충지에 바위를 쌓고 보루를 만들며 목책을 세우고 관문을 설치하고 깃발을 세워 북을 울리며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방어한다면, 적들이 바라보고 반드시 스스로 물러나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적령에서 아래로 창녕(昌寧)과 삭녕(朔寧)에 이르기까지 모두 고개를 한계로 하여 보루를 쌓고 일시에 함께 거행합니다. 대개 옛사람들은 느릅나무를 심어서 저절로 성채를 이루었고 청나라 사람들은 목책을 세워서 역시 경계를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과장되게 큰 것을 좋아하여 물자와 힘을 많이 들여서 산성을 쌓기 좋아하는데, 요충지를 차지하여 적을 막는 계책이 되지 못합니다.
박사수는 항상 생각하기를, 적을 하루 붙들어 두면 나라에 하루의 이익이 있고 적을 열흘 붙들어 두면 나라에 열흘의 이익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반드시 요충지 곳곳에 보루를 설치하였는데, 다만 공공 재물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변방 백성을 동요하지 않게 하는데 힘썼기 때문에 비록 겉보기가 장대한 다른 지방의 성루만 같지는 못하지만 여기에 의거하여 지킨다면 병자년(1636, 인조14) 겨울에 13만 기병이 사흘도 안 되어 사현(沙峴)을 넘어온 것과 같은 우환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강계 한 고을은 신이 재임할 때 경영하였는데 간혹 겨우 부잣집 담장과 같을 뿐이었지만, 들으니 강계 아래의 여러 고을은 강계보다 훨씬 낫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서는 옛날에 관문이 없었는데 지금 비로소 생긴 것인가? 그 관문은 점문(店門)에 비하면 과연 어떠한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점문에 비하면 더 클 뿐만이 아니고 오직 재물을 들이지 않고 백성을 동요시키지 않는 것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크게 배치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곧은길에도 설치하는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적유령(狄踰嶺)에서부터 산마루를 따라 내려와 계반령(鷄盤嶺)과 구계령(九階嶺) 등 여러 고개에 이르기까지는 바로 남북의 일대 관방인데, 일찍이 담장 하나도 쌓은 것이 없기 때문에 먼저 막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의주(義州) 일대의 경우에 있어서는 평탄한 곳으로서 보루를 설치하여 방어하기 어렵기 때문에 별도의 구획이 있습니다. 지난번의 장계 중에 성천(成川)에 진을 설치하여 관방의 삼대 진으로 삼는다고 한 것은 참으로 뜻이 들어 있습니다. 박사수는 우리 동국의 고사에 더없이 익숙한데, 이는 바로 고(故) 상신(相臣) 유성룡(柳成龍)이 일찍이 뜻을 두었으나 이루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이렇게 계품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뢴 말이 옳다. 저들이나 우리나라나 모두 교화 밖의 백성들이 있는데, 만약 서로 결탁하여 난을 일으키면 참으로 우려할 만하다. 다만 청나라 사람은 중원으로 들어갈 때 일찍이 우리나라를 침략해 왔으니 지금 본거지로 돌아가는 날을 당하여 다시 우리나라를 침략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이는 전후의 형세가 같지 않은 듯합니다. 정묘, 병자 연간에는 저들의 병력이 한창 강성한데 다만 우리나라의 논의가 늦는 것이 우려되었기 때문에 거병하여 시위를 하였습니다. 지금 이후로 만약 저들이 쫓기는 일이 있게 되면 반드시 장차 우리나라에 도움을 요청할 것이고, 우리나라가 그 요청을 따르지 않은 뒤에는 바야흐로 전쟁의 사달이 일어날 것인데, 이것은 절박한 우려가 아니고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바로 난민들이 창궐하는 것일 뿐입니다.
아까도 아뢴 바가 있지만, 깊고 험한 곳에 만약 곡식을 비축해 둔다면 훗날 생각지 못한 일에 소용될 수 있습니다. 저들이 만약 동쪽으로 나온다면 곡식을 요구하는 것이 첫 번째 근심입니다. 옛날 진(晉)나라 혜공(惠公)은 진(秦)나라에 곡식을 주지 않아 마침내 한(韓)나라 들판에서 전쟁이 있었는데 《춘추(春秋)》에서는 이를 기롱하였습니다. 만일 저들이 곡식을 구하는데 주지 않으면 그 잘못은 우리에게 있고, 주려고 한다면 곡식이 없는 것이 근심입니다. 산에 있는 곡식을 모두 옮겨 해창(海倉)에 내어 비치하자는 논의는 실로 계책을 세울 줄 모르는 것입니다. 조조(鼂錯)는 곡식을 귀하게 여기는 것을 변방을 방어하는 상책으로 여겼습니다.
지금 몇 년 동안 약간 풍년이 든 뒤라서 강변의 여러 읍에서 반드시 수만 섬의 곡물을 쌓아 두었을 것이니, 바야흐로 먼 일을 경영하는 계책이 됩니다. 박사수는 늘 신과 함께 이 일을 생각하며 근심하고 탄식하였습니다. 하늘은 유행하는 재앙이 있고 이치는 곱하고 나누는 운수가 있습니다. 올해 변방 고을의 농사를 나라에서 유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몽고 지역은 어느 곳에 이르는가? 지난번에 글의 뜻으로 인하여 들으니, 몽고 지역이 매우 넓어서 요동 북쪽과 영고탑 뒤편이 모두 몽고 지역이고 청인 부락보다 많다고 하는데 참으로 그런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들으니 몽고 부락은 과연 청나라보다 많아서, 의무려산(醫巫閭山) 뒤 대사막(大砂漠) 지역이 모두 몽고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황력(皇曆)에서 나열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더라도 그 땅이 넓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 사신 행차에 그 지도를 구입해 들였기 때문에 신도 그것을 보았습니다. 몽고는 청인에 비해서 거칠고 추하여 사람 같지가 않기 때문에 북경(北京)을 왕래할 때 마을에 들어가서 묵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 사람들은 몽고보다 나은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저 사람들은 지금 행동거지와 거처가 중국 사람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몽고 사람은 수레를 묶어 머물고 개를 끌어안고 자며 더럽고 누린내가 나서 사람 같지 않습니다. 북경 동승문(東勝門) 밖에 몽고인이 왕래하기 때문에 신도 한 번 가서 보았는데, 천 명 백 명씩 무리를 지어 참으로 개나 양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와 같기 때문에 특히 사납고 모진 것이다.”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저 청나라 사람들도 역시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몽고는 바로 먀선(乜先)의 자손입니다. 먀선의 아들은 암답(唵答)인데 암답의 아들인 청태길(靑台吉)과 황태길(黃台吉)의 자손들이 이와 같이 번성하여 지금은 48기(旗)가 되었다고 합니다. 청나라 사람의 팔기(八旗)라고 하는 것은 부락을 분별하는 칭호입니다. 그 이름에 황기(黃旗), 남기(藍旗), 홍기(紅旗), 백기(白旗)의 4색이 있고 4색 중에 또 정기(正旗), 양기(鑲旗)가 있어 이것이 팔기입니다. 황제 이하부터 팔기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황제는 정황기(正黃旗)에 들어간다고 하고 각 기의 사람은 기 아래에서 길러지며 가노(家奴)처럼 마음대로 사역됩니다. 청나라 사람이 병력이 강성한 것은 대개 이 때문인데 양병(養兵)의 수요 또한 자못 어렵다고 합니다. 신이 일찍이 듣건대 서쪽을 정벌할 때 매번 관동군(關東軍)을 조발(調發)하는 것을 마음속으로 괴이하게 여겼는데, 연행(燕行) 갔을 때 비로소 상세히 들으니, 팔기 외에 천하의 병력은 모두 녹기군(綠旗軍)인데, 녹기라는 것은 보군(步軍)이기 때문에 형세상 모름지기 관동 팔기군을 조발한다고 합니다. 이는 처음에는 강성하나 나중에는 쇠미하게 되는 징조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 내의 일을 오늘은 모두 다 물어보기 어렵다. 서달(西獺)의 일은 대략 물어보았는데, 연행 갔을 때 혹시 응대한 일이 있는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심양에 임본유(林本裕)라는 자가 있는데 말하기를 ‘서달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중국은 재물이 궁하여 윤대(輪臺)의 후회가 있을까 걱정일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내부의 화가 있을까 걱정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달은 어떤 종족 부류인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강족(羌族)에 속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요동에는 남은 종족이 없는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요동에서 없어진 뒤에 서요(西遼), 야율(耶律), 대석(大石) 등의 부류가 있게 되었는데 그 후에는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틀림없이 몽고 부락에 편입되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다른 일은 이 다음에 물을 것이다.”
하였다. 신하들이 마침내 물러 나갔다.
[주-D001] 김성탁(金聖鐸)이 내려간 :
김성탁은 약 5개월 전인 이해 1월 6일에 경상도 단성 현감(丹城縣監)에 임명되었다.
[주-D002] 궁중에서 …… 된다 :
후한(後漢) 숙종(肅宗) 때 마료(馬廖)가 태후(太后)에게 사치를 경계한 말이다. 궁중에서 사치를 일삼으면 백성들이 그 유행을 따르다가 정도가 더욱 심해짐을 뜻한다. 《後漢書 馬寥列傳》
[주-D003] 덕을 …… 않으려는 :
《국어(國語)》 〈주어 상(周語上)〉에 “목왕이 장차 견융을 정벌하려고 하니 채공(蔡公) 모보(謀父)가 간언하기를 ‘안 됩니다. 선왕께서는 덕을 드러냈을 뿐이지 무력을 과시하지는 않았습니다. 병력은 신중하게 보유하고 있다가 적절한 때에 출동시키는 것으로, 적당한 시기에 출동하면 위엄이 있지만 과시하다 보면 장난거리가 되는 것이니, 장난으로 쓰면 위력이 없습니다.’”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주-D004] 제 …… 것입니다 :
제 환공 35년(기원전 651) 여름, 환공이 규구에서 제후들과 회맹하자 주 양왕(周襄王)이 재공(宰孔)을 보내 제육(祭肉)과 동궁(彤弓), 동시(彤矢), 수레를 하사하면서 하사품을 받을 때 절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환공이 처음에는 절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관중(管仲)의 반대가 있자 그제야 절하고 받았다. 그해 가을 규구에서 다시 제후들과 회맹하였는데, 환공에게 교만한 기색이 나타나자 제후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다. 《史記 齊太公世家》 《春秋左氏傳 僖公 9年》
[주-D005] 낙수(洛水)의 …… 봉황 :
낙수의 거북이는 우왕(禹王) 때에 낙수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1부터 9까지의 점이 있어 이것이 《서경》의 홍범구주(洪範九疇)의 바탕이 된 것을 말하고, 기산의 봉황은 성군인 주(周)나라 문왕(文王) 때 봉황이 기산 아래에 날아 와 울어서 태평성대의 조짐을 알렸다는 고사를 말한다. 《國語 周語上》
[주-D006] 오성(五星)이 모였다 :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오성이 문운(文運)을 관장하는 별인 규성(奎星)에 모인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문운이 크게 번창할 것을 예시한다고 한다. 《太平御覽 卷384》
[주-D007] 현인을 …… 같다 :
곽공의 ‘곽(郭)’은 ‘괵(虢)’과 통용된다. 괵은 주 문왕(周文王)의 아우인 괵중(虢仲)의 봉지(封地)로, 노 희공(魯僖公) 5년(기원전 655)에 진(晉)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제 환공(齊桓公)이 옛 곽 땅에 노닐면서 곽공이 나라를 망하게 한 이유를 묻자, 부로들이 “선인을 좋아하면서도 제대로 임용하지 않았고 악인을 미워하면서도 제대로 제거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망하게 된 이유입니다.”라고 말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春秋左氏傳 僖公 5年》 《新序 雜事4》
[주-D008] 석현(石顯)이 …… 빈번하였는가 :
석현은 한나라 원제(元帝) 때 정권을 농단한 환관으로, 술수를 써서 정적들을 제거하였으며 특히 원제의 사부였던 명사 소망지(蕭望之)를 자결하게 하였는데, 원제는 상세하게 조사하여 논의하지 않은 것만 책망하자 석현 등 일당은 관을 벗고 사죄하였다. 《漢書 蕭望之傳》
[주-D009] 경방(京房) :
금문 역학(今文易學)의 대가로, 경씨학(京氏學)의 창시자이다. 한 원제(漢元帝)의 조정에서 낭중으로 근무하다가, 권신인 환관 석현의 질시를 받아 위군 태수(魏郡太守)로 쫓겨 간 뒤에, 다시 석현의 무고로 인해 기시(棄市)되었다. 《漢書 京房傳》
[주-D010] 고공과리(考功課吏)의 법 :
《한서(漢書)》의 주가(注家)인 진작(晉灼)의 설에 의하면, 영(令)ㆍ승(丞)ㆍ위(尉)가 한 현(縣)을 다스리되 교화를 숭상하고 범법자가 없을 경우는 모두 승진시키고, 도적이 있어 3일 안에 발각하지 못할 경우는 위의 책임이므로 영이 그를 파면하고 허물을 지는 식으로 된 법이라고 한다.
[주-D011] 가의(賈誼)와 조조(鼂錯) :
조조는 한(漢)나라 경제(景帝) 때의 강직한 신하로, 제후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천자의 권위를 강화시켜 사직을 편안케 하고자 법령 30장(章)을 개정했다가 제후들의 반발과 간신배의 참소로 조복(朝服)을 입고서 동시(東市)에서 처형되었다. 일찍이 복생(伏生)에게서 《상서(尙書)》를 수학(受學)하였고, 특히 변설(辯舌)이 뛰어났고 좋은 계책을 건의한 것이 많아서 당시에 지낭(智囊)이라는 호칭이 있기까지 했다. 가의는 불과 스무 살의 어린 나이로 문제(文帝)의 깊은 신임을 얻어 태중대부(太中大夫)로 발탁되어 복색, 제도, 관명 등의 대대적인 개혁을 주장하다가 당시 대신이었던 주발(周勃), 관영(灌嬰) 등의 참소를 입었다. 끝내 문제의 신임을 잃고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어 서른셋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史記 鼂錯列傳》 《漢書 賈誼傳》
[주-D012] 욱욱문재, 오종주(郁郁文哉, 吾從周) :
《논어》 〈팔일(八佾)〉에 나오는 말로, 원문은 “주나라는 하(夏), 은(殷) 2대의 문물에서 보았으니 찬란하다 그 문이여.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 吾從周.]”라고 하였다.
[주-D013] 위상(魏相)이 …… 때문에 :
위상은 한나라 선제 때의 승상으로, 현신(賢臣)인 가의, 조조, 동중서가 예전에 건의했던 내용을 다시 주청하여 윤허를 받고 시행했다. 《漢書 魏相丙吉傳》
[주-D014] 오랑캐를 정벌하는 전쟁이 :
원문은 ‘征胡之之役’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之’를 빼고 번역하였다.
[주-D015] 관중(管仲)이 …… 것 :
춘추 시대 제(齊)나라의 관중과 습붕(隰朋)이 일찍이 환공(桓公)을 수행하여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하였는데, 봄에 길을 떠났다가 겨울에 돌아오면서 길을 잃었다. 이에 관중이 “늙은 말의 지혜를 쓸 만하다.” 하고 늙은 말을 풀어 놓아 그 뒤를 따라가서 마침내 길을 찾게 된 일을 가리킨다. 《韓非子 說林》
[주-D016] 이탕개(尼湯介) :
선조 초에 조선에 귀화한 여진인으로, 육진(六鎭) 지역에 출입하며 조정으로부터 후대를 받아 온 자인데, 1583년(선조16)에 경원(慶源)에 사는 여진인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경원 부사 김수(金璲)가 이들에게 패함에 따라 여진인들이 경원부의 모든 진보(鎭堡)를 점령하여 기세를 떨쳤으나 온성 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과 첨사 신상절(申尙節) 등에 의해 평정되었다. 《宣祖實錄 16年 2月 13日, 34年 2月 24日, 38年 5月 26日》 《宣祖修正實錄 16年 5月 1日》
[주-D017] 이만주(李滿住) :
우리나라 북쪽 변방을 자주 약탈하던 건주위 야인의 추장(酋長)이다. 1467년(세조13)에 명나라는 건주위의 야인을 토벌하고자 우리나라에 협격(挾擊)을 요청하여 왔다. 이때 세조는 강순(康純), 어유소(魚有沼) 등에게 출정을 명하였다. 강순 등은 군사 1만을 거느리고 가서 건주위의 여러 성을 치고 이만주 부자(父子)를 죽이고 돌아왔다.
[주-D018] 강계(江界)와 폐사군(廢四郡) :
사군은 평안도 강계부에서 동북쪽에 있는 무창(茂昌), 여연(閭延), 우예(虞芮), 자성(慈城) 등 4개 고을을 말한다. 《正祖實錄 2年 1月 13日》 이 지역은 여진족의 지속적인 침입으로 1455년(단종3)에 여연ㆍ무창ㆍ우예 3개 군이, 1459년(세조5)에는 자성이 폐지되고 주민을 모두 강계로 옮겼다. 이후 이 4개 고을은 폐사군으로 지칭되었다.
[주-D019] 선창(船廠) :
심양과 영고탑 사이에 있는 지명으로, 북위 42도 지점이다. 《夢經堂日史 第1篇 馬訾軔征紀》
[주-D020] 연전에 …… 살폈는데 :
목극등(穆克登)은 청나라의 오라 총관(烏喇摠管)이다. 청나라가 1712년(숙종38)에 국경을 정하자는 연락을 하고 목극등을 파견했으므로 조선에서는 참판 권상유(權尙游)를 접반사로 보내었으나, 청의 사절이 함경도로 입국함에 따라 다시 참판 박권(朴權)을 접반사로 맞이하게 하였다. 이때 조선측의 접반사는 산정에 오르지도 못했는데, 목극등이 조선 측의 접반사 군관 이의복(李義復), 감사 군관 조태상(趙台相), 통관(通官) 김응헌(金應瀗) 등만 거느리고 산정에 올라가 일방적으로 정계비를 세웠다. 그 지점은 백두산 정상이 아니라 남동방 4km, 해발 2200m 지점이었다.
[주-D021] 적령(狄嶺) :
평안북도 희천군 동창면과 강계군 화강면 사이에 있는 적유령(狄踰嶺)을 말한다.
[주-D022] 먀선(乜先) :
몽고를 통일한 오이라트(瓦剌)의 족장이다. 명 영종(明英宗) 정통(正統) 14년(1449)에 대거 명나라를 침입하여 북경을 함락하였으나 영종의 아들 경종(景宗)에게 패배하였다. 《明史 朝鮮傳》
[주-D023] 윤대(輪臺)의 후회 :
무리해서 오랑캐를 정벌한 것을 후회함을 말한다. 윤대는 중국 신강성 서남쪽에 있는 지명으로, 한나라 군사가 정벌차 그곳까지 갔으나 무제가 병으로 죽을 때 윤대에 군사 보낸 것을 후회하는 조서를 내렸다. 《漢書 武帝本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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