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소가 압록강에서 시작하여 동해(東海)에 이르는 수천 리를 뻗어 돌로 성을 쌓았는데, 높이가 25척이요, 넓이도 그와 같았으며, 무릇 끝에서 끝으로 가려면 석 달이나 걸렸습니다.

2023. 4. 14. 15:35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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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22 경신(1440) 2 18(신묘)

22-02-18[02] 우의정 신개가 함길ㆍ평안 양도의 부방, 입보 등의 폐단과 비변책에 대해 상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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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우의정 신개(申槪)가 상언(上言)하기를,

“신이 그윽이 생각하오니, 함길ㆍ평안 양도에 부방(赴防)하는 폐단이란 진실로 큰 것이오나, 입보(入保)하는 폐단은 더욱 크옵니다. 부방하는 폐단은 행역(行役)의 수고로움이 양식의 준비에 그치고 마필이 폐사(斃死)할 따름이오나, 입보(入保)하는 폐단으로 말하면 더욱 큰 것이 다섯 가지나 있사오니, 대체로 사람의 생활은 사는 집이 완고(完固)하고 쓰는 기구가 고루 준비되어야 생업에 안심할 것이온데, 입보하게 되어 7, 8개월이나 지나서 돌아오면, 〈그 집이〉 혹 길가는 나그네의 불때는 소용으로, 혹 들불로 연소되어 풍우(風雨)마저 가릴 수 없게 된데다가, 일용 기물(器物)도 모두 다 타서 없어졌으므로 부득이 다시 말하기를 해마다 마지 아니함이 그 첫째이요, 가을걷이를 할 무렵이면 입보(入保)하라는 명령이 엄급(嚴急)하므로, 벼[禾]가 채 익지도 않았는데도 곧 타작을 시행하여 땅을 파고 이를 묻게 되니, 혹은 썩고 혹은 도적맞는데다, 또한 혹 다 거두어 간직하지 못하고 내버려두면, 행려(行旅)하는 말[馬]이나 산야(山野)의 짐승이 다 먹어버립니다. 또 입보하게 되면 몹시 군색한데다 많은 쌀 양식을 가지지 못했으므로, 성에 들어온 뒤로는 성에서 나가기가 어려워서 미음이나 죽으로 겨울을 지나오니 겨우 목숨만이 붙어 있을 뿐, 또한 길쌈하지 못하여 입을 의복이 없어서 대개가 발가숭이가 됨이 그 둘째이며, 혹 농사철을 당하여 고변(告變)이 있게 되면, 허실을 불문하고 독촉해서 입보하게 되니, 화곡(禾穀)ㆍ과소(瓜蔬)의 경작에 때를 잃게 되어 다시는 가을걷이를 할 희망이 없는 것이 그 세째이요, 부방하는 군사와 원거(元居)하는 백성이 모두 한 성안에 처소를 달리 할 수 없으므로 서로 문란하게 되는 것이 그 네째이며, 성보(城堡) 근처에는 나무는 많아도 풀이 적어서 우마가 굶주리는데다가, 또 마굿간이 없어서 설상(雪霜)이 내려도 노숙하게 되므로, 봄이 되면 살아 있는 것은 적고 죽은 것이 많게 되어 경우(耕牛)가 결핍되기를 해마다 그치지 아니하니, 그 다섯째이옵니다. 그러나 이 다섯가지 폐단이 있고서 백성이 어찌 도산(逃散)할 계교를 갖지 않겠습니까. 야적(野賊)이 멸망되지 않는 한 그 폐단이 없어지지 아니하옵고, 그 폐단이 없어지지 아니하는 한, 비록 강존자(强存者)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분력하여 도적을 막고 그 상관을 위하여 죽겠다는 뜻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함길도만은 땅이 비옥하고 넓은데다 또한 어염(魚鹽)의 이익이 있기 때문에, 위무하여 안접하게 하기를 여러 해 하면 안존(安存)할 리도 있겠사오나, 평안도 북쪽의 백성으로 말하면, 그전에 안업(安業)한 자라는 것이 오로지 강북(江北)의 전지가 비옥하였으되 세(稅)가 없었으므로, 이를 달게 여겨 생업을 즐겨 오면서 영세(永世)로 토착하였사오나, 오늘날은 그것을 경작하여 생활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통곡할 만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삼가 《고려사(高麗史)》를 상고하오니, 덕종(德宗)이 평장(平章)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처음으로 북경(北境)의 관방(關防)을 설치하게 하였는데, 서해(西海) 바닷가의 예전 국내성(國內城) 지경의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ㆍ흥화(興化)ㆍ정주(靜州)ㆍ영해(寧海)ㆍ영삭(寧朔)ㆍ운주(雲州)ㆍ안수(安水)ㆍ청새(靑塞)ㆍ평노(平虜)ㆍ영원(寧遠)ㆍ정융(定戎)ㆍ삭주(朔州) 등 13성을 거쳐 동해(東海)에 이르는 수천 리를 뻗어 돌로 성을 쌓았는데, 높이가 25척이요, 넓이도 그와 같았으며, 무릇 끝에서 끝으로 가려면 석 달이나 걸렸습니다. 그로부터 동서의 오랑캐 도적들이 감히 변경을 엿보지 못하였고, 문종(文宗) 때에 이르러서는 다투어가며 와서 변방에서 항복하고 주(州)나 현(縣)을 설치하기를 청원하여, 국적에 붙여 민호로 편입된 자가 1만 명에 가까웠사온데, 오늘날은 중국에서도 산해위(山海衛)로부터 요동(遼東)에 이르는 수천 리의 땅에다 참호를 파고 보(堡)를 쌓으며 나무를 심어서 북쪽 오랑캐[北胡]가 감히 엿볼 마음을 가지지 못하게 하였으니, 입보하는 소요가 없어져 여염집이 땅에 덮였고 소와 양이 들에 널려 있사오니, 중국과 고려에서 오랑캐를 방비하는 정책에 따르시고, 의주(義州)로부터 경원(慶源)에 이르는 사이에다 장성(長城)을 쌓는다면 만세의 이익이 될 것입니다. 만일 시기가 좋지 아니하여 거사하기 어려움을 염려한다면, 우선 적(敵)이 침입하는 요해처(要害處)를 살펴서 그 지형에 따라 혹은 참호를 파게 한다든가, 혹은 나무를 심게 한다든가 혹은 석축을 쌓게 하여, 그 원근을 요량해서 연대(煙臺)를 설치하고 수졸(戍卒)을 배치하게 하면, 야적이 반드시 돌입하지 못하여 입보하는 폐해가 거의 완화될 것이오니, 입보하는 폐단을 완화하는 것이 될 뿐 아니라, 남도에서 부방(赴防)하는 폐해도 점차로 줄어들 것입니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장맛비에 강물이 갑자기 불어나면, 참호가 반드시 메워져 막히고 목석(木石)이 물에 가라 앉아서 형세가 장차 행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고 하오나, 그것은 심히 그렇지 아니합니다. 강가의 물이 불어서 넘치는 곳은 할 수 없다고 하겠지만, 그 언덕이 높아서 미치지 않는 곳은 살펴서 혹 참호를, 혹은 나무를, 혹은 돌을 지형에 따라 시설하게 하되, 지형이 비록 구부러지고 곧지 않더라도 진실로 비고 빠진 곳이 없이 적이 침입할 수 없게 한다면 옳을 것입니다. 고려의 3월 노정(路程)의 성터나 중국의 수천 리에 걸쳐 있는 갱참(坑塹)도 반드시 도로의 구부러지고 곧은 곳에 있을 것이오니, 오직 성터를 살피는 자는 모름지기 지략과 견식이 있는 자라야 볼 수 있을 것이옵니다. 또 이 역사에는 반드시 크게 동원할 필요가 없이, 단지 원거(元居)하는 백성과 부방하는 군사를 작량(酌量)하여 나누어 맡기더라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백성을 수고롭게 함을 말한다면, 예전에도 대적(對敵)할 때에는 반드시 전쟁한 땅을 점거하고자 하여 반드시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싸우고 또 쌓았사오니, 그 백성을 수고롭게 함이 이보다 심할 수는 없었사오나, 기필코 실행한 이유는 얻는 것이 크고 손해되는 것은 백성과 군사의 한때의 수고로움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관(關)을 설치하는 폐단은 전쟁하면서 성을 쌓는 수고로움에 비할 수 없되, 그 이익인즉 부방하고 입보하는 괴로움을 덜게 하면서도 백성이 생업을 즐겨 평화로이 살 수 있어 영영 도산(逃散)할 계책이 없어질 것이오니, 잠시 수고하고 길이 편안함이 이 거조와 같음이 없는 것이옵니다. 옛사람은 장강(長江)이 견고한 것이라 여기어 건국(建國)한 자가 많사오나, 장강의 험한 것을 가졌으되 적은 도적을 근심하지 않음을 듣지 못한 바이오니, 이것은 방책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이 양도(兩道)에 입보하는 폐단을 듣고 이 방책을 건의하고자 한 지 오래였사오나, 그러나 북쪽에서 오는 사람이거나 익숙히 변방의 일을 아는 자를 볼 때마다 곧 그 폐단을 묻게 되면, 말은 다르지 아니하되, 관(關)을 설치하여야 한다는 데에 이르러서는 옳다는 자는 적고 옳지 않다는 자가 많았으며, 일찍이 양계(兩界)의 장수로 있었다가 대신이 된 자도 또한 불가하다 하오므로, 신도 또한 의심하여 오랫동안 가슴속에 품어 두고 감히 계달(啓達)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반복하여 생각하와도, 양도(兩道)의 큰 폐단을 덜고자 한다면 다른 기이한 방책이 있음을 보지 못하겠사오니, 그 옳지 않다고 말하는 자들은 고식지계(姑息之計)이온지 폐단의 경중(輕重)을 알지 못하여서이온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중국의 장성(長城)이 비록 만리(萬里)라고 하오나, 산해위의 관(關)을 보오면 사람이 통행할 수 있는 곳에만 쌓은 데에 그쳤으니, 반드시 도로의 평탄하고 험한 것을 논하지 아니하고 모두 쌓은 것입니다. 이제 의주로부터 경원에 이르기까지 그 도로의 평탄하고 험한 형세는 비록 멀리서 요량하기 어렵사오나, 강안(江岸)에는 절벽이 서 있고 준령(峻嶺)에는 깊고 험한 계곡이 있어, 오르지도 못하고 건너가지도 못할 곳이 모두 다이며, 통하기 쉬운 평탄한 길이란 1백에 하나쯤인 것이오나, 만약에 관(關)을 설치하게 한다면 외구(外寇)의 침략을 막는 데 그칠 뿐이 아니옵고, 국내에서 의심을 받는 자들이나 두 가지 마음을 품고서 반역하고자 하는 자들도 방자스럽게 행동하지 못할 것이오니, 그 이익이 어찌 원대(遠大)하지 않겠나이까. 이것으로 보오면, 비록 많이 민력을 써서 장성을 쌓는다 하더라도 불가함이 없을 것입니다. 관방(關防)이 이미 굳사오면, 강변의 여러 성을 쌓는 일도 반드시 급급하게 할 것은 아닙니다. 신은 사람들에게 들은 것이 많이 다르고 같은 것이 있었사오나, 어리석고 못난 소견을 감히 상달하지 않을 수 없사오므로 감히 어리석은 말을 올리오니, 엎드려 상재(上裁)가 있으시기 바라옵니다.”

하였다.

 [-D001] 과소(瓜蔬) : 

채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