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량한 백룡퇴(白龍堆) 사막의 북풍이 요란하게 소리를 내면서 모래를 날리고 쑥대를 부러뜨리며 날아오는 북풍이 해와 달을 가린다

2023. 4. 14. 16:39백두산

부얼진현(위구르어بۇرچىن ناھىيىسى 부르친 현중국어布尔津县병음Bù'ěrjīn Xiàn)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이리 카자흐 자치주 아러타이 지구의 현급 행정구역이다. 넓이는 10369km2이고, 인구는 71,561명(2018년)이다.

어우집 후집 3 / ()

동지사로 연경에 가는 이이립 상신  전송하는 〔送李而立 尙信 赴賀冬至于燕京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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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아 해외에 나라를 세우고 맹자의 이른바 천리를 두려워한다.”는 말을 체득하여 정성을 다해 대국을 섬긴 지도 2백 년이 지났다. 황상(皇上)의 탄일(誕日)을 성절(聖節)이라 하고 황태자(皇太子)의 탄일을 천추절(千秋節)이라 하여 축하하는 사절을 각기 성절사(聖節使)와 천추사(千秋使)로 호칭하여 파견하였고 동지(冬至)에 하례할 때도 마찬가지로 그 사절을 동지사(冬至使)라 불렀다. 또 별도로 사은사(謝恩使)와 진위사(陳慰使) 등의 사절을 두고 나라에 주청할 일이 있을 때는 역시 사신을 파견하되, 반드시 과하마(果下馬)와 호랑이ㆍ표범의 가죽 및 명주와 모시, 부채 등의 물건을 준비하여 예물로 충당하고 공물을 바치는 것을 일반적인 상례로 삼았다.

사신을 선발할 때는 반드시 금관자(金貫子) 옥관자(玉貫子)를 단 관원 중에 저명한 자를 골라 상사(上使)와 부사(副使)로 삼고, 이어서 낭관 중에 평소에 명망을 쌓고 규찰의 직임을 감당할 만한 자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는다. 이조에서는 재주 있는 자를 뽑고, 호조에서는 사행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며, 예조에서는 표문(表文)과 자문(咨文), 의물(儀物)을 준비하고, 태복시(太僕寺)는 말을 관리하며, 공조와 선공감에서는 여러 집기들을 챙긴다. 만일 이 중 한 가지 일이라도 혹여 지체되거나 잘못되면, 엄격한 국법을 적용하는 것이 정해진 법이다.

우리나라가 상국을 섬긴 충(忠)과 성(誠)은 만국 중에 비슷한 나라가 없다. 물자를 준비하여 보내는 규정에 따르면, 반드시 겨울부터 준비하여 여름에 떠나고 봄부터 행장을 꾸려 가을에 출발하니, 응수하고 체류하는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나라가 흥성할 때는 팔도의 크고 작은 읍을 막론하고 기일에 앞서 사신의 집으로 물자를 보낸다. 희귀한 토산물이 마루를 가득 채우고 수레바퀴의 굴대를 부러뜨리며 여유가 있으면 자제들의 비용으로 쓴다. 그러나 사명(使命)에 응하는 자의 명망에 높고 낮음이 있기에 열읍(列邑)에서 노잣돈을 제공할 때에 당시의 향배를 살펴서 그 물건들을 등급에 따라 후하고 박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병란 후에는 물자를 조달할 능력도 넉넉지 않아 사신들은 아무런 노잣돈도 없이 길을 떠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왕명을 받들어 전대(專對)하는 일로 말하자면 상하간의 뜻이 통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없으니, 이는 오로지 역관에게 의지한다. 그러나 백금(白金 은(銀))을 목숨같이 중하게 여기고 장사에 노련한 자들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고 조종하여 그저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한다. 게다가 그들은 염치까지 없으니 천하 사람 중에 이익을 독차지하고 함부로 요구하는 것을 병통으로 여기지 않는 자가 없다. 1() 쌓여 1()에 달하는 일이 나날이 더욱 심해지니, 민간의 어린 노비조차 또한 조선을 작은 나라라며 낮추어 본다. 문을 두드리며 마실 것을 구걸하는 것을 보면 오히려 손을 벌려 백금을 요구하며 면피(面皮)라 불리는 것을 강요한다. 그 사행길이 험난하여 공금을 다 털어도 절반도 댈 수 없으며 사재(私財) 또한 넉넉지 못하니, 자기 도의 입장만 사사로이 주장하는 팔도의 요구를 결단코 들어줄 수는 없다. 마땅히 조정에서 넉넉하게 줄 것과 아낄 것을 분간하여 팔도에서 그 비용을 적절하게 분담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 길이의 멀기로 말하자면, 한양에서 북경까지는 대략 3천여 리나 된다. 여름 장마와 겨울 추위는 그 고통이 둘 다 극심하다. 사람들은 “성절사와 천추사 두 사행의 고통은 동지사보다 심하다.”라고 한다. 요동 벌판에 물이 범람하면 도랑이나 하천의 물 때문에 사방 천 리에 땅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배를 저어 그 험한 곳을 조금씩 건너가며, 하루 세 끼를 나귀 위에서 먹기도 한다. 수레바퀴가 진흙에 빠지기라도 하면 가던 사람이 손으로 나귀 다리를 뽑아내야 하고, 수레의 짐을 지거나 이고 들판을 다 지나가도록 끌고 밀어야 한다. 심한 경우에는 공물로 가져가는 말이 진흙에 빠져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할 때도 있는데, 산 채로 낙인이 찍혀 있는 꼬리와 갈기를 잘라서 가기도 하니, 이는 예부(禮部)의 문책을 면하기 위해서이다.

여름 장마도 고통스럽지만 겨울 추위는 더욱 심하다. 저 동지사의 행차가 고평(高平) 반산(盤山) 사이에 이르면, 눈 닿는 곳에는 산 하나 보이지 않고 까마득히 천 리 들판뿐이다. 황량한 백룡퇴(白龍堆) 사막의 북풍이 요란하게 소리를 내면서 모래를 날리고 쑥대를 부러뜨리며 날아오는 북풍이 해와 달을 가린다요동 동팔참(東八站)의 지세는 극히 높고 탁 트이고 또 북쪽에 가까우니, 산골짝을 빙 둘러 갈 때면 그 추위가 혹독하여 7, 8월의 여름에도 갖옷을 껴입게 한다. 하물며 겨울의 혹한기에는 어떠하겠는가. 가는 사람은 양이나 담비, 승냥이, 여우의 가죽으로 몸을 감싸고 얼굴을 가리며, 솜을 몇 겹으로 해서 두 손을 둘둘 만다. 하지만 수염에 고드름이 맺혀 숨을 쉴 때마다 더욱 얼어붙어 뼛속까지 꽁꽁 얼어붙으니, 그 천신만고는 머리까지 하얗게 세게 할 정도이다.

비록 그렇지만 남아가 세상에 태어나 사방(四方)을 주유할 뜻을 품고서,  구석에 매달린 뒤웅박처럼 매어있기를 원치 않는다면, 중원으로의 여행은 비록 두세 번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번쯤 가보는 것은 참으로 그만둘 수 없다. 왜 그러한가? 말이나 치료하는 수의사의 허름한 집에서 명아주와 비름 같은 것이나 먹다가, 왕공(王公)의 진수성찬을 보게 되면 놀라고 두려워 젓가락을 떨어뜨리는 것이 이치상 당연하다. 이제 먼 변방에 움츠려 지내면서 거의 반평생 바로 눈앞에 있는 것만 보다가, 하루아침에 길을 따라 유람하게 되면, 길을 갈수록 더욱 신기하고 보는 것마다 면목이 모두 새롭다.

태종(唐太宗) 요동을 머물렀던 주필산(駐蹕山)울지경덕(尉遲敬德) 정벌 나가 세운 백탑사(白塔寺)정영위(丁令威) 학이 되어 날아와 앉았던 화표주(華表柱)가 아직도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백이와 숙제의 사당인 청절사(淸節祠)가 있고, 안고경(顔杲卿) 충신으로 절개를 드날렸던 어양(漁陽) 땅이 있으며, 문단의 태산북두인 한유는 여기 창려(昌黎) 에서 일어났다. 이광(李廣) 사호석(射虎石), 진 시황이 쌓은 만리장성,  소왕(燕昭王) 유능한 선비를 예로 맞이한 황금대(黃金臺)가 있다. 형가(荊軻) 북경 저자에서 술을 맘껏 마시고 역수(易水) 가에서 비장한 노래를 불렀고, 문천상(文天祥) 북경의 시시(柴市)에서 의리를 지켜 죽었으며, 주나라 선왕(宣王) 새긴 석고(石鼓) 태학관(太學館) 있다.

요동성의 망경루(望京樓)에 오르면 중화와 오랑캐의 경계가 활짝 펼쳐지고, 산해관의 망해정(望海亭)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면 천하의 모든 물들을 물이라 하기 어려워지며, 북경의 천단(天壇)과 지단(地壇)에 오르면 중원 문물의 융성함을 살필 수 있고, 북경의 장안문(長安門)을 통해 오봉루(五鳳樓)를 거쳐 황극전(皇極殿)으로 나아가 조회하면 예악과 문물과 사업의 성대함을 여기에서 마음껏 볼 수 있다. 높은 성곽과 풍요로운 마을, 성대한 시장과 진귀한 물건은 마음을 놀라게 하고 눈을 휘둥그레 뜨게 하기에 족하니, 이 모든 것을 또 어찌 이루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만력 33년(1605)에 조정에서는 이후(李侯) 상신(尙信)을 동지사에 임명하여 표문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가도록 명하였다. 나는 이후와 오래된 친구이다. 예전에 내가 관례(冠禮)를 마치자 책 상자를 짊어지고 대자사(大慈寺 경기 고양 삼각산 소재)로 갔는데, 이때에 이씨 삼형제가 찾아와 나와 침상을 나란히 하고 지냈다. 첫째는 나와 동갑이었고 둘째는 나보다 적었으며 가장 어린 이가 이후였는데 13살이었다. 몸가짐이 신중하고 말수가 적어 원대한 인물이 될 것이라 여겼는데, 내 나이가 몇 살 많다고 공경히 어른으로 대접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명성이 자자해져 끝내 나와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하였다.

아! 첫째는 나와 동갑인데 이미 세상을 떠났고, 한 살 어린 둘째는 이미 재상이 되었으며, 당시의 13세였던 그대는 장년을 지나 노년에 가까워졌으며 품계도 먼저 올랐다.  사이의 세월을 손꼽아보니 네다섯 번은 굽혔다 펴야 한다. 나는 늙었지만 아직 죽지 않았으니 또한 다행이다. 나는 비록 노둔하나 이 세상을 산 지가 오래되었고 사행을 다녀온 것이 번이다.

이후가 사행을 떠나는 일로 나의 말을 구하니 나는 이후의 바람에 이러한 말로 답하노라. 대국을 섬기는 성상을 잊지 말고, 당세의 명망을 실추시키지 말며, 사신의 책무를 다하고, 역관이 농간을 부리지 못하게 하며, 남아가 평소 품고 있던 장대한 뜻을 이루고, 팔도에서 주는 노자가 부족한 것을 마음에 두지 말며, 추운 사행 길에 건강을 잘 보살펴 산 넘고 물 건널 적에 조심하고, 늙은 친구가 한 말을 기억하시오. 잘 다녀오시게나.

[-D001] 동지사로 ……  : 

이 글은 1605년(선조38) 동지사 겸 주청사(冬至使兼奏請使)로 명나라에 가는 이상신(李尙信, 1564~1610)을 전송하는 글이다. 이때 다년간 문제가 되었던 염초(焰硝 화약)의 수입을 허락받았다. 이상신의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자는 이립(而立), 호는 청은(淸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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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록 2 / 유상수필(遊賞隨筆【상(上)】

의주(義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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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령을 넘어서 십 리를 못 미친 곳에 이른바 ‘구성문(舊城門)’이라는 것이 있으니 홍예문(虹蜺門)만 남아 있을 뿐 성터〔城址〕는 없다. 내훈문(來薰門)으로 들어가니, 문에 중루(重樓)가 있는데 위층에는 큰 글씨로 “해동제일관(海東第一關)”이라고 쓰여 있고 아래층에는 “용만남루(龍彎南樓)”라고 쓰여 있다. 그 마을의 번성함과 상업의 모여드는 규모가 팔도〔八路〕의 으뜸이니 진실로 서변(西邊)의 거대한 고을〔雄府〕이다. 누군가는 말하길, “마땅히 영원(寧遠), 광녕(廣寧)과 비교해서 서로 겨룰 수 있는데 그 화려하면서도 정돈된 것은 동팔참(東八站)의 작은 가게에도 못 미친다.”라고 하였다. 의주는 본디 고려의 용만현(龍灣縣)이었는데 일찍이 거란에게 망해서 거란이 궁구문(弓口門)을 설치하고 ‘포주(抱州)’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은 ‘보주(保州)’, ‘정주(靜州)’, ‘파주(把州)’, ‘위원진(威遠鎭)’이라고도 하였으니 모두 그 땅이다. ○내선각(來宣閣)은 곧 상사께서 묵으신 곳이다. 마을 관아〔府衙〕는 ‘진변헌(鎭邊軒)’이라고 하는데 대신(大臣)과 도신(道臣 관찰사)이 아니면 칙례(則例)상 숙소로 삼지 못한다고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