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백두산(白頭山) 자락이니, 백두산 정상과 겨우 100리라 한다

2023. 3. 18. 13:53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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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천집 28 / ()

북관 십경도기(北關十景圖記병서(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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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함흥에서 이미 십경(十景)을 얻었고, 도내(道內) 여러 고을에 있는 산과 바다와 누대의 경치가 뛰어난 곳을 또 열 군데 얻었다. 이 밖에 경흥(慶興)의 백악(白岳), 길주(吉州)의 만불(萬佛), 영흥(永興)의 비류(沸流), 안변(安邊)의 광석(廣石)은 단지 이름만 듣고 그곳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모사하는 데에 함께 나열할 수가 없다.

아! 도내에 있는 20여 고을의 볼만한 명승지를 모아 봤자 그 숫자가 겨우 함흥 한 고을과 비슷하니, 이는 아마도 맑고 깨끗한 기운이 모인 곳이 있고 흩어진 곳이 있기 때문인가 보다. 아니면 사람들이 구경하는 것이 가까운 곳은 상세하고 먼 곳은 간략해서인가. 이는 알 수 없다.

관외(關外)의 산천은 본래 거칠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 사이에 또한 이처럼 마음과 눈을 웅장하게 하고 원대한 생각을 부칠 만한 곳이 있는데, 다만 땅이 황폐하고 궁벽하여 찾아오는 사람이 적어서 널리 알리는 자가 없을 뿐이다. 산과 바다의 경물(景物)의 풍치(風致)를 눈이 있는 자라면 모두 볼 수 있는데도 매몰됨이 이와 같으니, 더구나 광채를 숨기고 감추어 궁벽한 시골에서 말라 죽어 가는 자가 또 어찌 당세에 이름을 날리고 후대에 명성을 전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개탄할 만하다.

 

학포(鶴浦)

 

안변부(安邊府)에서 동쪽으로 60리를 가서 바닷가의 돌벼랑 가를 따라가면 포구 가에 이른다. 포구 동북쪽에는 명사(鳴沙) 수십 리가 바람을 따라 무늬를 이루는데, 혹은 가늘고 혹은 굵어서 찬란함이 흰 비단과 같다. 포구 동쪽에는 사봉(沙峰)이 높이 솟아 있어 멀리서 바라보면 눈 더미 같고 때로 바람이 불면 모래가 날려 물이 흘러가는 듯한데 봉우리의 높이가 줄지도 늘지도 않으니, 이것이 신기하다. 포구의 둘레는 20리인데, 수면이 거울처럼 둥글다. 사봉 서쪽에 작고 푸른 봉우리가 물가에 임하였는데, 위에는 소나무와 회나무가 있고 아래에는 등라(藤蘿)가 얽혀 있다. 이곳을 원수대(元帥臺)라고 부르니, 옛날에는 섬이었는데 지금은 육지가 되었다고 한다.

포구 중앙에는 또 한 점의 외로운 섬이 있는바, 이름을 율도(栗島)라 하는데 우뚝하게 홀로 서 있어서 그림자가 물결 속에 잠겨 있으니, 양자강(揚子江) 금산(金山)과 서호(西湖) 고산(孤山)이 이에 비교하면 어떠한지 모르겠다. 사면의 야트막한 산들이 끊긴 듯 이어진 듯 푸르고 영롱해서 채색 병풍을 둘러친 듯하다. 포구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는 겨우 배 한 척이 들어갈 수 있는데, 파도에 모래가 밀려와 포구를 꽉 막고 있으므로 포구에 출입하는 배들이 통하기도 하고 막히기도 한다.

 

국도(國島)

 

학포의 사봉 동쪽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10리쯤 들어가면 이 섬에 이른다. 섬의 형세가 삼면은 높고 한 면은 낮은데, 낮은 곳에는 배를 정박시킬 수 있다. 물가에는 흰모래가 마전한 비단처럼 깔려 있고 약간 올라가면 해당화가 비단을 짜 놓은 것처럼 널린 채로 자라고 있으며, 또 조금 올라가면 푸른 대나무가 울창하고 순무가 섬을 온통 뒤덮고 있다.

배를 옮겨 섬을 돌아 동쪽으로 가면 돌벼랑이 점점 높아져서 혹은 수십 길이 되기도 하고 혹은 백여 길이 되기도 한다. 벼랑의 돌들은 모두 가닥가닥 나누어 묶어 세운 듯한데, 네모지게 사면이 반듯하고 곧아서 먹줄을 대고 깎은 듯하다. 조금 남쪽에 작은 굴이 있는데, 파도가 거세게 밀려와 깊고 어두워서 측량할 수가 없으며, 배를 저어 들어가 보면 겨우 삼베 한 필(匹)의 길이이고 좁아서 배가 깊이 들어갈 수가 없다.

굴 위를 우러러보면 단사(丹砂)가 돌 속에 숨어 있어 돌 틈 사이로 드러나 있는데, 배에 꽂는 장대로 위를 찌르면 단사가 점점이 배 안으로 떨어진다. 굴에서 또다시 돌아 남쪽으로 가면 돌의 형세가 더욱 높아져 뾰족한 바위가 우뚝하여 우러러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떨린다. 섬의 네 모퉁이에 묶어 세운 듯한 돌은 부러지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여, 비록 길이는 똑같지 않으나 모두 깎아 놓은 것처럼 사면을 이루어 크기가 똑같으며, 굴속의 돌도 또한 이와 같으니 이 한 섬이 모두 네모난 돌이 묶여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아! 기이하다. 포구와 섬은 진실로 천하의 절경이니, 아마도 산세가 북쪽으로부터 와서 금강산(金剛山)을 향해 점점 가까워지므로 산의 맑고 깨끗한 기운이 이 지역에 먼저 누설된 것이고, 경포대(鏡浦臺)와 총석정(叢石亭)으로 말하면 다 지류(支流)와 말류(末流)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도안사(道安寺)

 

정평부(定平府)에서 동쪽으로 60리를 가서 금진강(金津江)을 건너 바닷가에 이르면 산이 길게 뻗어서 바다 속으로 거의 10리쯤 빠져 들어간 곳이 있는데, 외로운 봉우리가 우뚝이 솟아 천길 높이 깎아지른 것처럼 서 있는바, 이 도안사가 그 중간에 있다.

좌우에는 비해(裨海)를 끼고 있고, 앞에는 끝없이 펼쳐져 아득한 하늘에 닿은 수평선 밖을 굽어보고 있다. 오른쪽으로 돌면 안변(安邊)의 학포(鶴浦)와 국도(國島)가 되고, 왼쪽으로 돌면 길주(吉州)의 마천령(磨天嶺)과 성진(城津)이 되는데, 그 사이에 섬과 바위와 산이 바다 속에 가라앉았다 나타나기도 하여 혹은 멀리 있기도 하고 혹은 가까이 있기도 하며, 혹은 크기도 하고 혹은 작기도 하며, 혹은 높이 솟아 날아오르는 새 같기도 하고 혹은 깎아 놓은 칼과 창 같기도 하여 눈앞에 빽빽이 펼쳐져 있다.

절 뒤로 대여섯 길을 조금 올라가면 관일단(觀日壇)이 있는데, 해와 달이 그 앞에서 떠오른다. 관일단에서 약간 서쪽으로 가면 작은 암자가 있는데, 돌을 뚫어 굴을 만들고 인하여 부처를 모시는 감실(龕室)을 만들었으며, 감실 앞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함흥평야가 아득히 멀고 창창(蒼蒼)하여 산악이 작은 개밋둑처럼 보이고 강호가 가는 띠처럼 보인다.

 

괘궁정(挂弓亭)

 

갑산부(甲山府)에서 북쪽으로 100리를 가서 혜산진(惠山鎭)에 이르면 이중으로 된 성이 높은 언덕 안에 우뚝이 축조되어 있으며 성 북쪽 귀퉁이에 괘궁정이 있는데, 괘궁정 난간이 성가퀴를 내려다보면서 압록강(鴨綠江)을 굽어보고 있다. 압록강 북쪽 언덕 수십 보 되는 곳에 석탑이 있어 아스라이 구름 속에 파묻혀 있는데, 속담에 이르기를 “옛날에 오누이가 살고 있었는데, 오라비는 남쪽 언덕에 성을 쌓고 여동생은 북쪽 언덕에 석탑을 세웠다.” 한다.

석탑에서 빙 돌아 올라가면 바로 백두산(白頭山) 자락이니, 백두산 정상과 겨우 100리라 한다. 괘궁정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면 강물이 굽이쳐 돌아 흐르며 들이 평평하고 둥글게 펼쳐져 있어서 매우 시원하고 깨끗한 운치가 있다.

아! 이곳은 바로 백두산의 뿌리요 압록강의 근원이니, 천하의 외진 곳이다. 예전에는 여진(女眞)과 말갈(靺鞨)이 서로 이곳을 소굴로 삼아 도둑질하고 노략질하여 마치 금수끼리 서로 잡아먹는 것과 같았는데, 어느 때에 불교가 이곳에 전래되어 인공(人功)과 사력(事力)으로 마침내 이와 같이 높고 웅장한 석탑을 세웠단 말인가. 이는 천 년 이내의 일에 불과한데도 아득하여 징험할 수 없음이 이와 같으니, 어찌하면 한문(寒門) 뛰어넘고 현명(玄冥) 지나 전욱(顓頊)에게 이것을 물을 수 있겠는가.

 

석왕사(釋王寺)

 

이 절은 안변부 서쪽 40리 지점인 설봉산(雪峰山) 아래에 있다. 우리 태조대왕이 잠룡(潛龍) 시절에 무너진 집에 들어가서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오는 꿈을 꾸고는 산 아래 토굴에 있는 승려에게 찾아가 물으니, 승려가 대답하기를 “몸에 서까래 세 개를 졌으니 바로 ‘왕(王)’ 자입니다.” 하였다. 태조대왕이 이에 감동하여 토굴이 있던 터에 절을 세우고 석왕사라고 불렀는데, 그 승려가 바로 무학(無學)이라 한다.

남산역(南山驛)으로부터 절로 들어가는 산문(山門)의 어귀를 찾아 홍살문으로 들어가는데, 첫 번째 건너는 수각(水閣 물가에 지은 정자 )을 단속문(斷俗門)이라 하고, 두 번째 건너는 수각을 등안각(登岸閣)이라 하고, 세 번째 건너는 수각을 불이문(不二門)이라 하는바, 세 누각의 사이가 거의 10리이다. 양쪽 언덕은 모두 기이한 바위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며, 단풍잎과 소나무 숲이 펼쳐져 있다.

절에 이르면 크고 화려한 불전(佛殿)과 웅장한 요사채가 온 도의 으뜸이어서 깊숙한 집과 회랑(回廊)이 아득하여 갈 곳을 모를 지경이다. 절의 서쪽 가에 한 누각이 있어 나무로 만든 8백 나한상(羅漢像)을 모시고 있는데, 태조대왕이 원수(元帥)로서 북쪽을 정벌할 적에 낭장(郞將) 김남련(金南連)으로 하여금 길주(吉州)의 광적사(廣積寺)에 가서 배로 나한상을 실어 오게 하고, 판각하여 이 일을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요속(僚屬)으로 있던 정몽주(鄭夢周) 등의 이름을 열거하여 썼는데, 판각이 절에 보관되어 있어 아직도 완연하다. 앞에 있는 시냇가에는 용비루(龍飛樓)와 흥경루(興慶樓)가 있는데, 매우 높고 탁 트였다.

 

성진진(城津鎭)

 

마천령(磨天嶺)은 단천(端川)과 길주 사이에 있는데, 남도와 북도가 이로부터 나누어진다. 마천령의 한 줄기가 동쪽으로 달려 바다 속으로 쑥 들어가서 성진진이 되었다. 옛날에 토성(土城)이 있었는데 만력 병오년(1606, 선조39)에 관찰사 이시발(李時發)이 조정에 보고하여 진을 설치하였으며, 을묘년(1615, 광해군7)에 관찰사 최관(崔瓘)이 석성(石城)을 쌓았다.

이곳은 삼면이 모두 바다이고 오직 뒤의 한 면만 육지와 연하였는데, 높은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성은 내성과 외성이 있으니, 내성의 동쪽 가장 높은 곳은 해와 달이 떠오르는 것을 구경하는 봉우리이고, 그 아래는 첨사(僉使)가 거주하는 곳이며, 서쪽에는 외로운 봉우리가 우뚝이 솟아 장단(將壇)이 되었다.

외성의 서쪽 언덕에는 조일헌(朝日軒)이 있으니 바로 객관(客館)이며, 서문(西門)의 서쪽에는 참경대(斬鯨臺)가 있고 동문(東門)의 동쪽에는 망해정(望海亭)이 있으며, 조일헌 위 압봉(壓峰)의 정상에 여초(麗譙)가 있으니, 진북루(鎭北樓)라 한다. 동문 곁으로부터 냇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여서 물을 가두어 연못을 만들었으며, 바다의 파도가 충돌하는 곳에는 형편상 성을 쌓을 수 없으므로 나무를 꽂아 목책(木柵)을 만들었다.

이곳의 지형은 앞에는 큰 바다가 있어서 하늘과 함께 끝이 없고, 한 봉우리가 파도가 몰아치는 큰 바다 가운데에 우뚝 서 있어서 아득하기가 마치 육오(六鰲)의 위에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넓디넓어서 마치 배를 타고 닻줄을 풀어 놓아 물결 따라 오르내리는 듯하니, 관방(關防)의 요해처다운 면모와 유람하는 기이한 경치를 모두 얻었다고 이를 만하다.

 

칠보산(七寶山)

 

명천부(明川府)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동남쪽으로 50리를 가면 문암(門巖)이 있는데, 문암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큰 산이 하늘과 맞닿아 사면을 빙 둘러 에워싸고 있다. 이 가운데 석산(石山)이 있는데 색깔이 붉은 노을과 같으며, 여러 봉우리가 높이 솟아 기이하고 빼어나서 천태만상 없는 것이 없다. 이중에 가장 기이한 것은 사암(寺巖), 책암(冊巖), 주암(舟巖), 천불봉(千佛峰), 만사봉(萬寺峰), 호상대(虎像臺) 등으로 불리는 것인데, 혹은 새가 날고 짐승이 달리는 듯하며 혹은 사람과 물건이 많이 모여 있는 듯하니, 비록 구름이 흩어졌다 모이고 신기루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으로도 그 신기함을 다 비유할 수 없을 것이다.

문암으로부터 10리를 가면 금장사(金藏寺)가 있고 금장사로부터 또다시 20리를 가면 개심사(開心寺)가 있으며, 개심사 뒤에 누대가 있는데 이곳에 앉으면 온 산의 면목을 대강 관망할 수 있다. 개심사에서 약간 동쪽으로 가면 망해대(望海臺)가 있고 망해대로부터 석봉(石峰)을 넘으면 금강굴(金剛窟)이 있으며 금강굴로부터 10리를 가면 도솔암(兜率菴)이 있다. 도솔암은 사암의 아래에 있는데 지형이 가장 높다. 세속에 전해 오기를 옛날에 일곱 산이 나란히 솟아 있었기 때문에 칠보산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중고(中古) 이후로 여섯 산이 바다 속에 잠겨서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다만 하나의 산뿐이라고 한다.

지금 이 산의 가장 높은 곳에는 조개와 소라 껍데기가 쌓여서 왕왕 무더기를 이루고 있으니, 이것을 보면 또한 이 산이 일찍이 바다에 잠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느 해에 여섯 산이 다시 육지로 나오고, 바닷물이 이 산을 뒤덮을지는 알 수 없다. 이 산이 기이한 것은 산에 무〔蘿葍〕가 가득히 자라고 있는데 모두 심은 것이 아니라 자생한 것이라는 점으로, 이곳에 사는 승려들은 이것을 식량으로 삼는다.

 

창렬사(彰烈祠)

 

경성부(鏡城府) 남쪽 100리 지점에 어란리(禦亂里)가 있으니 혹은 어랑리(漁郞里)라고도 칭하는데, 이 마을에 팔경대(八景臺)가 있고 팔경대 남쪽 10리쯤 되는 곳에 무계호(茂溪湖)가 있으니, 바로 임진왜란 때 의사(義士) 이붕수(李鵬壽)가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를 맞이하여 의병을 일으킨 곳이다. 금상(今上) 을사년(1665, 현종6)에 평사 이단하(李端夏)가 창의(倡議)하여 호숫가에 사당을 세우고는 정공(鄭公)을 제향하고 함께 맹세한 사람인 이붕수 등을 배향하였다. 또 촉룡서당(燭龍書堂)을 그 곁에 지어서 유생들이 거주하며 학업을 익히는 장소로 삼고 있다. 사당은 서쪽 봉우리 아래의 높은 언덕에 있는데, 앞에 작은 산이 가로질러서 초승달이 막 나온 듯하니, 반은 호수에 잠겨 푸르고 울창하다.

사면의 여러 산이 깎아 세운 듯하여 채색 병풍을 둘러친 듯하고, 그 가운데는 평평하고 둥근 호수를 이루었는바, 세로와 가로가 9리쯤 되는데 연꽃과 마름이 푸르고 깨끗하여 씻어 놓은 듯하며 온자(蘊藉)하고 깨끗하고 화려하여 자못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북쪽 지역의 산천은 대체로 거칠고 웅장하여 넓고 탁 트인 구경거리는 진실로 쉽게 얻을 수 있으나 산이 굽이지고 물이 감돌며 흘러 이곳만큼 아늑하고 고요한 곳은 없으니, 이는 아마도 하늘이 또한 정공의 충렬(忠烈)을 표창하여 특별히 한 구역을 먼 변방 가운데에 만들어서 그 영혼을 모시고자 해서인가 보다.

 

용당(龍堂)

 

경원부(慶源府) 동쪽으로 40리 되는 강가에 동림산성(東林山城)이 있는데, 이 성은 태종대왕 원년(1401)에 도순찰사(都巡察使) 강사덕(姜思德)에게 쌓게 한 것이다. 세속에 전해 오기를 목조(穆祖)가 처음 이곳에 살았는데, 이곳에서 알동(斡東)으로 옮겨 갔다고 한다.

성안에는 큰 우물이 있는데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으며, 우물가에는 옛터가 있는데 주춧돌과 섬돌이 아직 남아 있다. 지금 성의 동쪽 가에는 세 칸의 사우(祠宇)가 있어 조정에서 매년 향과 폐백을 보내와 두만강(豆滿江) 신에게 제사하는데, 이 지방 사람들은 이 사우를 용당이라고 칭한다.

용당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면 강의 남쪽에 있는 훈융(訓戎), 안원(安原) 등의 진보(鎭堡)와 경원부의 성곽과 증산(甑山), 칠암산(七巖山)이 눈앞에 나열되어 있으며, 강의 북쪽은 훈춘강(訓春江)이다. 춘산현성(春山縣城) 등 여러 지역이 아득히 바라보여 끝을 알 수 없는데, 두만강이 큰 들 가운데를 가로질러 오랑캐와 중국을 나누었다. 이곳은 일월(日月) 배태된 지역이어서 진실로 이와 같이 기이하고 웅장함이 있는 것이다.

 

무이보(撫夷堡)

 

경흥부(慶興府)에서 두만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 30리를 가면 무이보에 이르는데, 성이 강의 남쪽 기슭을 내려다보고 있다. 북쪽으로 오랑캐 땅을 바라보면 큰 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으며, 동쪽으로 바다 모퉁이를 바라보면 기이한 봉우리가 깎아 놓은 듯이 서 있으니, 바로 알동(斡東) 땅으로 목조(穆祖)가 일찍이 거주하신 곳이다.

무이보에서 약간 내려가면 강 북쪽 기슭에 큰 산이 있고 물이 역류하여 굽어 도니, 바로 목조 왕비의 옛 능이다. 능의 왼쪽 산허리 약간 낮은 곳에 철을 주조하여 용을 만들어서 묻어 지맥(地脈)을 도왔다고 하나 지금은 모두 다른 나라의 국경이 되어서 찾아갈 수가 없다. 넓은 들 가운데에 여덟 개의 못이 서로 잇닿아 있는데, 세속에 전해 내려오기로는 못에 오색 연꽃이 함께 핀다고 하나 신빙할 만하지 못하다. 무이보 뒤에 봉수대가 있는데, 가장 높은 곳에 있어서 한번 올라가 바라보면 땅이 다한 곳 밖으로 또 슬해(瑟海)가 있어서 검푸른 빛이 산과 맞닿아 있다.

아! 조선 초기의 위엄과 덕은 비록 두만강 물을 돌려 서쪽으로 흐르게 한다 하더라도 못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직 이 성조(聖祖)의 옛집과 능이 모두 강을 사이에 두고 한 걸음 떨어진 곳에 가까이 있는데도 이것을 방치하여 오랑캐들에게 주어 살게 하고 국경으로 삼지 않은 것은 무슨 연고인가? 김종서(金宗瑞) 등 여러 사람은 그 책임을 회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D001] 양자강(揚子江) 금산(金山) : 

금산은 중국 강소성(江蘇省) 진강시(鎭江市) 서북쪽에 있는 산으로, 양자강 가운데 우뚝 서 있는데, 빼어난 경치가 천하의 제일이라 한다. 당나라 때 배두타(裴頭陀)가 산을 개간하다가 금을 얻었으므로 이 산의 이름을 금산(金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D002] 서호(西湖) 고산(孤山) : 

서호는 중국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의 성 밖 서쪽 고산 곁에 있는 호수로, 전당호(錢塘湖)라고도 칭하는데,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북송 때 임포(林逋)가 20년 동안이나 시정(市井)에 나오지 않고 은거하면서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으로 삼아 살던 곳으로 더욱 유명하다. 《宋史 卷457 林逋列傳》

[-D003] 비해(裨海) : 

구주(九州) 즉 중국 밖의 작은 바다라 한다. 《史記 卷74 孟子荀卿列傳》

[-D004] 한문(寒門)……전욱(顓頊) : 

한문은 북극(北極)의 문(門)으로 북극의 빙하를 가리킨다. 현명(玄冥)은 북방의 신으로 겨울 또는 형살(刑殺)을 맡은 신이고, 전욱은 북쪽을 맡은 제(帝)로 수관(水官)의 군주이다. 《예기(禮記)》〈월령(月令)〉에 “맹동(孟冬)ㆍ중동(仲冬)ㆍ계동(季冬)의 달은 그 제는 전욱이고 그 신은 현명이다.”라고 하였다.

[-D005] 석왕사(釋王寺) : 

함경남도 안변군(安邊郡) 설봉산(雪峰山)에 있는 사찰로, 휴정(休靜)의 〈설봉산 석왕사기(雪峯山釋王寺記)〉에 따르면 고려 말 무학대사(無學大師) 자초(自超)가 이 절 근처의 토굴에서 지내다가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꿈을 해석해 준 것을 인연으로, 태조가 절을 크게 창건하도록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절에는 여말선초의 건물로 알려진 응진전(應眞殿)ㆍ호지문(護持門)과 1732년(영조8)에 개수한 대웅전ㆍ영월루(暎月樓)ㆍ흥복루(興福樓)ㆍ범종루(梵鐘樓)ㆍ용비루(龍飛樓)ㆍ조계문(曹溪門) 등이 있다. 태조와 깊은 인연이 있어 조선 왕실로부터 상당한 보호를 받았다.

[-D006] 장단(將壇) : 

대장(大將)을 임명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단을 이른다.

[-D007] 여초(麗譙) : 

누각을 가리킨다. 원래 삼국 시대 조조(曹操)가 지은 누각의 이름인데, 화려하기로 유명하다.

[-D008] 육오(六鰲) : 

여섯 마리의 자라로, 전설에 따르면 발해(渤海)의 동쪽에 큰 바다가 있으며 이 가운데 대여(岱輿)ㆍ원교(員嶠)ㆍ방호(方壺)ㆍ영주(瀛洲)ㆍ봉래(蓬萊)의 다섯 선산(仙山)이 있는데, 여기에는 신선과 성인(聖人)이 살고 있는바, 여섯 마리의 자라가 산을 떠받치고 있어 바다 위에 떠 있다 한다. 《列子 湯問》

[-D009] 일월(日月) 배태된 지역 : 

일월은 해와 달로 군주를 상징하는바, 조선을 개국한 태조의 고조인 목조(穆祖)가 살았던 곳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