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가 아득한 군산.악양들판

2022. 9. 14. 00:21대륙조선의 일반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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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집 제46권 / 제문(祭文) 

제산 김공에 대한 제문 정묘년(1747, 영조23) 〔祭霽山金公文 丁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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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의 기미가 변화하여 / 氣機嬗變
선악이 어지러이 분분한데 / 美惡參差
세월이 흘러 말세가 되매 / 裔而叔季
갈수록 뒤섞여 혼탁해졌으니 / 蓋益淆漓
그 기운 사람에게 모이면 / 鍾而在人
간사하고 음험해 비뚤어집니다 / 詭陰傾窳
간혹 정수한 기운 있으나 / 間有粹氣
만나는 사람 거의 없었는데 / 民鮮克遇
오직 공께서 탄생하시어 / 維公之生
실로 그 기약에 응하였습니다 / 實應其期
훤칠하니 늘씬한 몸에 / 頎而長身
맑은 눈동자 시원한 눈썹 / 明目疎眉
상서로운 햇빛과 양기를 발하듯 / 瑞日揚休
마음엔 화순한 덕이 가득하였고 / 中積和順
훌륭한 옥이 광채를 온축하듯 / 良玉蘊彩
밖으론 윤택한 빛이 드러났습니다 / 外著輝潤
타고난 자질 진실로 아름다웠고 / 生資洵美
또한 학문에 힘쓰셨습니다 / 亦懋于學
갈암 선생이 고운 금수 가에 / 有媚錦滸
강학하는 서당을 개설하니 / 有開講幄

선비들 구름처럼 몰려와서 / 有來如雲
함께 절차탁마하였습니다 / 以磋以琢
공이 당시 가장 어렸으나 / 公時最少
이미 추중(推重)을 받았습니다 / 已能見推
태산과 대들보가 한번 무너지자 / 山梁一壞
대낮에도 여우 살쾡이 울어 댔습니다 / 晝嗥狐狸
우리 외조인 밀암 선생께서 / 維我外祖
경서를 안고 홀로 비통해하매 / 抱經獨悲
실로 오직 공에게 의지하여 / 實維公賴
서로 돕고 부지하였습니다 / 以相扶持
외조부께서 공에 대해 / 外祖於公
실로 깊이 기대하고 허여하여 / 實深期許
시에서 옥인이라 찬한 말은 / 詩贊玉人
공이 그에 가깝다고 하셨습니다 / 謂公其庶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아 / 我乃不天
우리 외조부님을 잃었을 적에 / 我失我祖
공이 제문을 지음에 / 公有誄文
정과 뜻이 측은하고 슬펐으며 / 情志惻傷
공이 행장을 지음에 / 公有狀行
아름다운 덕을 천양하였습니다 / 德媺揄揚
외조부의 흩어진 유문들을 / 遺文散佚
공이 함께 편집하였고 / 公與編騭
미처 완성치 못한 집람을 / 集覽未完
공이 이어 집필하고자 했습니다 / 公欲續筆
공이 저의 외가에 대해서 / 公於外家
양대에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 兩世血心
나이가 들수록 은약에 힘써 / 老大隱約
생각이 원대하고 근심이 깊었습니다 / 思遠憂深
공이 아름다운 명망이 있어 / 公有令望
화려한 명성이 날로 빛났습니다 / 華問日彰
스스로 몸가짐 겸손하게 할수록 / 自持謙謙
명성은 더욱 높고 빛났습니다 / 益尊以光
재신과 관백이 다투어 찾아오고 / 矦伯擁篲
입을 모아 공을 천거하였습니다 / 交口以薦

왕께서 말씀하길 어떠한가 / 王曰如何
내 속히 만나고자 하노라 하셨습니다 / 予欲亟見
두 번이나 침랑에 조용하였고 / 再調于寢
수령에 시용하기도 하였습니다 / 或試之郡

이미 과거에 급제한 뒤에는 / 亦旣釋褐
옥당과 미원에 올랐습니다 / 玉署薇院
왕이 기뻐하며 칭찬하시길 / 王有喜言
내 문장하는 신하를 얻었도다 / 予得詞臣
임금의 문장이 찬란하니 / 天章有燦
총애와 은혜가 더욱 새로웠습니다 / 寵渥愈新
예로부터 군신 간의 제우가 / 蓋古際遇
이에 비할 이 드물었습니다 / 鮮克此比
온 조정이 귀를 기울이며 / 盈朝側聽
어떤 인물이기에 이러하냐 했지요 / 何狀乃爾
남들은 공을 위해 영광스레 여겼으나 / 人爲公榮
공은 기쁜 내색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 公不色喜
성대한 명성은 무너지기 쉽고 / 盛名易隳
험한 길은 끝까지 가기 어려운 법 / 險道難盡
임금의 은혜 비록 중하나 / 君恩雖重
의리상 출사하기 어려웠지요 / 義在難進
선사가 행하신 사업은 / 先師行業
본래 본말이 있었는데 / 自有本末
세도가 이리저리 반복되어 / 世道反復
저 더러운 무함을 입었습니다 / 蒙彼汚衊
깃대 들고 앞장서는 무리 있어 / 擧幡有徒
대궐에 호소하는 상소 올렸는데 / 叫閤有疏
구중궁궐 대문에서 / 修門九重
문지기에게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 閽者見拒

손을 거두고 돌아온 뒤로 / 斂手來歸
문을 닫고 지조를 지키며 / 杜門自持
추락한 통서를 강명하여 / 講明墜緖
세한의 절조를 기약하였습니다 / 歲寒是期
저 으르릉거리는 자들이 / 彼狺狺者
온갖 방법으로 교활한 혀를 놀려 / 巧舌百般
지나간 자취를 뒤미처 문제 삼아 / 追提冷跡
무함하고 욕보이길 끝이 없었습니다 / 誣辱無端
공은 탄식하며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 公嘻謂人
“허물은 실로 나에게 있는데 / 咎實在己
내가 삼가지 않은 탓으로 / 我之不愼
스승님께 화가 미쳤구나 / 以及夫子
내가 말을 하지 아니하면 / 我不有言
어떻게 스스로 해명할 수 있으리” / 何以自說
사직하는 소를 올리면서 / 辭疏有進
한마디 말미에 붙였는데 / 一語附末

애오라지 도리로 자처할 뿐 / 聊以自處
어찌 감히 신원하길 바랐으리오 / 敢望伸白
임금의 위엄이 진동하여 / 天威震撼
일이 헤아릴 수 없게 되었으니 / 事有不測
오월에 감옥에 갇히고 / 五月犴狴
여섯 번이나 형틀에 매였습니다 / 六度桁楊
사람들은 공이 죽을 것이라 하였는데 / 人謂公死
신명이 부지하여 도와주셨습니다 / 神或扶將
말에 약간 손색이 있었다 하나 / 語有小遜
실은 오직 시의 때문이었습니다 / 實維時義
이 마음의 명명백백함은 / 此心炳然
신명에게 질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 可質神鬼
공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 人有議公
“시의에 알맞게 대처함을 잃었으니 / 或失時措
인산의 일과 바다로 귀양 간 화는 / 仁山紫海
이 누구 때문이었는가 / 是誰之故
어찌 잠시 늦추어서 / 曷不少遲
하늘이 정해 줄 때를 기다리지 않았는가” / 待天所定
저는 그렇지 않다고 여기니 / 我曰不然
이 어찌 공의 탓이겠습니까 / 是豈公病
군사부 삼사의 의리 중하니 / 生三義重
있는 곳에 목숨을 바치는 법입니다 / 所在致死

스승을 무함하는 사람들 말을 / 人有誣言
어찌 차마 좌시할 수 있겠습니까 / 其忍坐視
나는 스스로 의리를 다할 뿐 / 我自盡義
어찌 그 밖의 것을 알겠습니까 / 寧知其外
우환이 뜻밖에 이르는 것은 / 憂患倘來
성인 또한 어찌할 수 없지요 / 聖亦無奈
아득한 바다를 건너가 / 濟海洋洋
가시나무 울타리에 갇혔습니다 / 往罹栫棘
평탄함과 험함을 똑같이 여기니 / 夷險一視
감히 근심하는 마음을 두겠습니까 / 敢有憂戚
유배되었던 섬강의 강가는 / 蟾江有滸
장기가 대낮에도 가득 찼습니다 / 瘴霧晝塞
갈은리 옛 마을에서 / 葛隱舊里
선사의 남은 자취 더듬으매 / 先師餘躅
악양의 들판이요 / 岳陽之野
아득한 군산이었습니다 / 君山杳杳
눈물이 아롱진 대나무에 / 其竹有斑

바람이 한들거립니다 / 其風嫋嫋
택반에서 초췌한 모습으로 / 憔悴澤畔
그 형체가 고달프셨습니다 / 其形有纍
때로 거닐며 시를 읊고 / 有時行吟
어버이 생각하고 시대를 근심하셨지요 / 念親憂時
내 그리운 분이 저 멀리 있으니 / 我懷伊阻
내 패옥을 누가 구경해 주겠는가 / 我佩誰

내 이치의 근원을 살펴보니 / 我觀理原
주공의 효사, 공자의 단전이요 / 周爻孔彖
내 수리의 굴을 탐구해 보니 / 我探數窟
소자의 역서, 양휘의 산법이었네 / 邵易楊筭
맛난 고기가 입에 맞듯 도를 즐겨 / 芻豢可口
근심과 즐거움을 둘 다 잊었습니다 / 兩忘憂樂
부자가 서로 지기가 되어 / 父子知己
서로 수응하고 응대하였습니다 / 互爲唯諾
제가 옛일을 살펴보건대 / 我觀于古
득력함이 매양 환난 시에 있었으니 / 得力每此
유유한 하늘의 뜻은 / 悠悠天意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 或者在是
공이 육가를 지음이여 / 公有六歌
가사의 뜻이 너무도 비통합니다 / 辭意絶悲
제가 참람됨을 헤아리지 않고 / 我僭不揆
망녕되이 규계를 올렸습니다 / 妄有進規
환난에 처해선 그 도리대로 행함이 / 素位行患
또한 자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盍亦自得
공이 한숨 쉬며 편지 주시기를 / 公欷有書
“그대도 오히려 알아주지 못하는구나 / 子猶不識
자당께서 늙고 쇠하시니 / 慈闈衰邁
저녁노을처럼 기약이 없네 / 夕照如飛
내 마음이 돌이 아니거니 / 我心匪石
내 비통함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 我悲曷歸
그대가 혹 내 마음을 안다면 / 子或知我
책하지 않고 탄식하리라” 하였습니다 / 不責且唏
제가 함부로 논하였는데도 / 余有妄論
공은 더러 수긍하시고 / 公或首肯
공이 또한 지은 글들을 / 公亦有著
바로잡도록 허락하셨습니다 / 許以評訂
저의 경박하고 날램을 경계하여 / 戒余輕俊
독실함에 힘쓸 것을 면려하셨고 / 勉余懋篤
때로 혹 지나치게 장려하시어 / 時或誤奬
함께 학문에 나아갈 만하다 인정해 주었습니다 / 可與進學
스승 잃고 갈 길 몰라 할 때 / 余倀失業
바로 공에게 의지하였습니다 / 繄公是依
밤마다 하늘에 빌며 / 夜祝于天
어찌하여 빨리 돌아오지 않나 기원했습니다 / 曷不遄歸
사문의 통서를 / 師門有緖
오직 공이 계승하셨으며 / 公惟嗣述
후생이 학업을 물으면 / 後生問業
공이 법도가 되셨습니다 / 公爲榘律
아아, 저 망극한 하늘이여 / 噫彼昊天
십 년을 돌아오지 않으시더니 / 十年不復
뉘 알았으리오 한번의 병으로 / 誰謂一疾
문득 일어나지 못하실 줄을 / 奄忽不起
계통은 남으로 귀양 가서 / 季通南徙
끝내 근심으로 졸하였고 / 卒以憂死
빛나는 덕을 지닌 이상도 / 赫赫貳相
북쪽에서 마치셨습니다 / 終于靑朔

공이 지하로 돌아가시매 / 公歸地下
거의 쓸쓸함이 없을 것입니다 / 庶無落莫
공의 두 아들 중에 / 公有二子
첫째가 백미로 가장 훌륭하여 / 白眉最良

이미 효성스럽고 우애하며 / 旣孝旣友
문장 또한 아름답습니다 / 亦富文章
채가의 중묵이 될 만하니 / 蔡家仲默
공이 훌륭한 자손을 두었다 할 것입니다 / 謂公卽有
후사를 부탁할 곳이 있어 / 後事有託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 庶幾不負
내 조정에서 벼슬하느라 / 余官于朝
제때에 와서 곡하지 못하고 / 哭不以時
멀리 남쪽 산을 바라보며 / 瞻望南嶺
눈물만 줄줄 흘렸습니다 / 有涕漣洏
마지막으로 한 번 찾아왔는데 / 最後一來
위의 있는 용모 영원히 볼 수 없습니다 / 儀容永閟
제가 무릎 꿇고 절하여도 / 我有拜跪
공은 맞이하여 보지 못하고 / 公不迎視
제가 말씀을 올리더라도 / 我有語言
공은 말씀이 없으십니다 / 公不宣吐
제 마음속 품은 충정을 / 我有衷情
공은 응당 살피셨을 것입니다 / 公應鑑顧
[주-D001] 제산(霽山) 김공(金公) : 김성탁(金聖鐸, 1684~1747)이다. 본관은 의성, 자는 진백(振伯), 호는 제산이다. 1728년(영조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관직을 제수받았는데, 후에 이현일(李玄逸)을 위한 신원소를 올렸다가 공척을 받고 광양(光陽)에 유배되어 죽었다. 문장에 뛰어나고 성리학에 조예가 있었다. 문집으로 《제산집(霽山集)》이 전한다.[주-D002] 양기를 발하듯 : 《예기》 〈옥조(玉藻)〉에 군자의 용모를 말하면서 “머리와 목은 반드시 곧게 하여 산처럼 요동하지 않도록 세우고, 때에 맞게 다니되 활기에 찬 기운이 마치 양기가 만물에 발양하듯 몸에 가득하게 하며, 안색은 옥빛과 같이 한다.〔立容辨卑毋讇 頭頸必中山立 時行 盛氣顚實揚休 玉色〕”라고 하였는데, 이 구절을 인용하여 김성탁의 법도에 맞는 용모를 찬탄한 것이다.[주-D003] 갈암 …… 개설하니 : 갈암 이현일이 광양(光陽)의 유배에서 풀려난 뒤 금수(錦水)에 자리 잡고 제자들과 강학하였는데, 김성탁이 17세에 처음 금수에서 갈암을 뵈었다. 《霽山集 年譜, 韓國文集叢刊 206輯》[주-D004] 태산과 …… 무너지자 :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공자가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팡이를 끌고 문에서 소요하며 “태산이 무너지는구나. 들보가 쓰러지는구나. 철인이 시드는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노래하였는데, 그로부터 7일 뒤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이후로 스승이 돌아가신 것을 말한다. 김성탁이 21세 되던 1704년(숙종30)에 이현일이 졸하였다.[주-D005] 여우 살쾡이〔狐狸〕 : 나라의 요직을 차지하고서 현인을 모함하고 국정을 해치는 소인배를 말한다.[주-D006] 밀암(密菴) 선생 : 대산의 외조부이자 갈암 이현일의 아들인 이재(李栽)이다. 이현일이 죽은 뒤 김성탁은 이재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함께 학문을 연마하였다.[주-D007] 미처 …… 집람(集覽) : 이재가 70여 세에 《주자대전》의 사실을 고정하고 의리를 밝혀 《주전집람(朱全集覽)》을 편찬하고자 준비하였는데 미처 탈고하지 못하고 졸하였다. 《密菴集 年譜, 韓國文集叢刊 173輯》[주-D008] 은약(隱約)에 힘써 : 성현의 경서에 담긴 간략하면서도 심오한 뜻을 연구해 나갔다는 뜻이다. 《사기》 권130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시경》과 《서경》의 글이 간략하면서도 뜻이 심오한 것은, 그 뜻의 생각을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夫詩書隱約者 欲遂其志之思也〕”라고 하였다.[주-D009] 재신과 …… 천거하였습니다 : 영조 즉위 후 어사 박문수(朴文秀)가 찾아오기도 하고, 안핵사 오광운(吳光運)ㆍ조현명(趙顯命) 등이 김성탁을 천거하였다.[주-D010] 두 …… 하였습니다 : 1730년(영조6)에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제수되었으며, 문장이 뛰어나 영조에게 자주 칭찬을 들었다. 조문명(趙文命)ㆍ조현명이 극력 추천하여 정릉 참봉(靖陵參奉) 및 사복시 주부에 제수되었으며, 영조가 입시하라는 명을 내려 인견하고 단성 현감(丹城縣監)에 제수하였다. 1735년 과거에 급제한 뒤로 전적, 지평, 정언에 제수되었으며 잇따라 주강과 소대에 입시하였다.[주-D011] 임금의 문장이 찬란하니 : 김성탁이 과거에 급제해 방방하던 날 영조가 꽃을 꽂고 입시하라고 명하여 친히 절구 한 수를 지어 직접 써서 내려 주었는데 당시에 온 조정이 특별한 은혜라고 칭하였다. 《霽山集 年譜》[주-D012] 깃대 …… 당하였습니다 : 한 애제(漢哀帝) 때, 강직한 사례(司隷) 포선(鮑宣)이 죄를 입어 옥에 갇히자, 박사제자(博士弟子)인 왕함(王咸)이 태학 아래에서 깃대를 들고 외치기를 “포 사례(鮑司隷)를 구하려는 자는 이 밑에 모이라.” 하자, 제생 1천여 명이 모여서 대궐 문을 지키고 상소하여 포선의 죄를 경감시켰던 일을 가리킨다. 《漢書 卷72 鮑宣傳》 여기서는 김성탁이 스승인 이현일의 억울함을 신원하고자 동문들과 소를 작성하여 상경한 일을 말한다. 1721년(경종1)에 이현일의 직첩을 환급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대간의 반대로 무산되자, 제산 김성탁이 동문들과 함께 상경하여 상소하고자 하였고, 또 1724년에도 같은 일로 상경하여 복합(伏閤)하였지만 끝내 소를 올리지 못하였다. 《霽山集 年譜》[주-D013] 사직하는 …… 붙였는데 : 1737년(영조13)에 부수찬을 사직하는 소를 올리면서 신헌(申𨯶)의 무함을 변석하여 스승인 이현일의 무고함를 말하였는데, 당시 승지였던 유엄(柳儼)이 이 말을 트집 잡아 아뢰어, 곧 국청을 열고 국문하여 9월에 제주로 안치하라는 명이 내렸다.[주-D014] 말에 …… 하나 : 당시 김성탁의 사직소 말미에, 영조가 기사년의 일은 선천(先天)에 부치겠다고 말했다는 것으로 이현일을 변명하였다. 이 말에 영조가 진노하여 어원을 캐자, 비답에 나온 말을 전해 들은 것이라고 하여, 《승정원일기》를 조사해 보았더니, 이는 잘못 전해진 것으로 영조는 병신년의 일은 선천에 부치겠다고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주-D015] 인산(仁山)의 …… 화 : 인산은 영해(寧海) 인산서원(仁山書院)을 가리키는 것으로,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과 갈암 이현일을 향사하던 곳이다. 1737년(영조13) 김성탁의 상소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본인은 제주로 유배되었으며, 서원도 훼철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당시 김성탁이 너무 성급하게 신원하여 오히려 스승과 본인의 화를 키웠다는 여론이 있었다.[주-D016] 군사부(君師父) …… 법입니다 : 사람은 임금과 부모, 스승의 은혜 속에서 삶을 영위하므로 이 셋을 동일하게 섬겨야 하며 자신이 현재 속해 있는 곳에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小學 明倫》 여기서는 김성탁이 스승인 이현일을 위해 목숨을 바쳐 상소한 것은 인륜상 당연한 의리였음을 강조한 것이다.[주-D017] 유배되었던 섬강(蟾江)의 강가 : 김성탁은 1738년(영조14)에서 졸년까지 전라도 광양현 섬진 지역에 유배되어 있었다.[주-D018] 갈은리(葛隱里) 옛 마을 : 전라도 광양은 예전에 갈암 이현일이 유배되었던 곳이다. 그중 섬강의 갈은리라는 마을에 머물렀는데 이현일의 호와 같아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는 일화가 한국문집총간 128집에 수록된 《갈암집》 〈연보〉에도 실려 있다.[주-D019] 악양(岳陽)의 …… 대나무에 : 악양은 경상도 하동현(河東縣)의 악양으로, 광양의 섬진(蟾津) 동쪽 언덕이 악양과 서로 맞닿아 있었다. 이곳의 지명이 마침 악양이므로 중국 악양루(岳陽樓)의 일을 끌어다 써서 군산(君山)과 반죽(斑竹)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주-D020] 택반(澤畔)에서 초췌한 모습 : 굴원의 〈어부사(漁父辭)〉에 “굴원이 조정에서 축출되어 강가에서 노닐고 못가를 거닐면서 시를 읊조릴 적에 안색이 초췌하고 형용이 말랐다.〔屈原旣放 遊於江潭 行吟澤畔 顔色憔悴 形容枯槁〕”라고 하였다. 후에는 유배된 사람의 곤궁한 모습을 표현하는 말로 쓰인다.[주-D021] 내 그리운 …… 주겠는가 : 이황이 자찬(自撰)한 〈묘갈명〉에 나오는 구절이다. 당시 김성탁이 유배 생활 중에서도 전라도에서 학사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면서 성신(誠信)으로 상대를 대해 소도산(小陶山)이라고 불렸다고 한다.[주-D022] 주공의 …… 단전 : 《주역》 〈건괘(乾卦) 구삼(九三)〉의 “군자가 종일토록 건실히 하여 저녁까지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조심하면, 비록 위태로운 지경을 당할지라도 허물이 없게 될 것이다.〔君子 終日乾乾 夕惕若 厲無咎〕”라는 말과 이에 대해서 해설한 건괘 문언(文言)의 내용을 말한다. 효사(爻辭)는 주공(周公)이 지었고, 문언과 단사(彖辭)를 포함한 이른바 십익(十翼)은 공자가 지었다고 전해져 왔는데, 여기에서는 김성탁이 말년에 역학(易學)에 몰입하였음을 말한다.[주-D023] 소자(邵子)의 …… 산법 : 소자는 소옹(邵雍)으로 《주역》을 연구해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를 지었고, 양휘(楊輝)는 송나라 학자로 수학서인 《적기수법(摘奇數法)》을 지었다. 모두 수리(數理)에 대해 연구한 책이다.[주-D024] 공이 육가(六歌)를 지음이여 : 송나라 재상인 문천상(文天祥)이 금(金)나라에 포로로 잡혔으나 항복하지 않고 감옥에서 가족들에 대해 읊은 육가를 지어 자신의 비통한 마음을 표하였는데, 김성탁도 제주로 귀양 간 뒤에 〈나의 노래〔我有歌〕〉를 지어 노모와 형제, 처자, 조카에 대한 슬픈 마음을 읊었다. 《霽山集 卷1》[주-D025] 공이 …… 주시기를 : 김성탁이 자신의 슬픈 심정이 시구에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을 기술한 이 편지는 《제산집》 권9 〈이경문 상정(李景文象靖)에게 답하는 편지〉에 실려 있다.[주-D026] 내 …… 아니거니 : 《시경》 〈백주(柏舟)〉에 “내 맘이 돌이 아니라 구를 수 없으며 내 마음 자리가 아니라 걷어 말 수도 없네.〔我心匪石 不可轉也 我心匪席 不可卷也〕”라고 하여 보통은 바뀔 수 없는 굳은 절개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목석이 아닌 자신의 슬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주-D027] 내 비통함이 …… 돌아가겠는가 : 《서경》 〈오자지가(五子之歌)〉에 “아아,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내 마음의 비통함이여! 만백성이 나를 원수로 여기니 내 장차 누구를 의지할까.〔嗚呼曷歸 予懷之悲 萬姓仇予 予將疇依〕”라고 한 글을 인용한 것이다.[주-D028] 계통(季通) : 채원정(蔡元定, 1135~1198)이다. 송나라 건양인으로 자는 계통, 호는 서산(西山),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어려서 가학을 잇고 자라서 주자를 사사하였다. 영종 연간에 주자와 함께 심계조(沈繼祖) 등의 공격을 받아 도주(道州)로 유배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잘 모르는 홍범(洪範)의 수(數)에 대하여 홀로 깨닫고 있었으나 미처 저술을 하지 못하고 이르기를 “내 뒤를 이어 내 학설을 완성시킬 사람은 내 아들 침(沈)일 것이다.” 하였다. 여기서는 김성탁 부자를 채원정 부자에 비유한 것이다.[주-D029] 빛나는 …… 마치셨습니다 : 이상(貳相)은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을 말한다. 조선 성리학을 정립한 인물로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하여 영남학파 성리설(性理說)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양재역 벽서 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江界)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졸하였다. 여기서는 김성탁이 뛰어난 학문을 지니고 무고하게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졸하였으므로 이언적에 비의한 것이다.[주-D030] 공의 …… 훌륭하여 : 김성탁은 아들이 둘로 김낙행(金樂行)과 김제행(金霽行)이 있었는데, 그중 첫째 아들인 구사당(九思堂) 김낙행이 부친을 따라가 유배지에서 시봉하면서 함께 학문을 강마하는 등 김성탁의 사업을 계승하였으므로 마량(馬良)의 고사를 인용하여 백미(白眉)라고 칭한 것이다.[주-D031] 채가의 중묵(仲默) : 채침(蔡沈, 1167~1230)이다. 송나라 건양인으로, 자는 중묵, 호는 구봉선생(九峯先生)이다. 채원정의 둘째 아들이고, 주자의 문인이다. 도주(道州)로 귀양 가는 부친을 수행하였고, 부친이 돌아간 뒤에 주자의 명을 받고 《서집전(書集傳)》을 저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