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도(熊島)의 사실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60)

2022. 12. 29. 22:38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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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도(熊島) 사실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60)     인조17년 16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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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인조(仁祖) 17년(기묘)은 명 의종(明毅宗) 숭정(崇禎) 12년이고, 후금 태종(後金太宗) 숭덕(崇德) 4년이다. 이해에 만주(滿州) 병부(兵部)에서 웅도(熊島)의 정벌을 도와달라는 자문(咨文)을 우리나라에 보내왔다.

후금(後金) 만주 병부의 자문에,

“조선(朝鮮)이 짐(朕)과의 맹약(盟約)을 어길 적에 극동(極東)에서 피장(皮張 육축(六畜)의 가죽을 말함)을 진공(進貢)하던 거민(居民) 경하창(慶河昌) 일당이 우리나라를 배반하고 늑복(勒伏)에 이르러 한(漢 명(明) 나라를 가리킴)과 통하면서 그곳을 웅도(熊島)라 이름하고 조선과 서로 왕래하였다. 조선이 우리나라에 신복(臣服)한 이후로, 그 안상(岸上)에 거주하는 반수(半數)의 백성들은 모두 지금도 예전과 같이 피장(皮張)을 진송(進送)하는데, 그 하창(河昌) 본인과 그의 아들, 그리고 기라라지둔아(其羅羅只屯阿) 등은 그대로 웅도에 거주하면서 우리나라에 진공(進貢)하기를 꺼리고 항상 조선 지방인 경흥(慶興)의 아오지보(阿吾地堡)ㆍ무이보(撫夷堡)ㆍ서수라보(西水羅堡)ㆍ조산보성(造山堡城) 등지와 왕래하면서 교역(交易)하고 있으니, 조선왕(朝鮮王)은 주사(舟師) 1천 명을 징발하여 웅도를 공취(攻取)하고, 하창ㆍ기라라지둔아(其羅羅只屯阿) 등 일당 중 두목을 모두 잡아올 것이요, 그 나머지 백성들에게는 그대로 안상(岸上)에 거주하면서 피장을 진송하도록 하고, 다시는 왕래하면서 문신(問訊)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그러자 우리나라에서 그 자문(咨文)에 답하기를,

“소방(小邦)은 전부터 후라도(厚羅島)가 있는 줄은 알지만 웅도라는 것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근래에 지로인(指路人 길을 인도하는 사람)에게 자세히 물어본 결과, 그곳을 가려면 수십 일이 걸릴 만큼 먼 거리에 있는데, 풍랑이 아주 거세다고 하므로 그것이 염려였습니다. 그런데 이어 들으니, 지로인이 말하기를 ‘군사 5백 명만 징발하여도 충분히 이곳을 함락시킬 수 있다.’고 하므로, 그의 말대로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목장흠(睦長欽)ㆍ북병사(北兵使) 이현달(李顯達)에게 통문(通文)하여 궁포(弓砲 활과 포)를 선택하고 배를 모은 다음, 별도로 북우후(北虞候) 유찬선(劉讚先)을 영장(領將)으로 임명하여 진발(進發)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다. 그 후에 또 올린 자문에는,

“웅도를 토벌하러 간 군사로 말하자면, 포수(砲手)가 4백 명, 사수(射手)가 1백 명에다 병선(兵船)과 양선(糧船)을 합해서 모두 1백 20척으로 영장(領將) 유찬선(劉讚先)이 두 차인(差人)과 함께 3월 22일 서수라(西水羅) 앞 포구(浦口)에서 항해(航海)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 유찬선의 장계(狀啓)에 따르면, 항해한 지 반 달 남짓 되었을 때,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어 위급했던 상황을 말로 다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배가 떠날 때 좌영장(左營將) 관하(管下)인 길주(吉州) 출신 한희룡(韓希龍) 등을 별도로 명하여, 먼저 쾌속정(快速艇)을 몰고 가서 요해처(要害處)에 잠복해 있으면서 비상사태를 살피게 하였습니다.

그런 결과 과연 저들 네 사람이 몰래 조그마한 배 세 척을 몰고 활과 화살을 허리에 꽂은 채 숲 속에 숨어 있다가 우리 복병(伏兵)에게 체포되어 군전(軍前)에 붙들려 왔는데, 그 중 한 사람은 곧 하창의 아들 길라내(吉羅乃)였고, 또 한 사람은 곧 하창의 조카인 아두(牙豆)였고, 또 한 사람은 곧 하창의 족속인 매개(梅介)였고, 또 한 사람은 하창의 종자(從者)인 고랑아(古郞阿)였습니다. 이 네 사람에게 돌아가면서 심문(審問)한 결과, 웅도에서 얼마 되지 않은 장도(獐島)에 하창이 옮겨가 거주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는 4월 초 9일 밤에 우리 군대가 장도를 포위하였더니, 하창 등이 우리 배를 바라보고 달아나다가 산택(山澤) 사이에서 복병(伏兵)을 만나 도저히 탈출할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문득 되돌아갔습니다.

그리하여 김명길(金命吉) 등을 시켜 설득시키는 한편, 그의 아들 길라내(吉羅乃)를 시켜 그 아버지를 설득시키기를 ‘항복하면 죽이지 않겠지만 항복하지 않으면 씨를 말려버리겠다.’고 하면서 잇달아 군사를 재촉하여 일제히 대포(大砲)를 발사하였더니, 하창의 형제(兄弟)들이 남녀 15명을 거느리고 군전(軍前)에 와서 신복(臣服)이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네가 어찌 감히 황조(皇朝)를 배반하였느냐?’고 힐책하였더니, ‘감히 배반한 것이 아니옵고, 미처 때에 맞춰 진공(進貢)하지 못했을 뿐입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신(臣)이 그 집을 찾아가 점검해 보니, 활과 화살, 갑옷과 투구 등이 있었는데, 화살촉에는 모두 독약(毒藥)을 발라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무리들의 도피한 자와 은닉시켜 놓은 가산(家産) 등에 대해서는, 도망간 자는 불러 모으고 은닉시켜 둔 가산은 본 위치로 운반해 놓은 다음 안심하고 농사지으면서 황조(皇朝)의 처분만을 기다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때 되돌아온 남녀는 모두 43인이었고 신등(臣等)은 거기서 머무른 지 3일 만에 환군하여 서수라포(西水羅浦)에 돌아와 정박하였습니다. 포획한 웅도의 남녀 등에 대해서는 다시 거기에 머물거나 따라오거나 간에 이 문제는 일체 차인(差人)에게 맡기었고, 처음부터 대행(帶行)했던 하창(河昌) 및 그의 형 차오라내(車吾羅乃)에게는 끝까지 따라올 것을 분부하였으나, 차오라내는 노병(老病)으로 인해 먼 길을 떠날 수 없었으므로, 그의 조카인 아두(阿豆)가 대신 따라왔으며, 여인(女人) 두 명도 데려왔습니다.”

하였다. 또 경진년(1640)에 만주(滿州) 호부(戶部)에서 보낸 자문에 이렇게 말하였다.

“조선에서 하창 등을 보내왔으나 아직도 그 여당(餘黨)이 남아 있으므로, 우리 군사 1백 명을 보내어 그들 남녀 5백 명을 포획하였는데, 포획된 자들 및 우리 군사와 전번에 포획된 하창 등이 모두 식량이 떨어진 채 저곳에 있으니, 국왕에게 자품(咨稟)하여 빨리 사람 수효대로 식량을 판출해서 우리 차관(差官)에게 부치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다른 해에 진상할 공물에서 그 액수를 따져 감(減)해 주겠다. 지금 그 식량은 봉황성(鳳凰城)으로 송진(送進)하라.”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군사를 보내 웅도를 정벌한 사실이다. 뒤에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와 같이 변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