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명나라에 대하여 군신(君臣)과 부자(父子) 사이의 의리가 있고, 또 영원히 잊지 못할 은덕이 있다.

2023. 6. 2. 20:29이성계의 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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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3 정사(1737) 10 14(무술) 맑음. 2() 3경에 달무리가 졌다

13-10-14[19] 소대를 행하여 《송원강목》을 진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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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辰時)에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갔다. 소대(召對)를 행하러 신하들이 입시한 자리이다. 참찬관 조적명(趙迪命), 검토관 정이검(鄭履儉), 사변가주서 유언국(兪彦國), 기사관 박성옥(朴成玉)ㆍ이종적(李宗迪)이 입시하였다.

정이검이 《송원강목(宋元綱目)》 제26편을 그 권의 끝까지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주서가 읽되 〈원순제기(元順帝紀)〉는 혼란하여 볼만한 것이 없으니 명(明)나라 태조황제(太祖皇帝)께서 군사를 일으킨 시말(始末)에 대한 대문(大文)을 집어내어 읽으라.”

하니, 유언국이 제27편을 그 권의 끝까지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성조(聖祖)의 시말은 현토를 존댓말로 해야 하는데 예사말로 하였으니, 이는 온당치 못하다. 주서가 읽을 때 거기에 달린 토를 따르지 말고 존댓말로 고쳐서 읽으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판윤은 누군가?”

하자, 조적명이 아뢰기를,

“민응수(閔應洙)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좌윤은 김흡(金潝)인가?”

하자, 조적명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윤은 누구인가?”

하자, 조적명이 아뢰기를,

“이진순(李眞淳)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서는 나가서 한성 우윤(漢城右尹) 이진순을 즉시 입시하도록 정원에 분부하되 패초하지는 말라.”

하고, 상이 이르기를,

“명(明)나라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의 일을 특별히 진강(進講)한 것은 내 뜻이 있어서였다. 우리나라는 명나라에 대하여 군신(君臣)과 부자(父子) 사이의 의리가 있고, 또 영원히 잊지 못할 은덕이 있다. 전에 《시경》의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을 강론하였을 때 서글픈 감회가 일었는데, 지금 성조께서 창업하신 시말(始末)을 강론하니 마치 황조(皇朝)의 성대했던 시절의 문물을 다시 보는 듯 황홀하여 내 마음에 나도 몰래 슬픈 감회가 인다.”

하고는, 상이 이어 오열하면서 말을 하지 못했다. 조적명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명나라 성조의 일에 대해 슬픈 감회가 일어 〈비풍〉과 〈하천〉의 뜻으로 누누이 하교하시니, 신들도 분하고 슬픈 마음에 흐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명나라는 원(元)나라의 더러움을 쓸어 내고 중화의 문물을 회복하였으니, 근 100년의 긴 밤이 지난 뒤에 밝은 해가 하늘 높이 뜬 듯이 나라를 세운 규모가 찬연히 볼만하였습니다. 글을 대하여 강독할 때 원나라가 망한 까닭과 황조가 흥한 까닭을 특별히 유념하여 밝게 살펴야 합니다.”

하였다. 정이검이 아뢰기를,

“성조께서 개국한 규모는 후대의 왕과 만세의 본보기가 될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경》에 이르기를 ‘단주(丹朱)처럼 오만하지 마소서.’라고 하였는데, 성인(聖人)과 광인(狂人)의 구분은 아주 작은 차이에 달려 있으니, 걸(桀)과 주(紂)가 난폭하더라도 사람이 걸이나 주와 같이 되는 것은 또한 아주 작은 차이와 하나의 생각에 달려 있을 뿐이다. 지금 원나라 순제(順帝)가 누기(漏器)를 조각한 일로 보면 재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만약 하나의 생각이 어긋나면 걸ㆍ주ㆍ원나라 순제처럼 되기가 어렵지 않다. 선(善)은 스승 삼을 수 있고 악(惡)은 본보기 삼을 수 있으니, 원나라 순제의 일도 어찌 거울로 삼아 경계할 것이 없겠는가. 하지만 내가 성조의 일을 집어내어 진강하도록 특별히 명한 것은 뜻이 있어서이니, 어찌 원나라가 혼란할 때의 일로서 황조의 문명이 성대할 때의 일에 대해 뒤섞어 서로 논할 수 있겠는가. 단지 황조의 일에 대해서만 문의(文義)를 진달하라.”

하였다. 정이검이 아뢰기를,

“전쟁을 치르며 창업할 때 먼저 유학을 숭상하였으니, 성조께서 나라를 세운 규모를 알 수 있습니다.”

하고, 조적명이 아뢰기를,

“‘황하가 맑아졌다.[黃河淸]’라는 한 구절의 말은 한(漢)나라가 처음 일어날 때 오성(五星) 동정(東井) 모였다.’라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명나라의 성조(聖祖)와 공자와 같은 만세의 스승의 가르침은 황홀히 내게 일러 주는 말인 듯하니 내가 스스로 힘쓰겠다. 하지만 지난번 연신이 요(堯)ㆍ순(舜)을 본받으려면 조종을 본받아야 한다고 진달하였는데, 지금 명나라 성조께서 신하들에게 하교하신 말씀을 보니 내 마음이 실로 감회가 일어난다. ‘기강이 서지 않으면 군주는 황음(荒淫)하고 신하는 제멋대로 하니, 이 때문에 법도가 행해지지 않는다.’라고 하고, 또 ‘예법은 나라의 기강이니 예법이 확립되면 사람의 뜻이 굳건하여 상하가 안정된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재상과 장수들이 성조를 본받아 협심하여 다스려 공업을 이루어 구차히 늘 하던 유시를 하는 일이 없다면 나랏일에 어찌 보탬이 되지 않겠는가. 성조께서 창업한 규모는 너무나 원대하지만 먼저 기강을 세우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으니 ‘기강을 세운다.[立紀綱]’라는 세 글자가 어찌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제일가는 요법(要法)이 되지 않겠으며 또한 어찌 오늘날의 급선무가 되지 않겠는가. 생각건대 지금 금과옥조가 찬란히 구비되어 있지만 국세가 이와 같은 것은 오로지 기강이 서지 않은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이는 바로 내가 스스로 면려할 점이고 또한 서로 면려하는 도리가 없을 수 없다. 이러한 뜻으로 거조를 내어 묘당에 신칙하라.”

하였다. - 산삭(刪削)하여 거조를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