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감숙)을 살피건대, 소생시킴을 다하지 못하여

2023. 6. 14. 20:15이성계의 명조선

도은집 제1권 / 시(詩) 봉정대부(奉正大夫) 직예문관 예문응교 지제교(直藝文館藝文應敎知製敎) 신(臣) 변계량(卞季良)이 하교를 받들어 편차(編次)하다.

하남의 곽구주가 사신으로 왔다가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그의 이름은 영석이다. 〔送河南郭九疇使還 名永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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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이르기를 아 상제께서 / 帝曰惟上帝
짐을 보호하려고 출중한 인재를 내셨도다 / 保朕生豪英
승상으로 짐을 보필하는 그대 역시 / 丞相爾朕弼
충의가 옛날의 아형과 똑같도다 / 忠義同阿衡

 

도적의 무리가 아직도 없어지지 않아 / 寇盜未衰息
민심이 추악한 행위에 염증을 내는도다 / 民心厭羶腥
그대에게 명하노니 짐의 뜻을 체득하여 / 命爾體朕意
어서 가서 반역자를 처단할지어다 / 往哉幹不庭
이에 명공이 절월을 내려 받고 / 明公受節鉞
충렬을 떨쳐 의로운 군대를 거느렸나니 / 奮烈將義兵
신하로서 만약 사태를 안정시키지 못한다면 / 臣若不集事
무슨 얼굴로 조정에 복귀하리오 / 胡顔復朝廷
신하가 실로 담기와 지략이 있는 데다 / 臣實有膽略
자기 몸 보기를 지푸라기처럼 하였고 / 視身如寸莛
백만 군사들도 용맹스럽기 그지없어 / 桓桓百萬衆
지붕 위의 물병보다 형세가 유리하였나니 / 勢甚高屋瓴
진을 펼치매 하늘의 위엄이 빛났고 / 鋪敦耀天威
호령을 내리매 뇌정처럼 치달렸어라 / 號令馳雷霆

 

그런 중에 우리가 선왕이 이룬 공훈을 생각하며 / 聞我念前勳
적개심을 품고서 황령을 도우려 한다는 말을 듣고 / 敵愾贊皇靈
마음과 힘을 합쳐 서로 돕자는 취지에서 / 政欲共心力
만리 길에 사신을 통해 은근한 뜻을 전했도다 / 萬里通丁寧
제 환공이 이룬 성대한 사업을 / 齊桓事業盛
성인이 경서에 특별히 기록하였는데 / 聖人書諸經
주나라의 안녕을 도모한 아름다운 일이 / 美矣謀寧周
어찌 유독 수지의 맹약뿐이라 하겠는가
 / 豈獨首止盟
두 분 임금님이 우호관계를 맺었으니 / 兩君旣相好
반역 도당이야 평정할 것이나 있으리오 / 孼芽安足平

 

변변찮은 이 몸 역시 불안한 가운데 / 鄙夫亦不寧
마음이 유독 기울어지며 경앙하였는데 / 景仰心獨傾
그대를 보니 홀연히 얼굴이 펴지면서 / 見子忽破顔
백안도 청안으로 바뀔 수가 있었다오 / 白眼還能靑

 

고상한 논의 접하고서 얼마나 즐거웠던지 / 怡然接高論
기발한 필봉은 숫돌에서 금방 꺼낸 듯했지요 / 奇鋒新發硎
너무 늦게 만난 것을 한스럽게 여겼는데 / 相逢恨已晩
더구나 수레를 또 급히 돌려야 하다니요 / 況復回飛軨

 

긴 하늘 저 멀리 갈 길은 험난한데 / 天長道途阻
세모에 서리와 눈발이 또 떨어지니 / 歲暮霜雪零
청컨대 그대 부디 여행길 조심하여 / 請子愼行邁
고독한 이 몸의 시름 위로해 주오 / 慰我憂煢煢

[-D001] 하남(河南) …… 전송하다 : 

1366년(공민왕15) 11월에 하남왕(河南王)이 공민왕의 빙문(聘問)에 보답하는 뜻으로 중서 검교(中書檢校) 곽영석(郭永錫)을 김제안(金齊顔)과 함께 고려에 파견했다는 기록이 《고려사》 권41 〈공민왕세가4〉에 보인다.

[-D002] 황제가 …… 똑같도다 : 

황제는 원 순제(元順帝)를, 승상은 하남왕을 가리킨다. 하남왕은 이름이 확확첩목아(擴廓帖木兒)로 양부(養父) 찰한첩목아(察罕帖木兒)의 뒤를 이어 천하총병관(天下摠兵官)이 되었으며, 순제(順帝) 24년(1364)에 패라첩목아(孛羅帖木兒)가 대도(大都)에 진주(進駐)하여 황태자가 태원(太原)으로 도망치자, 25년에 황태자를 옹위하고 패라첩목아를 정벌하여 순제가 패라첩목아를 복주(伏誅)하게 하였고, 그 뒤에 대도로 들어와서 좌승상(左丞相)의 지위에 올랐다. 《元史 卷141》 《新元史 卷220》 이에 고려에서도 1366년(공민왕15) 3월에 밀직제학(密直提學) 전녹생(田祿生)을 그에게 보내 빙문(聘問)하고 황태자의 환도(還都)를 축하하였으며, 또 그해 5월에 정원비(鄭元庇)를 보내 다시 하남왕을 빙문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高麗史 卷41 恭愍王世家4》 아형(阿衡)은 상(商)나라 시조 탕왕(湯王)의 현상(賢相)인 이윤(伊尹)의 별칭이다.

 

[《원사(元史)》 141권 〈확곽첩목아전(擴廓帖木兒傳)〉ㆍ196권 〈보안불화전(普顔不花傳)〉]

처음에 패라첩목아(孛羅帖木兒)가 사형을 당한 후에 순제(順帝)는 백쇄주(白鎖住)의 군대에 조서(詔書)를 내려 경성을 수비하게 하였다. 드디어 황태자에게 조서를 내려 경성에 돌아오게 하였는데, 확곽첩목아(擴廓帖木兒) 또한 황태자를 호종하여 입조(入朝)하였다. 조서를 내려 백살리(伯撒裏)를 우승상(右丞相), 확곽첩목아를 좌승상(左丞相)으로 임명하였다. 백살리는 누대(累代)에 걸친 훈구 신료이고, 확곽첩목아는 후대에 뒤늦게 태어났는데 이때에 와서 마침내 나란히 재상이 되었다.

두 달이 지나 확곽첩목아는 남쪽으로 돌아가 군대를 시찰하도록 요청하였다. 이때 중원(中原)은 별다른 일이 없었지만, 강회(江淮)ㆍ천촉(川蜀) 지역은 모두 조정이 점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황태자가 누차 군사를 감독하러 나가겠다고 청하였으나 황제는 곤란하다고 여겼다. 이에 조서를 내려 확곽첩목아를 하남왕(河南王)으로 봉하고, 천하의 군사를 통괄하여 대신 가도록 하였다. 확곽첩목아가 중서성의 관원을 나누어 자신을 따르게 하니, 관속(官屬)의 성대함이 거의 조정과 대등하였는데, 손저(孫翥)ㆍ조항(趙恒) 등을 등용하여 모주(謀主)로 삼았다. 그는 경성에서 하남으로 돌아온 뒤로 부친의 묘지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서 상례(喪禮)를 마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좌우 사람들이 모두 출사(出師)의 명을 받고서 중도에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에 다시 북쪽으로 건너가 회경(懷慶)에 거주하다가 또 창덕(彰德)으로 이주하였다.

처음에 이사제(李思齊)와 찰한첩목아(察罕帖木兒)가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킬 때는 나이와 지위가 서로 대등하였다. 이때에 와서 확곽첩목아가 군대를 통솔하니 이사제는 내심 복종할 수 없었다. 장량필(張良弼)이 가장 먼저 항명하였고, 공흥(孔興)ㆍ탈렬백(脫列伯) 등도 모두 공을 세운 것으로 자부하며 각기 다른 생각을 품고는 별도로 한 군대를 이끌게 해달라고 요청하면서 기꺼이 예속되려고 하지 않았다. 서로 틈이 생긴 뒤로 드디어 원수지간이 되었다. 확곽첩목아는 이내 관보(關保)ㆍ호림적(虎林赤)을 보내어 병력을 이끌고 서쪽의 녹대(鹿臺)로 가서 장량필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사제 또한 장량필과 회합하는 바람에 전쟁이 계속되어 멈추지 않았다.

황태자가 태원(太原)으로 달아났을 때, 당 숙종(唐肅宗)이 영무(靈武)에서 즉위한 옛 일을 따라서 스스로 황위에 오르고자 하였으나, 확곽첩목아와 패란해(孛蘭奚) 등이 따르지 않았다. 경사(京師)로 돌아오자 황후 기씨(奇氏)가 확곽첩목아에게 전지(傳旨)하여 중병(重兵)을 이끌고 태자를 옹위해서 입성(入城)한 뒤 황제에게 선위(禪位)할 것을 협박하도록 하려고 하였다. 확곽첩목아는 황후의 뜻을 알고서 경성 30리 부근에 도착하였을 때 즉시 군대를 해산시키니, 이 일로 인하여 황태자는 마음으로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이때에 와서 누차 강회(江淮)로 출병하도록 독촉하니, 확곽첩목아는 단지 동생 탈인첩목아(脫因帖木兒)와 부장(部將) 완철(完哲)ㆍ맥고(貊高)에게 군대를 이끌고 산동(山東)에 가게 하였으나, 서쪽의 군대가 서로 승부를 겨루어서 마침내 전쟁을 마치지 못하였다. 황제가 또 조서를 내려 그들에게 화해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황태자에게 명하여 친히 나가서 천하의 병마를 통괄하게 하고, 별도로 확곽첩목아에게 군대를 이끌고 동관(潼關)으로부터 동쪽으로 가서 강회(江淮) 일대를 평정하게 하고, 이사제에게 군대를 이끌고 봉상(鳳翔)으로부터 서쪽으로 가서 진군하여 천촉 지역을 탈취하게 하였다. 그러나 확곽첩목아는 시종 명령에 항거하고 기꺼이 명을 따르지 않았다.

관보(關保)는 찰한첩목아가 군대를 일으킨 이후에 즉시 장수가 되었는데, 제군(諸軍) 중에서 용맹이 으뜸이고 공적이 가장 높았다. 그리고 맥고는 군사(軍事)를 논하는 것에 뛰어났기 때문에 더욱 찰한첩목아의 신임을 받았다. 이때에 와서 두 사람은 확곽첩목아가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려고 하지 않는 마음을 지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문에 모두 그를 배반하고 그의 죄상을 열거하였으며, 소장(疏章)을 올려 말하기를, “신하된 자는 군주를 섬기는 것으로 충성을 다하는 법인데, 지금 총병관(總兵官) 확곽첩목아는 해마다 관군(官軍)과 원수가 되어 살인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신들은 곧 나라에서 배양한 사람이온데 어찌 그에게 머리를 숙이고 그의 명령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별도의 중신(重臣)을 선발하여 대군을 총괄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였다. 조서를 내려 확곽첩목아의 태부(太傅)ㆍ중서좌승(中書左丞)의 직위를 해제하고, 종전에 하남왕이었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여주(汝州)를 식읍(食邑)으로 삼고, 수행하던 관속(官屬)들을 다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확곽첩목아가 통솔하는 제군(諸軍) 중에서 군막 앞에 있는 자들은 백쇄주ㆍ호림적이 거느리고, 하남에 있는 자들은 이극이(李克彝)가 거느리고, 산동(山東)에 있는 자들은 사람답아(沙藍答兒)가 거느리고, 하북(河北)에 있는 자들은 맥고가 거느리게 하였다. 확곽첩목아는 조서를 받은 뒤에 즉시 군대를 퇴각시켜 택주(澤州)에 주둔하였다. 조서를 내려 또 독로(禿魯)와 이사제ㆍ장량필ㆍ공흥ㆍ탈렬백에게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천토(天討)가 바르게 시행될 수 있도록 하였다. 확곽첩목아는 즉시 군대를 보내어 태원(太原)을 점거하고, 조정에서 설치한 관원을 모조리 죽였다.

이에 황태자가 위새인불화(魏賽因不花)와 관보(關保)에게 명하여 모두 군대를 이끌고 가서 이사제ㆍ장량필의 제군(諸軍)과 택주(澤州)를 협공하게 하고, 천자 또한 조서를 내려 확곽첩목아의 작위와 봉읍(封邑)을 삭탈하고, 제군(諸軍)으로 하여금 일제히 그를 죽이게 하였으며, 그의 수하 장사(將士)와 관리 중에서 조정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본래의 죄를 면제해 주었으나 손저(孫翥)와 조항(趙恒)의 죄는 용서하지 않았다.

확곽첩목아는 퇴각하여 평양(平陽)을 지키고 있었는데, 관보가 드디어 택주ㆍ노주(潞州) 두 주(州)를 점거하여 맥고와 회합하였다. 그때 이사제ㆍ장량필ㆍ공흥ㆍ탈렬백은 확곽첩목아와 교전한 지 이미 오래되었고, 대명(大明)의 군대도 당시 이미 하남(河南)까지 도달하였다. 황제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잘못을 뉘우치고 깨달아서 조서를 내려 확곽첩목아의 종전 잘못을 없애 주었다.

이에 이르러 대명(大明)의 군대가 이미 산동(山東)과 하(河)ㆍ낙(洛) 지역을 평정하니, 중원 땅을 모두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확곽첩목아를 종전대로 하남왕(河南王)ㆍ태부(太傅)ㆍ중서좌승상(中書左丞相)에 제수한다고 거듭 명하고, 손저ㆍ조항도 옛 직책을 회복시켜서 군대를 이끌고 하북(河北)으로부터 남쪽으로 가서 토벌하게 하고, 야속(也速)에게 군대를 이끌고 산동으로 달려가게 하며, 독로의 군대를 동관으로 출격시키고, 이사제의 군대를 칠반(七盤)ㆍ금(金)ㆍ상(商)으로 출격시켜 변(汴)ㆍ낙(洛) 지역의 수복을 도모하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야속의 군대가 드디어 궤멸되고, 독로와 이사제의 군대 역시 출동하지 못하였다. 확곽첩목아도 평양(平陽)에서 퇴각하여 태원을 지키면서 다시는 감히 남쪽으로 가지 못하였으니, 사정이 이미 만회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대명의 군대가 역주(嶧州)를 빼앗고 익도로(益都路)를 취하자, 평장정사(平章政事) 보보(保保)가 투항하였고, 선위사(宣慰使) 보안불화(普顔不花), 총관(總管) 호준(胡濬), 지원(知院) 장준(張俊)도 모두 목숨을 잃었다.

처음에 보안불화는 강서행성낭중(江西行省郎中)이 되어 기(蘄)ㆍ황(黃)의 도적과 서수휘(徐壽輝)가 침범해오는 상황을 맞게 되었는데, 보안불화는 싸워 수비한 공로가 많았기 때문에 뒤에 중서참지정사(中書參知政事)가 되었다. 조서를 내려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 이국봉(李國鳳)과 함께 강남(江南)을 다스리게 하였다. 건녕(建寧)에 있을 때 강서(江西)의 진우량(陳友諒)이 등극명(鄧克明)을 보내 침범하자, 평장정사(平章政事) 아로온사(阿魯溫沙) 등이 모두 야반도주하였다. 이국봉은 당시 병사를 나누어 연평(延平)을 진수(鎭守)하였으나, 성이 함락되자 역시 도주하였다. 보안불화가 말하기를, “나는 교지를 받고 여기에 왔으니, 도망간들 장차 어디로 가겠는가? 맹세코 이 성(城)과 존망(存亡)을 함께하겠다.”라고 하고는, 각 문에 옹성(甕城)을 쌓도록 명하였다. 그 뒤 64일 동안 항전하니, 적군이 패배하여 돌아갔다. 이튿날 소환하여 산동선위사(山東宣慰使)에 제수하고 익도(益都)를 수비하게 하였다.

이때에 대명의 군대가 국경에 닥쳐오자 보안불화는 성을 지키며 힘껏 싸웠으나, 성이 함락되자 평장정사 보보가 나가서 투항하였다. 보안불화가 집에 돌아가 모친에게 말하기를, “아들은 충(忠)과 효(孝) 둘 다를 온전히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두 아우가 있으니 마땅히 어머니를 끝까지 봉양할 것입니다.”라고 하고서 어머니께 절하고 떠난 뒤 관사(官舍)로 달려가 당상(堂上)에 앉았다. 대명의 주장(主將)이 평소 그가 어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두세 번 불렀으나 그는 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손을 결박하고 얼굴을 내밀게 한 채로 국문하니, 보안불화가 말하기를, “나는 원(元)나라 조정의 진사(進士)로 관직이 극품(極品)까지 올랐다. 사정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 살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그의 아내 아로진(阿魯眞) 또한 아들을 안고서 집 북쪽 우물에 투신하고, 그의 딸과 첩 모두 우물로 따라 들어가 익사하였다.【96】

 

동문선 10 / 오언율시(五言律詩)

춘색(春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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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장수(偰長壽)

 

천지에 봄빛은 그럴 듯한데 / 春色可天地
강회에는 아직 전쟁일세 / 江淮猶甲兵
부질없이 시로 세월을 보내고 / 謾依詩歲月
세상의 공명은 부러워하지 않네 / 不羨世功名
흰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는 듯한데 / 白眼如無見
푸른 산은 정이 있는 듯도 하다 / 青山似有情
애오라지 탁주에 뜻을 부쳐 / 濁醪聊適意
때때로 아이 불러 잔을 기울이네 / 時復喚兒傾

 

동문선 17 / 칠언율시(七言律詩)

가을에 흥겨워서[高秋感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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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장수(偰長壽)

 

거용관 밑 예전 창평 고을 / 居庸關下古昌平
용호대 앞의 옛날 황제의 서울 / 龍虎臺前舊帝京
한밤중 서늘한 바람이 가죽 장막에 불고 / 半夜涼風吹毳帳
한 잔 맑은 이슬이 금경에서 나왔구나 / 一杯淸露出金莖
3천 무사들의 호위도 장했을씨고 / 三千武士嚴輿衛
열 여섯 천마도 성미에 다 맞았네 / 十六天魔適性情
만 리 밖에 와서 행락하던 곳 슬퍼하노니 / 萬里却嗟行樂地
빈 성엔 연기만 자욱, 풀조차 시들었구나 / 淡煙衰草滿空城

[-D001] 창평(昌平) : 

현 북평(北平)의 북쪽 고을. 북평 북방의 첫째 요해지.

 

동문선 103 / ()

근사제일고 (近思齊逸藁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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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장수(偰長壽)

 지정 무술년 1358년

선인(先人 사망한 아버지의 호칭)의 초고(草藁)가 연도(燕都 북경)에 있을 때에는 원래 모두 7책으로 되어 있었으니, 몸소 분류하여 13권으로 하였던 것이다. 지정(至正) 무술년에, 마침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상고(喪故)를 당하여, 대령(大寧)으로 나와 우거하고 있더니, 이 해 섣달에, 홍구(紅寇)의 난리를 만나 세간과 서적이 씻은 듯이 없어졌던 것이다. 드디어 홀몸으로 동으로 달려, 기해년 봄에 송경(松京)에 도달하였고, 인하여 기억에 잊지 않은 것을 기록하여 두 질(帙)을 만들고 이를 《근사재일고》라 하니, 무릇 시와 문을 합하여 모두 7백여 수가 되었으며 압강(鴨江 압록강)을 건너면서부터 주년(週年) 사이에, 또한 3백여 수가 되어, 따로 한 질을 만들고는 《지동록(之東錄)》이라 일렀다. 선인이 세상을 버리시게 되자, 돌아간 숙부 첨추공(簽樞公) 공명(公明)과 지금의 상보공(尙寶公) 공문(公文)과, 및 장수 등이 의론하기를, “서문을 한산(韓山) 이상국(李相國 이색)에게 청구하여 이내 판재에 새겨 영원히 전하게 할 계책을 도모하자.” 하였으나, 논의의 결정을 보지 못한 채 여러 숙부가 서방으로 돌아가자, 고자(孤子 아버지를 잃고서 자칭하는 말)의 힘이 미약하여 일은 드디어 중지되고 말았다. 이에 앞서 광산(光山) 김자윤 중빈(金子贇仲彬)이 일찍이 한 번 배타고 논 바 있고, 또 그 대략의 경위를 알고 있었는데, 신축년 가을에 내가 우거하는 집에 들려서 말하기를, “내가 《근사일고(近思逸藁)》가 있음을 들었으나, 아직 한 번 보지 못하였으니, 혹 빌려 볼 수 있느냐.” 하기에, 나는 사절하지 못하고, 우연히 강좌(江左)에 있을 때에 지은 것 한 질을 내주어, 이로서 그 소청을 말막음 하였던 것이다. 홍구가 서울을 침범함에 미쳐서 창졸간에 달아난 까닭에 나의 소장본은 다시 존류(存留)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난이 평정되자 김군이 홀로 이 편질을 완전히 보전하여 돌려주므로, 내가 놀랍고 기뻐서 두 번 절하였다. 그러나 역시 전일의 소원 만은 능히 수응하지 못하였다. 홍무(洪武) 임자년에, 내가 진양(晉陽)의 수령으로 나가니, 때마침 김군이 이 고을의 통판(通判 판관과 같음)으로 있었다. 이로 인하여 개연히 나를 돌아 보고 말하기를, “《일고》의 이미 유실된 부분은 진실로 다시 어찌 할 도리가 없으나, 다행히 남아 있는 것은 오히려 장구하게 전할 수 있다. 그대가 만약 감히 사역(私役)을 할 수 없다고 사양하지 않는다면 나는 장차 나의 사재를 들여서라도 하겠다.” 한다. 이리하여 각공을 모집하고, 판재(板材)를 구입하여 10일이 못 되어 그 일을 마쳤던 것이다. 아, 자식이 되어 능히 유적을 보전 수호하지 못한 것은, 진실로 천지 사이에 용납하지 못할 죄이다. 김군이 한 번 안 까닭으로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정성을 기울여서 이미 보전하여 잃지 않게 하고, 또 일을 도와서 후세에 전하게 하니, 비록 옛사람의 충후(忠厚)라 할지라도 이보다는 더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알지 못할 것은 설씨의 자손들이 그 덕을 만 분의 하나라도 능히 갚을 수 있을지의 여부이다.

 

설장수

偰長壽천민(天民), 운재(芸齋), 문량(文良)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천민(天民), 호는 운재(芸齋). 부원후(富原侯) 설손(偰遜)의 아들이다. 본래 위구르(Uighur, 回鶻) 사람으로 1358년(공민왕 7) 아버지 설손이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해 고려로 올 때 따라와 귀화(歸化)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60년 경순부사인(慶順府舍人)으로 있던 중 부친상을 당했는데, 서역인(西域人)이므로 왕이 특별히 명해 상복(喪服)을 벗고 과거에 나아가게 하였다. 1362년 문과에 급제해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에 오르고, 왜구를 퇴치할 계책을 올렸으나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어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고,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으며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에 녹권(錄券)되었다. 1387년(우왕 13)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389년(창왕 즉위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우왕(禑王) 손위(遜位)의 표문(表文)을 가지고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공양왕(恭讓王)을 세울 때 모의에 참여, 공이 있었으므로 1390년(공양왕 2)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정난공신(定難功臣)의 호를 받았고, 1392년 판삼사사(判三司事)로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였다. 이 해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될 때 일당으로 지목되어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太祖)의 특명으로 1396년(태조 5)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복직되고, 계림(鷄林: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을 본관으로 받고 연산부원군(燕山府院君)에 봉해졌다. 1398 정종(定宗)이 즉위하자, 계품사(啓禀使)로 명나라에 가던 도중 명나라 태조가 죽었으므로 진향사(進香使)로 사명(使命)이 바뀌어 북경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전후 8차에 걸쳐 명나라에 사신으로 왕래하였다. 시와 글씨에도 능하였다.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저서로는 『직해소학(直解小學)』·『운재집(芸齋集)』이 있다

 

中華民國元年二月十五日辛酉,

중화민국 원년(1912) 2월 15일(양력)[1] 신유,

臨時總統孫文, 謹昭告於明太祖開天行道肇紀立極大聖至神仁文義武俊德成功高皇帝之靈曰: 

임시대총통 손문은 삼가 명 태조 개천행도조기입극대성지신인문의무준덕성공 고황제의 영령에 밝혀 고합니다.

嗚呼!

아아!

國家外患, 振古有聞,

국가의 외환이 예로부터 들은 바가 있으나,

趙宋末造, 代於蒙古,

조송의 말세에 몽고에 대체되자,

神州陸沉, 幾及百年.

신주가 육침하여(國亡) 거의 백 년에 이르렀습니다.

我高皇帝

우리 고황제께서는

應時崛起, 廓清中土,

시운에 응하여 굴기하시어 중토를 숙청하시고,

日月重光, 河山再造,

일월이 다시 비추어, 하산을 재조하셨으며,

光復大義, 昭示來茲.

대의를 광복하심이, 밝혀 보이시어 이에 이르렀습니다.

不幸季室俶擾, 國力罷疲,

불행히 말년의 황실이 소란하여, 국력이 피폐해져,

滿清乘間, 竊據中夏,

만청이 그 때를 타고, 중하를 훔쳐서 차지하여,

嗟我邦人, 諸父兄弟,

아, 우리나라 사람들의 제부와 형제가

迭起迭覆, 至於二百六十有八年.

계속 일어나고 쓰러진 지가 이백육십팔년[2]에 이르렀습니다.

嗚呼! 我高皇帝

아아! 우리 고황제께서

時怨時恫, 亦二百六十有八年也.

때때로 원망하고 상심하신 지도 이백육십팔년입니다.

歲在辛亥八月,

세재 신해 팔월(음력 기준, 양력 1911년 10월 10일),

武漢軍興, 建立民國.

무한에서 군사가 일어나, 민국을 건립하였습니다.

義聲所播, 天下響應,

의로운 함성이 퍼뜨려진 바에, 천하에서 향응하여,

越八十有七日, 既光復十有七省,

팔십칠일이 지나[3], 이미 열일곱 성을 광복하였고,

國民公議, 立臨時政府於南京,

국민의 공의로 남경에 임시정부를 세웠으며,

文以薄德, 被推為臨時總統.

문이 박한 덕으로 임시총통에 추대되었습니다.

瞻顧西北, 未盡昭蘇,

서북(감숙)을 살피건대, 소생시킴을 다하지 못하여[4],

負疚在躬, 尚無以對我高皇帝在天之靈.

가책이 스스로에 있어, 여전히 우리 고황제의 하늘에 계신 영령에 대할 바가 없었습니다.

邇者以全國軍人之同心, 士大夫之正義,

근자에 전국 군인들의 한마음과, 사대부들의 정의로써,

卒使清室幡然悔悟, 於本月十二日宣告退位,

마침내 청실로 하여금 철저히 뉘우치며, 본월 12일(양력)에 퇴위를 선고하도록 하여,

從此中華民國完全統一, 邦人諸友,

이로부터 중화민국이 완전히 통일되어, 나라 사람들과 제우들이

享自由之幸福, 永永無已,

자유의 행복을 누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게 되었으니,

實維我高皇帝, 光復大義,

실로 오직 우리 고황제께서 대의를 광복하시어,

有以牖啟後人, 成茲鴻業.

후세 사람들을 깨우치심이 있어, 이러한 홍업을 이룬 것입니다.

文與全國同胞, 至於今日,

문은 전국의 동포들과 오늘에 이르러,

始敢告無罪於我高皇帝,

비로소 감히 우리 고황제께 무죄를 고하며,

敬於文奉身引退之前,

삼가 문이 몸을 받들어 관직에서 물러나기 전에[5],

代表國民, 貢其歡欣鼓舞之公意,

국민을 대표하여, 그들이 기뻐하며 춤추는 공의를 바치나니,

惟我高皇帝實鑒臨之,

다만 우리 고황제께서는 실로 감림하소서.

敬告.

삼가 아뢰나이다.

 

2. 알명태조릉문

維有明失祀二百六十有七年,

유 유명실사 이백육십유칠년[6],

中華民國始建,越四十有二日,

중화민국이 비로소 세워지고[7], 사십이일이 지나,

清帝退位,共和鞏立,

청 황제가 퇴위하여, 공화가 우뚝 서고,

民國統一,永無僭亂。

민국이 통일되어, 참란이 영원히 없게 되었습니다[8].

越三日, 國民公僕臨時大總統孫文

사흘이 지나, 국민의 공복인 임시대총통 손문이

謹率國務卿士文武將吏

삼가 국무의 경사와 문무의 장리를 이끌고

祗謁大明太祖高皇帝之陵而祝以文曰:

대명 태조 고황제의 릉에 지알(공경하게 진현함)하고 축문하여 말합니다.

昔宋政不綱,遼元乘運,

일찍이 송의 정사가 기강이 없어, 요와 원이 시운을 타고,

擾亂中夏,神人共憤。

중하를 요란하여, 신과 사람이 함께 분노하였습니다.

惟我太祖, 奮起草野,

오직 우리 태조께서 초야에서 떨쳐 일어나,

攘除奸兇,光復舊物,

간흉을 물리쳐 없애시고, 옛 땅을 광복하여,

十有二年,遂定大業,

십이년이 지나[9], 마침내 대업을 정하시고,

禹域清明,污滌羶腥,

우역(=중국)이 청명하였으며, 비린내나고 노린내나는(=이민족) 더러움을 씻으시어,

蓋中夏見制於邊境小夷者數矣,

대개 중하가 변경의 작은 오랑캐들에게 제어를 보임이 수 차례 있었지만,

其驅除光復之勳,未有能及於太祖之偉碩者也。

그 구제하고 광복하신 위훈이 태조의 크고 크심에 능히 미칠 수 있는 바가 아직 있지 아니합니다.

後世子孫不肖,不能繼厥英武。

후세의 자손이 불초하여, 그 영무하심을 이을 수 없었습니다.

委政小人,爲猶不遠[10]

소인에게 정사를 맡겨, 정치함이 원대하지 못하여,

卵翼東胡,坐滋強大,

동쪽 오랑캐를 품어 길러, 늘어나서 강대하게 되도록 하여,

因緣盜亂,入據神京,

이에 따라 도적질하고 반란하며, 들어와 신경을 차지했고,

憑肆淫威,宰制赤縣,

음위에 의지하여 방자하게, 적현(=중국)을 재제하여,

山川被其瑕穢,人民供其刀坫;

산천이 그 더러움을 입고, 인민이 그 칼날에 바쳐져,

雖義士逸民,跋涉嶺海,

비록 의사와 일민(학문과 덕행이 있는 은자)이라도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冀拯冠裳之沉淪,續祚胤於一線,

관상(=갓과 의복, 즉 문명)의 침몰에서 빠져나오고, 후사를 일선에서 잇기를 바라며,

前覆後起,相繼不絕,

앞에서 넘어지면 뒤에서 일어나면서, 서로 이어짐이 끊이지 않았지만,

而天未悔禍,人謀無權,

하늘에서 아직 화를 뉘우치지 않아, 사람의 모략에 권한이 없어,

徒使歷史編末添一傷心故事而已。

공연히 역사의 편말에 하나의 마음 아픈 고사를 더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自是厥後, 法令益嚴,罪罟益密,

이 이후로부터 법령이 더욱 엄해지고, 죄망이 더욱 은밀해져,

嗟我漢人,有重足傾耳,拑口結舌,

아, 우리 한인들이, 발을 모으고 귀를 기울이며, 입을 다물고 혀를 묶어[11],

以保性命不給,而又假借名教,

생명을 지키려 하였으나 족하지 않자, 다시 명교를 빌려,

盜竊仁義,錮蔽天下,使無異志,

인의를 훔치고 천하를 막고 가려, 다른 뜻이 없도록 하였고,

帝制之計,既周且備,

제제의 대계가 주에서 또한 갖추어졌지만,

將藉奸術,常保不義,

간사한 술수에 의지하려 하여, 늘 불의를 지켰습니다.

然而張、曾畫策於密室,林清焱起於京畿,

그러나 장(), 증()이 밀실에서 계책을 꾸미고, 임청[12]이 경기에서 떨쳐 일어났으며,

張、李倡教於川隴,洪、楊發跡於金田,

장(), 이()가 천롱에서 창교하고, 홍(수전), 양(수청)[13]이 금전에서 발자취를 일으켜,

雖義旗不免終蹶,亦足以見人心之所嚮矣。

비록 의로운 깃발이 종말을 면하지 못하였지만, 또한 인심이 향하는 바를 보이기에 족하였습니다.

降及近世,真理昌明,

근세에 내려와, 진리가 창성하여,

民族民權, 盎然人心,

민족과 민권이, 인심에 넘쳐흘러,

加以虜氛不競,強敵四陵。

노분(오랑캐로 인한 재앙의 조짐)이 쇠미해지고, 강적이 사방을 범함에 더해졌습니다.

不寶我土,富以其鄰,

우리 땅을 보배로 여기지 않아 그 이웃을 부유하게 하여,

國人雖不肖,猶是神明之冑,

국인들이 비록 불초하였지만, 여전히 이들이 신명의 후예라,

豈能忍此終古,以忝先人之靈乎?

어찌 이를 영원히 참아, 선인들의 영령을 더럽힐 수 있었겠습니까?

於是俊傑之士,飈發雲起,

이에 준걸의 지사들이 회오리와 구름처럼 일어나서,

東南厥始發難,吳樾震以一擊,

동남에서 처음으로 병란이 일어나, 오월[14]이 일격으로 진동하였고,

徐錫麟注彈丸於滿酋之腹,

서석린[15]이 탄환을 만추의 배에 쏘았으며,

熊成基舉燧大江之涘,

웅성기[16]가 대강의 강가에서 봉화를 일으켰으며,

以及萍鄉之役,鎮南關之役,

평향의 역[17]과 진남관의 역[18],

最近北京暗殺之役,羊城起義之役,

최근의 북경 암살의 역[19], 양성기의[20]의 역에 미치기까지,

屢起屢躓,再接再厲,

여러 번 일어나고 넘어졌지만, 더욱더 힘쓰고 분발하여,

天下為之昭蘇,虜廷為之色悸,

천하에서 소생으로 여겼고, 오랑캐 조정에서 안색이 두렵게 되어,

醞釀蟬蛻,以成茲盛。

선퇴(매미의 허물)를 품어내면서, 이로써 이 성대함을 이루었습니다.

武漢首義,天人合同,

무한에서 처음으로 기의하자 하늘과 사람이 합동하여,

四方嚮風,海隅景從,

사방에서 흠모하고 해우에서 그림자처럼 따라,

遂定長江,淹有河淮,

마침내 장강을 평정하고 하회를 엄유하였으며,

北方既協,攜手歸來,

북방에서 협상하자 손을 맞잡고 귀의하여 오니,

虜廷震懼,莫知所為,

오랑캐의 조정이 두려워 떨며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奉茲大柄,還我國人,

대권을 받들어 우리 국인들에게 돌려,

五大民族,一體無猜。

다섯 큰 민족[21]들이, 한 몸이 되어 시기가 없게 되었습니다.

嗚呼休哉!

아아, 기쁘도다!

非我太祖在天之靈,何以及此?

우리 태조의 하늘에 계신 신령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에 이르렀겠습니까?

昔嘗聞之,

옛날에 일찍이 듣기를,

夷狄之運,不過百年,

이적의 운수가 백 년을 지나지 않을 거라 하였지만[22],

滿清歷年,乃倍而三,

만청의 역수가 도리어 세 배가 되었으나,

非天無常,事會則然。

하늘이 무상함이 아니라, 일의 때가 그러하였던 것입니다.

共和之制,亞東首出,

공화의 제도가 아시아의 동쪽에서 처음으로 나와,

事兼創造,時無遲速,

일이 창조를 겸하고, 때가 느리고 빠름이 없이,

求仁得仁,焉用怨讟。

어짊을 구하여 어짊을 얻는데, 어찌 원망을 필요로 하겠습니까?

又聞在昔救時之士,

또한 듣기로 옛적에 시대를 구하였던 지사들이

常躋斯丘,勗勵軍志,

늘 이 언덕에 올라 군사들의 뜻을 격려하며,

俯仰山川,欷噓流涕,

산천을 두루 보며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렸는데,

昔之所悲,今也則樂,

옛적의 비통한 바가 오늘의 즐거움이 되고,

鬱鬱金陵,龍蟠虎踞,

무성한 금릉(남경)은,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형세로[23],

宅是舊都,海宇無吪,

주거가 옛 도성이며, 해우에 그릇됨이 없어,

有旆肅肅,有旅振振,

기치가 엄숙하고 군대가 진동하며,

我民來斯,言告厥成,

우리 국민이 이곳에 와서, 그것의 이루어짐을 고하나니,

喬木高城,後先有輝,

높은 나무와 성이 앞뒤로 광휘가 있어,

長仰先型,以式來昆。

앞선 모범을 영원히 우러러, 후손(내곤)들을 본받게 하나이다.

伏維尚饗。

엎드려 바라오니 흠향하소서.

 

[9] 명이 건국된 1368년으로부터 12년 전은 1356년이다. 이 해에 명태조는 남경을 장악하였다.

[21] 한족, 만족, 몽족, 회족, 장족(티베트)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