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遼) 지역은 낮고 더러우며 황하의 물이 느려서 행군 길이 통하기 어렵기 때문에

2022. 12. 7. 17:07백두산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1년 을묘 > 5월 26일 > 최종정보

영조 11 을묘(1735) 5 26(을축) 아침에는 맑고 저물녘에는 비가

11-05-26[20]  도의 구관 당상을 인견하고, 소대를 행하여 《자치통감강목》을 강하고 청군이 우리 변경을 침입하는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 상이 이르기를,

“청나라 사람은 금(金)나라 사람의 종족인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청나라와 금나라는 뿌리는 같고 파가 다른데, 여진(女眞)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는 생여진(生女眞)인가, 숙여진(熟女眞)인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렇듯이 상세하니 신은 감히 허실(虛實)과 상략(詳略)을 논하지 않을 수 없어 낱낱이 들은 바를 아뢰겠습니다. 중국은 한(漢)과 당(唐) 이전에는 오랑캐를 정벌하는 전쟁이 대부분 서북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옥관(玉關), 소관(蕭關), 운중(雲中), 태원(太原) 등이 매번 군사를 출동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수(隋)와 당 이후로는 마침내 동방 정벌의 전쟁이 있게 되어 바다를 건너 동방을 정벌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바다를 건넌 일은 잘 모르겠다. 안시성(安市城)은 어느 곳에 있었는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봉황성(鳳皇城)을 안시성이라고 칭하는데, 혹은 복주(復州)의 경내에 있었다고 합니다. 요(遼) 지역은 낮고 더러우며 황하의 물이 느려서 행군 길이 통하기 어렵기 때문에 관중(管仲) 늙은 말을 풀어서 돌아갈 길을 찾은 이 본디 연(燕)의 경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당 태종(唐太宗)이 요를 지나면서 역시 말꼬리에 섶을 매달아 진창길을 건넜다고 하니 그 험난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다를 건너는 전쟁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여진은 송(宋)나라 말기에 일어났는데 그 소굴은 백두산의 북쪽에 있으니 숙신씨(肅愼氏)의 옛 지역입니다. 평소에 ‘여진족이 1만 명을 채우면 천하를 횡행한다.’라고 일컬으니, 그들이 점점 강성해져서 마침내 중국에 들어가 주인이 되고, 원나라 사람이 금나라를 몰아내게 되어서는 금나라 사람이 다시 옛 지역으로 돌아가서 우리나라 서북 양 경계의 건너편 변방에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무릇 우리나라와 저들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은 압록강과 두만강 하나 사이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백두산 남북을 한계로 하여 한쪽은 우리나라 경계이고 한쪽은 저들 지역입니다. 저 사람들 중 강을 따라 늘어서 사는 자들을 혹은 생여진이라고 하고 혹은 숙여진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북쪽과 서쪽에 있는 자들을 번호 야인(藩胡野人)이라고 부르는데 북쪽은 이탕개(尼湯介)가 가장 강성하고 서쪽은 이만주(李滿住)가 가장 강성했습니다.

대체로 들으니 영고탑(寧古塔)은 육진(六鎭)의 북쪽에 있는데 함경도 한 지역은 고려 때에 저들 지역에 빼앗겼다가 우리 태조대왕이 북방에서 나라를 일으키면서 동국의 영토로 차지하게 되었고, 태종조 이후로는 철령(鐵嶺) 이북을 잃고 때로 차지했다 때로 잃었다 했습니다. 세종조에 이르러서 김종서(金宗瑞)에게 육진을 개척하라고 명하였는데 무산(茂山) 지역에 있는 노토(老土) 부락의 경우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하였으니, 이것이 장백산(長白山) 이남에 일찍이 여러 보(堡)를 설치한 까닭입니다. 서도로 말하자면 강계(江界) 폐사군(廢四郡)은 이른바 건주위(建州衛)라는 청인(淸人)과의 거리가 300리도 채 안 되게 가깝습니다. 건주위 사람들이 한창 강성하게 되어 모련위(毛憐衛), 좌위(左衛), 우위(右衛) 등의 부락이 빈번히 폐사군에 침입하였기 때문에 세조조에 사군 지역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그 지역이 폐해진 것이 대개 이 때문입니다.

건주위 추장 동산(董山)은 황조(皇朝)의 이성량(李成樑)에게 피살되고 동산의 아들 노랄적(老剌赤)은 몸을 탈출하여 건주로 도망해 갔는데, 차츰 강성해져서 백두산 동서쪽 여러 지역을 모두 차지하고 마침내 개원(開元)하여 심양(瀋陽)으로 들어갔습니다. 심양에서부터 요동을 평정하였는데 건주는 흥경(興京)이라고 부르고 심양은 성경(盛京)이라고 부르고 요동은 동경(東京)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삼경(三京)을 걸터앉아 차지하고 바야흐로 중국으로 뛰쳐 들어가려 하는데 우리나라가 그들의 근거지에 바짝 가까이 있기 때문에 뒤를 돌아보아야 하는 우려를 끊어 버리려고 마침내 정묘년(1627, 인조5)과 병자년(1636)에 국경을 침범한 우환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건주위는 지금 부락이 없는데 영고탑은 역시 별도의 종족이 있는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건주위 사람과 영고탑 사람은 비록 다 같은 여진이나 그 종파는 원래 다릅니다. 영고탑은 금나라 사람의 옛 소굴이고 건주위는 바로 청나라 사람이 기반을 일으킨 곳입니다. 듣건대 건주위의 성궐(城闕)과 부고(府庫)의 웅장함은 성경에 버금간다고 합니다. 우리 동국 사람은, 매번 저 청나라 사람들에게 일이 생기면 장차 우리나라에게 길을 빌려서 영고탑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크게 근심으로 여기는데, 신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청나라의 뿌리는 본디 건주위에 있기 때문에, 들으니 영고탑의 장군을 선창(船廠)으로 옮겼다고 하니 영고탑을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으로 여기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그 지형으로 논하더라도 백두산은 횡으로 천 리에 뻗쳐 있고 그 꼭대기에는 한 줄기 물이 있어 세 갈래로 나뉘어 흐르는데 그 동쪽은 토문(土門)이고 그 서쪽은 압록이고 그 북쪽은 바로 혼동강(混同江)입니다. 북쪽으로 흘러서 송화강(松花江), 흑룡강(黑龍江) 여러 물과 합류하여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갑니다. 오라진(烏喇鎭), 선창 등의 지역은 혼동강의 동서쪽에 있는데, 지금 들으니 오라진과 선창은 강희제(康熙帝)가 새로 설치하여 황폐한 지경을 변화시켜 번화한 곳으로 만들었으며, 또 성경에서 오라까지의 거리는 700리이고 오라에서 영고탑까지의 거리도 700리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가령 청나라 사람은 여진인에게 내몰리게 되거나 몽고인에게 쫓기게 되면 의당 성경과 흥경을 돌아갈 곳으로 여길 것이며, 그렇지 않고 반드시 영고탑으로 가려고 하면 선창과 오라의 길을 따를 수 있으니 어찌 꼭 남의 나라 지경을 넘어서 길을 빌리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고탑 가는 길을 만약 우리나라 지역을 따르면 길이 빠르고 쉽다고 하여 그런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연전에 목극등(穆克登) 와서 서북 지역을 살폈는데 어떤 사람은 훗날 길을 빌리는 데에 그 뜻이 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지도를 만들려고 지형을 살펴본 것이라고 합니다. 두 설이 어느 것이 옳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목극등이 말을 타고 강물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가 절치(折齒)에 이르러 돌아갔는데, 강 연안 일대는 경로가 험준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내지(內地)를 통과하여 들어가서 혹은 설한령(雪寒嶺)을 따라가거나 혹은 양덕(陽德)과 영흥(永興)의 교차 지역을 따라가게 되면 그 길이 멀 뿐만 아니라 선창의 곧은길에 비해 곱절 이상이 됩니다. 무릇 행군의 법에 어찌 패잔병을 거느리고서 갑자기 이웃 나라의 잘 모르는 길로 들어가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이는 그렇지 않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또 신의 구구한 근심은 여기에 있지 않고 다른 데에 있습니다. 대체로 청나라 사람이 중국을 석권하여 들어갈 때에 서북 두 방면의 여러 종족이 모두 따라서 남쪽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우리나라 변방이 백 년 동안 소요가 없었던 것은 실로 여기에 힘입었을 따름입니다. 지금 들으니 저 나라의 관문 밖의 난민들이 다수가 적당(賊黨)을 결성하여 채집과 사냥을 업으로 삼으며 강변을 왕래하는 자들의 숫자가 매우 많다고 합니다. 이들은 저 사람들이 말하는 이른바 투산적(投山賊)으로, 우리나라의 양계(兩界) 변방 백성들이 모두 이 무리와 형제처럼 의를 맺었습니다. 무릇 우리나라 관방의 허술함과 무기의 낙후함과 병력의 쇠잔함을 저들이 모르는 바가 없어 항상 탐욕을 부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우선 감히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것은 다만 옹정제의 명령이 약간 행해지고 있기 때문일 뿐입니다.

대체로 우리나라 사신이 연경(燕京)으로 들어갈 때에 복장이 깨끗이 빛나고 술과 음식이 끊이지 않으며 방값이나 잡물을 물 쓰듯 사용하기 때문에 동팔참(東八站) 서쪽의 사람들은 모두 우리 동국을 재화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나라로 보고서 한 번 와서 보고자 합니다. 강변의 호상(胡商)들은 백 리 밖의 요동 벌판으로 곡식을 운반하는데 수수 아니면 기장이어서 생계가 초라하지만, 우리나라 국경은 반드시 큰 사발에 밥을 먹는데 배가 불러야 그만두니, 산에다 곡식을 쌓아 둔 것이 가는 곳마다 구름과 같기 때문에 저들이 바라보고서 부러워해 마지않습니다. 만일 중원에 일이 생겨 옹정제의 명령을 변방에서 이행하지 못하게 된다면 옹정제가 동쪽으로 나오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저들 몇십 명의 기병들이 풀을 엮어 떼를 만들어 갑자기 국경을 넘어오게 된다면 여러 진(鎭)이 바람 앞에 와해될 것이니, 지금 초도(椒島)의 일과 같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강계 한 고을로만 말하더라도 강변에서부터 고을의 치소에 이르기까지, 고을의 치소에서 적령(狄嶺)에 이르기까지 숨 한 차례 쉴 정도의 경각에 불과한 일이니, 우리나라 사람 중에 성품이 모질고 난리 피우기를 생각하는 자가 앞잡이가 된다면 원나라 말기에 홍두적(紅頭賊)이 전철의 경계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평안 감사 박사수(朴師洙)가 매번 이 일로 깊이 근심하고 있습니다. 신이 서읍에 있을 때 그가 구획한 것을 보고, 만약 평원의 넓은 들에서 갑자기 천병만마가 깊이 쳐들어오는 상황을 당한다면 구구한 성벽과 해자는 참으로 막아 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랑캐 유격 기병이 마구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것은 비록 크게 성과 해자를 쌓을 필요가 없더라도, 만약 험준한 요충지에 바위를 쌓고 보루를 만들며 목책을 세우고 관문을 설치하고 깃발을 세워 북을 울리며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방어한다면, 적들이 바라보고 반드시 스스로 물러나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적령에서 아래로 창녕(昌寧)과 삭녕(朔寧)에 이르기까지 모두 고개를 한계로 하여 보루를 쌓고 일시에 함께 거행합니다. 대개 옛사람들은 느릅나무를 심어서 저절로 성채를 이루었고 청나라 사람들은 목책을 세워서 역시 경계를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과장되게 큰 것을 좋아하여 물자와 힘을 많이 들여서 산성을 쌓기 좋아하는데, 요충지를 차지하여 적을 막는 계책이 되지 못합니다.

박사수는 항상 생각하기를, 적을 하루 붙들어 두면 나라에 하루의 이익이 있고 적을 열흘 붙들어 두면 나라에 열흘의 이익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반드시 요충지 곳곳에 보루를 설치하였는데, 다만 공공 재물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변방 백성을 동요하지 않게 하는데 힘썼기 때문에 비록 겉보기가 장대한 다른 지방의 성루만 같지는 못하지만 여기에 의거하여 지킨다면 병자년(1636, 인조14) 겨울에 13만 기병이 사흘도 안 되어 사현(沙峴)을 넘어온 것과 같은 우환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강계 한 고을은 신이 재임할 때 경영하였는데 간혹 겨우 부잣집 담장과 같을 뿐이었지만, 들으니 강계 아래의 여러 고을은 강계보다 훨씬 낫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서는 옛날에 관문이 없었는데 지금 비로소 생긴 것인가? 그 관문은 점문(店門)에 비하면 과연 어떠한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점문에 비하면 더 클 뿐만이 아니고 오직 재물을 들이지 않고 백성을 동요시키지 않는 것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크게 배치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곧은길에도 설치하는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적유령(狄踰嶺)에서부터 산마루를 따라 내려와 계반령(鷄盤嶺)과 구계령(九階嶺) 등 여러 고개에 이르기까지는 바로 남북의 일대 관방인데, 일찍이 담장 하나도 쌓은 것이 없기 때문에 먼저 막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의주(義州) 일대의 경우에 있어서는 평탄한 곳으로서 보루를 설치하여 방어하기 어렵기 때문에 별도의 구획이 있습니다. 지난번의 장계 중에 성천(成川)에 진을 설치하여 관방의 삼대 진으로 삼는다고 한 것은 참으로 뜻이 들어 있습니다. 박사수는 우리 동국의 고사에 더없이 익숙한데, 이는 바로 고(故) 상신(相臣) 유성룡(柳成龍)이 일찍이 뜻을 두었으나 이루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이렇게 계품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뢴 말이 옳다. 저들이나 우리나라나 모두 교화 밖의 백성들이 있는데, 만약 서로 결탁하여 난을 일으키면 참으로 우려할 만하다. 다만 청나라 사람은 중원으로 들어갈 때 일찍이 우리나라를 침략해 왔으니 지금 본거지로 돌아가는 날을 당하여 다시 우리나라를 침략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이는 전후의 형세가 같지 않은 듯합니다. 정묘, 병자 연간에는 저들의 병력이 한창 강성한데 다만 우리나라의 논의가 늦는 것이 우려되었기 때문에 거병하여 시위를 하였습니다. 지금 이후로 만약 저들이 쫓기는 일이 있게 되면 반드시 장차 우리나라에 도움을 요청할 것이고, 우리나라가 그 요청을 따르지 않은 뒤에는 바야흐로 전쟁의 사달이 일어날 것인데, 이것은 절박한 우려가 아니고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바로 난민들이 창궐하는 것일 뿐입니다.

아까도 아뢴 바가 있지만, 깊고 험한 곳에 만약 곡식을 비축해 둔다면 훗날 생각지 못한 일에 소용될 수 있습니다. 저들이 만약 동쪽으로 나온다면 곡식을 요구하는 것이 첫 번째 근심입니다. 옛날 진(晉)나라 혜공(惠公)은 진(秦)나라에 곡식을 주지 않아 마침내 한(韓)나라 들판에서 전쟁이 있었는데 《춘추(春秋)》에서는 이를 기롱하였습니다. 만일 저들이 곡식을 구하는데 주지 않으면 그 잘못은 우리에게 있고, 주려고 한다면 곡식이 없는 것이 근심입니다. 산에 있는 곡식을 모두 옮겨 해창(海倉)에 내어 비치하자는 논의는 실로 계책을 세울 줄 모르는 것입니다. 조조(鼂錯)는 곡식을 귀하게 여기는 것을 변방을 방어하는 상책으로 여겼습니다.

지금 몇 년 동안 약간 풍년이 든 뒤라서 강변의 여러 읍에서 반드시 수만 섬의 곡물을 쌓아 두었을 것이니, 바야흐로 먼 일을 경영하는 계책이 됩니다. 박사수는 늘 신과 함께 이 일을 생각하며 근심하고 탄식하였습니다. 하늘은 유행하는 재앙이 있고 이치는 곱하고 나누는 운수가 있습니다. 올해 변방 고을의 농사를 나라에서 유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몽고 지역은 어느 곳에 이르는가? 지난번에 글의 뜻으로 인하여 들으니, 몽고 지역이 매우 넓어서 요동 북쪽과 영고탑 뒤편이 모두 몽고 지역이고 청인 부락보다 많다고 하는데 참으로 그런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들으니 몽고 부락은 과연 청나라보다 많아서, 의무려산(醫巫閭山) 뒤 대사막(大砂漠) 지역이 모두 몽고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황력(皇曆)에서 나열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더라도 그 땅이 넓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 사신 행차에 그 지도를 구입해 들였기 때문에 신도 그것을 보았습니다. 몽고는 청인에 비해서 거칠고 추하여 사람 같지가 않기 때문에 북경(北京)을 왕래할 때 마을에 들어가서 묵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 사람들은 몽고보다 나은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저 사람들은 지금 행동거지와 거처가 중국 사람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몽고 사람은 수레를 묶어 머물고 개를 끌어안고 자며 더럽고 누린내가 나서 사람 같지 않습니다. 북경 동승문(東勝門) 밖에 몽고인이 왕래하기 때문에 신도 한 번 가서 보았는데, 천 명 백 명씩 무리를 지어 참으로 개나 양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와 같기 때문에 특히 사납고 모진 것이다.”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저 청나라 사람들도 역시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몽고는 바로 먀선()의 자손입니다. 먀선의 아들은 암답(唵答)인데 암답의 아들인 청태길(靑台吉)과 황태길(黃台吉)의 자손들이 이와 같이 번성하여 지금은 48기(旗)가 되었다고 합니다. 청나라 사람의 팔기(八旗)라고 하는 것은 부락을 분별하는 칭호입니다. 그 이름에 황기(黃旗), 남기(藍旗), 홍기(紅旗), 백기(白旗)의 4색이 있고 4색 중에 또 정기(正旗), 양기(鑲旗)가 있어 이것이 팔기입니다. 황제 이하부터 팔기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황제는 정황기(正黃旗)에 들어간다고 하고 각 기의 사람은 기 아래에서 길러지며 가노(家奴)처럼 마음대로 사역됩니다. 청나라 사람이 병력이 강성한 것은 대개 이 때문인데 양병(養兵)의 수요 또한 자못 어렵다고 합니다. 신이 일찍이 듣건대 서쪽을 정벌할 때 매번 관동군(關東軍)을 조발(調發)하는 것을 마음속으로 괴이하게 여겼는데, 연행(燕行) 갔을 때 비로소 상세히 들으니, 팔기 외에 천하의 병력은 모두 녹기군(綠旗軍)인데, 녹기라는 것은 보군(步軍)이기 때문에 형세상 모름지기 관동 팔기군을 조발한다고 합니다. 이는 처음에는 강성하나 나중에는 쇠미하게 되는 징조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 내의 일을 오늘은 모두 다 물어보기 어렵다. 서달(西獺)의 일은 대략 물어보았는데, 연행 갔을 때 혹시 응대한 일이 있는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심양에 임본유(林本裕)라는 자가 있는데 말하기를 ‘서달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중국은 재물이 궁하여 윤대(輪臺) 후회가 있을까 걱정일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내부의 화가 있을까 걱정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달은 어떤 종족 부류인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강족(羌族)에 속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요동에는 남은 종족이 없는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요동에서 없어진 뒤에 서요(西遼), 야율(耶律), 대석(大石) 등의 부류가 있게 되었는데 그 후에는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틀림없이 몽고 부락에 편입되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다른 일은 이 다음에 물을 것이다.”

하였다. 신하들이 마침내 물러 나갔다.

[-D001] 김성탁(金聖鐸) 내려간 : 

김성탁은 약 5개월 전인 이해 1월 6일에 경상도 단성 현감(丹城縣監)에 임명되었다.

[-D002] 궁중에서 …… 된다 : 

후한(後漢) 숙종(肅宗) 때 마료(馬廖)가 태후(太后)에게 사치를 경계한 말이다. 궁중에서 사치를 일삼으면 백성들이 그 유행을 따르다가 정도가 더욱 심해짐을 뜻한다. 《後漢書 馬寥列傳》

[-D003] 덕을 …… 않으려는 : 

《국어(國語)》 〈주어 상(周語上)〉에 “목왕이 장차 견융을 정벌하려고 하니 채공(蔡公) 모보(謀父)가 간언하기를 ‘안 됩니다. 선왕께서는 덕을 드러냈을 뿐이지 무력을 과시하지는 않았습니다. 병력은 신중하게 보유하고 있다가 적절한 때에 출동시키는 것으로, 적당한 시기에 출동하면 위엄이 있지만 과시하다 보면 장난거리가 되는 것이니, 장난으로 쓰면 위력이 없습니다.’”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D004] …… 것입니다 : 

제 환공 35년(기원전 651) 여름, 환공이 규구에서 제후들과 회맹하자 주 양왕(周襄王)이 재공(宰孔)을 보내 제육(祭肉)과 동궁(彤弓), 동시(彤矢), 수레를 하사하면서 하사품을 받을 때 절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환공이 처음에는 절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관중(管仲)의 반대가 있자 그제야 절하고 받았다. 그해 가을 규구에서 다시 제후들과 회맹하였는데, 환공에게 교만한 기색이 나타나자 제후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다. 《史記 齊太公世家》 《春秋左氏傳 僖公 9年》

[-D005] 낙수(洛水) …… 봉황 : 

낙수의 거북이는 우왕(禹王) 때에 낙수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1부터 9까지의 점이 있어 이것이 《서경》의 홍범구주(洪範九疇)의 바탕이 된 것을 말하고, 기산의 봉황은 성군인 주(周)나라 문왕(文王) 때 봉황이 기산 아래에 날아 와 울어서 태평성대의 조짐을 알렸다는 고사를 말한다. 《國語 周語上》

[-D006] 오성(五星) 모였다 :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오성이 문운(文運)을 관장하는 별인 규성(奎星)에 모인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문운이 크게 번창할 것을 예시한다고 한다. 《太平御覽 卷384》

[-D007] 현인을 …… 같다 : 

곽공의 ‘곽(郭)’은 ‘괵(虢)’과 통용된다. 괵은 주 문왕(周文王)의 아우인 괵중(虢仲)의 봉지(封地)로, 노 희공(魯僖公) 5년(기원전 655)에 진(晉)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제 환공(齊桓公)이 옛 곽 땅에 노닐면서 곽공이 나라를 망하게 한 이유를 묻자, 부로들이 “선인을 좋아하면서도 제대로 임용하지 않았고 악인을 미워하면서도 제대로 제거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망하게 된 이유입니다.”라고 말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春秋左氏傳 僖公 5年》 《新序 雜事4》

[-D008] 석현(石顯) …… 빈번하였는가 : 

석현은 한나라 원제(元帝) 때 정권을 농단한 환관으로, 술수를 써서 정적들을 제거하였으며 특히 원제의 사부였던 명사 소망지(蕭望之)를 자결하게 하였는데, 원제는 상세하게 조사하여 논의하지 않은 것만 책망하자 석현 등 일당은 관을 벗고 사죄하였다. 《漢書 蕭望之傳》

[-D009] 경방(京房) : 

금문 역학(今文易學)의 대가로, 경씨학(京氏學)의 창시자이다. 한 원제(漢元帝)의 조정에서 낭중으로 근무하다가, 권신인 환관 석현의 질시를 받아 위군 태수(魏郡太守)로 쫓겨 간 뒤에, 다시 석현의 무고로 인해 기시(棄市)되었다. 《漢書 京房傳》

[-D010] 고공과리(考功課吏)  : 

《한서(漢書)》의 주가(注家)인 진작(晉灼)의 설에 의하면, 영(令)ㆍ승(丞)ㆍ위(尉)가 한 현(縣)을 다스리되 교화를 숭상하고 범법자가 없을 경우는 모두 승진시키고, 도적이 있어 3일 안에 발각하지 못할 경우는 위의 책임이므로 영이 그를 파면하고 허물을 지는 식으로 된 법이라고 한다.

[-D011] 가의(賈誼) 조조(鼂錯) : 

조조는 한(漢)나라 경제(景帝) 때의 강직한 신하로, 제후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천자의 권위를 강화시켜 사직을 편안케 하고자 법령 30장(章)을 개정했다가 제후들의 반발과 간신배의 참소로 조복(朝服)을 입고서 동시(東市)에서 처형되었다. 일찍이 복생(伏生)에게서 《상서(尙書)》를 수학(受學)하였고, 특히 변설(辯舌)이 뛰어났고 좋은 계책을 건의한 것이 많아서 당시에 지낭(智囊)이라는 호칭이 있기까지 했다. 가의는 불과 스무 살의 어린 나이로 문제(文帝)의 깊은 신임을 얻어 태중대부(太中大夫)로 발탁되어 복색, 제도, 관명 등의 대대적인 개혁을 주장하다가 당시 대신이었던 주발(周勃), 관영(灌嬰) 등의 참소를 입었다. 끝내 문제의 신임을 잃고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어 서른셋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史記 鼂錯列傳》 《漢書 賈誼傳》

[-D012] 욱욱문재, 오종주(郁郁文哉, 吾從周) : 

《논어》 〈팔일(八佾)〉에 나오는 말로, 원문은 “주나라는 하(夏), 은(殷) 2대의 문물에서 보았으니 찬란하다 그 문이여.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 吾從周.]”라고 하였다.

[-D013] 위상(魏相) …… 때문에 : 

위상은 한나라 선제 때의 승상으로, 현신(賢臣)인 가의, 조조, 동중서가 예전에 건의했던 내용을 다시 주청하여 윤허를 받고 시행했다. 《漢書 魏相丙吉傳》

[-D014] 오랑캐를 정벌하는 전쟁이 : 

원문은 ‘征胡之之役’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之’를 빼고 번역하였다.

[-D015] 관중(管仲) ……  : 

춘추 시대 제(齊)나라의 관중과 습붕(隰朋)이 일찍이 환공(桓公)을 수행하여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하였는데, 봄에 길을 떠났다가 겨울에 돌아오면서 길을 잃었다. 이에 관중이 “늙은 말의 지혜를 쓸 만하다.” 하고 늙은 말을 풀어 놓아 그 뒤를 따라가서 마침내 길을 찾게 된 일을 가리킨다. 《韓非子 說林》

[-D016] 이탕개(尼湯介) : 

선조 초에 조선에 귀화한 여진인으로, 육진(六鎭) 지역에 출입하며 조정으로부터 후대를 받아 온 자인데, 1583년(선조16)에 경원(慶源)에 사는 여진인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경원 부사 김수(金璲)가 이들에게 패함에 따라 여진인들이 경원부의 모든 진보(鎭堡)를 점령하여 기세를 떨쳤으나 온성 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과 첨사 신상절(申尙節) 등에 의해 평정되었다. 《宣祖實錄 16年 2月 13日, 34年 2月 24日, 38年 5月 26日》 《宣祖修正實錄 16年 5月 1日》

[-D017] 이만주(李滿住) : 

우리나라 북쪽 변방을 자주 약탈하던 건주위 야인의 추장(酋長)이다. 1467년(세조13)에 명나라는 건주위의 야인을 토벌하고자 우리나라에 협격(挾擊)을 요청하여 왔다. 이때 세조는 강순(康純), 어유소(魚有沼) 등에게 출정을 명하였다. 강순 등은 군사 1만을 거느리고 가서 건주위의 여러 성을 치고 이만주 부자(父子)를 죽이고 돌아왔다.

[-D018] 강계(江界) 폐사군(廢四郡) : 

사군은 평안도 강계부에서 동북쪽에 있는 무창(茂昌), 여연(閭延), 우예(虞芮), 자성(慈城) 등 4개 고을을 말한다. 《正祖實錄 2年 1月 13日》 이 지역은 여진족의 지속적인 침입으로 1455년(단종3)에 여연ㆍ무창ㆍ우예 3개 군이, 1459년(세조5)에는 자성이 폐지되고 주민을 모두 강계로 옮겼다. 이후 이 4개 고을은 폐사군으로 지칭되었다.

[-D019] 선창(船廠) : 

심양과 영고탑 사이에 있는 지명으로, 북위 42도 지점이다. 《夢經堂日史 第1篇 馬訾軔征紀》

[-D020] 연전에 …… 살폈는데 : 

목극등(穆克登)은 청나라의 오라 총관(烏喇摠管)이다. 청나라가 1712년(숙종38)에 국경을 정하자는 연락을 하고 목극등을 파견했으므로 조선에서는 참판 권상유(權尙游)를 접반사로 보내었으나, 청의 사절이 함경도로 입국함에 따라 다시 참판 박권(朴權)을 접반사로 맞이하게 하였다. 이때 조선측의 접반사는 산정에 오르지도 못했는데, 목극등이 조선 측의 접반사 군관 이의복(李義復), 감사 군관 조태상(趙台相), 통관(通官) 김응헌(金應瀗) 등만 거느리고 산정에 올라가 일방적으로 정계비를 세웠다. 그 지점은 백두산 정상이 아니라 남동방 4km, 해발 2200m 지점이었다.

[-D021] 적령(狄嶺) : 

평안북도 희천군 동창면과 강계군 화강면 사이에 있는 적유령(狄踰嶺)을 말한다.

[-D022] 먀선() : 

몽고를 통일한 오이라트(瓦剌)의 족장이다. 명 영종(明英宗) 정통(正統) 14년(1449)에 대거 명나라를 침입하여 북경을 함락하였으나 영종의 아들 경종(景宗)에게 패배하였다. 《明史 朝鮮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