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1. 21:15ㆍ대륙조선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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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전집 제27권 / 서(書)
안백순에게 답하는 편지 기묘년(1759, 영조35) 〔答安百順 己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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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계절입니다. 평소 생활은 어떠합니까? 농사에 흉년이 들었는데, 백성을 구휼하는 일에 근심스러운 점은 없습니까? 나는 눈앞에 도무지 여유로운 상황이라곤 없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기운이 빠지고 머리가 어지러워 혹 누가 밀치지 않아도 또한 넘어질 정도가 되고 말았으니, 이것이 어찌 세상 사람의 몰골이겠습니까. 얼마 전에 꿈을 꾸었습니다. 목이 길고 하얀 병이 앞에 있는데 목에는 몇 개의 구멍이 뚫려 있고 푸른색이 칠해져 있었습니다. 그 병이 푸른 학으로 변해 홀연 날아오르고 나도 몸을 솟구쳐 같이 하늘 높이 들어갔는데, 고륜(尻輪)이 호탕하여 그 즐거움을 알 만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슨 조짐이겠습니까. 세상 이치에 달관한 그대는 나를 위해 축하해 주어야지 애석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난번에 사문(斯文) 안경시(安景時)가 찾아왔는데 몸가짐이 공손하고 말이 겸손하며 행동에 법도가 있어서 호문(湖門)의 풍모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잠깐 만나고 헤어졌지만 아직도 마음에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가 부탁한 글은 감히 끝내 사양하지 못하여 며칠 동안 번뇌를 떨치고 정신을 수습한 다음 겨우 초고를 이루었는데, 다시 그의 간청대로 그대에게 보내 드립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심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의 《사성운고(四聲韻考)》는 심약(沈約)의 《사성보(四聲譜)》에서 시작되어 후인들이 증보한 것입니다. 그 가운데 나아가 말해 보면,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입성(入聲)은 중국에 없고 다만 이(二)ㆍ아(兒) 두 글자가 서로 비슷할 뿐인데, 아마 이는 또한 북방의 음(音)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침(侵)ㆍ담(覃)ㆍ염(鹽)ㆍ함(咸)의 네 성보(聲譜)는 진(眞)ㆍ문(文)ㆍ원(元)ㆍ한(寒)ㆍ산(刪)ㆍ선(先)의 여섯 성보와 대략 같고, 소(蕭)ㆍ효(肴)ㆍ우(尤) 등은 모두 두 가지 음이 합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입성 중에 유독 혀를 윗잇몸에 붙이는 한 가지 성보가 없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는데, 대개 우리나라와 중국의 음은 서로 합쳐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자해(字解)에 대한 규정은 어떻겠습니까? 우리나라의 언문(諺文)은 세종(世宗) 때에 정인지(鄭麟趾)와 성삼문(成三問) 등에게 명하여 요동(遼東)으로 귀양 온 명나라 학사(學士) 황찬(黃鑽)과 상의하여 만들게 한 것으로, 이는 필시 충렬왕(忠烈王) 때 공주(公主 원 세조(元世祖)의 딸)가 원나라로 보낸 편지에 기록한 외오아(畏吾兒)의 문자일 것입니다. 외오아란 원래 고창국(高昌國)의 이름입니다. 원(元)나라 세조(世祖) 때에 번승(藩僧) 파스파〔巴思八〕란 자가 불씨(佛氏)의 유교(遺敎)를 얻어 몽고(蒙古) 글자를 만들었는데, 평성(平聲)ㆍ상성(上聲)ㆍ거성(去聲)ㆍ입성(入聲) 4개의 운(韻)을 순(唇)ㆍ설(舌)ㆍ후(喉)ㆍ치(齒)ㆍ아(牙)ㆍ반순(半唇)ㆍ반치(半齒) 등 7개 음(音)의 모자(母字)에 분속하여 실로 소리가 있는 것은 하나도 빠뜨림이 없었습니다. 무릇 중국의 글자는 형상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손으로 전하고 눈으로 보았으며, 몽고의 글자는 소리를 위주로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입으로 전하고 귀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 형상이 없었으니 또한 어떻게 없어지지 않고 전해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그 자세한 내용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규례를 미루어 문자를 만들었다면 천하 후세에까지 통용되어 우리나라의 언문과 같은 공효를 이룰 수 있었을 터이니, 또한 아마 이 밖에는 다른 문자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언문의 기원입니다. 지금 《사성통해(四聲通解)》는 언문으로 주(註)를 달아 분류하였기 때문에 전혀 서로 부합하지 않으니, 36개의 자모(字母)와 비교하면 마치 풍마우(風馬牛)처럼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방음(方音)이 이미 구별되므로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에 따라 만들어서, 다시 간행하고 정리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근세에 북경에 갔던 사람이 귀양살이하던 임본요(林本堯)란 이를 만났는데, 자기를 오삼계(吳三桂)의 종사관(從事官)이라 소개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어 그가 말하기를 “귀국의 방음은 바로 기자(箕子)의 유훈(遺訓)이니 그대로 정음(正音)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뜻이 혹 일리가 있습니다.
또 경방(京房)의 십이벽괘(十二辟卦)는 끝내 그 요령을 터득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한말(漢末)의 감충가(甘忠可), 하하량(夏賀良) 등의 서괘(序卦)가 모두 이와 같은데 《역전(易傳)》에 보이는 내용은 아닙니다. 양웅(揚雄)의 《태현경(太玄經)》에 이르러서도 또한 동일한 내용인데 소강절(邵康節)도 “지극하구나, 《태현경》이여.”라고 하였으니, 모두 같은 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소강절의 시대는 지금과 멀지 않은데 무엇 때문에 전하는 내용이 없는 것입니까. ‘벽(辟)’이란 임금〔君〕이니 공(公), 경(卿), 제후(諸侯), 대부(大夫)와 더불어 다섯이 되고 열두 달로 환산하면 도합 60괘인데, 건(乾), 곤(坤), 감(坎), 리(離)는 이 수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순서를 밝힐 수 없으니 그 사이에 나아가 장차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원회운세(元會運世)는 30과 12를 차례로 추산하여 설명하는 것에 불과한데, 합벽연주(合璧聯珠)에 근거하면 요(堯) 임금의 시대가 되어 반원(半元)이 극성(極盛)하기 때문에 이런 설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천황(天皇)과 지황(地皇)은 호지(胡地)에서 처음 나왔으므로 그 일을 근거로 삼기에는 부족하니, 또한 무엇을 바탕으로 8000은 800이 되어야 한다고 단정하여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 1회(會)의 수를 절반으로 나누는 것은 유리한 점이 있어서입니까? 세상의 정치가 점점 더 나빠져서 한(漢)나라 이후로 더 이상 회복하지 못했던 것은 모두 사람의 계책이 우연하게도 잘못된 경우이니, 어찌 30일과 열두 달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궤적에 따라 진행되는 데 비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세상의 치란(治亂)으로 해명할 수 없음은 정해진 사실입니다. 이 수(數)에 대해 그대는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그러나 원론(元論)을 보지 못했으니, 또한 터무니없는 말로 무리하게 논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범범하게 이야기할 뿐입니다. 만고(萬古) 세치(世治)의 높고 낮음을 어찌 12만 9600의 숫자 사이에서 제한적으로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선통(禪通)과 구두(九頭) 같은 것들은 그 가운데 얼마나 많은 연주합벽(聯珠合璧)을 겪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또 예컨대 구두기(九頭紀) 가운데 4만 5600이란 숫자는 장차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지금 역수(曆數) 19년이 1장(章)이 되는 것은 바뀔 수 없는 원칙입니다. 내가 예전에 직접 계산해 보니, 4560년이 지나면 더 이상 추산되지 않았는데, 11월 초하루 자정(子正)이 동지(冬至)가 되는 갑자년 자월 갑자일 자시, 즉 갑자(甲子)가 네 번 겹치는 시점이 시작이었습니다. 구두(九頭)의 수는 또 이 4560의 10배이니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지금의 역법가들은 만분력(萬分曆)을 사용하므로 이미 4분의 1이란 수는 쓰지 않습니다. 이는 혹 이로 말미암아 다시 추산할 수 있는 나머지 수가 생기는 것입니까?
사마광(司馬光)이 신종(神宗)에게 말하기를 “가령 삼대(三代)의 임금이 항상 우(禹)ㆍ탕(湯)ㆍ문(文)ㆍ무(武)의 법을 지켰다면 지금까지 존속되더라도 별 무리가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은 비록 임금에게 대답하는 임기응변이라고 의심하지만 대저 어찌 그렇겠습니까. 기실은 지대지중(至大至中)하여 바뀔 수 없는 정법(正法)으로, 고금을 통틀어 사마광만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삼대가 비록 숭상하는 바를 바꾸었지만 인습(因襲)하는 것은 변경하지 않았으니, 가령 혹 주(周)나라를 계승하는 왕이 있다면 백세(百世) 뒤의 일이라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다시 바뀔 수 있는 다른 도(道)가 있겠습니까.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잘못하지 않고 잊어버리지 아니하여 옛 전장(典章)을 따르도다.〔不愆不忘 率由舊章〕”라고 하였으니, 잘못하면 옛 전장이 폐해지고 잊어버리면 수리(修理)하고 거행(擧行)하기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폐해질 때마다 거행하여 문(文)과 질(質)이 항상 밝으면 세치(世治)가 잠시 낮아졌다가 다시 높아질 터이니, 어찌 다시 의심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아, 세도(世道)가 더 이상 다스려지지 않은 것은 그 시작이 세 가지 재앙에서 연유하였습니다.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억압하는 폐단은 영정(嬴政 진 시황(秦始皇))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한(漢)나라가 개혁하지 못하였고, 인재를 등용할 때 문벌을 숭상하는 폐해는 위만(魏瞞)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진(晉)나라가 개혁하지 못하였으며, 문사(文辭)로 과시(科試)하는 폐단은 양광(楊廣 수 양제(隋煬帝))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당(唐)나라가 개혁하지 못했으니, 이 세 가지 재앙이 해악을 끼치고 번갈아 반복되면서 요순(堯舜)의 도가 마침내 구중(九重)의 심연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진실로 성왕(聖王)이 등극해서 사흉(四凶)을 제거하고 십육상(十六相)을 등용하였던 것처럼 확고하게 정사를 처리했다면 천지(天地)는 절로 운행하고 해와 달은 그대로 빛을 발했을 터이니, 인문(人文)이 어찌 유독 다시 찬란하게 꽃을 피우지 않았겠습니까. 이는 필연의 이치입니다. 주나라가 쇠하자 패도(覇道)가 성하고 왕도(王道)가 폐해졌습니다. 군자가 “오패(五覇)는 죄의 으뜸이다.”라고 하였으니, 오패의 공이 비록 크다 해도 족히 거론할 것은 못 됩니다. 한(漢)나라 선제(宣帝)가 이른 “왕도와 패도를 아울러 쓰고 있다.”라는 말이 바로 난적(亂賊)의 효시이니, 한나라의 제도가 어찌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억압하는 폐단의 핵심이 아니겠으며 또한 치세(治世)를 방해하는 기괄(機栝)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때부터 이후로 문벌과 과거를 숭상하게 되고 갈수록 심해져서 치란(治亂)과 흥폐(興廢)를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되었으니 원회운세(元會運世)가 과연 어디로 돌아갈 수 있었겠습니까. 나는 일찍이 말하기를 “구주(九州)의 안에 성인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은 비록 무익한 점이 있겠지만, 오직 구주의 밖에 세 가지 재앙이 발생하는 곳이 없어야 바야흐로 ‘세치(世治)가 잠시 낮아졌다가 다시 높아지는 이치’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세 가지 재앙 중에는 과거(科擧)의 폐해가 더욱 크므로 그 폐해를 어찌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만일 차선(次善)을 말한다면 방법이 있으니, 굳이 말하라고 하면 당나라 양관(楊綰)이 논한 효렴과(孝廉科)가 이에 가깝고 국조(國朝)에 조정암(趙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이 건의하여 시행했던 현량과(賢良科)가 또 그다음입니다. 그러나 양관의 효렴과는 사람들의 저지로 시행되지 못하였고 정암은 끝내 재앙의 원흉이 되어 사람들이 모두 손사래를 치며 두려워 피하였으니, 그 일이 오히려 옛 전장(典章)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것도 두려워했는데 더구나 삼대 성인의 가르침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제는 국시(國是)가 크게 정해져서 조 선생이 존경을 받아 위로 성묘(聖廟)에 배향되었으므로, 소인배들은 이미 멀어지고 선비들의 의론은 모두 그 일이 옳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독 과거의 과목이 점점 번거로워져서 갈수록 인심이 함닉(陷溺)되는데도 거론하여 말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이는 오직 목전의 이익을 취하면서 나랏일은 도외시하기 때문입니다. 하는 수 없이 또한 늘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황명(皇明)을 존중하여 일마다 반드시 그 제도를 준행하였다. 시험 삼아 과법(科法)을 살펴보면 오히려 문사(文士)들을 조리 정연하게 해서 한결같이 그 규례를 따르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오히려 지금처럼 잡다하기 짝이 없는 상황은 되지 않았을 텐데 무엇 때문에 준행하지 않았단 말인가. 매우 한탄스럽다.” 이렇게 해 놓고 봐도 다시 지루하여 지나치게 번거로운 이야기가 되고 말았는데, 우연히 세상 운세에 대한 말로 인하여 부질없이 군더더기 내용까지 언급하였으니 또한 입에서 나오는 대로 거침없이 말을 내뱉어 버리는 태양병(太陽病)의 증상이 도진 것일 뿐입니다.
오휴(五休)의 풀이는 분수를 지키며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의미인 듯합니다. 그런데 지금 좋은 술 향기로운 차라고 하였으니, 그 실상이 아닙니다. 또 향기로운 차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월굴(月窟)과 천근(天根)이 어찌 찾은 뒤에 곧 쉬는 것이겠습니까. 백순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관호(官號)는 매우 적절하지 않습니다.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으니 의당 ‘징사(徵士)’라고 해야 합니다. 이런 뜻은 본가(本家)와 상의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우리나라의 교린(交隣)은 일본만 한 곳이 없고 그 일에서는 삼(蔘)이 중요하니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 두 여자가 뽕을 다투다가 그로 인한 재앙이 망국(亡國)에까지 이른 적이 있었으니, 그 일을 본보기로 삼을 만합니다. 근래 들으니 삼이 귀해진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공(司空)이란 복성(覆姓)을 가진 자가 임의로 훈국(訓局)의 은전(銀錢)을 가져다 나라 안의 삼을 모조리 거두어들인 다음 제멋대로 이익을 독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가격이 오르고 품귀 현상이 생겨 삼 1냥(兩)의 가격에 돈 80냥이 든다고 하니 예전에 없던 일입니다.
가을 사이 나라 안에 일어난 근거 없는 소동은 통천(通川)에서 야기되어 사녀(士女)들이 휩쓸리고 있으니 이는 또한 무엇 때문입니까? “천 장(丈)의 제방이 개미구멍 때문에 무너지고 날카로운 바늘 끝에서 기(氣)가 빠져나간다.”라고 하였습니다. 일이 작다고 해서 염려하지 않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연화(燕貨)가 날로 줄어든 지 오래되었습니다. 예컨대 남계(南桂)와 서단(西丹) 따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근자에 말갈기〔馬鬉〕가 이르지 않는데, 이는 북쪽 지역의 산물입니다. 비록 북막(北漠) 이외에는 말이 모두 돌림병으로 죽었다고 하지만 북쪽 지역의 광활함은 구주(九州)의 안에 비할 바가 아닌데, 말의 돌림병이 어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또한 의아한 점입니다.
[주-D005] 심약(沈約) :
441~513. 남북조 시대 양(梁)나라의 학자로, 자는 휴문(休文)이다. 무제(武帝) 때 벼슬이 상서령(尙書令)에 이르렀다. 박학(博學)하고 시문에 특히 능하였다. 《사성보(四聲譜)》를 지어 글자를 평성(平聲)ㆍ상성(上聲)ㆍ거성(去聲)ㆍ입성(入聲) 등 사성으로 나누었다.
[주-D006] 우리나라의 …… 것입니다 :
당시 찬정(撰定)했던 언문(諺文)이 외오아(畏吾兒)의 문자였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부분은 《성호사설》 권16 〈언문(諺文)〉의 “우리나라에서 언문을 처음 제정할 때 궁중에 관서를 설치하고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등에게 명하여 찬정하게 하였다. 당시 명나라 학사 황찬이 죄를 짓고 요동에 귀양 와 있어서 성삼문 등으로 하여금 찾아가 질문하게 했는데, 왕래한 것이 모두 열세 번이라고 하였다. 내 생각으로 추측해 보면 지금의 언문은 중국의 문자와 판이하게 다르니 황찬이 무엇을 관여하였겠는가. 이때는 원나라가 망한 지 겨우 79년밖에 되지 않았으니 그 문자가 반드시 남아 있었을 것이고, 황찬이 우리에게 전한 것도 아마 이 밖에 다른 것이 없었을 것이다. 고려 충렬왕 때에 공주가 왕의 사랑을 투기하여 외오아의 문자로 편지를 써서 원나라에 보냈으니, 이는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는 이유였다.〔我國之始制也 設局禁中 命鄭麟趾成三問申叔舟等撰定 時皇朝學士黃鑽罪謫遼東 使三問等往質 凡往返十三度云 以意臆之 今諺文與中國字絶異 鑽何與焉 是時元亡纔七十九年 其事必有未泯者 鑽之所傳於我者 抑恐外此更無其物也 按高麗忠烈王時公主妬寵作畏吾兒字達于元 欲人之不曉也〕”라는 내용에 근거하여 번역하였다.
[주-D007] 고창국(高昌國) :
신강 위구르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 토노번시(吐魯番市)의 남서쪽 고창(高昌)의 폐허에 있던 나라이다. 《北史 卷97 西域列傳 高昌國》
[주-D008] 파스파 :
1235~1280. 중국 원대(元代)의 티베트 승려이다. 10세 때 백부 사캬 판디타에를 따라 중국에 와서 몽고 왕조에 봉사하였다. 쿠빌라이가 즉위한 이후 국사(國師)가 되어 티베트의 통치권을 위임받았고, 1269년 쿠빌라이 칸의 명령으로 파스파 문자를 만들었다. 사캬 왕조의 시조로서, 티베트 불교 융성의 길을 열었다. ‘파스파’는 ‘성스러운’ 혹은 ‘훌륭한’이라는 뜻으로, 대체로 팔사파(八思巴)라고 음역(音譯)되는데, 원문의 ‘巴思八’은 ‘八思巴’의 오기(誤記)로 보인다. 《종교학대사전》
[주-D009] 몽고(蒙古) 글자 :
1269년 파스파〔八思巴〕가 원 세조(元世祖)의 명으로 만든 파스파 문자를 말한다. 본래 티베트 문자를 방형화(方形化)하여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로로 쓰게 만든 표음 문자이다. 자음 30자, 모음 8자, 기호 9개로 되어 있었고, 뒤에 성종(成宗) 및 무종(武宗)의 제사(帝師)인 추크 오세르가 연모음(軟母音)과 복합 모음의 표기법을 고안ㆍ개정하여, 모음 8자, 자음 31자의 39개 자모(字母)로 개량하였다. 이후 100여 년 동안 쓰이다가 원(元)의 멸망과 함께 폐기되었다. 《위키백과사전》
[주-D010] 원(元)나라 …… 분속하여 :
대본에는 ‘元世祖時藩僧巴思八者得佛氏遺敎 製蒙古字 分唇舌喉齒牙半唇半齒七音之母字’로 되어 있는데, 의미의 연결이 명확하지 않아 《성호사설》에 의거하여 ‘分唇舌喉齒牙半唇半齒七音之母字’ 앞에 ‘平上去入四聲之韻’ 8자를 추가하여 번역하였다. 《星湖僿說 卷16 人事門 諺文》
[주-D011] 사성통해(四聲通解) :
1517년(중종12)에 최세진(崔世珍)이 편찬하였다. 세종 때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 등이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을 편찬하였으나, 너무 방대하여 보기가 어려웠으므로 다시 간이한 《사성통고(四聲通攷)》를 편찬케 하였다. 그런데 《사성통고》는 글자마다 자음(字音)은 표기되었으나 그 글자의 해석이 없었으므로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홍무정운》을 기초로 하여 실용에 적합하도록 엮은 것이 《사성통해》이다. 1614년(광해군6)과 1656년(효종7)에 중간(重刊)한 중간본이 전한다.
정통10년 : 1445년
고전번역서 > 육선생유고 > 박선생유고 > 문 > 최종정보
박선생유고(朴先生遺稿) / 문(文)
무본재(務本齋)의 시권(詩卷)의 서문 이후기(李厚基)가 선생의 친필이라고 하여 보내왔기에 지금 집에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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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나라 정통(正統) 10년 봄에 손공 수산(孫公守山)이 신공 숙주(申公叔舟), 성공 삼문(成公三問)과 함께 요동(遼東)에 가서 내한(內翰) 황찬(黃瓚)에게 - 당시에 황공이 요동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 홍무운(洪武韻)을 물었다. 돌아오려고 할 때에 손공이 재호(齋號)를 요청하자, 황공이 무본(務本)으로 지어 주고 문인(門人) 밀운(密雲)으로 하여금 모표(毛彪)의 붓으로 ‘무본재(務本齋)’라는 세 글자를 전서(篆書) 대자(大字)로 쓰게 하고, 또 서문(序文)까지 직접 지어 주니, 손공이 이것으로 문인(文人)들에게 시를 부탁하였다. 동량(㠉梁) 최공 항(崔公恒), 한산(韓山) 이공 개(李公塏), 창녕(昌寧) 성공 삼문(成公三問), 노산(魯山) 이공 영서(李公永瑞), 고령(高靈) 신공 숙주(申公叔舟)가 시(詩)를 짓기도 하고 찬(贊)을 짓기도 하였는데, 선생이 서문을 지었다.
손군(孫君) 자후(子厚)는 군자다운 사람이다. 언행이 순수하고 삼가며 학업이 근실하여 사람들의 추중을 받았는데, 나와 잘 알고 지낸 지가 오래되었다. 금년 봄에 신범옹(申泛翁)과 성눌옹(成訥翁) 두 군자와 함께 요동(遼東)에 가서 한림 황찬(黃瓚)을 뵙고 홍무운(洪武韻)에 대한 강설을 듣고 중국(中國)의 정음(正音)을 터득하니, 황 선생이 가상하게 여기고 예모를 깍듯이 하였다. 돌아오려 할 때에 ‘무본(務本)’으로 재실의 이름을 지어 주고 서문(序文)까지 아울러 지어 주었다.
대체로 공자(孔子)의 문하(門下)에서 인(仁)을 말한 것이 많지만 근본을 힘쓰라는 말처럼 학자에게 절실한 말은 없다. 대저 효제(孝悌)는 인심의 고유한 것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사람이 누가 자기 어버이를 사랑할 줄을 모르겠으며, 자기 형을 당연히 공경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겠는가마는, 이 마음의 천성을 다하지 못한 것이 염려스러울 뿐이다. 이 마음을 다하여 그 근본을 세우게 되면 나의 어버이를 사랑하여 남의 어버이에게 미치며, 나의 어른을 어른으로 섬겨 남의 어른에게 미치게 되어서 백성을 사랑하고 사물을 아끼는 도리가 장차 여기에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효제가 어찌 인(仁)을 하는 근본이 되지 않겠는가. 오직 노력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을 뿐이다.
우리 동방(東方)이 기자(箕子)가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제시한 후로부터 풍습이 예양(禮讓)을 숭상하고 말기(末技)는 부끄럽게 여겨 왔는데, 우리나라 열성조(列聖朝)가 서로 계승함에 미쳐서는 깊은 인애심과 훌륭한 정치력이 백성을 흡족하게 한 지가 오래되었다. 지금 전하께서는 하늘이 낸 성인으로 몸소 인의(仁義)를 행하시어 선조(先祖)를 효도를 다하여 받들고 대국(大國)을 공경을 다하여 섬기니, 백성들이 그 교화에 감화되어 효제의 기풍이 가득하게 되었다. 더구나 자후(子厚)는 언행(言行)과 학업(學業)이 남들의 추앙을 받고 있으니, 이 재실의 이름을 받은 것은 요행이 아니고 당연한 것이다.
비록 그러나 효제(孝悌)를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주(周)나라에서는 군진(君陳)만 인정을 받았으며, 공자의 문인 중에서는 오직 증자(曾子)와 민자건(閔子蹇)만이 능히 그것을 실천하였으니, 자후는 노력해서 황 선생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후가 문인들에게 시를 부탁하려 하면서 나에게는 서로 알고 지낸 지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서문(序文)을 부탁하였다. 황 선생은 근본으로 삼는 말을 많이 인용하였는데 나는 효제를 가지고 말하였으니 훗날에 선생을 만나거든 나를 위하여 사죄해 주기 바란다.
정통(正統) 10년 창룡(蒼龍) 을축(乙丑) 중하(仲夏)의 어느 날에 평양(平陽) 박팽년(朴彭年)은 삼가 서문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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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애의 처자가 중원(中原)에서 사면(赦免)을 반포함으로 말미암아 방면(放免)되었다고 (0) | 2023.05.31 |
정묘(正廟) 초기에는 백성들은 마침내 청색을 본받아 입었습니다. (0) | 2023.01.10 |
효충분의익사 공신으로 삼고는, 광산(光山)의 옛 땅을 떼어 주고, 연각(烟閣)의 새 영광을 트이게 한다. (0) | 2023.01.10 |
이 지방 방언은 민남(閩南) 지방 비슷하고, 논의 벼는 제우(淛右 절강성(浙江省) 서쪽 지방)의 논 닮았네. (0) | 2023.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