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正廟) 초기에는 백성들은 마침내 청색을 본받아 입었습니다.

2023. 1. 10. 21:50대륙조선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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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1년 갑신(1884) 6월 4일(병자) 비

21-06-04[35] 의복 제도를 변경하라는 성명을 거두어 주기를 청하는 관학 유생 심노정 등의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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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학 유생 심노정(沈魯正)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문장(文章)을 만들어서 귀천을 표시하는 것과 의관을 바로잡아 외관을 존엄하게 하는 것은 바로 선성(先聖)과 선사(先師)께서 실천하신 바입니다. 한번 의상(衣裳)을 드리우고 천하를 다스린 이래 혹 때에 따라 알맞게 변경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모두 규격 안에서 조금 변경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공사의 복식은 모두 명 나라의 제도를 따른 것으로, 위로는 교묘(郊廟)의 곤면(袞冕)에서부터 아래로는 여항의 관디[冠帶]에 이르기까지 질서 정연하게 문채가 있어 온 지 지금 500년이나 되어 바꿀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일전 전교에서 공사의 의복 제도를 변경한다고 여러 차례 밝히셨습니다. 신들은 본디 성상의 헤아리심이 탁월하여 천지를 경위(經緯)하고 고금을 참고하시되 시의에 마땅하도록 힘쓰시면서 한 시대의 법을 정하심을 알고는 만만 흠앙하는 바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계획을 아래에 묻지 않고 일을 신중하게 하지 않아서 이미 묘당의 차자와 대각의 상소가 있었으며 연명의 글이 여러 차례였으나, 아직껏 내린 명을 환수하겠다는 윤허를 아끼시어 신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놀랐습니다. 그러나 또한 드린 말씀이 존중받지 못했다 하여 말씀을 올리지 않아서도 안 되겠기에 견문한 바를 대략 얽어서 번거롭게 합니다. 삼가 비옵건대 성명께서는 밝게 살펴 주소서.
신들은 삼가 상고하건대, 홍무(洪武) 3년(1370, 고려 공민왕19)에 오사모(烏紗帽)와 절각건(折角巾), 그리고 둥근 깃에 좁은 소매의 포(袍)를 정하였고 속대(束帶)는 금이나 호박(琥珀)을 박은 것을 쓰도록 정하였습니다. 영락(永樂) 3년(1405, 태종5)에는 관을 오사모로 하면서 절각을 위로 향하게 하여 이름을 익선관(翼善冠)이라 하였으며, 포(袍)는 황색의 둥근 깃으로 하여 소매를 좁게 하였습니다. 이는 명 나라 황제의 장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남전(南殿) 1, 2실(室) 어진(御眞)의 둥근 깃과 좁은 소매는 국초에 명 나라에서 면복(冕服)을 내릴 때의 제도이지, 우리나라의 신하들이 어찌 감히 이를 모방하여 제도로 삼았겠습니까. 이보다 앞서 공민왕(恭愍王) 때에 설장수(偰長壽)가 명 나라에서 내려준 단령(團領)을 입고 돌아오는데, 중국 사신 서질(徐質)이 보고는 말하기를, ‘고려에서 다시 중국의 의관을 사용할 줄을 생각하지 못했다.’ 하였으니, 우리나라에 단령이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 영묘(英廟) 17년 정유(1741)에 이르러 관학 유생들에게 예전대로 홍단령(紅團領)을 입기를 명할 일로 중외에 문의했더니, 대신 김재로(金在魯)가 이수광(李睟光)이 지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 근거하여 건의하기를, ‘우리나라 국초에는 유생들은 사사로이 출입할 때에도 홍직령(紅直領)을 입었습니다. 그러니, 홍의는 반드시 조종조의 옛 제도일 것입니다. 조사복(朝士服)으로 말하자면 중요한 곳에서는 흑의를, 가벼운 곳에서는 홍의를 입었습니다. 무릇 유생이 성묘(聖廟)에 들어갈 때에는 청의를 입었고, 식당이나 재(齋)에 있을 때에는 홍의를 입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홍단령과 직령은 본디 옛 제도인데 지금에 와서 왜 갑자기 사복이라 하며 근거할 곳이 없다고 하는지 신들은 실로 알 수 없습니다.
또 선왕의 법복(法服)은 현단(玄端)과 심의(深衣)가 있게 된 이래 소매를 넓게 하고서 가장자리에 연(緣)을 달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소매를 좁게 하고서 연을 단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자(程子)의 견포(繭袍)나 주자(朱子)의 야복도(野服圖)도 모두 넓은 소매에 연을 달았습니다.
명 나라의 제도에 문관은 소매가 길어서 손끝을 지나서 반은 접혀 팔꿈치까지 왔으며, 무관은 소매 길이가 손끝에서 7치나 지났으니, 모두 심의의 제도이며, 단추를 풀지 않고도 팔을 뽑아 군례(軍禮)를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무관의 좁은 소매는 말을 달리고 활을 쏘는 데 행동하기가 불편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어가(御駕)가 돌아온 후, 신하들이 관디를 갖추지 못하여 모두 소매가 좁은 융복을 입었으며 융사(戎事)가 있을 때면 문무가 통용하였으나, 본디 항상 입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항상 착용하고자 한다면 그 편리 여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세속에서 쓰는 이른바 장포(長袍)와 주의(周衣)는 더욱 옛 제도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조(純祖) 30년(1830), 익종(翼宗)께서 대리(代理)하시던 경인년에 영을 내리시기를, ‘근래에 듣건대 사대부들이 흔히 소매가 넓은 주의(周衣)를 입는다고 하는데, 이는 무슨 제도인가. 주의는 승려들의 옷으로 요망한 옷이다. 세속에서 비록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숭상한다지만, 어찌 법을 무시하고 제도를 고쳐 이처럼 상도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문장(文章)을 표시하고 외관을 존엄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 거듭 금하여 통렬히 혁파하라.’ 하셨습니다. 이로써 상고해 보면 소매가 넓은 주의도 오히려 법복이 아닌데, 더군다나 소매가 좁은 주의이겠습니까.
신들은 고루하고 변통성이 없어서 전고(典攷)를 널리 끌어대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이 몇 가지를 가지고 말하자면 둥근 깃과 좁은 소매의 옷은 명 나라와 우리나라에서 임금이 입던 옷이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여러 아랫사람들이 의논할 수 없는 것인 듯합니다. 홍단령과 직령은 영묘(英廟)께서 성명(成命)하신 것이어서 갑자기 폐지할 수 없으며, 주의는 순조 때 익종께서 남기신 전교가 있어서 갑자기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옷의 소매를 좁게 만드는 문제는 현단ㆍ심의ㆍ견포ㆍ야복의 제도로 상고해 볼 때, 갑자기 좁게 할 수는 없습니다. 도포(道袍)와 창의(氅衣)에 이르러서는 행해 온 지가 오래되었으니, 역시 나라의 제도입니다. 이 몇 가지를 하나라도 변개해서야 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다만 나라에 어려움이 많고 영루(營壘)가 서로 바라다 보인다 하여 무릇 융사에 관계된 일을 경장하여 조절하고 문약(文弱)에 흐르는 것을 크게 변화시킴으로써 조정과 재야의 신하로 하여금 행동하기에 편리하고 걸음을 경쾌하게 하여 시석(矢石)이 몰아치는 전쟁터에 몸을 날리고 주먹을 휘두르되 비록 천만인이 덤비는 데라도 달려가게 하고자 하시니, 오늘의 신하된 자 그 누가 성의(聖意)의 만분의 일이나마 본받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들은 생각건대 임금에게 충성하고 임금을 떠받듦에 있어서 타오르는 불길이나 끓는 물 속에 뛰어드는 용기는, 인도하고 배양함이 어떠한가에 달려있지, 의복이 번거롭고 간편하거나 길고 짧은 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위에서 덕화를 행하고 아래에서 스스로 본받는 것은 본디 그 도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정묘(正廟) 초기에는 조관의 창의는 공무에는 청색을 입게 하고 사사로운 자리에서는 흰색을 입게 하시자, 상신 홍상한(洪象漢)이 아뢰어 공사 간에 모두 청색으로 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셨습니다. 또 아뢰기를, ‘백성들의 흰옷을 모두 청색으로 해야 합니다.’ 하니, 상께서 이르시기를, ‘백성들은 물과 같아서 휘저으면 어지럽게 된다.’ 하시면서 윤허하지 않으셨는데, 백성들은 마침내 청색을 본받아 입었습니다. 실로 옷의 색깔을 바꾸는 문제는 옷의 제도를 변경하는 문제에 비해 매우 쉽고 가벼운 것인데도 이처럼 어렵게 여겼으니, 참으로 훌륭하셨습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잘못하지도 않고 잊지도 않으면서 옛 제도를 따르도다.[不愆不忘 率由舊章]’라고 하였으며,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요순(堯舜)을 본받으려거든 마땅히 조종(祖宗)부터 본받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 열성조의 훌륭한 모책을 어찌 오늘날 법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성묘(聖廟)를 지키고 있어서 유관(儒冠)과 유복(儒服)은 더욱 구별이 있어야 하므로, 이에 감히 서로 이끌고 궐문에서 호소합니다. 삼가 비옵건대 성명께서는 더 잘 생각하시어 빨리 성명을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상소의 말이 근거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이번의 변통은 실로 옛 제도를 참작하고 번거로운 것을 없애어 간편하게 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고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