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제가 안휘성(安徽省)과 강소성(江蘇省) 일대를 남직례로 고쳤다.

2023. 10. 6. 14:36북경 추정

강희제(康熙帝, 1654년 5월 4일(음력 3월 18일) ~ 1722년 12월 20일(음력 11월 13일))는 청나라의 제4대 황제(재위 1661년 ~ 1722년)이자,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한 직후 청 제국이 산해관을 넘은 뒤 자금성에서 청 제국의 군주가 천명을 상실한 명나라의 주씨를 대신하여 중국의 새로운 수명천자(受命天子)가 되었음을 선언한 이래 두 번째 황제이다. 과 는 아이신 교로 효완예이(玄燁, 만주어ᠠᡳᠰᡳ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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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sin Gioro Hiowan yei), 묘호는 성조(聖祖, 만주어ᡧᡝᠩᡯᡠ Šengdzu), 시호는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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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osin Hūwangdi)이다.[1] 연호는 강희(康煕, 만주어ᡝᠯᡥ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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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lhe Taifin몽골어ᠡᠩᠬ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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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gqe Amuγulang)이다. 청 제국의 제3대 황제인 순치제의 셋째 아들인 그는 순치제의 후궁 출신인 효강장황후 퉁갸씨(孝康章皇后 佟佳氏)의 소생으로서 자금성에서 태어난 첫 청 제국 군주이기도 하다.

 

2006년 1월 17일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에 의해 런던에서 공개된 1763년 제작의 세계전도 '천하전여총도'. 지도상엔 1418년에 제작된 '천하제번식공도'를 필사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 남극대륙이 나타나고, 북아메리카의 워싱턴, 오리건, 캘리포니아 주 일대가 섬으로 그려져있다

 

   1763년 지도로 잘못된 점

   . 조선의 국명이 없다. 열도는 고려왕 비석이 존재한 땅이고, 아이누족을 정벌하기도 하였으며, 미군정청

     자료에 해후 미군정청 자료에 조선인 500만명이 존재하였다.승정원일기 고종편 및 감영기록등에

     왜인(왕,풍신수길.표류주민)의 얼굴은 검다. 김기수가 신사유람단으로 직접 왜왕을 보고

     고종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즉 고려 땅이란 것이다.

   . 청인이 만든 지도면 남직례란 대신에 강소성과 안휘성을 표시해야한다.최소한 강남성이라 해야한다.

   . 남경 즉 금릉은 시모노세끼 조약을 맺은 마관이다.

   . 서지상 남경 즉 금릉은 아래와 같이 현재의 남경과 전혀 무관한 지역이다.

   . 유구는 자바의 별종이라는기록과 적도 이남에 있다는 기록으로 역시 유구는 위치가 맞지않는다.

   . 가장 큰 문제는 조선의 지명이 없다는 것이다.

 

제가역상집 제4권 / 귀루〔晷漏〕

《수서(隋書)  금릉(金陵 중국 남경(南京)의 옛 이름)은 낙양에서 남북으로 약 1천 리 떨어졌기 때문에 그림자는 4촌이 차이가 나므로, 2백 50리마다 그림자는 1도〔寸〕씩 차이가 나는 것이다. 

 성재집 제36권 > 강설잡고〔講說雜稿〕 > 최종정보성재집 제36권 / 강설잡고〔講說雜稿〕연거만지〔燕居謾識〕

지금 황하의 하구가 옛날에 비하여 천여 리 남쪽으로 물러났는데, 이것 또한 천지의 큰 기운〔氣數〕이 쇠퇴하는 증거다.

 

학봉일고 3 / 조천일기(朝天日記) ○ 정축년(1577, 선조 10) 4

2(기미)

노하를 통해 금릉(金陵)까지 갈 수 있는데, 수로(水路)로 3600여 리로서 3개월 걸린다고 한다.

 

 

 

구한말 청의 수도 북경은 주천에 존재한 걸로 추정하고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도 북경의 백하가 주천에 흐른다고 나오고 있다. 강한집에는 숙주가 북경임을 암시하는 시를 짓고 있다. 또한 중국은 사막이며, 바닷가 둘레가 겨우 1천리라고 근대 문집에 나와있다. 오건의 덕계집 일통지 뒤에 적다란 시에서도 대명이 바로 조선임을 알 수 있다. 모택동의  만리장전의 끝이 서장이었다. 아울러 근대집에도 서장이 지나 라고 하고 있고, 다산 정약용의 시문집에 외교관의 역할이 서장을 정탐하는 것이었다.1920년대 동아일보기사에도 선조들이 흑룡.태원.영파.절강을 내준 것으로 나와있다.참고로 산서.태원은 원래 중국의 영토가 아니라고 나온다. 러시아 외교문서에 청일전쟁 당시 교주만위에 천진이 원산이고, 평양성을 함락한 

일본군이 베이징대로를 따라 진군하여 압록강을 건넜다는 기록이 있다. 눈가리고 아웅한 것이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白河

本文

在直隸。卽古沽水。源出獨石口外察哈爾沽源縣之土山。南流入長城。至赤城縣。折東流復出長城。經察哈爾、熱河兩區域南境。復入長城。南流至密雲縣。與潮河合。亦稱潮白河。南至通縣爲北運河。下流逕香河、武清諸縣。南至天津會大清河、子牙河、衞河。由直沽歸海。自天津三义口以下。俗稱海河。此河之水量。約毎杪五千六百立方尺。河幅在天津租界附近。一百七十尺乃至三百三十尺。北塘口至鹹水沽間。平均約二百五十尺。下流漸次増大。至大沽河口則六百六十尺。水深在天津附近。十二尺乃至三十尺。塘沽十二尺乃至二十二尺。北礮台附近十三尺乃至十八尺。然近來河身淤淺。水深大減。在乾潮之時。甚至有淺瀨不滿三尺者。高潮時雖吃水十尺之輪船。可以自由航行。及至低潮。則吃水三四尺之輪船。亦尙不能出入。毎年冬季。十一月下旬冰結。解冰則在翌年二月下旬。或三月上旬。故冰結以後。由上海北來之汽船。皆取道於秦皇島。河身灣曲甚多。後因西人之請爲截灣取直之計畫。自清光緖二十七年。至宣統三年。四次施工。縮短白河水道七十三里。節減一小時之船程。大沽口外。沙灘積淤。日甚一日。因又於舊水道之北。開闢新水道。幅二百十尺。水深較舊水道尙深三尺。凡吃水淺而可航行於白河之輪船。皆能經此水道以通過大沽沙灘。行者便之。⦿卽古淯水。源出河南嵩縣西南攻離山。東南流至南召縣。折南流經南陽、新野至湖北襄陽縣會唐河。名唐白河。注於漢。⦿在甘肅。古呼蠶水。亦曰洮賚河發源青海之祁連山。流經酒泉與黑河合。入蒙古額濟納之居延海。

 

환재집 제4권 / 잡저(雜著) 선수(瑄壽)가 고찰하건대, 선형의 유고는 경전을 보좌할 수 있으므로 대단치 않은 작품으로 여겨선 안 된다. 그 중에 종류별로 모을 수 없거나 한두 편에 불과하여 권(卷)으로 묶을 수 없는 편명들이 있으므로 《한창려집(韓昌黎集)》과 《방정학집(方正學集)》의 예에 따라 잡저(雜著)로 엮어서 문(文)의 첫머리에 싣는다.

안노원이 손수 모사한 〈신주전도〉에 대한 발문〔安魯源手摹神州全圖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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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노원(安魯源)이 윤연재(尹淵齋)가 소장한 중국 15성(省) 지도를 얻어 한 부를 모사하고, 또 성경(盛京 심양)의 지도 한 폭을 더 모사하여 첨부했는데, 이 지도의 정밀함과 섬세함은 《일통지(一統志)》나 《회전(會典)》 등 여러 책과 견주더라도 더욱 뛰어나다. 원본을 누가 제작한 것이며, 어느 책에 의거하여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강남성(江南省)은 명대(明代)에 남직례(南直隷)가 되었다가 강희제(康熙帝) 때에 강소성(江蘇省)과 안휘성(安徽省)으로 나뉘었다. 호광(湖廣) 지역이 호북(湖北)ㆍ호남(湖南)으로 나뉜 것과 섬우(陝右) 지역이 감숙성(甘肅省)으로 나뉜 것은 모두 강희제 20년 이후의 일이었다. 이 지도는 성(省)을 나누기 전에 만든 것이어서 모두 합쳐 있고 나뉘지 않았다. 남직례라 하지 않고 강남이라고 한 것으로 보면, 명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지도가 만들어진 것은 아마도 청나라 초기 강희제 이전일 것이다.

안노원은 서울에 유학(游學)하며 실사(實事)에 몰두하였다. 이처럼 정밀하고 공교롭게 모사한 것은 여기에 벽(癖)이 있어서 피곤한 줄 모르고 즐기는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다. 이제 그는 이 지도를 가지고 돌아가 벗들에게 자랑할 것이다. 옛날 서하객(徐霞客)은 만 리 밖을 널리 유람하여 곤륜산(崑崙山)을 구경하고 황하(黃河)의 근원을 건너 드디어 서역에까지 이르러 두환(杜環)의 옛 자취를 뒤따랐지만, 그가 지도를 그려 세상에 전하였는지는 모르겠다. 안노원이 사는 곳은 용강(龍岡)의 서해 바닷가이므로 그 발자취가 우리나라 밖으로 미칠 수 없었으니, 서하객의 유람과 견주어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사람은 이 지도를 꺼내 펼쳐놓고서 스스로 기뻐하고 스스로 대견하게 여기리라.

계축년(1853) 11월 환경(瓛卿)이 쓰다.

[주-C001] 선수(瑄壽) : 박선수(朴瑄壽, 1821~1899)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온경(溫卿)이다. 환재의 아우로, 1864년(고종1) 증광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다. 저서로 《설문해자익징(說文解字翼徵)》이 있는데,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누락된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 고대 종정(鍾鼎)의 유문(遺文)을 연구하고 문자의 원리와 본뜻을 고증하였다. 《환재집》의 간행에 교정을 맡았는데, 간혹 간략한 논평을 달아놓았다.[주-C002] 한창려집(韓昌黎集) : 당나라 한유(韓愈, 768~824)의 문집을 가리킨다. 앞부분에 운문인 부(賦)와 시(詩)가 먼저 실려 있고, 문장은 〈원도(原道)〉, 〈원성(原性)〉을 필두로 각종 설(說), 해(解), 전(傳), 잠(箴), 찬(贊), 변(辯), 후서(後敘), 송(頌), 기(記) 등을 모아 첫머리에 배치하였다.[주-C003] 방정학집(方正學集) : 명나라 방효유(方孝孺, 1357~1402)의 문집인 《손지재집(遜志齋集)》을 가리킨다. 문집의 첫머리에 잠(箴), 명(銘), 계(誡), 의(儀), 논(論)을 비롯하여 각종 산문을 모아 잡저(雜著)라는 제목으로 실어 놓았다.[주-D001] 안노원이 …… 발문 : 이 글은 1853년(철종4)에 문인 안기수(安基洙)가 모사한 중국지도에 부친 발문이다. 환재는 안기수가 그린 중국지도가 매우 정밀하고 섬세하여 일통지에 비하더라도 손색이 없음을 높이 평가하고, 지도 원본이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 명칭의 변천을 규명하여 강희 20년 이전에 제작된 것임을 논증하였다.[주-D002] 안노원(安魯源) : 안기수(安基洙, 1817 ~ ?)를 가리키며, 노원은 그의 자(字)이다. 본관은 순흥(順興), 출생지는 평안남도 용강(龍岡)이다. 1855년 생원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했으며, 1849년(헌종15) 환재가 용강 현령으로 부임한 것을 계기로 그의 문객이 되었다. 1868년 미 군함 셰난도어호가 내도했을 때, 대동강으로 진입하지 말라는 환재의 서신을 미국 측에 전달한 바 있으며, 신분을 숨기고 정탐활동을 하기도 했다. 지도 제작에 뛰어나, 환재를 도와 조선의 지도인 〈동여도(東輿圖)〉를 제작하기도 했으며, 중국 지도인 〈신주전도(神州全圖)〉를 제작하기도 했다.[주-D003] 윤연재(尹淵齋) : 윤종의(尹宗儀, 1805~1886)를 가리킨다. 본관은 파평, 자는 사연(士淵), 호는 연재, 시호는 효정(孝貞)이다.[주-D004] 일통지(一統志) : 중국의 전국을 건치연혁ㆍ향진(鄕鎭)ㆍ산천ㆍ토산ㆍ풍속ㆍ경승ㆍ고적ㆍ인물ㆍ선석(仙釋) 등의 항목으로 나누어 기록한 종합지리서를 가리킨다. 《대일통지(大一統志)》ㆍ《대원일통지(大元一統志)》ㆍ《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ㆍ《청일통지(淸一統志)》 등이 대표적이다.[주-D005] 회전(會典) : 중국 명ㆍ청 시대에 각 관서의 조직과 제도를 규정한 책을 가리킨다.[주-D006] 남직례(南直隷) : 현대의 직할시에 해당하는 명칭으로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성조(成祖)가 수도를 북경(北京)으로 옮기고서 하북성 지방을 북직례(北直隷), 안휘성(安徽省)과 강소성(江蘇省) 일대를 남직례로 고쳤다. 그 후 청나라 때 남직례를 강소성과 안휘성으로 분리함에 따라, ‘직례(直隷)’라는 말은 하북성(河北省)만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주-D007] 호광(湖廣) : 원나라 때까지는 호북(湖北)과 호남(湖南)의 양호(兩湖), 광동(廣東)과 광서(廣西)의 양광(兩廣)을 합칭하는 말이었으나, 명나라 이후로는 호북과 호남만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주-D008] 서하객(徐霞客) : 1586~1641. 명(明)나라 말기의 지리학자로, 이름은 홍조(洪祖)이다. 19세에 부친을 잃은 후 중국 각지를 돌아다녔으며, 51세 때 절강ㆍ강서ㆍ호남ㆍ광서ㆍ귀주ㆍ운남에 이르는 지방을 4년여에 걸쳐 답사하였다. 저서로는 여행을 하는 동안의 일기를 모은 《서하객유기(徐霞客游記)》 10권이 있다.[주-D009] 용강(龍岡) : 용강현은 황해도 삼화현(三和縣)과 인접한 평안도의 한 속현으로 삼면이 바다에 접하고 높은 산들이 에워싸 토지가 척박하고 가난한 고장이다. 환재는 사간원 정언을 거쳐 이듬해인 1849년(헌종15)에 용강 현령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