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31. 07:06ㆍ북경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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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집 제7권 / 갑오행록(甲午行錄)
통주에서 첩운(疊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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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주 성 저 너머로 곤곤히 흐르는 노하 강물 / 通州城外潞河水
양자강 물결 찾아와서 궁성에 인사드리누나 / 揚子潮來望禁墻
흰 성가퀴 화려한 누대 아스라하게 둘러싸고 / 粉堞麗譙環縹緲
내 낀 모래톱 겹친 나무숲 끝도 없이 아득하네 / 煙洲重樹極蒼茫
눈발 속에 찾아가는 푸른 깃발 술집이요 / 雪天酒扣靑帘戶
얼음 깨고 물고기 낚는 누런 모자 사내로세 / 氷穴魚尋黃帽郞
여기에 또 풍류 있어 지금 다할 줄 모르나니 / 更有風流今不盡
복사꽃 일렁이는 물에 잔뜩 모여든 배들이여 / 桃花浪闊簇烏檣
[주-C001] 갑오행록(甲午行錄) : 선조 27년(1594)에 중국 군대의 파병과 광해군(光海君)의 세자 책봉을 주청(奏請)하러 중국에 갔을 때의 시를 모은 것이다. 이때 주청사(奏請使)는 윤근수(尹根壽), 주청 부사는 간이(簡易) 최립(崔岦), 서장관(書狀官)은 신흠(申欽)이었다.[주-D001] 푸른 깃발 : 주점(酒店)을 뜻하는 표현이다. 보통 청렴(靑帘)은 술을, 홍탄(紅炭)은 차(茶)를 파는 곳을 가리킨다.[주-D002] 누런 모자 : 뱃사람을 뜻하는 표현이다. 토(土)가 수(水)를 이긴다는 뜻에서, 토의 색깔인 황색(黃色) 모자를 썼으므로, 황모랑(黃帽郞) 혹은 황두랑(黃頭郞)이라고 했다 한다. 《漢書 卷93 侫幸傳 鄧通》
고전번역서 > 간이집 > 간이집 제6권 > 신사행록 > 최종정보
간이집 제6권 / 신사행록(辛巳行錄)
통주(通州)에서 차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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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점포(夏店鋪)에서 이제는 서쪽으로 노하역(潞河驛) / 夏店西程走潞河
삼대처럼 빽빽한 숲 양공의 묘소 입구로세 / 楊公壟口樹如麻
성루도 해를 등져 멀리서 보니 어여쁜데 / 城樓背日遙看麗
저잣거리 깃발들은 뽐내려는 듯 펄럭펄럭 / 市幔翻風似欲誇
하나의 띠로 사방의 물화(物貨) 집결되지 않는다면 / 一帶不緣通溱集
중원에서 으뜸가는 화려한 도시가 어찌 될까 / 中原安得冠雄華
줄지어 선 범선(帆船)들도 대부분이 남쪽 선박 / 危檣簇簇多南舶
거센 물결 헤치고서 멀리 만 리 길 왔더라오 / 來自鯨波萬里遐
하수(河水) 동쪽에 양 상서(楊尙書)의 묘소가 있다.
[주-D001] 하나의 띠 : 하수(河水) 즉 회통하(會通河)를 가리킨다. 강남(江南)의 양곡을 운반하는 대운하(大運河)의 하나로, 당시에 연간 4백만 섬을 조운(漕運)하였다고 한다
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8년 경오 > 1월 28일 > 최종정보
인조 8년 경오(1630) 1월 28일(무신) 맑음
08-01-28[16] 자정전에서 주강을 행할 때 지사 홍서봉 등이 입시하여 진강한 뒤 황도의 실정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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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여가 아뢰기를,
“중조(中朝)가 침략을 당했다는 말이 세 번이나 이르렀으니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계는 보지 못했으나 원 장군(袁將軍)이 10만 명을 이끌고 나와서 산해관(山海關)에 있는데도 한(汗)의 군대가 요로로 출격해서 제도(帝都)에 진격하여 근접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듯합니다. 하지만 통주(通州)에서 전해 온 말이 맞다면 천하의 대사가 거의 끝장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담장을 튼튼하게 하고 이웃하는 여염집이 많으면 도적이 침입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와서 ‘너의 부모님 댁에 도둑이 들었다.’고 말하는데도, 장차 ‘담장이 튼튼해서 도둑이 필시 침입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웃하는 여염집도 많으니 도둑이 침입하기는 필시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그럴 리가 없다고 핑계 대면서 가만히 앉아만 있고 달려가서 살펴보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한인(汗人)이 황성을 포위했다는 설은 반드시 그럴 리야 없겠지만 보고가 세 번이나 이르렀으니 진실로 가볍게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그럴 리가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또한 가만히 앉아서 듣고 지나쳐서도 안 됩니다. 즉시 대신으로 하여금 잘 대처하는 방법을 찾게 하고 혹 얼음이 풀리자마자 사신을 보내서 탐문하여 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는 군국(軍國)의 대사이므로 소신이 감히 아뢸 것은 아니나 또한 중조와의 의리로 볼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는 문제와 관계되므로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을 들으니 지극히 놀라운데 듣고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하지만 오랑캐 졸개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도 없어서 현재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 원문 빠짐 -”
하였다. 홍서봉이 아뢰기를,
“적이 만약 산해관을 침범했다면 험한 요새가 다시는 없을 것이니 지극히 놀랍고 염려스럽습니다. 통주가 이미 포위되었다면 황도가 포위되리라는 말이 반드시 이치에 맞지 않으리란 것을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통주와 황도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가?”
하자, 홍서봉이 아뢰기를,
“40리의 노정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궐로부터 수로(水路)를 통하게 하였다고 하던데 그 물은 어떤가?”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물살이 약하여 둑을 쌓아서 물을 가두어 놓은 것 같습니다. 만약 위급한 일이 있으면 그 물을 터서 물살을 세게 합니다. 도성 아래에 작은 배가 있는데, 이른바 도독선(都督船), 한림선(翰林船)이라고 하는 배가 모두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물이 겨울에는 어는가?”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로는 넓은가?”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좁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좁다면 급박할 때 배를 탈 수 있겠는가?”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배 두 척이 동시에 뜰 수 있는 형편은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경(南京)의 수로는 강하(江河)와 통하는가, 해로(海路)와 통하는가?”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하수(河水)와 - 원문 빠짐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궐내에서 나오는 수량은 많은가?”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많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궐내에는 산이 없다고 하던데 어떻게 물이 있는가?”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가두어 둔 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의 형세에 대해서 말한다면 경의 생각에는 어떤 양상일 것 같은가? 이러한 것이 거짓 보고이겠는가? 적이 깊숙하게 침입하지는 않았다 해도 산해관을 침범했다는 것은 그럴 듯한 말인가?”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산해관을 침범했다는 설은 그럴 듯합니다. 만약 산해관으로 들어갔다면 그 안에는 주둔한 군대가 없으니 황도를 포위하지 못할 리도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통주에 성이 있는가?”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있습니다. 고아부(高牙夫)가 나와서 박난영(朴蘭英)을 만나 의주(義州)에 머물고 있는데 우리나라가 저의 소굴에 무슨 일이나 벌이지 않을까 해서 틀림없이 이 때문에 왔을 것입니다. 산해관 안으로 침입했다면 황도의 포위도 어렵지 않습니다. 가도(椵島)로 가는 바다의 얼음이 풀린다 해도 영원(寧遠)의 기별을 반드시 쉽게 전해 들을 수는 없을 것이니, 가도 사람들이 외부 소식을 모르기는 우리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 원문 빠짐 -”
하였다. 홍서봉이 아뢰기를,
“가정(嘉靖) 연간에 달적(獺賊 몽고족)이 침입해 왔어도 도성이 보전되었지만, 이번의 적은 변경을 뚫고 침입한 그들과 비교가 되지 않으니 지극히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이 침입하지 않았다면 그만이거니와 장성(長成)으로 쳐들어온다면 도성에 들어오기는 어렵지 않으렷다.”
하자, 홍서봉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말을 타고 먼 거리를 달릴 수 있는 것이 그들의 장기입니다. 회오리바람처럼 빠릅니다.”
하였다. 이기조가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옛날 임진년(1592, 선조 25)에 만력 황제(萬曆皇帝 명 신종(明神宗))가 뜻밖의 병화를 만난 우리나라를 걱정하고 또 동쪽으로 싸우러 간 장사(將士)를 염려하여 항진(行陣)에 오래 머무르며 정전(正殿)을 피하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이번에 황도가 포위당했다는 말이 호인(胡人)이 과장하는 말에서 나왔다 해도 듣고서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으니, 지금이 어찌 소방(小邦)의 상하 군신이 편안하게 있을 때이겠습니까. 상께서 정전을 피하는 등의 거조로 마음이 편치 않은 뜻을 보여야 할 것 같으니 예관으로 하여금 대신에게 수의하게 하여 정탈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이경여가 아뢰기를,
“참으로 승지의 말과 같이 해야 합니다. 황도를 포위했다는 말을 들었으니 허구든 실제든 간에 어떤 조처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홍서봉이 아뢰기를,
“황도를 포위했다는 설을 들었으니 마땅히 평상시와 다른 거조가 있어야 할 것이고 후에 확실한 소식을 듣고서 평상으로 회복한다고 해도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마땅하다. 그대로 하라. 원숭환(袁崇煥)은 위엄이 천하를 진동시키고 남아의 기상이 있으니 반드시 적 때문에 임금의 기대를 저버리고 산해관 밖으로 퇴각했을 리는 없다. 이기든 지든 반드시 진격하여 싸웠을 것이지만, 이런 일이 있다 해도 오랑캐들이 틀림없이 그런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희봉구(喜峰口)는 영원(寧遠)으로 들어가는 길목인가?”
하니, 홍서봉이 아뢰기를,
“서달(西獺) 건너편 지역입니다. - 원문 빠짐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생각에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여기는가?”
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조총은 국가에서 만들어 지급할 길이 없어서 각자 자신들이 준비한 물건을 가지고 있고 새로 내려 준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라 병사 구인후(具仁垢)가 소장한 50여 자루를 지급했습니다. 군수(軍需)에 쓰이는 물자가 나올 곳이 없으니 걱정입니다. 들으니 병조에는 여정(餘丁)의 가포(價布)가 많이 있고 진휼청(賑恤廳)에도 400동의 목(木)이 있다고 하니, 많은 수를 덜어 내어 본청으로 보내서 군수의 자금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단병기(短兵器)로 접전할 때는 환도(環刀)가 가장 관련 있는데, 화병(火兵 총을 가진 병사)이라 해도 단병기는 차고 다닐 수가 있으니 제조하는 방책을 생각하라. 군수의 비용은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적절히 제급(題給)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자점이 아뢰기를,
“당초의 사목 내에, ‘사노(私奴)에게는 복호(復戶) 50짐〔卜〕을 주며 양인(良人)에게는 1인을 급보(給保)하여 일체의 잡역에 침책(侵責)되지 않도록 감사와 수령으로 하여금 착실하게 거행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수령이 사목대로 하지 않아 사천(私賤)이 응당 받아야 할 복호를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침책까지 하여서 꿩, 노루, 멧돼지, 토끼까지 납부하도록 독촉하여 사적으로 쓰는 자금으로 삼아서 장차 군사들이 견디지 못할 지경이니 매우 한심합니다. 낱낱이 들어서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행하라. - 원문 빠짐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둔전(屯田)은 무판(貿販)보다 조금 낫지만 폐단이 있으니 - 원문 빠짐 -
[주-D001] 김의(金義)가 …… 변란 : 김의는 1374년(공민왕 23)에 고려에 말을 구하러 온 명(明)나라 사신의 호송 임무를 맡았는데, 접대가 부실하다고 사신이 행패를 부리자 도중에 사신 채빈(蔡斌)을 죽이고 사신 임밀(林密)을 납치해서 원(元)나라로 달아났다. 이 사건으로 오랫동안 양국 관계가 냉각되었다.[주-D002] 관리들에게만 …… 하고 : 향리(鄕吏)가 교대로 서울로 오면 공조(工曹)에서는 그 인원을 제사(諸司)에 나누어 배정시켜 땔감을 바치게 하였다. 대동법(大同法)이 시행된 후에는 경인(京人)들을 기인(其人)으로 삼아 미리 값을 주고 땔감을 마련하게 하는 제도로 바뀐다. 《大典會通 工典 京役吏》[주-D003] 황도를 …… 같습니다 : 원문은 ‘似無圍皇都之理’인데, 탈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似無’ 다음에 ‘不’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양경희 (역)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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