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25. 06:32ㆍ북경 추정
신유년(辛酉年)
1621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연호[원본 편집]
- 명(明) 천계(天啓) 원년
- 후금(後金) 천명(天命) 6년
- 일본(日本) 겐나(元和) 7년
- 후 레 왕조(後黎朝) 빈또(永祚) 3년
- 막 왕조(莫朝) 끼엔통(乾統) 29년 / 롱타이(隆泰) 4년
기년[원본 편집]
- 류큐(琉球) 쇼호왕(尚豊王) 원년
- 명(明) 희종 천계제(熹宗 天啓帝) 원년
- 후금(後金) 태조 천명가한(太祖 天命可汗) 6년
- 조선(朝鮮) 광해군(光海君) 13년
- 후 레 왕조(後黎朝) 신종(神宗) 3년
영원성 전투[편집]
1621년(천명 4년), 기세가 오른 누르가치는 심양, 요양을 잇따라 함락시켰고 1625년 요양 옆의 심양으로 천도했다. 이 때 금의 세력권은 요동 전역에 미쳤다. 1626년(천명 9년), 연전연승하던 누르가치는 명나라의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 산해관을 함락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그 앞에 있는 영원성[23]에서 장군 원숭환이 포르투갈에서 수입한 홍이포를 대량으로 거취하고 금군을 맞이했다. 홍이포의 위력에 금군은 패배하고, 퇴각했다. 영원성 전투로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다.
누르하치
천명제, 努爾哈赤
출생사망
1559년 |
1626년 |
청나라를 건국한 초대 황제 청 태조(재위 1616~1626년).
여진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웠으며 명과의 크고 작은 전쟁에서 여러 번 대승을 거두어 청나라 건국의 초석을 다졌다.
그가 병사한 후 아들 홍타이지가 국호를 대청으로 고치고 청나라 제국을 선포했다.
17세기 새로운 중국의 역사를 쓰다
누르하치는 17세기부터 약 300여 년간 중국 대륙을 지배했던 청나라의 초대 황제 태조로, 여진족을 통일하여 후에 청나라의 토대가 되는 후금을 세워 명나라를 압박했다. 그는 11년간 재위하면서 청나라 제도의 중심이 되는 팔기 제도를 창설했으며, 만주 문자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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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후반 중국 북동부는 여진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력권에 따라 건주여진 5개 부족, 해서여진 4개 부족, 야인여진 4개 부족 등으로 나뉘어 세력 다툼을 했다. 이는 명나라의 여진족에 대한 이중 정책의 결과로, 명나라는 여진족들끼리 단결하지 못하도록 분열 정책을 구사하는 한편 그들에게 관직을 주어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의 귀족 출신으로, 할아버지 기오창가(覺昌安)와 아버지 타쿠시(塔克世)는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건주좌위라는 관직을 받았다.
1582년 건주여진의 한 부족인 토륜성 성주 니칸와이란(尼堪外蘭)이 명나라 군대와 함께 교창가와 인척 관계였던 아타이를 공격했다. 누르하치의 조부와 부친은 이 전투에서 명나라 군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에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항의했지만 아직 힘이 미약했던지라 명나라가 사과의 의미로 하사한 관직을 받아들이고 울분을 참아야만 했다.
1583년 누르하치는 아버지가 남긴 13벌의 갑옷을 병사들에게 나누어 준 후 조상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니칸와이란을 공격했다. 1586년 그는 니칸와이란을 죽이고, 그가 족장으로 있던 건주여진의 일부인 소극소호 부락을 점령했다. 그리고 기세를 몰아 나머지 건주여진의 다른 부락들도 정복했고, 1589년에 건주여진 5개 부족을 통일했다.
누르하치의 건주여진 통일은 다른 여진족들과 명나라를 긴장시켰다. 특히 해서여진은 1593년 다른 여진 부락과 연맹을 맺고 세력을 확장한 다음 누르하치에게 사신을 보내 영토 할양을 요구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해서여진의 요구를 묵살했다. 같은 해 해서여진은 몽골 족과 연합하여 군사 3만을 이끌고 누르하치를 공격했다. 이에 누르하치는 자기가 이끄는 군대를 ‘만주 군대’라 칭하고 고륵산(古勒山)에 진을 치고 기다렸다. 그는 해서여진의 연합군이 당도하기를 기다렸다가 유인책을 펴 그들을 크게 격파했다. 누르하치는 당시 명나라가 조선에서 발생한 임진왜란에 원군을 보내는 것으로 간섭이 소홀해진 틈을 타 1599년부터 해서여진의 각 부족을 정복해 나가기 시작하여, 1613년에는 여진 각 부족을 통일했다.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1616년 본거지를 허투알라(赫圖阿拉)로 옮기고, 칸의 지위에 올라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하고,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했다. 누르하치가 세운 대금을 이전의 금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후금’이라고 부른다. 누르하치는 여진족의 이름을 불교의 문수보살의 이름을 따 만주(滿州)로 고치고, 만주 문자를 정비했으며, 여진족의 조직 구조를 팔기(八旗)로 재편성했다. 여기서 기(旗)는 행정단위이자 군사 조직으로 정황기(正黃旗), 양황기(鑲黃旗), 정백기(正白旗), 양백기(鑲白旗), 정홍기(正紅旗), 양홍기(鑲紅旗), 정남기(正藍旗), 양남기(鑲藍旗)로 나뉜다. 팔기군은 평시에는 조세와 행정을 담당했고, 전시에는 군대로 편성되었다.
정홍기, 정남기, 정황기, 정백기(상단 좌측부터), 양홍기, 양남기, 양황기, 양백기(하단 좌측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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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서의 기반을 확고히 한 누르하치는 1618년 팔기의 대장들과 군사들 앞에서 명나라 조정의 일곱 가지 죄를 적은 〈칠대한(七大恨)〉이라는 격문을 발표하고 하늘에 제를 지냈다. 여기서 그는 조부와 부친의 죽음을 명나라 군대에 의한 것이라고 규명했다. 〈칠대한〉은 명나라에 대한 실질적인 선전포고였다.
누르하치는 군사 2만을 이끌고 무순(撫順)을 공격했고, 무순의 성주인 명나라 장수 이영방(李永芳)에게 항복을 권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영방은 누르하치가 도착하기도 전에 투항했고, 누르하치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변성(邊城) 청하를 함락했다. 이에 명나라 황제 만력제는 전국에서 장수와 군사를 모집하고, 요동 지역의 군비를 증가시켜 국경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양호(楊鎬)를 요동 경략으로 임명하여 후금을 토벌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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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년 누르하치의 만주 군대와 명나라 군대는 무순에서 가까운 사르후(薩爾滸)에서 격돌했다. 명나라군은 군사를 네 갈래로 나누어 유정(劉綎)에게 동로군을, 두송(杜松)에게 서로군을, 이여백(李如柏)에게 남로군을, 마림(馬林)에게 북로군을 영솔하게 했다. 그중 주력 부대는 두송의 서로군이었다. 누르하치는 두송을 먼저 공격하기로 했다. 두송은 험악한 겨울 날씨 때문에 군사들이 힘들어 하자 속전속결로 만주 군대를 무찌르고자 했다. 두송은 사르후 산의 입구를 선점한 후 군대를 둘로 나누어 2만의 군사에게는 사르후를 지키게 하고, 자기는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후금의 계번성(界藩城)을 공격했다.
누르하치는 차남 대선(代善)과 8남 홍타이지(皇太極)에게 계번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사르후를 포위했다. 그는 사르후를 지키는 명나라 군대를 물리쳐 두송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계번성으로 진격했다. 완전히 포위된 명나라 군대는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고, 격렬히 저항했지만 모두 전멸하고 말았다. 두송 또한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이후 누르하치는 북로군과 동로군을 격파하며 사르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사르후 전투의 패배로 명나라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1621년 누르하치는 심양(瀋陽)과 요양(遼陽)을 잇따라 함락시키며 요동 전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1625년 그는 심양으로 천도하고, 심양의 이름을 ‘성경(盛京)’으로 바꾸었다.
1626년 누르하치는 명나라 본토를 공격했다. 그는 직접 13만 대군을 이끌고 먼저 산해관 앞의 영원성(寧遠城)을 공격했다. 이때 명나라의 장수 원숭환(袁崇煥)은 네덜란드에서 들여온 홍이포를 설치해 후금의 공격에 철저히 대비했다. 누르하치는 금주, 송산, 대소능하, 행산, 연산과 탑산 7개 성을 연속해서 공략했지만, 원숭환의 완강한 저항에 영원성은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이에 누르하치는 성 아래에 구멍을 내어 성벽을 허물고 입성할 계획을 세웠으나 이를 알아챈 원숭환은 홍이포를 쏘며 반격했다. 이틀간의 격렬한 교전 끝에 명나라군은 후금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으며, 누르하치도 대포 공격으로 부상을 입었다. 결국 부상을 당한 누르하치는 심양까지 퇴각을 결심했고, 퇴각 도중 부상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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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는 생전에 후계자를 결정하지 않았으나 그의 8남 홍타이지가 그의 뒤를 이어 칸이 되었다. 홍타이지는 1636년 후금의 이름을 ‘청(淸)’으로 바꾸고 누르하치를 태조로 추존했다.
속잡록 2(續雜錄二)
무진년 상 숭정(崇禎) 원년, 인조 6년(16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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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천둥이 쳤다.
○ 박난영(朴蘭英)이 호중(胡中)에서 돌아왔다. 오랑캐가 신유년에 심양(瀋陽)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호중(胡中)은 곧 심양을 의미한 것임.
○ 오랑캐 차사 용골대(龍骨大)ㆍ박기내(朴其乃)가 기병 50여 명을 거느리고 일시에 나왔다. 오랑캐의 편지의 대강은 아래와 같다.
우리 나라가 귀국에게 양식을 꼭 빌려야 되는 것은 아니나 근일에 몽고 백성이 다 귀순해 왔으므로 양식을 빌려서 그들을 구제하려는 생각이다. 귀국이 비록 탕진되었다고 핑계대지만 평안도 일대와 황해도 절반이 대병의 출입으로 잠깐 퇴폐된 듯할 뿐이며, 그 나머지 6도는 여전히 편안히 지내고 있으니 준비하기 어려울 리가 무엇 있겠는가. 한결같이 서로 약속한 수효대로 혹은 진강(鎭江)이나 혹은 수로로 수송해 주시오.
3일 죽산(竹山)에 거주하는 전 부사 허적(許𥛚)이 변란을 고발하며, 허유(許逌) 등이 이튿날 대궐을 침범할 것이라 하므로, 비변사에서 군사를 내어 고변인(告變人) 허선(許選) 등과 함께 몰래 동남문을 지켰는데, 이날 저녁에 역도들이 패를 갈라 각각의 문으로 들어오다가 모두 포박을 당했다. 최산휘(崔山輝) 역시 유효립(柳孝立) 등의 반역 사실을 고발하므로 도사(都事)를 나누어 보내 모두 잡아다 문초하니, 각 사람들이 모두 시인했다. 진술서에 어떤 이는, “애통해 하는 밀서를 강화에서 받고, 인성군(仁城君)을 시켜 의거를 일으키게 했다.” 하고, 어떤 이는 “자전(慈殿)의 밀지를 받아 인성군에게 전했다.” 하므로, 모두 사형에 처했다.
○ 중외 대소 신민에게 내린 교서는 다음과 같다.
왕은 이르노라. 국가가 불행하여 역모가 자주 국가 안에서 일어나고, 임금이 의지할 사람이 없어 큰 변이 측근에서 생겼다. 형벌과 법이 밝게 시행되니 경사와 덕택이 널리 흐른다. 나는 조그마한 몸으로 이 어지러운 뒤를 이어 받았다. 모후(母后)를 받들어 위(位)를 회복하니 인륜이 다시 밝아지고, 죄인을 물리쳐 명분을 밝게 하니 대의가 드러났다. 모든 형정(刑政)에 대해서는 매양 관대한 것으로 마음을 썼다. 원래 대역과 원흉이 윤기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면 모두 사랑하여 살려주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어찌 간당의 나머지가 감히 역적 모의를 할 줄 알았으랴. 역적 유효립(柳孝立)ㆍ정심(鄭沁)ㆍ윤계륜(尹繼倫) 등은 올빼미와 같은 본성으로, 날로 비렴(蜚廉)과 악래(惡來) 같은 행위를 하여, 혹은 권간(權奸)에게 붙어 국모를 폐하고 인륜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자기 책임을 삼고, 혹은 임금 측근에 줄을 대어 임금의 악을 유도하고 나라를 그르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죄악이 가득 차서 사형을 면하기 어려웠으나 관대하게 처리하여 시골집으로 놓아 보냈는데, 하늘처럼 떠받들 것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주인을 해칠 생각을 품었다. 그래서 귀신도 속일 수 있다 하고, 종묘사직도 넘겨다 볼 수 있다 하여 폐인(廢人)을 사귀어 밀서를 전달하여 서로 호응하고, 왕자와 결탁하여 집안 종을 모아 군사를 만들며, 참위(讖緯)를 칭탁하여 인심을 선동하고, 내시와 통하여 대궐을 엿보고, 역적을 제갈량(諸葛亮)에게 견주고, 괴수를 성인으로 지목했다. 궁중에 독약을 들여보낸 음모는 너무도 참혹한데, 태묘에 불을 지른다는 말은 어찌 차마 들으랴. 계획이 이미 이뤄지고 부서도 대략 정해졌다. 꾀를 내기는 실로 지난 해부터였고, 거사는 내일 아침으로 기약했던 것이다. 위태로운 화가 경각에 박두했는데, 다행히 천지의 말 없는 도움에 힘입어 마침내 기밀을 미리 알아낸 충성스러운 신하가 있어서 그 음모를 폭로하여 추한 무리가 모두 포박을 당했고, 엄한 형벌을 가해서 정상이 숨김없이 드러났으니 국가에는 떳떳한 법이 있는데 내 어찌 감히 용서하겠느냐. 이미 역적 유효립ㆍ배희도(裴希度)ㆍ허유ㆍ유종선(柳宗善)ㆍ유두립(柳斗立)ㆍ안집중(安集中)ㆍ이우명(李友明)ㆍ정인(鄭遴)ㆍ허규(許逵)ㆍ정진(鄭振)ㆍ조헌립(趙憲立)ㆍ이척(李惕)ㆍ배윤(裴允)ㆍ김응호(金應虎)ㆍ김응표(金應彪)ㆍ김응사(金應獅)ㆍ김세익(金世益)ㆍ김영기(金永起)ㆍ옥석(玉石)ㆍ금남(金男)ㆍ귀희(貴希) 등을 모두 사형에 처하고, 조관을 보내어 태묘(太廟)에 고유했다. 난신(亂臣) 적자(賊子)가 어느 시대인들 없으랴만 궁흉 극악이 이보다 심할 수는 없다. 이미 신민의 분노를 풀었기로 이에 뇌우(雷雨)의 은혜를 베푼다. 본월 11일 새벽 이전으로……. 아, 순리대로 하면 길하고 거스르면 흉하나니, 이것이 상리(常理)요, 양(陽)은 화평하며 음은 참혹하나니, 지극한 인(仁)이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이렇게 교시한다…….
다산시문집 제15권 / 서(敍)
대청 세계략(大淸世系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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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滿洲) 개국의 유래. 《개국방략(開國方略)》에,
“장백산(長白山) 동쪽에 포고리산(布庫哩山)이 있고 그 산 밑에 포륵호리(布勒瑚里)란 연못이 있는데, 전하는 말에 ‘하늘의 선녀(仙女) 불고륜(佛庫倫)이 내려와서 이 연못에서 목욕을 하는데, 신작(神鵲)이 붉은 과일 하나를 물고 와서 선녀의 옷 위에 놓고 갔다. 그 과일을 입에 넣고 삼킨 선녀는 드디어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성(姓)은 애신각라(愛新覺羅)이고 이름은 포고리옹순(布庫哩雍順)이다. 장백산 북쪽 아타리성(俄朶里城)에 살면서 국호(國號)를 만주라 하였다.’한다. 수세(數世) 동안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하였으므로 국민이 반란을 일으켜 애신각라의 종족을 해치자, 어린 아들 하나가 황야로 도망하여 목숨을 건졌다.”
하였고, 《황조문헌통고(皇朝文獻通考)》에는,
“우리나라는 장백산에서 발상(發祥 천명(天命)을 받아 천자(天子)가 될 길조(吉兆)가 나타나는 것)하였다. 먼 조상이 세 성(姓)의 난을 평정한 뒤로 아막혜(俄漠惠)의 야악다리성(野鄂多理城)에 살았으니, 지금의 영고탑(寧古塔) 서남쪽 3백여 리 지점에 있다. 국호를 만주라 했다.” 여지고(輿地考)
하였다.
살피건대, 명 나라 때 여진(女眞)의 땅을 나누어 건주(建州)ㆍ해서(海西)ㆍ모련(毛憐) 등 세 위(衛)를 설치하였더니, 청 나라는 건주위에서 일어났다. 건주위는 지금의 흥경(興京)으로 혁도아랍(赫圖阿拉)이란 곳이 바로 그곳이다. 동사(東史 우리나라 사책(史冊))를 상고해 보면 명 나라 영락(永樂) 때 알타리부락(斡朶里部落)의 맹가첩목아(孟哥帖木兒) 관독(管禿)이라고도 한다. 가 알목하(斡木河) 지금의 회령부(會寧府) 에 들어와 살았는데, 선덕(宣德 명 선종(明宣宗)의 연호) 7년 7성(姓)의 야인(野人)이 알목하를 공격할 적에 맹가가 피살되고 오직 범찰(凡察)과 이이(耳伊) 등만 죽음을 면하였는데 이들은 경원(慶源)으로 옮겨 살기를 청하였다. 《무비지(武備志)》에는 ‘맹가가 피살되자 그 동생 범찰과 아들 동창(童倉)이 조선으로 도망하였다.’하였고, 《박물전휘(博物典彙)》에는 ‘동창이 산 곳은 건주의 조상이 살던 곳이다.’하였으니, 《개국방략》에 말한 아타리성(俄朶里城)은 바로 동사(東史)에서 말한 알타리부락(斡朶里部落)이고, 《개국방략》에서 말한, 종족을 해치자 어린 아들이 황야(荒野)로 도망하였다는 것은 동창이 우리나라에 귀순한 것을 일컫는 듯하다. 또 동사를 상고하건대 ‘선덕(宣德)ㆍ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 때 건주위지휘(建州衛指揮) 이만주(李滿住)가 파저강(婆豬江) 내외의 땅을 점거하고서 우리의 국경을 자주 침범하므로 드디어 여연(閭延)ㆍ무창(茂昌) 등 4군(郡)을 폐하였다.’하였는데, 지금이《개국방략》에 조(肇)ㆍ흥(興)ㆍ경(景)ㆍ현(顯) 등 4조(祖)는 파저강 내외의 부락들과 연관이 있었을 듯하니, 이들은 아마도 만주를 이어서 일어난 것인 듯하다.
조조원황제(肇祖原皇帝). 이름은 상고할 수 없다. 개국(開國)한 뒤 몇 대를 전하여 조조에 이르렀다. 혁도아랍지(赫圖阿拉地)에 살았다. 소극소호하(蘇克素護河)와 가합하(嘉哈河)의 중간에 있는데, 아타리(俄朶里) 서쪽에서 1천 5백리 거리이다. 뒤에 흥경(興京)이라 하였다. 아들 둘을 두었다. 처음 시호(諡號)는 택왕(澤王)이었는데, 순치(順治 청 세조(淸世祖)의 연호) 5년에 추존(追尊)하여 조조(肇祖)라 하였다.
흥조직황제(興祖直皇帝). 이름은 상고할 수 없으며 조조의 증손(曾孫)이다. 아들 여섯을 두었다. 처음 시호는 경왕(慶王)이었는데 순치 5년에 추존하였다.
경조익황제(景祖翼皇帝). 이름은 규장(叫場)이고 흥조의 제4자(子)로 선세(先世)의 업(業)을 받들어 혁도아랍지에 살았다. 그 형제 5명은 5성(城)에 나뉘어 살면서 모두 영고탑패륵(寧古塔貝勒)이라 칭하였다.
아들 다섯을 두었다. 처음 시호는 창왕(昌王)이었는데, 순치 5년에 추존하였다.
현조선황제(顯祖宣皇帝). 이름은 타실(陀失)이고 경조의 제4자이다. 형 예돈(禮敦)과 함께 오령(五嶺)의 동쪽과 소호하(素護河) 서쪽 2백 리 안에 있는 부족들을 수습하여 복종시켰으므로 나라가 더욱 강성해졌다. 아들 다섯을 두었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11년 계미에 도륜성주(圖倫城主) 이감 외란(尼堪外蘭)과 영원백(寧遠伯) 이 성량(李成梁)이 공모하여 경조와 현조를 모두 해쳤다.
처음 시호는 복왕(福王)이었는데, 순치 5년에 추존하였다. 이상 4조의 무덤은 모두 같은 산에 있는데, 영릉(永陵)이라 칭한다. 흥경 서북 10리에 위치한 계운산(啓運山)에 있다.
태조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립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太祖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휘(諱)는 노화적(魯花赤)이고 노아합적(奴兒哈赤) 또는 노모합재(努慕哈齋) 또는 노랄(老剌)이라고 한다. 현조(顯祖)의 장자(長子)이다. 어머니 선태후(宣太后)는 가탑랄씨(嘉塔喇氏)이다. 아고도독(阿古都督)의 딸이다. 가정(嘉靖) 38년 기미에 장백산 밑에서 태어났다. 계미에 처음으로 군사를 일으켜 이감외란(尼堪外蘭)을 토벌하여 이겼다. 이때 태조의 나이 25세였다. 군사를 일으킨 이후 30여 년 동안 여러 부(部)를 평정하여, 만주(滿洲)의 소극소호하부(蘇克素護河部)ㆍ혼하부(渾河部)ㆍ완안부(完顔部)ㆍ동악부(棟鄂部)ㆍ철진부(哲陳部)와 장백산(長白山)의 눌은부(訥殷部)와 동해(東海)의 와집부(窩集部)ㆍ와이객부(瓦爾喀部)ㆍ고이객부(庫爾喀部)와 윤국(倫國)의 오랍부(烏拉部)ㆍ합달부(哈達部)ㆍ섭혁부(葉赫部)ㆍ휘발부(輝發部)와 흑룡강(黑龍江)의 살합련부(薩哈連部)와 조가성(兆嘉城)ㆍ옹악낙성(翁鄂洛城)ㆍ계번성(界蕃城) 등을 차례로 섬멸하니, 몽고(蒙古)의 과이심객(科爾沁喀)ㆍ이객(爾喀) 등 부(部)가 모두 귀복(歸服)하였다. 태조의 영특한 용맹이 세상에 뒤덮이니 사람들은 총명하고 슬기로운 패륵(貝勒 만주어로 부장(部長)의 뜻)이라 하였다.
기축에 명 나라로부터 용호장군(龍虎將軍)에 봉(封)해졌다. 을사에 혁도아랍(赫圖阿拉)에 성을 쌓고 살았다. 병오에 몽고의 여러 부(部)가 함께 높여 신무황제(神武皇帝)라 하였다. 병진에 존호를 올려 부육열국영명황제(覆育列國英明皇帝)라 하고 후금국한(後金國汗)이라 칭하였다. 천명(天命)이라 건원(建元)하였다. 만력(萬曆) 24년이었다. 을축에 심양(瀋陽)에 도읍을 정하였다. 후에 성경(盛京)이라 칭하였다. 병인에 붕(崩)하니 재위(在位) 11년에 68세였다. 숭덕(崇德) 연간에 무황제(武皇帝)에 추존하고, 강희(康熙) 연간에 개칭하여 고황제(高皇帝)라 하였다 (을축;1625년)
복릉(福陵)에 장사지냈으니, 성경(盛京) 동북쪽 20리에 위치한 천주산(天柱山)에 있다.
효자소헌경순인휘의덕경현승천보성고황후(孝慈昭憲敬順仁徽懿德慶顯承天輔聖高皇后) 섭혁납랄씨(葉赫納喇氏) 패륵 양고노(陽古努)의 딸이다. 복릉(福陵)에 합장(合葬)하였다
수사록 권1 / 북행총요(北行摠要)
청조 연계(淸朝年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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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사(續史)》에 이르기를, “청(淸)은 본디 만주인이다. 【만주는 또한 ‘건주(建州)’라고도 일컫는다. ○곧 여진 종(女眞種)이다.】 스스로 말하기를, ‘어떤 천녀(天女)가 신작(神鵲)이 물고 있던 붉은 열매를 삼키고 장백산(長白山) 동쪽의 포고리산(布庫哩山)에서 아들을 낳았으니 애신각라(愛身覺羅)로 성(姓)을 삼았다.’ 몇 대 후에 규장(叫場)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영고탑(寧古塔)에 살았는데, 패륵(貝勒)이라고 불렀다. 황명(皇明) 신종(神宗, 재위 1573~1620) 때 이성량(李成樑)이 요동을 진수(鎭守)하면서 규장과 그 아들 탑실(塔實)이 모두 이성량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탑실의 아들 노아합적(盧兒哈赤 누르하치(努爾哈赤))은 이미 장성하여, 용기와 지략이 남들보다 뛰어났으므로 만력(萬曆, 1573~1620) 기미년(1599)에 복수(復讎)라 일컬으면서 마침내 병사를 일으켜 후금의 칸〔可汗〕이 되었다.”라고 한다.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이름은 노아합적(盧兒哈赤)이다. ○명 신종 만력 기미년(1599)에 자칭 후금의 칸이라 하고 천명(天命)으로 개원(改元)하였다. ○명 희종(熹宗) 천계(天啓, 1621~1627) 병인년(1626)에 죽었다. ○복릉(福陵)】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 【이름은 홍타시(弘他時), 태조의 차자(次子)이다. ○명 희종 천계 정묘년(1627)에 후금 칸으로 옹립하여 천총(天聰)으로 개원하였다. ○명 의종(毅宗) 숭정(崇禎, 1628~1644) 병자년(1636)에 황제라고 칭하고 국호를 고쳐 청 건원 숭덕(淸建元崇德)이라고 하였다. ○계미년(1643)에 죽었다. ○소릉(昭陵)】
○세조장황제(世祖章皇帝) 【이름은 복임(福臨), 태종(太宗)의 아들이다. ○명 의종(毅宗) 숭정 갑신년(1644)에 옹립하여 순치(順治)로 개원하였다. ○북경에 도읍하였다. ○신축년(1721)에 죽었고 18년 재위하였다 ○효릉(孝陵)】
○성조인황제(聖祖仁皇帝) 【이름은 현휘(玄暉), 세조의 아들이다. ○임인년(1661)에 옹립하여 강희(康熙)로 개원하였다. ○임인년(1722)에 죽었고 61년 재위하였다. ○경릉(景陵)】
○세종헌황제(世宗憲皇帝) 【이름은 윤정(胤禎), 성조의 넷째 아들이다. ○계묘년(1723)에 옹립하여 옹정(雍正)으로 개원하였다. ○을묘년(1735)에 죽었고 13년 재위하였다. ○태릉(泰陵)】
○고종순황제(高宗純皇帝) 【이름은 홍력(弘曆), 세종의 넷째 아들이다. ○병진년(1736)에 옹립하여 건륭(乾隆)으로 개원하였다. ○을묘년(1795)에 죽었고 60년 재위하였다. ○유릉(裕陵)】
○인종예황제(仁宗睿皇帝) 【이름은 옹용(顒瑢), 고종의 아들이다. ○병진년(1796)에 옹립하여 가경(嘉慶)으로 개원하였다. ○경진년(1820)에 죽었고 35년 재위하였다. ○창릉(昌陵)】
○지금 황제(今皇帝) 【이름은 금녕(綿寧), 인종의 차자(次子)이다. ○신사년(1821)에 옹립하여 도광(道光)으로 개원하였다.】
[주-D001] 속사(續史) : 《속사략익전(續史略翼箋)》의 준말이다. 조선 후기 홍인모(洪仁謨, 1755~1812)가 찬(撰)하고, 그의 아들 홍석주(洪奭周, 1774~1842), 홍길주(洪吉周, 1786~1841) 형제가 보완하여 완성한 명대사(明代史)이다.[주-D002] 어떤 …… 삼았다 : 정약용(丁若鏞)의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권15 〈대청세계략(大淸世系略)〉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주-D003] 규장(叫場)이라는 …… 불렀다 : “경조익황제(景祖翼皇帝, 애신각라(愛身覺羅)ㆍ각창안(覺昌安), 1526~1583)는 이름이 규장(叫場)이고, 흥조직황제(興祖直皇帝 애신각라ㆍ복만(福滿))의 넷째 아들로 선세(先世)의 업을 받들어 혁도아랍(赫圖阿拉)에 살았다. 그 형제 5명은 5개 성(城)에 나뉘어 살면서 모두 ‘영고탑패륵(寧古塔貝勒)’이라 칭하였다. 아들 다섯을 두었다. 처음 시호는 창왕(昌王)이었는데, 순치(順治) 5년에 추존하였다.[景祖翼皇帝, 名叫場,興祖第四子, 承先業, 居于赫圖阿拉地. 其餘兄弟五人,分居五城,竝稱寧古塔貝勒. 有五子. 初諡昌王, 順治五年追尊.]” 《茶山詩文集 卷15 大淸世界略》[주-D004] 이성량(李成樑) : 1526~1615. 조선 출신인 이영(李英)의 4대손으로 중국 명나라에서 장수를 지냈다. 자는 여계(如契), 호는 인성(引城)이며 요령성 철령(鐵嶺) 출신이다. 요동총병(遼東総兵)이 되어 요동 지역의 군권을 장악하고 몽골과 여진에 대한 방위와 교역을 총괄하였다. 그의 아들들도 명나라 장수로 활약했는데, 맏아들인 이여송(李如松)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출병하였다. 이성량은 여진족과 명과의 교역권에 개입하여 여진족 내부 분열을 도모하였는데, 이때 이성량의 후원을 받아 세력 확대에 성공한 것이 바로 청 태조 누르하치(努爾哈赤)다. 《明史 卷238 李成樑列傳》[주-D005] 탑실(塔實) : 타실(他失)이다. ‘塔’과 ‘他’는 중국어 발음상 같기 때문에 넘나들며 쓰인 것으로 보인다. 타실은 청 태조 누르하치의 부친인 애신각라ㆍ탑극세(塔克世, 1543~1583)의 별칭이다.[주-D006] 차자(次子) : 적장자(嫡長子)가 아니라는 뜻으로 쓰였다. 태종은 누르하치의 여덟 째 아들이다.[주-D007] 현휘(玄暉) : ‘현엽(玄燁)’의 오기(誤記)이다.[주-D008] 윤정(胤禎) : ‘윤진(胤禛)’의 오기이다.[주-D009] 을묘년에 죽었고 : 을묘년(1795)은 건륭제가 퇴위한 해이고 기미년(1799)에 건륭제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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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역 조선왕조실록 > 신역 정조실록 > 정조 2년 무술 > 6월 1일 > 최종정보
정조 2년 무술(1778) 6월 1일(기축) 양력 1778-06-24
02-06-01[03] 진주사 채제공 등이 장계를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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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사(陳奏使) 채제공(蔡濟恭) 등이 급히 장계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들 일행이 올해 4월 15일에 북경(北京)에 들어가 당일로 즉시 예부(禮部)에 가서 표문(表文), 자문(咨文), 주문(奏文)을 올렸습니다. 신들이 가지고 간 주문 3본(本)은 여러 의견을 탐문한 다음 올리는 것으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심양(瀋陽)에 도착해서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을 만나 임역(任譯)들을 시켜 사행(使行)을 오게 된 연유를 말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은혜를 감사히 여기고 허물을 자책하는 것은 참으로 체모를 얻은 것이니, 전의 주문을 고쳐서 올리는 것이 비록 일반적인 규례와는 다르지만 외경(畏敬)하는 뜻을 보이는 방법으로 해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랜 관례를 답습했다는 말은 변명처럼 들립니다. 지금 황상께서 날로 엄격한 정령을 내고 있어서 감히 어길 수 없습니다. 황제께 아뢰는 문자에서 종종 말썽이 생기니 십분 신중히 살펴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황성(皇城)에 당도한 다음 신들이 다시 생각해 보니 ‘주문에 삽입된 말이 변명처럼 들린다.’라는 말에 더러 염려되는 마음이 없지 않아서 단지 말미에 지난번 주문이 첨부된 주문과 첨부되지 않은 주문을 받들고 곧바로 예부에 가서 지난번 주문이 첨부된 주문을 바쳤습니다. 신들이 자문을 받는 상(床) 앞에 서서 예부 상서 사용(謝墉)과 대면하여 말을 전하기를 ‘지난번 주문이 이미 정식과 맞지 않아 수고롭게 황제께서 황지(皇旨)를 내렸습니다. 이번의 주문은 격식에 어긋날 염려가 없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사용은 ‘좋습니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즉시 접수하였습니다. 신들은 행각(行閣)에 물러나 앉았고 임역들은 잠시 영외(楹外)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사용은 다시 첨부하여 올린 지난번의 주문을 보고는 제독(提督) 및 여러 낭중(郎中)과 서로 귓속말을 하였습니다. 이어서 임역에게 이르기를 ‘귀국의 지난번 주문은 이미 비준을 받았으니 지금 고쳐 올리는 것은 전례가 없을 뿐 아니라 황제께서 보시는 데 지장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예부에서 받아 황제께 올리는 것도 참으로 온당하지 않거니와 귀국 사행에도 반드시 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들은 다시 임역에게 말을 전하게 하기를 ‘중국 조정의 체식(體式)이 어떤지 몰라 다만 신중하게 하려는 생각으로 똑같은 주문인데 지난번에 올린 주문에서 한 단락을 없앤 것도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하였더니, 사용이 갖고 오게 하고는 여러 번 자세하게 읽은 다음 ‘이것이 참으로 좋습니다.’라고 하고는 처음에 올린 주문은 도로 내주기에 신들은 물러나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16일 오후에 제독 소릉(蘇楞)이 원명원(圓明園)에서 와서 임역들에게 말하기를 ‘주문을 올린 뒤에 군기 대신(軍機大臣)의 말을 들으니 황상께서 주문을 읽고 매우 기뻐하셨으니 필시 온화한 황지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날 황지가 곧 내려왔는데, ‘조선국 국왕이 지난번에 올린 주문에서 격식에 맞지 않는 말이 있었던 것에 대해 스스로 깊이 잘못을 자책하고 감격하여 속정을 아뢰니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을 가상히 여긴다. 짐이 평소 언어와 문자 때문에 사람들을 죄주지는 않았는데 조선국 국왕이 이처럼 사안이 있을 때마다 공경할 줄 아니 더욱 그가 공손한 줄을 알겠다. 장차 황제의 은혜와 사랑을 길이 받게 될 것이니 조선국의 매우 큰 경사와 행복이라 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제독 등이 이를 보고는 ‘이는 실로 황상의 마음에서 우러난 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문에 대한 회답 자문을 우선 베껴 적어 올려보내 주상께서 보실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방물(方物)은 심양으로부터 도착하여 관소(館所)에 부려 놓았고, 23일에야 비로소 표문에 대한 비답이 내려왔습니다. 사은(謝恩) 및 진주(陳奏)를 위한 이번 방물은 모두 내년 정공(正貢)에 이준(移準)해 주기로 하였기에, 예부에서 통지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이달 4일에 수효를 대조하여 창고에 교부했습니다. 황제는 황태후(皇太后)의 상기(喪期)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올여름에는 열하(熱河)로 가지 않고 계속해서 원명원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달 24일에 입궐하였고 27일에 방택단(方澤壇)에서 하지 대사(夏至大祀)를 친히 행하였는데, 예부에서 황제에게 아뢰어 단지 조선의 정사와 부사만 수역(首譯)을 데리고 황제의 행차를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그날 새벽 신들이 방택단 내문(內門) 밖에 가서 길 왼쪽에서 꿇어앉아 맞이하였습니다. 황제가 제사를 마치고 나오다가 신들이 공손히 맞이하는 곳에 이르러 시신(侍臣)에게 묻기를 ‘저들이 조선 사신인가?’ 하자, 맞이하는 행렬 중에 있는 예부 시랑(禮部侍郞)에게 그 시신이 와서 묻고 돌아가 꿇어앉아 아뢰었습니다. 황제는 보교(步轎) 속에서 몸을 돌려 보았고 10여 보를 갈 때까지도 여전히 자세히 보았습니다. 안색이 온화하고 기뻐하며 마치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는데 보교의 움직임이 몹시 빨라 이미 문밖에 나가 곧바로 원명원으로 돌아갔습니다.
신들이 책문(柵門)에 들어간 후 큰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 없었고 가뭄이 봄철부터 혹심하여 각 부(府), 주(州), 현(縣)에서 계속 기우제를 지냈고, 5월 보름에는 황제가 천단(天壇)에서 친히 기도하였는데, 비록 간간이 우레가 치고 비가 내렸지만 먼지를 적시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심양으로 가는 황제의 능행(陵幸)이 7월 20일 출발하는 것으로 정해졌습니다. 그래서 인출(印出)된 노정기(路程記)를 얻어 보고 날짜별로 역참을 계산했더니 8월 14, 5일에 먼저 흥경(興京)의 영릉(永陵)에 가고 19일, 20일 사이에 심양에 당도하여 복릉(福陵 청 태조(太祖)의 능)과 소릉(昭陵 청 태종(太宗)의 능)에 갈 것 같습니다. 흥경은 심양에서 200여 리 거리인데, 심양의 동북에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원전】 45 집 26 면
【분류】 외교-야(野)
[주-D001] 기축 : 저본에는 ‘乙丑’으로 되어 있는데, 《정조실록》 전후 날짜의 간지(干支)에 근거하여 ‘乙’을 ‘己’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1] 황태후(皇太后) : 청(淸)나라 옹정제(雍正帝)의 계비이자 건륭제(乾隆帝)의 생모인 효성헌황후(孝聖憲皇后) 뉴호록씨(鈕祜錄氏)로, 1777년(정조1) 1월에 86세로 훙서(薨逝)하였다. 《淸史稿 卷214 后妃列傳》 《正祖實錄 1年 2月 17日》[주-D002] 흥경(興京)의 영릉(永陵) : 흥경은 청 태조(淸太祖) 누르하치가 1616년 칭제하고 정한 첫 번째 도읍으로 원래의 이름은 혁도아랍(赫圖阿拉)이다. 이곳에 누르하치의 6대조 조조(肇祖), 증조 흥조(興祖), 조 경조(景祖), 부 현조(顯祖) 등의 능이 있었는데 이를 통칭하여 영릉이라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 광해군일기 > 광해군 13년 신유 > 6월 1일 > 최종정보
광해군 13년 신유(1621) 6월 1일(신미)
13-06-01[05] 요양을 핍박하는 서달에 대비하라 이르다
[DCI]ITKC_JT_O0_A13_06A_01A_00050_2005_023_XML DCI복사 URL복사
전교하였다.
“서달(西㺚)이 요양을 핍박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말은 허황된 말이 아닐 것이다. 서달족이 다시 심양(瀋陽)을 함락시킨다면 이 적들이 동쪽으로 나오는 길을 가득 메우게 될 염려도 없지 않으니 창성(昌城)과 의주(義州) 두 곳을 굳게 지키고 강가를 기찰하는 등의 일을 별도로 의논해서 처리하도록 〈비변사에 말하라.〉 ”
【원전】 33 집 378 면
【분류】 외교-야(野) / 군사-전쟁(戰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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