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의 곡부(穀簿)는 154만 섬뿐이었고 호남은 137만 500섬뿐이었다

2022. 10. 28. 16:35대륙조선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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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21 정사(1797) 10 4(기해)

21-10-04[03] 성정각(誠正閣)에서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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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교하기를,

“내일로 정해진 차대(次對)를 오늘로 앞당기고 망궐례(望闕禮)의 습의(習儀)를 행한 뒤에 참석하라.”

하였다.

○ 내가 이르기를,

“표류해 온 선박은 아란타(阿蘭陀 네덜란드) 사람의 선박이라고 한다. 유사 당상(有司堂上)은 이처럼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기이한 내용의 책을 즐겨 보니, 그들의 종족에 대해서도 알 것 같다.”

하니, 유사 당상 이서구(李書九)가 아뢰기를,

효묘조(孝廟朝때에도 일찍이 아란타 사람이 표류해  일이 있었는데, 이러한 내용을 동평위(東平尉) 《공사문견록(公私聞見錄) 중에서 보았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서남쪽 변방 오랑캐의 무리로, 중국의 영향권 안에 속한 지도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명사(明史)》에서는 하란(賀蘭)이라 하였는데, 근래 이른바 대만(臺灣)이라고 한 것이 이 나라입니다.”

하였다.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유사 당상이 아뢴 것을 보면 참으로 박학하다고 할 수 있으니, 참으로 이른바 재상은 모름지기 글을 읽은 사람을 써야 합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박학한 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꼭 모두 실용적인 학문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지난번 연석에서 묘당의 일에 힘쓰게 했던 이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임진년(1592, 선조25) 연간에 평수길(平秀吉) 외손(外孫)으로서 그의 선봉(先鋒)이 되었던 자가 우리나라에 와서 투항하여 우리나라에 계책을 바치고 명(明)나라를 위해 왜적의 정황을 먼저 알려 주었다. 그래서 김씨(金氏) 성(姓)을 하사받고 벼슬이 아경(亞卿)에까지 이르렀으며 문집(文集)도 있었으나, 공교롭게도 그의 성명을 기억하지 못하겠다. 유사 당상은 이를 아는가?”

하니, 이서구가 아뢰기를,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그의 문집을 시험 삼아 구해서 보고, 자손이 있는지도 수소문하라.”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어제 분류안(分留案)을 보니, 영남의 곡부(穀簿)는 154만 섬뿐이었고 호남은 137만 500섬뿐이었다. 이처럼 곡물의 축나는 수량이 해마다 점차 많아지고 있다. 영읍(營邑)의 문서가 요즘처럼 뒤섞여서 혼란스러운 적이 없었으니, 경은 부디 유의하여 샅샅이 정리해서 기어이 바로잡도록 하라. 이 일에 전념하면 기이한 글을 즐겨 보는 버릇도 지나칠 정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니, 어찌 실질적인 공부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내가 예조 판서 이시수(李時秀)에게 이르기를,

《전부고(田賦攷)를 과연 바로잡았는가?”

하니, 이시수가 아뢰기를,

현재 경작한 실총(實摠중에서 여러 가지 탈을 모두 제외한 뒤로 원총(元摠) 상세히 알기가 어려우니, 내년 3월 이후에 더욱더 바로잡겠습니다. 이번에는 우선 종이에 표시를 하겠습니다.”

하였다.

[-D001] 효묘조(孝廟朝) …… 있었는데 :

하멜을 비롯한 네덜란드인 38명이 제주(濟州)에 표류해 온 일을 가리킨다. 이들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켰다가 전라 병영과 순천(順天) 등 5개 읍으로 내려보냈는데, 그중 하멜을 비롯한 8명은 일본(日本)으로 탈출하였다. 《孝宗實錄 4年 8月 6日, 6年 4月 25日》 《顯宗改修實錄 7年 10月 23日, 8年 2月 26日》 《承政院日記 顯宗 7年 10月 24日》

[-D002] 동평위(東平尉) 공사문견록(公私聞見錄) :

동평위는 효종(孝宗)의 5녀 숙정공주(淑靜公主)와 혼인한 정재륜(鄭載崙)을 가리킨다. 《공사문견록》은 정재륜이 효종 때부터 경종(景宗) 때까지 궁궐을 출입하면서 보고 들은 역대의 고사(故事), 가언(嘉言), 선행(善行) 등을 모아 놓은 책이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해제자료 http://e-kyujanggak.snu.ac.kr 검색일:2011. 9. 17.》

[-D003] 지난번 ……  :

정조가 비변사 유사 당상(有司堂上)인 이서구(李書九)에게 비변사의 사무에 힘쓰기를 부탁하고, 비변사의 문서와 장부가 소략하므로 근거할 만한 문서들을 수집하여 책으로 만들도록 한 일을 가리킨다. 이때 정조는 이러한 일이 실질적인 공부라고 하였다. 《承政院日記 正祖 21年 10月 1日》

[-D004] 평수길(平秀吉) 외손(外孫) :

김충선(金忠善)을 가리킨다. 《承政院日記 正祖 21年 10月 7日》

[-D005] 분류안(分留案) :

각 도에서는 원회곡(元會穀) 및 군향전(軍餉錢)과 군향곡(軍餉穀)에 대한 회안(會案)을 4분기로 나누어 마감해서 호조로 올려보냈는데, 이때의 회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호조에서는 이듬해 2월에, 각 도가 동등(冬等)에 보고한 분급(分給)한 수량과 유고(留庫)한 수량을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六典條例 戶典 戶曹 會計司 京外儲積歲計》

[-D006] 전부고(田賦攷) :

호조에서 해마다 3월 15일에 내주기를 청하여 차례대로 수정해서 4월 1일에 다시 들여보내는 책자로, 전결(田結) 총수와 부세(賦稅) 총수의 변동을 기재하였다. 《六典條例 戶典 戶曹 版籍司 土田》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해제자료 http://e-kyujanggak.snu.ac.kr 검색일:2011. 9. 17.》

[-D007] 현재 …… 어려우니 :

정조가 이시수(李時秀)에게 “《전부고(田賦攷)》에 기록된 현재 경작한 실총(實摠) 중에서 올해 재해로 탈급(頉給)해 준 것과 잡탈(雜頉)을 모두 계산해서 제외하였기 때문에 참고하기에 불편하다.”라고 한 말로 보아, 《전부고》에서 원총(元摠)을 계산하기가 어렵다는 말로 이해된다. 《承政院日記 正祖 21年 10月 11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