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3. 21:51ㆍ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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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7년 계묘(1783) 7월 18일(정미) 양력 1783-08-15
07-07-18[02] 대사헌 홍양호가 상소하여 사행에서 본 여섯 가지 중국 문물에 대하여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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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헌 홍양호(洪良浩)가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번에 외람되이 사신(使臣)으로 나가라는 명을 받고 연경(燕京)과 계주(薊州) 사이를 왕래하였습니다. 산천과 성읍은 모두 요(堯) 임금과 우(禹) 임금의 옛 유적지였지만 의복과 문물은 더 이상 옛날의 것이 아니었으니, 이리저리 둘러보고 잠 못 이루며 탄식하였고 옛 성왕(聖王)의 전성기를 보지 못한 것이 더욱 한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땅은 예전 중화(中華)의 것이요 사람은 선왕(先王)의 백성이어서, 전해 오는 풍속에는 여전히 예전 모습을 징험할 만한 것이 있었고, 쓰기에 유리하고 생활에 도움을 주는 도구에도 모두 법도가 있었습니다. 대개 이것은 주관(周官)의 옛 제도가 백대(百代)를 이어 전해져서, 비록 전란(戰亂)의 불길이 자주 이어지고 한족과 오랑캐가 번갈아 침입하였어도 백성과 나라가 중요하게 사용한 기물은 예로부터 바뀌지 않은 것이니, 결국 외국(外國)이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이 이전에 서적을 통해 대략 한두 가지 궁리해 본 것은 있었으나, 귀로 전해 듣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만 못하여서 마침내 제 자신이 그 땅을 밟고 나서야 대체로 확연히 믿게 된 것이 있습니다. 무릇 풍속(風俗)을 관찰하고 방문하는 것이 사신의 임무입니다. 이에 국가의 정책을 수립하는 데 도움이 되고 백성의 쓰임에 가장 절실한 것을 골라 여섯 가지 조목으로 나누어 아래에 나열하겠으니, 주상께서 밝게 살펴 주소서.
첫 번째는 수레에 관한 제도입니다. 옛날에 황제(黃帝)가 처음으로 배와 수레를 만들어 통행하지 못하던 곳을 다니게 하여 그를 헌원(軒轅)이라 호칭한 것에서 만세(萬世)에 끼친 공로 중에 수레를 제작한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예기(禮記)》에 그 나라 임금의 부(富)를 물으면 수레가 몇 대인지로 대답한 것에서 국가에서 사용하는 기물 중에 수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에 백공(百工)의 일마다 각기 하나씩의 관직을 두었는데, 유독 수레에 있어서만큼은 윤인(輪人), 여인(輿人), 거인(車人), 주인(輈人) 등의 관직이 있고, 지름ㆍ둘레ㆍ척(尺)ㆍ촌(寸)의 규격과 길이ㆍ높이ㆍ넓이에 대한 정식이 마치 그림처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충분히 손으로 재고 자귀로 깎아 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옛날 선비가 말하기를 ‘수레에는 천지(天地)의 형상이 있고 사람이 그 안에 있으며 《주역》의 삼재(三才)와 육획(六畫)을 본떴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도 백성이 사용하는 기물 중에 수레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기 때문에 길을 갈 때는 승거(乘車)가 있고, 전투할 때는 융거(戎車)가 있으며, 짐을 실을 때는 대거(大車)가 있고, 농가에는 역거(役車)가 있으며, 밭에 물을 댈 때는 수차(水車)가 있어 온갖 종류로 제작하여 각기 그 용도에 맞게 하였으며, 안으로는 중국과 밖으로는 사방의 주변 지역에서 수레를 사용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이번 사행(使行)에서 본 것으로 말씀 드려 보자면, 연경에서는 바퀴통들이 서로 부딪칠 정도로 수레가 거리를 가득 메웠고, 참으로 천한 종이나 가난한 집 아이만 아니라면 거의 모두 수레를 타고 다녔습니다. 연경에서 요동(遼東)에 이르는 1000여 리 사이에 서로 이어진 수레의 궤적(軌跡)이 마치 하나의 궤적을 찍어 낸 듯하였으며, 수레에 달린 방울 소리가 밤낮없이 끊이지 않고 들렸습니다. 함곡관(函谷關)ㆍ섬서(陝西)ㆍ사천(四川)ㆍ촉도(蜀道)와 같이 험한 곳에도, 강소(江蘇)ㆍ절강(浙江)ㆍ복건(福建)ㆍ광동(廣東)과 같이 먼 곳에도 세력 있는 상인과 큰 장사꾼이 제집 마당 드나들 듯 다녔습니다. 이것은 단지 교통의 요지인 대국(大國)이어서 그런 것만도 아니며 재화가 풍부해서 그런 것만도 아니었으니, 수레를 사용하는 것이 말을 타는 것보다 백배, 천배 이로워서임을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상거(商車)를 가지고 살펴본다면, 수레 한 대를 끄는 것은 대여섯 마리의 노새나 말에 불과한데 거기에 싣는 짐은 수십 필의 힘과 맞먹습니다. 나귀 한 마리가 끄는 경거(輕車)에 세 사람이 한꺼번에 타고, 바퀴 하나에 작은 끌채가 있는 수레는 한 사람이 뒤에서 미니, 여기에서도 일은 반으로 줄고 효과는 곱절이 됨을 볼 수 있습니다. 대개 수레라는 것은 먹이가 필요 없는 말이요, 길을 다니는 집입니다. 백성에게 크게 유용하고 국가 통치에 이로운 기물이라는 면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수레를 사용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늘 말하는 것에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도로가 험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나 말이 드물다는 것입니다. 신이 하나씩 따져 보겠습니다. 대개 천하의 험준한 곳으로는 촉도만 한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적거사마(赤車駟馬)를 타고 성도(成都)를 지나갔고, 제갈량(諸葛亮)의 목우(木牛)와 유마(流馬) 역시 검각(劍閣)의 잔도(棧道)를 통행했습니다. 신이 지나온 곳만으로 말씀드리면, 청석령(靑石嶺)과 마천령(摩天嶺)은 우리나라의 동선령(洞仙嶺)보다 더 험한데도 수레가 다니는 데 지장이 없고 상인들이 서로 마주칠 정도로 빈번했으니, 이 한 가지만 보아도 그 나머지는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로의 험준함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소나 말이 드문 것은 이들 짐승이 번식이 안 되어서가 아니라, 단지 기르는 데 있어서 제대로 된 방법을 터득하지 못하였고, 부리거나 탈 때 그것들의 성질을 따르지 않아서입니다. 탐라(耽羅)에서 나는 말은 본래 대완(大宛)의 품종이라 일컬어지고, 북관(北關)의 말은 기북(冀北)의 준마에 못지않습니다. 섬의 목장이나 사원(沙苑)이 바둑판처럼 포진해 있고 구름처럼 펼쳐 있는데, 어찌 참으로 말이 없겠습니까. 이것은 다만 목자(牧子)가 축내고 감수관(監守官)이 나태해서이니, 이것을 일러 잘못이 기르는 데 있다고 한 것입니다.
소가 번식이 잘되기로는 우리나라만 한 데가 없습니다. 서울과 지방에서 도살(屠殺)되는 소가 하루에 몇천 마리인지도 모를 정도로 많은데, 그런데도 끊임없이 번식하고 있으니 우리나라의 풍토가 소를 기르기에 알맞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주역》에 ‘소는 부리고 말은 탄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소는 짐을 싣기에 알맞고 말은 타기에 알맞다는 것을 말한 것이고, 말에 물건을 싣는 것에 대해서는 말한 적이 없습니다. 《주역》 〈계사전(繫辭傳)〉에 ‘소로 무거운 것을 끌고, 말로 먼 곳에 도달한다.’라고 하였는데, 무거운 것을 끈다는 것은 수레를 끄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등에 무거운 짐을 싣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먼 곳에 도달한다는 것은 사람이 먼 곳에 도달한다는 말이지 물건을 먼 곳에 이르게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은 타고 가기에는 알맞으나 무거운 짐을 끄는 힘은 소만 못하며, 소는 짐을 실을 수는 있으나 멀리까지 가는 힘은 말만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소에 물건을 싣는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소, 말 모두 등에 짐을 싣습니다. 소는 그래도 괜찮지만, 말은 위태롭습니다. 이 때문에 강가로 쌀을 실어 나르는 말은 대부분 반년마다 한 번씩 바꾸며, 성안에 땔감을 운반하는 말은 세 해 겨울을 나게 하면 힘이 다하여 대개 죽지 않으면 절름발이가 되어 푸줏간에 걸리는 신세가 됩니다. 이것이 어찌 말의 죄이겠습니까. 이것을 일러 잘못이 부리거나 타는 데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레를 사용할 수 없다는 두 가지 주장이 모두 궁하게 되었으니, 무엇이 어려워 수레를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이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대개 그것을 실행할 방도를 찾은 적이 없는 것입니다. 어찌 이것뿐이겠습니까. 군자는 일상을 따르는 것을 편안하게 여겨 변통하려는 논의를 하려 들지 않고, 대중은 보고 듣는 것에 익숙해져서 색다른 일을 하기를 기꺼워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국가가 법을 제정하여 금한 적이 없는데도, 결국 한 사람도 색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비록 개중에 유감스럽게 여기는 뜻을 가진 이가 있더라도, 실로 조정의 명령이 아니면 힘이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어 시행하기에 불편한 점이 있게 됩니다.
신이 전에 벼슬살이를 하며 여러 곳을 다닐 적에 우리나라에서도 수레를 사용하는 곳이 많음을 보았습니다. 영남의 안동(安東)과 의성(義城), 해서(海西)의 장연(長淵)과 신천(信川), 관북(關北)의 함흥(咸興) 이남 육진(六鎭)에 속한 여러 고을에서 모두 한두 마리의 소가 끄는 수레를 써서 곡식이나 땔감을 운반하여 수백 리를 왕래하였는데, 수레를 만든 모양이 조악하고 투박하여 멀리 갈 수 없었던 것은 오로지 제대로 된 제작 방법을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일 뿐이니, 여기에서도 수레가 운행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 수레를 운행하고자 한다면, 중국에서 제작 방법을 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여러 군문(軍門), 양서(兩西)의 감영과 병영, 의주(義州) 등에서 거공(車工)을 연경으로 가는 사신 편에 딸려 보내 각종 수레의 제도를 본떠 오게 한 다음, 각각 몇 대씩을 제작하여 먼저 사용하게 하여 각기 편리함을 알게 된다면, 여러 고을에서도 따라 할 것이고 다른 도(道)에서도 따라 할 것이며 부호(富戶)도 그것을 따라 하여 몇 년 못 가서 온 나라에 두루 전파될 것이니, 그 보급에 따른 이익은 말로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그중 큰 이익을 말해 보자면, 하나는 상인들이 수송하여 온갖 물건이 유통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세(賦稅)를 바치는 데 품삯을 절약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말의 힘이 지치지 않게 되어 기마(騎馬)가 넉넉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융거가 구비되어 군사력이 자연히 강해질 것이고, 전거(傳車)가 만들어져 역마(驛馬)가 조금 한가해질 것이고, 수차가 보급되어 전야(田野)가 대대적으로 개간될 것입니다.
또 사행으로 말해 보면, 사신 3명에 딸린 역마와 쇄마(刷馬)가 수백 필에 이를 정도로 많고, 책문(柵門) 안에 도착하게 되면 세폐(歲幣)와 건량(乾糧)을 나르기 위해 번번이 수레를 빌려 운송하게 되는데 그 비용으로 은(銀) 수천이 듭니다. 이것이 모두 해마다 줄줄 새 나가는 비용입니다. 어찌 우리 수레에 우리가 실어서 갈 만하면 가고 설 만하면 서는 것만 하겠습니까. 품삯의 낭비를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또 지체됨에 따른 폐단을 없앨 수 있으니, 이해(利害)가 어찌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실로 만부(灣府 의주)에서 사행에 필요한 마필을 대략 계산하여 몇 대의 경거를 제작함으로써 운송과 왕래에 대비한다면, 확보해야 할 말이 3분의 1 내지 5분의 1로 줄게 될 것이고, 중국에서 들던 품삯도 이로 인해 자연히 줄게 될 것입니다. 1년간 수레 제작에 드는 비용을 계산해 보면, 몇 년간 말을 빌리는 데 들이는 비용 정도에 불과하지만, 끝없이 들어가는 비용을 영구히 없애게 될 것입니다.
《주역》 〈건괘(乾卦)〉에 이르기를 ‘이로움을 말하지 않으니, 크도다.’라고 하였으니, 왕정(王政)은 굳이 이로움을 말하지 않으나 비용을 절약하는 것이 백성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참으로 백성에게 편리하다면 국가가 그 복을 받을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말하지 않은 큰 이로움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수레에 대한 제도를 시행한다면 국가는 부유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아도 저절로 부유해지며, 백성은 풍족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아도 저절로 풍족해질 것이며, 군대는 강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아도 저절로 강해질 것입니다. 어찌 조금 보탬이 될 정도이겠습니까. 다만 도로를 정비하는 일에 약간의 비용을 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험한 지형의 고개나 교량은 관(官)에서 정비하고, 도로나 농지는 백성에게 정비하게 한다면, 한번 호령하는 데 달린 일에 불과합니다. 《시경》 〈천작(天作)〉에 이르기를 ‘저 험한 기산(岐山)에 평탄한 길을 내도다.’라고 하였고, 또 〈대동(大東)〉에 이르기를 ‘주나라의 길이 숫돌과 같이 편평하고, 화살과 같이 곧도다.’라고 하였으니, 도로를 정비하는 일 또한 왕정이 급선무로 여겨야 하는 일이지 단지 수레를 다니게 하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둘째는, 벽돌에 대한 제도입니다. 대개 벽돌이 언제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경전에 보이지 않으나, 도기(陶器)는 우제(虞帝) 때 비롯되었고, 기와집은 하후(夏后)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흙을 굽는 방법은 기와나 벽돌이 같습니다. 벽돌[甓]로 성(城)을 쌓는 것 또한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성이라는 글자가 ‘흙[土]’이라는 글자와 ‘이루어지다[成]’라는 글자로 만들어졌으니, 이는 흙을 쌓아서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벽돌이라는 글자는 ‘벽(壁)’이라는 글자와 ‘기와[瓦]’라는 글자로 이루어졌으니, 이는 기와로 벽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성이란 큰 담장입니다. 《주역》에 이르기를 ‘성이 다시 황(隍)이 되었다.’라고 하였으니, 성이 무너져 도로 흙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수도(首都)에서 흙일을 하고 조(漕)에서 성을 쌓네.’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도 성은 흙으로 쌓는 것이지 돌로 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른바 흙으로 쌓았다는 것은 부슬부슬 흩어지는 흙으로 굳건한 담을 만들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도성(都城)이 100치(雉)이다.’라는 말이 《춘추(春秋)》에 보이는데, 성가퀴 모양은 흙을 구운 것이 아니면 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것으로 볼 때, 벽돌로 성을 만든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사서(史書)에 ‘하왕(夏王) 발발(勃勃)이 흙을 쪄서 성을 만들었는데 견고하여 함락시킬 수 없었다.’라고 하였으니, 흙을 쪘다는 것은 벽돌을 구웠다는 것을 말합니다. 진(秦)나라가 장성(長城)을 만드는 데 벽돌을 사용하였다고 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으나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였는데, 신이 이번 사행에서 옛 장성의 산 정상을 이어 두른 것이 모두 벽돌임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의무려산(醫巫閭山)의 돌이 이루 다 쓸 수 없을 정도로 많았는데도 반드시 벽돌을 써서 성을 쌓은 것은 참으로 벽돌이 돌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돌은 견고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지나치게 견고하기 때문에 깎을 수는 있으나 갈 수는 없어서, 많은 양의 돌을 똑같은 크기로 만들 수 없고 여러 길[仞]을 쌓을 때 이음새를 다 맞출 수 없습니다. 비바람에 충격을 받거나 총탄에 맞아서 돌 하나라도 혹시 빠지게 되면 성가퀴 전체가 모두 흔들리게 되니, 어찌 흙을 구워 벽돌을 만들되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길이와 넓이가 균등하고 네모반듯하여 천 층 만 겹을 착착 맞물리게 하는 것만 하겠습니까. 이와 같기 때문에 안으로는 궁성과 도성, 밖으로는 주ㆍ부ㆍ군ㆍ현, 작게는 봉수대(熢燧臺)ㆍ초루(譙樓)ㆍ홍예문(虹霓門)ㆍ비석(碑石)의 지붕을 모두 벽돌로 쌓았던 것입니다.
제작 방법은 하나는 세로로 하고 하나는 가로로 쌓아서 길고 짧은 것을 교차시키며,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두께를 똑같이 하여 개의 이빨이 서로 맞물리듯이 생선 비늘이 서로 이어지듯이 만듭니다. 그리고 두 벽돌이 만나는 틈을 질척한 회(灰)로 메워 견고하게 붙여 감쪽같이 돌처럼 만들면, 반듯하기로는 도끼로 자른 듯하고 매끄럽기로는 숫돌로 간 듯하여, 아무리 민첩한 원숭이라 하더라도 붙잡고 오를 수 없을 정도이니, 그 견고하고 정밀함은 돌을 포개 쌓은 것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중국처럼 부유한 나라에서도 성을 쌓는 방법이 대체로 이와 같았으니, 옛사람이 강구한 뜻이 어찌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벽돌의 쓰임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궁실을 짓는 데도, 곳집을 짓는 데도 이것을 쓰고, 담장이나 계정(階庭)을 만들 때도 이것을 쓰는데, 화전(花甎)이나 문양 있는 벽돌을 이리저리 배치하여 온갖 기교를 부려도 사람의 공력이 들지 않기 때문에 큰 집을 짓는 데 드는 재목(材木)은 대들보, 서까래, 창틀, 들창 정도에 불과합니다. 쓰는 재목이 적어지니 쇠나 못도 그에 따라 적게 들어 비용이 매우 절약되며 제작은 극히 완비됩니다. 밖에서는 도둑이 들 염려가 없고 옆으로는 불길이 번질 근심이 없으니, 관사(官舍)와 민가(民家)에서도 전적으로 벽돌에 의지하게 됩니다. 이러하니 벽돌이라는 기물(器物)이 어찌 중대하지 않겠습니까. 폭넓은 이익을 준다는 점에서는 바로 수레와 같습니다.
전에 생각해 보니, 수레는 목(木)을 바탕으로 하나 금(金)에서 기물이 완성되며, 벽돌은 토(土)를 바탕으로 하나 화(火)에서 기물이 완성되니, 이것이 바로 천지가 생성해 준 물질이 백성의 큰 쓰임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서(虞書)〉에 이르기를 ‘수(水), 화, 금, 목, 토, 곡(穀)을 잘 다스린다.’라고 하였고, 《춘추좌씨전》에서는 ‘하늘이 다섯 가지 물질을 내고, 백성이 모두 그것을 활용한다.’라고 하였으니, 만들어 내는 것은 하늘이고, 활용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옛날에 성인이 상(象)을 관찰하여 기물을 제작하고, 각종 기물을 구비하여 그 쓰임을 다하게 하였다는 것은 모두 천지의 합당한 도에 맞도록 조절하여 보완한 것입니다.
대체로 수레라는 것은 형태는 원형(圓形)이며 동적인 것으로 효용을 삼고, 벽돌이라는 것은 형태는 방형(方形)이며 정적인 것으로 이로움을 삼습니다. 방형과 원형,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에는 음(陰)과 양(陽)이 갖춰져 있습니다. 하나는 음이고 하나는 양이어서 온갖 변화가 거기서 생겨납니다. 이것은 대개 천지의 조화가 기물(器物)에 깃들어 있어서 자연히 만세토록 백성에게 이로움이 되는 것이니, 실로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벽돌의 이로움은 비록 수레와 맞먹지만 거기에 들이는 비용은 매우 적어서, 임자 없는 흙에서 재료를 취하고 끝없이 나는 땔나무를 때서 만들어집니다. 이는 참으로 백성들의 무진장한 자원이요 천하의 공공물(公共物)인데 오직 우리나라만 그것을 쓰지 못하니, 이 어찌 흙이 없어서이겠으며 땔나무가 없어서이겠습니까. 다만 사람이 쓰지 않아서일 뿐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이번 사행에서 벽돌을 굽는 가마를 직접 보았는데, 대략 우리나라의 기와 굽는 가마와 같았고, 굽는 데 쓰는 흙 또한 기와의 경우처럼 곳곳에 산재해 있어 애초에 구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찍어 내고 굽는 방법은 별반 특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불을 때는 방식은 태우는 식이 아니라 찌는 식이기 때문에 가마 한 곳에 드는 땔나무는 마른 수숫단 수십 짐[擔]을 넘지 않아도 충분하니, 그 비용이 매우 적게 든다고 할 만하였습니다. 사서(史書)에서 말한 흙을 찐다는 것은 참으로 실제에 맞는 말이니, 옛날 사람이 대충 묘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대개 이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벽돌을 사용하는 용이함은 수레를 사용하는 것에 더더욱 비할 바가 아닙니다. 신은 청컨대, 또한 군문으로 하여금 연경으로 가는 사행 편에 사람을 보내 제작 방법을 알아 오게 하고, 그 방법대로 쪄서 만들어 먼저 궁성부터 시작해서 부서진 곳이 있을 때마다 개축하게 하소서. 이어서 여러 도에 제작 방법을 전파하여 모든 요충지나 주군(州郡)에 성(城)이 있어 보수해야 하거나 성이 없어서 새로 축성해야 할 곳에 모두 벽돌을 쓰게 하되, 축성하는 방법은 다 중국의 제도를 따라 하게 한다면, 나라를 굳건하게 하고 방어를 견고하게 하는 방도에 있어 어찌 효력이 크지 않겠습니까. 공사(公私)의 가옥(家屋)에 쓰인다거나 백성의 일상에 쓰이는 물자가 되는 것은 그 다음 일입니다.
셋째는 나귀와 양(羊)을 기르는 문제입니다. 지상(地上)의 쓰임에서 소나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에 미미한 짐승으로 건곤(乾坤)의 상(象)에 응하게 하였으니, 성인이 이처럼 그것을 중히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소나 말의 번식은 정해진 한도가 있고 백성의 수요는 무궁하기 때문에 반드시 계속 대 주어야 비로소 동나지 않게 마련입니다. 무엇으로 대 주어야겠습니까. 나귀와 양이 바로 그것입니다. 대개 나귀와 양이란 소나 말과 같은 부류이면서 종자가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희생을 바치는 제향에는 유모(柔毛)가 대무(大武)의 다음이 되고, 네 마리 말이 달리는 게 시원치 않으면 간혹 위(衛)로 열등한 말을 대체했으니, 이 또한 기르는 짐승 중 좋은 것입니다.
옛날 예법에서는 나라의 군주가 이유 없이 소를 잡지 않았는데 우리나라의 풍습은 도살에 제한이 없으니, 이는 손님 접대나 제사에 대신 올릴 짐승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소는 본래 번식을 잘하여 아주 부족하지는 않으나, 농가에서 경작할 때 사용하는 일소는 매번 부족한 근심이 있습니다. 지금 만약 양을 많이 길러 제수(祭需)에 대신 쓴다면, 소를 지나치게 소비하지 않게 되어 농사짓는 데 여유가 생길 것입니다.
더구나 양이란 동물은 잘 자라는 것으로 가장 알려져 있으며, 육축(六畜)에 포함되고 사방에 두루 퍼져 있으며, 가죽ㆍ털ㆍ내장ㆍ뿔 모두 쓸모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국경을 나가기 전에 이미 아뢰어 이번 사행에서 약간 사 왔습니다만, 매년 역서(曆書)를 받으러 가거나 공물을 바치러 가는 편에 변문(邊門)의 저잣거리에서 그때마다 흥정하여 사 오게 하여 점차 번식시킨다면, 수많은 소의 생명을 구할 수 있고 삼농(三農)의 이로움을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나귀란 동물은 말만큼 건장하지는 못하지만 성품이 유순하여 부리기가 쉽고 값이 싸서 구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중국인들은 집집마다 그것을 길러서 수레를 끌게도 하고 물건을 나르게도 하며 쟁기를 끌게도 하고 더러는 곡식을 갈거나 물을 운반하게도 하여 마치 어린 종처럼 마음대로 부리니, 사람의 노동력을 대신하고 말의 힘을 덜어 주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노새로 말할 것 같으면, 나귀에서 나왔으나 나귀보다 건장하니, 참으로 참새에서 매가 나오고 추(貙)에서 이리가 나온 경우와 같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멀리까지 가고 소와 말의 장점을 겸하였기 때문에 명나라 황제가 촉(蜀)에 행행(行幸)할 때는 항상 청노새를 타고 질주하였고, 송나라의 요평중(姚平仲)은 흰 노새를 타고 하루에 800리를 달렸으니, 참으로 발굽 달린 짐승 중의 신기한 품종입니다. 더구나 잘 자라는 성질을 가져서 태어난 지 반년이면 타고 달릴 수 있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말보다 더 사랑합니다.
우리나라의 나귀와 노새는 비록 북방에서 온 것이 있기는 하나 제대로 새끼를 낳아 번식한 적이 없고 기력이 다해 폐사하였으니, 이것은 목축을 등한시한 데서 생긴 잘못입니다. 참으로 연경의 시장에서 많이 사다가 여러 목장에 그것들을 방목하고 그 종자를 얻어 국가의 쓰임에 대비한다면, 부리고 타는 데 여유가 생기고 융마(戎馬)를 자급자족하게 될 것입니다. 또 만약 수레 제도가 시행되어 이것들로 수레를 끌게 하거나 짐을 싣게 한다면 소나 말의 반을 감당할 수 있어서 상업이 유통되고 백성이 그 이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대체로 목축하는 일이란 비용은 적게 들고 이익은 장구한 것이니, 노새나 양을 치는 것은 바로 소나 말을 기르는 셈입니다. 소나 말이 번성하면 백성이 부유해지고 군대가 강해질 것입니다.
네 번째는 동기(銅器)를 금하는 문제입니다. 신이 듣건대, 천지가 사물을 낼 때 각기 고유한 성질을 주었고 성인이 재물을 다스리고 조절할 때 각기 그 구실에 적합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서로 침범하면 양쪽 다 병들고 한쪽으로 편중되면 결함이 생기게 마련이니, 이것은 바뀔 수 없는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나무를 깎아 집을 만들고 흙을 굳혀 그릇을 만든 것은 그 성질을 따른 것이고, 솥이나 시루로 밥을 짓고 쇠붙이로 밭을 가는 것은 그 구실에 합당한 것입니다.
그릇을 사용하는 것 또한 그렇습니다. 상고시대에는 질그릇이나 바가지만 사용하였는데, 그 후 질박하던 것이 꾸미는 쪽으로 변하고 검소하던 것이 화려한 쪽으로 치달리게 되어 비로소 보궤(簠簋), 조두(俎豆), 호련(瑚璉)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보궤는 대나무로 만든 것이고, 조두는 나무로 만든 것이며, 호련은 옥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릇을 금(金)이나 은(銀), 동(銅), 주석(朱錫)으로 만들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글자를 만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증(甑)이나 언(甗)은 음식을 끓이는 그릇이고, 병(甁)이나 앵(甖)은 물을 담는 그릇인데 모두 ‘기와 와(瓦)’에서 나온 글자입니다. 상(觴), 굉(觥), 치(觶)는 술을 담는 그릇인데 ‘뿔 각(角)’에서 나온 글자입니다. 배(杯), 권(棬), 완(椀)은 국을 담는 그릇인데 ‘나무 목(木)’에서 나온 글자입니다. 이것들을 보면 나머지 부분도 다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악기(樂器)는 소리를 중시하고 이정(彝鼎)은 공적을 새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부(釜)나 당(鐺) 따위는 금에서 나왔으나 대부분 철(鐵)을 사용하였습니다. 후세에 사치스러워져서 더러 금이나 은으로 만든 기물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동을 사용한 적은 없었으니, 중국의 풍속이 지금까지 이와 같습니다.
신이 이번 사행에서 마을의 점포나 시장의 가게를 관찰해 보니, 기물은 모두 자기(磁器)를 사용하였고, 동이나 주석으로 만든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황제의 연회 상에 놓인 옥가(玉斝)나 금뢰(金罍)가 휘황찬란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떡이나 과일, 고깃국을 담은 그릇은 단지 자기이거나 아연(亞鉛)으로 만든 그릇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는 동으로 돈을 주조했기 때문입니다.
돈이란 온갖 물화의 근원이요, 백성의 생명줄입니다. 한번 잘못되면 백성과 나라가 그 고통을 받기 때문에, 천하의 동을 거두어 모두 다 사농(司農)이나 수형(水衡)에게 보내서 끊임없이 돈을 주조하게 한 뒤라야 온갖 보화(寶貨)를 취할 권한을 휘두르고 온 세상의 이로움을 다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것을 금이나 은보다 더 아까워하고, 주옥(珠玉)보다 더 보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주옥이나 금, 은은 수레의 말이나 장신구의 장식에 쓰이기도 하였으나, 동은 한 치도 다른 데 쓸 수 없었습니다. 새로 반포한 《사고전서(四庫全書)》 취진판(聚珍板)의 서문을 한 번 살펴보자면, 활자를 녹여서 보원국(寶源局)에 맡겼다 하였으니, 그 계책이 어찌 장구하지 않겠으며 그 법이 어찌 엄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생물의 성질을 따르되 각각 그 구실에 맞게 한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주례》에 나오는 천부(泉府)의 유제(遺制)인 듯한데, 돈을 만든 이후로 중국에서는 대대로 이 방식을 고수하고 오랜 세월 동안 바꾸지 않았습니다.
생각건대, 우리나라에서는 유석(鍮錫)을 대단치 않게 여겨 그것으로 기물을 만드는 데 법도가 없어, 술ㆍ밥ㆍ국ㆍ반찬을 담는 데 사용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크게는 원형 소반ㆍ사각 소반ㆍ화로ㆍ솥으로 만들거나, 천하게는 손을 씻거나 똥오줌을 받는 기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용하여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설사 우리나라에 동이 나는 혈(穴)이 있어 끊임없이 생산해 낼 수 있더라도 재물을 쓰는 도리상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더구나 본래 본토에서는 생산이 되지 않아 멀리 일본(日本)에서 사들여야 하는 상황이어서 왜인들이 거짓으로 속여 번번이 비싼 값에 파니, 그 원인을 따져 보면 귀하고 구하기 어려워서라고 이를 만한데도 우리나라의 풍속은 도리어 중대함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정에서 매번 돈을 주조하는 때면 어마어마한 재화를 내서 구하기 어려운 해외의 재화와 바꾸어 오나, 주조가 끝나고 나면 주조하여 얻은 것이 쓰는 양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따라서 담당 부서를 설치하여 돈을 주조하는 일을 가장 어렵고 신중하게 여겨 십 년에 한 번 주조하는 데 불과하니, 돈이 어찌 마르지 않겠으며 백성이 어찌 빈곤하지 않겠으며 국고의 재물이 어찌 다 없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중국은 부유하여 천지의 산물이 다 있고 산과 바다에서 나는 것을 포괄하며, 배와 수레가 사방에 도달하여 없는 것이 없는데도, 이와 같이 물자를 반드시 신중하게 사용하고 재물을 절도 있게 관리합니다. 양주(楊州)에서 생산되는 삼품(三品), 오(吳)와 촉의 동산(銅山)에서 나는 동이 샘솟듯이 나서 쏟아져 들어오는데도 그것을 또 이와 같이 아꼈으니, 이 어찌 백성의 생명과 국가의 이권(利權)이라는 면에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유독 중국만 그렇겠습니까. 왜(倭)도 그렇습니다. 그 나라는 동이 천하에서 제일 많이 나는데도 그것으로 기물을 만든 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모래를 굽고 나무에 칠을 하여 그릇을 만들었는데, 정교하게 제작하기로는 금이나 은으로 만든 것에 못지않습니다. 비용은 필시 유동(鍮銅)으로 만드는 것보다 더 들었을 텐데도 이 방식을 고수하고 바꾸지 않았으니, 이 또한 재물을 운용하는 방도를 잘 터득한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에도 나름 이유가 있습니다. 대개 국초에는 돈을 사용한 적이 없고 단지 은이나 포(布)를 화폐로 삼았습니다. 그 때문에 공시(貢市)에 나온 왜동(倭銅)을 쓸 곳이 없었으므로 그것으로 집기(什器)를 만들었고, 그로 인하여 습속이 된 것입니다. 돈이 통용된 뒤에는, 국정을 담당하여 일을 주관하던 사람들이 옛날 제도를 깊이 연구하지 못하여 그대로 답습하여 변통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오늘날 돈으로 인한 폐해가 나날이 더해져 백성과 나라가 함께 곤궁해졌으니 어찌 변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나라 안의 유동으로 만든 기물은 제기(祭器)와 악기를 제외하고는 일체 사용하지 못하게 금하고, 기한을 정하여 관(官)에 실어 오게 하여 값을 계산하여 돌려준다면, 백성이 소요하는 폐해가 없을 것이고 국가는 영구적인 이익이 생길 것이며 대신 사용할 기물에 물건이 없을까 근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온 나라를 통틀어 유동으로 만든 기물이 억만 근(斤)이나 있지만 보상하는 값은 필시 멀리 왜의 시장에서 사오는 비용에 미치지 못할 것이니, 나머지를 탁지(度支 호조)에 보관하였다가 그것으로 돈을 주조하면 국가의 쓰임이 넉넉해지고 동의 가치 또한 자연히 헐해질 것입니다.
또 중국의 법을 보면, 동뿐만 아니라 철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 농기구 외에는 아무리 궁실을 짓는다 하더라도 오로지 흙과 나무를 쓰고 철의 사용을 최소화하였으니, 철은 병기(兵器)의 재료이기 때문입니다. 난간이나 청사의 벽을 모두 기와나 벽돌로 하고, 소반ㆍ합ㆍ궤짝ㆍ상자를 대부분 종이나 가죽으로 만들어 나무 사용을 최소화하였으니, 나무는 배나 수레의 재료이기 때문입니다. 붓대나 담뱃대 또한 갈대나 등(藤)나무를 쓰고 대나무를 쓰지 않았으니, 대나무는 화살대나 쇠뇌의 재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모두 중국이 재화를 관리하는 방법이고 예로부터 지금까지 전해 오는 비결이며, 백성이 날마다 쓰면서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니 국가가 어찌 부유해지지 않을 수 있겠으며, 백성이 어찌 풍요롭지 않을 수 있겠으며, 군대가 어찌 강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옷감을 짜거나 곡식을 가는 기구, 붓ㆍ먹ㆍ아교ㆍ칠과 같은 따위도 백성이 날마다 사용하는 것으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인데, 간편하고 정교한 것이 모두 자연의 솜씨이고 바꿀 수 없는 법도가 있었습니다. 《주례》에 ‘지혜로운 자는 사물을 만들어 내고 솜씨 좋은 자는 그것을 계승한다. 백공의 일을 모두 성인이 만드셨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국이란 곳은 성인이 살던 옛 거처이니, 신묘하게 제작하는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신이 동을 금지하는 이로움에 대하여 유사한 부류로 유추하여 내심 깨달은 것이 있어 여기에 함께 말씀드렸으니, 이것은 국가를 위해 계획하는 자라면 모두 알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다섯째는 모자(帽子)를 없애는 일입니다. 대개 이웃나라와 교린(交隣)하고 상호 교역하는 법은 각기 자기 나라에 있는 것을 가지고 없는 것과 바꾸는 것으로, 양쪽 모두에게 이익이 되고 모두에게 편리하여 오래되어도 폐단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송(宋)나라가 하(夏)나라와 상호 교역할 때 차(茶)를 가지고 말[馬]로 바꾸었는데, 이원호(李元昊)가 아직 어렸는데도 그의 부친에게 허락하지 말도록 간하니, 당시의 지식인들이 그가 훗날의 근심이 될까 우려하였습니다. 여기에서도 상호 교역은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서북(西北) 지방에서 이루어지는 개시(開市)는 공물을 바치는 것과 같으니 수량의 많고 적음을 따져서는 안 됩니다마는, 사행 때 상역(商譯)이 재화를 교역할 때는 한결같이 흥정하여 교역하는 방식을 따르므로 그 득실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가진 재화로는 오로지 은을 좋은 물건으로 삼습니다. 전에는 왜은(倭銀)이 통용되어 이것을 가지고 연경에 들어갔는데, 가져갔다가 가져오는 것이 마치 고리를 따라 돌 듯하였기 때문에 비록 물화의 가격이 달라지고 판매하는 수량이 들쑥날쑥하더라도 본국에는 자연히 손해날 것이 없었습니다. 근래에는 왜은의 유통로가 끊겨 대신 광은(礦銀)을 보내는데, 이것은 한번 압록강(鴨綠江)을 건너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연못에 금을 던져 버리는 것과 거의 같으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온 나라 안의 은화(銀貨)가 나날이 줄고 있습니다.
신의 이번 사행으로 말해 보자면, 역원(譯員)이 가져가는 포은(包銀)의 태반이 채워지지 않았으니, 가져올 물화가 고갈될 것이라는 점을 미루어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을 위한 계책으로는 곧 북인(北人)의 은을 조금 절약하여 해마다 필요한 자금으로 비축하는 것입니다만, 여행 경비 등의 공적 비용은 줄일 수 없고 역원의 정원(定員)도 없애서는 안 되는 상황입니다. 차라리 교역하는 물자를 실제 필요한 물품으로 바꾸어 온다면 그나마 상호 교역이라는 본래의 취지를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모자라는 물건을 구입하는 비용은 가장 쓸모없는 데 쓰는 비용입니다. 국가의 재정을 줄줄 새 나가게 하는 것에 이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시급하게 그 새는 구멍을 막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대개 모자는 경전과 사서에서 언급된 적이 없고 천하에서 사용한 적도 없는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그것을 사용합니다. 남자의 경우는 관(冠) 위에 관을 쓴 것이니 이미 예(禮)의 의미를 잃은 것이고, 부인의 경우는 비녀도 아니고 수건도 아니어서 실로 아무런 근거가 없으니 추위를 막는 물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지 추위를 막기 위해서라면 어찌 다른 물건이 없겠으며, 어찌 하필 멀리 다른 나라에서 구한단 말입니까. 중국에서는 이것을 쓰지 않기 때문에 요동 상인의 한 가게에서 털을 모아 제작하여 오로지 우리나라에만 팔아 앉아서 큰 이익을 거두고 있으니, 어찌 중국인의 조롱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한 해 모자 값으로 번번이 거금을 쓰고 있습니다. 비할 데 없이 귀중한 유통 재화를 가지고 쓸모없는 모직물과 바꾸어 겨우 한 해 가을과 겨울을 나면 못 쓰고 땅에 던져 버립니다. 금년에도 이와 같고 내년에도 이와 같다면, 산천의 자원(資源)은 한계가 있고 천하의 털은 한없이 많은데, 장차 무엇으로 그 값을 댈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속히 모자 수입을 중지하고 이어서 온 나라에 모자 금지령을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연경에 들여가는 포은으로는 모자 대신 노새나 말, 포나 비단과 같은 유용한 물건을 사 오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생활에 도움이 되고 민생에 보탬이 될 것이니, 짧은 시일로 따져 보면 충분치 않으나 한 해 전체를 놓고 보면 남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모자에 부과하는 세(稅)를 공용(公用)에 충당해 온 것으로 말하면 약간 변통하는 일이 있을 것인데, 이는 묘당(廟堂)에서 상의하여 구획(區劃)해 가는 데 달려 있습니다.
여섯 번째는 중국어를 익히는 일입니다. 대체로 한인(漢人)의 언어가 곧 중국의 정음(正音)입니다. 진대(晉代) 이후부터 오호(五胡)가 교란하여 방언(方言)이 자주 변하였고 글자 음(音) 또한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유사함에 의지하여 진짜 음을 찾을 만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음은 중국의 음에 가장 가까웠으나,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이후로 알아들을 방도가 없게 되어 매번 중국어를 익히는 어려움에 대해 근심해 왔습니다.
우리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는 하늘이 준 예지(睿智)를 지녀 홀로 천부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고, 중국인에게 그것을 질정하여 더없이 정교하게 만드셨습니다. 무릇 사방천지에서 쓰는 언어와 온갖 구멍에서 나오는 소리들을 모두 붓끝에서 형용할 수 있어, 비록 길거리의 어린아이나 마을의 부녀자라 하더라도 그것을 깨칠 수 있게 되었으니, 만물의 도리를 깨달아 천하의 일을 성취하는 공로를 이룩하였다는 점에서 이전의 성인이 하지 못한 일을 한 것이며 천지의 조화에 참여한 것이라 이를 만합니다. 이것으로 한음(漢音)을 번역해 내면 마치 칼날이 닿으면 올이 갈라지듯 분명하여, 이것으로 글자의 운(韻)을 맞추고, 이것으로 소리의 율(律)을 맞춥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사대부 대다수가 중국어에 능통하여 사신을 나가거나 조칙(詔勅)을 맞이할 때 역관(譯官)의 입을 빌리지 않고도 대화가 메아리처럼 원활했습니다. 임진년(1592, 선조25)과 계사년(1593)에 구원을 청하거나 변무(辨誣)하는 일과 같은 국가의 중대사도 그 덕택에 많이 힘입었으니, 중국어를 익히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근래에 와서 한학(漢學)을 익히는 것이 형식적으로 변하여 구두(句讀)에 능통한 자가 매우 드뭅니다. 그 때문에 사신이 저들과 상대할 때 귀가 먹은 듯하고 입이 붙은 듯하여 짤막한 단어나 문장도 전적으로 역관에게 의지합니다. 역관이란 자도 겨우 길거리에서 주고받는 대화 정도를 이해할 뿐이니, 장차 어떻게 감정과 뜻을 소통하며 시비를 따져 변론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다행히 양국 간의 사이가 좋아 사행에 지장이 없으나, 만일 주청(奏請)하거나 진변(陳辯)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면 아마도 해결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이는 작은 근심이 아닙니다.
몽학(蒙學) 한 과목에 대해서도 단지 허울뿐인 명목만 있지 전혀 강습하지 않고 있습니다. 몽고(蒙古)가 우리와 지금은 비록 서로 통신(通信)하지 않고 있지만, 강역(疆域)이 매우 근접하고 병마(兵馬)가 가장 사나우니 훗날의 일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어찌 소홀하게 여겨 살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생각하기에, 사역원(司譯院)을 감독하고 신칙하여 여러 어학(語學)의 과정을 엄격하게 하고 격려하고 권면하는 방법을 강구하게 하며 상벌(賞罰)을 뒤따르게 하여 기필코 어학에 능통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학으로 선발된 조정의 선비에게도 규정을 분명히 천명하여 전적으로 어학을 익히는 데 뜻을 두게 함으로써 사신으로서 독대(獨對)할 수 있는 인재를 길러 내게 해야 합니다.
아, 천하가 평정된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불행히 국가에 일이 많이 생겨 사신을 태운 수레가 서로 교차하게 된다면 나라의 위신이 사신이 응대하는 말에 의존하게 됩니다. 만약 이처럼 한가한 때에 미리 대비해 놓지 못한다면 장차 어떻게 졸지에 생긴 일에 대처하겠습니까. 전하는 말에 ‘의원이 약재를 비축해 놓지 않으면 위급한 병을 치료할 수 없고, 농부가 종자에 물을 대어 주지 않으면 알곡을 먹을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어떤 물건이든 평소에 갖추어 놓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또 ‘장마 때는 수레를 장만하고, 가물 때는 배를 장만한다.’라고 하였으니, 무슨 일이든 미리 준비해 두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국가를 통치하는 방법 역시 이와 같습니다.
이번에 신이 아뢴 것은 모두 실생활에 절실하고 알기 쉬운 일이지 애당초 현실과 동떨어져 실행하기 어려운 법이 아닙니다. 수레에 대한 제도는 전에 고(故) 상신(相臣) 김육(金堉)이 사신이 교거(轎車)를 타는 폐단에 대해 아뢰고 안거(安車)를 타게 함으로써 역마의 힘을 넉넉하게 하도록 청하였으며, 벽돌에 대한 제도는 고 상신 이항복(李恒福)이 성곽(城郭)의 제도를 무척 칭찬하고 또 구워 만드는 방법의 편이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 모두 그의 문집에 실려 있어서, 선배의 식견 있는 의론에 대해 대략 알 수 있습니다. 나머지 한두 가지 변통해야 하는 일 또한 인정(人情)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백성과 국가를 위한 장구한 계책입니다. 부디 성상께서는 신이 성가시게 하고 외람되게 구는 것을 용서하시고, 정신을 집중하여 청정하게 살피셔서 경사(卿士)에게 순문(詢問)한 뒤 채택하여 시행하신다면, 거의 국가를 풍족하게 하고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방도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주상이 이 상소를 묘당에 내려 주상에게 물어 처리하게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수레에 대한 제도를 처음으로 시행하는 일은, 수레를 사용하는 것은 실로 백성과 국가에 관련되니 각 군문에서 솜씨 있는 사람을 특별히 선발하여 절사(節使)가 연경에 갈 때 데리고 가게 하여 각종 수레의 제도를 일일이 모사해 와 그것을 본떠 시행하게 하소서. 흙벽돌을 구워 만드는 일은, 구운 벽돌에 대한 논의는 옛날부터 있어 왔지만 그 요령을 얻지 못하여 뜻은 있어도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군문에 시켜 연경에서 제조 방법을 알아 오게 하되, 구워 만드는 방법을 자세히 탐지해 오게 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하소서. 나귀와 양을 목축하는 일은, 먼저 의주부(義州府)에서 나귀와 양 몇 마리를 사 오게 하여, 나귀는 놀리고 있는 넓은 목장에서 방목하고 양은 관서(關西) 지방의 각 고을에 나누어 소속시킨 뒤 저들의 기르는 방법을 따라 하게 하여 널리 번식하게 하소서. 동기 사용을 금지하여 돈을 주조하는 자금으로 삼는 일은, 늘 쓰던 물품을 영영 금지하면 소란이 생길 염려가 없지 않으니 중지하소서. 모자 무역을 금하는 일은, 사행에 드는 공적 비용을 전적으로 모자세에 의존하고 있으니, 대신할 세를 마련할 때까지 기다려 다시 상의하여 처리하소서. 중국어를 익히게 하는 일은, 양국이 상호 교류하는 일은 전적으로 언어에 달려 있으니, 사역원의 예전 제도를 다시 엄격히 준수하여 삼학(三學)의 강의 규정을 회복시키고 문신에게 중국어를 익히도록 신칙하며 역관에게 몽학을 익히도록 권면함으로써 전처럼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45 집 384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교통-육운(陸運) / 교통-마정(馬政) / 건설-토목(土木) / 건설-건축(建築) / 농업-축산(畜産) / 사법-법제(法制) / 외교(外交)
[주-D001] 예기(禮記)에 …… 것 :
《예기》에는 군주의 부가 얼마나 되는지 물으면 토지의 넓이로 답한다고 하였고, 사(士)의 부를 물었을 때 수레의 수로 답한다고 하였다. 아마도 홍양호가 착오를 일으킨 듯하다. 《禮記 曲禮下》
[주-D002] 수레에는 …… 본떴다 :
《주례》 〈고공기〉 정현(鄭玄)의 주(注)에, 수레의 진(軫)이 방형인 것은 땅을, 덮개가 원형인 것은 하늘을 본뜬 것이라 하였다. 또한 하늘의 도는 음양(陰陽), 땅의 도는 강유(剛柔), 사람의 도는 인의(仁義)이며 이 삼재가 가진 두 가지씩의 도를 합하여 육획을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수레에 6등급이 있는 것이 이 삼재육획(三才六畫)을 본뜬 것이라고 하였다. 《周禮注疏 考工記》 《周易 說卦傳》
[주-D003] 사마상여(司馬相如)는 …… 지나갔고 :
적거사마는 고관대작이 타는, 말 네 필이 끄는 붉은 수레를 말한다. 《화양국지(華陽國志)》에 의하면, 사마상여가 처음에 고향인 촉을 떠나 장안(長安)에 들어갈 때 시문(市門)에 “적거사마를 타지 않고는 너를 지나가지 않겠다.”라고 적었다고 한다.
[주-D004] 제갈량(諸葛亮)의 목우(木牛)와 유마(流馬) :
목우와 유마는 삼국시대 촉의 제갈량이 처음 만들었다는 운반 기구로, 바퀴 하나짜리 수레와 바퀴 네 개짜리 수레이다. 《三國志 蜀書 諸葛亮傳》
[주-D005] 대완(大宛)의 품종 :
대완은 옛날에 서역(西域) 지역에 있던 36국(國) 중 하나로, 명마(名馬)가 많이 나는 곳으로 유명하였다. 《史記 大宛列傳》 《漢書 西域傳上 大宛國》
[주-D006] 사원(沙苑) :
원래 중국 섬서성 대려현(大荔縣) 위수(渭水) 가에 있는 지명으로, 목축하기에 알맞은 곳이어서 당(唐)나라 때 이곳에 사원감(沙苑監)을 두고 국가의 말을 길렀다. 여기에서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목장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주-D007] 사람이 …… 말이지 :
저본에는 ‘行致之稱’으로 되어 있는데, 홍양호의 문집인 《이계집(耳溪集)》의 같은 상소에 근거하여 ‘致’를 ‘遠’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耳溪集 卷19 陳六條疏》
[주-D008] 성이 …… 되었다 :
《주역》 〈태괘(泰卦) 상육(上六)〉에서 이용한 말이다. 여기서 황(隍)은 성 밖을 둘러싼 마른 못, 즉 해자(垓字)를 말한다.
[주-D009] 수도(首都)에서 …… 쌓네 :
《시경》 〈패풍(邶風) 격고(擊鼓)〉에서 인용한 말이다. 여기서 조(漕)는 위(衛)나라 고을 이름이다.
[주-D010] 도성(都城)이 100치(雉)이다 :
치란 고대에 성의 담장[城牆]의 면적을 세는 단위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1년 조(條) 두예(杜預)의 주(注)에 의하면, 사방 1장(丈)을 도(堵)라 하고, 3도를 1치라 하며, 1치의 담장은 길이가 3장, 높이가 1장이라 하였다.
[주-D011] 하왕(夏王) …… 없었다 :
동진(東晉) 안제(安帝) 때인 413년에 하왕 발발이 10만여 명의 사람을 부려 삭방(朔方) 북쪽 흑수(黑水) 남쪽에 도성을 쌓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성을 쌓을 때 흙을 쪄서 쌓았는데, 바늘이 1치 정도 들어가면 만든 사람을 죽일 정도로 굳건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通鑑節要 卷30》
[주-D012] 의무려산(醫巫閭山) :
중국 요령성(遼寧省)에 있는 산으로 동북 지역의 3대 명산 중 하나이며, 금주석(錦州石)이 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明史 地理志》
[주-D013] 수(水) …… 다스린다 :
〈우서〉는 《서경》의 편명이다. 그중 〈대우모(大禹謨)〉에서 우(禹)가 순(舜)에게 정치의 목적은 백성을 잘 기르는 것[養民]에 있으며, 백성을 잘 기르는 것의 핵심은 바로 금, 목, 수, 화, 토, 곡식을 잘 다스리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주-D014] 하늘이 …… 활용한다 :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27년 조에서 인용한 말로, 여기서 다섯 가지 물질이란 금, 목, 수, 화, 토를 가리킨다.
[주-D015] 성인이 …… 것 :
《주역》 〈계사(繫辭)〉에서 요약ㆍ발췌한 말로, 옛날에 복희씨(伏羲氏)가 위로는 하늘의 상을 관찰하고, 아래로는 땅의 법(法)을 관찰하며, 중간으로는 조수(鳥獸)의 문양을 관찰하여 팔괘(八卦)를 만들었다 한다. 《周易正義 繫辭上》
[주-D016] 사서(史書)에서 …… 것 :
사서는 《통감절요》를 말한다. 동진(東晉) 안제(安帝) 때인 413년에 하왕 발발이 10만여 명의 사람을 부려 삭방(朔方) 북쪽 흑수(黑水) 남쪽에 도성을 쌓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성을 쌓을 때 흙을 쪄서 쌓았는데, 바늘이 1치 정도 들어가면 만든 사람을 죽일 정도로 굳건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通鑑節要 晉紀 安帝》
[주-D017] 유모(柔毛)가 …… 되고 :
유모는 고대에서 제사에 사용하는 양의 별칭이고, 대무는 소의 별칭이다. 《예기》 〈곡례 하(曲禮下)〉에 의하면, 종묘(宗廟)에 제사할 때 소는 일원대무(一元大武), 작은 돼지[豕]는 강렵(剛鬣), 살찐 돼지[豚]는 돌비(腯肥), 양은 유모라 한다고 하였다.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 “양이 살찌면 털이 가늘어지고 부드럽게 된다.”라고 하였다.
[주-D018] 위(衛) :
《이아익(爾雅翼)》 〈석수(釋獸)〉에서 나귀를 일명 위(衛)라 한다고 하였다.
[주-D019] 육축(六畜)에 포함되고 :
육축(六畜)은 육생(六牲)과 같으며, 희생으로 쓰는 말, 소, 양, 닭, 개, 돼지를 가리킨다. 《周禮 天官冢宰》
[주-D020] 삼농(三農)의 이로움 :
옛날에 농민이 거주하던 곳을 평지(平地), 산간(山間), 습지(濕地) 세 지역으로 나누었는데, 이 세 지역에서 모두 양을 기르게 되면 이익이 많이 날 것이라는 뜻이다. 《주례》 〈천관총재(天官冢宰) 태재(太宰)〉 정현의 주(注)에서 인용하였다.
[주-D021] 송나라의 …… 달렸으니 :
요평중은 송나라 흠종(欽宗) 때 경기선무사도총제(京畿宣撫司都統制)를 맡았던 장군으로, 금(金)나라가 침입하자 밤에 금의 병영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하여 서촉(西蜀)으로 망명하였다. 송나라 육유(陸游)가 쓴 《요평중소전(姚平仲小傳)》에 요평중이 일이 성사되지 못하자 청노새를 타고 하루 밤낮에 750리를 달려 망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渭南文集 卷23》
[주-D022] 앵(甖) :
저본에는 ‘罌’으로 되어 있는데, ‘와(瓦)’에서 온 말임을 설명하는 내용이므로 이체자인 ‘甖’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주-D023] 사농(司農) :
중국 고대의 관명(官名)으로, 조세(租稅)ㆍ전곡(錢穀)ㆍ염철(鹽鐵) 등 국가의 재정 수지를 담당하였다. 진(秦)나라 때 설치한 치속내사(治粟內史)를 한 무제(漢武帝) 때 대사농(大司農)으로 개칭하였다. 《通典 職官8》
[주-D024] 수형(水衡) :
중국 고대의 관명으로, 수형도위(水衡都尉), 수형승(水衡丞)의 약칭이다. 한 무제 때 설치되었고, 수(隋)나라 때 폐지되었다. 황가(皇家)의 상림원(上林苑)을 관리하고, 겸하여 세수(稅收)와 주전(鑄錢)을 관장하였다. 《漢書 百官公卿表上》
[주-D025] 취진판(聚珍版) :
청나라 건륭(乾隆) 시기에 편찬된 《사고전서》의 활자판(活字版)인 《무영전취진판총서(武英殿聚珍版叢書)》를 말한다. 목활자 25만여 자를 써서 138종, 2891권을 인행하였다. 《書林淸話 卷8》
[주-D026] 보원국(寶源局)에 맡겼다 하였으니 :
보원국은 명(明), 청(淸) 때 화폐를 주조하고 관리하던 관서이므로, 이 관사에 활자를 맡겼다는 것은 활자를 녹여서 동전을 주조하는 데 사용하였다는 의미이다. 취진판 서문에 따르면, 송나라 때 필승(畢昇)이 처음 활자를 만들었을 때는 진흙을 구워서 만들었고, 명나라 때는 아연으로 만들었으며, 청나라 때 이것으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찍어 낸 뒤 그 활자를 무영전(武英殿)에 보관하였다가 당시 동전이 귀하게 되자 그것을 녹여서 동전을 주조하는 데 썼다고 하였다. 《武英殿聚珍版叢書 序》
[주-D027] 천부(泉府) :
중국의 관명으로 사도(司徒)의 속관(屬官)이며, 국가의 세수, 벌포(罰布), 질포(質布) 등을 관리하였다. ‘천(泉)’을 ‘전(錢)’이라 하기도 한다. 《周禮 地官司徒》
[주-D028] 양주(楊州)에서 생산되는 삼품(三品) :
《서경》 〈우공(禹貢)〉에, 양주에서 금삼품(金三品)을 공물로 바친다고 하였는데, 그 주(注)에서 공영달은 삼품을 금, 은, 동이라고 보았고, 정현은 동의 세 가지 색, 즉 청(靑), 백(白), 황(黃)이라고 보았다.
[주-D029] 이원호(李元昊)가 …… 우려하였습니다 :
이원호는 훗날 서하(西夏)의 경종(景宗)이다. 그의 아버지 이덕명(李德明)이 서하를 건국했으며, 묘호(廟號)는 태종(太宗)이다. 송나라는 이민족과의 교역에서 주로 차를 말로 바꿨는데, 이로 인해 이민족들은 점차 차에 의존하게 되었고, 송나라는 전마(戰馬)를 확보하고 이민족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을 당시에는 서하가 아직 건국하기 전이었는데, 지식인들은 이원호가 이러한 문제가 생길 것을 미리 알고 송나라와의 교역을 반대한 것이라고 여겨 훗날 송나라의 큰 근심거리가 될 것이라고 예견한 것이다. 《宋史 外國列傳 夏國》
[주-D030] 역원(譯員)이 …… 않았으니 :
포은은 중국으로 가는 사신과 그 원역(員役)들이 중국에 갈 때 가져가던 사무역(私貿易) 자금이다. 국초에 은화로 가져가던 것을 세종 연간 이후 인삼으로 대신하게 되면서 생긴 용어로, 인조 이후로는 1인당 80근까지 가져갈 수 있도록 허용되었고 이를 팔포(八包)라고 하였다. 현종 때 다시 인삼이 귀해지면서 은화로 가져가도록 하여 80근 어치의 은화 2000냥을 1인당 팔포의 기준으로 삼고 당상관(堂上官)에게는 1000냥을 더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영ㆍ정조 연간이 되면서 은화도 귀해져 팔포를 채우기도 힘들게 되자[空包], 다시 인삼이나 피잡물(皮雜物) 등을 섞어 가져가도록 하였다. 《正祖實錄 16年 10月 6日》
[주-D031] 변무(辨誣)하는 일 :
명나라 법전인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朝鮮) 왕조의 조상을 이단(李旦)이 아니라 고려의 권신(權臣)인 이인임(李仁任)이라 기록하고, 또 이단이 고려의 공민왕(恭愍王)ㆍ우왕(禑王)ㆍ창왕(昌王)ㆍ공양왕(恭讓王) 등 네 왕을 시해(弑害)하였다고 잘못 기록한 것을 바로잡은 일을 말한다. 이 문제는 조선으로서는 매우 중대한 일이어서, 태종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 종계변무 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를 파견하여 그 개정을 요구하였으며, 선조(宣祖) 때에 이르러 비로소 바로잡게 되었다. 《宣祖實錄 17年 11月 1日》
[주-D032] 김육(金堉)이 …… 청하였으며 :
인조 22년(1644)에 대사성 김육이 상소하여, 중국으로 나가는 사신이 교거를 타고 가게 되면 한 사람의 행차에 말이 10여 필이 넘고 따르는 자가 또 수십 인이 되므로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폐단을 지적하고, 말 1필이 끄는 작은 수레인 안거를 이용할 것을 청하였다. 《仁祖實錄 22年 9月 1日》
[주-D033] 성곽(城郭)의 …… 있어서 :
이항복의 문집인 《백사집(白沙集)》 별집 권5 〈조천록 하(朝天錄下)〉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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