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북쪽으로 험난한 거용산(居庸山)이 가로막혀 있고

2022. 9. 12. 10:49백두산

목은시고 제14권 / 시(詩) 

청산음(靑山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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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은 기약 있어 길이 문에 당했는지라 / 靑山有約長當戶
앉아서 거용 등지고 여부를 어루만지네 / 坐背居庸撫廬阜
세 가닥이 종횡하여 산세가 불일치하니 / 三條縱橫勢莫一
어느 곳이 참다운 천부인지 알 수 없고 / 未知何處眞天府
동쪽 바다 서쪽 언덕에 자리한 장백산은 / 東溟西岸長白山
마치 태백이 도망갔던 형만과 똑같은데 / 有如泰伯逃荊蠻
오악은 중국에서 가장 높게 내버려 두고 / 從敎五岳尊中州
홀로 요해에 걸터앉아 청구와 연하였네 / 獨跨遼海聯靑丘
삼한에 흩어져선 뛰어난 지세를 차지하여 / 散在三韓占形勝
봉우리마다 신선 누각을 솟구쳐 일으키고 / 峰峰聳起神仙樓
누각 아래 흐르는 물은 동해로 달려가 / 樓下流川走東海
봉래산의 운기는 하늘이 내리덮은 듯하네 / 蓬萊雲氣如天蓋
눈이 있어도 티끌 하나를 볼 수 없거니 / 有眼不見纖塵生
학 타고 돌아간들 또한 무엇이 해로우랴 / 駕鶴歸來亦何害
머리 숙이고 앉아서 청산음을 짓다 보니 / 低頭且作靑山吟
마른 버들에 말 부스럼 비벼댐과 흡사하네 / 恰似枯楊便馬疥

 

[주-D002] 거용(居庸) …… 어루만지네 : 

거용은 연경(燕京)에 있는 산명(山名)인데, 험준하기로 이름이 높고, 여부는 바로 동진(東晉)의 고승(高僧) 혜원 법사(慧遠法師)가 거주했던 여산(廬山)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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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선생전서습유 제4권 / 잡저(雜著) 

공로책(貢路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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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은 말하노라.

우리 동방이 처음 중국과 통하기는 후한(後漢) 건무(建武 광무제(光武帝)의 연호)의 시대이다. 삼국과 고려에 이르러서는 당(唐)나라ㆍ송(宋)나라ㆍ요(遼)나라ㆍ원(元)나라를 섬겼는데, 표문(表文)을 짓기를 더욱 공경히 하고, 조공을 받드는 일이 없는 해가 없었다. 그 조공을 들여간 길과 그 네 왕조의 국토가 있었던 곳은, 믿을 만한 사록에 갖추어 실려 있으리니, 이제 그것을 상고하여 일일이 들어 말할 수 있겠는가? 국조(國朝 명조(明朝)를 가리킴) 고황제(高皇帝)가 도읍을 금릉(金陵)에 정하매, 고려 말기의 조공을 바치는 사신이 일찍이 바닷길을 따라가다가 배가 뒤집혀 빠져 죽는 환난을 여러 번 당하자, 부득이 정흥(定興)ㆍ요동(遼東)의 길을 경유하려 했으나 당시 지방을 맡은 자가 재삼 가로막아 국서(國書)를 드리지 못하였다. 마침 황제가 바닷길의 험함을 민망히 여겨 요동과 계구(薊丘)의 길을 열기를 허락하여 지금에 이르도록 백여 년 왕래에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 중조(中朝)의 경우, 남쪽으로는 왜구(倭寇)의 변고가 있어 바다에 연한 지방은 모두 왜구의 노략질에 해를 당하여 손상과 파괴가 이미 극에 이르렀고, 북쪽 지방으로는 흉년으로 기근이 들어 있는 데다 달로(㺚虜)가 마구 들어와 여기저기 성을 많이 함락시키는 바람에 도처에서 시체를 밟고 다닐 지경이어서, 평온을 되찾을 길이 없으나, 길이 막힐 우려가 없지 않다. 혹시라도 연로(燕路)를 지키지 못해 황제가 피난을 가게 된다면, 주청(奏請)하기에 편한 길이 말미암을 데가 없게 된다. 만약 바닷길을 좇으려 한다면, 또 명확한 교지(敎旨)가 없으니, 누가 -두 글자 빠짐- 영(令)을 좇아 달성할 수 있겠는가. 향하는 곳에서 거부를 당하는 것이 정요(定遼) 지역 보다 반드시 심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왜적이 바야흐로 노략질을 함부로 해대며 여러 섬에 출몰하고 있음에랴.

만약에 두 길이 다 막히면, 지금을 위한 계책으로서는 장차 조심스레 봉하여 준 땅이나 지키면서 해내(海內 중국을 가리킴)가 평정되기를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풍파를 무릅쓰고서라도 나라의 명이 반드시 상달되기를 바랄 것인가? 대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중요한 일로서, 국시(國是)가 있는 바에는 반드시 정론이 있을 것이다. 진실로 평소에 미리 강구해 두지 않으면, 갑작스러운 사태에 대응할 길이 없으리라. 너희 선비들은 옛것을 배우며 지금의 것을 통달하고, 반드시 스승이나 벗들을 좇아 이런 난처한 일을 질정해 두고서 내가 묻기를 기다린 지 오래이니, 각기 남김없이 글로 나타내어라.

 

신(臣)은 응대합니다. 

 ‘우리 동방’에서부터 ‘일일이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신 곳까지를 읽고서 신은 항상 옛날을 상고하고 전대를 살피는 전하의 성대한 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은 듣건대,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 동방은 멀리 해외(海外)에 있어 비록 별도로 한 구역이 된 것 같으나, 구주(九疇)의 가르침과 예악의 풍속은 중화(中華)에 뒤지지 않으니, 끝내 한 줄기 강물이 갈라놓았다고 하여 따로 다른 이역(異域)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화에 조공을 닦은 것이 한(漢)나라 건무(建武) 때로부터 비롯된다고는 하나, 기자(箕子)가 주(周)나라에 조현(朝見)하러 갈 때 지은 맥수(麥秀)의 노래가 있었고, 연백(燕伯)이 분수에 넘치게 제왕의 칭호를 가지자 죄[鼎 죄(罪) 자로 해야 할 듯하다]를 묻는 군대를 일으키려고 했으니, 이로 보면 주나라ㆍ한나라 이전에 이미 중국에 통했을 것이나, 단지 문헌의 부족으로 고증해 내지 못할 따름입니다. 이로부터 내려오면서 외처럼 나뉘고 솥발처럼 버틴 삼국[瓜分鼎峙之三國]과 닭을 가지고 오리를 친 고려[操雞搏鴨之高麗]에 이르는 동안 예교(禮敎)가 점차 갖추어지고 천자(天子)에 배알함이 점차 공경스러워져 삼국은 이당(李唐)에 대해서, 고려는 삼조(三朝 송(宋)나라ㆍ요(遼)나라ㆍ원(元)나라)에 대해서, 크고 작은 빙문을 반드시 제때에 해서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그 직분을 잃지 않았으니, 명목상으로는 비록 외국이지만 실은 동방의 한 제로(齊魯)일 따름입니다.

그 조공을 바친 통로와 국토의 소재 같은 것은 믿을 만한 사록에 있으니, 이 어리석은 신하의 우매한 논설을 기다릴 것이 없겠으나, 신이 그 대략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당나라는 장안(長安)에 도읍했고, 송나라는 변경(汴京)에 도읍했으니 조공을 바침에 바다를 항행하여 길이 소주(蘇州)ㆍ항주(杭州)를 경유했음을 가히 알 수 있으며, 요나라와 원나라는 모두 북연(北燕)에 도읍했으니, 산을 넘어 요주(遼州)ㆍ계주(薊州)에 도달했음을 또한 가히 상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라고 하는 것은 비단이나 옥 등의 예물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삼국과 고려가 대국을 섬기는 데 게으르지 않았던 것이 과연 의리가 있어서 능히 그 정성을 다했던 것이겠습니까? 혹시 대국의 도움을 빌려 적대국을 제압하려고 했던 것이나 아닌지요? 아니면 위세에 눌려서일 뿐, 진심으로 복종한 것이 아니었던 것은 아닌지요? 그 예의는 비록 부지런했으나 반드시 의리에 맞지는 않았고, 그 의례는 비록 성대했으나 반드시 그 정성이 담겨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어찌 우리 왕조에서 의리로써 섬기고 정성으로써 섬기는 것과 동일하게 논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감히 욕되이 진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신은 엎드려 성책(聖策)에서, ‘국조 고황제가’에서 ‘갑작스러운 사태에 대응할 길이 없으리라’ 하신 부분까지를 읽고서, 전하께서 두 실마리를 잡아 치우치지 않게 그 중용(中庸)을 쓰시려는 뜻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은 듣건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길 때는 평탄하거나 험난하다고 하여 그 마음을 바꾸지 않고, 성하고 쇠한 것으로 인하여 그 예의를 폐하지 않는다.” 하오니, 이를 능히 행하고 있는 경우는 오직 우리 왕조가 중조(中朝)를 섬기는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험난한 거용산(居庸山)이 가로막혀 있고, 남쪽으로는 깊은 창해가 경계하고 있습니다. 대명국(大明國)이 일어나 금릉(金陵)에 도읍을 정하면서부터 고려 말의 사신들이 대양을 건널 적에, 거센 회오리바람이나 고래 등 같은 파도처럼 예측하기 어려운 환난으로 인해, 바친 토산물(土産物)이 열 가운데 겨우 한둘 정도 도달할 지경이었고, 그중에는 배를 제대로 운항하지 못해 바다에 빠져 죽는 경우도 또한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바닷길에 어려움이 많자 요양(遼陽)을 통하여 공물을 전함으로써 정중한 정성을 펴보려고 하였으나, 이 지역을 맡은 관리가 영토를 지키면서 길을 빌려 주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황제께서 신성하시어 밝게 만 리 밖을 보고 바다를 건너는 어려움을 충분히 짐작하시어 드디어 요양의 길을 열어 왕래하는 사신을 통하게 하셨습니다. 게다가 위엄과 덕망을 널리 펴자 오랑캐가 두려워 복종하였으며, 또한 동방에서는 진정한 군주가 천명을 받아 등극하였습니다. 위에는 온화하고 공경스러운 황제의 덕이 있고, 아래에는 아름답고 성하게 제후의 덕이 있게 되었으니, 남쪽으로는 한 척의 배도 쳐들어올 위험이 없고, 북쪽으로는 초구(楚丘)의 침략이 없게 되었습니다. 중화와 동방이 합하여 한집이 되어, 도움을 주는 것 -한 글자 빠짐- 이미 내려지고 번국(藩國)으로서의 소임이 무겁게 되니, 실로 만세의 그지없는 경사였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하늘이 어여삐 여기지 않아 국조에 근심거리가 많아 준동(蠢動)하는 북쪽 오랑캐는 무간(舞干)의 교화에 바로잡히지 않고, 볼품없는 남쪽 오랑캐는 항상 독벌레의 독을 피워서 요양 일대는 거의 피비린내 나는 지경으로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해안의 두어 고을에 남아 있는 백성이라고는 거의 없는 지경이 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중국 조정의 커다란 우환이자 우리나라의 불행입니다. 만약 하늘이 화란을 내린 것을 거두지 않아 난리가 즉시 그치지 않아서, 만에 하나 장성(長城)을 지키지 못하고 황제가 남쪽으로 옮겨간다면, 우리나라가 조공을 들여가는 길은 장차 어디를 통할 것입니까? 북쪽으로는 그 심보를 헤아릴 수 없는 공순치 못한 오랑캐들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 것입니까? 남쪽으로는 지난날 배가 뒤집혀 빠져 죽는 환난이 또한 걱정스럽습니다. 그리하여 장차 조심스럽게 봉토를 지키면서 시기를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반드시 도달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이 문제가 바로 전하께서 스스로 지혜를 쓰시지 않으시고 모의를 이 가난한 선비에게까지 미치게 하신 까닭입니다. 신은 청컨대, 옳음과 그름, 이로움과 해로움의 논설로써 우러러 밝으신 이목을 더럽히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