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 너비20리. 고운당 기록

2022. 9. 13. 21:47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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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당필기 2

가체를 금하다〔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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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사》 〈백제열전〉에 “백제 여인은 머리를 땋아 뒤쪽으로 늘어뜨리고, 혼인한 뒤에는 양 갈래로 땋아서 머리 위에 얹는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풍속도 그러하다. 어떤 이는 “고려가 몽고에서 배운 것이다.”라고 한다. 내가 몽고 여인을 보니 과연 모습이 같았다. 그러나 원래 백제의 풍속이라면 우리나라에서 따라 한 지 오래이니 몽고가 고려의 몸치장을 배운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연경에 있을 때 나양봉의 집에서 한황의 〈회홀무녀도(回鶻舞女圖)〉를 보았는데, 머리카락을 땋아서 머리에 빙 두른 것이 또한 우리나라 부녀자들과 비슷했다. 회홀(回 위구르)이란 금의 회회(回回)이다. 나는 또 회회의 여인을 본 적이 있는데, 머리에 뾰족한 모자를 쓰고 두 갈래로 땋은 머리를 어깨 뒤로 늘어뜨린 것이 마치 남과 경쟁하다가 추월당해 쪽 찐 머리가 흘러내린 것 같았다. 대개 머리를 땋는 것은 중국 제도는 아니다.

요즈음 풍성한 가체를 좋아해서 구름을 포갠 듯 안개를 두른 듯이 하느라 걸핏하면 천금을 들인다. 나이 어린 부녀자들은 목이 약해서 감당하지 못하는데도 가체가 작은 것을 싫어하니, 영조 때는 이 풍속을 금지하기도 했다. 금상(정조) 12년(1788)에 《신금사목》을 반포하고 나서야 비로소 부녀자들이 쪽을 찌고 족두리를 쓰게 되었다. 천한 자들은 여전히 옛 풍속을 따르지만 가체를 크게 하지는 못한다.

[-D001] 나양봉(羅兩峯) : 

나빙(羅聘, 1733~1799)으로, 자는 돈부(遯夫), 호는 양봉이다. 청나라의 화가로, 양주팔괴(揚州八怪)의 한 사람인 금농(金農)의 제자이다.

[-D002] 한황(韓滉) : 

723~787. 당나라 때 화가이자 서예가이다. 인물 및 농촌 풍경과 함께 소, 양 등의 동물을 특히 잘 그렸다.

[-D003] 신금사목(申禁事目) : 

《가체신금사목(加髢申禁事目)》을 말한다. 영ㆍ정조 시기 부녀자들의 가체가 성행하고 이로 인해 사치하는 풍속이 심해졌다. 이에 1788년 이 사목을 제정 및 반포하여 사대부 부인을 비롯한 각 계층 부녀자의 머리 양식을 규정하고 가체를 금하였다. 1책으로 뒤에 한글 번역이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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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당필기 3

팔도 군사 수〔八道軍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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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의 군사는 모두 57만 4742명이다. 기병(騎兵)이 6만 411명, 보병(步兵)이 34만 3521명, 수첩군(守堞軍)이 9만 4466명, 수군(水軍)이 4만 8582명, 봉군(烽軍)이 2만 6238명, 승군(僧軍)이 1524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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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당필기 4

몽고어〔蒙古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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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어로 하늘을 ‘등혁력(騰革力)’이라 하니  《한서》 〈흉노전〉 “흉노는 하늘을 ‘탱리(撑犁)’라고 한다 말이 이것이다. 태양을 납라(納刺)라 하는 것은 어렴풋이 우리말과 비슷하고, 말[馬]을 막림이라 하는 것은 만주어와 같다. 고려를 쇄롱혁이라 하는데 조서(臊鼠 은서, 곧 족제비)도 쇄롱혁이라 하니 그 뜻을 모르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몽고 사람을 만나면 누린내가 난다고 싫어하고 만주 사람을 만나면 고기 비린내가 난다고 싫어한다. 아마 몽고 사람들도 우리를 만나면 비린내가 난다 할까? 우리 풍속에서 아이들 놀이로 실에 꿩 깃털을 매어 바람에 날리는 것을 고고매(姑姑梅)라고 하는데 몽고에서 봉황을 고고매(苦苦妹)라 하니 고고매(姑姑梅)가 곧 고고매(苦苦妹)임을 알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려 때 몽고어를 많이 익혔다.

[-D001] 몽고어로 …… 이것이다 : 

몽골 민간 신앙에서 최고의 신은 천신(天神)인데, 몽골어로는 ‘텡게르’라 하고 현재 중국어로는 ‘騰格里’로 표기하고 ‘텅거리(ténggélǐ)’로 읽는다.

[-D002] 막림(莫林) : 

현재 중국어 발음은 ‘모린(mòlín)’이다. 앞의 〈만주어〉에 “여진은 말[馬]을 모린(毛鄰)이라고 한다.” 하였는데, 이와 발음이 비슷하다.

[-D003] 쇄롱혁(瑣瓏革) : 

숙량합(肅良合)으로도 표기되었다. 현재 몽골어 발음은 ‘소롱고’이고, 무지개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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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당필기 4

한자〔漢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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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각이 서장관으로 연경에 갔다 돌아왔다. 나와 함께 내각에 있을 때 그가 연경에서의 일을 말해 주었다.

“정양문(正陽門) 밖 모처를 구경하다가 한인 벼슬아치 여럿을 만나서 필담을 했지요. 그중 한 사람이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묻더군요.

‘선생은 어쩌면 그렇게도 한자에 익숙하신가요?’

제가 답문하였지요.

‘한자에 익숙하지 않으면 무슨 글자에 익숙하겠습니까?’

‘본국 글자는 없습니까?’

‘없습니다.’

‘황상(皇上)의 집안도 본국 글자가 있답니다.’

‘우리나라는 기자(箕子)가 봉해진 이래로 예악 문물이 중국에 비길 정도이니 어찌 한자를 쓰지 않겠습니까. 황상의 집안에는 본디 한자가 없었지요.’

그러자 그 사람이 크게 웃었습니다.”

이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국 사람 중에 그다지 독서를 하지 않은 자는 말이 대개 이렇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매번 묻기를 ‘뭍으로 왔습니까, 바다로 왔습니까?’ 하고, 또 ‘귀국에는 진 시황이 책을 불태우기 전의 《시경》과 《서경》이 있습니까?’ 하고, 또 삿갓 꼭대기의 공작 깃을 가리키면서 ‘이것은 황상이 상으로 하사한 것인가요?’ 묻는데, 모두 답할 것 없는 말들이지요. 어쩌면 그렇게도 한자에 익숙하냐고 묻다니, 더더욱 심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공의 대답이 썩 통쾌합니다. 그 사람이 크게 웃은 것은 아마도 ‘황상의 집안에는 본디 한자가 없었다.’라는 한 구절이 가려운 곳을 긁어 주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내 말에 김 직각도 크게 웃었다. 그 며칠 뒤에 또 내각에 있는데  직각이 이런 말을 해 주었다.

“최근 어떤 어른의 일입니다. 그는 경전과 역사서를 많이 읽은 데다 표책(表策)을 잘 짓는 분이었지요. 마침 다른 사람 집에서 모임이 열려 안석에 기대 누웠는데 젊은이들이 건륭제의 글씨를 돌아가며 감상하는 것을 보고 그 어른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지요.

‘건륭이 글씨에 능한가?’

‘그렇습니다.’

젊은이들이 답하자 그 어른이 글씨를 가져다가 한참 들여다보고는 또 물었습니다.

‘이게 바로 건륭의 글씨란 말이야?’

‘네.’

‘괴이하구나, 괴이해. 이 오랑캐가 우리나라 글자를 흉내 낸 것이 어쩌면 이토록 솜씨가 좋을까.’

젊은이들은 몰래 웃지 않는 이가 없었답니다.”

나는 듣고 포복절도했다. 이 이야기는 앞서 한인 벼슬아치의 말에 겨룰 만한데, 도리어 더 낫기까지 하다.

[-D001]  직각 : 

김조순(金祖淳, 1765~1832)으로, 자는 자는 사원(士源), 호는 풍고(楓皐)이다. 순조의 장인이자 순원왕후의 아버지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중심 인물로 유명하다. 1792년(정조16) 서장관으로 청나라로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고, 그해 규장각 직각에 제수되었다.

[-D002]  직각 : 

남공철(南公轍, 1760~1840)로, 자는 원평(元平), 호는 사영(思穎) 등이다. 1792년 급제한 후 같은 해 바로 규장각 직각이 되었다. 뛰어난 문장가로 정조 때는 친우인 김조순과 함께 문체반정에 동참하기도 했고 순조 때는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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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당필기 5

우리나라 책이 왜에 전해지다〔我書傳於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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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놈들은 지혜가 날로 트여 더 이상 지난날의 왜가 아니다. 대개 장기(長崎 나가사키)를 드나드는 배들을 통해 중국 강남의 서적을 수입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책 역시 왜에 많이 전해졌다. 무진년(1748, 영조24)에 통신사가 왜에 갔을 때 서기들이 왜의 유학자들과 필담을 나누었다. 그 가운데 기국서라고 하는 자가 말하였다.

“《고려사》, 《여지승람》, 《고사촬요》, 《병학지남》, 《징비록》, 《황화집》, 《보한재집》, 《퇴계집》, 《율곡집》 등을 보았습니다.”

또 상월신경이라는 자가 말하였다.

“양촌(陽村)의 《입학도설》, 회재(晦齋)의 《구경연의(九經衍義)》, 퇴계의 《성학십도》ㆍ《계몽전의》ㆍ《주서절요(朱書節要)》ㆍ《천명도(天命圖)》ㆍ《자성록(自省錄)》, 율곡의 《성학집요》ㆍ《격몽요결》ㆍ《계몽보요해(啓蒙補要解)》 등을 보았습니다.”

왜국에 유포된 다른 책은 그다지 큰 문제가 없지만, 《병학지남》과 《징비록》 같은 책은 바로 비서(秘書)인데, 도대체 어떤 간사한 놈이 왜관(倭館)에 몰래 팔았단 말인가! 왜인이 언젠가 《지봉유설》에 있는 내용을 인용하여 망녕되이 울릉도가 자국 영토라는 증거를 대었으니, 이 일이 참으로 거울삼을 만하다.

[-D001] 우리나라 …… 전해지다 : 

맨 앞과 뒷부분의 의론 부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권59 〈앙엽기6(盎葉記六)〉에도 실려 있다.

[-D002] 기국서(紀國瑞) :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1755)의 제자로 대마도주의 기실(記室:서기)을 지냈다. 조명채(曺命采)의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 건(乾)》, 조엄(趙曮)의 《해사일기(海槎日記)》에 활동상이 보인다.

[-D003] 상월신경(上月信敬) : 

대판(大阪:오사카) 사람으로 자는 단장(丹藏), 호는 전암(專菴)이다. 《靑莊館全書 卷59 盎葉記六》

[-D004] 병학지남(兵學指南) : 

16세기 명나라의 척계광(戚繼光)이 지은 《기효신서(紀效新書)》의 내용 가운데 조선의 처지에 맞는 군대 훈련법을 간추려 엮은 책이다. 조선에서는 진법(陳法)을 시험하는 능마아강(能麽兒講)이나 병법의 내용을 묻는 여러 시취(試取)에서 이 《병학지남》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이 책은 조선 전술의 근간을 이룬다.

[-D005] 징비록(懲毖錄) : 

유성룡이 벼슬에서 물러나 임진왜란 체험을 바탕으로 우리가 패배한 원인이나 상황, 앞으로의 대책을 다룬 책이다. 이 책 안에는 전략적 요새를 논한 것이나 조선군의 취약점 등을 서술한 부분이 있다.

[-D006] 왜인이 …… 대었으니 : 

이수광의 《지봉유설》 〈지리(地理)〉의 〈도(島)〉에 울릉도를 논한 내용이 나온다. 저자는 임진왜란을 겪은 뒤에 왜병의 약탈을 당하여 사는 사람이 없다고 기술한 다음, “근래에 왜놈들이 의죽도(礒竹島)를 점거하였다고 들었다. 어떤 이는 기죽도(磯竹島)라고도 하는데 바로 울릉도이다.”라고 서술하였다. 이것을 두고 왜인이 울릉도를 자국 관할로 주장하는 근거 자료로 쓰인다고 한 것이다.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왜인들이 어부 안용복이 월경한 일로 와서 쟁론할 때, 《지봉유설》의 내용과 예조의 회답 가운데 ‘귀계(貴界)의 죽도(竹島)’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증거를 삼았다.”라고 하였다. 《문헌비고》의 〈울릉도 사실(鬱陵島事實)〉,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논사류〉의 〈울릉도사실변증설(鬱陵島事實辨證說)〉, 《숙종실록》 21년 6월 20일 기사에 관련 내용이 자세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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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당필기 6

우리나라 음이 중국 음보다 낫다〔東音勝華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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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경(劉元卿)의 《현혁편(賢奕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글자를 기록하는 문자를 같게 하는 것은 천하를 소유한 사람이면 힘으로 같게 할 수 있지만 글자의 음운을 같게 하는 것은 비록 성인이 천자의 지위에 있다 하더라도 형세상 할 수 없는 점이 있다. 지금 천하에 음운이 틀린 것은 민(閩)이나 월(粤)은 차치하고 논할 것조차 없지만 오나라 사람들이 말할 때 황(黃)과 왕(王)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북쪽 사람들이 늘 비웃는데, 정작 북쪽 사람들은 자신들의 음운이 바르지 못한 것이 매우 많은 줄은 알지 못한다.

예를 들면 경사(京師)에서는 보(步)를 포(布)라고 하고 사(謝)를 사(卸)라고 하며, 정(鄭)을 정(正)이라 하고 도(道)를 도(到)라고 하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 하남 사람은 하남(河南)을 갈남(渴南)이라 하고 처제(妻弟)를 칠제(七帝)라고 한다. 북쪽의 직례나 산동 사람은 옥(屋)을 오(烏)라고 하고 륙(陸)을 로(路)라고 하며 각(閣)을 과(果)라고 하여 입성운(入聲韻)이 없으며, 입성 내에서 집(緝)을 처(妻)라고 하고 엽(葉)을 야(夜)라고 하며 갑(甲)을 가(賈)라고 하여 합구자가 없다. 산서 사람은 총(聰)을 촌(村)이라 하여 동자운(東字韻)이 없고 강서, 호광, 사천 사람은 정(情)을 진(秦)이라 하고 성(姓)을 신(信)이라 하여 청자운(淸字韻)이 없다. 흡주(歙州), 목주(睦州), 무주(婺州) 이 세 군의 사람은 란(蘭)을 랑(郞)이라 하고 심(心)을 성(星)이라 하여 색(塞)과 침(侵) 두 글자의 운자가 없다.

또 예를 들면 거(去) 자의 경우 산서 사람은 고(庫)라고 하고 산동 사람은 취(趣)라고 하며 섬서 사람은 기(氣)라고 하고 남경 사람은 가(可) - 거성(去聲)이다. - 라고 하며 호광 사람은 처(處)라고 한다. 이 외에 산서 사람은 좌(坐)를 좌(剉)라 하고 청(靑)을 처(妻)라고 하며, 섬서 사람은 염(鹽)을 년(年)이라 하고 교(咬)를 뇨(褭)라고 하며, 태주(台州)와 온주(溫州) 사람은 장창(張敞)을 장창(漿槍)이라 하는데, 이와 같은 사례는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다. 대개 이는 습관으로 몸에 밴 지가 오래된 것이다. 오래된 것은 변하기 어려운 법이니 총명함이 특별히 뛰어나 늘 운서(韻書)를 염두에 두는 사람이 아니라면 스스로 세간의 습속에서 빠져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음운의 문란이 중국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동쪽의 우리나라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은 입성이 있고 또 합구성(合口聲)이 있으니, 도리어 중국보다 나은 셈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연경에 들어가 혹 중국 사람들과 음운을 논하다가 까마귀를 가리키면서 “저 새의 울음소리가 어떻죠?” 하고 묻는다면 그들은 “가가”라고 하고 우리나라 사람은 “각각”이라 하여 끝내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이다.

[-D001] 합구자(合口字) : 

입을 다물어서 발음하는 음운을 가진 글자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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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당필기 6

한성과 삼한의 관계〔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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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록》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시경》 〈한혁(韓奕)〉에 ‘커다란 저 한나라의 성이여, 연나라 백성들이 완성해 준 바로다. 왕이 한후(韓侯)에게 내려 주시니 추(追)와 맥(貊) 땅이로다. 문득 북쪽 나라를 받았구나.’라고 하였는데, 왕숙(王肅)이 ‘지금 탁군(涿郡) 방성현(方城縣)에 한후성(韓侯城)이 있다.’라고 하였다. 또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 이르기를 ‘옛날 주(周)나라 선왕 때에 한후의 나라가 연(燕) 땅에 가까웠는데, 후에 위만의 침입을 당하여 해중의 섬으로 옮겨 가 살았다.’라고 하였다. 한나라 시대는 옛날과 멀지 않으니 의당 전수받은 기록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삼한에 대해 변론한 우리나라 학자들이 아직 논증하지 못한 것이다.

  

러시아〔車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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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우후(北虞候) 신류의 《차한기략》에 말하였다.

“차한(車漢)은 나선(羅禪)이다. 이전에 왈개(曰介), 개부락(介夫落), 퍅개(愎介) 세 나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자 청나라가 죄를 물으려 하니 세 나라가 ‘차한의 침략을 받아 난리를 구제하기에도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청나라가 이에 해마다 군대를 내어 차한을 토벌하였으나 번번이 패하였다.

효종 5년 갑오년(1654)에 청나라가 우리나라에 군사를 요구하였다. 우리나라는 북우후 변급에게 총수(銃手) 100명과 기수(旗手)와 고수(鼓手) 48명을 거느리고 후통강에 나아가 싸우게 했는데, 적 중 많은 수가 총탄에 맞아 죽었으나 변급은 군대를 보전하여 돌아왔다. 효종 9년 무술년(1658)에 청이 또 군사를 요구하자, 신류가 혜산 첨사(惠山僉使)에서 북우후로 옮겨 임명되어 북쪽 변경의 총수 200명과 표하(標下), 기수(旗手), 고수(鼓手), 화정(火丁) 60명을 뽑아 3개월의 군량을 가지고 갔다. 이해 3월 1일에 두만강을 건너 19일에 영고탑에 도달하고 6월 10일에 흑룡강에 이르렀다. 강은 너비가 20여 리나 되는 데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고 강물 색깔이 칠흑 같았는데, 물고기와 강가의 짐승들도 모두 검은색이었다. 적은 흑룡강 하류에서 왔는데 그들의 배는 모두 자작나무 껍질을 겹씌운 것이었다. 우리나라 부장(部將) 배시황(裵是鎤)과 유응천(劉應天) 등이 적선에 불화살을 쏘아 붙이자 일시에 불이 번져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적은 키가 10척이나 되고 깊숙한 눈에 머리카락이 붉었으며 드리운 수염이 어깨를 덮었다. 그들의 화포는 도화선을 쓰지 않고 산호석(珊瑚石)을 화문(火門)에 붙여 놓고, 또 용두(龍頭)의 위에 금수를 달아 놓아서 용두를 떨구면 불이 일어나 탄환이 발사되었다. 그 배의 쇠닻은 열 명이서도 들어 올릴 수 없었는데, 포로로 잡은 적은 마치 지푸라기를 집듯 한 번에 들어 올렸다. 우리 군대는 전사자가 8명이고 부상자도 몇 명 있었다.

7월 10일에 승전보를 올리고 회군하여 9월 27일에 영고탑에 이르렀다. 청나라 장수가 배시황을 초청해 자기 집으로 가서 세 아내를 보였는데, 세 아내는 한 팔을 올리고 한 팔을 내려 예를 하고서 나아와 얼굴을 마주하고 음식을 차려 대접했다. 11월 18일에 영고탑을 떠나 12월 15일에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 다음 해 청나라는 전사자의 집에는 은 30냥씩, 부상자 25인에게는 은을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 조선으로 돌아오는 사신 편에 부쳐 보냈다.”

《청일통지》에 말하였다.

“흑룡강에는 국초에 색륜과 타호이(打虎爾) 두 부족이 있었는데 결국 태종 문황제에게 복속했다. 악라사(鄂羅斯 러시아) 사람 나찰(羅刹)이 아극살 지역에 성을 쌓고 색륜과 타호이를 침략하였으므로, 강희 22년(1683)에 장군과 부도통(副都統)을 두어 성을 쌓고 지키게 하였다. 25년에 나찰을 쳐서 그 성을 함락하였고, 28년에 격이필제하에 대신을 보내 강가에 비석을 세워 경계로 삼았다.”

살펴보건대 신류가 기록한 “차한은 나선이다.”라고 한 것은 나찰을 가리킨 듯하고, 왈개, 개부락, 퍅개 부류는 색륜과 타호이인 듯하다. 우리 효종 9년(1658)은 청나라 순치 15년이다. 생각건대 그 당시 나찰이 흑룡강 지역을 침범하여 괴롭히자 청의 요청으로 군대를 징발하여 토벌한 사건이 있었고, 강희 연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평정되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흑룡강까지 가서 악라사와 싸운 것 또한 초유의 일이었다.

[-D001] 신류(申瀏) : 

1619~1680. 1656년 혜산진 첨절제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함경북도 병마우후가 되었다. 1658년 나선 정벌에 참가하였고 저서로 이때의 일을 기록한 《북정일기(北征日記)》가 있다.

[-D002] 차한기략(車漢記略) : 

‘차한기(車漢記)’ 또는 ‘차한기략(車漢記略)’이라는 제목의 책은 확인되지 않는다. 차한(車漢)은 악라사(鄂羅斯), 나선(羅禪), 아라사(俄羅斯) 등과 함께 러시아를 가리키는 말인데, 유득공이 러시아에 대한 기록이라는 의미로 인용한 것인지, 직접 열람한 책의 이름을 쓴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같은 내용이 《성호사설》 권8 〈차한일기(車漢日記)〉에 보인다.

[-D003] 변급() : 

조선 효종 때의 무관으로, 나선 정벌 때의 지휘관이다. 1654년 함경도 병마우후로 있다가 나선 정벌에 출전, 영고탑에서 청군과 합류하여 흑룡강에 이르러 러시아군을 맞아 큰 전과를 올리고 개선하였다.

[-D004] 후통강(厚通江) : 

지금의 송화강이다.

[-D005] 금수(金燧) : 

화경(火鏡)의 일종으로 햇빛을 모아 불을 일으키는 도구이다.

[-D006] 색륜(索倫) : 

남방 퉁구스족의 일파로 아무르강의 남방에 분포한다.

[-D007]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 : 

재위 1636~1643. 청나라 제2대 황제로, 청 태조의 여덟째 아들이다.

[-D008] 아극살(雅克薩) : 

지금의 러시아 알바진 지역, 흑룡강 유역이다.

[-D009] 격이필제하(格爾必齊河) : 

흑룡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오륜목하(烏倫穆河) 부근의 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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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당필기 2

남양 바다 속의 기둥〔南陽海中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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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의 바다 가운데 기둥이 있는데 우뚝 서서 높고 장엄하며 멀리서 바라보면 검은색이라 구리 기둥인지 돌기둥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기둥에는 ‘연초(燕初)’라는 두 글자가 예서로 크게 새겨져 있다. 바닷물이 북쪽에서 흘러와 이 기둥 때문에 갈라지며 흰 물결이 마치 하얀 솜같이 일어난다. 뱃사람들이 그곳을 지날 때는 벌벌 떨며 기둥의 동쪽을 따라가는데 기둥 서쪽으로 나가면 표류하게 된다고 한다.

살펴보건대 ‘연초’란 연나라 초기 혹은 연나라 초입이라는 말인 듯하다. 하지만 춘추 시대의 연나라나 노관의 연나라, 모용의 연나라가 여기까지 그 영토를 넓혔던 적은 없으니 이상한 일이다. 진사 김안기(金安基)가 이 기둥을 보고 나에게 말해 주었다.

[-D001] 남양(南陽) :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소재지이다. 유득공은 어렸을 때 외가에서 잠시 자란 적이 있는데 그의 외가가 여기에 있었다. 《泠齋集 卷6 先妣行狀》

[-D002] 노관의 연나라 : 

노관(盧綰)은 한(漢) 고조와 한동네에서 한날 태어나 아주 가깝게 지낸 사람이다. 한 고조를 따라 천하를 통일하고 연왕(燕王)에 봉해졌으나, 후에 유씨(劉氏) 아닌 제후들이 차례로 제거되자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여 동호로왕(東胡盧王)이 되었다. 《史記 盧綰列傳》

[-D003] 모용의 연나라 : 

오호십육국 중 모용황(慕容皝)이 세운 전연(前燕)을 말한다. 후에 전진(前秦)의 왕인 부견(苻堅)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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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당필기 2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하고 세운 비석〔大唐平百濟國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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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황제가 모든 나라에 조회를 받고 온갖 생령을 다스리며, 사해 안팎을 맑게 하고 천하 질서를 잘 유지하며, 광대한 천지 가운데 자리를 잡아 경계를 넓혀 간 바를 살펴보건대, 칠덕을 드날려 머나먼 지역을 통치하고 오병을 번득여 변방을 조용하게 만들지 않은 적이 없었다. 비록 질과 이 궤도가 다르고 걷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여 길이 다르더라도 읍양과 전쟁, 수종과 혁명의 어느 경우든 모두 신묘한 무용(武勇)을 써서 병기를 거두지 않았다. 이는 흉수에서 재앙을 끼치다가 구영이 마침내 주륙당하고 동정호에서 반역을 일으켰다가 삼묘가 주살된 데에서 알 수 있다.

천년을 살피고 만고를 회상해 보니, 당도고는 한나라를 대신하고 사마씨는 조씨의 위나라를 계승하였다. 착문의 임무를 중하게 여기고 추곡의 예를 높인 경우로는,  복파가 교지국에 구리 기둥을 주조해 세우고  거기가 연연산의 돌에다 공을 새겼다. 그러나 끝내 제해에서 날뛰는 고래를 뒤집어엎지 못하였고 낭산에서 치달리는  돼지를 끊어 없애지 못하였다. 하물며 구수는 닳아 없어져 명성은 적막하고 원정은 전하지 않아 역사서에 기록할 것이 없음에랴.

어리석은 이 오랑캐는 섬에서 황제의 명을 훔쳐 구이(九夷) 요새로 삼고   멀리 떨어져 험난한 지세를 믿고 감히 천상(天常) 어지럽혔다동쪽으로는 친한 이웃을 쳤고 최근에는 황제의 밝은 조서를 위반하였으며북으로는 반역자들과 연합하여 멀리 사나운 소리에 호응하였다. 게다가 밖으로는 직언하는 신하를 버리고 안으로는 요망한 부녀를 믿어, 형률과 처벌은 오직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에게 내리고 총애와 신임은 반드시 아첨하고 알랑대는 신하에게 먼저 가해져 노처녀는 원망이 맺히고 길쌈하는 부녀자는 슬픔을 품었다.

우리 황제께서는 성현을 체득해서 존귀한 자리에 오르시고  가지 에 능통하여 표준을 세우셨으며, 성현의 상을 지녀 훌륭한 자손을 낳고 제왕의 상에 광채가 빛나셨다. 그리고 오서를 거두어 백신(百神)에게 조회하고 만물을 신묘하게 하여 육변(六辨)을 타서 서북쪽에서는 하늘 기둥을 바르게 하고 동남쪽에서는 땅의 을 돌리셨다. 용도를 펼치고 봉기를 모으며 금경을 매달고 옥촉을 가지런히  것은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에서 죽어 가던 물고기를 구해 주듯, 기울어진 둥지에서 위태롭던 새알을 건져 주듯 하셨다. 이 유민을 불쌍히 여기고 이 흉악한 무리에게 분노하시어, 이에 백성을 위로하고 죄지은 군주를 치는 일을 직접 하지 않고 먼저 장수에게 명하셨다.

사지절(使持節) 신구ㆍ우이ㆍ마한ㆍ웅진 등 일십사도 대총관(神丘嵎夷馬韓熊津等一十四道大摠管)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상주국(上柱國) 형국공(邢國公) 소정방(蘇定方)은 증성에서 깊은 모함을 여러 번 받았고 위수에서 긴 파란을 일으켰으며, 무장에서 뛰어난 계략을 조정하였고 문창에서 빼어난 기를 드러내었다. 이릉(李陵)과 곽거병(霍去病)을 능가하여 쫓아오지 못하게 하였고 팽월(彭越)과 한신(韓信)을 굽어보아 높이 바라보도록 하였다. 온몸에 담력이 넘치던 조운(趙雲)처럼 용맹이 삼군에 으뜸이었고, 만 명을 대적하는 관우처럼 그 명성이 백대에 제일이었다. 몸을 던져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뜻은 쏟아지는 화살을 무릅써 더욱 견고하였고, 삶을 가볍게 여기고 의를 중시하는 마음은 선봉을 맡아 빼앗기기 어려웠다. 마음에 거울이 달려 있어 귀신도 그 모습을 감출 수 없었고 자질은 소나무와 대나무보다 뛰어나 바람과 서리도 그 본색을 바꿀 수 없었다. 사졸을 길러 변방을 다스릴 때는 사지를 삼가고 삼혹을 제거하였다. 얼음 같은 샘물을 돌아보아 고결함을 드러내고 서리 맞은 측백을 품어 곧은 절개를 굳게 하였다. 말을 하지 않아도 시서(詩書)와 부합하였고 행하지 않아도 법도에 딱 맞았다. 흰 구름을 거느려 상쾌함을 함께하였고 푸른 소나무와 더불어 고고함을 다투었으니, 멀리 이전의 사람을 생각건대 모두 부끄러운 마음이 들 법하였다.

부대총관(副大摠管)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상주국 하박공(下博公) 유백영(劉伯英)은 위로는 - 원문 5, 6자 결락 - 낭묘(廊廟)의 재주를 자부하고 장상(將相)의 기량을 품었다. 말은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고 행동은 군사의 법칙이 되었으며, 말은 베와 비단처럼 따스하고 기상은 지초와 난초처럼 향기로웠다. 공적은 기상에 드러나고 격조는 종률(鍾律)에 잘 어울렸다. 평소의 생활을 만절(晩節)보다 중히 여겼고 한 자의 옥을 촌음(寸陰)보다 가볍게 여겼다. 외효의 진흙을 깨트린 공훈을 세우고도 항상 부족하게 여겼고 조(趙)를 평정한 계책을 세우고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부대총관(副大摠管) 사지절 농주제군사(隴州諸軍事) 농주자사(隴州刺史) 상주국 안이공(安夷公) 동보량(董寶亮)은 - 원문 1, 2자 결락 - 뜻을 드날리고 웅대한 포부를 우뚝 세웠다. 재주는 책략을 겸하였고 계책은 - 원문 2, 3자 결락 - 움직였다. - 원문 2, 3자 결락 - 매실을 생각하게 하여 위나라 군사로 하여금 갈증을 멎게 하였고, 솜을 두는 수고로움 없이도 마침내 초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추위를 잊게 하였다.

부대총관(副大摠管) 좌령군장군(左領軍將軍) 김인문(金仁問)은 기품과 도량이 온아하고 기국과 식견이 침착하고 굳세었다. 소인의 자잘한 행위는 없었고 군자의 고고한 풍모를 지녔으며, 무략은 전쟁을 그치게 하였고 문치는 역시 먼 지방 사람까지 회유하였다.

행군장사(行軍長史) 중서사인(中書舍人) 양행의(梁行儀)는 구름이 수려한 모습을 토해내고 태양이 밝은 빛을 드날리듯 풍모는 벼슬아치를 제압하고 도는 아름다운 풍속을 비추었으며 감식안은 허소(許劭)와 곽태(郭泰)보다 뛰어나고 명망은 순숙(荀淑)과 배도(裴度)보다 무거웠다. 변설은 파도를 올라타 학문의 바다에서 구류(九流)를 장악하고, 문장은 예리함을 드러내어 문단에서 칠택을 차지했다. - 원문 1, 2자 결락 - 태부(太傅)의 심오한 계책으로도 말고삐를 잡는 것조차 감당할 수 없을 터인데,  진남의 원대한 계략이라 해서 수레바퀴를 밀 수 있겠는가. 잠시 봉지에서 노닐며 고래가 날뛰는 바다를 맑게 하였다.

형국공은 비책을 운용하고 굳센 용맹을 뽐내어, 음우(陰羽)는 언월(偃月)의 계획을 열고 양문(陽文)은 샛별의 기운을 머금었다. 〈용도〉와 〈표도〉는 반드시 마음에서 드러나고 현녀와 황공이 모두 신묘한 운용에 모였다. 하물며 하늘에 닿도록 개미처럼 모여들고 땅을 빙 둘러 벌 떼처럼 날아드는 것이 단호가 모래를 머금은 것과 유사하고 장사가 안개를 토해 내는 것과 비슷하여, 군영을 연결하면 시랑이 길에 꽉 차고 진을 치면 효경이 산에 가득함에 있어서랴. 이런 까닭으로 흉악한 무리들이 이 궁벽하고 험한 곳을 지켜서, 매달린 줄이 거의 끊어지려는데 천균을 매달아 떨어뜨리고 포갠 바둑돌이 이미 위태로운데 구정(九鼎)으로 짓누르는 격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가을 풀이 시들어 차가운 산이 고요하고 싸늘한 폭풍이 몰아쳐서 살기가 사나워졌다. 군사들의 날랜 발걸음은 번갯불과 다투어 날고, 둥둥 울리는 북소리는 세찬 우레와 다투어 진동하였다. 풍륭(豐隆 우레)에게 명하여 뒤쪽에 서게 하고, 열결(列缺 번개)에게 명하여 선봉이 되게 하였다. 요사한 기운과 요망한 기운을 창으로 쓸어버리고, 높은 성과 가파른 성가퀴를 충붕으로 부수었다.

좌장군총관(左將軍摠管) 우둔위낭장(右屯衛郞將) 상주국 축아사(祝阿師)와 우일군총관(右一軍摠管) 사지절(使持節) 치주자사(淄州刺史) 상주국 우원사(于元嗣)는 지역은 관하(關河)를 차지하였고, 재주는 문무를 포괄하였다. 산서(山西)의 건장한 기운을 지니고 기북(冀北)의 뜬구름을 타 올라서, 호흡을 하면 강과 바다가 파도를 멈추고 호통을 치면 바람과 번개 소리가 끊겼다.

우이도부총관(嵎夷道副摠管) 우무후중랑장(右武侯中郞將) 상주국 조계숙(曹繼叔)은 오랫동안 나라의 큰일에 참여하여 온갖 어려움을 다 맛보았는데, 억지로  먹던 염파와 다르고 원로 신하였던 조충국과 같았다.

행군장사(行軍長史) 기주사마(岐州司馬) 두상(杜爽)은 자질은 아름다운 봉우리에서 빛났고 화려한 명성은 계수나무 동산에 널리 퍼졌다. 바람을 따르고 번개를 쫓아서 서해에서 빠른 말을 타고 질주했으며, 구름을 밀치고 물을 박차 남명(南溟)에서 굳센 날갯죽지를 치니, 천리마의 발이 힘껏 치달아 백제를 빼앗을 만하였다.

우일군총관(右一軍摠管) 선위장군(宣威將軍) 행좌효위낭장(行左驍衛郞將) 상주국 유인원(劉仁願)은 효성을 바탕으로 충을 행하고 집에서 시작해서 나라에 모범이 되었다. 어려서는 주공과 공자의 가르침을 듣고 만년에는 손자와 오자의 병서를 익혀서 이미 영특하고 용맹한 재주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문관의 도를 겸비하였다. 형국공이 성지(聖旨)를 받들어 법규를 공포하고 시행하는 일을 맡긴즉 황금을 한낱 낱알처럼, 귀한 말도 값싼 양처럼 여기게끔 하는 것이었다.

우무위중랑장(右武衛中郞將) 김양도(金良圖)와 좌일군총관(左一軍摠管) 사지절 기주자사(沂州刺史) 상주국 마연경(馬延卿)은 모두 철석같은 마음을 품고서 각자 새매 같은 맹렬한 뜻을 가다듬었으며, 삼하의 억센 군사를 거느리고 육군의 좋은 집안 자제를 거느렸다.

형국공은 위로는 신묘한 계책을 받들고 아래로는 군대 지휘에 전념하였다. 중권을 이끌고 적진을 함락하기도 하고 후경을 이끌고 선봉에 서기도 하여, 하늘로 솟구치고 땅으로 들어가는 기묘한 계책은 천변만화하였고, 멀리까지 이르고 깊은 데까지 파고드는 신묘한 계략은 번개처럼 일어나고 바람처럼 내달렸다. - 원문 1, 2자 결락 - 세월이 바뀌어도 영용한 명성이 도로에 가득하였다. 형국공은 어질기가 전선(轉扇)과 같고 은혜는 투료보다 깊었다. 명을 어기는 자는 가을 서리와 같은 위엄으로 엄하게 처리하였고, 귀순하는 자는 봄 이슬과 같은 은택으로 포용하였다. 한 번 출병하여 구이를 평정하고, 두 번 출병하여 삼한을 평정하였다. 유홍의 서신을 내리자 천 개의 성이 그 덕을 우러러보고, 노중련의 화살을 쏘자 만 리가 모두 그 은혜에 감사하였다. 백제의 왕 부여의자(扶餘義慈)와 태자 융(隆) 외에 부여효 등 13인이 대수령(大首領) 대좌평(大佐平)인 사타천복, 국변성(國辯成) 이하 700여 명과 함께 깊은 궁중에 있다가 모두 포로로 잡혔다. 말가죽을 씌우고 소가 끄는 수레에 실어 사훈에 올리고 삼가 청묘(淸廟 종묘)에 바쳤다. 이에 사나운 풍속을 바꾸어 현묘한 통치에 젖어 들게 하였다.

휘장을 걷고 면복(冕服) 보일 사람은 먼저 진실되고 성실한 자를 택하고, 생선을 삶고 비단옷을 지을 사람은 반드시 어질고 착한 사람으로 선발해야 한다. 그래야 거의 제후로 하여금 공적이 공수와 황패보다 훨씬 뛰어나게 하고수령으로 하여금 명성이 탁무와 노공보다 높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무릇 5도독, 37주, 250현을 두었으며, 74만 호 620만 구(口)를 각각 편호(編戶)로 정리하여 모두 오랑캐의 풍속을 바꾸게 하였다.

무릇 동관에 쓰고 남궁에 기록하는 것은 그 선을 드러내기 위해서이고, 이정(彝鼎)에 새기고 경종(景鍾)에 새기는 것은 그 공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능주장사 판병조(陵州長史判兵曹) 하수량(賀遂亮)은 외람되이 용렬한 재주로 문한의 직임을 잘못 맡았다. 학문은 조두(俎豆)를 가벼이 여기고 기운은 풍운을 중하게 여겼다. 직함을 장군으로 불려 염파와 나란하기를 원했고 벼슬은 박사로 불려 부끄럽게도 가의(賈誼)와 우열을 다투었다. 쇠약한 용모라 여기지 않고 오히려 씩씩한 절개를 품고 해외에서 창을 들고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 - 원문 1, 2자 결락 - 적들 속에서 아홉 번 도적을 물리쳤다. 윤옹귀 같은 인물을 세움에 치우침이 없게 하기 위해 쓸데없는 말을 버리고 삼가 직필을 휘둘러 단지 이룬 일만 쓰고 부화한 말은 취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바다가 뽕나무 밭으로 변하도록 천지의 영원함과 함께하고 모래톱이 우거진 섬으로 변하도록 일월과 함께 장구하리라. 

호서의 부여현(扶餘縣)은 백제의 옛 도읍이다. 고을 남쪽 2리에 빙 둘러 글을 새긴 석탑이 있는데, 사람들은 평제탑(平濟塔)이라 부른다. 글이 웅혼하고 필체가 힘차서 당나라 비석 중에서도 으뜸이다. 이는 서안부(西安府)에서 두루 찾아봐도 얻기 어려운데, 어찌 해외에 있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고을 북쪽 3리에 또 유인원의 공적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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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당필기 2

풍홍의 무덤〔馮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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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용연(成龍淵 성대중)은 운산 군수(雲山郡守)를 지냈다. 그가 해 준 말이다.

“고을에 큰 무덤이 있는데 황제총(皇帝冢)이라고 하네. 돌을 쌓아 만든 것인데, 한쪽 모퉁이가 무너져 내렸기에 들여다보니 움푹하게 속이 텅 비었더군. 사람들은 황제란 곧 위만(衛滿)이라 하는데, 어떤 이는 풍홍(馮弘)이라고도 하네.”

살펴보건대 위만은 황제를 칭한 적이 없다. 풍홍은 고구려에 맞아들여져 평곽(平郭)에서 살다가 얼마 후 북풍(北豐)으로 옮겨졌다. 장수왕이 장군 손수(孫漱)와 고구(高仇) 등을 보내 북풍에 있는 풍홍을 죽였다. 시호는 소성(昭成)이다. 운산이 바로 고구려의 북풍이다.

[-D001] 풍홍의 무덤 : 

풍홍(馮弘, ?~438)은 십육국 시기 북연의 군주이다. 북연의 문성제 풍발(馮跋)의 아우로, 형이 죽자 그 조카를 죽이고 찬탈해서 6년간 재위하였다. 437년 북위의 침략으로 쫓겨나 고구려로 도망했다가 장수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당시 풍홍의 무덤은 위만의 무덤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성대중의 《청성잡기》 권4에도 이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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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당필기 2

가체를 금하다〔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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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사》 〈백제열전〉에 “백제 여인은 머리를 땋아 뒤쪽으로 늘어뜨리고, 혼인한 뒤에는 양 갈래로 땋아서 머리 위에 얹는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풍속도 그러하다. 어떤 이는 “고려가 몽고에서 배운 것이다.”라고 한다. 내가 몽고 여인을 보니 과연 모습이 같았다. 그러나 원래 백제의 풍속이라면 우리나라에서 따라 한 지 오래이니 몽고가 고려의 몸치장을 배운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연경에 있을 때 나양봉의 집에서 한황의 〈회홀무녀도(回鶻舞女圖)〉를 보았는데, 머리카락을 땋아서 머리에 빙 두른 것이 또한 우리나라 부녀자들과 비슷했다. 회홀(回鶻 위구르)이란 지금의 회회(回回)이다. 나는 또 회회의 여인을 본 적이 있는데, 머리에 뾰족한 모자를 쓰고 두 갈래로 땋은 머리를 어깨 뒤로 늘어뜨린 것이 마치 남과 경쟁하다가 추월당해 쪽 찐 머리가 흘러내린 것 같았다. 대개 머리를 땋는 것은 중국 제도는 아니다.

요즈음 풍성한 가체를 좋아해서 구름을 포갠 듯 안개를 두른 듯이 하느라 걸핏하면 천금을 들인다. 나이 어린 부녀자들은 목이 약해서 감당하지 못하는데도 가체가 작은 것을 싫어하니, 영조 때는 이 풍속을 금지하기도 했다. 금상(정조) 12년(1788)에 《신금사목》을 반포하고 나서야 비로소 부녀자들이 쪽을 찌고 족두리를 쓰게 되었다. 천한 자들은 여전히 옛 풍속을 따르지만 가체를 크게 하지는 못한다.

[-D001] 나양봉(羅兩峯) : 

나빙(羅聘, 1733~1799)으로, 자는 돈부(遯夫), 호는 양봉이다. 청나라의 화가로, 양주팔괴(揚州八怪)의 한 사람인 금농(金農)의 제자이다.

[-D002] 한황(韓滉) : 

723~787. 당나라 때 화가이자 서예가이다. 인물 및 농촌 풍경과 함께 소, 양 등의 동물을 특히 잘 그렸다.

[-D003] 신금사목(申禁事目) : 

《가체신금사목(加髢申禁事目)》을 말한다. 영ㆍ정조 시기 부녀자들의 가체가 성행하고 이로 인해 사치하는 풍속이 심해졌다. 이에 1788년 이 사목을 제정 및 반포하여 사대부 부인을 비롯한 각 계층 부녀자의 머리 양식을 규정하고 가체를 금하였다. 1책으로 뒤에 한글 번역이 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