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경(燕京)은 몽고(蒙古)ㆍ달자(韃子)와 지경을 연하고 있어 가까우면 100리가 되고 멀어도 300리에 불과하다.

2023. 5. 4. 19:43북경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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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견잡기(聞見雜記) / [잡기(雜記)]

문견잡기(聞見雜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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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燕京)은 옛날의 유주(幽州)이다. 역대의 연혁(沿革)을 따지면 명 나라 초기에 순천부(順天府)가 되었고 영락(永樂) 연간에 북경(北京)이 되었는데, 청(淸) 나라가 또 그대로 답습, 순천부(順天府)로 하여 경사(京師)에 예속시켰다. 지세(地勢)로 논하면 중원(中原)의 동북쪽에 위치하여 태항산(太行山)ㆍ연연산(燕然山)이 구불구불 북쪽을 두르고, 끝없이 넓은 바다가 그 동쪽에 흐르고 있어 천하의 대세가 모두 품 안으로 돌아온다. 참으로 패왕(伯王)의 도읍지이다. 그러나 이적(夷狄)과 화하(華夏)의 경계가 그다지 서로 멀지 않아서 북으로 거용관(居庸關)을 접하고 서로는 자형관(紫荊關)에 가깝고, 몽고(蒙古)ㆍ달자(韃子)와 지경을 연하고 있어 가까우면 100리가 되고 멀어도 300리에 불과하다. 융적(戎狄)이 중국에 들어와 주인이 된 까닭을 살펴보면 너무 가까운 때문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연경(燕京)의 노정(路程)은, 우리 한양에서 의주(義州)까지가 1070리, 의주에서 봉성(鳳城)까지가 150리, 봉성에서 심양까지가 443리, 심양에서 산해관까지가 803리, 산해관에서 연경까지가 660리, 통산하여 3126리이니, 우리 노정을 제하여도 실로 2050리가 되는 것이다.
이를 둘로 나누면 십삼산(十三山)이 꼭 절반인데, 셋으로 나누면 구련성(九連城)부터 십리보(十里堡)까지를 동팔참(東八站)이라 일컫는다. 이것이 첫단계가 된다. 지나는 길은 모든 산골짜기가 험준하고 냇물이 사납고 급하다. 책문(柵門) 밖은 무인지경이어서 호랑이와 표범이 멋대로 돌아다니고 갈대숲이 무성한데, 다니는 자는 2참을 노숙하여야 한다. 그리고 책문 안의 6참은 거주민이 있기는 하나 본래 산협이어서 촌락이 허술하다. 대개 8참의 산세는 우리나라와 같아 간혹 들이 펼쳐진 곳이 있으며 산천이 대부분 명랑하고 수려하다. 토양도 비옥하여 모두 경작할 만한 땅이고 구릉이 깊숙하여 살 만한 곳도 많다. 구련(九連)의 송골산(松鶻山), 봉성(鳳城)의 봉황산(鳳凰山) 및 금석산(金石山) 등 여러 산이 깎은 듯이 우뚝 서서 돌봉우리가 아스라이 빼어났고, 기괴한 총수산(蔥秀山)의 암석(岩石), 맑고 고운 온정(溫井)의 산세는 북으로 가는 동안 수천 리에 걸쳐 무엇과도 견줄 만한 것이 없을 만큼 아름답다. 대장령(大長嶺)ㆍ소장령(小長嶺)ㆍ송참(松站)ㆍ장항(獐項) 등은 작은 토산이고, 소위 분수령(分水嶺)이라는 것에 이르면 큰 산이 남쪽으로 달려 비로소 과협(裹峽 산 고개가 잘룩하게 되어 있는 곳)이 되었기 때문에 그 뒤가 연산관(連山關)이 된다. 여기가 곧 예전의 아골관(鴉鶻關)이니 실로 명 나라 때의 관방(關防)이었던 곳이다. 또 그 뒤에 잇달아 청석(靑石)ㆍ회령(會寧) 두 고개가 있는데 매우 험준하며, 낭자산(狼子山) 역시 큰 산협으로 요동 평야에 들어서면 이런 고개가 없다.
심양에서 산해관까지는 둘째 단계가 된다. 냉정(冷井)을 지난 이후에는 산록(山麓)은 끝나고 요동 평야가 전개되어 까마득하게 가이없다. 400여 리를 나아가도 지세가 평탄하여 언덕 하나 없으므로 장마가 지면 물이 나갈 곳이 없어 진흙이 무릎까지 빠진다. 그래서 거마(車馬)가 다니기 어렵다. 소흑산(小黑山)에서 산해관까지는 간혹 언덕이 이어져 산이 되기도 했는데 역시 높지는 않다.
산해관 안이 마지막 단계가 된다. 노숙하는 2참을 제외하고 3단계를 합하면 31참이 된다. 예전에 찰원(擦院)이 있었는데 무너져 폐지된 지가 이미 오래이다. 압록강을 건넌 이후로 요동까지는 건해방(乾亥方)을 향해 가고, 여기부터 고가자(孤家子)까지는 혹 술건방(戌乾方)으로 가기도 한다. 그 후는 계속 곤신방(坤申方)을 향하여 간다. 송산보(松山堡)에서 고교보(高橋堡)까지는 미정방(未丁方)을 향하여 가고, 여기를 지나서 중후소(中後所)까지는 혹은 미방(未方) 혹은 곤신방을 향하여 간다. 또 그 뒤에는 혹은 유방(酉方) 혹은 신방(辛方)으로 향하고, 계주(薊州)를 지나 통주(通州)까지는 또 연속 곤신방을 향하여 간다.

심양 이후에는 광녕(廣寧)의 의무려산(醫巫閭山) 하나가 태항산(太行山)에서 1000여 리를 뻗어 와서 유주(幽州)의 주산이 되었다. 그러나 태항산의 어느 지점에서 처음 떨어져 나왔고 또 그 산맥이 어느 곳으로 뻗어나갔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대황기보(大黃旗堡)에서부터 서북방으로 멀리 바라보이는 지점에 막아 섰으며, 그 밖에는 다시 다른 봉우리가 없다. 길옆에 보이는 것들은 산세가 낮고 작은데, 신광녕(新廣寧)에 이르러 조금 높고 크다. 그리하여 그 아래 북진묘(北鎭廟)가 세워졌다. 연산역(連山驛)에 이르니 산세가 조금 높으나 낮은 곳이 더 많더니 동관(東關)을 지나자 다시 조금 높아졌다. 십삼산 이전은 남쪽이 큰 들이어서 자갈로 된 산기슭이 없더니, 십삼산에 이르자 작은 모래가 남쪽으로 내려가 들 가운데에 봉우리를 이루었다. 여기서부터 언덕이 서로 연속되는데, 그중에도 서북간의 한 산록이 송산보(松山堡)에서 바라보면 가장 높고 봉우리가 또한 꽤 수려하다. 이것을 봉래산(蓬萊山)이라고 부른다.
관(關) 밖에서 의무려산이 평지에 봉우리를 일으킨 것은 역로에서 오직 십삼산과 이 봉우리뿐이다. 영녕사(永寧寺) 뒤의 한 장대(將臺) 봉우리가 또한 꽤 높은데, 소위 홍라산(紅螺山)이란 것으로 의무려산의 한 지록(枝麓)이며, 면주(綿州) 서쪽 지경에서 실로 크고 작은 두 산이 되었다. 주위는 거의 100여 리에 뻗쳤다 하지만 경치를 일컬을 만한 것이 없다. 관내(關內)의 홍라산은 회유현(懷柔縣) 북쪽에 있는데 역시 태항산의 여록(餘麓)이다. 돌산이 매우 높고 정상에 못이 있는데, 못 속에 2개의 붉은 소라가 있어 불꽃 같은 빛이 숲과 산기슭에 쏘아 비치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라 한다.
요동의 천산(千山)과 창려현(昌黎縣)의 문필봉(文筆峯)이 더욱 수려하고, 관내에서는 각산(角山)이 가장 높다. 그 이후에는 산맥이 꾸불꾸불 멀리 둘러 잠깐 숨었다 잠깐 나타나고 낮았다 높았다 하며 노봉구(蘆峯口)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보이지 않는다. 대체로 연경(燕京)에 가는 자는 이 산을 매양 오른편에 끼고 가는데, 큰길에서 거리가 멀어야 5, 60리이고 가까우면 2, 30리도 미치지 못한다.
관(關) 밖의 물은, 면주(綿州)의 대릉하(大凌河)ㆍ소릉하(小凌河)와 심양의 혼하(渾河)ㆍ주류하(周流河)와 요동의 태자하(太子河)를 큰 강이라 하고, 삼차(三叉)ㆍ팔도(八渡)ㆍ옹북하(瓮北河)의 물도 모두 동팔참(東八站)의 물이다. 관내(關內)의 물은 계주(薊州)의 어양하(漁陽河)와 삼하(三河)의 호타하(滹沱河)가 조금 큰데, 모두 다리가 있다. 그리고 모두 시냇물에 불과하다. 어수(漁水)는 어산(漁山)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영평(永平)의 난하(灤河)ㆍ청룡하(靑龍河)는 모두 큰물이라고 일컫는데 빛이 대단히 푸르고, 심하(深河)는 난하(灤河)에 비하면 조금 작은데 물이 맑고 모래가 희어서 좋다. 강(江)이니 하(河)니 하는 것이 큰것도 우리나라의 임진강에 미치지 못하고, 그 나머지는 개천 물에 불과하다. 그래서 물이 가득 차면 배를 타는 곳도 있지만, 물이 마르면 모두 옷을 걷고 건널 만하다. 대체로 작은 여울을 하(河)라고 이름하는 것이 곳곳에 있으니, 예전 말에 ‘북방의 흐르는 물을 모두 하라고 한다.’ 한 것이 그럴 듯하다. 태자하(太子河)는 혼하(渾河)ㆍ요하(遼河) 여러 물의 하류를 받고, 삼차하(三叉河)는 또 태자하의 하류를 받아 바다로 들어가기 때문에 삼차하라고 한다. 이 하수의 좌우가 곧 요동ㆍ요서(遼西)로 갈라진 것인데,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에 진펄 200여 리를 흙으로 깔아 다리를 만들어 건넜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산해관 안팎의 여러 산이 모두 태항산에서 나왔는데, 태항산은 전부 돌산이기 때문에 이 산을 조산(祖山)으로 한 산은 바위가 높고 험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먼 멧부리라도 추악한 형세를 벗어나서 모두 우리나라의 삼각산, 도봉산 같고 토산(土山)은 보이지 않는다. 서산(西山)에 이르면 석재(石材)가 더욱 많아서 공사(公私)의 비석과 집들에 각종 돌로 만들어진 것이 모두 웅장하고 사치스럽다. 개천을 쌓고 길에 깔고 교량(橋梁)ㆍ성지(城池)에 쓰는 것까지 모두가 거대한 돌이고, 궁궐ㆍ단묘(壇廟)에 쓴 것은 모두 연척(碝磩)이라는 돌로서 그 빛이 옥 같다. 그래서 서산(西山)에서 취하지 않는 것이 없다. 모용씨(慕容氏) 이래로 지금까지 캐다가 썼는데도 없어지지 않는다. 안으로 경성(京城)에서 밖으로 관동(關東)까지 돌의 품질이 같으니 모두가 같은 산의 돌인 때문이다.
청석령(靑石嶺)은 돌이 많고 그 빛이 푸른데, 돌결이 매우 부드럽고 미끄러워 벼루를 만들 만하다. 그런데 물에 잠긴 돌은 아름다우나 땅 위에 튀어나온 것은 너무 단단하여 쓸 수가 없다. 봉황산(鳳凰山)부터 요양(遼陽)까지 여러 고을에서 쓴 돌은 모두 이것과 품질이 같으니 역시 같은 산의 돌인 때문이다.

토질은 모두가 푸석푸석한 가는 모래이고, 진흙과 황토는 원래 없다. 들판이 심히 넓게 펼쳐져 있고, 또 점점 바다에 가까워지므로 지기(地氣)가 거칠고 짜서 그러한 것이 아닌가? 흙이 부드럽고 산은 대부분 낭떠러지인데, 연로에서 산사태가 난 곳을 보지 못하였다. 모두 석봉(石峯)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수원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이상한 일이다.
큰길에서 수레바퀴의 자국이 종횡으로 도랑처럼 파졌다. 그것이 모두 부토(浮土)가 되어 바람이 없는 날에도 수레가 다니고 말이 달리면 날리는 모래가 재와 같아서 눈을 뜰 수가 없고, 혹시 바람이 일면 먼지가 하늘을 가려 지척을 분변할 수 없다. 그리고 모래먼지가 붙으면 의복과 안색이 깜짝할 사이에 변할 뿐 아니라 이목구비 곳곳에 들어간다. 그리하여 씻어도 씻어지지 않고 깨물면 우지직 소리가 난다. 시전(市廛)과 인가에 놓아둔 그릇은 항상 닭꼬리로 만든 비로 쉴 새 없이 쓸어 낸다. 북경 성안은 길에 돌조각을 깔았으나 거리 위에는 항상 물을 길어다 놓아두고 자주 물을 뿌린다. 요동 이전은 실로 우리나라 강변과 다름이 없으나 요야(遼野) 이후부터는 이와 같다.

동팔참(東八站)은 물맛이 맑고 시원한데, 심양 이후는 모두 썩은 물이어서 혼탁하고 맛이 나쁘다. 일판문(一板門), 이도정(二道井) 사이가 더욱 심하여 죽을 끓일 수 없을 정도이고, 관내의 물 또한 그러하다. 북경 성안에 이르면 더욱 견디기 어려워서 풍토병이 많이 생긴다. 오직 강과 하수의 물은 맛이 좋고 옥천산(玉泉山) 하류의 물은 아주 맑고 차다. 옥천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인 것이다. 일찍이 들으니, ‘성안의 우물 물맛이 모두 짜고 써서 마실 수 없으되, 오직 옥하(玉河) 동쪽 언덕 위에 있는 첨사부(詹事府) 우물이 맛이 좋아서 길어 가는 사람이 매우 많다.’고 한다. 이것 역시 옥천의 하류여서 그러한 것이리라.

역로의 성지(城池)ㆍ관애(關隘)로 말하면, 구련성이 요(遼)와 금(金) 나라가 비로소 9성(城)을 쌓아 인접한 고려(高麗)와 싸우다가 들어가 지키는 장소로 삼은 곳이다. 원 나라 때에도 역시 여기서 방수(防守)하였는데 명(明) 나라 때에 와서 그 성을 탕참(湯站)으로 물려 쌓았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허물어지고 터만이 남았다.
봉황성(鳳凰城)도 역시 명 나라 때 방수하던 땅인데, 청 나라 사람들이 구련ㆍ탕참을 모두 폐지하고 오로지 이곳을 변문(邊門)으로 삼아 목책(木柵)을 세워 경계를 하였다. 《여지도(輿地圖)》를 상고하면, ‘이 책(柵)이 여기서 남으로는 수십 리를 못 가서 바닷가에 그쳤으나, 북쪽으로는 흥경(興京)을 지나 위원보(威遠堡)에서 동북으로 곧장 혼동강(混同江)을 걸치고 오랄(烏喇 랴오닝 성[遼寧省] 부근) 지방을 둘러나와 객합성(客哈城) 뒤에 그치며, 또 개원(開原)으로부터 서쪽으로 의무려산(醫巫閭山)의 북쪽, 홍라산(紅螺山)의 남쪽을 둘러나와 철원(鐵原)ㆍ광녕(廣寧)ㆍ의주(義州)ㆍ금주(錦州)ㆍ영원(寧遠) 등지를 포함하여 걸쳐서 곧 산해관에 다다라 장성(長城) 밖의 동북변 경계를 만든다. 그리고 각처에 모두 판자문을 설치하여 변문(邊門)이라고 칭한다.’고 했다. 봉황성 변문부터 산해관까지 주위가 무릇 1800여 리이고 변문이 모두 17인데, 봉황(鳳凰)ㆍ흥경(興京)ㆍ개원(開原)ㆍ광녕(廣寧)ㆍ의주ㆍ금주ㆍ산해 등 일곱 성장(城將)에게 나누어 붙이었다. 책을 세운 바깥은 모두가 몽고의 경계이다. 이 책문은 곧 우리나라 사람들이 출입하는 변문인데, 관병(官兵)을 두어 진수(鎭守)하고, 부근의 성보(城堡)는 오로지 성수(城守)ㆍ장경(章京)의 관할에 속한다. 변문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봉성(鳳城)이고 하나는 애하(靉河) 또는 애합(愛哈)이라 한다. 그 경계는 동으로 조선(朝鮮)까지가 220리, 동남이 120리이다. 서쪽으로 개평(蓋平), 남으로 바다에 이르렀는데 모두 200리이며, 서남으로 금주(金州) 경계까지 405리, 북으로 흥경(興京) 경계까지 320리, 동북이 205리, 서북으로 성경(盛京) 경계까지 510리, 우장(牛莊) 경계까지 300리이다.

대개 성첩(城堞)은 반드시 정밀하게 다듬은 돌로 먼저 지대(地臺) 6, 7층을 쌓고 그 위에 비로소 네모진 큰 벽돌로 유회(油灰)를 섞어서 안과 밖을 쌓는데, 안과 바깥의 면에 네모진 벽돌 여섯 겹을 쌓고서 그 가운데를 흙으로 채운다. 그래서 안팎의 벽돌은 합하면 12겹이다. 성 쌓는 벽돌은 보통 쓰는 벽돌에 비교하면 넓고 두껍고 대단히 크다. 성 높이는 세 길, 혹은 네 길이 넘으며, 너비는 2장(丈) 5척(尺), 혹은 6장 4척에 이르는데, 모두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넓다. 밖에는 해자를 팠는데 깊이가 대개 한 길이 넘고 너비는 3장 혹은 4, 5장에 이른다. 성문은 모두 안팎의 옹성(瓮城)이 있으며, 성첩에 모두 타구(垜口)ㆍ적루(敵樓)ㆍ각루(角樓)를 만들고 각 문밖에 모두 화포(火砲) 2좌(坐)를 설치하였다. 주위는 큰 성이 15리에 불과하고 작은 성은 6, 7리 혹은 3, 4리이다. 대개 도성(都城)과 궁장(宮墻)은 높고, 쌓은 것은 견고하며, 면(面)마다 깎은 것 같아 발을 붙일 만한 곳이 없다. 우리나라의 성장(城墻)처럼 돌톱니[石齒]가 들락날락하여 딛고 넘을 수가 없다.
심양은 성지(城池)가 심히 웅장하고 내외성(內外城)이 있는데, 성 위는 넓기가 오마대(五馬隊)를 늘어세울 만하며, 주위가 7, 8리나 된다. 산해관은 그 웅장한 것이 심양보다 배나 되고 동서에는 모두 중성(重城)이 있다. 주위는 10리에 가깝고 개천을 깊게 파고 벽을 겹으로 하였으니 참으로 천하의 요해지(要害地)이다. 다만 내외 성첩(城堞)이 간간이 무너진 곳이 많다. 강희(康煕 청 성조) 때에도 이미 그러하였는데, 유령(遺令)으로 수축하지 말라 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대로 내려온다 한다. 무릇 자금성(紫禁城)과 능묘의 곡장(曲墻)은 모두 붉은 흙으로 발랐는데, 저들은 이를 홍토(紅土)라고 한다. 그 품질이 우리나라 번주홍(燔朱紅)보다 나으나 곳에 따라 모두 좋고 나쁜 것이 있어 또한 각각 같지 않다고 한다.

황명(皇明)이 원 나라의 대를 이어 일어났기 때문에, 동북쪽의 외환이 두려워 태조(太祖)가 초기에 북평부(北平府)를 두어 중요한 군사를 주둔시켰다. 그리하여 거용관(居庸關)ㆍ산해관(山海關)으로부터 심양에 이르는 관외(關外) 여러 성보(城堡)는 홍무(洪武) 초년에 설치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건문(建文)에 이르러서는 북방에 편중하였기 때문에 이미 정난(靖難)의 거사가 있었고, 영락(永樂) 이후에는 드디어 남경(南京)을 버리고 연경(燕京)으로 도읍을 옮겨 더욱 동북을 튼튼히 하는데 주력하였다. 역로에서 본 것으로 말하더라도 지난 각참(各站)이 둔위(屯衛)ㆍ성소(城所)가 아니면 반드시 진보(鎭堡)였으니, 수천 리를 뻗치어 성벽[堠障]이 별처럼 벌여 있고 성지(城池)가 바둑처럼 널려 있고 봉화대ㆍ치첩(雉堞 성가퀴)이 이르는 곳마다 서로 바라보이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이것을 쌓는 역사가 장성(長城)을 쌓는 힘에 못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더구나 각처에 양식을 저축하고 군사를 주둔하기에 천하의 힘이 모두 동북에 몰렸기 때문에, 남방이 공허하여 도적이 창궐해도 금하고 제재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청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가만히 앉아서 어부지리(漁夫之利)를 얻게 하였으니, 만리장성을 쌓아 오랑캐를 막다가 도리어 관동(關東) 도적에게 망한 진시황(秦始皇)의 일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나 지금의 형세는 또 이것과 반대이다. 영고탑(寧古塔)과 심양을 저희들의 심복(心腹)으로 믿고 우리 동방은 내지(內地)로 대접할 뿐만 아니라, 약한 나라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보아, 스스로 동북은 다시 다른 걱정이 없다 생각하고 완전히 포기하였다. 그래서 성지를 수축하지 않는 것은 뜻이 있다 하더라도 적을 지키는 것마저 또한 심히 소루하여 영고(寧古)와 오랄(烏喇 랴오닝 성[遼寧省] 부근)에는 주둔한 군사가 심히 적고, 심양에서 관할하는 군사는 3000명에 지나지 않으며, 산해관은 수백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나머지 성지에는 갑군(甲軍) 수십 명을 두어서 장경(章京)과 성수위(城守尉)의 부름에 대비할 뿐이며 더러는 역참(驛站)의 장정 수만큼도 못하다.
몽고는 가장 강하고 크다. 그리고 동북에 가장 가까운데, 그 약속(約束)을 받은 것은 겨우 수백 리 안 약간의 종족일 뿐이나, 이것도 실은 임시로 얽어 놓은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 나머지는 모두 저희들의 강적이니, 어찌 근심이 소홀히 여기는 데서 생기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황명(皇明) 때에 조공하던 길은, 요동을 거쳐 곧장 안산(鞍山)으로 갔었다. 그리고 해주위(海州衛)부터 이하는 모두 바다를 따라갔는데, 지금은 길이 심양으로 나가기 때문에 십삼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동남으로 물빛을 바라본다. 그리고 연이어서 바다를 따라가는데 송산보(松山堡)에 이르면 바닷가가 더욱 가깝다. 관내(關內)에서는 아득하고 멀어서 바라보이지 않으나 대개는 바다가 멀지 않다.
지나다가 망해정(望海亭)에 올라 바라보니 금주(金州)ㆍ개주(蓋州)는 저 위에 있고 등주(登州)ㆍ내주(萊州)는 아래쪽에 있으며, 앞의 남쪽은 바라보아도 끝이 없다. 건너편 언덕은 곧바로 우리나라의 양서(兩西) 연변인데 한 바다가 서로 연하였기 때문에 물빛이 같고 조수도 왕래한다. 지금 이 발해를 천하의 동쪽 대양(大洋)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서쪽에 있고 물빛과 조수도 실상 우리나라 서해와 서로 통한다. 이로 보면 우리 영동(嶺東)의 바다가 참 동해이고, 중국에는 참 동해가 없는 것이 아닌가?

궁궐은 원 나라 사람들이 실로 송 나라 임안(臨安)의 제도를 모방하였기 때문에 극히 장려하였다. 영락(永樂 명 성조)이 영건(營建)할 때에 묘사(廟社)ㆍ교단(郊壇)과 궁전의 각문(各門)을 모두 남경을 모방하여 지었는데 지나치게 굉장하였으며, 다시 황성(皇城) 동남에 태자궁(太子宮)을 세웠다. 순치(順治 청 세조)가 또한 모두 예전 제도를 인습하였다. 원년(元年)에 정전(正殿)을 고쳐 짓고 이름을 태화전(太和殿)이라 하여 조하(朝賀)를 받았다. 이것이 소위 황극전(皇極殿)으로 역시 황명의 태화전(太和殿)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길이와 너비가 모두 9칸이고 가운데는 보좌(寶座)를 놓아두었다. 전벽(殿壁)에는 ‘경천법조(敬天法祖)’ 4자를 써서 현판하였고, 앞에는 9등급의 섬돌이 있는데 왼쪽을 중좌문(中左門), 오른쪽을 중우문(中右門)이라 한다.
단지(丹墀) 동서에 두 무(廡)가 있어 좌는 체인각(體仁閣), 우는 홍의각(弘義閣)인데, 체인각 북쪽은 좌익문(左翼門), 홍의각의 북쪽은 우익문(右翼門)이라 한다. 태화전의 뒤는 중화전(中和殿)이고 또 그 뒤는 보화전(保和殿)이다. 보화전의 왼쪽은 후좌문(後左門), 오른쪽은 후우문(後右門)이다. 태화전의 남쪽 정문은 태화문인데 금수교(金水橋)가 앞에 있다. 그 문의 좌편은 소덕문(昭德門)이고 우편은 정도문(貞度門)이다. 태화전의 동무(東廡)는 협화문(協和門)이고 서무(西廡)는 옹화문(雍和門)인데, 협화문의 동쪽에서 조금 북으로 가면 문화전(文華殿)으로 곧 황제의 경연(經筵)과 동궁(東宮)의 강학하는 곳이며, 옹화문 서쪽에서 조금 북으로 가면 무영전(武英殿)이다.
건청궁(乾淸宮)은 보화전 뒤에 있는데 곧 황제의 정침(正寢)이고, 건청문이 그 앞에 있는데 황제가 여기에서 정사를 듣는다. 두 기둥에는 ‘인심유위(人心惟危)’ 이하 16자(字)를 썼다. 문밖에 있는 두 무(廡)는, 좌는 경운문(景運門), 우는 융종문(隆宗門)이다. 교태전(交泰殿)은 건청궁 뒤에 있고 곤녕전(坤寧殿)은 교태전 뒤에 있는데 곧 황후의 정침이다. 곤녕전의 동쪽에는 경인(景仁)ㆍ승건(承乾)ㆍ종수(鍾粹) 등 세 궁을 설치하고 서쪽에는 영수(永壽)ㆍ익건(翊乾)ㆍ저수(儲秀) 등 세 궁을 설치했는데, 그 앞의 문은 신녕문(神寧門)이라고 한다.
자령궁(慈寧宮)은 무영전 뒤에 있는데 곧 태황태후(太皇太后)가 거처하는 곳이고, 영래궁(寧來宮)은 자령궁 서쪽에 있는데 본 이름은 함안궁(咸安宮)이니 곧 황태후가 있는 곳이다. 돈본전(惇本殿)은 문화전(文華殿) 북쪽에 있고 육경궁(毓慶宮)은 돈본전 뒤에 있는데 그 앞 문은 상욱문(祥旭門)이고, 상본전(祥本殿)은 돈본전 남쪽에 있는데 돈본(惇本) 이하 세 궁전은 모두 황태자의 궁이다.
오문(午門)은 태화문(太和門) 앞 금수교(金水橋) 남쪽에 있는데 중앙에 3문을 설치하고 좌우에 또 익문(翼門)을 설치하고 그 위에 각각 누가 있다. 오문의 좌편은 좌액문(左掖門)이고 우편은 우액문(右掖門)이다. 동화문(東華門)은 문화전 동쪽에서 조금 남쪽에 있고, 서화문(西華門)은 무령전 서쪽에서 조금 남쪽에 있으며 그 후문(後門)이 신무문(神武門)이다. 이상은 모두 자금성(紫禁城)의 문이다.
대궐 좌문(左門)은 오문(午門) 좌편에 있고 조금 남쪽으로 신주문(神廚門)이 있는데 그 안이 태묘(太廟)이다. 대궐 우문(右門)은 오문 우편에 있고 조금 남쪽에는 또 사우문(社右門)이 있는데 그 안이 사직단(社稷壇)이다. 단문(端門)은 곧 오문 앞 정남쪽에 있는데 동에는 태묘가문(太廟街門)이 있고 서에는 사직가문(社稷街門)이 있다. 천안문(天安門)은 곧 단문 앞에 있는데 정남쪽이며, 문 앞에는 석교(石橋) 다섯이 있는데 곧 금천교(禁川橋)이다. 이상 각문은 자금성(紫禁城) 밖에 있는 것이다.
황성(皇城) 문안의 태화문ㆍ오문ㆍ단문ㆍ천안문이 모두 정문인데, 누는 2층이고 문은 모두 다섯이다. 다만 태화문은 정도(貞度)ㆍ옹화(雍和) 두 문을 따로 좌우에 설치하였고, 오문도 좌우에 역시 두 익문(翼門)을 따로 설치하였기 때문에 곧 두 문을 병설한 문인데 모두가 셋이다. 태청문은 천안문 앞 정남쪽에 있는데, 곧 대궐의 바깥 정문으로 문밖의 중앙에 달리는 길을 만들었다. 그 동서에는 긴 낭(廊)이 있는데 이름은 천보랑(千步廊)이다. 꺾어서 좌우로 돌면 장안 좌문(長安左門)이 태청문 안 조금 북쪽에 있고, 꺾어서 동으로 가면 장안 우문이 대청문 안 조금 북쪽에 있고, 꺾어서 서쪽으로 가면 동안문(東安門)이 동화문(東華門) 동쪽에 있고, 서안문(西安門)은 서화문(西華門) 서쪽에 있고, 지안문(地安門)은 신무문(神武門) 북쪽에 있다. 이상은 모두가 황성의 문이다.
황명 영락 때에 문호(門號)를 다 정하였는데, 정통(正統) 연간에 또한 이름을 고친 것이 많고 순치(順治 청 세조)가 들어와 차지한 뒤에 승천문(承天門)은 천안문으로, 북안문(北安門)은 지안문으로, 대명문(大明門)은 지금 태청문으로 고쳤다. 단문ㆍ천안문 밖에는 모두 석주(石柱) 한 쌍을 세웠는데 경천주(擎天柱)라고 한다. 이것도 명 나라 때의 구물(舊物)이다. 상고해 보면 명 나라 초년에 집정 대신(執政大臣)을 경천반(擎天班), 옥당 청서(玉堂淸署)를 환벽반(煥璧班), 언관 법사(言官法司)를 검악반(劍鍔班), 외척(外戚)을 초란반(椒蘭班), 친왕(親王)을 경판반(瓊板班), 공신 장수(功臣將帥)를 표수반(豹首班)이라 하였으니, ‘경천(擎天)’의 칭호는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대개 궁전의 제도는 임안(臨安)이 이미 변경(汴京)을 모방하였고, 변경은 실로 낙양(洛陽)을 모방하였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낙양 궁궐의 유제(遺制)도 대강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무릇 성중의 마을[里巷]을 모두 ‘호동(衚衕)’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원 나라 때부터 일컬어 온 것이다. 성마다 어사(御史)를 설치하여 순시하고 병마지휘사사(兵馬指揮司使)와 또 도ㆍ부지휘(都副指揮)를 설치하였으니, 곧 송 나라 때 사상(四廂)의 도지휘(都指揮)요 원 나라 때의 순경원(巡警院)이다. 대개 경성(京城)에 항상 머물러 있는 군사가 3만인데, 모두 팔기(八旗)에 소속시켜 5성(城)을 나누어 맡긴다. 그리고 각기 맡은 성에 거접(居接)하여 옮기지 못하게 하고는 또한 각기(各旗)의 군사로 하여금 각기 맡아 다스리는 땅을 나누어 순찰(巡察)하게 한다. 팔기 외에 또 한군(漢軍)으로 녹기군(綠旗軍)을 설치하여, 간사함을 힐문하고 횡포함을 금하는 책임을 맡게 하고, 또 때로는 순포삼영(巡捕三營)을 두어 불의의 사변을 살피기도 한다.
성안의 각 사찰에는 종(鍾)이 있으나, 고루(鼓樓)에는 종이 없고 북을 달아매어 친다. 인정(人定)과 파루(罷漏)의 시각은 모두 우리나라와 같다. (), ()에는 목탁을 치는데, 경(更)마다 여러 목탁이 한꺼번에 움직이고 점(點)마다 점수(點數)에 따라서 목탁을 친다.
야금(夜禁)의 제도는, 모종(暮鍾)이 이미 고요하고 만종(晚鍾)이 움직이기 전에 범한 자는 볼기 30을 때리고, 2경ㆍ3경ㆍ4경에 범한 자는 볼기 50을 때린다. 외군(外郡)의 성진(城鎭)은 각각 한 등을 감하며, 급한 공무나 질병ㆍ생산ㆍ사상(死喪)에는 이러한 금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종 치기 전후에 순졸(巡卒)이 까닭 없이 행인을 잡은 자는 죄를 받게 된다.
북경 성안에는 닭ㆍ돼지ㆍ오리 등 가축이 전혀 없어서 더러운 냄새가 없다. 길 위에는 모두 벽돌을 깔았으며 돌 위에 하수도를 만들어 물을 뺀다. 그리고 매양 얼음이 풀릴 때면 혹 막힐까 하여 곧 수선하는데 그 깊이가 거의 몇 길이 넘는다. 인가(人家)에는 모두 변소가 없고 성안 우묵한 곳에 벽돌로 우물같이 만들어서 여기에 분뇨(糞尿)를 버린다고 한다. 중국의 변소가 예전부터 이러했겠는가? 소변을 보는 그릇은 모양이 목안(木雁) 같은데 가운데에서 입으로 통한 것이 주전자(酒煎子)와 같다. 처음 보는 우리나라 사람은 문득 술그릇으로 착각하고 입에 가까이 대기도 한다. 호인들도 처음 우리나라의 요강을 보고서 음식 그릇으로 오인했다고 하니, 참으로 대(對)가 될 만하다.

대개 성원(城垣)ㆍ궁부(宮府)ㆍ단묘(壇廟)ㆍ창고(倉庫)를 짓는 것은 공부(工部) 영선사(營繕司)에서 관할하는데 낭중(郞中)ㆍ원외(員外)ㆍ주사(主事)를 두어서 분장하게 한다. 순치(順治 청 세조)가 연경(燕京)에 도읍을 정하고서 같이 정벌 갔던 훈구(勳舊)와 갑사(甲士)에게 모두 집을 주고, 한관(漢官) 및 훈척(勳戚)의 자손 중에 고아나 과부로 의지할 데 없는 자에게도 집을 주었다. 종실(宗室)과 외조(外朝)의 방옥(房屋)과 기대(基臺)의 값은 모두 정한 한도가 있어서 한도를 넘는 자는 죄를 주고, 동(銅)으로 만든 사자ㆍ거북ㆍ학 등을 멋대로 쓰는 자는 벌로 은(銀) 20냥을 과한다.

무릇 종실은 친왕(親王) 이하부터 부대(府臺)ㆍ방좌(房座)ㆍ누문(樓門)ㆍ기지(基址)의 높고 낮은 것까지 모두 장척(丈尺)의 수를 정해 주었고, 방옥(房屋)ㆍ누전(樓殿)은 모두 붉게 칠하여 금채화(金彩畫)를 붙이는 것을 허락한다. 그림은 사조(四爪)ㆍ오조(五爪)의 용(龍) 무늬와 갖가지 화초를 그리는 것을 허락하고, 기둥은 순색 청홍(靑紅)을 칠하도록 허락하는데, 지위가 낮은 자는 다만 작은 화초만 그리게 하고 용의 머리를 조각하는 것은 모두 허락하지 않는다. 친왕은 오조 용의 무늬를 그리거나 조각은 또한 금한다.
문 머리에는 모두 돌 난간 쓰는 것을 허락하고, 지붕에는 또한 모두 원앙와(鴛鴦瓦)를 덮었는데, 친왕은 녹와(綠瓦)를 쓰고 군왕(郡王) 이하는 보통 통와(筒瓦)를 썼다. 외조의 제도는 종실에 비하여 모두 감하였다. 친왕의 부기(府基)는 높이가 2장(丈), 보국 공부(輔國公府)는 2척(尺)인데, 외조는 공(公) 이하 3품까지의 부기는 2척으로 한정하고, 4품 이하 서민(庶民)의 가기(家基)는 1척을 넘지 못한다. 방옥(房屋)의 칸 수는 1품이 14칸인데 그 아래는 순차적으로 감하여 9품이 3칸, 발십고(撥什庫)가 2칸, 갑병(甲兵)이 1칸이다. 6등을 나누어 집의 값을 주는데 1등은 매칸에 120냥, 2등은 100냥, 3등은 80냥, 4등은 60냥, 5등은 40냥, 6등은 30냥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1칸이라는 것이 우리나라의 칸 수와 같은 것이 아니고 실상은 더 넓은 것인 것 같다. 대개 집을 짓는데 칸이 몹시 커서 모두 들보가 일곱 아홉 아닌 것이 없고, 들보의 길이도 모두 14, 5장(丈)이 된다. 이는 혹 금채(金彩)로 꾸미면 1칸의 값이 많아서 그러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무릇 집의 제도는 크고 작고를 막론하고 모두 일자(一字) 집으로 짓고, 비록 초가집이라도 반드시 들보가 다섯 또는 일곱에서 아홉으로 짓는다. 그리고 들보의 척수도 심히 길며 원래 툇마루를 다는 제도가 없다. 처마에 부연(附椽)을 붙이기는 하나 아주 짧으며, 후면과 좌우는 모두 담을 쌓아 벽을 하고 석회로 바른다. 전면 중앙의 1칸을 문으로 만들고 좌우 칸에는 각각 온돌방을 설치한다. 문에는 푸른 베로 된 발을 늘이고, 전면에는 모두 긴 창을 만들어 안에서 열고 닫는데, 쇠지도리를 쓰지 않고 창틀의 횡목(橫木) 양쪽 끝을 문설주에 꽂아서 암치 수치가 서로 물리게 하여 열고 닫는다.
공사 간에 가옥의 기둥과 들보 사이는 모두 단청을 하는데, 또 청색으로 칠한 것도 많다. 공가(公家) 및 종실 방옥(宗室房屋)이나 사관(寺觀) 등 관가에서 짓는 집은 흔히 원앙와(鴛鴦瓦)를 쓰고 혹은 녹와(綠瓦)도 쓴다. 사가(私家)는 다만 보통 암키와로 덮고, 누런 기와는 천자가 아니면 감히 쓰지 못한다. 대개 기와의 제도는 우리나라 기와에 비하면 작고도 연한데 청ㆍ녹ㆍ자ㆍ황의 여러 빛깔이 구비되어 있다. 용을 조각하고 채색 그림을 그리는 것은 비록 사치하고 화려한 것 같으나, 예전 제도를 상고해 보면 궁궐의 기와가 누르고 푸르던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이다. 유리(琉璃)로 낙숫물통을 만든 것은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한(漢) 나라의 미앙궁(未央宮)ㆍ감천궁(甘泉宮)과 위(魏) 나라의 동작대(銅雀臺)의 기와가 모두 견고하고 윤택하여 정교하기가 옥도 같고 돌도 같았으며, 그 제도가 또한 커서 그것을 얻은 자는 먹도 갈고 벼루도 만드는 등 보완(寶玩)을 삼는다. 이것으로 비교한다면 근래의 기와는 제도가 도리어 추하고 나빠진 것이다.
초가집 간가(間架)의 제도도 역시 같다. 모두 풀과 억새로 가늘게 엮어서 두껍게 덮어 그 두께가 거의 한 자가 넘는다. 들보 위에는 풀을 엮어서 덮지 않고 다만 진흙과 석회를 두껍게 발랐다. 대개 관(關)의 안팎이 모두 광야이므로 갈대와 억새로 집을 덮지 않은 것이 없다. 오직 고려보(高麗堡) 근처만이 논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볏짚으로 이은 것을 보았다. 혹 토옥(土屋)이 있기도 한데, 옥상에는 들보가 없고 숫돌같이 판판하다. 흙을 매우 두껍게 쌓아 거의 두어 자에 이르고 그 위에는 풀이 났다. 혹은 회를 바르고 처마 끝에 기와를 덮은 것도 있으나 큰비가 오면 오히려 새는 근심을 면치 못한다. 봉성(鳳城)에서부터 주류하(周流河)까지는 초가가 많고 주류하부터 산해관까지는 토옥이 많다. 관(關) 안은 와가가 많고 간혹 토옥이 있으나 초가는 하나도 없다. 이것은 대개 억새와 풀이 귀한 때문이다. 대개 토옥은 대부분이 한인의 소유인데 모두 들보가 없다. 물으면,

“우리는 군상(君上)이 없기 때문에 들보를 얹지 않는다.”

고 하였다. 그러나 청인의 집도 이와 같은 것이 많으니, 실상은 가난한 사람이 기와와 풀을 준비할 수가 없어서 흙만으로 덮는 것으로서, 만일 들보를 높게 하고 처마를 낮게 하면 흙이 반드시 흘러내리기 때문에 부득이하여 이 제도를 쓴 것이다. 부호의 집은 혹 나는 듯한 동마루가 구름과 연하는데도, 외랑(外廊)ㆍ별실은 간혹 이 토옥을 모방한 것이 있으니 이것은 제작과 양식을 달리하려는 것 같았다.
관(關) 밖은 땅이 모두 광활하기 때문에 가대(家垈)가 심히 넓고 큰데, 관 안과 경성은 동네가 즐비하기 때문에 기지(基址)가 몹시 좁다. 캉[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나라의 온돌방이다. 그 제도가 모두 창 밑에 설치하여 벽돌로 쌓았는데 높이는 겨우 걸터앉을 만하고 길이는 그 집 간가(間架)의 길고 짧음에 따라서 다르다. 그러나 넓다고 해야 겨우 누울 만한데, 키가 큰 사람은 발을 뻗을 수가 없다. 캉 위에는 모두 물억새 삿자리를 깔고 부자는 삿자리 위에 또 흰 담요를 깔았다. 그리고 캉 아래에는 모두 벽돌을 깔았다. 사치한 집은 그 아래에 아궁이를 만들고 불을 때는데 그것을 지캉[地炕]이라고 한다. 아궁이는 모두 캉 앞에 만들고, 밖에서 불을 때는 집은 극히 적다. 옛날부터 공사(公私)의 가옥 제도가 모두 책에 나타나 있는데 캉의 이름은 일찍이 당송(唐宋) 이전에는 문자에서 보지 못하였다. 이 법이 어느 시대에 모방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금, 원 이래로 이미 이러하였고, 지금은 위로 천자ㆍ왕공에서 아래로 여염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제도를 쓴다. 강남(江南)만이 마루에서 살고 캉을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일찍이 들으니, 우리나라 북관(北關) 촌 집의 제도와 양식이 대체로 이와 같다고 한다. 북방의 가옥 제도가 본래 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 대개 규모가 크기는 한데, 정밀하고 교묘한 것은 우리나라에 미치지 못한다.

의복의 제도는 남녀 귀천과 사치하고 검소한 이를 막론하고 모두 검은 빛을 좋아한다. 옷의 길이는 정강이에 미치고 소매는 심히 좁으며 겉과 속에 모두 매는 것이 없이 위에서 아래까지 작은 단추를 많이 달아서 걷어 잡거나 벗을 때에는 매우 불편하다. 겉옷은 옷섶이 없고 속옷은 혹 섶이 있으나 모두 오른쪽으로 여민다. 예전에 좌임(左袵)이라고 한 것은 혹 딴 종족을 가리킨 것인가? 아니면 청인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준용한 것일까? 바지와 버선은 빛이 푸르고 남녀가 모두 똑같은 것을 착용(着用)한다.만 한인 여자는 혹 치마를 입는데 반드시 앞은 세 폭 또는 네 폭에 빛이 분홍이거나 연분홍이고 그 모양은 매우 길다. 치마를 걸친 여자는 보지는 못하였으나 청인이 치마를 읊은 시에 이르기를,

소상의 여섯 폭 치마 주름이 겹쳐 / 瀟湘六幅更重重
무산의 십이봉이 되었구려 / 裁作巫山十二峯

이라 하였으니, 그렇다면 상(裳)이 7폭, 군(裙)이 6폭인데, 12폭으로 만든 것이었던가? 한인 여자는 어려서부터 발을 싸는데 매우 단단히 묶어 해골같이 된다. 그래서 빛이 추하고 냄새가 고약하다. 발 끝은 뾰족하여 가늘기가 바늘 같으나 정강이는 통통하고 크므로 항상 깊이 감추고 보이지 않게 보호한다. 바지 가랑이와 버선 위를 반드시 색포(色布)로 단단히 싸고 낮이나 밤이나 풀지 않아 아무리 정인(情人)이라도 볼 수가 없다. 혹은 이 법이 달기(妲己)에게서 나왔다 하고 혹은 당 나라 때에 시작되었다고 하나 정확히 알 수 없다. 발 모양이 추악한 것이 이와 같으니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또 걷기가 심히 거북하여서 마치 오리나 참새 걸음과 같고, 길에서 바람을 만나면 곧 자빠진다. 세 치씩 걷는 금련보(金蓮步)를 오히려 부러워하면서도 조금만 더 크면 도리어 부끄러워한다. 지금 천하가 머리를 풀어헤친 지 이미 백 년이나 되었는데도 오직 이 한 가지만은 굳게 지키고 변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부인은 얼굴을 하얗게 한다. 예전부터 연경의 풍속이 비록 머리가 센 사람이라도 연지를 찍고 분을 발랐다. 그러므로 연로에서 본 사람은 귀천 노소할 것 없이 모두가 붉은 입술에 분칠한 얼굴이었다. 또 귀고리는 아무리 걸인이라도 모두 달았고 많으면 3, 4개를 달았다. 심지어는 어린 남자까지도 귀를 뚫고 달아맨 자가 있다. 물어보면 모두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 속담에 장수한다고 하므로 달았다.’ 하였다.
여자의 머리 제도는 그 모양이 갖가지이다. 한인 여자는 혹 남자의 상투와 같은데, 꼭대기에 검은 비단으로 머리를 싼 것이 마치 복건(幅巾) 제도와 같다. 이것을 ‘박(帕)’이라 한다. 흑수건으로 머리를 싸지 않으면 반드시 비녀를 꽂고 꽃을 꽂는다. 혹은 뇌(腦) 위에 작은 낭자를 만들기도 하는데 검은 빛깔의 비단으로 작은 모자를 만들어 가리고, 옥패(玉貝)로 얽은 다음 또 꽃을 꽂는다. 저들의 문자(文字)에,

“예전에는 머리털을 끌어 묶어서 낭자[䯻]를 만들었으나 지금은 사견(紗絹)으로 만들어 ‘아고(丫䯻)’라고 이름한다.”

하였으니, 이것을 가리킨 것 같다. 꽃은 청(淸), 한(漢)의 노소(老少)를 가리지 않고 여자라면 머리에 꽂지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초상을 당한 자까지도 혹은 흰 모자에 꽂는다. 대개 길에서 꽃을 파는 자가 극히 많은데 통주(通州)의 꽃은 정하고 고와서 경사(京師)의 꽃보다 낫고 관외(關外)의 꽃은 심히 추하여 더 못하다.
호인 여자는 머리를 싸고 모자를 쓴 자가 극히 적다. 그리고 상투는 모두 높고 비녀를 꽂았는데, 꽃을 꽂은 것은 한인 여자와 같다. 혹 좌우의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서 두개골 뒤의 머리털과 합하여 묶어서 머리 위에 낭자를 만들기도 했다. 처녀는 이마 위에서부터 머리카락을 좌우로 갈라 뒤에 묶었다. 동팔참(東八站)에서는 혹 망건을 쓰고, 혹 머리털을 땋아서 머리에 두르기를 우리나라 여인과 같이 하기도 했다. 대개 관내(關內)는 모두 한인 여자이고 관외(關外)는 모두 호인 여자이다.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면사(面紗)를 쓰고 나귀를 타고 다니는 자는 산해관의 여자이고, 분을 바르고 좋은 옷을 입고 수레를 타고 다니는 자는 경성(京城)의 여자인데, 관 밖에는 이런 것이 없다. 한인 여자는 발이 남자와 아주 다르기 때문에 신이 모두 당제(唐制)의 여혜(女鞋)이다. 이것이 소위 궁혜(弓鞋)이다. 호인 여자가 신는 신은 남자와 같다.
한녀(漢女)는 외인을 피하나 호녀(胡女)를 피할 줄을 모른다. 비록 제왕(諸王) 경상(卿相)의 아내라도 모두 수레를 타고 다니다가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수레를 멈추고 포장을 걷고 본다. 호녀는 날이 추우면 혹 남편의 붉은 모자를 써서 추위를 막는데 한녀는 결코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호인이 항상 말하기를,

“동국은 여자는 순한데 남자가 순하지 않고, 중국은 남자는 순한데 여자는 순하지 않다.”

고 했다. 이것은 중국 남자는 모두 머리를 깎고 호복(胡服)을 입었는데 여자는 끝내 발을 싸매는 것을 풀지 않고 호복도 입지 않으며, 우리나라 여자는 머리털을 두르고 발이 큰데 남자는 끝내 머리를 깎지 않고 아직도 중화의 제도를 인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남자는 부귀한 자 외에는 모두 베를 입는데 여자는 가난하여도 모두 비단옷을 입는다. 그리고 크고 작은 일을 모두 남자에게 책임을 지워, 물 긷고 쌀 찧고 소제하고 비단 짜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앉아서 장사하고 다니며, 장사하느라 겨를이 없어서 목욕하고 씻지도 못하기 때문에 먼지와 때가 얼굴에 가득하고 의복이 남루하니, 사람 생긴 것마저 극히 추하고 용렬하다. 그런데 그 아내는 비단옷을 입고 얼굴에 분을 바르고 귀에 귀고리를 달고 길쌈을 하지 않고 문에 기대어 얼굴이나 다듬으며, 아무리 가난하고 천한 자라도 밥을 짓고 신바닥이나 꿰맬 뿐이다. 그러니 그 남편에 비교하면 종과 상전 같을 뿐 아니라, 그녀가 우리나라 사람을 대하면 또한 자기 남편이라고 말하기를 부끄러워한다. 대개 관내(關內)의 여자는 경성 여자에게 미치지 못하고 관 밖은 모두 천한 무리라서 족히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화관(華冠)을 쓴 자도 보이지 않는다. 한녀는 비록 아름답기는 하나 모두 눈을 직시(直視)하므로 보는 자가 매양 호녀가 낫다고 한다. 일찍이 《황명패기(皇明稗記)》를 보니,

“연산(燕山)의 부녀가 토실토실하고 곱기는 하나 13세만 되면 시집가고 30세가 되면 야윈다.”

하였고, 역배(譯輩)들도 또한 말하기를,

“한인 여자는 성적 자극을 주지 않는 자가 없기 때문에 모두 안질이 생긴다.”

라고 하는데, 혹 그 말이 사실인가? 또 들으니, ‘명 나라 때에 연산의 창기는 모두 자(子)로 이름을 지어 향자(香子)ㆍ화자(花子) 같은 유가 심히 많았으며, 추운 때나 더운 때 할 것 없이 반드시 비단 치마를 입었으며, 북경(北京) 안의 창가(娼家)는 동서 교방(東西敎坊)을 설치하여 금릉(金陵) 16루의 제도를 모방하였는데, 실은 당 나라의 의춘원(宜春苑)의 유지(遺志)와 같은 것이다.’고 했다. 황명 때에는 성하기가 이와 같았는데 강희(康煕) 때에는 경성의 창기를 일체 금하여, 천하에 청녀(淸女)로서 기생이 된 자는 사형의 법으로 논하고, 오직 한인 여자는 금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연로의 삼하(三河)ㆍ계주(薊州) 사이에 혹 한인 기생을 양성하기도 하였는데, 몹시 쓸쓸하고 조잔하였다. 들으니, ‘강남(江南)의 판교(板橋) 등 여러 원(院)은 모두 풀이 우거져 다시는 옛날의 아름답고 고운 것이 없다.’고 한다. 상고해 보면 남경의 판교와 당 나라의 의춘원은 그 제도가 극히 성하여 풍류의 고장이라고 일컬었는데 과연 어떠했는지 알 수가 없다.

남자는 낳으면 포대기 속에서부터 머리를 깎아 정상의 정수리[百會] 및 두어 곳을 모두 쑥으로 뜬다. 이것은 머리칼을 모두 깎았기 때문에 여기를 뜸떠서 풍한(風寒)을 막기 위한 것이니, ‘백회를 떠서 총명(聰明)을 감하게 한다.’는 것은 참으로 거짓말이다. 오직 머리 뒤의 한 줌 머리칼은 깎지 않고 땋아서 늘어뜨리는데 이것이 소위 ‘호승적(胡僧赤)’이다. 혹은 말하기를, ‘부모가 있는 자는 이렇게 한다.’고 하는데, 실은 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이것이 있고, 오직 중만이 다 깎았다.
남자의 군복(軍服)ㆍ조복(朝服)은 모두 한 모양이다. 바지는 솜을 두지 않고 추우면 털 갖옷[毛裘]을 입으며, 또한 깃이 없기 때문에 긴 털가죽으로 목을 두르는데 이름을 ‘구금(裘襟)’ 또는 ‘항권(項圈)’이라고 한다. 옷소매는 모두 말발굽 모양으로 만드는데, 이것이 소위 ‘마제수(馬蹄袖)’이다. 구금과 소매 가를 천한 사람은 담비 가죽을 쓰지 못한다. 조복의 속옷은 길고 양쪽 소매와 옷자락에 모두 망룡(蟒龍)을 수놓았는데, 이것이 ‘망포(蟒袍)’라는 것이다. 웃옷은 짧고 흉배(胸排 관복에 붙이는 가슴 장식)를 붙였는데, 백학(白鶴)ㆍ기린(猉獜)ㆍ금계(錦鷄)ㆍ노자(鷺鷀) 등 각각 품등(品等)이 있었다. 안에는 털 따위를 붙였는데 날이 추우면 겉옷과 속옷을 혹 바꿔 입기도 한다. 양 어깨에는 망단 피령(蟒緞披領)을 메었는데 그 만듦새가 우리나라 호련대(扈輦隊)가 메는 것과 같다. 모자 갖옷의 꾸밈은 위로 초피(貂皮)로부터 아래로 여우ㆍ오소리ㆍ쥐ㆍ수달에 이르기까지 모두 등급이 있고, 은서피(銀鼠皮)와 흑호피(黑狐皮)는 금하여 쓰지 못한다. 평상시에 쓰는 모자는 홍진사(紅眞絲)로 얽고 조복의 모자는 홍륭사(紅絨絲)를 썼는데, 대단히 두껍고 길어서 테를 꿰맨 털의 선과 서로 가지런하다. 양모(涼帽)는 선이 없기 때문에 비록 항상 쓰는 모자라도 붉은 실이 모자 옆으로 나온다. 몽고의 모자는 위가 펀펀하고 청인의 모자는 위가 둥글어서 이것으로도 구별할 수 있다. 귀천의 구별은 오직 정자(頂子)와 방석[坐褥]에 있다.
대개 정자는 진주[東珠]가 상이고 다음은 홍보석(紅寶石)ㆍ남보석(藍寶石)ㆍ수정(水晶)ㆍ금은(金銀) 등 각각 정한 품등이 있는데, 천자로부터 왕공까지 관 위에 쓰는 동주ㆍ보석의 수가 모두 한결같지 않다. 그리고 또 직함(職啣)이 있고 없는 것과 순색(純色)ㆍ간색(間色)을 가지고 등위(等位)ㆍ절차(節次)에 따라 차례로 감한다. 벼슬이 낮은 자는 단지 기화금은(起花金銀)만 쓰고 금작(金雀)ㆍ은작(銀雀)은 공생(貢生)이 쓰며 호로(葫蘆)는 외랑(外郞)이 쓴다. 소위 보석이라는 것은 명 나라 때에는 운남(雲南)ㆍ광동(廣東) 등지에서 캤는데 그 폐단이 극히 많았다. 지금 쓰는 것도 이 돌인지 알 수 없다.
띠[帶]도 또한 천자로부터 후백(侯伯)까지 각각 정한 제도가 있다. 모두 둥근 옥판(玉版) 네 덩이에 금테를 둘렀는데, 조각마다 진주ㆍ홍보석을 품등에 따라 썼다. 1품은 금양ㆍ방옥판(方玉版)에 홍보석(紅寶石)을 쓰고, 2품과 3품은 기화금 원판(起花金圓版)에 보석이 없고, 4품은 은양금판(銀鑲金版)이고, 5품은 소금판(素金版)이고, 6품은 은양 대모판(銀鑲玳瑁版)이고, 7품은 소금판이고, 8품은 은양 양각판(銀鑲羊角版)이고, 9품 잡직(雜職)은 은양 오각판(銀鑲烏角版)이다.
황대(黃帶)ㆍ황수지(黃手扯)는 종실(宗室)이나 특사(特賜)가 아니면 감히 쓰지 못하고, 자수지(紫手扯)는 패륵(貝勒)ㆍ패자(貝子) 외에는 또한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종실은 혹 누런 띠를 띤 자가 있으나 그 외의 사람에게서는 모두 띠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하니 괴이한 일이다.
방석[坐褥]은 친왕(親王)부터 후백(侯伯)까지 초피(貂皮)ㆍ스라소니 표피ㆍ호피(虎皮)ㆍ이리ㆍ오소리ㆍ산양(山羊) 등의 가죽을 각각 그 품등에 따라 쓴다. 여름에는 오조청룡 남장단(五爪靑龍藍粧緞) 및 남양단(藍鑲緞)에 모두 홍백전(紅白氈)으로 안을 받치고, 그 다음은 청홍섬단(靑紅閃緞)ㆍ홍양청갈(紅鑲靑褐)ㆍ청양홍포(靑鑲紅布)에 모두 홍전(紅氈)으로 안을 받치고, 또 그 다음은 남포(藍布)에 백전(白氈)으로 안을 받친다. 외조(外朝)는 겨울 요(褥)도 1품이라야 비로소 이리 가죽 쓰는 것을 허락하고, 그 아래는 차례로 강쇄(降殺)하여 녹비(鹿皮)까지 쓰며, 여름에는 홍양(紅鑲)ㆍ청갈(靑褐)이 가장 좋은 품질이고, 그 아래는 또한 차례로 강쇄하여 백전(白氈)이 최하품이 된다.
사환(仕宦)하는 사람이 출입할 즈음에는 종자 한 사람이 반드시 요를 가지고 따른다. 오문(午門)에 이르러 벼슬이 높은 자는 각기 하관이 요를 가지고 따르고, 벼슬이 낮은 자는 친히 끼고 들어간다. 공작(孔雀)의 깃은, 패자(貝子) 이상은 세 눈[眼]을 달고, 진국(鎭國)ㆍ보국(輔國)은 두 눈을 달고, 호군(護軍)ㆍ통령(統領) 및 대신 이하는 모두 한 눈을 단다. 염주(念珠)는 곧 밀화(蜜花)ㆍ청강석(靑剛石) 따위의 물건으로 수효가 108이나 되는데 혹은 목에 걸고 혹은 두어 구슬을 팔뚝에 건다.
공주 이하 관인의 아내가 타는 수레 또한 모두 등급이 있는데, 수레 꼭대기를 금이나 은으로 장식한 것이 가장 귀하고, 그 아래는 홍ㆍ남ㆍ녹ㆍ청 네 가지 빛을 쓴다. 네 모서리는 붉은 테가 가장 귀하고 남ㆍ녹ㆍ청색 테가 그 다음이 된다. 수레의 채와 바퀴는 자색이 상품이고, 채가 푸르며 바퀴가 붉은 것이 다음이다.
위아래가 모두 신으로 수화자(水靴子)를 신는데, 그 아가리가 길고 좁아서 벗고 신기에 매우 곤란하나, 대개 행보에 편한 것을 취한 것이다. 신 바닥은 베를 접어서 만들었는데, 매우 두껍고 단단하여 진흙 길을 걸어도 스며들어 젖지 않는다. 수레를 몰거나 밭을 가는 자는 모두 검은 신을 신고 다리에서 발까지 베로 감아 싼다. 그리고 가난한 자는 노끈으로 묶는다. 그래서 달리기에 편하고 빠르다. 혹은 피혜(皮鞋)도 신는데, 이것이 바로 월오기(月吾其)라는 것이다. 귀천ㆍ노소 할 것 없이 모두 허리에 작은 주머니와 화철(火鐵)ㆍ도자(刀子)를 차며, 비록 두세 살 된 작은 아이라도 모두 모자 쓰고 신 신고, 버선을 벗은 자는 없다. 대개 천하에 우리나라만이 흰옷을 입는데, 들으니, 한중(漢中)에서도 흰 것을 숭상하여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 흰 베로 머리를 싸고 혹은 황견(黃絹)에 백모(白帽)를 쓴다는데, 화주(華州)ㆍ위남(渭南) 등처가 더욱 심하여 원조(元朝)의 길례(吉禮)에는 반드시 흰 관과 흰옷을 입고 서로 하례한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보다도 더하다.

청인의 관복(冠服)은, 저희들이 스스로 보기에도 불만족하게 여기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또한 웃는다. 그러나 우리의 단령(團領)ㆍ오사모(烏紗帽)ㆍ활수장의(闊袖長衣)는 저들이 감히 웃지를 못한다. 그래서 비록 부녀자들도 반드시 자세히 보고 사모하고 좋아한다. 그러므로 희롱하고 농담할 때에 우리나라 사람의 관복은 역관들이 혹 입는데, 저희들의 복색은 일찍이 우리나라 사람에게 입히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싫어하고 귀찮게 여기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매양 저들과 이야기하다가 의복 제도에 대하여 물으면, 한인은 얼굴에 부끄러워하는 빛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의 복색을 물으면, 혹은 말하기를,

“이것은 중화의 제도이므로 좋은 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의 시왕(時王)의 법도 또한 좋은 점이 많다.”

고 한다. 그 까닭을 물으면,

“머리털을 다 깎았으니 빗질하는 수고가 없고, 위아래가 똑같이 입으니 명분의 구별이 없고, 제작이 간단하고 평이하여 일하는 데에 장애가 없으니, 이것을 편하게 여긴다.”

고 대답한다. 유식한 사람은 혹 말하기를,

“이것이 우리 선조가 입던 옷으로, 우리 집에서는 아직도 예전 옷을 간직하여 때때로 펼쳐 구경한다. 그대가 화제(華制)의 옷을 입었으니 어찌 흠모하고 부러워하지 않을까?”

하며 슬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명 나라 때의 단령(團領)ㆍ화관(華冠) 등의 물건은 모두 광대들의 희자당(戱子堂)으로 돌아가고 예전 제도는 조금도 없다. 대저 원 나라는 비록 중국에 들어와 임금 노릇을 하였으나 천하가 그래도 머리는 깎지 않았는데 지금은 사해(四海)가 모두 호복(胡服)이다. 백 년 육침(陸沈)에 중화(中華)의 문물(文物)은 남은 것이 없고, 선왕(先王)의 법복(法服)은 지금 모두 광대들[戱子輩]의 구경거리와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리하여 제멋대로 고치고 바꾸니 황명의 예전 제도가 날로 멀어지고 날로 없어져서 장차 다시 얻어 보지 못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외국 사이(四夷)에서 조공하러 오는 자까지도 좌임(左袵)을 입지 않고 오랑캐 말을 하지 않는 자가 없다. 안남(安南)은 관디[冠帶]를 갖추었다고 하지만 머리털을 풀어 흩뜨리고 이빨에 칠을 하였으니 또한 중화 제도라고 논할 수 없고 보면, 가위 천지가 긴 밤중이라 하겠다. 알 수 없거니와 강남(江南)에는 유식한 선비가 있어서 그래도 은례(殷禮)를 증거할 만하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관내(關內) 관외(關外)의 농사짓는 제도는 우리나라 산협(山峽)의 농사와 같은데, 호미는 크고 길어서 서서 풀을 매고 쟁기는 짧고 작아서 대단히 간편하다. 대개 토질(土質)이 부드럽고 연하여 모두가 가는 모래이므로 관내(關內)는 소뿐 아니라 노새ㆍ나귀ㆍ말 등도 다 밭을 간다. 그런데 관외(關外)는 소가 많이 갈고, 요동 이후에는 두 마리에 멍에를 메워 가는 자가 있으니 토질이 점점 우리나라와 같기 때문이리라. 강소ㆍ절강 사이에는 농사짓는 방법이 여기와 어떠한지 알 수가 없다. 관동(關東)은 논농사를 지극히 엄하게 금하여 최고형[一罪]으로 다스리기 때문에 원래 수전(水田)이 없으니, 이것은 대개 바다에 연하여 있는 큰 들이라 땅에 본래 소금기가 있고 또 수원(水源)이 없어서 항상 한재가 많기 때문에 이와 같이 엄금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밭 이랑도 깊이 갈지 않고 기장과 서속만을 가는데 수확이 또한 많다. 밭 모양과 수확 방법은 우리나라의 북도(北道)와 같다. 곡식은 수수ㆍ콩ㆍ차조에 불과하기 때문에 소와 말을 먹이는 것이 모두 조짚이고, 날마다 때는 나무도 모두 수숫대이다. 콩은 빛이 검고 알이 작은 것이 잘되는데 그 모양이 우리나라의 서목태(鼠目太)와 같다. 소와 말을 모두 이것으로 먹인다. 이 콩은 가장 잘 썩고 상하므로 관고(官庫)에서 받아도 보존하기 어려운 것을 근심한다. 그리하여 각 고을에서 종자 개량하기를 청하였다. 논은 고려보(高麗堡)에서부터 비로소 보았고 순천부(順天府)에도 더러 있다. 거기에서 산출되는 것을 수도(水稻)라고 하는데, 쌀알이 크고 빛깔이 또한 희다. 밥을 지으면 산도(山稻) 밥보다는 나으나 그래도 기름기가 없고 단단하다. 남경도(南京稻)의 쌀은 쌀알이 더욱 크고 밥을 지으면 북경(北京) 쌀보다는 훨씬 나으나 맛이 또한 몹시 나빠 우리나라 쌀밥만 못하다. 저들이 매양 우리나라 밥을 좋아하는 것은 이 까닭인 듯하였다. 관 안팎의 쌀은, 산도는 전혀 없고 모두 좁쌀로 밥을 짓는데, 수수쌀 밥이 더욱 많았다. 대개 서북(西北)은 모두 밭뿐이므로, 의논하는 이들이 수리(水利)를 시설하지 않는 것을 한한다. 밭의 제도는 이랑 하나의 길이와 너비가 각각 300여 보(步)나 되는데, 두 이랑을 하루갈이[一日耕]라고 한다. 먼저 똥을 이랑 위에 펴고 흙을 일구어 똥을 덮고 종자를 뿌린다. 밭에 거름하는 것을 일로 삼기 때문에 삼태기와 광주리를 가진 자가 서로 길에 잇대어서 지나가는 말이 똥을 누면 곧 주워 담는다.

경사(京師)는 모두 8창(倉)으로 곳집이 339좌(座)인데 팔기(八旗)에 나누어 붙였다.
좌익(左翼)은 곧 해운창(海運倉)인데 곳집이 61좌로 양황기(鑲黃旗)에 속하고, 남신창(南新倉)은 41좌로 양백기(鑲白旗)에 속하고, 녹미창(祿米倉)은 23좌로 정람기(正藍旗)에 속하고, 구대창(舊大倉)은 65좌로 정백기(正白旗)에 속한다.
우익(右翼)은 곧 북신창(北新倉)인데 곳집이 97좌로 정황기(正黃旗)에 속하고 부신창(富新倉)은 37좌로 목판(木板)만을 저축하는데 양홍기(鑲紅旗)에 속하고, 흥평창(興平倉)은 40좌로 정홍기(正紅旗)에 속하고, 태평창(太平倉)은 15좌로 양람기(鑲藍旗)에 속한다.
통주(通州)는 3창으로, 대운서창(大運西倉)이 112좌, 대운중창(大運中倉)이 64좌, 대운남창(大運南倉)이 149좌이다.
각고(各庫)는 10개가 있는데, 광선고(廣善庫)는 팔기의 관운(官運)을 거두어 저축하고, 금은고(金銀庫)는 직성(直省)의 정잡은(正雜銀)과 금주(金珠)ㆍ옥석(玉石)을 거두어 저축하고, 단필고(緞匹庫)는 각성(各省)의 세단(細緞)ㆍ포필(布匹)ㆍ피장(皮張)ㆍ마근(麻觔) 등의 항목을 거두어 저축하고, 안료고(顔料庫)는 각성의 주사(朱砂)ㆍ황단(黃丹)ㆍ침향(沈香)ㆍ강향(絳香)을 거두어 저축하는데, 금은고(金銀庫) 이하 3고는 호부(戶部)에서 관할한다. 이신고(裏新庫)는 단필(緞匹)ㆍ약재(藥材)ㆍ청람(靑藍) 등의 항목을 거두어 저축하고, 공용고(供用庫)는 강소ㆍ절강성의 백미(白米)ㆍ황백랍(黃白蠟)ㆍ동유(桐油)ㆍ모다(茅茶)ㆍ오매(烏梅)ㆍ홍숙동(紅熟銅) 등의 항목을 거두어 저축하고, 을자고(乙字庫)는 각성의 포마(布麻)ㆍ주단(紬緞)ㆍ면마(綿麻)ㆍ잡향(雜香)을 거두어 저축한다. 대개 창고의 제도는 명 나라의 제도를 따랐는데 가감(加減)하여 같지는 않다.

무릇 서울에 있는 문무관(文武官)의 녹봉은 품계에 따라서 지급하는데, 정종(正從) 1품은 1년에 은 180냥을 지급하고, 정ㆍ종 2품은 150냥, 정ㆍ종 3품은 130냥, 정ㆍ종 4품은 105냥, 정ㆍ종 5품은 80냥, 정ㆍ종 6품은 60냥, 정ㆍ종 7품은 45냥, 정ㆍ종 8품은 40냥, 정ㆍ종 9품은 33냥을 지급한다.

내무부(內務府)는 청 나라 초년에 설치하였는데, 부(府)의 대소사와 재용(財用)의 출입, 제사(祭祀)ㆍ연향(宴享)ㆍ선복(饍服)ㆍ사여(賜予)ㆍ형법(刑法)ㆍ공작(工作) 등의 일을 모두 총리(摠理)하게 하여, 궁(宮)과 부(府)가 일체가 되게 하니 실로 이번원(理藩院)과 표리(表裏)가 된다. 대개 이번원은 오로지 몽고를 관할하고 내무부는 오로지 만주를 관할하여, 다른 부원(府院)에 비교하면 책임이 유별나다.
그 소속 아문 가운데, 광저사(廣儲司)는 고장(庫藏)ㆍ저축(儲蓄)ㆍ경비(經費)의 일을 맡고, 회계사(會計司)는 장원(莊園)ㆍ지묘(池畝)ㆍ호구(戶口)ㆍ요역(徭役)의 일을 맡고, 장의사(掌儀司)는 연연(筵宴)ㆍ제사(祭祀)ㆍ예의(禮儀)ㆍ악무(樂舞)의 일을 맡고, 도우사(都虞司)는 삼기 금려(三旗禁旅)의 훈련(訓鍊)ㆍ조견(調遣)과 어렵(漁獵) 등의 일을 맡고, 신형사(愼刑司)는 형옥(刑獄)을 심헌(審讞)하는 일을 맡고, 영조사(營造司)는 수선(修繕)ㆍ공작(工作) 및 신탄(薪炭)ㆍ도야(陶冶)의 일을 맡고, 직염국(織染局)은 궁중 의복을 자수하는 일을 맡고, 경풍사(慶豐司)는 우양(牛羊)을 치는 일을 맡았는데, 모두 낭중(郞中)ㆍ원외(員外)ㆍ주사(主事)를 두어 나누어 다스린다. 무비원(武備院)은 진설(陳設)ㆍ무비(武備)ㆍ사급(賜給)ㆍ징수(徵收)의 일을 맡고, 상사원(上駟院)은 구목(廐牧)의 일을 맡고, 봉신원(奉宸院)은 경산대(景山臺)와 남원(南苑) 등지를 맡았는데, 모두 대신(大臣)을 두어 관장하고, 낭중ㆍ원외ㆍ주사 등 관원은 위와 같다.

무릇 각성에 모두 양제원(養濟院)을 설치하여 의지할 데 없는 환과고독(鰥寡孤獨)과 잔질(殘疾) 및 빈궁한 자를 수용하는데, 매월에 쌀 3두와 면포(綿布) 1필을 준다. 관리가 혹 감하여 주면 도둑으로 논죄하고 돌보아 기르지 않는 관리도 또한 죄준다. 이것은 명 나라 제도를 답습한 것이나, 지급하는 수는 가감하여 같지 않다. 강희(康煕 청 성조)가 또 각성에 명하여 따로 육영당(育嬰堂)을 설치하고 인민이 가난하여 자손을 무양(撫養)하지 못하는 자를 수양(收養)하게 했다. 그리고는 도로에 고아를 유기하는 자를 엄금하였다. 또 의총법(義塚法)을 세워 고골(枯骨)을 묻게 하여 많이 거두어 묻는 자는 정표(旌表)하고 상을 주었다. 경사(京師)에는 양제원을 광녕문(廣寧門) 밖에 설치하였는데 강희가 특별히 비를 세웠으며, 육영당은 광거문(廣渠門)에 설치하였는데 옹정(雍正 청 세종) 2년(1724)에 또 조서를 내려 권장하였다. 그리고 편액(扁額)을 내리는 한편 백금(白金)을 내려 자본을 삼아 돕게 하고, 각성에 칙령하여 경사(京師)의 예를 참작하여 미루어 행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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