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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2년 무술(1778) 2월 14일(을사)
02-02-14[02] 승문원 정자 이가환을 불러 여러 경서의 내용을 질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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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이가환(李家煥)을 불러 보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저번의 대책(對策)에서 이미 해박(該博)함을 알고 있었거니와, 일전의 시권(試券)도 근래에는 이런 작품(作品)이 없었다고 이를 수 있으니, 진실로 가상하게 여길 만하다. 오늘 너에게 전석(前席)을 빌려 주었으니, 모름지기 평소에 쌓은 공부를 털어놓도록 하라. 대저 유주(維州)를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임에 있어서의 시비(是非)와 득실(得失)을 너는 과연 어떻게 보고 있느냐?”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주자(朱子)의 《강목(綱目)》에 사마광(司馬光)과 호씨(胡氏)의 단안(斷案)을 써 놓은 것이 모두 차서(次序)가 있으니, 주자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주자의 뜻이 호씨를 옳게 여기고 사마광을 그르게 여긴 것이 아니다. 시대의 선후에 따라 기록하는 순서를 그와 같이 한 것이다.”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지당하십니다마는, 신의 생각에는 대개 이덕유(李德裕)를 우월하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덕유가 교지(矯旨)하여 항복받은 것을 또한 그르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대부(大夫)가 국경(國境)을 나가서 국가에 유익한 일은 전단(專斷)해도 되는 법이니, 이를 그르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토번(吐蕃)의 부락(部落)이 어느 시대부터 시작된 것인가?”
하매, 이가환이 아뢰기를,
“어느 때부터 시작된 것은 알 수 없지만, 토곡혼(吐谷渾)과 서로 가까우니, 대개는 곧 서강(西羌)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우공(禹貢)에 ‘도이(島夷)가 피복(皮服)을 바쳐 왔다.’고 하였다. 그 시기에 당해서는 해와 달이 비치는 곳과 이슬과 서리가 내리는 곳이면 모두 성왕(聖王)의 교화(敎化) 속에 들게 되는 참이었다. 교화가 미치게 되는 바를 가지고 다스리는 강토(疆土)의 원근(遠近)을 말하기도 한다면 비록 오복(五服) 밖에 또 오복이 있다 하더라도 가하겠지마는, 도리어 후세에 폭원(幅圓)이 크고 솔복(率服)이 멀었던 것만도 못하였으며 또 도이들은 지경이 가까웠는데도 오히려 피복을 입었었으니,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이 오히려 미쳐 가지 못했음은 무슨 까닭이겠는가?”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요순(堯舜) 때에 성교(聲敎)는 사해(四海)에 미쳐 갔었지만 다스리는 강토는 오복(五服)에 그치었고, 이적(夷狄)에 있어서는 다스리려고 하지 않는 방법으로 다스렸었는데, 후세에는 무력(武力)을 멋대로 사용하여 그 힘이 닿는 데까지 관대(冠帶)를 쓰게 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적들이 중국(中國)에 들어왔음은 대개 어느 시대부터이겠는가?”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한나라 무제(武帝) 시절 호한야(呼韓耶)란 〈흉노(匈奴)〉가 변방에 와서 복종했을 때부터 이미 중국에 들어오게 될 조짐이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호한야가 변방에 와서 복종한 이후에 이미 중화(中華)를 어지럽히게 될 조짐이 있었지만, 이적이 중국에 들어오기는 대개 유연(劉淵) 때부터 시작되었다.”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위(元魏)의 모든 임금 중에 가장 어진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효문제(孝文帝)가 가장 어질었습니다.”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옛적에 성씨(姓氏)가 있은 법은 대개 그 종족을 구별하여 대대로 전해 가게 하려 한 것이다. 원위를 비록 이적이라고 말하나, 〈탁발씨(拓跋氏)인〉 성을 〈원(元)으로〉 고치었음은 또한 무슨 까닭이겠는가?”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원위가 성을 고친 것은 이적이어서 무식한 소치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역대의 관제(官制)에서 주(周)나라의 관제(官制)는 알맞게 잘 갖추어졌기에 다시 논할 것이 없겠으나, 한(漢)나라ㆍ당(唐)나라ㆍ송(宋)나라ㆍ명(明)나라는 관제가 각각 다른데, 어느 시대의 것이 좋은 것이겠는가?”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주나라는 육관(六官)이 찬란하게 되어 있고, 한나라는 구경(九卿)이 실무(實務)에 정성스러웠으며, 당나라는 주나라 관제를 모방하여 육관을 만들었었지만, 정승의 직책이 문란하여 수뇌부(首腦部)가 잘못 되었습니다. 송나라는 희령(熙寧) 때 관제를 개정하기 이전에는 절반이 곧 이름만의 직함(職銜)이어서 명실(名實)이 문란했었는데, 희령 이후에는 비록 명실이 바로잡아지기는 했지만 대부분 소인(小人)을 등용하게 되어 논할 만한 것이 없게 되었고, 명나라는 내직(內職)과 외직(外職)이 서로가 유지(維持)해 가게 되어 있어 법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니었지만,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전포(展布)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저 대관(大官)은 중요한 것이어서 다른 관원과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인데, 당나라 때에는 대신이 절도사(節度使)를 겸임하게 되어 있었으니, 이는 또한 관제(官制)가 문란한 일이다. 송나라 때는 동평장사(同平章事)와 동중서 문하성(同中書門下省)이 모두 상신(相臣)을 겸임하게 했었고 또한 더러는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겸임하기도 하였으며 더러는 복야(僕射)도 전임하게 되기도 했었다. 또한 태사(太師)와 태부(太傅)의 직도 역시 이름만의 직함으로서, 양전(楊戩)ㆍ동관(童貫)과 같은 무리들을 비록 관원으로 일컫지는 않았지만 20여 인이나 되도록 많았다. 명나라 때는 호유용(胡惟庸) 이후에는 각신(閣臣)이 태학사(太學士)를 겸임했었으니 상직(相職)이 또한 문란했었다. 우리 나라의 관제도 역시 이와 다를 것이 없어 대신이 백관(百官)을 통솔한 다음에야 명실이 바로잡아질 것인데, 비변사(備邊司)가 생기면서는 정부(政府)가 하나의 공아(空衙)로 되어버리고, 제조(提調)를 두면서는 육조(六曹)에서 자주(自主)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빈대(賓對)를 거행하면서도 상참(常參)이 그만 형식이 되어버렸으니, 우리 국조(國朝)의 관제도 또한 말할 만한 것이 없다.”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국조의 관제는 닦아서 거행해 간다면 가장 주나라의 관제에 가까울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덕유에게 죄가 있었다면 내치는 것이 가한데 낮추어 사호(司戶)로 삼았으니, 또한 어찌 관방(官方)이 어그러지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진실로 성상께서 분부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송나라 때의 절도사도 또한 이름만의 직함이었는가?”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문천상(文天祥)이 번진(藩鎭)을 다시 설치하려고 했었는데, 과연 유익하게 될 수 있었을까?”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송나라나 명나라가 모두 파국(破局)이 된 뒤에야 번진을 복구하려고 했는데, 사세가 이미 틀려버렸기에 도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나라 때는 번진의 폐해가 고질(痼疾)이었지만, 송나라 때에는 이를 없앴는데도 또한 폐해가 있었음은 무슨 까닭이겠는가?”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오직 단속하여 다루기를 합당하게 하기에 달린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나라 때는 봉건(封建)을 했다가 7국(七國)의 난이 있게 되었고, 당나라 때는 번진을 두었다가 위박(魏博)에 있어서는 관령(管領)하지 못하였으며, 송나라 때에는 또한 두 시대만도 못하게 되었었다. 천고(千古)의 일을 상론(尙論)해 볼 적에 양법(良法)이 없었던 것 같은데, ‘무양법(無良法)’이란 세 글자는 식견 있는 사람은 할말이 아닌 것이다. 법을 어떻게 만들면 오래 되어도 폐단이 없게 되겠는가?”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옛적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법이 오래 되고서도 폐단이 없었던 것은 있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주(新州)는 먼 땅도 아니었는데, 어찌하여 형극(荊棘)이란 말이 있게 되었는가?”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형극이란 말은 참으로 형극이 있어서 한 말이 아니라, 단지 대신(大臣)을 오랫 동안 찬축(竄逐)하지 않은 데임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낙양(洛陽)은 천하의 중심지로써 사방의 나라들이 조공(朝貢)하기에 이정(里程)이 균등(均等)하게 적합했으니, 어찌 제왕(帝王)이 도읍(都邑)으로 정할 만한 땅이 아니었겠는가? 그런데 성주(成周) 이후로는 한나라나 당나라나 송나라가 더러는 관중(關中)을 도읍으로 하고 더러는 변경(汴京)을 도읍으로 했으며, 다시는 낙양에 도읍을 정함이 없었던 것은 무슨 까닭이겠는가?”
하니, 이가환이 아뢰기를,
“주나라 때에는 안으로 승평(升平)의 다스림이 있었고 밖으로 병혁(兵革)의 근심이 없었기 때문에 낙양에다 도읍을 해도 사방을 제어(制禦)해가며 장구(長久)하게 국운(國運)을 누릴 수 있었지만, 한나라나 당나라 이후에는 비록 낙양에 도읍을 하고 싶어도 지세(地勢)가 평탄하게 넓어 가로막힌 산과 빙 두른 하수(河水)의 험준함이 없어 혹시라도 병란(兵亂)이 있게 되면 대비하여 방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세가 사방이 막힌 땅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기주(冀州)는 곧 천하에서 가장 북쪽인데 제요(帝堯)가 도읍으로 했었다. 기주는 지세의 형편이 어떠한 곳이고, 또 기내(畿內) 지방의 연무(延袤)가 그다지 광대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된 것인가?”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기주에 관하여는 선유(先儒)들도 더러 논한 말이 있었고, 주자(朱子)도 또한 ‘기주 밖에 또한 기주와 같은 땅이 있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기주가 가장 북쪽이 되지는 않는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지(輿誌)로 말한다면 기주는 마땅히 어느 지경에 속하게 되겠는가?”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당나라 때에는 태원(太原)이고 송나라 때에는 안남(安南)이며, 지금으로 말한다면 산서성(山西省)이 곧 그 곳입니다. 이른바 유주(幽州)란 곳도 또한 기주 지경에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나라ㆍ당나라ㆍ송나라ㆍ명나라의 폭원(幅圓)은 어느 시대의 것이 넓겠는가?”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한나라 때에는 북쪽으로 삭방(朔方)에 이르렀고 남쪽으로 교지(交趾)에 닿았으며, 서쪽으로 돈황(燉煌)까지에다 동쪽으로는 사군(四郡)을 두었습니다. 당나라 때에는 북쪽은 한나라 때와 같았고 동남쪽은 축소되었으나 서쪽은 황하(黃河)와 황수(湟水)에까지 이르러서 한나라 때와 비교해도 상당한 듯하였으며, 명나라 때에는 하투(河套)와 안남(安南)을 잃어버려 한나라와 당나라에 비하면 좁아진 듯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청(淸)나라의 폭원(幅圓)은 명나라 때와 어떠한가?”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폭원은 명나라 때와 같은데, 삼성(三姓)과 흑룡강(黑龍江)을 덧붙이었기에 명나라의 면적보다는 넓을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송나라의 폭원은 무슨 연유로 축소된 것인가?”
하니, 이가환이 말하기를,
“연운 16주(燕雲十六州)를 석진(石晉)에게 할양(割讓)한 바가 되었고, 안남과 영하(寧夏)를 또한 모두 잃게 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점점 축소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송나라 태조(太祖)가 몸에 황포(黃袍)를 걸치고서 창업(刱業)하였기에 당초부터 이미 용병(用兵)은 말할 것이 없게 되었거니와, 그 이후에 사방에 출사(出師)하였다가 번번이 패전(敗戰)하게 되었으니, 어찌하여 병력(兵力)이 그처럼 다투지 못하게 된 것인가?”
하니, 이가환이 말하기를,
“문(文)과 법(法)을 앞세우게 되었기 때문에 장수(將帥)들이 무재(武才)를 펼 수가 없게 되고, 그 이후에는 군현(郡縣)을 분할하게 되어 편리하게 행사(行事)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송나라가 남도(南渡)한 이후에는 오로지 사천(四川)을 가지고 지탱하여 보존하였으니, 그 사천의 부고(府庫)는 부요(富饒)함이 과연 어떠했었는가?”
하니, 이가환이 말하기를,
“사천은 천하에 제일인 부고라 할 수 있는 데이고, 강남(江南)은 마땅히 그 다음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당나라의 병제(兵制)는 마땅히 역대에 있어서 제일이지 않겠는가?”
하니, 이가환이 말하기를,
“부병(府兵)의 법이 오래지 않아서 확기(彍騎)로 변경되고 확기가 변병(邊兵)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대저 부병에게는 구분 업전(口分業田)이 있었기 때문에 신용(身庸)ㆍ호조(戶調)ㆍ전조(田租)가 있을 수 있었는데, 부병 제도가 이미 무너지면서는 민생들이 토착(土着)하지 못하게 되어 양염(楊炎)이 부득이하여 합쳐서 양세(兩稅)를 만들었던 것이 이로 본다면 병(兵)과 농(農)이 일관(一貫)되어야 하는 것인데, 삼대(三代) 이후에는 마침내 병을 농에다 붙여 놓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당나라 태종(太宗)은 곧 영명(英明)한 임금으로, 정관(貞觀)의 정치는 지극히 훌륭하다고 이를 만하고 번진(藩鎭)의 설치도 또한 응당 조리가 있게 된 것인데, 두어 대(代)를 전하지 못하여 그만 바로 문란해졌음은 또한 무슨 까닭이겠는가? 그 입국(立國)한 규모를 송조(宋朝)와 비교할 때 우열(優劣)이 어떻게 되겠는가?”
하니, 이가환이 말하기를,
“당나라 태종은 영명하였고 세운 법도 진실로 좋은 것이었으나 그런 제도가 오래 가지 않아서 추락되어버렸음은 가법(家法)이 올바르지 못했던 까닭으로 자손들이 능히 세수(世守)하지 못한 데에 말미암아서 그렇게 된 듯합니다. 송조(宋朝)의 세운 법이 비록 당나라만은 못하였으나 여러 대를 인후(仁厚)하게 서로 전해 갔으며, 신종(神宗)의 변법(變法)에 있어서도 또한 전일한 마음으로 백성을 위해서였고 백성에게 몹시 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으니, 가법이 이처럼 올바르게 되었기 때문에 자손들이 능히 세수하여 잃어버리지 않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 번 송나라 신종의 변법한 일이 있고부터는 후세에 이를 감계(監戒)로 삼게 되어 비록 경장(更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또한 감히 마음을 먹지 못하게 되었으니, 한탄스러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 왕안석(王安石)의 청묘법(靑苗法)은 비록 폐단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왕안석의 신법(新法)이 또한 어찌 하나도 취할 수 없는 것이겠는가? 사마광(司馬光)이 정승으로 들어가는 날에 도성(都城) 백성들이 이마에 손을 얹고서 상상하여 바라기를 어떻게 했고, 담책(擔責)하기를 어떻게 했었는가마는, 급급하게 경장하기를 반드시 5일로 한정을 했음은 무슨 까닭이겠는가?“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왕안석의 고역법(雇役法)은 선유(先儒)들도 또한 더러 옳게 여기는 이가 있었으니, 날짜를 한정해 놓고 모두 고쳐버림은 또한 지나치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상위(象緯)의 법도 또한 자못 잘 안다고 하던데, 그런가?”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그런 것에 관한 일은 신이 더욱 공소(空疎)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기삼백(朞三百)의 주(註)는 이것이 곧 옛적의 역법(曆法)으로서 잘못되었을 리가 없을 것 같은데, 삼대(三代) 이후로 지금까지 역법이 일정하지 않았고 분각(分刻)과 절후(節候)도 각자가 같지 않음은 무슨 까닭이겠는가?”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기삼백의 주는 곧 옛적의 역법이라서 지금의 역법과 자연히 같지 않게 된 것인데, 신이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명나라 때의 이마두(利瑪竇)가 수정한 역법이 지극히 정묘(精妙)했었다. 이마두는 외국 사람인데 어떻게 혼자서 정묘한 곳을 풀게 되었고, 또한 과연 능히 충분하게 되어 다시는 잘못되어진 염려가 없게 된 것이겠는가?”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이마두 이후에 또 탕약망(湯若望) 등의 수정한 것이 있었으니, 역시 이마두 자신이 창작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서양(西洋) 사람들은 옛적부터 전문가[專門]가 많아 서로들 전수(傳授)해 가며 책력을 만듦에 있어 의기(儀器)로 측정(測定) 하였는데, 그 의기의 도(度)ㆍ분(分)ㆍ초(秒)가 천체(天體)에 있어서와는 차이 나는 바가 매우 크기에, 서양 사람 자신이 이미 오래 가면 반드시 차이가 나게 된다고 말을 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시각(時刻)의 추천(推遷)이 있게도 되고 계절(季節)의 조만(早晩)이 있게도 되어 역법이 일정하지 않으니, 혹시 천체가 별의 운행이 예와 지금의 차이가 있어서 그러는 것인가?”
하니, 이가환이 말하기를,
“맞지 않는 수가 있음은 역법이 정밀하지 못해서이고, 천체에 있어서는 만고(萬古)에 한결같은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혼천의(渾天儀)로 말한다면 톱니바퀴[輪牙]가 돌게 되어, 춘분(春分)과 추분(秋分)의 서로 맞게 됨이 마치 부계(符契)와 다름이 없으니, 천체의 회전도 또한 그렇게 되는 것인가?”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혼천의가 기계 바퀴로 운전(運轉)하게 되어 있음은 곧 사람의 솜씨로 그렇게 해 놓은 것이고, 천체의 본연(本然)은 아닌 것입니다. 춘분과 추분이 자연히 천체의 운행과 맞게 되어 있음은 곧 톱니바퀴가 성기기도 하고 배기도 하여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삼대(三代) 이후에는 도학(道學)이 밝아지지 않다가 후세에야 비로소 ‘학(學)’이라는 명칭이 있게 되면서 경학(經學)도 있게 되고 사학(史學)도 있게 되었으며, 백가(百家)들의 갖가지 기예(技藝)를 배우지 않는 것이 없게 되었다. 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ㆍ제가(齊家)의 학문은 말할 것도 없고, 차례차례 고금(古今)의 것을 섭렵(涉獵)하여 천지(天地)를 범위(範圍)함과, 역대의 치란(治亂)ㆍ흥망(興亡) 및 전대 사람들의 출처(出處)ㆍ사업(事業)에 이르기까지 해관(該貫)하지 않는 것이 없게 한다면, 이도 또한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무릇 학문에 뜻을 두는 사람들이 모두 주력하는 데가 있는 것이지만, 엄관(淹貫)하려고 한다면 과연 어떤 방법을 써야 하고, 너는 공부를 할 적에 무엇을 주력하였는가?”
하니, 이가환이 말하기를,
“신은 본시 노망(鹵莽)하여 진실로 전공(專攻)하는 학문이 없습니다마는, 대저 자신의 의지(意志)를 꺾으면서 독서(讀書)하여, 집에 있을 적에는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출신(出身)해서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 사람의 당연한 임무입니다. 기(記)에 이르기를, ‘기문(記聞)만 하는 학문은 사람들의 스승이 될 수 없다.’고 하였으니, 박람(博覽)하는 것은 유익할 것이 없을 듯하고, 만일에 천자(天資)가 총명하여 자연히 엄관하게 되는 자는 또한 좋겠으나, 마침내 수신(修身)을 하여 절요(切要)하게 되는 것만 못합니다. 옛사람이 방심(放心)을 도로 찾아 기송(記誦)에 자연히 배가 되는 수가 있었으니, 만일에 모든 잡념(雜念)을 물리쳐 끊어버리고 전심(專心)하여 다스려 간다면 또한 강기(强記)하게 되는 수가 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해박(該博)하여 바로 질문하고 논란하기 좋으니, 승지(承旨)가 질문하기 시작하라.”
하였다. 승지 이진형(李鎭衡)이 말하기를,
“평소에 의아(疑訝)스러운 바가 있었다. 대개 중국(中國)은 천하의 도회지(都會地)이고 인물(人物)의 부고(府庫)이지만 비록 조빙(朝聘)하고 회동(會同)할 때라 하더라도 떠드는 소리가 없었는데, 우리 나라는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를 논할 것 없이 오로지 떠들어대기를 일삼아 하게 되니, 이는 무슨 까닭이겠는가?”
하니, 이가환이 말하기를,
“한 번 풍속이 이루어지면 고쳐지기 어려운 것입니다. 당ㆍ요(唐堯)로부터 주(周)나라 때까지는 1천여 해가 되지만 기주(冀州)에는 오히려 도당(陶唐)의 유풍(遺風)이 있었고, 우리 나라 경상도에는 지금도 신라 때의 무실(務實)하는 유풍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동방(東方)은 옛적부터 본시 기강(紀綱)이 없었기에 그대로 풍속이 되어버려, 떠들어대고 조급하게 나대는 짓이 오래도록 고쳐지지 않은 것입니다.”
하였다. 이진형이 묻기를,
“몇 해 전에 국경(國境)을 나설 때에 보건대, 요동(遼東)의 1천여 리나 되는 들판이 모두가 옥토(沃土)이어서, 만일에 심양(瀋陽)과 산해관(山海關)까지의 사이를 잘 수치(修治)한다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좋은 지리(地利)이었는데, 전연 구혁(溝洫)도 없고 오곡(五穀)도 이루어진 것이 없었으니, 그렇게 큰 대지(大地)를 등한하게 버려 둠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맥(貊) 땅은 오곡(五穀)이 자라지 않고 오직 기장만 자랍니다. 요동과 맥의 착양(錯壤)에서는 경작(耕作)을 힘쓰지 않는 것이 이미 옛날부터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요동은 맥과 가깝기 때문에 오곡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면, 관서(關西)도 또한 요동과 가까운데 살고 있는 민생들이 농사에 힘쓰고 있으니, 그 까닭이 어디에 있는 것이겠는가?”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그런 이유는 신이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진형에게 이르기를,
“경의(經義)를 가지고 질문하라.”
하자, 이진형이 묻기를,
“요전(堯典)에 일중(日中)이니, 조성(鳥星)ㆍ허성(虛星) 등의 별은 모두가 남방(南方)의 별들이다. 사방에 모두 별이 있는데 매양 남방의 별만을 들어 말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이가환이 말하기를,
“대개 뭇 별들이 모두 북극성(北極星)에 호응하게 되는데, 북방(北方)의 별들은 숨어 있고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무릇 성진(星辰)을 말할 적에는 반드시 남방의 별만 지칭(指稱)하는 것이 이런 때문입니다.”
하였다. 이진형이 묻기를,
“《주역》의 건괘(乾卦)에 ‘저녁까지 두려워하고 조심한다.[夕惕若]’는 말이 있는데, 군자(君子)가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때로 말한다면 아침에서 저녁까지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때가 아닐 적이 없는 것인데, 반드시 ‘석(夕)’ 자를 들어 말을 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이가환이 말하기를,
“《주역》을 전요(典要)로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괘(下卦)의 끝 대문이기 때문에 석(夕)을 말한 것인데, 어두워지는 때에 당하면 편하게 쉬며 지기(志氣)가 게을러지기 쉽기 때문에 반드시 모름지기 두려워하고 조심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두워지는 때에 당하면 편하게 쉰다는 것은 야매(夜寐)라는 뜻과 서로 반대가 된다. 만일에 어두어지는 때를 당하여 바로 편안히 쉬게 된다면 어찌 게을러질 염려가 없겠는가?”
하매, 이가환이 말하기를,
“어두워질 때를 당해서란 반드시 저녁에 들어섰음을 말한 것이 아니라, 무릇 혼흑(昏黑)해질 이후부터는 모두 다 어두워짐에 들어서게 될 때일 듯합니다. 군자도 장경(莊敬)하면 날로 자강(自强)하게 되지만 안사(安肆)하면 날로 태만해질 것입니다. 천군(天君)은 백체(百體)의 주재(主宰)가 되니 능히 마음을 먹고 장경해 간다면 일찍 일어나고 밤이 깊어서 자도 자연히 피로하지 않지만, 만일에 조금이라고 방사해지면 그만 태만해지게 되어 단지 지기(志氣)에만 해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또한 혈기(血氣)에도 해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원전】 45 집 9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주-D001] 유주(維州)를 …… 받아들임 :
유주(維州)는 본래 서천(西川)에 속한 지방으로 토번(吐蕃)으로 통하는 요로였는데, 토번의 소유가 되었었음. 당(唐)나라 문종(文宗) 때 이덕유(李德裕)가 이종민(李宗閔)ㆍ우승유(牛僧孺)와 불화하여 서천 절도사에 출보(出補)되어 지형(地形)을 탐색하고 사졸(士卒)을 조련하자, 토번의 장수 실단모(悉怛謀)가 유주 부사(維州副使)로서 내항(來降)하매, 이덕유가 그 성(城)을 점거하고는 그 사실을 장문(狀聞)하였음. 조정에서 모두 이덕유의 계책대로 할 것을 청하였으나, 우승유가 이덕유의 공을 저해하려고 유주를 받아들이는 것의 불가함을 말하니, 문종이 “유주를 돌려주고 실단모를 포박하여 돌려보내라.”고 하였는데, 토번에서 실단모 등 투항했던 자들을 전부 죽였던 고사(故事).
[주-D002] 호씨(胡氏) :
호안국(胡安國).
[주-D003] 교지(矯旨) :
왕명이라고 거짓 핑계함.
[주-D004] 우공(禹貢) :
《서경(書經)》의 편명.
[주-D005] 오복(五服) :
중국 고대(古代)에 왕기(王畿) 밖의 사방 주위를 5백 리마다 차례로 한 구역(區域)씩 정한 전복(甸服)ㆍ후복(侯服)ㆍ수복(綬服)ㆍ요복(要服)ㆍ황복(荒服)의 다섯 등급인 지역. 복(服)은 천자(天子)에게 복종하여 섬긴다는 뜻임.
[주-D006] 원위(元魏) :
북위(北魏).
[주-D007] 육관(六官) :
주대(周代) 여섯 개의 중앙 행정 기관으로, 천관(天官)ㆍ지관(地官)ㆍ춘관(春官)ㆍ하관(夏官)ㆍ추관(秋官)ㆍ동관(冬官)을 이름.
[주-D008] 희령(熙寧) :
송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주-D009] 양전(楊戩) :
송나라 휘종(徽宗) 때 환관(宦官).
[주-D010] 동관(童貫) :
송나라 휘종 때 소인.
[주-D011] 양염(楊炎) :
당나라 덕종(德宗) 때의 문신(文臣).
[주-D012] 상위(象緯) :
일월(日月) 오성(五星).
[주-D013] 기삼백(朞三百) :
이는 《서경(書經)》 요전(堯典)의 ‘기삼백육순유육일(朞三百六旬有六日)’에서 온 말로, 1년의 날수를 가리킨 것임. 그 주에 역법(曆法)을 설명한 것이 있음.
[주-D014] 천군(天君) :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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