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양 동남쪽 570리 지점에 백두산 위치하다

2022. 9. 10. 20:03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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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오재집 3 / () 

사은사 서장관 이중강 전송하다〔送謝恩書狀李仲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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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은 가을에도 더운 먼지 이니 / 遼燕秋日尙炎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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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야리강 강변이 곧 심양이니 / 耶利卽瀋陽
낙타와 호마가 모래벌판에 가득하지 / 槖駝胡馬滿沙塲
서하의  객관에서 공자를 슬퍼하고 / 西河舊館悲公子
조선의 남은 백성 성왕 생각에 눈물 흘리네 / 東國遺黎泣聖王

[-D011] 야리강(耶利江) : 

심양(瀋陽) 근처에 있는 강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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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포재집 1 / () 

심양에서 옛날을 회상하며〔瀋陽懷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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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우리 할아버지가  먹던 을 / 吾祖昔年餐雪地
소손이 오늘 얼음물 마시며 가네 / 小孫今日飮氷行
천시와 인사가 예나 지금이나 같으니 / 天時人事今猶舊
야리강 가에서 곱절이나 슬프구나 / 耶利倍愴情

[-D003] 야리강(耶利江) :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니, 심양에 있는 강 이름으로 보인다. 한국문집총간 171집에 수록된 《옥오재집(玉吾齋集)》 권3 〈사은사 서장관 이중강을 전송하며[送謝恩書狀李仲剛]〉에 “야리강 가는 곧 심양이다.[耶利江邊卽瀋陽]”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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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장관전서 11 / 아정유고 3(雅亭遺稿三) -  3 

혼하(混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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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리강 물이 차서 말 뼈가 저린데 / 耶里水寒馬骨傷
변방에 먼지와 구름이 누렇게 뭉쳤구나 / 飛沙混與塞雲黃
정말로 밉다 만 리 하늘에 단 듯한 저 풀이 / 生憎萬里連天草
왕손의 고향 바라보는 눈을 가려 버리네 / 遮斷王孫望故鄕

혼하(混河)는 심양(瀋陽)에 있으니 일명 야리강(耶里江)이다. 강 위에 효모(孝廟)의 정자를 지은 터가 있다 한다.

조선관 속에 지는 해 비꼈는데 / 朝鮮館裏落暉橫
혼하의 목멘 소리 차마 듣겠나 / 忍聽混河咽咽鳴
성 서쪽의 뜨거운  지금은 파랗게 되었으니 / 熱血城西今化碧
죽어도 산 것 같은 우리 정뇌경이로세 / 死猶如活鄭雷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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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자속편 3 

4(을해) 맑고 바람이 붊

혼하(渾河), 일명 야리강(耶里江)까지 1리를 지났다.

여기서부터 서북쪽을 향하여 심양(瀋陽)까지 9리를 갔다. 

 

경오행권건(行卷乾) / 1836(헌종 2 병신) 

30(기유) 맑고 추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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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뜨기 전에 출발하여 백탑보(白塔堡)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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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출발하여 빙판이 된 혼하(渾河)를 건넜다. 일명 ‘야리강(耶里江)’이라고 한다.

 

지정연기 1 / 1804(순조 4갑자) 

4(무오) 눈이 약간 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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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리를 가서 심양에 머물러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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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탑보(白塔堡)에 도착했다. 백탑은 마을의 동쪽에 있으며, 높이는 수십 길에 8면 13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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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심양(瀋陽)을 향해 출발하여 곤하(昆河), 일명 ‘야리강(耶里江)’을 건넜다. 강 위로는 다리가 놓여 있고, 그 아래에 배 몇 척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로 효종(孝宗)께서 심양에 계실 때 이곳에 정자를 지으셨다고 한다. 노가재(老稼齋) 《연행일기(燕行日記)》에는 “예전에 《시강원일기(侍講院日記)》를 보았더니 ‘만주인들이 세자(世子 효종(孝宗))에게 야판전(野坂田) 주어서 채소를 심게 했다.’ 하였는데그곳이 바로 이곳이다.”라고 되어 있다. 

 

몽경당일사 1 / 마자인정기(馬訾軔征紀) ○ 을묘년(1855, 철종 6) 11[1-16] 

7(병인)

 

혼하(渾河)를 건넜는데 일명 야리강(耶里江)이라 한다. 일찍이 듣건대, 효종이 심양(瀋陽)에 있을 때에 청 나라 사람이 한 구역의 채전(菜田)을 바쳤는데, 이 물가에 있었다. 거기에 정자를 세우고 야판정(野坂亭)이라 하였다 하나, 지금은 그곳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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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盛京)은 옛날 숙신(肅愼)의 영토이고, 심수(瀋水)는 일명 만천하(萬泉河)라고도 하니, 심양(瀋陽)이라는 이름이 여기에 연유된 것인데, 청 태조가 독단으로 여기에 도읍을 정했다. 계묘년에 성을 수축하게 하고 기해년(1599, 선조 32)에 처음 만자(滿字)를 만들었다. 요동 경략(遼東經畧) 양호(楊鎬)가 심양에서 군병을 모아서 네 길로 갈라서 침공해 오는데 47만이라 불렀다. 청 태조가 양호의 군사를 살이호산(薩爾滸山)에서 크게 격파시켰으니, 즉 한어로는 목주산(木廚山) 요문전(姚文田) 시의 주(註)에 나온다. 이다.

여러 가지 방물이 책문에 이르러 봉성장에게 교부되어 차례로 운반하여 심양까지 도착하고, 다시 장경(章京)에 교부되어 북경까지 와서 우리 사신에게 교부되어 바치게 하였다. 건륭 때에 조선 방물이 운송하기가 곤란하므로 특별히 이런 전례를 정하였는데 방물이 도착되지 않으면 수역(首譯) 방우서(方禹叙) 이 여기에 머무른다고 한다.

심양을 성경이라 부르는데 북경ㆍ남경ㆍ흥경(興京)과 함께 4경이라 한다. 그 지방은 동남쪽으로 압록강까지 570여 리이며동북으로 회객탑(回客塔)까지 2000여 리이고, 서쪽으로 산해관까지 800여 리이며 북쪽으로 변문(邊門)까지 450여 리로 몽고 지방의 경계가 되고, 남쪽으로 바다까지 730여 리이며 영고탑(寧古塔)과는 거리가 1300여 리나 된다. 선창(船廠)은 심양과 영고탑 중간에 있다. 북위(北緯) 42도 지점이고 천성석목(天星析木)의 자리에 해당되며 미수(尾宿) 10도의 위치에 들어간다. 옛날 읍루국(挹婁國)이니, 당 나라 때는 심양을 두고, 요(遼) 나라 때는 흥료군(興遼軍)이라 고치고, 홍무(洪武) 때 처음으로 위(衛)를 두었다 

 

계산기정 2 / 도만(渡灣) ○ 계해년(1803, 순조 3) 12[4-24] 

4(을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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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백탑보(白塔堡) 40리를 가서 점심을 먹고, 심양(瀋陽) 20리를 가서 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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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하(渾河)

또 한 가지 이름은 야리강(耶里江)이다. 그 수은 장백산(長白山) 서남쪽에서 나와 요하(遼河)와 함께 태자하(太子河)로 모여 바다로 들어가므로 산천을 셋으로 나눴다고 말한다. 넓이는 우리나라의 저탄(渚灘)만 하고 나무 다리가 있는데, 심양에서 9리이다. 세상에 전해지기로는, ‘효종(孝宗)께서 심양에 계실 때 이곳에다 정자를 지으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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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瀋陽)

심양은 옛날의 숙신(肅愼) 읍루(挹婁)의 땅이다. 발해의 대씨(大氏)가 처음으로 심주(瀋洲)를 설치하고 정리부(定理府)의 관할로 하였다. 요(遼) 나라 때에는 무원소덕(無遠昭德)과 삼하락교(三河樂郊)라고 하였다가 흥료군(興遼軍)이라고 고쳤으며 명(明) 나라 때에는 심양중위(瀋陽中衛)로 삼았다. 청(淸) 나라 때에는 봉천부(奉天府)에 예속하였고 또 성경(盛京)이라고도 하였는데, 청 나라 사람이 창업한 땅이다. 그 북쪽은 몽고(蒙古 몽골)의 지경이고, 그 동쪽은 개원(開原)으로부터 오랄선창(烏喇船廠)을 거쳐 영고탑(寧古塔)에 이르는 1300여 리이며, 서쪽은 산해관(山海關)으로부터 연경(燕京)까지 1400여 리이며, 요동부터 동팔참(東八站)을 넘어 우리 국경에 이르기까지가 500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