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9. 16:23ㆍ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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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8년 임자(1732) 5월 8일(갑자) 비가 옴
08-05-08[10] 시민당에서 사은 겸 동지사를 인견하는 자리에 정사 낙창군 이탱 등이 입시하여 수정한 《명사》와 은화에 관한 일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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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申時)에 상이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갔다. 돌아온 사은 겸 동지사 세 사람이 인견을 위해 입시하고 상이 사책(史冊)을 받는 자리이다. 정사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 부사 행 대사성 조상경(趙尙絅), 행 도승지 조석명(趙錫命), 우승지 이봉익(李鳳翼), 서장관 행 호군 이일제(李日躋), 기사관 이수해(李壽海), 가주서 이석복(李錫福), 기사관 안후석(安后奭), 기주관 정창선(鄭敞選)이 입시하고, 영의정 홍치중(洪致中)과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함께 입시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사책을 지금 막차(幕次)에 봉안(奉安)하였는가?”
하니, 조석명이 아뢰기를,
“사책을 실은 용정(龍亭)을 지금 막차에 임시로 두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세 사신은 숙배 후에 천담복(淺淡服)을 입고서 사책을 받들고 들어오도록 사관은 전유하라.”
하니, 주서가 마침내 명을 받들고 나갔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들이 도착하여 사책을 공경히 맞이하였는가?”
하니, 조석명이 아뢰기를,
“영상과 우상은 공경히 맞이한 뒤에 그대로 궐문 안에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원임 대신들도 왔는가?”
하니, 조석명이 아뢰기를,
“원임 대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과 우상이 함께 입시하도록 사관을 보내 전유하게 하라.”
하니, 사관이 마침내 명을 받들고 나갔다. 주서가 사신 세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평상시 입시와는 다르니 전강(殿講)하는 규례에 따라 승지와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나아와 엎드리라.”
하였다. 정사 이탱이 사책을 받들고 집영문(集英門)의 정로(正路)를 통해 들어왔다. 사책이 도착하자 상이 자리에서 내려가 서 있었다. 부사 조상경과 서장관 이일제가 함께 들어왔다. 이탱이 승지 이봉익에게 사책을 무릎 꿇고 전해 주자 이봉익이 무릎 꿇고 받아서 책상 위에 두었다. 상이 마침내 자리로 돌아가 무릎 꿇고 보자기를 풀어 함을 열어 보고 이르기를,
“궤가 아니라 함이다.”
하니, 이탱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함 속의 황색 보자기를 풀어 보니 그 사책은 바로 칙명으로 수정한 《명사(明史)》였다. 상이 펼쳐 보고 이르기를,
“찌를 붙인 부분은 저들이 한 것인가?”
하니, 조상경이 아뢰기를,
“이 책은 처음에 황제의 열람을 거쳤으므로 사국(史局)에서 인묘(仁廟)의 일을 고친 부분에 황색 찌를 붙여 표시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태조(太祖)의 일에 대해 저들 중 누가 고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는가?”
하니, 조상경이 아뢰기를,
“오배(吳拜)는 청인(淸人)이고 왕유돈(汪由敦)은 한인(漢人)인데, 오배는 자못 고쳐서 바로잡고자 하였는데 왕유돈은 끝끝내 고집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정옥(張廷玉)은 어떻게 하려고 하였는가?”
하니, 조상경이 아뢰기를,
“장정옥은 고치려고 했습니다만 왕유돈 무리에게 저지당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모두 명나라 때의 역사 기록인가?”
하니, 조상경이 아뢰기를,
“원래는 명나라 때의 역사 기록인데 청나라 사람들이 이를 바탕으로 수정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자(自)’ 자가 두 곳에 있는데, 아래쪽 것을 고칠 수 없는 이상 위쪽 것을 고치더라도 유익할 것이 없다.”
하니, 조상경이 아뢰기를,
“명나라 〈본기(本紀)〉에도 이 두 글자가 있으니, 대체로 예부터 요 임금이 선양(禪讓)하여 순 임금이 받은 경우가 아니면 이 두 글자는 사실 개국하는 즈음에 일반적으로 쓰는 말입니다. 게다가 그 당시 우리나라의 공물은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고 그대로 받았는데, 안남(安南)과 점성(占城)의 경우는 사서(史書)에 ‘찬시(簒弑)’라고 썼기 때문에 공물(貢物)을 물리치고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훗날 보는 사람들도 틀림없이 차이를 둘 것입니다.”
하고, 이탱이 아뢰기를,
“신들이 명나라의 〈본기〉를 보고자 하였으나 옹정제(雍正帝)가 이미 안으로 들여 보관해 두었으므로 볼 길이 없었습니다. 저 사람들에게 베껴오게 해서 보자니 믿을 만한 방법이 아니기에 〈본기〉의 초책(草冊)을 보고자 해서 근근이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가지고 왔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올리라.”
하니, 승지가 받들어 올렸는데 바로 명(明)나라 희종 철황제(熹宗哲皇帝)의 〈본기〉였다. 상이 받아서 책상 위에 두고 보고서 이르기를,
“이 또한 《명사(明史)》를 근거로 수정한 것이다.”
하니, 이탱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고, 이일제가 아뢰기를,
“이 책에는 인묘조(仁廟朝)의 일을 실었는데 대략 큰 강령만 썼습니다.”
하였다. 이탱이 또 한 권을 올리자 승지가 봉입하니 바로 명나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본기〉로, 우리 태조의 일이 기록된 부분이었다. 상이 이르기를,
“저 ‘자(自)’ 자는 없애더라도 이 ‘자’ 자는 없애기 어렵겠다. 주자(朱子)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편찬할 때, 촉한(蜀漢)이 정통에 속하는데도 다만 ‘한중왕(漢中王)이 자립(自立)하였다.’라고 썼다. 지난날 중신(重臣)과 유신(儒臣)들이 이것을 명확한 근거로 삼아 고하였으니, 그 말은 좋으나 내 마음은 오히려 석연치 않았다. 그러나 지금 〈본기〉를 보니 또한 어찌할 수가 없다. 비록 ‘자’ 자가 있지만 그 당시 다른 나라의 공물은 받지 않고 우리나라의 공물만 받았으니 그 뜻을 대략 알 수 있다.”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저 사람들이 모두 ‘개국(開國)과 계서(繼序)는 차이가 있으므로 개국 시에 이러한 문자는 조금도 혐의스러워 할 것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도 맞습니다.”
하고, 조상경이 아뢰기를,
“우리나라를 안남과 점성에 비교하면 어찌 현격하게 다르지 않겠으며, 후대의 사람들도 어찌 모르겠습니까. 십칠대사(十七代史)에서 무왕(武王)이 주(紂)의 머리를 베어 흰 깃발에 매단 일을 가장 먼저 말했으니 혁명할 즈음에는 이러한 문자가 진실로 무방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제신(諸臣)들은 등본(謄本)이 인본(印本)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뜻은 그렇지 않다. 저들이 이미 어문(御門)에서 친히 반포하였으니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바란 바는 《명사》 전질(全帙)의 간본(刊本)을 얻고자 한 것이다. 그런 뒤에야 일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 전서(全書)를 보지 못하니 간본이든 등본이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하니, 이탱이 아뢰기를,
“신들이 반드시 간본을 얻고자 하였는데 장정옥이 특히 주저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조상경이 아뢰기를,
“〈본기〉는 20여 권이고 〈열전〉은 74권인데 그중에 네 권이 외국의 일에 관한 것입니다. 〈지(志)〉는 10권인데 당초에 들었을 때는 곧 간행할 것이라고 하였지만 나중에 들으니 간행이 아직도 멀었다고 하였습니다. 또 〈열전〉은 이미 끝마쳤는데 〈지〉는 아직 끝마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중에 옹정제(雍正帝)의 선조(先祖)에 관한 일이 많이 실려 있는데 노(虜) 자와 노(奴) 자를 썼으니, 저들이 호(胡) 자와 노(虜) 자는 꺼리지 않지만 노(奴) 자는 매우 싫어하여서 흉노(凶奴)와 적노(賊奴)의 노 자를 모두 산삭하게 해서라고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명사》는 저들이 산삭하겠지만, 고대의 역사까지 모두 산삭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웅사리(熊賜履)와 왕홍서(王鴻緖)가 〈열전〉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 두 사람이 죄를 입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사초(史草)를 가지고 가서 〈열전〉을 찬정(撰定)하여 올렸습니다. 강희제(康熙帝)가 보고서 ‘어찌 〈본기〉가 없는가?’라고 묻자, ‘휘해야 할 부분이 있어 찬집(撰集)하기 어렵습니다. 명나라 때 글에 노적(虜賊), 미노(迷奴) 등의 글자가 많이 있어서, 남겨 두자니 기휘에 저촉될까 염려되고 산삭하자니 실정에 어긋날까 두려워서 감히 찬집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강희제가 ‘노(虜) 자는 옛적부터 쓰던 것이지만 노(奴) 자는 욕된 말이니, 노(奴) 자는 고치고 노(虜) 자는 그대로 두라.……’라고 하였습니다. 또 왕홍서 등이 올린 것은 야사(野史)이기 때문에 마땅히 사국(史局)으로 하여금 《명사》를 수정(修正)하게 하되, 장정옥을 총재로 삼아 《명사》를 수정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열전〉은 이미 다 간행하였다고 하던가?”
하니, 이탱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조상경이 아뢰기를,
“인묘조의 일은 간본을 보려고 하였으나 볼 수 없었습니다. 옹정제가 오랫동안 보관해 두고서 내려 주지 않는 것은 노(奴) 자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니 휘해야 할 부분을 고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기〉의 본초(本草)는 어떻게 얻어 왔는가?”
하니, 이탱이 아뢰기를,
“본초 역시 이미 보관해 두었기에 보기 어려웠습니다. 한수악(韓壽岳) 등 4인이 높은 가격으로 사국의 본책 20여 권을 사서 가지고 왔으므로 그들에게 베껴 오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때 사관이 인도하여 영상과 우상이 들어와서 나아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는 이 책을 받들어 대신에게 전하라.”
하니, 조석명이 받들어 대신에게 전하자 영상과 우상이 함께 받들어 보았다. 이탱이 아뢰기를,
“이 책을 보기 전에는 우려가 많았습니다. 역대 왕들의 일을 모두 어떻게 썼는지 알지 못하고 종계(宗系)의 일도 어떠한지 알지 못하였으므로 참으로 우려가 많았는데, 이 책을 보니 과연 모든 부분에 잘못된 곳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하고, 조상경이 아뢰기를,
“재신(宰臣) 이하원(李夏源)이 사행을 갔을 때, ‘종계가 아직도 변무(辨誣)되지 않은 곳이 있으니 이보다 앞서 변무해야 한다.’라고 해서 상께서 특교로 인묘(仁廟)의 일을 우선 변무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신들도 염려하였는데 지금 이 책을 보니 매우 다행입니다.”
하고, 이일제가 아뢰기를,
“성종조(成宗朝)에 박씨(朴氏) 성을 가진 왕비의 박(朴) 자를 박(樸) 자로 썼다고 운운하였습니다. 그래서 고쳐서 바르게 하려고 물어보았더니 박(朴) 자로 써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보았더니 과연 고쳐져 있었습니다. 실로 또한 다행스런 일입니다.”
하였다. 조상경이 아뢰기를,
“유홍(兪泓)의 일을 쓴 곳도 있는데, 유(兪) 자를 유(愈) 자로 써놓았으니 한인(漢人)의 음이 서로 비슷하여 가리지 않고 쓴 것입니다. 일(日) 자와 일(一) 자도 통용하고 있기에 물어보니 음이 서로 비슷해서 통용해 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탱이 아뢰기를,
“저 나라의 일을 자세히 알기 위해 이추(李樞)와 김시유(金是瑜)로 하여금 김상명(金常明)에게 통하게 하니, 김상명이 통주(通州)에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저 나라는 가뭄이 매우 심하고 황제의 병이 근래 더 심해지며 사고가 갖가지로 일어나 근심이 한창 심하다고 합니다. 가뭄이 매우 심해서 기설제(祈雪祭)와 기우제를 여러 차례 설행하였는데, 계속해서 재계하느라 황제의 하부(下部) 쪽 병이 매우 위중하다고 합니다. 저 사람들은 김상명을 상대인(常大人)이라 부르고 김삼태(金三泰)를 삼대인(三大人)이라고 부르는데, 두 사람은 모두 김씨 성을 가졌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은 성을 부르지 않으므로 김상명과 김삼태가 상대인과 삼대인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입니다.”
하였다. 이탱이 또 아뢰기를,
“은화(銀貨)에 관한 일은 별단에서 이미 진달하였습니다. 김상명이 ‘전년에 사신이 왔을 때 유보(留保)에게 은 6000냥을 주었는데, 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받지 않았으며 인삼도 받지 않으면서 이후에 사책이 완성되면 예폐(禮幣)를 보내 주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사책에 관한 일이 거의 완성되어 가는데 유보에게 주어야 할 물품을 어떻게 해야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거절하기 어려워 김상명에게 잘 미봉(彌縫)하라고는 하였습니다만, 저쪽에서 재화를 쓰는 도가 매우 난처합니다. 김상명은 또 ‘6000냥은 이미 유보에게 주기로 하였는데 그 외 2000냥을 또 더 썼으니, 이 액수대로 마련해 주어야 마땅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6000냥에 대한 일은 이미 조정에 진달한 것이지만, 김상명의 말이 또 이러하였기에 사행 일행 중에 은이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다른 재물은 없고 다만 들여온 상채청(償債廳) 은이 있었지만 우선 그대로 두게 하고, 매번 그에 맞는 액수를 마련하기 어렵다고 말하였습니다. 김상명은 지난번에 유보에게 주기로 한 은 6000냥과 이번에 더 쓴 은 2000냥, 도합 8000냥을 매번 요구하였는데 반드시 천은(天銀)으로 요구하였습니다. 천은에 대해서는 이미 결정한 일이 없으므로 8000냥 중에서 반은 주고 반은 조정에 돌아가 여쭌 뒤에 변통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김상명이 또 말[馬]을 달라고 하였는데, 신들이 이는 결정한 일 이외의 것이라 아래에서 마음대로 줄 수 없으니 이 또한 조정에 돌아간 뒤에 후일 사행 편에 들여보내겠다고 하였습니다. 김상명이 또 진주(眞珠)를 요구하였으나 역시 주지 않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저곳에 가져간 진주는 크기가 얼마만 한가?”
하니, 이탱이 아뢰기를,
“이는 바로 왜(倭)의 진주이니 크기가 손톱만 한 데 불과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가 소유한 진주도 동래(東萊)에서 난 것인가?”
하니, 이탱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저들이 요구하는 것은 크기를 불문하고 특이한 종류의 진주입니다. 말은 이미 허락하지 않았는데 김상명은 일이 이미 성사되었다는 이유로 많은 것을 요구하며 이르기를 ‘유보는 인삼 한 근도 받지 않은 채 일이 성사되기를 기다렸는데, 지금은 일이 이미 잘 되었습니다. 유보가 지금은 비록 사명을 받고 나갔지만 오래지 않아 돌아올 터인데 약속대로 하지 못한다면 저는 매우 무안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일제가 아뢰기를,
“저곳의 물정을 들어 보니, 모두들 ‘삼태와 유보는 돈으로 매수할 수 있지만 장정옥은 그나마 청렴하면서도 어짊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비 장환(張渙)은 강희제 때의 재상이었고, 증조는 명나라 때의 재상이었으니, 집안 4대가 삼공(三公)을 지내 옹정제가 매사를 장정옥에게 일임합니다. 마제(馬齊)와 진원룡(陳元龍)도 대신인데, 장정옥은 세 번째 각로(閣老)입니다. 다른 대신들은 제독 이하 사람들이 모두 성명을 부르지만 장정옥만은 장중당(張中堂)이라고 부르니, 문장을 잘할 뿐만 아니라 사람됨이 어질기 때문에 이와 같습니다.
통관(通官) 유만권(劉萬權)이라는 자는 박천(博川) 사람의 종자인데 매우 간사하고 남을 잘 속이는 데다가 남의 뜻을 잘 헤아리니 칙사의 행차 때에 나온다면 우리나라에 피해를 끼치는 일이 필시 많을 것입니다. 제독 이하 사람들이 모두 유만권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유만권은 또 김상명과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에 혹 우리나라에서 김상명에게 몰래 뇌물을 주었다고 생각하여 일마다 몰래 살펴봅니다. 이번의 사신 행차 때에는 역관에게 묻기를 ‘이번에는 관화(官貨)가 대부분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정세태(鄭世泰)에게 은을 주어서 그러한 것인가?’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키려고 하는데 겨우겨우 미봉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훗날 사달을 일으킬 것이 몹시 염려됩니다.”
하고, 이탱이 아뢰기를,
“유만권은 전일에 이미 나왔다고 합니다.”
하고, 조문명이 아뢰기를,
“유만권은 사람됨이 몹시 흉악하다고 합니다. 훗날 또 나온다면 폐단이 반드시 많을 것이니 몹시 골칫거리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몹시 괴이한 놈이다.”
하였다. 이탱이 아뢰기를,
“4000냥은 이미 김상명에게 주었고 나머지 4000냥은 돌아가 조정에 여쭈어 후일 사행 편에 변통하겠다고 하였는데, 김상명이 ‘이 일이 만약 번거롭고 어렵다면 일단 그대로 두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장차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나머지 4000냥은 확실히 주기로 한 것은 아닙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을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니, 홍치중이 아뢰기를,
“다들 너무 많다고 여깁니다. 이는 은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요구하는 길이 너무 넓어지면 근심될 만한 점이 없지 않기 때문이니, 줄여서 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근래 국가의 비축이 고갈되었기에 이처럼 구차하게 되었다. 인정(人情)을 쓴다면 수천 냥을 어찌 많다고 하겠는가. 애초에 인묘의 일을 변무하려 했을 뿐이니, 전에는 원래 뇌물을 쓸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그 뒤에 또 태조가 무함받은 것을 보고서 형체도 없고 자취도 없이 고치고자 하였으므로 중간에 뇌물을 쓸 생각을 하였다. 옛날 문왕(文王)이 유리(羑里)에 갇혔을 때 무왕(武王)이 미녀와 옥백(玉帛)을 썼으니, 이 또한 부득이한 일이다. 어찌 그 많고 적음을 따지겠는가.”
하였다. 조상경이 아뢰기를,
“전년에 이미 6000냥을 주기로 하였는데 올해 쓴 것은 2000냥에 불과하니 6000이란 수는 이번 사행이 신세 진 것이 아닙니다.”
하고, 조문명이 아뢰기를,
“8000이란 수가 너무 많지만, 앞으로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데다 뇌물을 써서 역사를 고쳤다는 혐의도 피할 수 있습니다.”
하고, 홍치중이 아뢰기를,
“저들이 요구하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저 나라로 말하자면 사관이 뇌물을 받아 역사를 고치니 한심하다고 할 만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의 일은 우리와 상관없다. 후일 사행을 가서 형세를 보고 조처할 수 있을 테니, 뇌물을 주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뇌물을 준 이상 2000냥을 어찌 아끼겠는가. 말과 진주는 명분이 없는 물건인데 김상명이 무시로 요구하니 민망한 일이다.”
하니, 이탱이 아뢰기를,
“김상명은 역마 중에 한 필을 얻고자 하였지만 신은 조정에 돌아간 뒤에 변통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저 사람이 반드시 표마(驃馬)를 요구한다고 하였는데, 순색마(純色馬)도 요구하던가?”
하니, 이탱이 아뢰기를,
“작고 순한 말을 요구하였는데, 김상명 자신이 쓰려는 것이 아니고 십육왕과 십칠왕이 김상명과 가장 친하므로 얻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홍치중이 아뢰기를,
“이번에 역마 한 필을 주고 왔더라면 좋았을 듯합니다.”
하니, 이탱이 아뢰기를,
“역마를 마음대로 준다면 훗날 반드시 끝없는 폐단이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자, 홍치중이 아뢰기를,
“김상명은 지금 권세와 총애가 있다고 하니, 그중에 반드시 시기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총애가 다하고 권세가 사라져 이 일이 드러난다면 우리나라에 누를 끼칠 염려가 없을 수 없으니, 김상명과의 관계를 차라리 조속히 끊어 버리는 편이 낫습니다.”
하였다. 이일제가 아뢰기를,
“김상명의 일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문관도 아니고 무관도 아니며 달리 재능도 없는데 어떻게 옹정제에게 총애를 얻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듣건대 그의 집은 호화롭고 사치스러워 신하의 의절(儀節)이 거의 없다고 하니 이는 오래 지속될 방도가 아닙니다. 신은 지난겨울 하직 인사를 할 때에 김상명의 일을 대략 진달하였으니, 성명(聖明)께서 아마도 기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신은 그때 ‘무릇 사람의 권세는 성할 때가 있으면 쇠할 때도 있는 법이니, 그를 따르는 자가 있으면 그를 미워하는 자 역시 분명히 있는 것이 이치입니다. 김상명이 조만간 한번 실패하면 우리나라에 누를 끼치는 일이 없을 수 없을 테니 차라리 조속히 멀리하여 관계를 끊어 버리는 편이 낫습니다.’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상께서 ‘옛날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라고 하교하셨기에 신들이 자문을 받들고 간 것입니다. 지금 이 사책에 관한 일은 비록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이러한 길은 결코 열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에 가서 보니 우려할 만한 점이 더욱 많았습니다. 지금부터는 김상명에 대해 분명히 단절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조문명이 아뢰기를,
“훗날 김상명의 죄안(罪案)을 만든다면 반드시 조선과 내통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만약 이와 같이 된다면 우리나라가 욕을 당할 테니 끝내 근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이탱이 아뢰기를,
“지금은 사책이 이미 완성되었으니 김상명이 스스로 공이 있다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주지 않는다면 남을 속인 꼴을 면치 못하니 장차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오직 성상의 처분에 달려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금 만약 갑자기 거절한다면 또한 폐단이 있을 것이다. 저 사람이 요구하는 세 가지 물건은 어떤 것은 주고 어떤 것은 주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진주와 말에 대해서는 ‘본래 기찰(譏察)이 있으니 우리나라의 불행이 될 뿐만 아니라 너에게도 불행이 될 것이다.’라는 식으로 거절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은은 이미 주고 난 뒤이니 어찌 2천이냐 8천이냐를 따지겠는가.”
하였다. 조상경이 아뢰기를,
“저 나라는 원래 면폐(面幣)를 주는 일이 이미 습속이 되었습니다. 만약 일이 잘되어서 만나면 모두 면폐가 있으니 풍습이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는 또한 사책에 관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예폐(禮幣)로써 요구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1000냥의 은화도 저들이 대수롭지 않게 보는가?”
하자, 조상경이 아뢰기를,
“듣건대 김상명의 집은 매우 사치스럽고 화려하여 유리 거울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기타 집물과 거처가 매우 기이하다고 합니다.”
하니, 조문명이 아뢰기를,
“김상명의 권세는 임금을 압도한다고 이를 만합니다. 듣건대 사행이 들어갔을 때 통주강(通州江)에서 계수나무를 실은 화초선(花草船)을 진상하는 것을 보았는데, 가을이 된 뒤 역관들이 김상명의 집에서 계수나무 꽃을 보고 꺾어 왔다고 합니다. 천자나 누리는 기이한 물건을 김상명이 소유할 수 있으니, 그 권세가 성대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이탱이 아뢰기를,
“김상명의 조모는 바로 강희제(康熙帝)의 보모라고 합니다.”
하니, 이봉익이 아뢰기를,
“정묘년(1627, 인조5)의 난리에 김상명의 조모가 포로로 잡혀 궁중에 있었는데 순치제(順治帝)의 유모 역할로 일등공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자, 이탱이 아뢰기를,
“김상명은 12개의 관직을 겸하고 있는데, 대신들이 입시할 때는 항상 영시위 내대신(領侍衛內大臣)으로서 입시한다고 합니다.”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황제가 병이 나서 유리창으로 간격을 두고 있을 때에, 장정옥이 혼자 문서를 가지고 들어가 창문 밖에서 여쭈어 정하는데 김상명 등 몇 사람이 시위(侍衛)한다고 합니다. 장정옥은 재상이고 악종기(岳鍾琪)는 장수인데 두 사람은 모두 한인(漢人)으로 강희제가 청인(淸人)을 신용한 것과는 다른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은, 진주, 말을 주는 것이 괜찮겠는가?”
하니, 홍치중이 아뢰기를,
“은은 예폐와 관계된 일이어서 주지 않아서는 안 되지만 진주와 말은 지금부터 끊어 버리고 주지 않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조상경이 아뢰기를,
“만약 진주와 말을 주지 않으려 한다면 굳이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마치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듯이 하면서 지급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역관들이 응대할 때는 비록 착실한 듯이 하더라도 조정에서는 마치 듣지도 알지도 못한 듯이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홍치중이 아뢰기를,
“역관들은 반드시 저들의 뜻에 영합하고자 하여 매번 좋은 말로 답합니다. 김상명은 분명 역관들이 허락한 이상 조정에서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할 터이니, 그를 저버리는 것 또한 편치 않을 것입니다.”
하니, 이탱이 아뢰기를,
“김상명은 늘 그 자신이 스스로 주선하였다고 하였으며, 신들도 역시 그렇게 말을 해 왔습니다. 앞으로의 우려가 비록 이와 같지만 그는 반드시 은과 진주와 말이 들어오리라 알고 있을 것이니, 만약 보내지 않는다면 장차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이후에는 김상명에게 다시 청할 수 있는 일이 없게 됩니다. 서서히 그 길을 막되, 다만 이번에 들여보내는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홍치중이 아뢰기를,
“역관들이 필시 이미 확정하여 말하였을 것이므로 신은 김상명의 뜻을 저버리는 것 또한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을 잘해서 주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뒷날의 폐단이 될 뿐만 아니라 이번에 보내는 것은 어찌 명분이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은은 저쪽에서 면폐로 요구하고 이쪽에서 면폐로 주는 것이니 명분이 없지 않고 인정도 아니다. 바로 윤필료(潤筆料)이고 면폐이니 주어도 무방하지만, 진주와 말은 명분이 없는 물건이니 이목을 번거롭게 한다는 이유로 거절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였다. 조문명이 아뢰기를,
“왕래한 역관을 불러다 물어보고서 묘당에서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이탱이 아뢰기를,
“〈본기〉를 구입한 자가 모두 개인 돈을 썼는데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 되니 마땅히 포상하는 은전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른 일도 있으니, 한꺼번에 논상(論賞)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천도(天道)가 순환하니 오랑캐는 백 년 동안 지속되는 운수가 없다. 이종성(李宗城)이 전에 ‘몽고(蒙古)와 서달(西㺚)이 힘을 합친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별단을 보니 진실로 그러하다.”
하니, 조상경이 아뢰기를,
“서달도 몽고의 한 부류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만약 영고탑(寧古塔)으로 쳐들어간다면 우리나라는 피해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영고탑을 수리하는 일이 있다고 하니 몹시 괴이하다.”
하니, 조상경이 아뢰기를,
“남쪽 지방에 토적(土賊)의 봉기가 있다고 하는데 이른바 대만(臺灣)입니다. 복건(福建)의 아래쪽 상강(湘江) 근처에 위치하고 해도(海島) 안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지 않는데, 그 세력이 점점 강성해져 남쪽 지방이 요란하다고 합니다.”
하고, 이탱이 아뢰기를,
“지금은 몽고도 순종하지 않아 이미 반역의 형세가 있으니, 심양(潯陽)의 장군이 변화를 살피러 왔다가 몽고에게 쫓겨 갔다고 합니다.”
하고, 이일제가 아뢰기를,
“서달이 거처하는 지역은 장성(長城)의 바깥쪽에 있는데 한나라의 사군(四郡)과 송나라의 영하(寧夏) 근처인 듯합니다. 서쪽으로는 청해(靑海)와 서장(西藏)과 통하고 동쪽으로는 한해(瀚海)와 천산(天山)과 접해 있습니다. 한 무제(漢武帝) 때 매번 막(漠)을 건너는 것을 어렵게 여겼으니, 이른바 막은 바로 사막(沙漠)인데 북해로 가는 옛길입니다. 천리나 되는 사막으로 모래 바람에 인가는 전혀 없고, 달적(㺚賊)의 소굴이 북쪽에 있기 때문에 토벌하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듣건대 달인은 추위와 배고픔을 잘 견디고 오곡을 먹지 않아 사람과 가축을 막론하고 만나기만 하면 살을 갈라 생으로 먹으며, 말 또한 나는 듯이 사막을 달린다고 합니다. 그 추장의 성명은 바로 측왕아이희탄(測汪阿伊希攤)인데 중국인들은 단지 측왕(測汪)이라고 부릅니다.
당초 전쟁의 발단이 생긴 것은 합밀국(哈密國)의 진과(眞瓜)를 다투었기 때문인데, 결국 전쟁과 재화(災禍)가 끊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릇 강(羌)과 번(蕃)은 다른 종족이라고는 하나 본래는 하나의 부류이니, 이른바 서적(西賊)은 바로 강의 종자라고 합니다. 지난해 8월 옹정제가 병사를 보내 출정시켰는데 모든 군대가 패망하였고, 또 마이새(馬爾賽)를 보내 출정시켰는데도 대패(大敗)를 면치 못하고 겨우 필마로 도망쳐 왔습니다. 거용(居庸), 관서(關西), 북몽고(北蒙古)의 경계를 참혹하게 침범하고 습격하는 근심이 있어 옹정제가 몹시 걱정한다고 합니다.
관동(關東) 및 연북(燕北)의 군대는 팔기군(八旗軍)이라 불리는데, 의식(衣食)과 행장(行裝)을 모두 관에서 준비하여 공급하며, 이들 모두는 기병(騎兵)입니다. 나머지 중국의 군대는 녹기군(綠旗軍)이라 불리는데, 모두 보병(步兵)입니다. 근년 출정은 모두 팔기군을 썼는데, 악종기(岳鍾琪)는 녹기군을 이끌고 옥문관(玉門關)을 방비한다고 합니다.
임본유(林本裕)라는 자가 심양 서가(西街)에 거주하고 있는데, 문장을 잘 짓고 식견이 있습니다. 필담으로 서적(西賊)의 일을 묻다가 이어서 중원의 일까지 언급하였는데, ‘윤대(輪臺)의 후회가 있을까 염려됩니다.’라고 답하였습니다. 또 ‘그렇다면 재화가 다하고 병력이 고갈되었습니까?’라고 묻자, ‘그렇습니다. 해마다 출정하는 까닭에 재력이 탕진되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들어갈 때에 동팔참(東八站)을 지났는데 몹시 어수선하였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에게 ‘관동은 곧 근본이 되는 땅인데 여러 해 동안 계속 이렇게 토병(土兵)을 일으키니 근본을 단단히 하려는 뜻을 잃은 것이 아닙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이는 실로 어쩔 수 없습니다. 당초에는 출정한 군병 식솔들의 식량을 모두 나라에서 공급하였으므로 군병이 모두 기꺼이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나라의 비용을 점차 정역(征役)에 다 써 버려 부민(富民)을 뽑아 병사로 만들자는 의론까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민심이 동요하며 관내(關內)도 평안하지 않다고 합니다. 서적이 이와 같으니 천자의 미간이 매번 펴지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이른바 마이새는 곧 각중(閣中)에서 출정하여 대장군인(大將軍印)을 차고 병사를 이끌고 갔습니다. 그런데 진을 치기도 전에 서적이 습격하여 전군이 몰살되고 마이새는 눈 하나를 잃고 근근이 도망쳐 돌아왔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별의 변화가 몹시 괴이하였는데 세 사신이 모두 보았습니다. 2월 6일 저녁에 서쪽 방향 맨 끝에서 별이 쏟아지듯 떨어졌는데 꼬리의 길이가 10여 장(丈)이고 크기는 기둥 같아서 떨어질 때 소리가 났고 용처럼 구불구불한 모양이 매우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아 연경(燕京) 사람들이 두려워하였습니다. 그 후 악종기의 승전보가 이르자 저 사람들은 별의 변화를 서적이 패할 징조로 여겼다고 하는데 그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혹자가 이르기를 ‘강희제의 상(喪)에 별의 변화가 있었고 황후의 상에도 있었다. 지금 또 별의 변화가 있으니 옹정제의 병환이 몹시 위중하여 저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고 있다가 악 장군의 승전보가 이른 후에 조금 안정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만은 복건의 아래쪽에 있는데 정지룡(鄭芝龍)이 일찍이 할거(割據)하던 곳입니다. 근래에 들으니 이들이 해구(海寇)가 되어 쳐들어올 조짐이 있어 연경 사람들도 걱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해동복국지(海東復國志)》는 임진년(1592, 선조25) 이후 지어진 책으로 단지 1건만 있고 이미 본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얻어 보고자 했지만 결국 얻을 수 없었고, 단지 지도 1장만 보았으므로 베껴서 가져왔습니다.
복건은 우리나라와 마주 보는 곳으로 지역이 맨 아래쪽에 있어서 제주(濟州)와 마주 보고 있습니다. 신이 남쪽 고을에서 직임을 맡고 있을 때, 바다 밖의 지형을 직접 살펴보았는데, 바다 가운데에 물마루가 있어서 중국 배가 왕래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는 바닷길이 몹시 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등주(登州)와 내주(萊州) 지역은 한쪽 방면이 동해로 툭 튀어나와 있어 우리나라의 호서(湖西), 해서(海西)와 마주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곳에는 중국 배가 출몰할까 몹시 우려됩니다.”
하자, 조문명이 아뢰기를,
“서장관이 진달한 것은 대체로 근심하는 방도로는 옳습니다. 그러나 강희제는 본래 한 시대 후 바로 망한 군주가 아니고, 옹정제 또한 비상(非常)한 사람입니다. 서적이 비록 그들이 있는 곳에서 소요를 일으키고는 있지만 천하에 뜻을 둔 것은 아닙니다.”
하니, 조상경이 아뢰기를,
“서달과 몽고가 이와 같으니 중국이 판탕(板蕩)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조문명이 아뢰기를,
“몽고는 머지않아 중원에 들어올 듯합니다. 관외(關外)의 사람들은 그 군주의 아름답지 않은 일과 좋지 않은 이야기를 반드시 모두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바로 한인(漢人)이기 때문이니 그 말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전에 소장(蕭墻)이라는 두 글자를 말하였는데 이 말이 옳은 듯하다. 옹정제는 뒷일을 헤아릴 수 없어서 《각미록(覺迷錄)》을 만들게까지 하였는데 아직도 태자를 세우지 못하였으니 이상하다.”
하였다. 이일제가 아뢰기를,
“십사왕을 죽일 수 없었던 것 또한 이유가 있습니다. 십사왕은 먼저 몽고 여자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들을 왕에 봉하자, 두 아들은 ‘아버지가 죄적에 있으니 아들이 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십사왕은 서쪽 변방에 사냥하러 나갔다가 한 여자를 만나 약혼하였는데 바로 목순공주(穆順公主)이니 또한 몽고와 가장 친한 나라의 여자였습니다. 용기와 힘이 남보다 훨씬 뛰어났는데 두 아들을 낳으니 역시 비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옹정제는 십사왕의 두 처가를 두려워하여 감히 죽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십사왕은 나이가 50에 가까운데 옹정제와 형제입니다. 얼핏 들으니 민심은 모두 십사왕을 어질다고 합니다.
또 지금 저 사람들은 옹정제가 전에 비해 조금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전일에 사행이 동팔참을 지날 때, 이따금 옹정제의 괴이한 거조(擧措)에 대한 말을 들었는데 지금은 모두들 ‘구습을 잘 고쳐서 백성을 사랑하는 거조가 상당히 많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옹정제는 근래에 재물을 많이 내어 백성을 진휼하고 또 곡식과 은을 내어 통주(通州)에 두니 사람들이 모두 찬미합니다. 그리고 도중에 왕왕 정문(旌門)이 있어 물어보니 황제가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곳에도 열녀(烈女)가 있는가?”
하자, 이일제가 아뢰기를,
“열녀문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옹정제는 병이 이미 고질이 되었는데 아직도 태자를 세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이탱이 아뢰기를,
“황제의 아들이 두 명인데 태자로 봉하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을 물어보니 ‘왕비로 책봉한 사람의 아들이 아니므로 태자로 봉하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왕비로 책봉한 사람의 아들이 있어서 정미년(1727, 영조3)에 우리나라 의원 오지철(吳志哲)이 들어가 병을 치료하였는데 구제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듣건대 옹정제가 처음에는 재물을 탐하고 몹시 포학하여 신하 중에 재물이 많은 자가 있으면 중죄로 얽어 그 재물을 장부에 들였기 때문에 원망과 비방이 벌 떼처럼 일어났습니다. 그 후 돌연 잘못을 깨닫고 허물을 고쳤으니 이 때문에 칭찬하는 말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일을 물어보니 조정에는 오랫동안 대관(臺官)과 간관(諫官)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조상경이 아뢰기를,
“옹정제는 초년에 간쟁하는 자가 있으면 앞에서 발로 차고 때리게 하여 즉사한 자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간신(諫臣)이 없어서 ‘간(諫)’ 한 글자가 조정에서 전혀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또 진달할 만한 일이 있는가?”
하니, 이탱이 아뢰기를,
“의주(義州)의 일은 진실로 매우 우려할 만합니다. 민심은 분산되었고 관부(官府)는 혼란스러워 전혀 수습될 형세가 없어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킬 생각까지 한다고 합니다. 지금 최선의 계책은 민심을 수습하는 것입니다.”
하고, 조상경이 아뢰기를,
“의주는 외적이 침입하는 길의 초입이니 바로 인후지지(咽喉之地)입니다. 그런데 민심이 이러하니 민심을 수습하는 방도를 묘당으로 하여금 각별히 진념하게 해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서장관도 진달하라.”
하니, 이일제가 아뢰기를,
“의주의 모든 일은 끝이 없습니다. 대개 인민들은 정착지가 없고 항산(恒産)이 없어 공중에서 의식(衣食)을 마련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저 사람들과 단지 하나의 강을 사이에 두고 있으니, 만약 굶주림과 추위가 뼈에 사무치면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쉽게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별도로 무휼(撫恤)을 더해야 합니다. 독고(獨孤) 성(姓)을 가진 사람 중에 쓸 만한 사람이 없지 않은데,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난합니다. 지금 늙어 죽게 되어서는 전쟁을 담당한 데 대한 탄식이 없지 않은데도 관고(官庫)가 예전처럼 넉넉하지 못하여 그 곤궁함을 구제해 줄 수가 없습니다. 대저 민심을 단속하지 않으면 어지러운 때에 도움을 받기 어려울 수 있으니 지금 착실하게 처리하고자 하나 좋은 계책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위화도(威化島)는 곧 태조가 회군한 곳입니다. 신들이 가서 보고자 하였으나 나룻배에 문제가 있어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형편을 대강 들어 보니 만약 그 지역에 진을 친다면 백성들에게 크게 이로운 점이 있어 인심을 수습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진실로 변방을 견고하게 하고 백성을 넉넉하게 하는 계책이며 또한 급한 상황을 구제할 방법입니다. 신과 부윤이 이 일을 논의하였는데 부윤도 좋다고 여겼습니다.”
하자, 홍치중이 아뢰기를,
“위화도에 진을 치자는 의론은 전부터 있었습니다. 의주는 농업에 힘쓰지 않고 단지 상인의 이익만을 추구하였는데 지금은 이익의 통로가 이미 막혀 버려 살아갈 방도가 끊어졌습니다. 이미 살아갈 방도가 없는데 어찌 항심(恒心)이 있겠습니까. 만약 위화도를 개간한다면 비록 농민에게는 이롭겠지만 읍내의 대상인은 갑작스레 농사를 지을 수 없을 테니 조금도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 상류는 저들의 경계에 가까워 늘 범월(犯越)할까 걱정되는데 어찌 그 지역에 진을 친단 말입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이 때문에 망설였던 것입니다.”
하고, 조문명이 아뢰기를,
“서쪽 변방은 매번 범월을 근심하고 있으니 이를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개간할 만한 땅이 오직 위화도만 남았는가?”
하니, 조상경이 아뢰기를,
“다른 섬은 모두 개간하였는데 오직 위화도만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만약 개간을 허락한다면 비록 상인에게는 이익이 없겠지만 반드시 본부(本府)에는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조문명이 아뢰기를,
“사신이 의주의 인심에 관해 아뢴 데 따라 신 또한 아뢸 것이 있습니다. 근래 서로(西路) 지방에 청나라에서 빚을 진 사람의 일족들이 비국에 정장(呈狀)한 일이 있는데, 그 내용에 ‘저희들은 빚을 진 사람의 일족으로서 지난번에 일족에게 징수할 때 집안의 재물을 다 처분하여 빚진 은화를 갖추어 납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저 나라에서 이미 탕감해 준 이상 마땅히 도로 내주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원범(元犯)은 정황이 매우 통탄스러우니 엄격히 징계하는 방도로 볼 때 혹 속공(贖公)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일족들은 원범이 아니고 당초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일족에게 징수한 것이었는데, 저 나라 사람이 이미 탕감해 주도록 하였으니 살갗을 벗기고 뼛골을 뽑듯 혹독하게 거둔 물건을 남겨 둘 명분이 없습니다. 일족들이 또한 몹시 불쌍하니 마땅히 구별하여 탕감해 주어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이미 탕감해 준 뒤인데 일족에게 징수한 재물을 내주지 않는다면 은혜는 저들에게 돌아가고 원망은 나에게 돌아올 것이다. 아뢴 대로 구별하여 탕감해 주라.”
하였다. - 이 단락은 거조를 내었다. -이탱이 아뢰기를,
“신들이 처음에 역관(譯官) 김경문(金慶門)의 말을 들으니 은 200냥을 황력 재자관(皇曆齎咨官)에게 빌려 쓰고 청하여 탕감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들이 역관 변중화(卞重和)에게 물어보니 원래 빌린 일이 없었고 김경문 일행의 은화는 거의 2만여 냥을 넘었다고 하였습니다. 가져간 팔포(八包)로는 8000냥을 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허다한 은화를 불법으로 가지고 갔으니 이것만도 매우 한심하였습니다. 게다가 짐바리가 너무 많아 다 실어갈 수가 없어서 책문(柵門)에서 20여 일을 머물렀습니다. 또 저 나라에서에서 가마를 타고 일산(日傘)을 폈다고 하니 이 또한 조정의 명령으로 금하는 것인데 그가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게다가 교역할 때에 말이 너무 많아 정세태(鄭世泰)가 우리나라의 일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관계된 바가 적지 않은 문제이니 별도로 징계해야 합니다.”
하니, 조상경이 아뢰기를,
“신들이 식전에 책문에 도착하여 일찍 나오려고 하였는데, 이른바 세관(稅官)이라고 하는 자들이 ‘세금이 없어서는 안 된다. 이는 바로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이다. 김경문이 이미 세금을 바쳤고 황력 재자관 역시 세금을 냈다. 더구나 이번 동지 사행은 큰 행차인데, 어찌 세금을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온종일 문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신들이 예전에는 없던 일을 지금 새로 만들 수 없다는 뜻으로 갖은 말을 하면서 방어하자, 온종일 문을 닫고는 내보내 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극력 다투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사행 일행에게서 은자 및 삼승포(三升布) 등의 물건을 더 거두어 세금으로 내고서야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는 예전에는 없던 일로 김경문이 폐단을 일으킨 것이니, 논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김경문이 이른바 수레를 빌리기 어려워 사행이 반드시 낭패를 당할 것이라는 말과 호인(胡人)들이 그를 잡고 등을 지졌다고 하는 등의 말은 모두 극히 터무니없으니 참으로 몹시 원통합니다.”
하자, 이탱이 아뢰기를,
“그의 짐바리가 너무 많아서 호인들이 하나하나 풀어 보려고 하자 그는 몹시 난처해하면서 은자를 쓰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은을 빌렸다고 사칭한 말과 세금을 내도록 만든 일은 모두 매우 놀랄 만하니 각별히 엄하게 다스려 뒷날의 폐단을 막아야만 합니다.”
하니, 홍치중이 아뢰기를,
“뒷날을 기다릴 것도 없이 폐단이 이미 생겨났습니다. 사행과 황력 재자관은 모두 세금을 내고 책문을 나오는 일을 면치 못했으니 이는 눈앞의 막대한 폐단입니다. 김경문을 의금부로 잡아다 신문하여 처리해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김경문을 의금부로 잡아다 처리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이탱이 아뢰기를,
“사행 일행의 일로 감히 아뢸 것이 있습니다. 저곳에서 선래 역관(先來譯官)과 선래 군관(先來軍官)을 우리나라로 보낼 때에는 반드시 나이가 적고 병이 없는 자를 골라 보냅니다. 국가에서 가자(加資)하여 논상하는 것은 진실로 노고를 위로하여 기쁘게 하려는 뜻에서 나왔는데, 이번 선래에게 베푼 가자는 그들에게 도리어 불행이 되었습니다. 무릇 나이 적은 역관이 바라는 것은 등제(等第)인데, 역관 김도행(金道行)은 이번에 가자하도록 하여 등제 기회를 잃게 되었습니다. 등제 기회를 잃게 되면 굶어 죽는 것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에 김도행이 흐느끼며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는 결코 굶어 죽는 것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군관 조상수(趙尙綏)는 가인의(假引儀)로 초사(初仕)하여 수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가자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관직을 잃고 늠료(廩料)를 잃게 되었으니 또한 몹시 낙담하였습니다. 역관은 전부터 사신이 진달하여 본원에서 시상하는 규례가 있었으니 이번에도 김도행이 원하는 대로 시상하고, 조상수도 가자하는 명을 거두어들이고 6품으로 올리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들의 뜻은 어떠한가? 전에도 김두성(金斗成)과 한수악(韓壽岳) 등에게 그들이 원하는 대로 시상한 일이 있었다.”
하자, 홍치중이 아뢰기를,
“역관의 경우 원하는 대로 본원(本院 사역원)에서 처리하는 것은 원래 전례가 있습니다. 그러나 군관을 6품으로 올리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 정도가 지나친 듯합니다.”
하고, 조문명이 아뢰기를,
“나이 적은 역관에게 가자한다면 도리어 몹시 괴로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부터 진달하여 변통하였습니다. 다만 등제는 그들에게는 과거와 같기 때문에 신이 사역원 제조를 맡고 있을 때에 등제를 상으로 삼는 길을 막고 반드시 다른 것으로 시상하였습니다. 조상수에게 가자한 것을 도로 중지하고 6품으로 올리도록 하는 것은 전례(前例)가 없으니 불가함이 확실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이 적은 역관은 가자를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원래 본 아문이 시상한 규례가 있다. 이번에 국가에서 위로하여 기쁘게 해 주려고 한 것이 도리어 그들을 낙담하게 하였으니 논상하는 도리가 아니다. 역관 김도행은 가자를 도로 중지하고서 본 아문에서 상전을 골라 시행하고, 군관 조상수는 가자를 중지하고, 6품으로 올리는 것은 외면적으로 불가하지만 만약 가자를 도로 중지하고 우직(右職)에 제수한다면 이는 마땅히 6품직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뜻으로 해당 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또 탑전 하교를 내었다. -조상경이 아뢰기를,
“조상수는 신의 서제(庶弟)입니다. 진향사(進香使) 편에 그 어미의 병이 위급함을 듣고 급하게 올라왔는데 지금 뜻밖에 이러한 특별한 은혜를 입었으니 신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 리 길을 갔다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기쁘고 다행이다.”
하니, 이탱, 조상경, 이일제가 일어났다가 엎드려 아뢰기를,
“이는 진실로 성상의 위덕(威德)이 미친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서장관은 보고 들은 사건 중 긴요한 말을 뽑아내서 다음번 소대(召對)를 차분히 하게 될 때 입시하여 진달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상은 옹정제가 오래갈 수 있다고 하였지만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
하니, 조문명이 아뢰기를,
“옹정제는 한 시대 후에 바로 망할 군주가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진향사는 언제 강을 건너온다고 하던가?”
하니, 이탱이 아뢰기를,
“이달 17일, 18일 사이에 강을 건너올 듯합니다.”
하였다. 이탱이 아뢰기를,
“신들이 사책을 받들고 나올 때, 말에 실어 날랐고 위에는 황기(黃旗)를 꽂았습니다. 봉성(鳳城)에 도착하자 성장(城將)과 관원 5, 6명이 ‘이것은 황지(皇旨)인가?’라고 묻기에 황제가 반포한 책자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놀라 동요하는 기색을 띠면서 말하기를 ‘책자와 칙서는 모두 황지이고 그대들의 나라에서는 책자가 더욱 귀하다. 그런데 어찌 연여(輦轝)에 봉안하지 않고 도리어 대충대충 실어 가는가? 황제의 칙서가 나갈 때에는 의주의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맞이하여 매우 성대한 의장이 있는 법인데 이번에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이추(李樞)에게 답하게 하기를 ‘이곳은 대국의 경계이고, 또 우리나라 경계를 넘어서 의장을 갖추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나라의 경계에 도착한다면 비로소 의장을 갖춰 나와 맞이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책문을 나간 뒤에는 구경하는 사람들이 미리 중강(中江)에 도착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 수가 배로 많았으니, 모두들 조선에서 응당 위의(威儀)를 성대하게 갖추어 사책을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중강에 이르러서도 영접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의장의 절목은 안주(安州)에 도착해서야 해당 조에서 마련하였으니 지체되었다고 할 만하고, 파발마로 서울에서 출발한 뒤 4일이 지나서야 도착한 것 또한 태만함과 소홀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 사람들의 일은 매번 이와 같은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므로 모욕을 당한 것이다. 사책이 경계에 도착한 후에 의장을 갖추어 맞이해 오는 보고가 매우 긴급하였는데도 여러 날 동안 지체되었으니 실로 놀랄 만하다. 해당 조의 당상도 진작 절목을 마련하려는 뜻이 없어 주강(晝講)에 나아와서야 비로소 진달하였다. 만사를 이렇게 소홀히 하여 의문(儀文)이 갖추어지지 않게 만들었으니 예의를 잘 지키는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경책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해당 조의 당상을 추고하고 본도로 하여금 발장(撥將)을 과치(科治)하게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내었다.
. 홍치중이 아뢰기를,
“교하(交河)의 냇물을 막은 곳은, 동료 재상이 봉심(奉審)하기 위해 왕래할 때에 이미 둘러보았습니다. 또 차사원(差使員)의 보장(報狀)을 보건대, ‘물밑은 모두 가늘고 부드러운 모래와 진흙으로 덮여 있습니다. 물길을 막아 흐르지 못하게 한다면 물이 땅속으로 파고들며 부딪쳐 모래와 진흙이 절로 파이고 지세(地勢)가 아래로 꺼져 쌓아 둔 둑도 그에 따라서 낮아지고 움푹 패여 터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다 보니 장차 완전하게 쌓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물력(物力)을 많이 들여 이미 중요한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는데 이제 와서 중도에 그만둔다면 이전에 해 둔 일이 아깝습니다. 이 일은 애초에 좌참찬 윤순(尹淳)의 진달로 인하여 시작하였으니 반드시 그 형편을 헤아린 점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그에게 한번 살펴보고 지휘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상은 아뢰라.”
하자, 조문명이 아뢰기를,
“신이 당상들과 가서 보니, 방죽을 쌓은 곳의 북쪽 한 부분이 과연 무너져 물이 돌아 못을 이루었습니다. 또 최천약(崔天若)의 말을 들으니, 이후에는 결코 다시 막기 어렵다고 합니다. 다만 신의 소견으로는 포(浦) 남쪽에 대충 막은 곳이 있기 때문에 이쪽은 포락(浦落)하고 저쪽은 진흙이 생기는 형세가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혹 물이 옛 길을 따라 나올 가망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을 거조로 내어 중신(重臣)들에게 다시 살펴보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장관이 얻어 온 지도는 우선 올렸다가 내가 도로 내린 다음에 다시 그 본을 확대하여 만들어서 들이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은 겸 동지사 세 사신 이하를 모두 서계(書啓)하고 ‘부지런히 힘쓴 자’라고 주(註)를 달도록 정원에 분부하라.”
하였다. - 탑전 하교이다. -
[주-D001] 용정(龍亭) :
임금의 조서(詔書), 옥책(玉冊), 예물(禮物) 등을 운반할 때 쓰는 가마로 용정자(龍亭子)라고도 한다.
[주-D002] 인묘(仁廟)의 일 :
인조반정(仁祖反正)에 대해 부정적인 야사(野史)의 기록을 인용한 것이다.
[주-D003] 태조(太祖)의 일 :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조의 권신(權臣)인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술되어 있던 것 등이다.
[주-D004] 자(自) …… 있는데 :
《명사(明史)》 권320 〈조선열전(朝鮮列傳)〉에 “이종(李倧)이 국왕 혼(琿)을 폐하고 자립하였다.[倧廢其國王琿 自立]”라고 하였고 “이성계(李成桂)가 자립하였다[成桂自立/成桂之自立也]”라고 되어 있었던 것을 말한다.
[주-D005] 이 두 글자 :
《영조실록》 8년 5월 8일 기사에 영조가 “‘자립(自立)’의 ‘자(自)’ 자는 끝내 고치지 못하였다.”라고 한 것으로 볼 때, ‘자립’을 의미한다.
[주-D006] 안남(安南)과 …… 때문에 :
《명사》 권321 〈안남열전(安南列傳)〉과 권324 〈점성열전(占城列傳)〉에 ‘찬시(簒弑)’라고 쓴 부분이 보인다.
[주-D007] 저 …… 어렵겠다 :
《명사》 〈조선열전〉의 이성계와 관련된 ‘자(自)’ 자는 없애더라도 〈본기〉의 이성계와 관련된 ‘자’ 자를 없애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주-D014] 김상명이 …… 하였습니다 :
1730년(영조6) 11월 1일에 떠난 동지 겸 사은 정사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가 1731년(영조7) 4월 1일에 입시한 자리에서 아뢴 내용이다. 유보(留保)는 김상명(金常明)과 사촌 처남 매부 사이로 김상명의 부탁으로 사책의 수정에 관여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김상명은 역관 김시유(金是瑜)에게 유보에게 답례를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承政院日記 英祖 7年 4月 1日》
[
[주-D026] 윤대(輪臺)의 후회 :
윤대는 서역(西域)의 땅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일생 동안 서역을 개척하느라 국력을 탕진하였는데, 만년에 이르러서 이를 깊이 뉘우치고 윤대를 포기한다고 공표하여 신민들에게 용서를 비는 조처를 취했다. 《漢書 西域傳》 여기서는 옹정제가 서적(西賊)을 방비하는 데에만 힘쓰다가 한 무제와 같은 후회를 할 수 있다는 뜻으로 쓰였다.
[주-D029] 동해 :
중국의 처지에서 동해이므로 우리나라의 황해를 가리킨다.
[주-D035] 윤순(尹淳)의 진달 :
1731년(영조7) 장릉(長陵)을 교하(交河) 부근으로 옮기는 논의가 있었다. 이때 윤순은 능터 주변의 물줄기가 후대의 공사로 인해 직선으로 흐르고 있어 정취가 사라졌음을 지적하고, 둑을 쌓아 막아서 굽이져 흐르던 옛 물길을 회복하도록 건의하였다. 《承政院日記 英祖 7年 9月 1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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