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0. 20:07ㆍ백두산
연행기 제2권 / 열하에서 원명원까지[起熱河至圓明園] ○ 경술년(1790, 정조 14) 7월[16일-26일]
22일(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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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황토령(黃土嶺), 청석령(靑石嶺)을 넘어 양간방(兩間房)에서 밥을 지어 먹고, 조하(潮河)를 건너 북구(北口)의 조하천 영성(潮河川營城)에서 잤다. 이날은 80리를 갔다.
상산욕(常山峪)에서 서남으로 5리를 가면 황토량자(黃土梁子)가 있고, 칠구(七溝)에도 황토량자가 있는데, ‘황토량자라는 것은 북쪽 지방에서 재의 등성마루를 통칭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이가 있다. 고개 아래에 연대(煙臺)와 발신(撥汛)이 있는데 지명을 마권자(馬圈子)라 한다. 마권자라는 땅 이름이 모두 세 번이나 보이는데, 또한 발신(撥汛)의 통칭이 아닌가 의심된다. 황석량자(黃石梁子)에서 서남으로 7리를 가면 청석령이다. 돌을 뚫어서 길을 내었는데 험준하기가 광인령(廣仁嶺)보다 더하다.
청석령에서 서남으로 18리를 가면 연대와 발신이 있는데 지명을 ‘삼간방(三間房)’이라고 한다. 삼간방에서 서남으로 10리를 가면 행궁(行宮)과 사냥터[獵囿]가 있는데, 지명은 ‘양간방(兩間房)’이다. 양간방에서 서남으로 20리를 가면 연대와 발신이 있는데 지명을 ‘마권자(馬圈子)’라고 한다. 마권자에서 서남으로 12리를 가면 ‘파극습영(巴克什營)’인데, 여기에도 행궁이 있다. 파극습영에서 서남으로 8리를 가면 고북구(古北口)의 조하천 영성(潮河川營城)이 있다. 서북으로 조하(潮河)와의 거리는 겨우 100여 보(步)인데 하수를 끊어 작교(柞橋)를 만들어 북문협(北門夾) 사이로 통한다. 동쪽과 서쪽은 모두 사릉산록(四稜山麓)으로, 진(秦) 나라 때 쌓은 장성(長城)이 언덕 등성마루에 구불구불 둘러 있고, 명 나라 때의 적대(敵臺)는 봉우리 정상에 별처럼 벌여 있다. 기세가 웅장하고 경치도 장관이어서 실로 남북의 큰 방위선(防衛線)이요, 화이(華夷)의 큰 경계이다.
관내(關內)에는 여정(閭井)이 즐비하여 번화함이 평천(平泉), 의주(義州)에 버금간다. 양간방에서부터 서남으로는 산록(山麓)이 점점 낮아지고 점차로 평야가 열리다가 산이 다시 합치면서 들은 다시 없어진다. 무릇 다섯 번이나 그렇게 되풀이한 연후에야 비로소 고북구(古北口)가 되었다. 조하영(潮河營)에서 바깥쪽은 난평부(灤平府)의 경계에 속하고, 안쪽은 밀운현(密雲縣) 경계에 속한다.
조하천영(潮河川營)은, 명 나라 때에는 조하천 수어천호소(潮河川守禦千戶所)를 두었고, 청 나라에서는 조하천 파총(潮河川把摠)을 설치해서 주둔하여 수비하게 하였다. 성의 둘레는 6리인데 6개의 관문(關門)이 있다. 북문이 셋, 중성(中城)의 동문이 하나, 남문이 둘인데 모두 문루(門樓)는 없다. 제독영(提督營)은 성안에 주재하여 본표(本標)와 마란(馬蘭), 태령(泰寧), 선화(宣化), 천진(天津) 등의 4진(鎭)을 통할하고, 직례총독(直隷總督)의 절제를 받는다. 본표의 중영(中營)에는 중군참장(中軍參將) 1인, 중군수비(中軍守備) 1인, 천총(千摠) 2인, 파총 4인, 군사 806명이 있고, 좌영에는 유격(游擊) 1인, 중군수비 1인, 천총 2인, 파총 4인, 군사 806명이 있고, 우영에는 유격 1인, 중군수비 1인, 천총 2인, 파총 4인, 군사 806명이 있다.
고북구의 성수영(城守營)에는 도사(都司) 1인, 천총 1인, 파총 2인, 군병 247명이 있다.
조하(潮河)는 근원이 고북구의 서북 300리에 있는 곽가둔(郭家屯)의 서쪽, 고개평(古開平) 남쪽 경계에서 나오는데, 서쪽으로 난하(灤河)의 근원과의 거리가 겨우 수십 리에 불과하다. 《수경(水經)》의 주(註)에서 이른바, ‘포구수(鮑邱水)가 어이(禦夷)의 북쪽 새중(塞中)에서 나온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동남쪽으로 흘러가서 산욕(山峪) 사이를 지나, 고북구에서부터 서쪽으로 흘러 밀운현계(密雲縣界)에 들어가서는 서남쪽으로 꺾어진다. 현치(縣治)의 서남에 이르러 백하(白河)와 모이는데, 수세가 사납고 급하여 물소리가 조수(潮水)가 들어오는 것 같다.
정림(亭林) 고염무(顧炎武)가 말하기를,
“고북구(古北口)의 북쪽 3리 지점이 조하천이니, 수어천호(守禦千戶)가 있는 곳으로 관(關)이 있다. 《원사(元史)》에 ‘중통(中統) 2년(1261, 고려 원종)에 황제가 친히 여러 만호(萬戶) 및 한군(漢軍)과 무위군(武衛軍)을 거느리고 단순주(檀順州)를 거쳐 조하천에 주둔하였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라고 하였다.
조하는 새외(塞外) 흥주(興州)에서 발원, 고북구에 들어와서 서남으로 밀운(密雲), 회유(懷柔)를 거쳐 우란산(牛欄山)에 이르러 백하(白河)와 합류한다.
넓은 곳은 1, 2리가 될 만하고 좁은 곳은 겨우 2, 3장(丈)에 지나지 않는데, 큰 나무로 목책(木柵)을 만들고 가로세로로 돌을 펴 놓아 융마(戎馬)를 제한(制限)하게 하였다. 여기가 한(漢) 낭중(郞中) 후응(侯應)이 말한바,
“목시(木柴)가 계곡의 수문(水門)에 쓰러져 떨어졌다.”
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물살이 급하여 큰비가 오면 여러 산비탈의 물이 넘쳐 내려와서 나무가 뜨고 돌이 굴러가므로, 해마다 수리해야 한다. 내의 양쪽 곁에는 담을 쌓고 대(臺)를 세웠는데, 동쪽 대 아래 철문관(鐵門關)이 있으니 이것이 출입하는 길이다. 그러나 항상 잠가 둔 채 열지 않는다. 대 위에는 문루(門樓)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총독대신(總督大臣)이 보살피고 상 주는 일로 임하는 곳이다. 관 밖에는 협장(夾墻)이 있다. 외이(外夷)들이 일렬로 서서 앞으로 나와 관 아래서 상(賞)을 받고, 군사들이 두 산(山) 사릉산(四稜山)의 동서 등성이 위에 벌여 서서 북을 치고 피리를 불어서 그들을 위협한다.
아래에는 작은 성이 있는데 이를 북관영(北關營)이라 하며, 두 문이 있고 냇물 어귀 동남쪽에도 작은 성이 있는데 이는 조하천보(潮河川堡)라 하며, 역시 두 문이 있어 수비(守備) 1인이 지킨다. 대의 동쪽, 서쪽에는 산을 따라 성을 쌓았는데 들쭉날쭉 굽고 꺾이면서 1000리나 끊어짐이 없다. 그 요충(要衝)인 곳에는 속이 빈 적대(敵臺)를 세웠는데, 높이가 3, 4장(丈) 되는 것도 있고 너비는 14, 5장 되는 것도 있다. 모든 요충지에는 혹 4, 50보(步)에 대 1개소를 세우고, 요충이 아닌 곳에는 혹 200보에 대 1개소를 세웠다.
그리고 대(臺)마다에 백총(百摠) 1인이 있어 적을 죽이는 일을 주관하고 대두부(臺頭副) 2인을 두어 치중(輜重)을 주관한다. 5대(臺)에 파총(把摠) 1인, 10대에 천총(千摠) 1인을 두었는데 모두 남방 출신의 군병으로 충당한다. 1, 2리마다 방울과 목탁(木柝) 소리가 서로 들리는 곳에 돈대 1개소를 두고, 돈대마다 군인 다섯 명을 두어 망을 보게 한다. 또 길마다 전봉관(傳烽官) 1인을 두어 비상 사태가 있을 때 봉화를 들면, 좌우 양쪽으로 나눠서 서로 전하여, 수백 리에서 다 보고 신속히 호응하여 미리 대비한다. 그러므로 실수하는 일이 드물다. 모든 것이 다 소보(少保) 척계광(戚繼光)이 남긴 계책이다.
조하천영(潮河川營) 성에 올라가 시(詩)를 지었다.
수레는 더디고 사막엔 가을인데 / 車馬逶遲大漠秋
백단산 남으로 보이는 게 신주라네 / 白檀南望是神州
연경 운수는 하늘 끝에 닿았고 / 燕雲樹色連天盡
선대하 물소리는 관새로 사라져 가네 / 宣大河聲入塞流
지난날의 가을 산과 봄물의 감회 / 異代秋山春水感
몇이나 진 나라 달 한 나라 관에서 시름했던고 / 幾人奏月漢關愁
변성의 아녀자들 무정한 마음 / 邊城兒女無情緖
가득히 생화 꽂고 포루로 올라오네 / 滿揷生花上砲樓
또 한 수는,
산 따라 쌓은 성첩 형세도 웅장한데 / 緣山古堞勢猶雄
하늘이 겹 관을 만들어 길이 한 없네 / 天作重關路不窮
열하의 천 리 변을 지나 / 行過熱河千里塞
석양에 다시 명대에 오르네 / 明臺復上夕陽中
그리고 또 한 수는 이렇다.
사릉산 아래 조하가 달리는데 / 四稜山下走潮河
사신 길 추풍에 변방에 와 노래하네 / 漢節秋風出塞歌
관방은 고북을 제일로 치는데 / 第一關防稱古北
묻노니 척공의 방략 어떠했던가 / 戚公方略問如何
[주-C001] 원명원(圓明園) :
북경의 서직문(西直門)의 동산으로 청 나라 세조(世祖)가 번저(藩邸)에 있을 때에 하사된 것이다. 옹정(雍正) 이래로 매년 초봄에 여기에서 청정(聽政)하는 것을 상례로 하였다. 함풍(咸豐) 때에 영불연합군(英佛聯合軍)에 의하여 불에 탔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
白檀山
本文
在京兆密雲縣南二十里。與懷柔縣接界。舊説白檀縣以此名。按密雲之白檀縣爲後魏置。山當以縣得名。漢白檀縣在盧龍塞外。塞外當別有白檀山。漢李廣弭節白檀。又曹操伐烏桓。田疇請從盧龍口越白檀之險。掩其不備。皆指塞外之白檀山而言。不能認爲密雲之白檀也。
密雲縣
本文
秦漁陽郡治。後魏置密雲縣。唐於縣置檀州。改曰密雲郡。元廢縣入檀州。明改州爲密雲縣。清屬順天府。今屬京兆尹。縣踞潮河白河會口之東北。爲京熱大道之咽喉。北近長城。與蒙古交易頗盛。⦿遼置。尋改爲慶雲。故治在今奉天開原縣西南。
월사집 제3권 / 무술조천록 하(戊戌朝天錄下)
옥전(玉田)을 지나면서 전주(田疇) 장군을 생각하며 옥전은 옛날 무종현(無終縣)으로, 전주 장군이 살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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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갈대 우거진 이 누른 모랫길 / 白葦黃沙路
아만이 적의 예봉 무찌른 곳이지 / 阿瞞破敵鋒
사람들은 바야흐로 진록을 좇았건만 / 人方逐秦鹿
한 선비는 노룡을 팔지 않았었지 / 士不賣盧龍
큰 재략은 세상 바로잡을 뜻 품었고 / 大略懷匡世
높은 풍모는 봉작 받기 부끄러워했지 / 高風恥受封
영웅 호걸의 그 사업은 남았건만 / 英豪餘事業
그 어디서 남긴 자취를 물을거나 / 何處問遺蹤
[주-D001] 전주(田疇) :
삼국 시대 사람으로 자는 자태(子泰)이며 독서를 좋아하고 검술에 능하였다. 서무산(徐无山)에 일족(一族)을 거느리고 은거하면서 혼인이며 강학(講學) 등의 법규를 제정하여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덕화를 이루었다. 원소(袁紹)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조조(曹操)가 오환(烏丸)을 정벌할 때 향도(嚮導)가 되어 공을 세웠으나 끝내 봉작(封爵)을 받지 않았다.
[주-D002] 아만(阿瞞)이 …… 곳이지 :
삼국 시대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아명(兒名)이 아만이다. 조조가 오환(烏丸)을 정벌한 것을 가리킨다.
[주-D003] 진록(秦鹿)을 좇았건만 :
진록은 진(秦)나라 사슴으로 제위(帝位)를 뜻한다. 《사기》 권92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진나라가 사슴을 잃자 천하 사람들이 다 함께 좇았는데 고촌(高村)의 발빠른 사람이 먼저 얻었다.” 하였다.
[주-D004] 노룡(盧龍)을 팔지 않았었지 :
조조가 봉작(封爵)을 주자 전주(田疇)가 사양하면서 “어찌 노룡의 변새(邊塞)를 팔아서 작록과 바꿀 수 있겠는가.” 하였다.
> 고전번역서 > 연행록총서 > 관연록 > 관연록 권하 > 1805년 > 최종정보
관연록 권하 / 1805년(순조5, 을축)
22일 맑고 바람이 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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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사가 모두 새벽에 일어나 노구(盧溝)로 행차하였다. 여러 반당(伴倘)이 함께 따라갔다. 노구는 황성(皇城)에서 40리 떨어져 있었다. 노룡새(盧龍塞)가 끝나는 곳으로 노구의 물은 흘러서 혼하(渾河)로 들어간다.
상건하교(桑乾河橋) 남쪽에 이르니 두 갈래 길이 나 있었다. 서쪽으로는 섬서성으로 내달리는데 태항산(太行山)이 그 서쪽에 있고, 남쪽으로는 강남의 여러 성으로 내달으니 이곳은 천하의 도회였다.
……………
태항산이 조ㆍ대(趙代)에 걸치어 있고 / 太行跨趙代
흐르는 물 고금에 한가진데 / 流水古今同
누대는 천상인 듯 급박하고 / 樓迫疑天上
다리는 거울 속 마냥 위태롭구나 / 橋危似鏡中
정회를 풀어내도 정주할 데가 없고 / 散懷無定住
흥취가 일어나도 허공에 내맡기니 / 超興任虛空
원컨대 바람 날개 빌려 타고서 / 願借凌風翼
날아서 물 끝까지 이르고파라 / 飛飛戾水窮
[주-D001] 노룡새(盧龍塞) :
중국 하북성 희봉구(喜峰口)이다. 서무산(徐無山) 기슭의 동쪽에 위치하며, 좌측에 매산(梅山)과 우측에 운산(雲山)을 끼고 있다.
[주-D002] 태항산(太行山) :
중국의 하북성과 산서성(山西省) 경계에 있는 산이다.
[주-D003] 상유(上游) :
상류(上流)와 같은 말인데 나라의 중요한 지역을 뜻하기도 한다.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옛날의 제왕은 땅이 사방 백 리인데 반드시 상유에 거하였다.[古之帝者, 地方千里, 必居上游.]”라는 구절이 보인다.
[주-D004] 조ㆍ대(趙代) :
모두 나라 이름이다. 조(趙)나라는 전국 시대 하북성 서남쪽에 위치한 한단(邯鄲)을 근거로 건국했던 나라이며, 대(代)나라는 지금의 하북성 울현(蔚縣)의 동북쪽에 있던 나라로 전국 이전에 건국하여 기원전 475년에 조나라 양자(襄子)에 의해 멸망되었다. 두 곳 모두 태항산이 위치한 곳이다.
운양집 제3권 / 시(詩)○석진우역집(析津于役集)
옛 노룡새〔古盧龍塞〕 18리의 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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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후를 사양한 높은 의리, 전주에 감동 받아 / 辭封高義感田疇
가을에 든 옛 노룡새에 말을 세웠네 / 立馬盧龍古塞秋
어찌하여 안녹산이 발호할 수 있었던가 / 底事祿山能跋扈
당나라의 형세는 변방 고을에 달려있었네 / 唐家形勢在邊州
[주-D001] 노룡새(盧龍塞) :
하북성(河北省) 희봉구(喜峰口)이다. 서부산(徐無山) 기슭의 동쪽에 위치하며, 좌측에 매산(梅山)과 우측에 운산(雲山)을 끼고 있다.
[주-D002] 전주(田疇) :
169~214. 자는 자태(子泰)로 우북평(右北平) 무종(無終) 사람이다. 동한(東漢) 말에 조조(曹操)에게 계책을 올려서, 오환(烏丸)을 격파했다. 이 후에 출사를 거절하고, 얼마 후 병으로 죽었다.
[주-D003] 안녹산(安祿山) :
중국 당나라의 무장(703~757)이다. 현종(玄宗)의 신임을 받던 중 자신과 현종의 사이를 이간질하려던 양국충(楊國忠)을 제거한다는 명목하에 755년에 반기를 들었다. 이듬해 스스로 대연황제(大燕皇帝)라 칭하고 성무(聖武)라는 연호를 세웠다. 아들인 경서(慶緖)와의 반목으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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