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8. 11:15ㆍ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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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지고(地庫)에 대하여.
[답] 우리 나라가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긴 뒤로 지고를 건립하여 고려의 사초(史草)를 그곳에 옮겨 놓았는데, 이는 대체로 화재를 염려했기 때문이고 또 감추기 위해서였다. 선조조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에 유미암(柳眉菴)도 볼 수 있었던 것인데, 임진왜란 때 도성의 백성들이 난을 일으켜 불태웠으므로 전해지지 않으니 애석하다. 일찍이 당(唐) 나라 때 발행된 《국조전휘(國朝典彙)》를 보니, 홍치(弘治) 5년에 태학사(太學士) 구준(丘濬)이 청하기를 “문연각(文淵閣)의 근처에 별도로 중루(重樓)를 건립하되 목재는 사용하지 말고 벽돌만 사용해야 합니다. 여러 조정의 실록(實錄)과 임금이 지은 글이나 글씨들은 누상(樓上)에 진열해 놓고 내부(內府)의 장서(藏書)는 하층에 진열해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해마다 이 서적을 꺼내어 햇볕에 쪼이되 한림(翰林)의 당상관(堂上官)에게 위임하여 점검한 뒤에 봉해 넣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가상히 받아들였다고 하였다. 목재를 사용하지 않고 벽돌만 사용하자는 것은 화재를 피하기 위한 것이니, 후환을 염려하는 뜻이 깊다고 하겠다.
내가 일찍이 말하기를, “사고(史庫)나 장서각(藏書閣)은 돌로 쌓아 건립해야 한다. 그 밑을 파서 지고(地庫)를 만들되 사면과 바닥은 모두 벽돌로 쌓아야 할 것이다. 만약 난리를 당하여 서적을 실어가기 어려울 경우 은밀히 지고로 옮겨 놓고 벽돌로 덮어 틈이 없게 한다면 적병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하였었다. 이로 인해 또 생각해 보니, 금세처럼 많은 서적이 유행되기는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 이는 대체로 중국과 상통(相通)하면서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의 길이 막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일 혹시 사변이 발생하여 요동과 심양의 길이 끊겨 중국과 통하지 않을 경우 국내에 없어지지 않을 서적이 얼마나 되겠는가?
옛날 신라 애장왕(哀莊王)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간행하여 해인사(海印寺)에 보관해 두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목판(木版)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우리 세조 무인년(1458)에 50건의 서적을 간행하면서 38만 8천9백여 권의 종이를 사용하였는데, 대체로 한 건의 서적마다 7천7백78권의 종이를 사용한 것이다. 종이 1권은 20장이므로 이를 합하면 15만 5천5백60장이고 이를 접으면 31만 1천1백20장이다. 대체로 책 한 권이 백 장에 지나지 않으니, 31만 1천1백20장이면 3천1백11책이 되는 것이다. 신라의 왕이 이단(異端)의 글에 힘을 들여 명산(名山)에 보관하여 지금 천여 년이 되도록 보존되어 있으니, 그 뜻을 쓸모 있는 글에다 두었더라면 어찌 우리 유도(儒道)의 다행이 아니었겠는가. 우주 안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은 경전(經傳), 사서(史書), 성리(性理), 전장(典章)이고 그 다음은 자집(子集)이다. 제가(諸家)의 경서(經書), 이십이사(二十二史), 《통전(通典)》, 《통고(通考)》 및 《도서편함사(圖書編函史)》,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와 기타 교육과 정치에 도움이 되는 글 중에 특히 긴요한 것을 뽑을 경우 백 장 되는 책으로 2천여 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병화(兵火)가 미치지 않는 명산에 석실(石室)을 건축하고 관리를 배치하여 지키되, 법의 조항을 엄하게 하여 대대로 지키게 한다면 어찌 문화를 숭상하는 하나의 큰 사업이 아니겠는가.
다음과 비교
임하필기 제13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가야산(伽倻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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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은 이제는 폐지된 야로현(冶爐縣)의 북쪽 30리에 있으니 지금의 합천(陜川)이다. 이것이 서쪽으로 뻗어나가서 월류봉(月留峯)이 되었다. 이 산에 해인사(海印寺)가 있는데 신라의 애장왕(哀莊王)이 창건한 것으로서, 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구입해서 배에 싣고 오게 하여 여기에 장경각(藏經閣) 120칸을 세우고 수장(收藏)하였는데 아직까지도 그 판이 마치 새것 같다. 이 산 남쪽에는 홍류동(紅流洞)이 있고 그 어귀에는 무릉교(武陵橋)와 서암(書巖) 및 기각(棋閣) 등이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숨어 살던 곳이라고 한다.
[주-D001] 당나라에 …… 수장(收藏)하였는데 :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高宗) 때에 강화(江華)에서 판각(板刻)한 것이며, 조선 태조 7년(1398)에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것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해인사로 옮겨 왔다. 당나라에서 구입해 와서 수장했다는 것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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