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조선의 강토 요동(遼東)의 전 지역과 요서(遼西)의 의주(義州) 및 광녕(廣寧) 이동(以東)

2022. 9. 8. 11:10고대사

 

한국문집총간 순암집 順菴先生文集卷之七  최종정보  

 

이정조(李廷藻) 가환(家煥) 에게 편지를 보내다. 을유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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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하고 있는 글의 범례(凡例)는 이미 초안(草案)했을 줄로 예상되는데, 지금 어디까지 이르렀습니까? 대체로 임금의 명을 받아 편찬하는 글은 대부분 바쁜 중에 만들어졌기에 착오된 부분이 매우 많으니, 《문헌비고(文獻備考)》를 거울삼을 수 있습니다. 어찌 애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동방의 지리지(地理誌) 서적은 실로 착오된 것이 많으니, 이러한 곳은 여러 서적을 합하여 참고해 보면 흠점이 저절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의심스러운 바가 있을 경우 해당 고을에 공문을 보내어 물어보면 또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일을 아는 수령(守令)을 얻기 어려우므로 토민(土民)에게 맡길 수밖에 없으나 일을 아는 토민 또한 얻기 어려우니 매우 딱한 일입니다.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집필(執筆)한 지 19년 만에 완성하여 만세토록 읽을 만한 서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식자(識者)들은 오히려 미비하다고 탄식하였는데, 더구나 수천 년 호란(胡亂)을 겪은 지역을 어떻게 만 한 달 안에 마무리지을 수 있겠습니까.

지리지(地理誌)는 대체로 나라를 경영하는 방책이 들어 있는 것인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같은 서적은 시문(詩文)이 반을 넘습니다. 시문이 과연 나라를 경영하는 데 무슨 도움이 있단 말입니까? 인물을 기록하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당파의 논쟁(論爭)이 일어난 뒤로 의견이 같지 않으니 필시 쟁점(爭點)이 많을 것입니다. 사람의 성명 밑에는 자(字)와 관향(貫鄕)을 쓰고 문장을 잘 하였으면 ‘문장으로 이름이 났다’고 쓰고 경술(經術)이 있으면 ‘경술로 이름이 났다’고 쓰되, 모두 두서너 글자로 단정(斷定)지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훌륭한 언행(言行)이 있더라도 마땅히 생략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 역시 나라를 경영하는 도에는 무관(無關)하기 때문입니다. 이 뜻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역 내의 지리(地理)는 자체에서 당연히 맞는지 탐험(探驗)해 보겠지만, 변방의 경계에 있어서는 반드시 자세히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

고려 때에 서희(徐熙)와 박의중(朴宜中)이 잘 대답하지 않았더라면 북쪽 지역을 모두 잃었을 것입니다. 옛날로 하자면 기자(箕子)의 강토는 지금 요동(遼東)의 전 지역과 요서(遼西)의 의주(義州) 및 광녕(廣寧) 이동(以東)이 모두 조선의 강토에 속하였으니, 중국의 사서(史書)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제가 편찬한 《동사지리고(東史地理考)》 가운데에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도(海島)로 말하자면 숙종(肅宗) 계유년(1693, 숙종 19)에 안용복(安龍福)이 없었다면 울릉도(鬱陵島)가 필시 왜인(倭人)들에게 점거(占據)당했을 것입니다. 서해(西海)에 해랑도(海浪島)가 있는데 이 역시 분명하니, 자세히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 그 밖에 큰 섬이나 무인도(無人島)도 많다고 하니, 자세히 탐색(探索)하여 기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인조(仁祖) 계유년(1633, 인조 11)에 통제사(統制使) 황익(黃瀷)이 조정에 올린 장계(狀啓)에 “표류한 선박이 와서 정박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스스로 말하기를 ‘신라 말엽에 왕자(王子)와 같이 영동(嶺東)에서 난리를 피하였는데 지역이 좁아 수십만 명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배를 타고 해중(海中)에 도착하여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남방국(南方國)이라고 일컬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이 역시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입니다. 공은 혹시 들어서 알고 계십니까? 그전부터 적(賊)들의 진술 내용에 해상(海上)이 많이 거론되었는데 불량한 무리들이 모여드는 것은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니, 나라를 경영하는 사람은 또한 알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숙종 병자년(1696, 숙종 22)에 동래(東萊)의 무과출신(武科出身) 이모(李某)가 표류하다가 하이국(蝦夷國)에 도착하였는데, 그 지역이 일본의 동북쪽에 있어 우리의 육진(六鎭) 및 원춘(原春) 등의 지역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그 또한 자세히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

한스러운 것은, 숙종 임진년(1712, 숙종 38)에 목극등(穆克登)이 와서 두 나라의 국경선(國境線)을 정할 때 백두산(白頭山) 꼭대기에 비석을 세우고 기록하되, 분계강(分界江)를 한계로 삼고 분계라 이름한다고 하였으니, 이게 두 나라의 경계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강이 두만강(豆滿江)의 북쪽 3백여 리에 있는데 그 당시 일을 맡은 사람이 원대한 생각이 없어 공연히 버린 것입니다. 지금 그곳은 야인(野人)들의 사냥하는 곳이 되어 버렸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습니까? 산천(山川)으로 말하자면 반드시 근본과 말단을 자세히 살펴 내력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권양촌(權陽村 권근(權近))이 임금이 낸 시제(詩題)에 따라 지은 시의 주를 참고할 만합니다.

《비고(備考)》 중 지리고(地理考)는 세상을 떠난 나의 친구 승선(承宣) 신순민(申舜民)이 편찬한 것인데, 매우 역량(力量)이 있습니다. 자세히 상고하여 써 넣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우리 나라 변보(邊堡)의 지명(地名)이나 각 고을 방면(坊面)의 호칭은 저속(低俗)하여 볼 것이 없으니, 임금께 여쭈어 정하되, 방언(方言)과 비슷한 음과 뜻을 가진 아름다운 이름으로 고치는 것도 왕도정치(王道政治)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근래에 또 들은 바에 의하면, 옛것을 좋아하는 어떤 선비가 말하기를 “이인역(利仁驛)에 속한 용전역(龍田驛)에 책암(冊巖)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옛날부터 전해온 이야기에 그곳은 백제(百濟)의 국사(國史)가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고 하였으니, 이 일은 박 검서(朴檢書)에게 물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들은 바에 의하면, 철원(鐵原)의 보개산(寶盖山) 안양사(安養寺) 앞에 입석(立石)이 있는데 큰 돌로 덮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 역시 전하는 이야기에 궁예(弓裔)의 국사가 들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믿을 수는 없으나, 고인(古人)은 일을 매우 원대하게 생각하므로 병란(兵亂) 때 깊이 간직해 둘 수도 있다고 여깁니다. 만약 발굴하여 믿을 만한 자취를 얻는다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이 뜻을 모였을 때 상의하여 발굴해 증험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청인(淸人)의 《성경통지(盛京通志)》는 모두 20권인데 각중(閣中)에 있을 줄로 여깁니다. 이 책의 규모도 좋으니, 시험삼아 열람(閱覽)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산물(産物)은 토지를 가진 자가 자세히 아는 법인데, 《여지승람》에는 풍속에서 부르는 이름만 기록하였으며 누락된 것도 많습니다. 좋은 물고기로는 도미(度美)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는데 왜인(倭人)은 도미를 조어(鯛魚)로 이름 붙였고 또 대구(大口)를 설어(鱈魚)라고 하는데, 모두 일정한 글자가 있다. 《여지승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목어(目魚), 명태(明太), 멸어(篾魚) 《성경통지》에는 해청어(海靑魚)로 되어 있다. 의 등속도 모두 빠졌으니, 무엇 때문이란 말입니까? 《성경통지》에는 새, 짐승, 벌레, 물고기, 곡식, 채소, 꽃, 과일, 풀, 나무의 부류들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생김새와 나는 시기를 주(注)로 달아 한눈에 어떤 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였으니, 이게 어찌 좋지 않습니까. 우리 나라 동쪽 삼척(三陟)의 삼촌심(三寸椹), 갑산(甲山)의 들쭉(豆乙粥), 삼수(三水)의 지분자(地粉子)바로 뱀딸기인데 맛이 매우 좋다. 북도(北道)의 용편(龍鞭), 남해(南海)의 황칠(黃漆)은 모두 진귀한 산물이니, 기록해도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있던 산물이 지금은 없고 지금 있는 산물이 옛날에는 없던 것이 많습니다. 이것들도 마땅히 구분해야 하고 책에도 누락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성종조(成宗朝) 때 구빈국(久賓國)이 와서 조공을 바쳤다고 하였는데, 그 나라는 어느 지방에 있습니까?

위의 여러 설은 하나같이 사정에 어두운 부유(腐儒)들의 이야기로서 잠꼬대나 다름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았으면 다행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