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가 8월이면 거기 행역(行役)할 때에는 서늘한 기운이 돌았을 듯하다

2022. 11. 20. 12:19북경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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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5 무인(1878) 11 28(계유) 맑음

15-11-28[30] 성정각에서 돌아온 고부사를 소견할 우부승지 조숙하 등이 입시하여 농사 형편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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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시(申時).
상이 성정각(誠正閣)에 거둥하였다. 돌아온 고부사(告訃使)가 입시할 때에, 우부승지 조숙하(趙肅夏), 가주서 김진호(金鎭祜), 기사관 차유성(車有聲), 별겸춘추 홍승헌(洪承憲), 고부사 조익영(趙翼永), 서장관 홍재찬(洪在瓚)이 차례로 나아가 부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고, 이어서 고부사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니, 조익영이 앞으로 나아갔다. 상이 이르기를,
“먼길에 잘 다녀왔는가?”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왕령(王靈)이 미치는 바이어서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폭염 속에 길을 떠나가서 찬바람 속에 돌아왔으니, 필시 노고가 많았을 것이다.”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돌아올 때 중간에서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는 바람에 길을 재촉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언제쯤 황성(皇城)에 도착하였는가?”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8월 20일에 입성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기가 8월이면 거기 행역(行役)할 때에는 서늘한 기운이 돌았을 듯하다.”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칙사가 강을 건널 시기는 언제쯤 될 것인지 혹 자세히 알아 보았는가?”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전에는 길을 떠난 뒤 1개월이면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달 4일에 출발하였으니, 강을 건널 시기는 아마 다음 달 4, 5일쯤 될 것입니다. 그러나 눈비가 계속 이어지면 심양(瀋陽) 이후로는 진흙길이 많으니, 예정대로 일정을 서두를지는 미리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곳의 진흙길이 몇 리나 되던가?”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거의 수백 리나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즘은 날씨가 매우 차니, 혹 길이 얼기라도 하면 칙사가 나올 시기를 지체할 수 없을 듯하다.”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장관 및 수역(首譯)의 문견록(聞見錄)을 보건대, 황제(皇帝)가 간간이 《대학》을 읽는다고 하니, 황제의 영명함을 알 만하다.”
하니, 홍재찬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8세의 어린 나이로 이미 《대학》을 읽고 있으니, 황제의 총명함이 조숙하다는 것을 알 만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청려(萬靑藜)와 하동선(賀同善)이 황제의 강학을 도와서 인도한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하니, 홍재찬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듣자하니, 전일에 전하는 말로는 옹동화(翁同龢)가 사부가 되었다고 하던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가?”
하니, 홍재찬이 아뢰기를,
“지금은 강학(講學)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옹동화가 무슨 일로 강학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하니, 홍재찬이 아뢰기를,
“그가 이미 체차되어 다른 관직으로 옮겼다는데, 신이 자세히 알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홍장(李鴻章)은 공친왕(恭親王)과 함께 국사에 많이 참여한다고 하던데, 과연 그러하던가?”
하니, 홍재찬이 아뢰기를,
이홍장이 국사에 많이 참여한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은 공친왕이 조정에 참여하지 않고, 이홍장이 주관하던가?”
하니, 홍재찬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목종의황제(穆宗毅皇帝)와 철효의황후(哲孝毅皇后)의 산릉(山陵) 역사(役事)를 흠천감(欽天監)으로 하여금 이제서야 비로소 길한 날을 받도록 했다고 하는데, 이는 과연 재정을 잇대기가 어려워서 그런 것인가?”
하니, 홍재찬이 아뢰기를,
“비단 재정이 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침전(寢殿)에 석곽(石槨)을 쌓는 역사가 방대해서 내년 봄이 되어야 역사를 마칠 듯한데, 이렇게 하는 것은 영구적으로 봉안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사 동준한(董俊漢)과 감찰어사 부대장(傅大章)이 대책을 세우고 의론을 수립하는 데에 큰 공로가 있다고 하던데, 과연 그러한가?”
하니, 홍재찬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흉년에는 대국의 사세로 보아 아마도 어려운 일이 많을 것이다.”
하니, 조익영(趙翼永)이 아뢰기를,
“금년에 13성 내에 항주(杭州)와 전당(錢塘)의 연해변 지역이 수재가 특히 심하여 큰 흉년이 들었는데, 정신(廷臣)이 구제할 방안을 미리 준비해 두기를 주청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재를 입은 지방이 몇 리나 되던가?”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연해 지역 1천여 리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하(慶賀)할 때에 사신은 들어가서 참여하였는가?”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경하할 때에 사신이 들어가서 참여하는 것이 규례입니다마는, 이번에는 예부에서 처음부터 지휘가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름을 고부사(告訃使)라고 하였는데, 참여시키지 않더란 말인가?”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그런 듯합니다. 그리고 진하(陳賀)하는 문제도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황태후의 탄신에도 진하(陳賀)를 하던가?”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이전부터 내려오는 규례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하남(河南) 회경부(懷慶府)에 가뭄이 들어 관제신묘(關帝神廟)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고 전후하여 비를 얻었다고 하니, 관왕(關王)의 정령이 스러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험할 수 있겠다.”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정백(精魄)이 아직도 있어서 매번 이런 영험이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부(知府)가 직접 가서 기우제를 지내던가?”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주군(州郡)의 마을마다 관우(關羽)의 사당을 지어 놓았기 때문에 가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왕을 존숭하는 문제에 대해, 우리나라에서는 집집마다 받들지는 않으나, 다만 존모(尊慕)하는 도리를 갖추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구국(琉球國)이 지금은 중국을 섬기지 않고 왜국(倭國)을 섬긴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들은 바로는 과연 그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구국이 중국을 섬기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서양과 왜국이 교활하게 속임수를 쓰기 때문으로, 그들의 침노를 견디지 못하여 그런 것인데, 중국도 거두지 아니하고 방치해 둠으로 해서 이 지경이 되었으니, 매우 한탄스럽다.”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이 나라가 바다 가운데 섬나라가 되어서 왜국과는 인접해 있고 중국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이 같은 일이 있는데도 그대로 두고 문제 삼지 않는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올 봄에 광동(廣東)과 향강(香岡) 지방에 유룡(遊龍)이 있었는데, 서양 사람이 발견하여 포를 쏘았기 때문에 한재가 발생하게 되었고 사람도 많이 다쳤다고 한다. 서양 사람이 다치는 것이야 매우 상쾌한 일이다만 중국 사람은 죄도 없이 화를 당하였으니, 정말 참담한 일이다.”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중국 사람이 재앙에 걸린 것은 참으로 참담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파손된 가옥이 수천 호나 된다고 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다쳤다는 것을 알 만하다.”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양 사람들이 관(館)에 있을 때에 그들이 좋아하는 물건이 많이 소실되었다고 하니, 역시 상쾌한 일이다.”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양 사람들이 중국에 들끓는 것도 일시적인 운수이다. 올 봄에 있었던 이 일도 아마 하늘이 성진(腥塵)을 싫어하여 재앙을 내리게 한 것일 것이다.”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과연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인과 양인이 전처럼 황성(皇城)에 많던가?”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왜인이 관에 머무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들은 것이 없습니다마는 양인의 경우는 여전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대신 이홍장(李鴻章)이 그들의 기세를 꺾은 뒤로 전에 비하면 크게 줄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인이 다친 것을 보고 중국 사람도 속이 시원하다고 하던가?”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사람들이 많이 전해 주는 것을 보면 필시 시원하게 여긴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인과 왜인은 그들의 공간(公幹)을 보내 중국과 교통(交通)을 하는데 중국도 이처럼 서로 교통을 하던가?”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자세한 소식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복건(福建)과 절강(浙江) 등지가 해마다 흉년이 든데다가 이번에 수재를 당하고 나자, 백성들이 유랑하면서 어린아이들을 버린다고 하니, 듣기에 몹시 측은하다.”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과연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밖에 주달할 만한 일이 혹 있는가?”
하니, 홍재찬이 아뢰기를,
“신이 관(館)에 있을 때 9월 27일자 경보(京報)를 보니, 강남도(江南道) 감찰어사(監察御史) 주개명(周開銘)이 주달한, ‘강서(江西), 요주(饒州), 호북(湖北), 안륙(安陸), 형주(荊州), 호남(湖南), 상덕(常德) 등 7개 읍이 여름이 가고 가을로 접어드는 사이에 다시 교룡(蛟龍)이 나타나서 인가를 무너뜨리는 바람에 누렇게 익어가던 곡식이 썩고 말았으니, 계획을 세워 진곡(賑穀)을 내려주기를 청합니다.’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내(關內)와 관외(關外)가 비록 재해를 입었으나, 통틀어 말하면 풍년이라 하겠던가?”
하니, 홍재찬이 아뢰기를,
“풍년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의 물정이 전만 같지 못하던가?”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계속되는 흉년으로 백성들은 궁핍하고 재정은 고갈되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방에서 일어나는 비적(匪賊)들은 과연 대단하지 않던가?”
하니, 홍재찬이 아뢰기를,
“대단한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에 회비(回匪)와 묘비(苗匪)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도 있다고 하던가?”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모두 서쪽 지방의 오랑캐 무리인데, 침범할 때 보면 있고 물러간 뒤에 보면 없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에 아직도 오랑캐로 번방(藩邦)을 삼은 곳이 많다고 하던가?”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서남쪽 지방 이외의 오랑캐는 이전부터 그러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가는 데 시일이 며칠이나 걸렸는가?”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달로는 6개월이고 날로는 154일이 걸렸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다녀온 사신은 황제를 뵈었는가?”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전에는 진하하거나 동가할 때에 지영(祗迎)하는 자리에 참석하게 되면 황제를 우러러보았다고 하는데, 이번 10월 1일 태묘(太廟)에 전배할 때에는 처음부터 지휘가 없었으므로 뵙지를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신은 황제를 뵙지 못하였더라도 역관들 중에서 혹 본 자가 있는가?”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태묘가 정문 내에 있으니 역관은 들어가서 참여할 수가 없었으므로 슬쩍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단지 궐문 밖에서 예를 행하였다면 어떤 문이 정문이 되던가?”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대청문(大淸門)이 정문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물가가 전에 비하면 배나 더한다고 하니, 인심이 점점 야박해져서 그런가?”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칙사가 세전에 압록강을 건너가겠다고 하던가?”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처음 듣기로는 10월 그믐 이전에 건너가겠다고 하였는데, 이달 4일에야 출발하였다면 세전에 강을 건너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칙사의 일행이 만부(灣府)에서 경성까지는 보름이 걸릴 것이다. 보름 이후에 서울에 도착하게 되면 세전에 강을 건너 되돌아가는 것은 장담할 수 없겠다.”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 국경에 들어서니, 농사의 형편은 어떠하던가?”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풍년이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임진강에 이미 얼음이 얼었던가?”
하니, 조익영이 아뢰기를,
“얼기는 하였으나 견고하지 않아서 얼음을 깨고 배를 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부사는 먼저 물러가라.”
하고, 이어 사관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승지와 사관이 차례로 물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