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나라와 당나라의 인구수

2022. 9. 18. 12:41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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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집 제13권 / 정문(程文)

향시책(鄕試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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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의 재용과 호구의 액수는 사책(史冊)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는데, 시대마다 그 액수가 각기 다른 점이 눈에 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수(隋)와 당(唐)의 경우는 매우 의아하게 생각되는 점이 있다. 수나라 고조(高祖)가 진(陳)나라를 평정한 처음에는 호구가 400여 만이었는데, 양제(煬帝)의 대업(大業) 5년(609)에 이르러서는 무려 890여 만으로 증가하였고 부고(府庫)의 재물도 흘러 넘쳤으니, 한(漢) 이래로 이와 같이 번성한 적은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당나라가 천하를 소유함에 미쳐서는, 고조(高祖)로부터 고종(高宗) 2년(651)에 이르는 사이에 호구가 무려 380여 만으로 감소되었으므로, 태종(太宗)도 수나라의 융성에 대해서 탄복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수나라는 고조로부터 대업 5년까지 불과 30여 년 동안에 양제의 사치 생활이 극에 달했는데도 그토록 융성하였고, 당나라는 고조로부터 고종 2년까지 역시 불과 30여 년 동안에 태종이 근검하며 선정을 베풀었는데도 이토록 감소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나 당나라는 오래도록 유지된 데 반해서, 수나라는 얼마 되지 않아서 금방 망하고 말았다. 이것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장구한 기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재용과 호구만 믿을 수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전성(全盛)의 기틀을 지키면서 무궁한 기업을 향유하려면 과연 무엇을 힘써야 하겠는가? 만약 선을 행하면 다스려지고 악을 행하면 망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진부하고 천박한 언론이 되고 말 것이다. 제생(諸生)은 지금까지 아무도 말하지 못했던 새로운 의논을 표출하여 마음을 다해서 답변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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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 제118권 / 경사강의(經史講義) 55 ○ 강목(綱目) 9

[당 무종(唐武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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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신재식(申在植)이 대답하였다.]
선가(仙家)와 도가(道家)는 서로 가깝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유향과 반고의 책에서 비로소 파(派)를 나누어 구별하였습니다. 도가에 선가가 있는 것은 불교에 사사(邪師)와 마종(魔宗)의 종파가 있는 것과 같고 유가(儒家)에 양명(陽明)과 상산(象山)의 학파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니, 호씨의 설이 고루함을 면치 못할 듯합니다.

이해에 천하의 호구(戶口)가 모두 495만 5151호였으니, 개성(開成) 연간의 호적과 비교해 보면 4만 1600호가 감소한 것이다. 무종이 승려와 비구니들에게 칙령을 내려 환속시킨 것이 26만 500명이니 의당 그 호구가 전에 비해 증가되어야 하는데, 증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때가 개성 연간과의 사이가 겨우 6년밖에 안 되는데도 4만 1600호나 되는 많은 인구가 감소한 것은 그 까닭이 무엇인가?

[생원 김회연(金會淵)이 대답하였다.]
백성이 감소하는 이유는 전쟁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태화(太和 문종(文宗) 초기의 연호)부터 개성(開成 문종 후기의 연호) 연간까지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무종 때에 이르러 회흘(回紇)과의 전쟁이 있었고 또 소의(昭義)를 정벌하였으니, 이것이 6년 동안에 호구가 점차 감소된 까닭입니다. 승려와 비구니를 환속시킨 명령은 7월 이후에야 겨우 내려졌고 탁지(度支)에서 인구수를 헤아려 보고한 것은 곧 한 해가 끝나기 전이었으니, 아마도 필시 상계(上計)한 호적에 갖추어 기재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증가된 호구는 호적이 온전하지 못하고 줄어들 만한 이유는 많았으니, 4만 호가 줄어든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상은 당 무종(唐武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