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8. 12:40ㆍ고대사
> 고전번역서 > 창계집 > 창계집 제16권 > 잡저 > 최종정보
창계집 제16권 / 잡저(雜著)
한나라 서역 도호 감연수 등이 질지를 격파한 노포를 의작(擬作)하다〔擬漢西域都護甘延壽等破郅支露布〕
[DCI]ITKC_BT_0432A_0170_070_0040_2019_005_XML DCI복사 URL복사
………..
옛사람들이 변문(騈文)을 애당초 그리 자주 짓는 편은 아니었거니와 의작(擬作)에 대해서는 더욱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점차 고문(古文)을 좋아할 줄 알고부터는 대체로 그러하였다. 그런데 유독 동래(東萊) 여공(呂公)은 〈당정양총관파토번노포(唐定襄摠管破吐蕃露布)〉를 몹시도 꼼꼼하게 지었으니, 여공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명유(名儒)이거늘 도리어 이러한 글을 기꺼이 모의(模擬)하여 엮어 내기를 과장(科場)의 늙은 수재(秀才)를 흉내 내었는가? 아마도 여공에게 다른 감회가 있었던 것인가?
내가 생각하건대, 여공이 살던 시대에는 서북방 오랑캐가 일으킨 화란(禍亂)이 그 어느 때보다 심하였다. 두 황제가 북방으로 순행하였고 온 천하가 적에게 유린되어, 결국 송나라 조정은 장강(長江) 이남으로 쫓겨나 구구하게 사직을 유지하니, 겨우 일개 군왕(郡王)에나 비길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공이 어찌 진정 불평스러운 감정이 없었겠는가. 이 글도 역시 까닭이 있어서 지었을 것이다. 당시 충신과 의사들로 하여금 무릎을 치고 외면서 누구나 이를 갈고 피눈물을 뿌리며 곤오(昆吾)의 북쪽으로 뜻을 치달리게 하려는 것이었으리라.
아아, 여공의 뜻이 절실하도다. 이 어찌 한갓 심심풀이 글 장난일 뿐이겠는가. 여공의 뜻을 안다면 이 글을 지은 나의 뜻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D054] 동래(東萊) 여공(呂公) :
송나라 여조겸(呂祖謙, 1137~1181)을 가리킨다. 자는 백공(伯恭), 호는 동래, 하동(河東) 무주(婺州) 사람이다. 주희(朱熹), 장식(張栻)과 절친하여 그들과 함께 ‘동남삼현(東南三賢)’이라 일컬어졌으며, 주희와 함께 《근사록(近思錄)》을 편찬하였다. 저서에 《동래좌씨박의(東萊左氏博議)》, 《동래역설(東萊易說)》, 《동래집(東萊集)》 등이 있다.
[주-D056] 두 황제가 …… 형편이었다 :
송나라 정강(靖康) 2년(1127) 금(金)의 공격으로 수도인 변경(汴京)이 함락되고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포로로 잡혀갔는데, 이 사건을 정강의 변이
라고 한다. 이후 난을 피해 남쪽으로 도망한 흠종의 아우 강왕(康王)이 임안(臨安)에 도읍함으로써 북송(北宋)은 멸망하고 남송(南宋)이 성립되었다.
[주-D057] 곤오(昆吾)의 …… 것이었으리라 :
곤오는 신강(新疆) 합밀현(哈密縣) 지역으로, 한나라 때에는 ‘이오(伊吾)’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권18 〈장궁열전(臧宮列傳)〉에 “장궁과 마무의 무리는 칼을 어루만지고 손뼉을 치면서 이오의 북쪽에서 뜻을 치달린다.[臧宮馬武之徒, 撫嗚劍而扺掌, 志馳於伊吾之北矣.]”라는 말이 나오는데, 장궁과 마무는 모두 후한 때 장군으로 서북방 이민족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곧 이 말은 금나라를 무찔러 빼앗긴 고토를 회복할 의지를 품는다는 뜻이다.
고전번역서 > 열하일기 > 구외이문 > 구외이문 > 최종정보
구외이문(口外異聞) / 구외이문(口外異聞)
합밀왕(哈密王)
[DCI]ITKC_BT_1370A_0240_010_0320_2003_002_XML DCI복사 URL복사
….
“회흘(回紇)의 일명은 회골(回鶻)이다.”
하였고, 《원사(元史)》중에는 외올얼부[畏兀兒部]가 있는데 외올(畏兀)은 곧 회골이었고 회회는 또 회골의 변한 소리다. 또 《고려사(高麗史)》에,
“원(元)의 사람이 고려 사람으로 하여금 외오얼[畏吾兒] 말을 가르쳤다.”
하였으니, 외오얼은 또 외올(畏兀)의 변한 말이다. 합밀은 한(漢) 때에는 이오(伊吾)에 속한 땅이요, 당(唐)에 이르러서는 이주(伊州)에 속한 땅이다. 고려 말기에 설손(偰遜)이란 이가 곧 회골 사람으로서 원에 벼슬하다가 공주(公主)를 따라 동으로 와서 이내 고려에 벼슬을 하였고, 이조(李朝)에 들어와서 벼슬한 설장수(偰長壽)는 곧 설손의 손자이다.
고전번역서 > 해행총재 > 일사집략 > 일사집략 > 문답록 > 최종정보
일사집략(日槎集略) 인(人) / 문답록(問答錄)
횡빈항의 대청이사서(大淸理事署) 역원(譯員) 일본 사람 임우륙(林又六)이 내방해서 문답하였다
[DCI]ITKC_BT_1406A_0030_010_0280_2003_011_XML DCI복사 URL복사
…내가 말하기를,
“그대는 대청(大淸)의 관청 안에 있으니, 근일에 청국 형편이 어떤지 혹 말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그가 말하기를,
“이홍장(李鴻章)은 용병(用兵)할 뜻이 없고, 좌종당(左宗棠)은 감숙성(甘肅省)의 총독이 되어 합밀국(哈密國)을 원조하고, 러시아를 견제하여 러시아로 더불어 여러 번 교전하여 위엄이 외이(外夷)에까지 진동한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서양 사람이 청 나라 사람을 업신여긴다고 들었는데, 그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니, 그가 말하기를,
“청 나라 사람은 대국에 태어났지만, 그 사람됨에 비열해서 1문(文)의 돈을 아끼기를 산과 같이 여깁니다. 서양 사람들은 모두 부상(富商)으로서 천금을 가볍게 여깁니다. 이는 풍속과 인물의 경중을 잘 알아보고 나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영조 17년 신유(1741) 5월 21일(갑신)
17-05-21[02] 한림 추천에 대한 폐단과 김원재의 일과 당습에 대한 헌부의 아룀
[DCI]ITKC_JT_U0_A17_05A_21A_00020_2005_017_XML DCI복사 URL복사
……
. 임금이 또 말하기를,
“북도(北道)의 오국성(五國城)에 휘종(徽宗)ㆍ흠종(欽宗)의 무덤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아닌가?”
하니, 오수채가 말하기를,
“백성들이 서로 전하기를 황제총(皇帝塚)이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당시 고려(高麗)에 길을 빌리려고 하였다면, 오국성(五國城)이 북도(北道)에 있었음은 의심할 것이 없다. 이미 황제총이라고 하였으며 또 무덤 모양도 있다고 하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나무하는 일과 짐승 치는 일을 금지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 영조실록 > 영조 3년 정미 > 11월 8일 > 최종정보
영조 3년 정미(1727) 11월 8일(경신)
03-11-08[01] 검토관 조진희가 북관 여러 고을의 군비가 허술함을 아뢰다
[DCI]ITKC_JT_U0_A03_11A_08A_00010_2005_005_XML DCI복사 URL복사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여 《중용(中庸)》을 강론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조진희(趙鎭禧)가 북관(北關)의 여러 고을에 군비(軍備)가 허술함을 진달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회령(會寧)은 성중(城中)에 우물이 없어 주민(住民)들이 모두 성 밖에 나가서 물을 길어가니, 위급한 때에 믿을 만한 곳이 되지 못합니다. 들은즉 ‘본부(本府)의 수십 리 밖에 운두성(雲頭城)이 있는데 천연(天然)의 험준(險峻)함이 매우 장대(壯大)하고 성중에 또 우물이 있으며 변방 사람들이 서로 전해 이르기를 완안성(完顔城)이라 하고 혹은 오국성(五國城)이라 일컫는다.’고 합니다. 이제 만약 이 성을 수리하여 회령부(會寧府)를 옮기거나 혹은 보라 첨사(甫羅僉使)로 하여금 살게 한다면, 부령(富寧)으로 더불어 무산령(茂山嶺)을 협수(夾守)하여 족히 내외 관방(內外關防)의 형세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니, 마땅히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형편을 살피고 다시 상확(商確)하여 장문(狀聞)하도록 한 다음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고전번역서 > 청장관전서 > 청장관전서 제67권 > 입연기 하 > 최종정보
청장관전서 제67권 / 입연기 하(入燕記下)
정조 2년 윤6월
[DCI]ITKC_BT_0577A_0670_010_0030_2000_011_XML DCI복사 URL복사
……..
5일(계해) 저녁에 비가 약간 왔다. 45리를 가 대방신(大方身)에서 점심을 먹고, 45리를 가 심양(瀋陽)에서 유숙했다.
○ 영안교(永安橋)는 심양 서교(西郊)의 큰 다리로서 방금 수리하느라고 목석(木石)이 비쭉비쭉 길가에 쌓여 있는데, 진흙에 반은 매몰(埋沒)되었다. 말과 수레가 진흙에 빠져 잘 가지 못하니 요야(遼野) 2천 리 길에 최초로 험난한 길을 만났다. 초혼(初昏)에 심양에 당도하였다.
○ 심양서원(瀋陽書院)을 방문하였다. 교관(敎官) 배진(裵振)은 자(字)가 서로(西鷺)로 산서 평양부(山西平陽府) 사람인데 용모도 매우 순후(醇厚)하고 학문도 해박하였다. 내가 오국성(五國城)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그는 심양성(瀋陽城) 북쪽 개원현(開元縣)이 바로 옛날 오국성이라고 대답하고, 또,
“심하(深河)는 흥경(興京)과 성경(盛京) 사이에 있는데 여기저기에 경관(京觀)이 있으니 곧 고려인총(高麗人塚)입니다.”
하니, 이는 대개 김응하(金應河)가 패사(敗死)한 곳인 듯하다.
고전번역서 > 번암집 > 번암집 제8권 > 시 > 최종정보
번암집 제8권 / 시(詩)○재필록(載筆錄)
회령의 척수헌에서 오국성을 바라보며 감회를 읊다〔會寧滌愁軒望五國城 感吟〕
[DCI]ITKC_BT_0543A_0120_010_0320_2018_003_XML DCI복사 URL복사
화석의 풍류가 여기에 와서 참 가련하였지 / 花石風流此可憐
배고프면 삭설을 먹고 목마르면 호천을 마셨네 / 飢餐朔雪渴胡泉
강남에서 제일가는 진 승상은 / 江南甲第秦丞相
나라가 기울도록 부귀를 잘도 독차지했거늘 / 好是傾邦富貴專
[주-D001] 척수헌(滌愁軒) :
회령부 관아(官衙) 안에 있던 건물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주-D002] 오국성(五國城) :
회령(會寧) 부근에 있던 옛 성이다. 송(宋)나라가 1127년 정강(靖康)의 난(難)을 당하여 수도 변경(汴京)이 함락되자,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금(金)나라 군사들에게 사로잡혀 북으로 끌려가 오국성에 갇혀 죽었다. 《宋史 卷22 徽宗本紀》
고전번역서 > 번암집 > 번암집 제8권 > 시 > 최종정보
번암집 제8권 / 시(詩)○재필록(載筆錄)
오국성에 오르다〔登五國城〕
[DCI]ITKC_BT_0543A_0120_010_0390_2018_003_XML DCI복사 URL복사
산천이 천 겹으로 변경을 가로막으니 / 溟嶽千重遮汴京
천자는 이곳 외로운 성에서 눈물이 다 말랐네 / 靑衣淚盡此孤城
간악(艮嶽)의 기화괴석은 새 주인에게 돌아갔고 / 艮岑花石歸新主
남으로 간 고관대작들은 태평시절 누렸도다 / 南渡軒裳樂太平
말고삐 잡던 떠도는 혼은 밤비에 울부짖는데 / 執靮覊魂啼夜雨
모래에 묻혔던 통보는 봄밭에서 찾아지네 / 沈沙通寶拾春耕
야선은 오히려 군신의 의리를 알았는지라 / 也先猶解君臣義
능히 영황을 명나라로 돌려보냈지 / 能送英皇返大明
승정원일기 > 영조 > 영조 13년 정사 > 4월 26일 > 최종정보
영조 13년 정사(1737) 4월 26일(갑신) 저녁에 비가 옴
13-04-26[29] 소대를 행하여 《송원강목》을 강하였다
[DCI]ITKC_ST_U0_A13_04A_26A_00300_2020_270_XML DCI복사 URL복사
상이 이르기를,
“고종의 시대가 휘종, 흠종 때와는 달랐으니, 고종이 속은 것도 괴이할 것이 없다. 그 당시 고려(高麗)에 길을 빌려 바닷길을 통해 맞이하여 돌아오게 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니, 우리나라가 오국성(五國城)에서 반드시 멀지 않을 것이다.”
하니, 김한철이 아뢰기를,
“회령(會寧)에 이른바 오국성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하번이 응당 이를 알 것이다.”
하니, 김한철이 이르기를,
“회령의 운두산성(雲頭山城)에 큰 무덤이 있는데, 이를 황제묘(皇帝墓)라 이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지란(李之蘭)의 무덤도 그렇다고 한다.”
하였다. 김한철이 아뢰기를,
“큰 무덤 근처에 작은 무덤이 또한 100여 개 정도인데 종신(從臣)의 묘라고 칭하므로 백성들이 간혹 이를 파 보았더니, 그 가운데 정강통보전(靖康通寶錢)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체로 서로 거리가 반드시 멀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조영국이 아뢰기를,
“《송사기(宋史記)》에 연경(燕京)과 오국성의 거리가 천 리라고 하였으니, 멀지 않다고 이를 수 없습니다.”
하였다. 김한철이 아뢰기를,
“곽영(郭永)과 왕복(王復)의 일로 보건대 군주와 거리가 먼 신하로서 이와 같이 순절한 자가 많을 것입니다. 대체로 송이 건국될 적에 자연히 규모가 있었으니, 그러므로 비록 고종의 세상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죽음으로 섬기는 신하가 많았던 것입니다.”
고전번역서 > 열하일기 > 황교문답 > 황교문답 > 최종정보
황교문답(黃敎問答) / 황교문답(黃敎問答)
황교문답후지(黃敎問答後識)
[DCI]ITKC_BT_1370A_0150_010_0030_2003_002_XML DCI복사 URL복사
연암이 말하기를,
............................
이제 내가 열하의 지세를 살펴보니, 대체로 천하의 두뇌(頭腦)와 같았다. 황제가 북쪽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다름 아니라 두뇌를 누르고 앉아 몽고의 인후를 틀어막자는 것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몽고는 이미 날마다 나와서 요동을 뒤흔들었을 것이니, 요동이 한 번 흔들리고 보면 천하의 왼쪽 팔이 끊어지는 것이요, 천하의 왼쪽 팔이 끊어지고 보면 하황(河湟 영하성 지방)은 천하의 오른편 팔이라 혼자서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니, 내가 보기에는 서번의 여러 오랑캐들이 나오기 시작하여 농(隴)ㆍ섬(陝)을 엿볼 것이다. 우리 동방은 다행히 바다 한 쪽에 궁벽되어 있어서 천하 일에 상관이 없다 하겠으나, 내 이제 머리털이 흰지라 앞일을 가히 보지는 못할 것이로되, 30년을 넘지 않아서, 능히 천하의 근심을 걱정할 줄 아는 자가 있다면 응당 나의 오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호(胡)ㆍ적(狄) 잡종의 일을 위와 같이 아울러 기록해 둔다.”
하였다.
임하필기 제32권 / 순일편(旬一編)
청해(靑海)의 모란
[DCI]ITKC_BT_1432A_0350_010_1030_2007_007_XML DCI복사 URL복사
청해의 모란에 대하여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간악(艮岳)의 유종(遺種)으로서 오국성(五國城)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절도(節度)의 정원과 못 둘레에 심어져 있는 것이 무려 수백 그루인데, 크기가 모두 한 움큼 되는 고목이고 꽃도 매우 아름답다. 옛날 백사(白沙) 선생이 삼락재(三樂齋)에 있을 때 절도사가 국화를 보내 주어 심었다. 청해에는 옛날부터 본래 꽃 종류가 많았다. 일찍이 삼락재 앞에서 모란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도 아마 간악에서 나온 품종일 것이라 생각하였다.
> 고전번역서 > 학봉전집 > 학봉일고 제2권 > 부 > 최종정보
학봉일고 제2권 / 부(賦)
간악부(艮嶽賦)
[DCI]ITKC_BT_0210A_0220_020_0020_2004_004_XML DCI복사 URL복사
……………..
국사 날로 글러져도 아니 살폈고 / 國日非而不省
백성들이 못살아도 아니 살폈네 / 民曷喪而莫察
그 누가 알았으랴 한 산 만들자 / 誰知一嶽之纔築
백성들의 원망 소리 높아질 줄을 / 奄民嵒之岌岌
변방 산의 살기는 하늘 뻗치고 / 陰山之殺氣彗雲
산머리에 지는 해는 광채 잃었네 / 峯頭之落日無色
토붕와해 형세 되어 못 떨치고는 / 勢土崩而莫振
천자 수레 까마득히 하황에 갔네 / 龍馭邈兮河隍
지난날의 번화함을 바라다보니 / 回首昔日之繁華
몇 개의 점 외로운 산만 남았네 / 但數點之孤岳
[주-D007] 천자 …… 갔네 :
북송(北宋) 정강(靖康) 2년(1127)에 금(金) 나라 군대가 남하하여 송 나라의 수도인 변경(汴京)을 함락시키고 휘종(徽宗)과 철종(哲宗) 두 황제와 황족들을 포로로 잡아간 것을 말한다. 하황(河隍)은 하황(河湟)으로, 휘종이 잡혀갔던 오국성(五國城)을 가리킨다.
고전번역서 > 어우집 > 어우집 제1권 > 시 > 최종정보
어우집 제1권 / 시(詩)○서수록(西繡錄)
성천 강선루 시에 차운하다 3수〔次成川降仙樓韻 三首〕
[DCI]ITKC_BT_0265A_0020_050_0110_2017_001_XML DCI복사 URL복사
…………
수많은 푸른 봉우리 굽은 대를 둘러싸고 있는데 / 多少蒼峯控曲臺
백 자 높은 누대가 강을 향해 열려있네 / 層樓百尺面江開
오려낸 듯한 푸른 숲은 그윽한 새를 감추고 / 靑林如剪藏幽鳥
어금니처럼 엇갈린 오랜 바위엔 이끼 끼었네 / 老石交牙衣綠苔
세자에게 입은 은택이 삼 년 동안 넉넉하였고 / 少海恩波三載洽
두 마리 오리 변한 신선 신발 구천을 맴도네 / 兩鳧仙舃九天廻
하황이 아직도 이리의 소굴에 들어가 있으니 / 河湟尙入豺狼窟
석양 속 높은 난간에서 원통한 마음 가눌 수 없네 / 斜日危欄恨未裁
[주-D004] 하황(河湟) :
하황은 하수(河水)와 황수(湟水) 일대로 서융이 사는 지역인데, 여기서는 관서의 변방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치평요람 제112권 / 송(宋)
[《역대통감집람(歷代通鑑輯覽)》 76권 〈송 신종황제(宋神宗皇帝)〉]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국가가 기어코 서방의 적을 토벌하여 평정하려고 한다면, 먼저 하황(河湟)을 수복하는 것보다 더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씨가 복배(腹背)에서 적국의 공격을 받고 표리(表裏)에서 번갈아 공격하는 환난이 .
> 고전번역서 > 치평요람 > 치평요람 제91권 > 당 > 최종정보
치평요람 제91권 / 당(唐)
[무종(武宗) 회창(會昌) 원년]
[DCI]ITKC_BT_1483A_0920_010_0010_2015_035_XML DCI복사 URL복사
처음에 이오(伊吾)의 서쪽과 언기(焉耆)의 북쪽에 힐알사(黠戛斯)라는 부락이 있었다. 이는 바로 옛날의 견곤(堅昆)이자 당나라 초기의 결골(結骨)로서 뒤에 이름을 힐알사로 바꾼 것인데, 그들이 건원(乾元) 연간에 회골(回鶻)에게 격파된 뒤로 중국과 왕래하지 않았다. 그 부락의 사람들이 사납고 용맹하였으므로 토번(吐藩)이 항상 그들에게 예물을 주고 관작을 봉해 주었다. 회골의 세력이 쇠퇴해지자 힐알사 추장 아열(阿熱)이 비로소 극한(可汗)이라고 자칭하였다.
조선왕조실록 > 성종실록 > 성종 22년 신해 > 7월 4일 > 최종정보
성종 22년 신해(1491) 7월 4일(무인)
22-07-04[02] 개성부 유수 유순ㆍ경기 관찰사 김제신 등에게 하서하여 북정 일정을 통지하다
[DCI]ITKC_JT_I0_A22_07A_04A_00020_2005_033_XML DCI복사 URL복사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유순(柳洵)과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김제신(金悌臣)과 강원도 관찰사 김여석(金礪石)과 충청도 관찰사 홍흥(洪興)과 병마 절도사(兵馬節度使) 조숙기(曹淑沂)와 전라도 관찰사 김극검(金克儉)과 병마 절도사 신주(辛鑄)와 경상도 관찰사 정숭조(鄭崇祖)와 좌도 병마 절도사(左道兵馬節度使) 하숙부(河叔溥)와 우도 병마 절도사(右道兵馬節度使) 조극치(曹克治)와 영안남도 절도사(永安南道節度使) 변종인(卞宗仁)과 북도 절도사(北道節度使) 성준(成俊)에게 하서(下書)하기를,……………..
고을의 군사는 8월 16일에 길을 떠나서 9월 21일에 길성(吉城)에 도착하도록 하고, 영안도(永安道) 군사의 길을 떠날 일시(日時)는 도원수(都元帥) 허종(許琮)의 절도(節度)를 듣도록 하라.
아아! 군사가 이미 나가는데 명분(名分)이 있고 군대가 마땅히 정직하매 웅장(雄壯)하게 된다. 죄인(罪人)을 잡아 신문하고 오랑캐를 잡는 것이 목적이니, 내 한사람이 어찌 이오로(伊吾盧)에 분심(憤心)을 풀려고 하겠는가? 말을 쉬게 하고 전쟁을 그치게 하여 변방 백성을 북방 들에서 편안하게 하고자 한다.”
고전번역서 > 다산시문집 > 다산시문집 제17권 > 제문 > 최종정보
다산시문집 제17권 / 제문(祭文)
중추(中樞) 이시승(李時升)의 제문
[DCI]ITKC_BT_1260A_0170_040_0130_2000_007_XML DCI복사 URL복사
뛰어나고 매서운 기개는 간에 서리고 폐에 뭉쳤는데 울적하여 펴지 못한 채 이처럼 떨어져 운명하게 되었네. 몸은 문지(門地) 때문에 굽히고 이름은 재물로써 가렸으나 깊은 생각과 총명한 지혜는 무리 가운데서 뛰어났네. 북으로는 악라(卾羅)까지 가고 남으로는 이리(伊犂)에 다다라 해우(海宇)를 거두어 놓고 변방을 의논했으나, 그 관직을 생각하니 때를 만나지 못함 애석타 하겠네. 그가 남긴 10편의 글, 아는 이 그 누구인가. 불볕 날씨에 떨치고 나간 것이 나와의 이별이었네. 탁주와 닭고기로 이 슬픈 마음을 나타내노니 부디 흠향하소서.
[주-D001] 악라(鄂羅) :
러시아의 음역(音譯)임. 아라사(鄂羅斯).
[주-D002] 이이(伊犁) :
강 이름으로 혹 이열(伊列)ㆍ이려(伊麗)ㆍ익리(益離)라고도 한다. 부명(府名)으로는 한(漢) 나라 때에는 오손국(烏孫國)이었다가 청(淸) 나라 초에 준갈이(準噶爾)가 살았는데, 건륭 때에 준부(準部)를 멸하고 이이부(伊犁部)를 두었다
오국성(五國城)은 회령부 서쪽 20리의 산록에 있다. 두만강 가에 옛 성터가 있는데 속칭 유단(游端)이라고 한다. 밭 가는 자들이 이따금 송전(宋錢)을 얻기도 한다. 지금은 보라 첨사(甫羅僉使)를 두었다. 《청일통지(淸一統志)》를 살펴보면 “오국두성(五國頭城)은 영고탑성(寧古塔城) 동북쪽에 있다. 《대금국지(大金國志)》에 ‘천회(天會) 8년(1130)에 송(宋)나라의 두 황제가 한주(韓州)에서 오국성으로 갔으니, 그 성은 금(金)나라 도읍의 동북쪽 1000리에 있다.’라고 하였으니 예전부터 송 휘종이 이곳에 묻혔다고 전해 온다.”라고 하였다. 또 《호종록(扈從錄)》을 살펴보건대 “영고탑으로부터 동쪽으로 600리를 가면 강돌리갈상(羌突里噶尙)이 있는데, 이곳에서 송화강(松花江)과 흑룡강(黑龍江)이 합류한다. 이곳에 큰 토성(土城)이 있는데, 이 성을 오국성이라고 하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회령은 금나라의 상경(上京)이었으니, 오국성이 금나라 도읍의 동북쪽에 있었다고 한다면, 여기가 송나라의 두 황제가 구금되었던 곳인 것 같다.
황제총(皇帝塚)은 행영(行營) 서북쪽 25리의 화풍산(花豐山)에 있다. 산골짜기에 큰 무덤이 있으니 마치 언덕 같다. 곁에 작은 무덤 100여 기가 있는데 잡석으로 무덤구덩이 모양[壙形]을 만들었다. 이는 시신총(侍臣塚)이라고 한다. 하늘이 흐리고 비가 올 때마다 곡소리가 들린다
《길림통지(吉林通誌)》에 “고려 북쪽 지역은 ‘별십팔(別十八)’이라고 부르는데 중국어로는 오국성(五國城)이다.” 하였다. 또 “오국성은 옛날에 오국두성(五國頭城)이라고 불렀다. 그 지역이 오국을 총괄하는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얻은 이름인데 후세에 잘못 전해져 단지 오국성이라고만 하였다. 오국은 《요사(遼史)》 〈영위지(營衛志)〉에 부아리국(剖阿里國), 분노리국(盆奴里國), 오리미국(奧里米國), 월리독국(越里篤國), 월리길국(越里吉國)이라고 하였는데, 절도사를 설치하여 통솔하게 하고 황룡부(黃龍府)에 소속시켰다. - 건륭(乾隆) 연간에 부도통(副都統) 작극탁(綽克托)이 백도눌성(伯都訥城)을 쌓던 중에 자단목(紫檀木) 상자에 담겨 1000여 년 동안 묻혀 있던 송나라 휘종(徽宗)이 그린 매 그림 족자를 발굴하였는데, 먹 빛깔이 새것 같았다. 또 옛날 자기 수십 건을 획득하고 아울러 비갈(碑碣)을 얻었는데 휘종 만년(晩年)의 일기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그 대강을 해독할 수 있었는데 ‘천회(天會) 13년(1135, 인종13) 이곳에 거처를 정하였다.’라고 하였다. 몇 해가 지나고서야 비로소 오국성이 이곳인 줄 알게 되었다. - ”라고 하였다. - 이상은 오국성 고적이다.
임하필기 제11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오국성(五國城)
[DCI]ITKC_BT_1432A_0140_010_1140_2007_002_XML DCI복사 URL복사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오국성은 둘이 있는데, 하나는 강계(江界)에 있으니, 벌등보(伐等堡) 강월(江越) 가에 네모꼴의 성터가 있고, 하나는 회령보(會寧甫)에 있으니, 을하보(乙下堡) 서쪽 두만강 남쪽의 옛 성 모양의 터가 이것이다.” 하였다. 《송사(宋史)》에 이르기를, 금(金)나라 사람들이 두 황제를 균주(均州) 오국성으로 옮겼는데, 성은 백두산(白頭山) 남쪽에 있다.” 하였다. 사료에 의하면 균주는 지금 회령부(會寧府)이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보(堡)의 서쪽에 큰 무덤이 있어 황제총(皇帝塚)이라 부르고, 또 겹겹의 작은 무덤이 있어 시신총(侍臣塚)이라 불렀다 한다. 지금 옛 성의 근처에서 금은(金銀)의 기물이 발견되는데 궁중에서 쓰던 물건이고, 또 옛날 돈이 나오는데 바로 흠종(欽宗 북송의 마지막 황제) 이전의 연호가 찍혀 있다.
임하필기 제32권 / 순일편(旬一編)
오국성(五國城)에서 얻은 송나라의 엽전
[DCI]ITKC_BT_1432A_0350_010_0380_2007_007_XML DCI복사 URL복사
오국성은 송나라 두 임금이 구류되어 있던 곳으로서, 지금의 회령부(會寧府)의 보라진(甫羅鎭)이다. 금(金)나라가 도읍한 곳에서 동북쪽 1000리쯤에 있다고 한다. 황제의 무덤은 행영(行營) 서북쪽 25리 화풍산(花豐山)에 있는데, 구릉처럼 큰 무덤이다. 옆에는 작은 무덤 100여 개가 있는데, 그것을 시신총(侍臣塚)이라 한다. 농부가 밭을 갈다가 종종 송나라 때의 엽전을 얻었다.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가 4매(枚)를 얻었는데, 황송통보(皇宋通寶)ㆍ경덕원보(景德元寶)ㆍ원풍통보(元豐通寶)ㆍ원우통보(元祐通寶)였다. 둘레가 두툼하고 예쁘기가 옛날 오수전(五銖錢)과 같다. 전서로 쓰기도 하고 예서로
> 조선왕조실록 > 영조실록 > 영조 3년 정미 > 11월 8일 > 최종정보
영조 3년 정미(1727) 11월 8일(경신)
03-11-08[01] 검토관 조진희가 북관 여러 고을의 군비가 허술함을 아뢰다
[DCI]ITKC_JT_U0_A03_11A_08A_00010_2005_005_XML DCI복사 URL복사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여 《중용(中庸)》을 강론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조진희(趙鎭禧)가 북관(北關)의 여러 고을에 군비(軍備)가 허술함을 진달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회령(會寧)은 성중(城中)에 우물이 없어 주민(住民)들이 모두 성 밖에 나가서 물을 길어가니, 위급한 때에 믿을 만한 곳이 되지 못합니다. 들은즉 ‘본부(本府)의 수십 리 밖에 운두성(雲頭城)이 있는데 천연(天然)의 험준(險峻)함이 매우 장대(壯大)하고 성중에 또 우물이 있으며 변방 사람들이 서로 전해 이르기를 완안성(完顔城)이라 하고 혹은 오국성(五國城)이라 일컫는다.’고 합니다. 이제 만약 이 성을 수리하여 회령부(會寧府)를 옮기거나 혹은 보라 첨사(甫羅僉使)로 하여금 살게 한다면, 부령(富寧)으로 더불어 무산령(茂山嶺)을 협수(夾守)하여 족히 내외 관방(內外關防)의 형세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니, 마땅히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형편을 살피고 다시 상확(商確)하여 장문(狀聞)하도록 한 다음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고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단(震旦)이란 나라가 있었는데 혹은 지나(支那)라 하기도 하고, 여기서는 다사유(多思惟)라고 하는 바, 이 나라 사람들은 생각을 많이 하는 까닭이며, 곧 대당국(大唐國)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0) | 2022.09.18 |
---|---|
수나라와 당나라의 인구수 (0) | 2022.09.18 |
“신라가 오(吳)ㆍ월(越)을 침범하여 그 지역의 일부를 점령하여 살았다.” (0) | 2022.09.18 |
오조(五條) : 단군의 다섯 가지 가르침 (0) | 2022.09.18 |
200만 수나라군 패전 과 5000리 조선 해안선 (0) | 2022.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