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6. 10:34ㆍ고대사
속동문선 제14권 / 기(記)
회로당기(會老堂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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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金馹孫)
이 당(堂)을 회로(會老)라 이름함은 향당(鄕黨)부로(父老)의 모임을 뜻한 것이다. 모여서는 무엇을 하느냐 하면, 술을 마시거나, 활을 쏘고, 법(法)을 강습한다. 당은 부성(府城) 북쪽에 있으니, 지난 10년 동안 부의 사람 김순손(金順孫)이 옛터에 세운 것이었다. 조종조(朝宗朝)로부터 건의한 자가 하나가 아니었으나, 이미 설치된 뒤엔 파기하였다가 얼마 아니 되어 또 회복되었으나 술 마시고, 활 쏘고, 법 을 읽는 등의 일은 폐기되었으니, 조정이 이에 유의하지 않았음이 아니라, 향당(鄕黨)에서 이 일을 맡아 보살필 자가 없었으므로 이 당이 우뚝히 빈 집만 남았던 것이었다. 기유년 봄에, 조정에서 시골 풍속이 옛 풍습을 잃음을 우려하여 특히 유향소(留鄕所)의 제도를 살리고 향정(鄕正)을 세웠는데, 주(州)와 부(府)에는 5명, 군(郡)에는 4명, 현(懸)에는 3명으로 정하고, 각기 한 고을에서 명망 있는 이를 추천하여 그 책임을 맡겼다. 김해(金海)는 부(府)였으므로 전 의성 현령(義城縣令) 김계금(金係錦) 전 청산 현감(靑山縣監) 백계영(白啓英), 전 인의(引儀)배형(裴炯), 전 참군(參軍)송숙형(宋叔亨)과 나의 종형 진사(進士)김백견(金伯堅) 등 5명으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한 부에서 명망이 있었다. 이 시골에 공사(公事)가 있으면 모두 이 당에 모여서 의논하였다. 부는 옛 가락국(駕洛國)의 터이라,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무덤이 지금 서곽문(西郭門) 밖에 있으므로 관가에서 초목(樵牧)을 금하였고, 고사(故事)에 부로가 시수(時羞)를 갖추어 제사를 올리고는 향인들이 함께 음복하는 것이 해마다 상례가 되었다. 나는 김해 사람이라, 선세(先世)에서 서로 전하기를, “수로왕의 계출(系出)이라.” 하나 아득하여 상세히 알 수 없으므로 매양 능 밑을 지나칠 때마다 곽숭도(郭崇韜)가 곽자의(郭子儀)에게 절하던 일이 혐의쩍어 감히 스스로 붙이지는 못하였으나, 오히려 시골 사람을 따라 조두(俎豆)를 진설하였다. 지난해 겨울에, 내가 도주(道州)전야(田野)로부터 이르렀을 때, 마침 시골 사람이 음복하는 날이었으므로 많이 이 당에 모였다. 나는 당 밑에 나아가 부로들에게 절을 드렸다. 김선생(金先生)이 나를 맞이하며, “이것은 우리 시골의 풍속으로서 인습된 지 이미 오래니, 혹 옛 의례에 방해로움이나 없을런지.” 하고 묻기에 나는, “무엇이 방해롭겠습니까. 예로부터 제왕(帝王) 중에 공덕(功德)이 있는 분에게는 대가 끊어진 뒤에 그 향토의 백성들이 사당을 세우지 않음이 없는 것이 전기(傳記)에 나오곤 하니, 요(堯)ㆍ순(舜)ㆍ대우(大禹)의 사당은 물론이요, 후세에 이르러 한 나라의 고조(高祖)ㆍ광무제(光武帝)ㆍ촉선주(蜀先主)가 모두 사당이 있어, 평민들이 기도 드리고 고(告)하기도 하며, 제사도 드릴 수 있었으니, 이는 비록 경문(經文)에는 맞지 않으나 나라사람이 다하지 않은 생각을 품어서 천고의 공경을 일으킨 것이니, 금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일찍이 상고하건대, 수로왕이 후한(後漢)건무(建武) 18년에 나라를 열어서 4백 년에 11세를 전하고, 말왕(末王) 구해(仇亥)에게 이르러서 신라에 항복하여 나라가 없어진 뒤, 이제 천 년이 넘어 왕의 자취가 인멸되고 남은 은택이 말랐으되, 향인이 오히려 제사를 드려 게을리 하지 않았음은, 대체 수로왕은 우리 시골 생민(生民)의 처음 임금인 만큼 따라서 그 은덕을 갚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니, 이것은 실로 우리 시골의 아름다운 풍속이라, 우리 시골로서 의당 대대로 지켜야 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더니, 김선생은, “옳아, 국가에서 유향(留鄕)의 제도를 회복하였음은 시골 풍속을 아름답게 하려는 것이어늘, 그대는 이를 우리 시골의 아름다운 풍속이라 하니, 이 모임이 이 당에서 열림이 더욱 빛이 나도다. 내 이미 회로(會老)라 이름하였으니, 그대는 의당 기문을 쓰라.” 하기에, 나는 일어나 대답하기를, “오늘 이 당에 모인 이는 모두 부형과 종족(宗族)이요, 다른 이가 없는 만큼, 친목을 강론함이 이르지 않은 것이 없겠으나, 다만 한 시골에는 반드시 한 시골의 풍속이 있으면서도, 시골 풍속이 예를 따라 아름다운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것은 비록 국가 법전에서 나온 것이 아닐지라도 버리지 못할 것이요, 그 악한 것은 비록 구습으로부터 내려왔다 하더라도 결코 둘 수가 없을지니, 온 시골의 자제들로 하여금 아름다움은 따라 고치고 악한 것은 경계함이 부로의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유향이란 곧 옛날의 향대부(鄕大夫)가 삼물(三物)과 팔형(八刑)으로서 가르쳐 규정함에 제대로 그 일이 있으니, 혹은 아버지로서 아버지의 노릇을 못하고, 아들로서 아들의 도리를 못하고, 형으로서 형의 구실을 못하고, 아우로서 아우의 도리를 못하고, 지아비로서 지아비의 노릇을 못하고, 아내로서 아내의 도리를 못하거나, 겨레에 화목하지 못한 자, 인척간에 좋지 못한 자,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고자질하는 자, 관리로서 백성에게 토색하는 자는 모두 감시하여 이끌어 주기도 하고 깨워 주기도 하며, 심한 자는 관가에 고발하여, 한 시골의 아름다움을 몰아서 우리 시골의 질박한 것이 흩어진 뒤에 회복하고, 희희(熙熙)히 수로왕의 순백한 풍속이 이룩된 연후에, 이 당에 나아가 한 잔 태평춘(太平春)을 마신다면, 이는 한갓 시골의 다행일 뿐 아니라, 곧 국가의 다행이리라 생각됩니다. 전부사(前府使) 이손(李蓀)공이 일찍이 묘전(墓田)을 장만할 돈을 내었고, 지금 부사 김의형(金義亨)공은 또 우리 시골 사람이었으므로 무릇 우리 풍속을 아름답게 할 것을 부로들은 바야흐로 촉망하는 것입니다. 이에 앞서 김백견(金伯堅)형이 재실 다섯 칸을 당의 서쪽에 경영하였으니, 밭이 있으므로 제수에 쓸 수 있고, 집이 있어 이에 재계하여 서직(黍稷)을 드릴 수 있으니, 수로왕이 어찌 흠향을 하지 않으리까. 제사가 끝난 뒤에 음복을 하면 부로들은 어찌 즐겁지 않으리까. 뒷날에 나도 역시 흰 머리로서 이 당의 늙은 이가 되오리다.” 하고는 드디어 연신가(延神歌)를 지어서 부로와 더불어 노래하였다.
붉은 끈 땅에 드리워 / 紫纓墮地兮
그 전통이 면면하였소 / 垂統緜緜
구간이 주장 없어 / 九干無主兮
하늘에서 떨어졌다오 / 有隕自天
바다 위에 나라 정하여 / 海上定鼎兮
4백년을 드리웠소 / 垂四百年
편호에 사는 백성 모두가 / 編戶居民
그 자손들 / 晜雲遠孫
세시되면 제사 올려 / 歲詩報事兮
부로들이 모여들었소 / 父老駿奔
신령한 까마귀 울어 흩어지자 / 神鴉啼散兮
거친 언덕엔 고목 뿐 / 古木荒原
변두는 고요하고 아름답고 / 籩豆靜嘉兮
서직은 향기롭소 / 黍稷其芬
퉁소ㆍ북 울리니 / 簫鼓鳴兮
보도 듣도 못하건마는 / 不見不聞
신은 구름인 양 오시리다 / 神之來兮如雲
술취하고 배불러 양양히 내리시니 / 醉飽洋洋兮
어찌 우리 백성에게 복을 아끼리요 / 何不福我元元
우리 백성 복을 받아 / 我民受賜兮
즐기고 평한하였다오 / 於以樂康
백발(白髮)이 삼삼하고 / 鶴髪鬖鬖兮
구장이 장장할 제 / 鳩杖鏘鏘
춤과 노래 해마다 / 歌舞年年兮
길이 길이 쉬지 않으리 / 其永無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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