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3. 21:46ㆍ고대사
삼천리 제7권 제7호 > 名將과 此一戰
잡지명 | 삼천리 제7권 제7호 |
발행일 | 1935년 08월 01일 |
기사제목 | 名將과 此一戰 |
필자 | 權悳奎, 柳光烈, 李光洙 |
기사형태 | 문예기타 |
3. 高隋의 國力比較
嬰陽王의 父王인 平原王은 어진 님검이다. 內治에 힘을 들여 국력을 충실케 하얐으니 그 大槪를 말하면 農桑을 권하야 나라이 富케 하얐음은 물론이어니와 이때 문명이 한참 滿熟한 시대라 宮城의 건설, 市街의 성립, 官舍의 설치 등이 俱備하얐으니 平壤의 外城인 長安城이 이때의 서울로 궁성의 주위가 약 5리에 金宮玉樓가 눈을 어리고 시가는 田자형으로 구분하야 市區가 대개 180區이요 平壤 全市의 人戶가 21만 5백여 戶에 상비병이 30만이요 남은 여러가지 중에도 曇徵의 그림과 王山岳의 琴調 百餘曲과 李文眞의 國史 백여권이 國粹를 발휘하야 盛世를 粧飾하얏다.<95> 이 때 삼국의 판도를 말하면 지금 朝鮮半島의 忠淸北半으로부터 滿洲大幅은 高句麗가 차지하야 훌륭한 一大帝國을 일우고 반도의 南은 百濟, 新羅가 分領하야 인구를 합하면 4천만에 달하는데 中國으로 말하면 隋라는 니름밑에 저의 개국이래, 남북이 통일되어 한족의 인구가 약 5천만이니 朝漢 兩民族의 인구가 대개 상이한데 隋의 文帝(煬帝의 父)가 이 中國統一의 餘威를 가져 高句麗를 엿볼 새 嬰陽王에게 보내는 국서에 「왕은 생각하라. 浿水(지금 遼水)가 넓다한들 長江(楊子江)과 어떠하며 國兵이 많다한들 陳國(隋에게 망한 강남의 國)과 어떠하랴. 朕이 왕의 罪過를 責할진대 무삼 大力을 들이랴만 그래도 은근히 曉喩하야 왕의 自新을 바라노라」(抄譯)하얐다.
嬰陽王은 高句麗 季世의 짝 없는 英主이라 벌서부터 隋와는 양립치 못할 것을 헤알여 오든 차에 왕의 9년 2월에 친히 西征에 임할 세 靺鞨兵 萬餘로 선봉을 삼고 姜以式으로 元帥를 삼아 대군으로 遼西를 擊入하며 대왕은 후군을 거늘이어 뒤를 니있다. 隋 文帝가 이 소문을 늗고 수륙군 30만을 發하야 潮水같이 驅入하얏다. 대왕이 대군을 命하야 臨渝關에서 屬戰擊破하니 적병이 退走하는 중에 死傷이 과반이요 적의 兵船은 我 水軍의 猛擊과 風浪을 遭하야 거의 覆沒하니 死者-10에 8, 9라. 隋의 擧國이 驚惶하얏다. 이 전쟁이 무릇 8개월에 달하얐다.
4. 高隋의 再戰과 乙支의 薩水大捷
姜以式의 臨渝關 戰捷 후에 嬰陽大王의 위엄이 사방에 떨치매 南北隣國이 다 猜忌하는 중 더욱 新羅와 百濟는 隋의 高句麗 再구*의 뜻이 있을 줄을 헤알이고 使를 보내어 高句麗 침을 꼬드기나 隋 文帝는 前㤼이 있어 이를 사절하드니 文帝가 죽고 그 아들 煬帝가 서서는 吐谷軍(而藏地) 東突厥(蒙古地) 등 제국을 朝貢받고 兼하야 해마다 豐登하야 창고가 넘처가고 게다가 煬帝는 巡遊를 좋아하야 3천리 운하(直隸省 通州로부터 浙江者 抗州에까지)에 龍舟놀이를 하며 여러 貢國을 巡覽할 새 啓民可汗의 帳(今 山西省)에서 高句麗 使者를 맞나 突厥이 高句麗에도 조공함을 알고 高句麗 시기의 마음이 꼭뒤까지 오르는데 寵臣裵矩가 先帝의 부끄럼을 씻으라 꾀이고 또한 高句麗 서울 平壤의 佳麗함과 皆骨山(金剛山)의 靈秀함을 침이 마르게 니야기 하야 煬帝의 욕심을 닐으컸다.
嬰陽王이 百濟 新羅가 隋를 通하고 隋의 煬帝가 東侵의 욕심이 있음을 미리 헤알인 지라 隋와의 作戰 계획을 의론할 새 幾萬의 군사는 南으로 發하야 百新 兩國을 경계하고 數十萬兵으로 隋를 경비하는데 대왕은 친히 大陸大元師가 되고 乙支文德은 陸軍元師요 王弟 建武는 水軍元師라 水陸 양면을 똑같이 보되 만일 隋가 전쟁을 닐으키면 대거 침입하리니 저윽이 操心할 *라 하야 이번에는 進攻의 策을 쓰지 말고 先守後戰策으로 인민을 命하야 성내에 入居케하고 將土를 命하야 假戰假敗하야 각 요새에 退守하다가<96> 적의 군사가 疲勞한 뒤에 공격하기로 하얏다.
嬰陽王 22년(서기 611) 6월에 隋의 煬帝가 高句麗 치는 詔書를 나리어 翌年 정월에 涿郡(今 直隷省 ■縣)에 집중케하고 戰備를 하는데 새로 지은 兵船이 3백艘요 兵車가 5萬乘이며(乘은 一車四馬) 淮南 江南의 수군 7만을 發하야 수군을 증가하고 軍需를 운반하는 役夫만 數十萬人이라. 수륙에 떠드는 소리가 밤낮 끄치지 아니 하드라.
翌年 정월에 煬帝가 ■郡에 이르러 諸軍을 節度할 새 좌우 각 12군으로 낞우니 기병이 4단에 40隊요 보병이 4단에 80隊요 輜重兵과 散兵이 다 각각 4단이라. 團마다 色을 달리하고 보병이 사이사이 끼어 모다 24군이 1일에 1군씩 출발하야 40일만에 다 출발하니 首尾가 960리에 뻐치고 기발이 하눌을 가리며 북소리 山河를 울리고 御營軍이 뒤를 니어 또한 80리에 뻐치니 正兵이 1,133,800에 號를 2백만이라 하고 輸運兵이 또한 150만이니 中國 有史 이래 未曾有의 大動兵이라. 그 침입의 선로는 (一)은 御營軍과 其外 10여군이니 煬帝가 친히 거늘여 遼水를 건너 遼東 각 성을 치기로 하고 (一)은 大將 宇文述 등의 9軍이니 또한 遼水를 건너 바루 平壤城을 치기로 하고 수군 10여만은 水軍總管 來護兒가 거늘여 海路로 좇아 大同江으로 들어올라 宇文述과 합세하야 平壤을 치기로 하얐다.
이에 계획하얐든 高句麗 대장 乙支文德이 遼河 北西의 軍兵을 걷어 遼河를 직히니 3월에 隋軍이 오아 河西 上下 數百里에 結陣하야 우글우글하며 隋軍 제일 용장, 선봉 麥鐵杖이 浮橋를 매어 河水를 넘으려 한다. 乙支將軍이 諸將으로 迎擊하야 麥鐵杖 등 수십 將士와 만여 병졸을 버이고 浮橋를 끊었다. 隋兵이 물에 달려들어 浮橋를 다시 매며 격전하는지라 乙支將軍이 예정한 계획대로 거* 패하야 퇴군하얐다. 이에 煬帝가 그 전군을 몰아 河水를 건너 遼東 각 성을 圍攻하며 宇文述 등 9군은 乙支장군을 좇아 平壤城을 치려하얐다.
이를 앞하야 來護兒의 거늘인 수군 10여만은 바다를 건너 浿江口로 들었다. 高句麗 수군元師 建武는 수군을 각처에 숨어 있게 하고 平壤城下 인가에다 布泉을 걸어 널고 隋兵의 상륙을 내벌여 두었다. 隋의 정병 4만이 먼저 城下에 돌진하야 金帛을 노략하노라 隊伍가 산란하얐다. 建武元師가 決死隊 5백명으로 羅郭空寺 중에서 나아가 이를 돌격하야 破하고 諸軍을 호령하야 쫓아치며 각 處의 수군이 일시에 나아가 한께 쳐 부시니 隋軍이 서로 짓밟아 죽은 자- 무수하고 江口에서 선박을 擊沉하니 來護兒- 겨우 小艦을 타고 단신으로 도망하얐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매 隋의 糧艦이 어찌 남았으랴. 宇文述의 대군이 平壤에 온다한들 장차 무엇을 먹으리요.」
乙支장군이 遼河에서 퇴군하야 隋兵의 虛實을 탐지하려 하야 降使者의 맵시로 宇文述의 陣을 찾었다. 이에<97> 그 虛實을 다 알고 돌아왔다. 宇文述 등 上下가 나중에야 속은 줄을 알고 사람을 빨리 보내어 다시 맞나기를 청하얐으나 일은 벌서 늦었다.
宇文述 등이 급히 행군하야 乙支장군의 유인에 빠졌다. 隋兵이 平壤에 이르니 인가가 막끔 비고 성내외가 고요하얐다. 述 등이 乙支장군의 七戰七走에 속아 平壤에 왔으나 내용을 알 길이 없고 來護兒의 소식이 감감하며 降伏할 문서 조사를 하는 중이라든 高句麗 정부의 회답이 5일을 지나 10여일이 넘어도 도무지 動靜이 없음으로 諸軍을 지휘하야 攻城을 시작하얐다. 어찌 뜻하얐으랴. 城上으로부터 외쳐 가르되 너의 小軍은 陷沒을 당하고 糧艦이 모다 침몰하얐으니 너이가 무엇을 먹고 살려느냐. 宇장군아 어리석다. 七戰七走를 어찌 생각하는가. 닐굽번 패토록 이기었으면 그만두는 것이 어떠하냐고 비웃는 말을 전하고 虜獲한 바 隋 수군 將卒의 印信, 旗幟를 던저주며 일시에 旗幟가 사면에 곶히며 소뇌, 활살이 비오듯 하얐다. 述 등이 이제야 일의 틀림을 알고 退還할 새 淸川江에 이르니 물이 그리 깊지 아니 한지라. 다투어 건너는 중에 상류에 막았든 沙*을 터놓으니 물이 폭력으로 나리 밀리고 뒤의 추격이 급하야 빠저 죽는 자 맞어 죽는 자 밟히어 죽는 자 놀라 죽는 자가 이루 셀 수가 없는데 남아 쫓겨가는 자- 一日一夜에 450리를 달려 도망하야 鴨綠江을 건너 遼東에 가아 兵數를 점검하니 術 등의 거늘인 九軍의 30만5천이 겨우 2천7백이 남었다. 아- 딱하다. 군사는 백의 하나골도 남지 못하고 軍需輜重은 모다 高句麗의 虜獲品이 되었다.
또 앞서 隋의 遼東征伐하든 군사는 遼東 각 성을 쳐 하나도 함락지 못하고 將卒만 喪하얐으며 더욱 烏列忽(遼東城)에서는 아주 全沒을 당하야 3월로부터 7월까지 4, 5朔동안에 遼東벌판이 피ㅅ빛, 비린내로 化하얐다. 이에 隋의 24군의 數百萬名이 전멸되고 虎賁郞將 衛文昇이 殘軍 數千으로 煬帝를 보호하야 가지고 도망하얐다. 아- 전쟁에 죽은 자도 끔찍하거니와 隋의 수백만 寡婦는 장차 어찌될 것인가.
隋 煬帝는 이 뒤 억지로 제 2회, 제 3회의 전쟁을 닐으켰으나 다- 뜻을 얻지 못하고 니내 威信이 떨어저 내란으로 하야 몸을 죽이고 나라까지 망하얐다.
乙支장군은 이렇듯 큰 전쟁에 큰 승리를 얻고 隋兵의 각골을 뫃아 쌓아 승전의 기념탑을 半空에 둥두렷이 올리어 京觀이라 하얐다.
이 때에 高句麗의 威權은 세계를 누르고 국민의 의기는 하눌을 치받었다. 아 乙支公이어. 公은 과연 사람이 아니요 신이로다. 만일 신이 아니요 군인이요. 사람에게 두고 말한다 하면 公은 학자요 시인이요 군인이요 정치가요 대위인이로다. 참- 거룩거룩하다. 公이어 乙支公이어.<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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