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樂浪郡) 치소(治所)가 요동에 있는 것은 바로 요양遼陽이 평양이다.

2022. 9. 12. 11:27고대사

연원직지 1 / 출강록(出疆錄) ○ 임진년(1832, 순조 3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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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책문 안에서 떠나 50리를 가, 건자포(乾者浦)에 이르러 머물러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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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성기(鳳凰城記)

 

봉황산 서쪽 5, 6리에 조그마한 성이 있는데, 봉황성이라 한다. 《일통지(一統志)》에,

“성은 본래 예맥 땅인데, 발해(渤海) 때에는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를 삼았고, 요(遼) 나라에서는 개주 진국군(開州鎭國軍)이라 하였으며, 원 나라에서는 동녕로(東寧路)에 소속시켰다.”

고 하였다. 심양에서 동북쪽으로 올라선창(兀刺船廠)까지 수천 리 사이에 봉황성이 그 어구를 얽매고 있다. 성 주위는 7, 8리에 지나지 않는데 사방이 반듯하다. 남문 밖은 좌우에 시사(市肆)가 매우 번성하여, 상호[號扁]와 푯말[標木]을 칠을 하기도 하고 금을 바르기도 하였다. 물품이 그 안에 가득 쌓였는데, 휘황찬란하여 족히 처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놀라게 하였다. 이는 하나의 변문(邊門) 벽지에 불과한데 이와 같으니, 중국의 부유하고 화려함은 이로 미루어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성신(聖申)이 두서너 동행(同行)과 성안에 들어가 두루 돌아보고 와서 말하기를,

“성안의 시사가 성 밖만 못하고, 용봉사(龍鳳寺)가 있는데 곧 조그마한 사찰입니다. 또한 유원관(柔遠館), 일명 조선관(朝鮮館)이란 데가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을 유접(留接)시키는 곳입니다.”

고 했다. 여기 풍속은 비록 황족이나 각로(閣老)일지라도 행차에 사람을 벽제(辟除)하지 않는다. 오직 봉황성 사람들이 우리나라 풍속을 익히 알고 성장(城將)의 행차 때는 반드시 우리나라 사람들을 호령하여 내쫓는다고 한다.

연암의 《열하일기》에,

“어떤 사람의 말이, ‘이것이 곧 안시성(安市城)이다.’ 한다. 고구려 방언에 큰 새를 안시(安市)라 하고, 지금 방언에도 혹 봉황을 안시라 하며, 뱀을 백암(白巖)이라 한다. 수(隋) 나라와 당(唐) 나라 때 국어(國語)에 따라 봉황성을 안시성이라 하고 사성(蛇城)을 백암성(白巖城)이라 한 것이다.”

하였으니, 그 말이 퍽 이치가 있는 듯하다.

또 세상에서 전하기를,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이 당 태종(唐太宗)을 쏘아 눈을 맞히니, 황제가 성 아래에서 병력(兵力)으로 시위하고 비단[絹] 100필을 주어 그의 임금을 위하여 굳게 지키는 것을 상주었다.”

한다.

삼연(三淵)이 그 아우 노가재를 연경(燕京)에 보내면서 지은 시(詩)에,

천추에 대담한 양만춘이 / 千秋大胆楊萬春
용 수염을 쏘아 눈동자를 떨어뜨렸네 / 箭射虬髯落眸子

하였다. 목은(牧隱)의 ‘정관음(貞觀吟)’이란 시에는,

이것이 주머니에 든 물건이라 생각했는데 / 謂是囊中一物耳
어찌 현화가 백우에 떨어질 줄 알았으랴 현화는 눈, 백우는 화살. / 那知玄花落白羽

하였다. 두 분이 읊은 시는 의당 우리나라에 유전되는 옛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당 태종이 온 천하의 병력을 동원하여 탄환보다 작은 성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창황하게 군사를 돌렸다는 것은 그 사적(事跡)이 의아스럽다. 김부식(金富軾)이 단지 사서에 그의 성명이 빠진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대체로 김부식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쓸 때 다만 중국 사서(史書)에서 일부를 초하여 사실을 만들었다. 심지어 유공권(柳公權)의 소설을 인용하여 주필산의 포위를 증명했는데, 《당서(唐書)》나 사마광(司馬光)의 《통감(通鑑)》에 모두 기록되지 않았으니, 중국을 위하여 휘(諱)한 것인지 의아스럽다. 그러나 본토에서 전해지는 옛 소문 같은 것도 믿는 것이든 의심나는 것이든 감히 한마디도 싣지 않았으니, 아마도 빼어 버린 것이리라. 내 생각에는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었다는 것은 비록 상고할 수 없지만, 대체로 이 성을 안시성이라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닐까 한다.

《당서》를 고찰하건대,

“안시성은 평양과의 거리가 500리이고,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王儉城)이라 한다.”

하였으며, 《지지(地誌)》에는 또한 ‘봉황성을 평양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는 어떻게 하여 이름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또 《지지》에,

“옛 안시성(安市城)은 개평현(蓋平縣) 동북쪽 70리에 있다. 개평현으로부터 동쪽으로 수암하(秀岩河)까지 300리와 수암하로부터 동쪽으로 200리까지 봉황성이 된다.”

하였으니, 만일 여기가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 이른바, ‘500리’라는 것과 서로 맞는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선비들은 단지 지금의 평양만 알아 기자(箕子)가 평양에 도읍을 했다,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다, 평양에 기자의 묘가 있다고 말하면 믿으나, 만약 다시 봉황성이 평양이라고 하면 크게 놀라며, 요동에 평양이 있었다고 하면 꾸짖으며 괴이하게 생각한다. 이는 단지 요동이 본래 조선(朝鮮)의 옛 땅으로서, 숙신(肅愼), 예맥(穢貊), 동이(東夷)의 여러 종족이 모두 위만조선(衛滿朝鮮)에 복속한 것을 알지 못하고, 또한 오랄(烏剌 랴오닝 성[遼寧省] 부근), 영고탑(寧古塔), 후춘(後春) 등의 땅이 본래 고구려의 옛 강토인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 후세 사람들이 땅의 경계를 자세히 알지 못하여 망녕되이 한사군(漢四郡)의 땅을 모두 압록강 안에 국한하여, 사실에 억지로 합하여 구구하게 나누어 배치하였다. 그리고 다시 패수(浿水)를 그 속에서 찾아 더러는 압록강을 패수라하고 더러는 청천강(淸川江)을 패수라고 하고, 더러는 대동강을 패수라고 하니 이것은 조선의 옛 강토가 싸우지 않고도 저절로 축소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은 무엇일까? 평양을 한 곳에다 고정시키고 패수는 앞뒤로 당겼다 물렸다 하여 항상 사적을 붙이는 까닭이다. 나는 일찍이 한사군 땅이 유독 요동만 여진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현도(玄菟)ㆍ낙랑(樂浪)만 있고, 진번(眞番)ㆍ임둔(臨屯)은 나타나 있지 않다. 대개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에는 사군을 합하여 2부(府)를 만들고 원봉(元鳳) 원년에는 또 2부를 고쳐 군을 만든 것이다. 현도는 3현(縣)인데 고구려가 있고, 낙랑은 25현인데 조선(朝鮮)이 있고, 요동은 18현인데, 안시(安市)가 있다. 유독 진번은 장안(長安)과 거리가 7000리요, 임둔은 장안과 거리가 6100리이니, 김윤(金崙)의 이른바 “우리나라의 경계 안은 찾을 수 없으니, 당연히 지금의 영고탑(寧古塔) 등의 지역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옳다.

이로써 논한다면, 진번ㆍ임둔은 한(漢) 나라 말엽에 바로 부여(扶餘)ㆍ읍루(挹婁)ㆍ옥저(沃沮)로 들어가니, 부여는 다섯이고 옥저는 넷이다가 혹은 변하여 물길(勿吉)이 되었고 변하여 말갈(靺鞨)이 되었으며, 변하여 발해가 되었고 변하여 여진이 된 것이다. 발해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가 일본(日本)의 성무왕(聖武王)에게 답한 글을 고찰하건대,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가지고 있다.[復高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한사군은 절반이 요동에 있고 절반이 여진에 있으니, 이 둘을 한데 모으면 본래 우리나라의 면적(面積)을 더욱 징험할 수 있다.

그런데 한(漢) 나라 이래로 중국에서 말하는 ‘패수’라는 것이 그 있는 데가 일정하지 않고, 또 우리나라의 선비들은 반드시 지금의 평양으로 표준을 삼아 혼잡스럽게 패수의 자취를 찾았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중국 사람들이 무릇 요동 왼쪽 물을 다 패수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수(里數)가 맞지 않고 사실도 틀리는 것이 많음은 이 까닭이다.

그러므로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강역(彊域)을 찾으려면 먼저 여진을 국경 안에 합친 다음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한다. 패수가 확정된 후에 강역이 밝혀지고, 강역이 밝혀진 후에 고금의 사실이 맞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봉황성이 과연 평양일까? 이는 역시 혹 기씨(箕氏), 위씨(衛氏), 고씨(高氏)가 도읍한 곳이면 하나의 평양이 된다. 《당서(唐書)》 배구전(裵矩傳)에,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孤竹國)인데, 주(周) 나라는 기자(箕子)를 봉하고 한(漢) 나라에서는 4군(郡)으로 나누었다.”

하였는데, 이른바 ‘고죽국의 땅’은 지금의 영평부(永平府)에 있다. 또 광녕현(廣寧縣)에 있는 옛날 기자의 사당에는 우관(冔冠)을 쓴 소상(塑像)이 있었는데, 명 나라 가정(嘉靖) 때 병화(兵火)로 불탔다. 광녕 사람들이 더러 평양이라 했고, 《금사(金史)》나 《문헌통고(文獻通考)》에 모두, “광녕과 함평(咸平)이 모두 기자가 봉한 땅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영평과 광녕의 사이가 하나의 평양인 것이다.

《요사(遼史)》에,

“발해 현덕부(顯德府)가 본래 조선 땅으로서 기자를 봉한 평양성(平壤城)인데, 요 나라가 발해를 치고 동경(東京)이라 고치니, 곧 지금의 요양현(遼陽縣)이 그것이다.”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요양현이 하나의 평양이 되는 것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기자가 처음엔 영평(永平)과 광녕(廣寧) 사이에 있다가 후에 연(燕) 나라 장수 진개(秦開)에게 쫓기어 땅 2000리를 잃고 점차 동으로 옮겨 가 중국의 진송(晉宋)이 남으로 건너가듯 하여 가는 데마다 모두 평양이라고 일컬었다. 지금 우리나라의 대동강(大同江) 가의 평양도 바로 그 하나이다. 패수도 또한 이런 유이다. 고구려의 강토가 때로 늘었다 줄었다 하면 패수의 이름도 또한 따라서 바뀌어졌으니, 중국 남북조(南北朝) 때 주군(州郡)의 호칭이 서로 이랬다 저랬다 한 것과 같다.

그런데 지금의 평양을 평양이라 하는 사람은 대동강을 가리켜 패수라고 하고, 평안ㆍ함경 두 도계(道界) 사이의 산을 가리켜 이것이 개마대산(蓋馬大山)이라 한다. 요양을 평양이라 하는 사람은 헌우(蓒芋) 난수(灤水)를 가리켜 패수라 하고, 개평현(蓋平縣)의 산을 가리켜 이것이 개마대산(蓋馬大山)이라 한다. 비록 어느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으나, 반드시 지금의 대동강을 패수라고 하는 것은 자진하여 강토를 작게 만드는 의논일 뿐이다.

당(唐) 나라 의봉(儀鳳) 2년에 고구려 왕 장(藏)을 요동주(遼東州) 도독(都督)으로 임명, 조선왕(朝鮮王)으로 봉하여 요동으로 돌려보내고, 이어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겨 통할하게 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당 나라가 요동에 있는 고씨(高氏)의 경토(境土)를 비록 얻었으나 소유하지 못하고 다시 고씨에게 돌려준 것이다. 즉 평양은 본래부터 요동에 있으면서 혹 이름이 붙여져 패수와 더불어 때로 이랬다 저랬다 한 것뿐이다. 한 나라 낙랑군(樂浪郡) 치소(治所)가 요동에 있는 것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바로 요양(遼陽)의 평양이다.

승국(勝國) 왕씨 고려 때에는 요동 및 발해의 온 강토가 다 거란에 들어가니, 즉 겨우 자산(慈山), 철산(鐵山)의 두 재[嶺]를 경계로 지켜 선춘(先春) 압록강을 모두 버리고 다시 돌아보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그 밖에 한 걸음 더 나아간 땅이랴? 비록 안으로 세 나라를 합하더라도 그 강토와 무력(武力)이 고씨의 강대(强大)함에 크게 미치지 못한데, 후세의 고루한 선비들이 평양이란 옛 이름만 연모하고, 한갓 중국의 사서와 전기(傳紀)만 신빙하여, 수 나라와 당 나라의 옛 자취에 재미를 붙여 이것이 패수(浿水)이며 이것이 평양이라 한다. 이미 엉뚱하게 틀림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 성이 안시성(安市城)인지, 봉황성(鳳凰城)인지를 어찌 분별할 수 있겠는가?

[-D001] 유공권(柳公權) : 

당 나라의 서예가이며 경술가(經術家)이다.

[-D002] 배구전(裵矩傳) : 

배구(裵矩)의 자는 홍대(弘大), 시호는 경(敬)이다. 수(隋) 나라에 벼슬하여 서역 여러 나라의 경략(經略)이 되었고 요를 정벌한 공로로 우광록대부(右光祿大夫)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