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3. 21:55ㆍ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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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강록(渡江錄) / 도강록(渡江錄) 6월 24일 신미(辛未)에 시작하여 7월 9일 을유(乙酉)에 그쳤다. 압록강(鴨綠江)으로부터 요양(遼陽)에 이르기까지 15일이 걸렸다.
28일 을해(乙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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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봉황성을 새로 쌓는데 어떤 사람이,
“이 성이 곧 안시성(安市城)이다.”
라고 한다. 고구려의 옛 방언에 큰 새를 ‘안시(安市)’라 하니, 지금도 우리 시골말에 봉황(鳳凰)을 ‘황새’라 하고 사(蛇)를 ‘배암(白巖)’이라 함을 보아서,
“수(隋)ㆍ당(唐) 때에 이 나라 말을 좇아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사성(蛇城)을 백암성(白巖城)으로 고쳤다.”
는 전설이 자못 그럴싸하기도 하다. 또 옛날부터 전하는 말에,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이 당 태종(唐太宗)의 눈을 쏘아 맞히매, 태종이 성 아래서 군사를 집합시켜 시위(示威)하고, 양만춘에게 비단 백 필을 하사하여, 그가 제 임금을 위하여 성을 굳게 지킴을 가상(嘉賞)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연경에 가는 그 아우 노가재(老稼齋) 창업(昌業)에게 보낸 시(詩)에,
천추에 크신 담략 우리의 양만춘님 / 千秋大膽楊萬春
용 수염 범 눈동자 한 살에 떨어졌네 / 箭射虬髯落眸子
라 하였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정관음(貞觀吟)에는,
주머니 속 미물이라 하잘것이 없다더니 / 爲是囊中一物爾
검은 꽃이 흰 날개에 떨어질 줄 어이 알랴 / 那知玄花落白羽
라 하였으니, ‘검은 꽃’은 눈을 말함이요, ‘흰 날개’는 화살을 말함이다. 이 두 노인이 읊은 시는 반드시 우리나라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리라. 대개 당 태종이 천하의 군사를 징발하여 이 하찮은 탄알만 한 작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창황히 군사를 돌이켰다 함은 그 사실에 의심되는 바 없지 않거늘, 김부식(金富軾)은 다만 옛 글에 그의 성명이 전하지 않음을 애석히 여겼을 뿐이다. 대개 부식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지을 때에 다만 중국의 사서에서 한번 골라 베껴 내어 모든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였고, 또 유공권(柳公權 당의 학자요 서예가)의 소설(小說)을 끌어 와서 당 태종이 포위되었던 사실을 입증까지 했다. 그러나 《당서(唐書)》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도 기록이 보이지 않으니, 이는 아마 그들이 중국의 수치를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우리 본토에서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실을 단 한 마디도 감히 쓰지 못했으니, 그 사실이 미더운 것이건 아니건 간에 모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었는지 않았는지는 상고할 길이 없으나, 대체로 이 성을 ‘안시’라 함은 잘못이라고 한다. 《당서》에 보면, 안시성은 평양서 거리가 5백 리요,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王儉城)이라 한다 하였으므로, 《지지(地志)》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 하기도 한다 하였으니, 이는 무엇을 이름인지 모르겠다. 또 《지지》에,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蓋平縣 봉천부(奉天府)에 있다)의 동북 70리에 있다 하였으니, 대개 개평현에서 동으로 수암하(秀巖河)까지가 3백 리, 수암하에서 다시 동으로 2백 리를 가면 봉황성이다. 만일 이 성을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 이른바 5백 리란 말과 서로 부합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 평양만 알므로 기자(箕子)가 평양에 도읍했다 하면 이를 믿고,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다 하면 이를 믿으며, 평양에 기자묘(箕子墓)가 있다 하면 이를 믿어서, 만일 봉황성이 곧 평양이다 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 더구나 요동에도 또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 하면, 이는 해괴한 말이라 하고 나무랄 것이다. 그들은 아직 요동이 본시 조선의 땅이며, 숙신(肅愼)ㆍ예(穢)ㆍ맥(貊) 등 동이(東彝)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衛滿)의 조선에 예속되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또 오라(烏剌)ㆍ영고탑(寧古塔)ㆍ후춘(後春) 등지가 본시 고구려의 옛 땅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아, 후세 선비들이 이러한 경계를 밝히지 않고 함부로 한 사군(漢四郡)을 죄다 압록강 이쪽에다 몰아 넣어서, 억지로 사실을 이끌어다 구구히 분배(分排)하고 다시 패수(浿水)를 그 속에서 찾되, 혹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고, 혹은 청천강(淸川江)을 ‘패수’라 하며, 혹은 대동강(大同江)을 ‘패수’라 한다. 이리하여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 이는 무슨 까닭일까. 평양을 한 곳에 정해 놓고 패수 위치의 앞으로 나감과 뒤로 물리는 것은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르는 까닭이다. 나는 일찍이 한사군의 땅은 요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여진(女眞)에까지 들어간 것이라고 했다. 무엇으로 그런 줄 아느냐 하면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현도(玄菟)나 낙랑(樂浪)은 있으나, 진번(眞蕃)과 임둔(臨芚)은 보이지 않는다.
대체 한 소제(漢昭帝)의 시원(始元) 5년(B.C. 82)에 사군을 합하여 2부(府)로 하고, 원봉(元鳳) 원년(B.C. 76)에 다시 2부를 2군(郡)으로 고쳤다. 현도 세 고을 중에 고구려현(高句麗縣)이 있고, 낙랑스물다섯 고을 중에 조선현(朝鮮縣)이 있으며, 요동 열여덟 고을 중에 안시현(安市縣)이 있다. 다만 진번은 장안(長安)에서 7천 리, 임둔은 장안에서 6천 1백 리에 있다. 이는 김윤(金崙 조선 세조(世祖) 때의 학자)의 이른바,
“우리나라 지경 안에서 이 고을들은 찾을 수 없으니, 틀림없이 지금 영고탑(寧古塔) 등지에 있었을 것이다.”
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이로 본다면 진번ㆍ임둔은 한말(漢末)에 바로 부여(扶餘)ㆍ읍루(挹婁)ㆍ옥저(沃沮)에 들어간 것이니, 부여는 다섯이고 옥저는 넷이던 것이 혹 변하여 물길(勿吉)이 되고, 혹 변하여 말갈(靺鞨)이 되며, 혹 변하여 발해(渤海)가 되고, 혹 변하여 여진(女眞)으로 된 것이다. 발해의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가 일본(日本)의 성무왕(聖武王)에게 보낸 글월 중에,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옛풍속을 물려받았다.”
하였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면, 한사군의 절반은 요동에, 절반은 여진에 걸쳐 있어서, 서로 포괄되어 있었으니, 이것이 본디 우리 강토 안에 있었음은 더욱 명확하다.
그런데 한대(漢代) 이후로, 중국에서 말하는 패수가 어딘지 일정하지 못하고, 또 우리나라 선비들은 반드시 지금의 평양으로 표준을 삼아서 이러쿵저러쿵 패수의 자리를 찾는다. 이는 다름 아니라 옛날 중국 사람들은 무릇 요동 이쪽의 강을 죄다 ‘패수’라 하였으므로, 그 이수가 서로 맞지 않아 사실이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조선과 고구려의 지경을 알려면, 먼저 여진을 우리 국경 안으로 치고, 다음에는 패수를 요동에 가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패수가 일정해져야만 강역이 밝혀지고, 강역이 밝혀져야만 고금의 사실이 부합될 것이다. 그렇다면 봉황성을 틀림없는 평양이라 할 수 있을까. 이곳이 만일 기씨(箕氏)ㆍ위씨(衛氏)ㆍ고씨(高氏) 등이 도읍한 곳이라면, 이 역시 하나의 평양이리라 하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당서》 배구전(裴矩傳)에,
“고려는 본시 고죽국(孤竹國)인데, 주(周)가 여기에 기자를 봉하였더니, 한(漢)에 이르러서 사군으로 나누었다.”
하였으니, 그 이른바 고죽국이란 지금 영평부(永平府)에 있으며, 또 광녕현(廣寧縣)에는 전에 기자묘(箕子墓)가 있어서 우관(冔冠 은(殷)의 갓 이름)을 쓴 소상(塑像)을 앉혔더니, 명(明)의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때 병화(兵火)에 불탔다 하며, 광녕현을 어떤 이들은 ‘평양’이라 부르며, 《금사(金史)》와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광녕ㆍ함평(咸平)은 모두 기자의 봉지(封地)이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영평(永平)ㆍ광녕의 사이가 하나의 평양일 것이요, 《요사(遼史 원(元)의 탁극탁이 씀)》에,
“발해(渤海)의 현덕부(顯德府)는 본시 조선 땅으로 기자를 봉한 평양성(平壤城)이던 것을, 요(遼)가 발해를 쳐부수고 ‘동경(東京)’이라 고쳤으니 이는 곧 지금의 요양현(遼陽縣)이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요양현도 또한 하나의 평양일 것이다. 나는,
“기씨(箕氏)가 애초에 영평ㆍ광녕의 사이에 있다가 나중에 연(燕)의 장군 진개(秦開)에게 쫓기어 땅 2천 리를 잃고 차츰 동쪽으로 옮아가니, 이는 마치 중국의 진(晉)ㆍ송(宋)이 남으로 옮겨감과 같았다. 그리하여 머무는 곳마다 평양이라 하였으니, 지금 우리 대동강 기슭에 있는 평양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 패수도 역시 이와 같다. 고구려의 지경이 때로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였을 터인즉, ‘패수’란 이름도 따라 옮김이 마치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때에 주(州)ㆍ군(郡)의 이름이 서로 바뀜과 같다. 그런데 지금 평양을 평양이라 하는 이는 대동강을 가리켜, “이 물은 ‘패수’다.” 하며, 평양과 함경(咸鏡)의 사이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은 ‘개마대산(蓋馬大山)’이다.” 하며, 요양으로 평양을 삼는 이는 헌우낙수(蓒芋濼水)를 가리켜, “이 물은 ‘패수’다.” 하고, 개평현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은 ‘개마대산’이다.” 한다. 그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지금 대동강을 ‘패수’라 하는 이는 자기네 강토를 스스로 줄여서 말함이다.
당(唐)의 의봉(儀鳳 당 고종(唐高宗)의 연호) 2년(677)에 고구려의 항복한 임금 고장(高藏)고구려 보장왕(寶藏王) 을 요동주(遼東州)도독(都督)으로 삼고, 조선왕(朝鮮王)을 봉하여 요동으로 돌려보내며, 곧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에 옮겨서 이를 통할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고씨(高氏)의 강토가 요동에 있던 것을 당이 비록 정복하기는 했으나 이를 지니지 못하고 고씨에게 도로 돌려주었은즉, 평양은 본시 요동에 있었거나 혹은 이곳에다 잠시 빌려 씀으로 말미암아 패수와 함께 수시로 들쭉날쭉하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의 낙랑군 관아(官衙)가 평양에 있었다 하나 이는 지금의 평양이 아니요, 곧 요동의 평양을 말함이다. 그 뒤 승국(勝國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는, 요동과 발해의 일경(一境)이 모두 거란(契丹)에 들어갔으나, 겨우 자비령(慈悲嶺)과 철령(鐵嶺)의 경계를 삼가 지켜 선춘령(先春嶺)과 압록강마저 버리고도 돌보지 않으니, 하물며 그 밖에야 한 발자국인들 돌아보았겠는가. 고려는 비록 안으로 삼국(三國)을 합병하였으나, 그의 강토와 무력이 고씨의 강성함에 결코 미치지 못하였는데, 후세의 옹졸한 선비들이 부질없이 평양의 옛 이름을 그리워하여 다만 중국의 사전(史傳)만을 믿고 흥미진진하게 수ㆍ당의 구적(舊蹟)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패수요, 이것은 평양이오.”
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벌써 말할 수 없이 사실과 어긋났으니, 이 성이 안시성인지 또는 봉황성인지를 어떻게 분간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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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잡지(盛京雜識) / 성경잡지(盛京雜識) 7월 10일 병술(丙戌)에 시작하여 14일 경인(庚寅)에 마쳤다. 모두 5일 동안이다. 십리하(十里河)로부터 소흑산(小黑山)에 이르기까지 모두 3백 27리다.
14일 경인(庚寅)
일판문과 이도정은 땅이 움푹 파인 곳이어서 비가 조금만 와도 시궁창이 되고, 봄에 얼음 풀릴 무렵에는 잘못 시궁창에 빠지면, 사람도 말도 삽시에 보이지 않게 되어 지척에 있어도 구출하기 어려우므로, 작년 봄에 산서(山西) 장사꾼 20여 명이 모두 건장한 나귀를 타고 오다 일판문에 이르러 한꺼번에 빠졌으며, 우리나라 마부 역시 두 사람이 빠져버렸다 한다. 그리고 《당서》에 이르기를,
“태종이 고구려를 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오는 길에 발착수(渤錯水)에 이르러 80리 진펄에 수레가 통할 수 없으므로,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양사도(楊師道 당 고조(唐高祖)의 사위) 등이 군정 1만 명을 거느리고 나무를 베어 길을 쌓고 수레를 잇달아 다리를 놓을 제 태종이 말 위에서 손수 나무를 날라서 일을 도왔고, 때마침 눈보라가 심해서 횃불을 밝히고 건넜다.”
하였으니, 발착수가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요동 진펄 천 리에 흙이 떡가루처럼 보드라워서 비를 맞으면 반죽이 되어 마치 엿 녹은 것처럼 되어, 자칫하면 사람의 허리와 무릎까지 빠지고 겨우 한 다리를 빼면 또 한 다리가 더 깊이 빠지게 된다. 이에 만일 발을 빼려고 애쓰지 않으면 땅 속에서 마치 무엇이 있어서 빨아들이는 듯이 온 몸이 묻혀서 흔적도 없어지게 된다. 지금은 청(淸)에서 자주 성경으로 거둥하므로, 영안교에서부터 나무를 엮어 다리를 만들어서 진펄을 막되, 고가포(古家舖) 밑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치는데, 2백여 리 사이에 한결같이 뻗쳤으니 이는 비단 물력(物力)이 그처럼 굉장할뿐더러, 그 나무끝이 한 군데도 들쭉날쭉한 것이 없이 2백 리 사이에 두 쪽이 마치 한 먹줄로 퉁긴 듯이 되었으니, 그 일솜씨의 정미로움을 이로써 짐작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민간에서 항용 쓰는 물건들이라도 이를 본받아서 그 규모가 대체로 같으니, 이는 덕보(德保 홍대용(洪大容)의 자)가 이른바 중국의 심법(心法)을 우리로선 당하지 못할 것이라 한 것이 바로 이런 일을 말한 것이리라. 이 다리는 3년 만에 한 번씩 고친다 한다. 그리고 《당서》의 발착수는 아마 일판문ㆍ이도정의 사이를 말한 것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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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잡지(盛京雜識) / 성경잡지(盛京雜識) 7월 10일 병술(丙戌)에 시작하여 14일 경인(庚寅)에 마쳤다. 모두 5일 동안이다. 십리하(十里河)로부터 소흑산(小黑山)에 이르기까지 모두 3백 27리다.
산천기략(山川記略)
발해(渤海)는 봉천부 남쪽에 있다. 《성경통지(盛京統志)》에 이르기를,
“바다의 옆으로 나간 줄기를 발(渤)이라 한다.”
하였다. 요동 2천 리 벌이 뻗쳤는데 그 남쪽이 곧 발해이다.
요하(遼河)는 승덕현의 서쪽에 있다. 곧 구려하(句驪河)인데 혹은 구류하(枸柳河)라고도 한다. 《한서(漢書)》와 《수경(水經)》에는 모두 대요수(大遼水)라 하였다. 요수의 좌우가 곧 요동ㆍ요서의 갈리는 경계이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칠 적에 진펄 2백여 리에 모래를 깔아 다리를 놓아서 건너갔다.
혼하(渾河)는 승덕현 남쪽에 있다. 일명(一名) 소요수(小遼水)요, 혹은 아리강(阿利江)이라 하고, 또는 헌우록수(軒芋濼水)라고도 한다. 장백산에서 발원하여 태자하(太子河)와 합하고, 다시 요수와 합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태자하는 요양 북쪽에 있다. 변문(邊門) 밖 영길주(永吉州)에서 발원하여 변문 안으로 흘러들어 혼하ㆍ요하와 합쳐 삼차하(三叉河)가 되었다. 세상에 전하기를,
“연 태자(燕太子) 단(丹)이 도망하여 이곳까지 온 것을 마침내 머리를 베어 진(秦)에 바쳤으므로 후인이 이를 가엾이 여겨 이 물 이름을 태자하라 하였다.”
한다. 소심수(小瀋水)는 승덕현 남쪽에 있다. 동관(東關) 관음각(觀音閣)에서 발원하여 혼하로 들어간다. 물 북편을 양(陽)이라 하므로 심양(瀋陽)의 이름이 대체로 여기에서 난 것이라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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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전편(前篇)에 9일 을묘(乙卯)를 계속하여 14일 경신(庚申)에 그쳤다. 모두 엿새 동안이다.
10일 병진(丙辰)
“황자(皇子)가 오시는 거요.”
한다. 한 사람이 말을 탄 채 궐내로 들어가는데,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가는 것이었다. 이가 소위 황륙자(皇六子) 영용(永瑢)이다. 흰 얼굴에 얽은 자욱이 낭자하고, 콧날은 낮고 작으나 볼이 몹시 넓으며, 흰 눈에 눈자위가 세 거풀 지고, 어깨가 넓고 가슴이 떡 벌어져서 체격이 건장하긴 하나, 전혀 귀기(貴氣)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글을 잘하고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여, 지금 《사고전서(四庫全書)》 총재관(總裁官)이며, 민망(民望)이 그에게 쏠린다 한다. 내 일찍이 강녀묘(姜女廟)에 들어갔을 때, 그 벽 위에 황삼자(皇三子)와 황오자(皇五子)의 시(詩)를 깊이 간직한 것을 보았다. 황오자의 호는 등금거사(藤琴居士)라 하며, 시가 몹시 쓸쓸하고 글씨마저 가냘파서, 재주는 있으나 황왕가(皇王家)의 부하고 귀한 기상이란 엿볼 수 없었다. 그리고, 등금거사는 호부 시랑(戶部侍郞) 김간(金簡)의 생질이요, 간(簡)은 상명(祥明)의 종손(從孫)이다. 상명의 조부는 본시 의주(義州) 사람으로 중국에 들어갔으며, 상명은 벼슬이 예부 상서에 이르렀고, 옹정(雍正) 때 사람이다. 간(簡)의 누이동생이 궁중에 들어가서 귀비(貴妃)가 되어 총애를 받았었다. 건륭제의 뜻은 다섯째 아들에게 뒷일을 맡기려 하였는데, 연전에 일찍 죽어 버리고 지금은 영용이 총애를 독차지하여서, 지난해에 서장(西藏)에 가서 반선(班禪)을 맞아 왔다 한다. 그 죽은 아들이 읊은 시(詩)는 뜻이 몹시 스산하고, 그 남은 아들의 것도 귀기(貴氣)가 전혀 없으니, 폐하(陛下)의 집안 일이 어찌 될지 모를 노릇이다.
“귀국 부인도 역시 발을 묶습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아뇨, 중국 여자들의 활굽정이처럼 생긴 신은 차마 볼 수 없더군요. 휘뚱거리며 땅을 디디고 가는 꼴이, 마치 보리씨를 뿌리는 것처럼 외로 흔들고 오른쪽으로 기우뚱거려, 바람도 없는데 저절로 쓰러지곤 하니 이게 무슨 꼴이어요.”
하였더니, 혹정은,
“이로 인하여 도륙을 당하였음은 가히 세운(世運)을 짐작할 수 있으리다. 전조(前朝) 명대(明代)엔 그 죄가 부모에게 미쳤고, 본조(本朝)에 와서도 이에 대한 금령(禁令)이 몹시 엄격하였으나, 끝끝내 이를 막을 수 없음은 대개 남자는 따르지만 여자는 따르지 말라는 때문이어요.”
한다. 나는,
“모양이 흉하고 걸음이 불편한데, 왜 하필이면 그걸 합니까.”
하였더니, 혹정은,
“만주 계집들과 한가지로 보일까봐 그런 게죠.”
하고는 곧 붓으로 지워 버리고 그는 또 이어서,
“죽어도 고치지 않는답니다.”
한다. 나는,
“삼하ㆍ통주 사이에서, 늙은 거지 여인이 머리에 가득히 꽃을 꽂고 발을 싸맨 채 말을 따라오면서 구걸하는데, 마치 오리가 배불리 먹은 것처럼 뒤뚱뒤뚱 넘어질 듯하니, 내 보기에는 도리어 만주 여자보다도 흉하더군요.”
하였더니, 혹정은,
“그러니까 삼액(三厄)이라 하였습죠.”
한다. 나는,
“삼액이란 무슨 말씀이어요.”
하였더니, 혹정은,
“남당(南唐) 때 장소랑(張宵娘)이 송궁(宋宮)에 사로잡혀 왔는데, 궁인(宮人)들이 모두 그 작은 발이 뾰족한 게 보기 좋다 하여, 다투어서 헝겊으로 발을 팽팽하게 싸매어, 마침내 풍속이 이룩되었답니다. 원(元)의 시절엔 중국 여자들이 발을 싸맴으로써 스스로 표적을 삼았으며, 명(明)에 이르러선 이를 금했으나 소용이 없었지요. 그러나 만주 계집들이 중국 여자들의 발 싸맨 것을 비웃어 회음(誨淫)이라 하지만, 이는 실로 억울한 일입니다. 이것이 족액(足厄)이오. 홍무(洪武) 때에 고 황제(高皇帝)가 가만히 신락관(神樂觀 도관(道觀)의 이름)에 거둥하여, 한 도사(道士)가 실로 망건(網巾)을 떠서 머리칼을 싸매는 것이 보기에 편리할 듯해서, 이를 빌려 거울 앞에서 써 보고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그 제도를 천하에 명령하였답니다. 그 뒤부터 말 갈기로써 실을 대신하여 꼭 졸라매어서 자국이 낭자하게 났으며, 이를 호좌건(虎坐巾)이라 함은 그 앞이 높고 뒤가 낮아서 흡사 범이 쭈그리고 앉은 것 같음을 이름이었고, 또 수건(囚巾)이라 함은 당시에도 벌써 이를 옳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어서 천하의 두액(頭額)이 모두 그물 속에 갇혔다 함이었으니, 대개 불편히 여긴 이가 많았던 것입니다.”
하고는 붓으로 내 이마를 가리키며,
“이게, 두액(頭厄)이 아니어요.”
하기에, 나는 웃으면서 그의 이마를 가리켜,
“이 번쩍번쩍하는 건 무슨 액(厄)이어요.”
하였다. 혹정은 별안간 슬픈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곧 천하두액(天下頭額) 이하의 글자를 모두 까맣게 지워 버리었다.
그리고 그 시(詩)는 욱리자(郁離子)가 지은 것이다.
붉은 꽃 다 지고 누런 꽃 피는구나 / 紅花落盡黃花發
붉은 꽃이란 붉은 모자를 가리킴이었고, 몽고와 서번은 모두 누런 모자를 쓰는 것을 이름이었다. 또 한 노래에,
원래는 옛 물건이니 누가 정말 주인인고 / 元是古物誰是主
라 하였으니, 이 두 노래를 보건대 모두 몽고를 두고 부름이다. 몽고는 방금 마흔여덟 부가 강하고, 그 중 토번(吐番)이 가장 사납다. 토번은 서북의 호족(胡族)이었으며, 몽고의 별부(別部)로서 황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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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8월 15일 신유(辛酉)에 시작하여 20일 병인(丙寅)에 그쳤다. 모두 6일 동안이다.
18일 갑자(甲子)
글자를 만드는 데는 상형(象形)이 가장 많았음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배 주(舟) 자의 변에는 도(舠)니 첩(艓)이니 작(舴)이니 항(航)이니 맹(艋)이니 정(艇)이니 함(艦)이니 몽(艨)이니 하는 따위가 모두 그 꼴을 따라서 이름을 지은 것이 가지마다 모두 그렇거늘, 어쩐지 우리나라에서는 작은 배는 걸오(傑傲)니 나룻배는 날오(捏傲)니 커다란 배는 만장이(漫藏伊)니 곡식을 실은 배는 송풍배(松風排)니 하였을 뿐 아니라, 바다에 출범(出帆)할 때에는 당돌이(唐突伊) 상류에 뜰 때에는 물우배(物遇排)라 하였고, 또 관서(關西)에서는 배를 마상이(馬上伊)라 일컫는다. 그 제도는 비록 각기 같지 않으나, 다만 선(船)의 한 글자로 통일되어 있을 뿐이요, 또 비록 도(舠)ㆍ첩(艓)ㆍ작(舴)ㆍ맹(艋) 등의 글자를 차용(借用)하였으나, 그 이름과 실물은 맞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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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선시말(班禪始末) / 반선시말(班禪始末)
반선시말(班禪始末)
“반선액이덕니(班禪額爾德尼)는 서번(西番) 오사장(烏斯藏 서장 지방의 일부)의 대보법왕(大寶法王)입니다. 서번은 사천(四川)ㆍ운남(雲南)의 지경 밖에 있고, 오사장은 대개 청해(靑海) 서쪽에 있는데, 옛 경(經)에는 당(唐) 때의 토번(吐蕃) 옛 땅으로 황중(湟中)에서 5천여 리 떨어져 있다 합니다. 혹은 반선을 장리불(藏理佛)이라고도 하는데, 소위 삼장(三藏)이 바로 그 땅입니다.
내가 열하에 있을 때 몽고 사람 경순미(敬旬彌)가 나를 위해 말하기를,
“서번(西番)은 옛날 삼위(삼위 나라 이름) 땅으로 순(舜)이 삼묘(三苗)를 삼위로 쫓아 보냈다는 곳이 바로 이 땅입니다. 이 나라는 셋으로 되어 있으니, 하나는 위(衛)라 하여 달뢰라마(達賴喇嘛)가 사는데 옛날의 오사장이요, 하나는 장(藏)이라 하여 반선라마(班禪喇嘛)가 사는데 옛날의 이름도 역시 장이요, 하나는 객목(喀木)이라 하여 서쪽으로 더 나가 있는 땅으로서 이곳에는 대라마(大喇嘛)는 없고 옛날의 강국(康國)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 땅들은 사천(四川)마호(馬湖)의 서쪽에 있어 남으로는 운남(雲南)으로 통하고 동북으로는 감숙(甘肅)에 통하여 당의 원장 법사(元裝法師)가 삼장(三藏)으로 들어갔다는 곳이 바로 이 땅입니다. 원장이 갈 적에는 이 땅에 사람이 없었고 큰 물을 건너 갔었는데, 그가 돌아올 적에는 물은 말라버리고 촌락이 생겼으며, 당의 중엽에는 갑자기 토번(吐蕃)이란 큰 나라가 생겨서 중국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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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란섭필(銅蘭涉筆) / 동란섭필(銅蘭涉筆)
동란섭필(銅蘭涉筆)
우리나라 도포와 갓과 띠는 중국의 중옷과 흡사하다. 그들이 여름에 쓰는 갓을, 혹은 등(藤)으로 만들고, 혹은 종려(棕櫚)로 만들기도 한다. 도포는 특히, 깃이 모가 난 것이 좀 다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도포는 모두 검정 공단이거나 문사(紋紗)를 쓰고, 가난한 자는 오히려 수화주(秀花紬)나 야견사(野繭紗)로 도포를 만들어 입는다. 나는 변의(卞醫) 관해(觀海)와 더불어 옥전(玉田) 어느 상점에 들어갔더니, 수십 명이 둘러서서 우리들이 입은 베도포 만든 제도를 자세히 구경하다가, 매우 의아하게 여기면서 저희들끼리 서로 말하기를,
“저 중은 어디에서 왔을까.”
하니, 한 사람이 희롱으로 대답하여,
“사위국(舍衛國) 급고원(給孤園 석가여래가 설법하던 곳)으로부터 왔겠지.”
한다. 우리들이 조선 사람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의 도포와 갓을 보고서 걸승(乞僧)들과 비슷하다고 조롱하는 것이다. 대체로 중국의 여자와 승려(僧侶)와 도류(道流)들은 옛날 제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의관은 모두 신라의 옛 제도를 답습한 것이 많았고, 신라는 처음에는 중국 제도를 본뜬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풍속이 불교를 숭상하므로, 민간에서는 중국의 중옷을 많이 본떠서 1천여 년을 지난 오늘에 이르도록 변할 줄을 모르고, 도리어 중국의 승려가 우리의 나라 의관을 본떴다고 말했으니, 어찌 그렇겠는가.
중의 갓이, 등나무 실로 짠 것은 그 빛이 우리나라 초립(草笠)과 같고, 종려나무 실로 짠 것은 우리나라 주립(朱笠)과 같다.
이탁오(李卓吾 명(明)의 사상ㆍ문학가 이지(李贄). 탁오는 자(字))는 머리가 가려워서 공공연하게 머리를 깎았더니, 중국 사람들은 또한 그를 흉성(凶性)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대체로 중국 사람들이 머리를 깎을 징조라고 할 것이다. 지금 중국 사람의 머리 깎는 풍속은 금ㆍ원 시절에는 없던 풍속이니, 만일 중국이 낳은 진주(眞主) 명 태조(明太祖) 같은 이가 있다면, 건곤(乾坤)을 맑게 숙청할 것인데, 우민(愚民)들이 이런 습속에 젖은 지도 이미 1백여 년이 지나고 보니, 또한 머리를 묶고 모자를 쓰자면 도리어 가렵고 불편하다고 할 자가 없지 않았다.
고려 때는 송의 장삿배들이 해마다 자주 예성강(禮成江)에 닿았으며, 백화(百貨)가 몰려들었다. 고려왕은 예절을 차려서 대우했으므로, 당시에 서적들은 훌륭히 갖추어졌고, 중국의 기물(器物)로서 안 들어온 것이 없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뱃길로 중국 남방과 통상을 하지 못하므로 문헌에는 더구나 캄캄하며, 삼왕(三王)의 일을 몰랐던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은 강남(江南)과 통하므로, 명(明)의 말년에 고기(古器)와 서화와 서적과 약료(藥料)가 장기(長崎) 지방에 폭주(輻輳)하여, 지금의 겸가당(蒹葭堂) 주인 목씨(木氏) 홍공(弘恭)의 자는 세숙(世肅)인데, 3만 권의 책을 가지고 중국의 명사와도 많은 교제가 있다고 한다.
‘황여고’에는,
“천하에 큰물 셋이 있어 황하(黃河)ㆍ장강(長江)과 압록강이 그것인데, 압록강은 역시 외지에 있다.”
하였고, 《양산묵담(兩山墨談)》 진정(陳霆)의 저(著) 에 이르기를,
“장회(長淮)는 남북의 큰 한계가 되는데, 장회 이북은 북조(北條)가 되어 모든 물은 황하를 조종으로 삼고 있으므로 ‘강(江)’이란 이름을 붙인 물은 없고, 장회 남쪽은 남조(南條)가 되어 모든 물은 대강(大江 양자강(揚子江))을 조종으로 삼고 있으므로 ‘하(河)’라는 이름을 붙인 물은 없다. 두 가닥 물 이외에 북으로 고려에 있는 물은 혼동강(混同江)ㆍ압록강이라 하고, 남으로 만조(蠻詔 지명)에 있는 물은 대도하(大渡河)라고 하는데, 그것은 우(禹)의 치수 사업 중에 들지 않았다.”
하였으나, 나는 이 말들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강과 하(河)는 맑고 흐린 것으로 구별한 것이니, 내가 압록강을 건널 때 강 넓이는 한강(漢江)보다 넓은 것이 없으나, 물이 맑기는 한강에 비할 만했다. 북경에 이르기까지 무려 물을 10여 차나 건너면서, 때로는 배로 건너고 때로는 발로 건넜다. 물이름은 혼하(混河)ㆍ요하(遼河)ㆍ난하(灤河)ㆍ태자하(太子河)ㆍ백하(白河) 등인데, 어디나 누른 흙탕물이다. 대체로 들에 흐르는 물은 탁하고, 산골물은 맑다. 압록강의 발원지는 장백산으로서, 국경의 여러 산속을 흘러내리므로 언제든지 물이 맑다. 동팔참(東八站)의 여러 물들은 모두 맑으니, 이것도 이유는 같은 것이다. 나는 비록 장강(長江)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 근원이 민아산(岷峨山) 같은 첩첩한 산중에서 발원하여 삼협(三峽)을 뚫고 내려올 것이고 보니, 물이 맑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소위 남조(南條)의 물들이 하(河)라고 이름 붙인 것이 없는 것은, 초(楚)의 남쪽은 산도 많고 돌도 많으므로 물이 모두 맑은 까닭이다. 그러니 만조(蠻詔)의 대도하(大渡河)도 필시 평양에서 발원하여 물이 탁하므로 하수라 불렀을 것이다.
숭정(崇禎) 정축년(1637년) 11월 11일 정조사(正朝使)건주(建州)와 더불어 화해를 한 뒤이다.한형길(韓亨吉 조선 선조(宣祖) 때의 관리)과 서장관(書狀官) 이후양(李後陽 미상)의 일행이 사절로 갔을 때, 정례의 진상품 외에 별공(別貢)으로 홍시(紅柿) 30바리를 가져다 바쳤더니, 칙사는 또 다시 2만 개를 더 바치라고 독책한다. 당시의 칙사는 영아아대(英俄兒代 만인(滿人))ㆍ마복탑(馬福塔)ㆍ대운증(戴雲曾 미상) 등으로 연로에서 말을 달려 사냥을 하면서 고을 기생들의 수청을 강요하여 조금이라도 여의치 못할 때는 매질을 하고 야료를 낭자히 했고, 왜인들도 역시 말 3백 필과 매 3백 마리와 황새 3백 마리를 구하였다. 이번 걸음에 가지고 온 방물(方物)이란 종이와 자리에 불과했으나, 중국은 우리가 유숙하는 비용을 치르는 것만 하더라도 언제나 10여만 냥이 든다고 하니, 청 나라 초기에 비한다면 가위 도리어 중국에 폐를 끼치는 셈이 된다.
“청인들이 여러 번 한(汗) 청(淸)의 태종(太宗) 에게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리를 깎도록 명령하라고 권했으나, 한(汗)은 묵연(黙然)히 이에 응하지 않고 가만히 여러 패륵(貝勒)들에게 이르기를, 조선은 본래 예의로 이름이 나서 머리털을 자기 목숨보다 사랑하는데, 이제 만일 억지로 그 심정을 꺾는다면 우리 군사가 돌아온 뒤에는 반드시 반복(反覆)할 터이니, 그들의 풍속에 따라 예의로써 얽매어 두는 것만 못할 것이다. 저들이 도리어 우리 풍속을 익혀 기사(騎射)에 편리해진다면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다."
하고, 드디어 그만두었다. 우리로서 말하자면 다행함이 이보다 큰 것이 없었다 하더라도, 저들로서 계교한다면 우리들의 문약(文弱)함을 그대로 두려던 것이었다.
우리나라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홍류동(紅流洞)에 원융각(元戎閣)이 있어 명의 중군도독태자태보(中軍都督太子太保) 이여송(李如松)이 쓰던 갓과 전포와 당시에 지은 시 한 편을 보관해 두었다. 내가 일찍이 해인사를 유람할 때에 갓과 도포를 구경하니, 갓 모자 둘레가 세 아름이나 되니 그 머리통의 크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절에 있는 중 가운데 키가 가장 큰 자를 뽑아 전포를 입혀 보았더니 땅에 한 자나 남게 끌렸다. 만력 임진에 우리나라가 왜인의 침로를 당했을 때 공(公)은 요계보정산동군무제독(遼薊保定山東軍務提督)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를 도와 평양(平壤)으로 달려 나와서 왜장(倭將) 평행장(平行長)을 모란봉(牧丹峰) 아래서 격파시켰다. 장사(壯士) 누국안(婁國安)을 행장의 영채에 보내서 빼앗아 간 왕자 순화군(順化君 조선 선조(宣祖)의 여섯째 아들)과 대신 김귀영(金貴榮)ㆍ황정욱(黃廷彧) 등을 빼앗아 왔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간 지 6년 뒤에 요동에서 전사했는데, 의관을 갖추어 장사를 지내도록 조서를 내리고 소보(少保)의 벼슬을 추증(追贈)하고 시호를 충렬(忠烈)이라 불렀다. 공은 우리나라로 올 때에 군사를 몰아 조령(鳥嶺)을 넘어 문경(聞慶)으로부터 충주(忠州)로 돌아왔으므로 그의 갓과 전포가 합천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공은 본래 조선 사람으로 그의 원조(遠祖)는 영(榮)인데, 홍무(洪武) 연간에 처음으로 중국에 들어가 양평(襄平)에 살았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그의 근본을 아는 자가 드물지만 일찍이 왕이상(王貽上)의 《대경당집(帶經堂集)》에 실린 청의 병부시랑(兵部侍郞) 이휘조(李輝祖)의 신도비(神道碑)에는,
“철령(鐵嶺) 이씨는 영원백(寧遠伯) 성량(成樑)으로부터 시작하고 문벌이 명의 시절부터 드러나기 시작하여 본조에 들어와서는 가문이 더욱 커져서 안으로는 경악(經幄)에 참례하게 되고, 밖으로는 장수의 지위에 나아가게 되었다. 이씨의 선조는 조선 사람으로서 제일 먼저 양평에 옮겨 오기는 영이었는데, 영은 처음 군공(軍功)으로 철령위도지휘사(鐵嶺衛都指揮使)를 받았고, 그의 아들은 문빈(文彬)이요, 문빈의 아들 다섯중 맏이가 춘미(春美)요, 춘미의 아들이 경(涇)이요, 경의 아들이 영원(寧遠)이요, 영원의 장자(長子)가 공이다.”
했으니, 휘조는 춘미의 아우 춘무(春茂)의 후손이다. 이로써 공이 우리나라 출신인 것을 더욱 알 수가 있겠다. 숭정 말년에 공의 아들과 여백(如栢)ㆍ여매(如梅)의 아들들이 조선으로 탈신(脫身)해 온 것은 그 부형들이 조선에서 큰 공을 세웠은즉 비단 옛 은혜를 판 것만이 아니라 역시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제 고향으로 향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 혁명이 나면서 우리나라 역시 기휘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우리나라에 온 여러 이씨들도 감히 그 소자출(所自出)을 밝혀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선무문(宣武門) 안 첨운패루(瞻雲牌樓) 앞에서 한 미소년(美少年)을 만났는데, 그는 말하기를, 영원백의 후손으로 이름은 홍문(鴻文)이라 하였다. 이튿날 나를 비단 점방으로 찾아와 품속에서 인쇄한 족보(族譜) 두 권을 내놓는데, 곧 《철령이씨세보(鐵嶺李氏世譜)》로서, 영으로부터 시작하여 계통을 이어서 곧 조선 사람이라 하였으니, 내가 전에 알던 것과 더욱 들어맞아 의심할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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