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3. 21:40ㆍ고대사
삼천리 제7권 제9호 > 讀史隨筆 萬里長城과 大高句麗
잡지명 | 삼천리 제7권 제9호 |
발행일 | 1935년 10월 01일 |
기사제목 | 讀史隨筆 萬里長城과 大高句麗 |
필자 | 金明植 |
기사형태 | 문예기타 |
讀史隨筆 萬里長城과 大高句麗
金明植
(承前) 讀史順에 의하야 다시 眞番朝鮮문제를 捉提한다. 丁茶山疆城에 의하면
「夏秦魏略曰, 箕子後, 朝鮮侯, 周-衰함을 見하고 燕이 王을 自稱하고 東으로 略地코자 함에 朝鮮侯 또한 王을 自稱하야 興兵하야 燕을 逆擊코자 하다. 其大夫禮가 諫함에 이에 그첫다. 禮를 使하야 西하야 燕을 說하야 써 이에 그치게 하고 攻치 아니하얏다. 後子孫이 驕虐하얏다. 燕이 이에 將秦開을 遺하야 그 西를 攻하고 千里을 取하야 滿潘汗에 至하야 畧을 삼앗다. 朝鮮이 드데여 弱해젓다. 鏞按, 今北京이 義州를 距함이 2,100里이다. 만일 魏略의 說과 如하면 드데여 鴨綠以西를 失할 것이다. 엇지 다시 滿潘汗으로써 界을 삼을 수 잇느냐. 그 說이 妄이다」云云.
茶山이 당시에 잇서서 이 夏秦說의 妄을 斷言한 것은 卓見이 아니라 할 수 업고 그 由來와 眞相을 밝키지 못한 것은 시대와 그의 생활환경을 앎으로써 이해할 수 잇다. 그리고 夏秦이 닐즉 司馬씨의 史記를 讀書아니 하얏슬 리가 업는데 同一問題에 잇서서 그와 다른 記述을 내노흔 것은 廉耻를 不顧할 이유가 潛在하고 잇섯는 까닭이 아닌가. 史記 「匈奴傳에 의하면 燕北에 東胡와 北戎이 잇섯는대 賢將秦開를 遺하야 東聀¡를 襲破하야 千里를 郤하고 長城을 築하다」 또 史記는 「初에 秦開 人質이 되여 東胡의 虛實을 審察하고 歸國한 後 드데여 東胡를 伐하다」 云云.
이로써 보면 司馬씨의 東胡를 夏씨는 眞番朝鮮이라하고 司馬씨의 千里를 夏씨는 二千里로<150> 改作하얏다. 또 司馬씨의 「人質」云云을 夏씨는 削去하얏다. 무슨 까닭인가. 첫재 人質說을 削除한 것은 從來 燕이 弱하고 眞番朝鮮이 强한 것을 掩蔽하기 위함이오. 東胡를 眞番朝鮮으로 改作한 것은 東胡의 標本인 鮮卑와 烏丸이 그 시대에 잇서서는 歷史舞台에 나타나지 아니한 것을 아는 까닭이오. 千里을 二千里로 改作한 것은 燕의 威力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그럼으로 燕이 長城을 築한 사실을 또 削除한 것이다. 그러나 夏씨의 陰謀는 모두 自己暴露에 그치고 말앗슬 뿐이다. 二千里를 取하야 滿潘汗으로써 界를 삼앗다고 하얏스니 그것은 二千里를 喪失하기 전 眞番朝鮮의 영역은 깁히 中國 본부로 드러 갓던 것을 반증하는 조건이어니와 일즉 箕子後의 朝鮮이 그와 가치 領地를 가저본 사실이 업는 關係上 저의 創出한 眞番朝鮮은 箕子朝鮮이 될 수 업는 것을 저 스스로 설명해 노앗고 그것이 東胡가 아니라고 하얏스니 따라서 眞番朝鮮은 저의 절대 忌避하는 高句麗가 되지 아니 할 수 업다. 그리고 司馬씨는 東夷族이 저의 北方으로 襲來하얏슴으로 東胡라고 平凡히 取扱하얏지마는 그 후 史家들에게 잇서서는 暗黙裡에 東胡을 우상으로 내세우고 異端者 高句麗를 黙殺할 陰謀가 진행되고 잇섯슴으로 東胡의 年代를 밝킬 필요가 잇서 司馬씨의 東胡를 改作치 아니치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 까닭에 저들간의 혼란이 생기지 아니할 수 업섯고 따라서 東胡의 扶餘 蒙古 兩族 混和說을 내노치 아니치 못하얏다. 그러나 그것은 저들의 혼란상태를 救해주지 안코 도로혀 退却의 亂步調에 拍車를 가할 뿐이다. 즉 地理的 隣接이 업서서는 兩 族이 混和되여 新族이 출현할 수 업는 것인대 蒙古族이 東滿州로 일즉 진출한 史實이 업는 以上 저들은 高句麗의 西滿州진출을 是認치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오. 또 兩族의 融和에 의한 新族이 歷史舞臺에 뚜럿시 나타날 만콤 成長함에는 적지아니한 時日을 要하는 것이다. 여긔서 저들은 扶餘族과 蒙古族의 地理的 接近과 밋 그 年代 又는 新族成長에 要한 時日을 商考하야 마츰내 三國以後에 鮮卑와 烏榎이 나타난 것을 首肯치 아니치 못하얏다. 그와 동시에 從來東胡의 標本으로 내 노튼 鮮卑와 烏榎는 一種의 우상인 것이 가만한 가온대 立證되엿다.
窩稽考 「今遼水東北海邊諸地다.(中略). 西沃書를 考査하건대 沃沮 南北으로 分해 잇다.<151> 맛당히 長白山(白頭山)으로써 界를 삼을 것니다.(中略). 高句麗가 盡有하얏다함은 非다.(中略). 拂황*(流)部는 즉 今 寧古塔 西南80里에 잇는 古城이다. 俗稱 東京城이라 한다. 또 拂訥和 訥和 즉 流城이라고 稱한다. 遼史를 案컨대 東京은 木拂*國(즉沸流國 城이다. 明時에 拂*赤衛를 두엇섯다. 此를 指한다. 野의 上原龍泉府도 역시 拂*故地인 것이다. 지금 吉林各城을 土人은 通稱曰 高麗城이라고 한다. 대개 渤海가 일즉 高麗에 附함으로 말미암는 것이오. 高麗가 吉林地를 實有한 것은 아니다」云云(向影樓叢書東三省輿圖說-曹廷杰編).
이 窩稽考 一章은 실로 高句麗 上古史 全集을 縮寫한 것가티 보인다. 그 結論의 無條理한 獨斷은 저들의 상습적 행위이니 다시 追證할 것이 업다. 掩蔽한 史實을 暴露해준 저의 反意識的 功效는 謝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2. 八面城考「蒙古遊牧記에 의하면 科爾心左翼中旗 東南四百里에 阿拉馬圖城이 잇다.(中略). 舊盛京道志는 韓州는 本來류離國舊洞流柳河縣이다. 高句麗가 鄭頡府를 두어서 鄭頡兩州를 領케 하얏다.(中略). 野史는 今拉城 西北에 高麗城이 잇다. 方里餘다. 즉 黑水靺鞨舊地이다.」云云(仝上).
즉 八面城은 蒙古의 科爾心左翼中旗 東南四百里에 잇다. 阿拉馬圖城이오. 韓州오. 鄭頡府이오. 高麗城이다. 여긔서 특히 「韓州云云」과 高麗城云云과 鄭頡府云云은 注意할 바이다.
「高句麗立國이 가장 오래다. 周書王會編에 東夷가 잇다. 嗛草語註는 東夷는 東北夷高*라 하엿다. 이것이 古高句麗가 簡冊에 나타난 始初이다.」(丁謙).
以上 各史家의 기록에 의하야 우리는 續論할 수 잇다. 즉 拂流國=류離國=高句麗이다. 그리고 扶餘가 高句麗에 讓國하얏고 肅愼=挹屢=句吉이 高句麗에 亡하얏고 또 穢貊과 沃沮와 靺鞨이 高句麗에 屬하엿다. 그럼으로 高句麗는 呂政이 皇帝가 되기 전에 잇서서 中國本部에 얼마나 侵入하얏는지 이제 이는 알우 업스나 北魏가 擡頭하기 전까지는 그 간의 衛氏朝鮮이니 劉氏四郡이니 箕氏朝鮮이니 公孫氏遼東이니 纂容氏遼東이니 하는 朝出暮沒한 鼠窃狗盜는 문제될 것이 업고 의연히 全滿州를 領有하고 잇섯든 것을 알 수 잇다. 또 劉澈直後<152> 半島北半을 領有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업다. 그리고 東方의 最大國으로서 이와가티 廣大한 疆域을 그와가티 長久한 時日-직어도 1500년 이상을 保有한 민족은 歷史上의 그 類例를 볼 수 업는 것이다. 그러나 渤海國 이후 이 대평원에 잇서서 正統性을 일어버린 高麗族의 일부인 朝鮮族은 이미 朝鮮族으로서의 歷史와 傳統과 言語와 文字 즉 文化와 지역이 분립되얏스니 以上의 역사적 사실을 토론함은 考古學的 價値는 업지 아니하나 現實的 緊急必要에는 勞가 만흔 만콤 功이 잇슬 수 업스니 아즉 高閣에 束해 두는 것이 총명한 일인출로 안다.
긋흐로 劉澈의 四郡과 秦開의 長城을 畧記하고 擱筆하겟다.
「或은 이르되 武帝元胡間에 이미 高句麗로써 縣을 삼앗다 하고 또 昭帝元始5年에 至하야 玄芚郡治高句麗가 되엇다 하니 (揑造說을 再擧할 필요가 업지 아니한가) 朱蒙의 幼時일 것 갓다.(第 2朱蒙이면 그럿타). 古高句麗는 이미 立國할 때가 업다. 不知케라. 高句麗는 비록 沃에 降하야 高句麗縣이 되엇스나 高句麗王은 그대로 잇섯든가. 朱蒙이 朝鮮에 至하야 郡境을 侵犯하얏다는 말을 듯지 못하얏스니 또 무슨 甌脫로 그의 立國을 容納하얏는가. 不知케라 沃이 朝鮮을 開하얏다는 것은 그 平曠외處에 就하야 建城置邑함에 지나지 안이한 것이오. 그 東北諸山에 近地한 諸地는 여전히 土部가 分據하얏든지 朱蒙의 立國은 대개 土部를 要幷하야, 成한 것은 그 卒本川 즉 拂流王松讓故地에 建都함과 가튼 것으로써 考할 수 잇다.」云云.
丁씨가 말한 가온대 前說을 撤廢히 取消해 바리는 反覆性은 卒本川을 鴨綠江의 어느 支流가티 暗示하고 또 拂流王松讓故地가 丸都城 혹은 國內城으로 明示하야 드대여 高句麗 즉 新高句麗를 맨드라노는 活劇으로씨 闡明할 수 잇스나 劉澈의 四郡이 名義뿐인 眞相을 正視한 것은 學者的 良心이 남아 잇는 증거이다. 그러타. 劉澈의 四郡이란 澈가티 消滅되엇다. 그리고 高句麗는 劉澈후에 丁氏의 말과 가티 北攘挹屢, 東擊沃沮한 것 뿐만 아니라 東南으로 四郡을 奪還하얏다. 그러나 一矢一兵도 傷치 아니한 것은 丁氏의 不聞侵犯郡境云云으로써 確證할 수 잇다.
그러면 高句麗는 얼마나 中國本部에 侵入하얏든가. 이것은 秦開의 長城으로써 考證할<153> 수 잇겟다.
長城에 관한 記事가 歷史上에 먼저 나타난 것은 魏惠王 39년 (西紀前349년)에 「長城을 築하야 固陽을 塞하다」云云의 春秋와 戰國간의 시대이다. 그 후 趙武靈王, 秦昭王, 燕將秦開등이 이어 長城을 築하얏다. 그 중, 魏는 異族에 備한 것이 아니오. 趙와 秦은 戎과 狄에 備한 것이오. 燕이 東胡(高句麗)에 備한 것이다. 그리고 燕의 長城은 造陽에서 起하야 襄平에 止하얏는대 後世史家는 당시 燕이 上谷, 漁陽, 石北平, 遼西, 遼東五郡을 置하야써 胡를 拒하얏다고 하얏다. 그러나 이 五郡이 秦의 置한 것은 歷代郡縣考王奔註로써 立證할 수 잇다. 그리고 造陽은 宣化東北獨石以南이오. 襄平은 遼西의 一地方이다.
그럼으로 「燕의 長城은 八達嶺以西로부터 東進하야 潘家口附近에서 다시 東折하야 遼河에 至한 者이오. 承德東北境으로부터 南折하야 山海關에 至한 것은 隋齊이후의 創建이다.(小濱氏昭著長城考). 따라서 秦開가 東胡의 千里地를 取하야 滿潘汗으로 界를 삼앗다 함은 이 造陽과 襄平間의 長城으로써 界를 삼앗다는 말과 가튼 것이니 이로써 생각하면 從來高句麗는 이 長城內 西南二千里의 城域을 領有하고 잇섯던 것은 틀림업는 사실이다. 그리고 秦始 王時에 至하야 遼西, 遼東, 石北平등을 失하얏스나 곳 回復하얏고 또 衛氏朝鮮은 箕氏朝鮮에서 幾百里를 南進한 것 뿐이오. 高句麗領地에는 侵入해 보지 못한 것과 劉澈의 四郡도 未幾에 奪還한 것은 旣述한 바이다. 실로 過去 高句麗는 强大하얏다. 그러나 우에서 말한 바와 가티 그것은 발서 우리와 인연이 멀어젓다. 그럼으로 먼저 現實朝鮮을 알고 또 현재 민족을 알어야 한다. 대개 산사람에게는 산 事實이 무엇보다 귀한 까닭이다.<15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별책 3 93권 배달공론 · 독립공론 > 倍達公論 > 『倍達公論』第四號(三一紀念號)
桓族은 桓族끼리 살어야
一 雨(寄)
緖言
桓은 音이 한이니 韓, 干, 滿, 豻, 犴, 汗이 다 同音이라. 뜻으로 말하면 ‘한’은 大이며 天이니 우리는 大族이오 天族이라.
桓儉(한검)은 桓族 又 桓國(又稱 檀國, 韓國이니 檀의 音도 한)의 임검이시니 今에 往跡을 探究하면 蒙古族이나 支那族이나 倭族 中에도 桓族의 血脈이 直接 間接으로 派及된 것도 事實이나 그네들은 다 忘本肯源하고 橫走倒行하야 自己네가 天上落下와 갓치 생각하고 우리를 侵犯하며 侮辱하기 몃 번인 것이 한 事實이로다. 그러면 구태여 追本探源하야 懲末矯弊할 必要가 업고 다만 우리 桓儉의 血統과 精魄을 直受한 桓族리 살기를 力圖하지 안이하면 안 될 것이라. 그럼으로 이 아래에 傍近으로는 倭와 支那의 蠻動과 壑慾을 말하고 遠方으로는 白人들의 强猂과 人種觀念 말을 하야써 同族과 同種의 關係에서 생기는 利害를 切實히 覺悟코져 하며 딸아서 現時 所謂 世界主義니 均富主義니 하는 迷夢을 喚醒코져 하고 아울너 桓族의 前途는 桓族리 開拓하기를 바라노라.
그럿타고 共産主義를 反對하는 것은 아니오. 共産도 桓族리 할 것이니 桓族의 現在는 弱하닛 다른 種族의 것을 앗지도 못할 거시며 貧하닛 다른 國民의게 보태줄 것도 업슬 것이라 如何한 方法으로 잘살던지 못살던지 우리리 한데 苦生하고 갓치 享樂할 外에 他道가 업슴으로 이에 高明한 人士의 贊否를 不拘하고 愚衷과 淺見을 瀝出하야써 兄弟姉妹의 一覽에 供하노니 簡單히 말하면 남이야 엇더케 살던지 우리는 ‘民族主義’ 下에서 共産을 하자 함이로다.
一
支那族(所謂 漢族)은 歷史를 쓰던지 小說을 짓던지 唱戲나 歌詞에지라도 自己네는 中國이오 神洲라 하며 其他는 夷狄蠻貊이라 하야 舜帝는 東夷人이오 文王은 西夷人이라 하면서도 支那文化 主人翁으로 推戴하야 尊稱도 하며 攘斥도 하다가 畢境 同化의 網中에 집어너어 漢族의 始祖를 만들엇으며 大徐國(桓族의 一支)의 威武와 强盛으로도 終乃 漢族의게 混化가 되엿으며 遼金淸(桓族의 一派)의 毅魂鐵魄으로도 今에는 全數가 漢人化하엿으니 이럿트시 國是가 强하고 族粹가 殷한 民族은 自身만 旺盛할 아니라 能히 他族을 同化하며 人國을 己有하나니 司馬氏의 憶斷에서 나온 一部 歷史의 힘이 이럿케 偉大하도다!
桓族의 過去를 回顧하면 九族을 感化하며 三千團部를 統治하야 亞洲의 全部에 그 種族이 퍼지며 世界에 先하야 그 文明을 자랑하든 것이 아닌가.
隋煬帝는 다리가 불러지고 唐太宗은 눈이 지게 하던 高句麗와 山東을 攻陷하고 刺史를 斷頭하던 大震國과 倭와 樂浪이 入寇하다가 仁化를 보고 慚愧하야 逃走케 하던 新羅가 그 얼마나 桓族(이에는 强族의 義)다운 價値를 發揮하엿으며 榮譽를 顯揚하엿는가.
이러하거늘 金富軾의 所謂 三國史筆은 桓族의 精神을 抹殺하고 李成桂의 鴨綠江回軍(征明軍)으로 因하야 桓族의 金甌萬里가 얼마나 縮小되엿으며 五百年來로 國家의 元氣이며 民族의 師表로 自處하든 所謂 碩學巨儒들은 尊華攘夷라는 愧天怍人의 腐敗한 論調로 桓族리 堂堂한 權威와 凜凜한 氣勢로 잘살어가던 先烈 祖謨를 餘地업시 消滅식히더니 이제에는 世界主義라는 鱷浪鯨波가 自主氣槪와 獨立精神을 搖動할 念慮가 不無하며 念慮 아니라 그럿케 된다 하면 一場의 苦鬪를 辭치 아니하노니 或者들은 時代의 落後를 顧慮할지나 그대로 捕風捉影的으로 덤벙이다가는 全民族이 滅亡하고 말 것이로다.
二
倭는 新羅로서 건너간 素盞鳴尊의 生化와 敎化와 治化를 바다 우리를 父師君으로 섬기던 種族으로 地帶의 狹小와 土品의 卑劣로 因하야 生活이 恒常 困難함으로 邊海寇抄와 轉輾蓬生으로 일삼다가 五十餘年 前인 明治初붓터 儼然히 帝國으로 自號하며 和族이라 自稱하야 支那를 壓視하고 韓國을 犯盜하야 鼹鼠의 河腹을 充하며 狠子의 野心을 肆하니 이런 蠻種의게 무슨 普遍主義나 共同思想이 잇으리오? 共産主義에 共鳴만 하면 倭놈이라도 握手한다는 人士들이여 露西亞人의 陰凶手段을 본바다 함부루 덤베지 말지어다. 弱하고 貧한 處地에 잇는 우리 民族은 오직 肉彈과 血戰으로 最後 一人지 싸와가며 桓族 以外의 種族은 다 排斥하여야 永遠한 生存과 尊榮을 엇을 것이라. 外交手段으로 他國을 利用하며 結好通商으로 互相救助하난 것은 萬國의 通例라 할지나 現在에 우리가 處한 境遇는 主權이 自在한 民族과 다르니 누구를 밋지도 말고 무엇을 바라지도 말고 오직 죽지 아니면 獨立하고 獨立 못하면 죽겟다는 決心을 품을 이로다.
三
世界主義를 高調로 唱導하며 國家의 區域과 民族의 差別이 업시 고루이 잘살자는 所謂 共産의 旗幟를 兩大洲의 北端에 高揭하고 急轉直下의 勢로 全世界에 宣傳하든 露西亞는 今日에 國際地位를 圖得하랴고 가진 方法과 手段을 다하야 弱肉强食의 殺伐蕞中과 優勝劣敗의 競爭場邊에 忌憚업시 나서는 것을 볼지어다. 數十萬 猶太人을 坑殺하며 波蘭을 分含하고 東西洋을 蹂躪코져 하던 大野心의 根底가 轉瞬間에 蒸拔이 되엿을가.
議會政府라는 것이 全國을 網羅하야 公私財産을 沒數히 押收하여 가지고 陸海軍을 擴張하며 發行隊를 增設하는 것이 그 무슨 뜻인가 눈치른 고기도 털낙시에는 속나니 假飾도 잘만하면 반듯이 남이 속난 것이라. 同勞共産의 好題目과 均富平等의 美名義를 압세우고도 二千萬 飢死의 民은 不救하고 國庫를 殷充하엿다가 兵權과 財力으로 列强에 比肩하야 長足으로 前進하려 하는 것을 보면 그 者들의 居心用意를 얼는 알 것이로다. 凶惡한 사크의 말발굽으로 小弱國을 짓발불 날이 멀지 아니하도다. 桓族인 우리 兄弟여 이것을 보고 생각할진뎌.
四
人道正義의 主人翁으로 自處하며 菩薩은 저 이오 慈悲는 혼자 쓰는 체하든 北亞美利加는 黃種에 對한 擧措가 如何한가를 볼지어다.
旣往에 比律賓을 西班牙의 覊絆에서 벗겨낸다고 世界에 公言하고 左右周旋하야 獨立을 식혀 놋코 當場에 져의가 집어 먹고 此日彼日하며 至今 五十餘年間을 獨立을 주지 아니하난 것을 佛心이라할가 痕心이라 할가.
現在에 支那의 元氣가 充實하자면 孫文이 政權을 가져야 될 것인즉 世界의 黑幕을 알며 自族의 前程을 爲하야 四十餘年間을 革命에 奔走彈誠하는 孫文 其人이 支那에 當局하는 것이 白人唆膏의 凶計에 不利한 點을 알고 愚勇한 吳佩孚를 後援하며 暗黑한 北京政府를 承認하야 支那 將來를 荒亂케 하는 것이 美國의 老鍊政策이 아닌가.
日俄戰爭에 際하야 처음에는 露西亞가 歐亞 兩洲를 걸어안자 威福을 自作하는 것을 厭忌하야 뽈틱艦隊로 하여곰 日本海에서 最後를 告하게 하여 놋코는 兩國의 講和談判 席上에 中裁者가 된 白人들은 露西亞가 全敗한 것이 自己네게 넘우도 羞恥로 생각하야 倍償問題에 아모 價値업는 樺太島 半部를 日本에 주게 한 것을 볼에 人種關係가 이러하다는 것을 누가 아니 感想하엿을가? 이러케 말한 가운데 黃白人의 關係는 現場 우리의게 아모 切實한 問題로 생각지 아니하나 大略을 列擧한 것은 廣義로는 黃種리 살어야 …… 狹義로는 桓族리 살어야 …… 이런 뜻으로 한 말이 안이오 世界的으로 黃白人種이 不同함을 因綠하야 그와 갓흔 霄壤의 懸絶이 생겻다는 것을 引證하야 局部的으로 黃族 가온데도 우리 桓族리 살어야 살게된다는 것을 懇篤히 말한 것이며 一邊으로 眞意味도 모르는 所謂 社會主義者들이 桓族의 固有한 眞髓 卽 ‘한검의 가르침’지 排斥하는 그 言動을 白眼으로 看코져 함이로다.
四二五七年 三月 十五日
申江 ㄷㄹㅅㅁ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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