紹興舊緖永為隣國當時新羅力强制命

2022. 9. 13. 21:52고대사

성호사설 20 / 경사문(經史門)

여제여신(麗濟餘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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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와 구려(句麗)는 당(唐) 나라에 멸망한 바가 되어 다시 일어날 형세가 없었다. 그러나 타다 남은 불기운처럼 반란을 일으키자 당 나라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게 되었다. 백제가 망한 후에 부여 풍(扶餘豊)이 또 배반하므로 당 나라는 부여 융(扶餘隆)으로 하여금 백제로 돌아가 그들의 민중을 낙마시키도록 하고 조칙(詔勅)을 내리기를, “백제의 옛땅을 모두 반환하고 신라와 더불어 다시 맹세를 맺게 하여, 전일의 감정은 서로 잊어버리고 평화롭게 지내도록 하라.” 하였다.

지금 신숙주(申叔舟)의 《해동기(海東記)》와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에 상고해 보니, “백제가 망할 때 임정 태자(臨政太子)가 배를 타고 왜(倭)로 들어가서 주방주(周防州) 다다량포(多多良浦)에 머물렀다. 그리하여 다다량씨라고 하면서 대대로 대내전(大內殿)에서 살아 온 지가 8백 년이 넘었다. 23대인 지세(持世)에 이르러 호를 대내전(大內殿)이라 하였으나, 아들이 없어 조카 교홍(敎弘)을 양자하였다. 교홍의 아들 정홍(政弘)에게 이르러서는 군사가 구주에서 제일 강하게 되어 감히 영을 어기는 자가 없었다. 그의 계통이 백제에서 나왔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에게 가장 친절하였다. 산명(山名)이 세천(細川)과 더불어 다툴 때에 대내(大內)는 산명을 도와주었다. 이보다 먼저 대신(大臣) 적송(赤松)이 난을 일으킬 때, 국왕(國王)이 징병령(徵兵令)을 내렸으나 소이전 원가뢰(小二殿源嘉賴) 혼자만이 응하지 않았다. 왕이 대내에게 명해 토벌시켰는데 가뢰(嘉賴)는 도망쳐 대마도(對馬島)로 달아나고, 대내는 드디어 가뢰의 땅을 다 차지하였다. 이렇게 되자 모두들 대내의 당(黨)을 미워했다. 산명이 가뢰의 아들 뇌충(賴忠)에게 명하여 옛날 토지를 다 되찾도록 하므로 뇌충은 축전(築前)ㆍ박다(博多)ㆍ재부(宰府) 등의 고을을 모두 복구하게 되었다. 대내는 무릇 47대를 전해 온 후로는 자손이 없다. 그리고 임정(臨政)에게 종행(從行)한 자의 후손인 휘원(輝元)이란 자는 수길(秀吉)과 함께 신장(信長)의 원수를 갚은 자이었다. 처음은 대강씨(大江氏)라고 하다가 나중에 모리씨(毛利氏)로 고쳤는데, 휘원의 조상이 대대로 그 지방에서 전해 왔다. 임진년(1592) 난리 때 휘원은 위협에 눌려서 비록 코를 베이기까지 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조금 불쌍히 여기고 민망하게 생각하였다.”고 했다는 것이다.

소위 임정 태자(臨政太子)란 자는 옛날 왜에게 인질로 잡혀갔던 부여 풍(扶餘豊)인 듯하다. 구려가 망한 후 귀신(貴臣) 연정토(淵淨土)의 아들 안승(安勝)을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던 바, 신라는 그를 그냥 구려왕(句麗王)으로 봉해 주었다.

그에게 준 글에 “구려를 이은 아들 안승이다[句麗嗣子安勝].” 하였고 또, “선왕을 바로 이은 자는 오직 공(公)뿐이었다[先王正嗣惟公而已].”라고 하였다.

대개 연정토는, “지난해에 열 두 개의 성(城)을 가지고 와서 항복했다.”는 자인 듯하다. 그런데 어떤 이는 귀족이라고 일컬었으니, 구려의 종척(宗戚)인 듯하다. 옛날 소흥(紹興)의 후예로 기리 이웃 나라로 되었는데, 그 당시 신라가 힘이 강해서 절제를 하였으나 다시 삼국(三國)이란 칭호를 두었다. 신라도 또한 가끔 조칙(詔勅)을 제대로 받들지 않고 도리어 군사를 일으켜 당 나라 군사를 공격하였는데, 이것을 《당사(唐史)》에는 모두 빼 버리고 쓰지 않았다.

동사(東史)에, “고장(高藏)의 외손 안승이다.” 하였으니 소위 연정토도 역시 고씨(高氏)의 후예로서 사위가 되었던 자인 듯하다.

盖淵净土前年以城十二来投者也或稱貴族則麗之宗戚也紹興舊緖永為隣國當時新羅力强制命更有三國之號羅亦時不奉詔興師反攻唐兵唐史皆略之也史又謂髙臧外孫安勝則所謂淵净土亦必髙氏之裔而為之壻者也

 

[-D006] 소흥(紹興) : 

송 고종(宋高宗) 조구(趙構)의 연호.........................잘못된 해석. 이어서 흥하다 옛날 업적.혈통

중국 남송(南宋:1127~1279)의 제1대 황제.
(병). Gaozong. (웨). Kaotsung.

ㅇ이름은 조구, 묘호는 고종. 유목민족인 여진족이 중국북부를 침략하여 그의 아버지이자 퇴위한 황제 휘종(徽宗:1100~25/26 재위)과 형 흠종(欽宗:1125/26~27 재위)을 포로로 잡아갔을 때 그는 남쪽으로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