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23. 00:53ㆍ이성계의 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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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자집 시고 제6책 / 시(詩)
영동사 592〔其五百九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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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이 전대하는 사신의 책무를 다했으니 / 圃翁專對盡爲臣
남들은 위험 피했으나 홀로 떨쳐 일어났다오 / 人避其危獨挺身
북으로는 명나라에 남으로는 일본에 갔으니 / 北使天朝南日本
가는 곳마다 그 뜻을 펴지 못한 일 없었다오 / 所如無事不能伸
이때 왜구의 환난이 매우 심하였는데 이전에 일본에 보낸 사신들은 가기만 하면 모두 구금되었다. 마침내 전(前) 대사성(大司成) 정몽주(鄭夢周)를 파견하여 일본에 빙문(聘問)하게 하고 또 왜구를 금지시켜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때의 사행(使行)을 사람들은 모두 위태롭게 여겼는데 정몽주는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일본에 도착하여 정몽주가 고금 교린의 이해(利害)를 극력 진술하자 주장(主將)이 경복(敬服)하고 정몽주를 후히 대접하였다. 귀국할 때 포로로 잡혀있던 윤명(尹明)과 안우세(安遇世) 등 수백 명을 돌려보내고 대마도(對馬島)와 일기도(一歧島)의 침략을 금지시켰다. 뒤에 정몽주는 또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명나라 경사(京師 남경)에 가서 성절(聖節)을 하례하였다. 당시에 황제(명 태조)는 고려에 군대를 출동시켜 세공(歲貢)을 늘려 정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약조한 대로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고 하여 사신들에게 장(杖)을 치고 유배하였기 때문에 사신 가기를 모두 싫어하고 피하였다. 이때 성절을 당하여 최후에 진평중(陳平仲)이 또 병을 칭탁하고 사양하자 임견미(林堅味)가 정몽주를 추천하여 대신하게 하였다.정몽주가 그날로 길을 떠나 하루에 이틀 길을 가서 절일(節日)에 맞추어 표문을 올리자 황제는 특별히 위무하고 후한 예(禮)로 전송하였으며 구금하였던 이전 사신들을 석방하여 돌려보냈다. 다시 또 명나라에 파견되어 세공(歲貢)을 경감시켜줄 것을 청하자 황제가 특별히 5년간의 밀린 세공과 늘려 정한 세공의 상수(常數)를 면제해주었다.
[주-C001] 시(詩) :
《무명자집》 시고 제6책에 실린 시는 작자 나이 67세인 정묘년(1807, 순조7) 세모에 지은 시부터 70세인 경오년(1810)에 지은 시에 이르기까지 3년 동안 창작한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무명자집》 시고 제6책의 후반부에 실린 〈득실에 대해 읊다〔詠得失〕〉라는 시의 원주에 “모두 9수인데 한 수는 제8권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고, 《무명자집》 시고 제5책 〈영사 93〉의 주석에 ‘12권 기묘조(己卯條)’에도 시가 있다고 언급한 것을 종합하면 원래 제6책 이후로도 많은 시가 있어서, 최소한 12책 이상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1811년에서 1826년 작고할 때까지 만년에 해당하는 15년간의 시는 산일된 듯하다.
[주-D001] 전대(專對) :
외국에 사신으로 가서 상황에 따라 독자적으로 응답하는 것을 이른다.
[주-D002] 전(前) …… 요청하였다 :
고려 제32대 임금 우왕(禑王) 3년(1377) 9월의 일이다. 《高麗史 卷133 辛禑列傳1 3年》
[주-D003] 진평중(陳平仲)이 …… 하였다 :
밀직부사(密直副使) 진평중이 노비 수십 명을 임견미(林堅味)에게 뇌물로 주고 병을 칭탁하자 임견미가 정몽주(鄭夢周)를 천거한 것이다. 《高麗史 卷117 鄭夢周列傳》
[주-D004] 정몽주가 …… 돌려보냈다 :
우왕 10년(1384) 7월의 일이다. 《高麗史 卷135 辛禑列傳3 10年》
[주-D005] 명나라에 …… 면제해주었다 :
우왕 12년(1386) 2월의 일이다. 《高麗史 卷136 辛禑列傳4 12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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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자집 시고 제6책 / 시(詩)
영동사 598〔其五百九十八〕
[DCI]ITKC_BT_0576A_0060_010_7180_2015_008_XML DCI복사 URL복사
우와 창을 죽이고 다시 요를 세웠는데 / 誅滅禑昌更立瑤
윤이와 이초는 어이해 명나라에 고발했나 / 彝初何事訴天朝
지금까지 사람들 문충공 죽음을 말하니 / 至今人說文忠死
원혈이 아직까지 선죽교에 남아 있다오 / 寃血尙凝善竹橋
태조가 심덕부(沈德符), 정도전(鄭道傳) 등과 논의하여 우왕(禑王)과 창왕(昌王)은 본래 왕씨(王氏)가 아니니 종묘의 제사를 받들 수 없다고 하여 우왕을 강릉(江陵)으로 옮기고 창왕을 강화(江華)로 추방하였다. 그리고 정창군(定昌君) 왕요(王瑤)를 세우니 바로 공양왕(恭讓王)이다. 뒤이어 우왕과 창왕을 주살하였다.파평군(坡平君) 윤이(尹彝)와 중랑장(中郞將) 이초(李初)가 반역하여 중국에 들어가 무고하기를 “시중(侍中) 이성계(李成桂)가 장차 상국(上國 명나라)을 침략하려고 하자 이색(李穡) 등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이색 등 19인을 잡아 죽이거나 유배하였습니다. 귀양 가 있는 재상들이 몰래 저희를 보냈기 때문에 와서 고하는 것입니다. 고려로 와서 토벌해주기를 청한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윤이와 이초의 당여를 국문하여 옥중에서 죽게 하거나 그 가산을 적몰하였다. 윤이와 이초가 또 조선의 종계(宗系)를 무고하여 조선 태조가 이인임의 후손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무고를 변별해줄 것을 주청하였다. 선조(宣祖) 때에 이르러서야 유홍(兪泓)이 비로소 개정된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가지고 돌아왔다.공양왕(恭讓王) 4년(1392)에 조영규(趙英珪)가 길에서 정몽주(鄭夢周)를 기다렸다가 격살하였는데 선죽교(善竹橋)에 아직도 그 혈흔(血痕)이 남아있다.
[주-C001] 시(詩) :
《무명자집》 시고 제6책에 실린 시는 작자 나이 67세인 정묘년(1807, 순조7) 세모에 지은 시부터 70세인 경오년(1810)에 지은 시에 이르기까지 3년 동안 창작한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무명자집》 시고 제6책의 후반부에 실린 〈득실에 대해 읊다〔詠得失〕〉라는 시의 원주에 “모두 9수인데 한 수는 제8권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고, 《무명자집》 시고 제5책 〈영사 93〉의 주석에 ‘12권 기묘조(己卯條)’에도 시가 있다고 언급한 것을 종합하면 원래 제6책 이후로도 많은 시가 있어서, 최소한 12책 이상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1811년에서 1826년 작고할 때까지 만년에 해당하는 15년간의 시는 산일된 듯하다.
[주-D001] 우왕을 …… 추방하였다 :
고려 제33대 임금 창왕(昌王) 즉위년(1388) 11월 무인일의 일이다. 우왕은 14년(1388) 6월 경술일에 강화(江華)로 추방되었다가 동년 9월에 여흥(驪興)으로 이배(移配)되었었다. 〈영동사 596〉 참조. 이때 강릉(江陵)으로 이배된 것은 전(前) 대호군(大護軍) 김저(金佇)와 전(前) 부령(副令) 정득후(鄭得厚)가 여흥에 유배되어 있던 우왕의 명을 받들어 예의판서(禮儀判書) 곽충보(郭忠輔)에게 그해 팔관회 날에 이성계(李成桂)를 죽일 거사를 벌이도록 하였는데, 곽충보가 이성계에게 이를 고발하였기 때문이다. 《高麗史 卷137 辛禑列傳5 辛昌 卽位年》
[주-D002] 정창군(定昌君) …… 공양왕(恭讓王)이다 :
제34대 마지막 임금 공양왕(恭讓王) 즉위년(1388) 11월 기묘일의 일이다. 《高麗史 卷45 恭讓王世家1 卽位年》
[주-D003] 우왕과 창왕을 주살하였다 :
창왕 원년(1389) 12월의 일이다. 《高麗史 卷137 辛禑列傳5 辛昌 元年》
[주-D004] 파평군(坡平君) …… 하였다 :
공양왕 2년(1390) 5월 초하루 계사일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왕방(王昉)과 조반(趙胖) 등이 돌아와 명나라 예부(禮部)에서 자신들에게 전했다고 말한 내용이다. 《高麗史 卷45 恭讓王世家1 2年》
[주-D005] 윤이와 …… 적몰하였다 :
공양왕 2년(1390) 5월 신축일의 일이다. 《高麗史 卷45 恭讓王世家1 2年》
[주-D006] 조선 …… 돌아왔다 :
조선 개국 초부터 선조 때까지 약 200년간 잘못 기록된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종계(宗系)를 명나라에 개록(改錄)해줄 것을 주청한 종계변무(宗系辨誣) 사건을 이른다. 《대명회전》의 ‘조선국(朝鮮國)’ 조의 주에 “고려 이인임과 그 아들 이성계, 지금 이름은 단(旦)이라는 자가 홍무 6년(1373)부터 25년(1392)까지 앞뒤로 왕씨 사왕(四王)을 시해하였으므로 우선 기다리게 하였다.〔即髙麗其李仁人及子李成桂今名旦者 自洪武六年至洪武二十八年 首尾凡弑王氏四王 姑待之〕”라고 되어 있는 내용을 고쳐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시정 약속만 하고 실현되지 못하여 역대 왕들의 가장 큰 현안 문제가 되었다. 선조 21년(1588) 4월 24일에 유홍(兪泓)이 고쳐진 《대명회전》을 가지고 돌아와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사왕’은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이다. 《宣祖實錄 21年 4月 24日》 《明會典 卷96 禮部55 東北 朝鮮國》
[주-D007] 공양왕(恭讓王) …… 격살하였는데 :
공양왕 4년(1392) 4월 을묘일의 일이다. 《高麗史 卷46 恭讓王世家2 4年》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영천(永川)에서 태어났다. 공민왕 6년(1357)에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공민왕 9년(1360)에 문과에 장원하였다. 공민왕 16년(1367)에 예조정랑(禮曹正郞) 겸 성균박사(兼成均博士)가 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문집에 《포은집(圃隱集)》이 있다. 《高麗史 卷117 鄭夢周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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