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扶桑)의 도적이 진보(珍寶)를 받들고 와서 조회하고, 유구(琉球)와 남만(南蠻)이 이중으로 통역하여 들어와서 조공하였습니다.

2023. 5. 2. 13:39이성계의 명조선

 

천자???? 이 천자는  누구일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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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8 / 칠언고시(七言古詩) 

주상(主上) 거가(車駕) 송헌(松軒 시중(李侍中 李成桂) () 임행(臨幸)하시매 조정의 여러분들이  시를 지어 하례하옵는데 ()  () 얻고서[伏覩車駕臨幸松軒李侍中第薦紳諸公咸作詩以賀得幾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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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소종(尹紹宗)

 

당말에 열린  나라가 명이 흥할 때에 이르러 / 唐季開國到明興
현릉께서 (아들을 얻을 )꿈ㆍ뱀(딸을 얻을 )  꾸어 / 玄陵夢斷維熊虺
31
대에 왕통이 끊어지고 / 三十一朝統中絶
신씨 2대를 만인이 분해하던  / 辛氏二世人憤悱
상공께서 강후 양공 충성을 일으키시어 / 公奮絳侯梁公忠
신손이 반정하여 임금 위에 오르시니 / 神孫反正御丹
하늘에 계신 열성들이 다시 제사를 받고 / 在天神聖復血食
혼돈이 거듭 열려 하늘의 해가 밝았네 / 混沌重開天日暐
어진 정치 새로 이루시니 바로 창업과 같고 / 訏謨更化同刱業
충성된 마음 광명하여 흐림이 없어라 / 赤心光明無晻
사전을 개혁하여 경계가 바루어지고 / 私田害革經界正
양식 풍족, 군사 증강, 봉록을 올리고 / 豐兵雄增俸菲
서울이나 지방에나 학당을 설치하여 / 置學京坊盡鄕縣
교관을 뽑아 세우니 문교가 빛났네 / 選立師官文敎煒
서도ㆍ북도에도 모두  읽는 소리 / 西鄙北鄙絃歌聲
동왜ㆍ남만이 공물을 바치네 / 東倭南蠻琛厥
해륙의 운수가 40년에 다시 트여 / 漕斷陸輓四十年
어렴의 이가 통해 유민들이 모여들고 / 漁鹽利通來流鬼
전쟁에 시달렸던 연변 백성들도 / 萬戰四散沿邊民
고향에 돌아와서 폐허를 개간하고 / 咸還鄕墟墾荊葦
경연의 대유들을 조석으로 모셔서 / 經筵大儒侍朝夕
이제 삼왕을 부지런히 강설하네 / 二帝三王陳亹亹
성덕을 보양하여 날마다 새롭게 하니 / 輔養聖德日日新
주공 뒤에 이런  몇이 있었던고 / 周公之後曾有幾
서산연의 동궁에 내놓고 / 西山衍義進東宮
명덕ㆍ신민을 자초지종 아뢰니 / 明德新民窮首尾
보ㆍ부(벼슬 이름 태보(太保) 태부(太傅)) 빈우들이 모두 기와 (요순(堯舜) 때의 어진 신하)이니 / 保傅賓友盡夔龍
출입 기거에 어찌 소인을 친하랴 / 出入起居寧比匪
만세 대업을 공께서 여시니 / 萬世大平開自公
중흥의 정치를 하늘이 도우시네 / 中興致治實天棐
천자께서 갸륵히 여겨 특히 봉호내리시니 / 帝嘉匡復特勞賜
삼한 충의공  이름 빛날씨고 / 三韓忠義公有斐
배사공 저택과 조보 당도 / 裴司空第趙普堂
삼대 같은 거룩한 명주  모셨으나 / 未擧明主三代韙
상공께서 절하시고 낮을 점쳐서 만세수를 드리오니 / 公拜卜晝獻萬壽
공훈이 이ㆍ주와 함께 길이 크시나이다 / 宗勛永與伊周偉

 

 조선왕조실록 > 태조실록 > 태조 1년 임신 > 12월 16일 > 최종정보

태조 1 임신(1392) 12 16(임술)

01-12-16[01] 좌시중 조준이 전문을 올려 평양의 식읍과 도통사의 관직을 사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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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시중(左侍中) 조준이 평양 식읍(食邑)과 경기 도통사(京畿都統使)를 사면(辭免)하기를 청하였다. 그 전문(箋文)은 이러하였다.

“신이 듣자옵건대, 은총(恩寵)과 이록(利祿)으로써 성공(成功)한 후에 그대로 있지 아니한 것이, 이윤(伊尹)이 자기 몸을 소중히 여기고 그 임금으로 하여금 요순(堯舜)의 임금으로 만든 이유이고, 권세가 극성(極盛)한데 그냥 있으면서 그만두지 아니한 것이, 소하(蕭何)가 자기 몸을 욕되게 하고 한(漢)나라 고조(高祖)로 하여금 그 공신을 능히 보전하지 못하게 한 이유입니다. 전하께서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왕업을 창건하여, 신에게 봉읍(封邑)을 내리시니, 분수에 감당할 바가 아니며, 신에게 경기의 병권(兵權)을 맡기시니, 재주에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 모기의 어깨로 태산(太山)을 짊어진 것과 같으므로, 권세가 극성(極盛)함에는 반드시 전복(顚覆)하게 될 것입니다. 명령을 받은 이후로 잠잘 때는 자리에 편안하지 못하며 밥 먹을 때는 달게 먹지 못하므로, 지극한 심정을 간절히 진술하여 감히 천총(天聰)을 모독(冒瀆)하오니, 성상의 은혜를 내려서 윤허(允許)하심을 바라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신이 처음 현릉(玄陵)을 섬겨 유악(帷幄)에 시봉(侍奉)하였으나, 중간에 비색(否塞)한 운수를 만나 문을 닫[杜門]고 글을 읽으면서 한평생을 마치고자 하였는데,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 한 번 만나 보고서 옛벗과 같이 친밀히 하셨으니, 이것은 하늘이 신을 전하께 만나게 한 것입니다. 무진년 정월에 전하께서 대장 최영(崔瑩)과 더불어 15년 동안 백성에게 해독을 끼친 여러 흉인(兇人)들을 숙청(肅淸)하였으니, 이 일은 전하의 잔인한 무리를 제거한 덕이 백성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최영은 학술이 없는 사람이므로 이에 위주(僞主)와 더불어 요동(遼東)을 범하려고 모의하여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자, 전하께서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군사를 돌이켜서 삼한(三韓)의 백성으로 하여금 썩어 문드러짐을 면하게 하였으니, 이 일은 전하께서 세상을 구제한 공로가 사직(社稷)에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때에 신을 천거하여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으므로, 신이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전하께서 말을 따르지 않은 적이 없어서,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켜 공도(公道)를 펴서 밝히고, 준수한 현량(賢良)을 등용하고 간사한 무리를 내쫓아 하민(下民)들의 해독을 제거하고 상국(上國)에 우호(友好)를 맺었으며, 이에 위조(僞朝)를 내쫓고 왕씨를 흥복(興復)시켰으므로, 천자가 이를 가상히 여겨 사신을 보내어 와서 위로하였으니, 이 일은 전하께서 광복(匡復)한 공이 천하에 알려진 것입니다.

처음에 전하께서 신을 천거하여 대사헌을 삼으실 적에는 전하께서 개연(慨然)히 만세를 위하여 태평을 개시(開始)함을 하늘의 신명(神明)에게 고(告)하고는, 여러 사인(邪人)의 비방을 배척하고 거실(巨室)의 노여움을 범하면서까지 사전(私田)의 여러 해 묵은 폐단을 개혁하여, 백성을 도탄(塗炭) 가운데서 구제하고 군량(軍糧)을 어려운 즈음에서 넉넉하게 하여, 이로써 누선(樓船)을 만들고 이로써 성보(城堡)를 쌓게 하여, 무위(武衛)가 떨치게 되고 조로(漕路)가 통하게 되어, 삼한(三韓) 40년 동안의 왜놈[倭奴]의 병화(兵禍)가 하루아침에 그쳐졌습니다. 과전(科田)을 경기에 설치하여 사대부를 우대하고 군전(軍田)을 주군에 설치하여 군사를 길렀으며, 이로써 향리(鄕吏)와 진ㆍ원(津院)에도 모두 전지를 공급하여, 전지에는 일정한 제도가 있고 나라에는 성문(成文)한 법이 있어 각기 상하(上下)ㆍ존비(尊卑)의 구별이 있어 서로 침해하고 빼앗지 못하게 하였으니, 겸병(兼幷)이 근절되므로써 모든 백성들의 전택이 정해지고, 부세의 징수가 경해지므로써 환과(鰥寡)의 의식이 넉넉해지고, 봉록(俸祿)이 후해지므로써 염치가 시행되고, 창고(倉庫)가 충실해지므로써 국가의 용도가 넉넉해졌습니다. 전하께서 신과 더불어 탐오(貪汚)한 관리가 백성을 해치고 무능한 장수가 구적(寇賊)을 양성하는 것을 분개하여, 국가에 건의하여 대신(大臣)을 천거해서 병권을 맡게 하고 여러 도에 순찰해서 출척(黜陟)을 행하니, 번진(藩鎭)은 군율을 시행하므로써 패(敗)하여 달아나는 걱정이 근절되고, 주군은 법을 받들므로써 탐욕 많고 잔인한 기풍이 그쳐졌습니다. 영장(令長)은 서리(胥吏)에서 나왔으므로 이에 그 관질(官秩)을 승진시키고 그 선용(選用)을 소중하게 하고, 대간과 육조의 보증 천거[保擧]함을 사용하므로써 전리(田里)에는 근심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없어지고, 유망(流亡)한 사람이 직업에 돌아오는 즐거움이 있게 되었습니다. 죄를 짓고 도망하여 독직(瀆職)한 관리를 신문(訊問)하여 그 향리(鄕吏)로 돌려보내고, 향원(鄕原)토활(土猾)의 간사한 사람을 공격하여 그 음호(蔭戶)를 부역(賦役)시키고, 현(縣)에는 각기 재(宰)를 두고 역(驛)에는 각기 승(丞)을 두므로써, 빈 터가 변하여 읍리(邑里)가 되고 숲과 풀이 변하여 좋은 곡식이 되었습니다. 쓸데없는 관원[冗官]이 국록(國祿)을 소모하고, 총애 받는 사람이 국가의 직무를 더럽히고, 공(工)ㆍ상(商)ㆍ조례()가 외람히 관직을 차지하고, 중들로서 놀고 먹는 사람이 토지를 많이 점거하고, 공이 없는 봉군(封君)과 유약한 자제(子弟)가 직무를 비워 두게 되었는데, 법을 제정하여 도태시키니 요행(僥倖)의 문이 닫혀지고 분경(奔競)의 길이 막혀졌습니다. 가묘(家廟)를 세우고 기제(忌祭)를 설치하는 것은 백성의 덕을 후하게 하는 까닭이고, 학교를 넓히고 교수(敎授)를 두는 것은 인륜(人倫)을 밝히는 까닭입니다. 문치(文治)가 이미 흡족하고 무위(武威)가 멀리까지 밝아져서, 부상(扶桑)의 도적이 진보(珍寶)를 받들고 와서 조회하고, 유구(琉球)와 남만(南蠻)이 이중으로 통역하여 들어와서 조공하였습니다.

왕씨(王氏)의 16년 동안의 이미 망했던 왕업이 실로 전하께 힘입어 다시 일어났는데도, 왕씨는 혼미(昏迷)하여 도리어 시기와 미워하는 마음을 내게 되고, 위신(僞辛)의 역란(逆亂)한 무리와 전지를 잃고 관직을 잃은 무리들이 고기 비늘[魚鱗]처럼 곁에 있어 근거 없는 말로써 차츰차츰 헐뜯어서, 전하를 제거할 것을 모의하여 흉악한 계책이 자꾸 변하여졌습니다. 금년 3월에 와서 전하께서 세자(世子)가 〈중국에〉 들어가 조회하고 동쪽으로 돌아올 적에 서울 서쪽 수백 리의 먼 곳까지 나가서 맞이하고, 또 몸소 사냥하여 와서 하례(賀禮)를 하려고 하던 차에, 불행히도 말에서 떨어져 초막(草幕)에 누워 있었는데, 간신(姦臣) 정몽주(鄭夢周)는 전하께서 비호해 준 사람인데도 자신이 총재(冢宰)가 되어 손수 정권을 잡고는, 왕씨의 뜻을 맞추어 대간(臺諫)을 사주(使嗾)하여, 신과 정도전ㆍ남은을 전하의 심복(心腹)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틈을 타 계책을 부려 죄를 꾸며 법망(法網)에 끌어넣어 먼저 내쫓고, 다음에 전하를 도모하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병을 무릅쓰고 수레를 타고 길을 갑절이나 빨리 하여 돌아왔습니다. 4월 4일에 나라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여서 정몽주가 참형을 당하였으나, 전하께서 살리시기를 좋아하는 덕을 펴서, 그 나머지 간사한 무리들을 한 사람도 주멸(誅滅)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사제(私第)에 병들어 누워서 빈객(賓客)을 사절하면서도 오히려 왕씨(王氏)가 깨닫기를 바라면서, 형벌하고 상주는 권한을 임금에게서 나오도록 했는데도, 왕씨는 혼미하여 그래도 깨닫지 못하고서 흉악한 무리들이 더욱 제 마음대로 굴어 화(禍)가 경각(頃刻)에 있게 되었습니다. 7월 12일에 이르러 하늘이 노하고 백성이 이반하여 온 나라가 마음을 돌이켜 전하를 왕으로 추대하여, 인심과 천명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전하께서 조(曹)나라 자장(子藏)의 절개를 지키고자 하더라도 그것이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이에 왕씨(王氏)를 강릉(江陵)의 간성(杆城)에 봉하였으니, 이 일은 탕왕(湯王)이 걸왕(桀王)을 남소(南巢)에 내쫓은 것이요, 왕씨의 동모제(同母弟)를 기현(畿縣)의 마전(麻田)에 봉하여 신성(神聖)한 공민왕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으니, 이 일은 무왕(武王)이 미자(微子)를 송나라에 봉한 것입니다. 여러 왕씨를 강화도(江華島)ㆍ거제도(巨濟島)에 안치(安置)하고는 관에서 미곡(米穀)을 급여하게 하였으니, 한(漢)나라ㆍ위(魏)나라 이후로 혁명(革命)한 군주로서는 미치지 못한 바입니다.

지난번에 만약 전하께서 나라를 취(取)할 마음이 있었다면, 압록강에서 군사를 돌이킬 적에 어찌 즐거이 만 번 죽을 위태한 지경에 나와 한 평생을 버리면서까지 왕씨를 부흥시킬 의논을 세웠겠습니까? 기사년 겨울에 황제의 조칙(詔勅)이 왔을 적에도 어찌 즐거이 종친(宗親)의 장(長)을 세워서 왕씨에게 정권이 돌아가게 하였겠습니까? 어찌 즐거이 이미 성인이 된 저군(儲君)을 일찍 세워서 국가의 근본을 정하고자 하였겠습니까? 어찌 즐거이 경연(經筵)을 개최하고 학문에 밝은 선비를 임금의 좌우에 나아가게 하여 《정관정요(貞觀政要)를 바치고 조석으로 가르치게 하였겠습니까? 어찌 즐거이 서연(書筵)을 개최하고 많은 선비를 동궁(東宮)에 모아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올려 정치하는 방법을 날마다 강론하였겠습니까? 어찌 즐거이 상상(上相)의 정병(政柄)을 내놓고 택리(宅里)를 아들과 사위에게 나누어 주고서 고향에 돌아가 쉬기를 원한 일이 두세 번에까지 이르도록 더욱 힘써 하였겠습니까? 전년(前年) 가을에 또 어찌 즐거이 저군(儲君)에게 천자(天子)를 알현하도록 건의(建議)하였겠습니까? 전하께서 왕씨를 위하신 지극한 정성과 지극한 충성은 하늘이 굽어 보신 바이며 온나라가 함께 아는 바이온데도, 왕씨는 참소하는 적당(賊黨)에게 의혹되어 연(燕)나라 소왕(昭王)이 악의(樂毅)에게 대한 일과 제(齊)나라 양왕(襄王)이 전단(田單)에게 대한 일과 같이 하지 못하고서는, 이에 운대(雲臺)의 훈신(勳臣)을 도리어 도마 위의 고기로 삼으려고 하였으니, 이것은 하늘이 왕씨의 덕을 싫어하고 전하의 왕업을 세우게 한 것입니다.

나라 일에 지극히 부지런하고 집안 일에 지극히 검소한 것은 우왕(禹王)이 순제(舜帝)를 계승한 이유이요, 간언(諫言)을 따르고 거절하지 않으며 허물을 고치되 인색하지 않은 것은 탕왕(湯王)이 하(夏)나라를 대체(代替)한 이유이요. 은(殷)나라의 정치에 반대하여서 천하가 다스려진 것은 무왕(武王)이 주(周)나라를 세운 이유이요, 현신(賢臣)을 가까이 하고 소인(小人)을 멀리 한 것은 전한(前漢)이 흥융(興隆)한 이유이요, 소인을 가까이 하고 현신을 멀리 한 것은 후한(後漢)이 경퇴(傾頹)한 이유입니다. 지금 하늘이 이미 전하에게 명령하여 삼한(三韓)에 어버이 노릇하게 하였으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삼왕(三王)의 지극한 정치를 본받으시고 양한(兩漢)의 득실(得失)을 거울로 삼아, 삼가고 두려워하여 이를 생각하여 마음을 이에 두어, 억만대(億萬代)의 성자신손(聖子神孫)의 귀감(龜鑑)으로 삼으신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신은 가만히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 나라를 처음 세우신 것은 실로 하늘이 명하신 바이니, 신이 어찌 조그만 공로라도 그 사이에 있었겠습니까? 전하께서 어리석은 신을 지나치게 총애하여, 태재(太宰)의 높은 관직에 임명하고 저군(儲君)의 사부(師傅)에 등용시켰으니, 임무가 지극히 중대합니다. 또 하찮은 공로를 기록하여 개국 공신에 이름이 우두머리에 있게 하고 전지와 노비를 주셨으니, 상도 이미 극도에 도달하였는데 식읍(食邑) 1천 호(戶)에 실봉(實封) 3백 호를 더 주고, 경기좌우도(京畿左右道)의 군사를 총제(摠制)하는 권한까지 더 맡기시니, 신이 어찌 이를 감당하겠습니까? 원컨대, 이를 회수하시고 어리석은 신으로 하여금 한 몸으로 맡은 두 임무를 나누게 하여, 빈궁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려는 본뜻을 이루게 하고, 온전한 생활을 길이 주어서 신의 조그만 보필을 후일에 책임지우게 하소서. 옛날에 은나라에서는 이윤(伊尹)을 재상으로 삼아 왕이 되었으며, 한(漢)나라에서는 장양(張良)을 사부(師傅)로 삼아 황제가 되었는데도, 이윤은 오히려 돌아가기를 고하고자 하였으며 장양은 적송자(赤松子)와 놀기를 원하였으니, 그들이 은(殷)나라와 한나라에 박대(薄待)한 것이 아니라, 대개 혹시 권세가 극성(極盛)함에 이름을 좋아한다는 비방을 받아서, 탕왕(湯王)이나 고제(高帝)와 같은 지덕(智德)을 겸비한 임금에게 누(累)를 끼칠까 염려했던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은 4월 4일 이후의 생명은 실로 전하께서 주신 바이옵니다. 신은 전하께 다만 임금과 신하 관계일 뿐만 아니라 실로 하늘같이 가이 없는 부모의 은혜가 있사오니, 마침내 사직(辭職)하기를 청할 이치는 없습니다. 어찌 감히 이윤(伊尹)과 장양(張良)의 돌아가서 휴식하는 뜻을 품겠습니까? 신은 다만 두 분의 성만(盛滿)을 경계하고 겸손함을 지키는 마음을 본받아서 전하와 함께 한없는 세대(世代)에 시종(始終)을 보전하기를 원할 뿐입니다. 《역경(易經)》에, ‘천도(天道)는 영만(盈滿)한 것은 이즈러지게 하고 빈 것은 보태어 주며, 귀신(鬼神)은 영만(盈滿)한 것은 이를 해치고 빈 것은 이를 복준다.’ 하였으며, 또 ‘근로하고 겸손하면 군자가 결실이 있게 되니, 길(吉)한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신이 위로 성감(聖鑑)께 폐를 끼치는 까닭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이 권세의 극성(極盛)함을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지극한 심정을 불쌍히 여기시고, 신이 나라와 함께 기쁨을 같이하려는 충성스런 계책을 살피시어, 봉호(封戶)를 공실(公室)에 돌리게 하고 병권(兵權)을 양장(良將)에게 맡기게 하신다면, 신은 더욱 분골쇄신(粉骨碎身)하는 정성을 다하여 위로 생성(生成)해 주신 덕을 보답하겠습니다.”

임금이 글을 내리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원전】 1 집 36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정론(政論) / 외교-왜(倭) / 외교-유구(琉球) / 외교-동남아(東南亞)

[-D001] 현릉(玄陵) : 

공민왕.

[-D002] 위주(僞主) : 

신우(辛禑).

[-D003] 환과(鰥寡) : 

늙고 아내가 없는 사람과 늙고 남편이 없는 사람.

[-D004] 향원(鄕原) : 

시골에서 군자 소리를 듣는 위선자.

[-D005] 토활(土猾) : 

지방의 교활한 백성.

[-D006] 조례() : 

관아에서 부리는 하인.

[-D007] 분경(奔競) : 

엽관운동(獵官運動).

[-D008] 부상(扶桑) : 

일본(日本).

[-D009] 위신(僞辛) : 

신창(辛昌).

[-D010] 자장(子藏) : 

춘추 시대 조 선공(曹宣公)의 서자(庶子). 제후(諸侯)들이 자장(子藏)을 조(曹)나라 임금으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그는 사양하였음.

[-D011] 미자(微子) :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서형(庶兄). 주 무왕(周武王)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미자(微子)를 송(宋)나라에 봉하여 은나라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음.

[-D012] 저군(儲君) : 

세자(世子).

[-D013] 《정관정요(貞觀政要) : 

당(唐)나라 오긍(吳兢)이 지은 책. 태종(太宗)의 가언 선행(嘉言善行)을 기록하였음.

[-D014] 상상(上相) : 

수상(首相).

[-D015] 악의(樂毅) : 

전국 시대(戰國時代) 연(燕)나라의 명장(名將). 소왕(昭王)의 신임을 얻어 강한 제(齊)나라를 쳐부수고 전대의 설욕(雪辱)을 하였음.

[-D016] 전단(田單) :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명장(名將). 연(燕)나라를 쳐부수고 제(齊)나라를 수복(收復)하였음.

[-D017] 운대(雲臺) :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에 전대의 공신(功臣) 28인을 추념(追念)하여 초상을 그려서 걸었던 곳.

[-D018] 삼왕(三王) : 

하우(夏禹)ㆍ은 탕(殷湯)ㆍ주 무왕(周武王).

[-D019] 양한(兩漢) : 

전한(前漢)ㆍ후한(後漢).

[-D020] 태재(太宰) : 

총재(冢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