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4. 00:38ㆍ백두산
한국근대사자료집성 14권 14권 프랑스외무부문서 4 조선Ⅲ·1890 > 정치공문 1888~1896 조선 1890 권3 콜랭 드 플랑시 씨 > 【66】 러시아의 조선 보호국화 소문
제목 | 【66】 러시아의 조선 보호국화 소문 |
문서번호 | 정치국 극동과 제157호 |
발신일 | 1890년 6월 10일 ( 1890년 06월 10일 ) |
수신자 | 리보, 등등 |
【66】 러시아의 조선 보호국화 소문
정치국 극동과 제157호
서울,
1890년 6월 10일
러시아의 조선 영토의 일부 점령과 관련된 소문
장관님,
지난달 중 천진에서는 조선이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기로 결정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청국의 다른 지방으로까지도 소문이 빠르게 퍼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한반도 남부의 전략 지점을 점령했다는 소식도 들렸습니다. 이와 동시에 일본 신문들은 일본 해군이 동 시베리아 영토에서 가까운 섬을 점령하였다고 보도했으며 영국 전함 두 척이 며칠 전부터 엔진을 가동하고 통지를 받자마자 출항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영국 제독은 우려할 만한 전문을 받았다고 덧붙였습니다. 이 소문들은 매우 모호하지만 청국의 항구뿐만 아니라 도쿄를 상당한 흥분에 빠뜨렸으며 셴키비츠(SienKiewiez) 씨는 제게 사실 여부를 급히 물었습니다.
유럽 신문들이 이 소식을 조속히 전달할 것이므로 제가 수집한 정보를 지체하지 않고 각하께 보고드립니다.
이번 사건은 제가 1889년 9월 21일자(제67호) 외무성에 보고 드린 바 있는 일년 전에 발생한 녹도(Dear Island)에 대한 소문의 반복인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이 현재 청국과 종주 관계를 단절하고 러시아의 보호를 수락할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이 문제에 대해 청국 주차관도 매우 평온한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한편 최근 러시아 함대는 한반도 남부의 어떤 지역도 방문한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극동의 언론의 특파원들이 제공하는 정보들은 신빙성이 매우 희박하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문제의 섬은 북쪽에 위치한 두만강(du fleuve Tumen) 어귀의 녹둔도(Nok- toun to)로 그 지역 수도인 블라디보스톡(Vladivostock)이며 소유권이 양도되었습니다. 제가 이 문제에 대해 함께 협의한 청국 대표에 의하면 이 곳은 1860년부터 러시아 영토의 일부였으므로 자신이 판단하기에는 이러한 정보는 현안으로 삼을 필요도 없으며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공식적인 조선 지도와 프랑스 선교사 지도 그리고 일본 참모부 지도를 참고한 결과 이 주장이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고 드립니다. 지도에 녹둔도는 조선 영토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1860년 북경에서 이그나티에프 장군(Gal Ignatief)과 공친왕(Prince Kong)이 체결한 조약문에도 이 섬을 러시아에 양도한다고 명시한 구문이 없습니다. 당시에는 녹둔도가 조선에 귀속되어 있었다는 것이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후 대륙과 분리되었던 두만강 어귀의 일부분에 섬의 모래가 충적되면서 대륙과 연결되어 이제는 시베리아에 붙은 일종의 곶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확한 시점은 제가 모르지만 이처럼 지형의 변화가 발생한 이후로 러시아는 자연 현상에 의해 대륙에 붙어버린 이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협상은 몇 년 전에 시작되었습니다. 과연 해결책을 찾아 현 상황의 근본적인 우려를 종식할 수 있을까요? 현 상황에 페테르스부르그(Pétersbourg) 정부가 만족한다 하더라도 우리들이 목격하고 있는 현 소요 사태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을 각하께서도 짐작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경구.
콜랭 드 플랑시
파리의 외무부 장관 리보 각하께, 등등
명칭[편집]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어로 "동방을 지배하다"를 뜻한다. 1860년까지는 외만주가 중국의 영토였고, 해삼위(海參崴)로 불렸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그 중국어 발음인 '하이선와이'(Hǎishēnwǎi)라고 부르지만 러시아어 표기를 음차한 푸라디워스퉈커(중국어: 符拉迪沃斯托克, Fúlādíwòsītuōkè)라는 이름도 사용된다. 일본에서는 '우라지오스토쿠'(일본어: ウラジオストク)라고 부르며, 과거에는 이를 줄여 우라지오(浦鹽)또는포항(浦港) 라고 쓰기도 했다.
지리[편집]
연해주 남부에 위치한 표트르대제 만을 아무르스키 만과 우수리스키 만으로 나누는 좁고 긴 산악 반도인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 반도(길이 30km, 너비 12km)의 남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러시아 해군의 태평양 함대의 기지가 위치한 군항 도시이다. 반도 선단의 금각만 연안에 시가지가 있다.[1]
기후[편집]
블라디보스토크의 기후 구분은 현행 쾨펜의 기후 구분 상에서는 Dwb에 속한다.
- 한 해 평균 기온 : 4.3 °C
- 1월 평균 기온 : -13.7 °C
- 8월 평균 기온 : 20.2 °C
- 한 해 평균 강우량 : 722 밀리미터
베이징 조약
베이징 조약(북경조약, 중국어: 北京條約 Běijīng Tiáoyūe[*])은 제2차 아편 전쟁의 결과로, 1860년 10월 18일에 청나라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과 체결한 조약이다.
이 조약은 6개의 항목으로 되어 있으며, 이 조약에 따라 청국은 영국에 주룽(현재의 홍콩 중심부)을 내주었고, 러시아에는 연해주를 넘겨주었다. 이로 인해 러시아가 만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영국은 청나라의 각종 이권을 빼았아 갔으며, 프랑스는 청국 영토 내에서 프랑스인의 우월함을 인정 받고 청국 영토내에서 천주교 전파 등 포교 활동의 자유를 인정 받았다.
배경[편집]
1860년 10월 18일, 청나라와 제2차 아편 전쟁을 치른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천단, 이화원, 원명원 등 베이징 주요 건축물와 주변을 약탈하고, 베이징의 자금성에 입성하였다.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공친왕을 대표로 내세워 러시아 대표인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이그나티예프(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Игна́тьев) 영국 대표인 제임스 브루스(James Bruce) 프랑스 대표인 장바티스트 루이 그로 (Jean-Baptiste Louis Gros)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할 수 밖에 없었다. 또, 교전 당사자가 아니었던 러시아까지 조약을 중재했다는 핑계로 조약 당사자로 끼어들었다.
영국군, 프랑스군은 유럽인 죄수들에게 청나라 관원들이 부당한 대우를 했다는 구실로 자금성을 방화할 계획이었는데(애로호 사건 참조), 조약체결 후 그 대신 이화원과 원명원을 불살랐다.
이 조약은 1860년 10월 24일에 자금성의 남쪽 건물에서 마무리되었다. 조약은 중국-영국, 중국-프랑스, 중국-러시아 간 조약의 형식으로 각각 맺어졌다.
조약내용[편집]
- 청나라가 비준을 거부한 1858년의 톈진조약 내용을 비준한다.
- 톈진을 개항한다.
- 외교사절의 베이징 주재를 허용한다.
- 배상금 800만냥을 지불한다.
- 프랑스에 대해 몰수한 가톨릭 재산 반환을 인정한다.
- 청나라에 의한 자국민의 해외 이주 금지 정책의 철폐와 이민 승인
결과[편집]
영국과 러시아는 위의 조건 외에 개별적으로 청나라와 조약을 맺었다.
아이훈 조약(愛琿條約)은 1858년 헤이룽장성의 북쪽 아무르 강 연안의 아이훈에서 러시아 제국과 청나라가 맺은 불평등 조약이다.
배경[편집]
러시아는 청나라가 제2차 아편 전쟁(1856년 - 1860년) 중인 것을 기회로 청나라의 전권대사 이산을 협박해서 이 조약을 맺게 하였다.
이 조약은 1689년의 네르친스크 조약을 뒤집은 것으로, 러시아 제국은 이 조약을 구실로 청나라로부터 스타노보이 산맥(외싱안링 산맥: 外興安嶺)과 아무르 강(헤이룽 강: 黑龍江) 사이의 넓은 지역을 빼앗음으로써 시베리아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농사지을 수 있는 60만km2(한반도 면적의 약 3배)의 땅을 확보하고[1][2] 태평양으로 향하는 부동항(블라디보스토크)을 확보할 발판을 만들었다.
내용[편집]
- 헤이룽 강(黑龍江, 아무르 강)의 좌안은 러시아 령으로 한다. 헤이룽 강 우안 중 우수리 강 서쪽은 청나라 영토로 하고, 우수리 강 동쪽(연해주)은 두 나라가 공동 관리한다.
- 헤이룽 강 좌안의 만주인 촌락(강동육십사둔)은 청나라가 관할한다.
- 헤이룽 강·쑹화 강·우수리 강의 항행은 두 나라의 배로 제한한다.
- 위 세 강 연안의 주민 간에는 무역을 허용한다.
결과[편집]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강동육십사둔을 제외한 아무르 강 이북 지역을 전부 러시아에 내주었다. 청나라 정부는 이 조약을 승인했다가 얼마 뒤 부인하였으나, 2년 뒤인 1860년에 체결된 베이징 조약에서 아이훈 조약의 내용을 재확인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베이징 조약으로 인해 우수리 강 동쪽인 연해주마저 러시아 영토로 내주었다.
천진조약은 청국 천진에서 청국과 여러 외국 간에 맺은 조약의 총칭이다. 최초의 천진조약은 애로호사건에 관련하여 1858년 6월, 러시아·미국·영국·프랑스 등 4개 각국과 청국이 맺은 4개의 조약이다. 이외에도 1871년 청·일 양국이 상호 대등한 입장에서 맺은 통상조약으로, 이 조약에서는 영사 재판권은 상호 인정하였으나 최혜국 조관은 포함하지 않았다. 또 조선의 갑신정변에 관련하여 조선으로부터의 청·일 양국 군대의 철병을 약속한 1885년의 천진조약이 있다.
천진조약 체결 이후 조선 정부는 청국 정부의 권유로 1888년 미국 교관 4명을 초빙하여 육군사관학교 격인 연무공원(鍊武公院)과 궁성 호위대의 훈련을 맡겼고 1892년에는 영국 해군 교관 2명을 초빙하여 강화도 갑곶에 있는 해군학교의 훈련을 담당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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