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국과 광평대군 궁

2022. 10. 19. 16:54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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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선생문집 10 / 동사문답(東史問答)

성호 선생에게 올린 편지. 병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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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三國史)》는 구해 방법이 없었는데 전번에 마침 친우 권암(權巖) 찾아와서 사정을 듣고는 빌려 주었으니 다행입니다. 대충 훑어보니 책은 비록 정사(正史)라고는 하나 문헌을 징빙할 없습니다. 단지 연대만 이어놓고 중국의 역사책을 가져다가 메워 놓았을 뿐입니다. 중국 사람이 외이(外夷) 일을 전한 데에 본디 잘못된 것이 많은데, 모두 변별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한스럽습니다.

백제(百濟) 일을 가지고 말해보면백제가 망하자 땅이 말갈(靺鞨) 발해(渤海) 신라(新羅) 나눠졌다.” 하였으니, 이것은 대개 《당서(唐書)》를 인용한 것입니다. 말갈과 발해는 백제와 더불어 남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능히 땅을 나누어 가질 있겠습니까. 백제의 근원이 부여(扶餘)에서 나왔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대부분 혼동해서 칭하였습니다. 《남사(南史)》에서() 나라 백제가 약간 요서(遼西) 가졌다.” 하고, 《북사(北史)》에서구태(仇台) 비로소 대방(帶方) 왕노릇을 하니, 공손도(公孫度) 딸로 아내를 삼아 주었다.” 설들은 모두 부여의 일인데 혼동하여 백제라고 하니, 중국 역사책을 믿을 없는 것이 대개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삼국 이후에는 《금사(金史)》가 있어 징빙할 만하나 전에는 더욱 징빙할 만한 것이 없으니, 손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지금 단군 이하 삼국의 시초에 이르기까지 편을 초잡아서 올리오니, 조목조목 비판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군기(檀君紀)에다 구이(九夷) 일을 갖추어 논하는 것은 단군에 부합되지 못할 같지만, 동방에 원래 9종의 오랑캐가 있었으니 사실을 빼지 않아야 되겠거니와 단군도 역시 구이의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신라는 바로 사로(斯盧)이고, 백제는 바로 백제(伯濟)입니다. 고구려는 분명히 무제(武帝) 앞에 있었는데, 《삼국사》에 기록된 연대는 역력히 저와 같으니, 또한 본국의 분명한 문적을 놓아 두고 멀리 황홀하여 믿기 어려운 중국 책을 취할 없습니다. 그러나 전혀 빼버리는 것도 사가(史家) 의문점을 전하는 예가 아니니 이같은 부분을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습니까?

구해 《고기(古記) 1책은 바로 신라의 이속(俚俗) 전한 것으로 고려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대부분 신령하고 괴이한 말들이고 불가(佛家) 언어가 과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도 역시 고려의 일연(一然) 찬한 것인데, 책은 대개 불가의 문자를 찬한 것이나 또한 국사(國事) 언급된 것이므로 더러 채택할 만한 것이 있지만 역시 허황된 말이 많습니다. 우리 나라는 고래로 어찌 옛일을 기록한 저술을 남긴 선비 하나가 없어서 중의 불경스러운 책만이 후세에 전하는 것입니까. 생각건대 강역이 나누어져 난리를 치른 나머지 공사문기(公私文記) 거의 없어지고 불가에서 전하는 것은 명산심곡 속에 간수하여 보존되었을 것입니다. 단군 이후 근거없는 괴설을 일체 깎아버렸는데, 《시경》의 생민시(生民詩) 읽어볼 중국에도 이런 일이 있으니, 전혀 그것이 모두 옳지 못한 것이라고 지워버릴 수는 없습니다. 주자가후세의 상서로운 일에는 위망(僞妄) 것이 많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찌 위망을 인하여 진실한 것까지 아울러 모두 없는 것으로 여길 있겠습니까. 봉황도 오지 않고 황하에 하도(河圖) 떠오르지 않는다고 공자의 말씀이 어불성설이니 또한 옳지 못함이 되고 생민시도 그와 같은 경우가 됩니다. 이와 같은 일들을 취사선택하기가 또한 어려우니, 아울러 하교해주시기를 삼가 바라옵니다.

사마공(司馬公 사마광(司馬光))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에는 여러 책의 취사선택에 대한 것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책을 모방하여 조목 밑에 주를 달았습니다. 그리하여 먼저 삼국 이상의 몇몇 조목을 초하여 아울러 올립니다.

전일에 여쭌 황룡국(黃龍國)은 하교에서 악비(岳飛)가 일컬은 것으로 해당시키셨습니다. 지금 《성경통지(盛京通志)》를 보니 “요(遼)가 발해(渤海)를 정벌하여 지금의 개원현(開原縣)에 이르니, 황룡이 나타났다. 그래서 황룡부(黃龍府)로 개명하였다.” 하였는데, 악비가 일컬은 것은 이것을 가리킨 것이고, 우리 나라 역사책에서 일컬은 것은 양한(兩漢)의 즈음에 있으니, 옳지 않은 듯싶습니다.

창해(蒼海) 삼한(三韓) 이름은 하교에 의하여 고이(考異) 속에서 자세히 논하였고, 밖의 지명도 조금은 단서가 보이나 단지 문적의 근거가 있는 것만을 다룰 뿐입니다. 윤장(尹丈 윤동규(尹東奎))께서《전한서(前漢書)》의 지리지(地理志) 가장 명백하니 모두 따를 만하고 우리 나라의 땅은 정사를 따라야 한다.” 하시니, 말씀이 옳을 같습니다. 그런데 그때 통하지 못한 곳이 있으니 널리 상고하여 중에서 옳은 것만 취할 뿐입니다. 만일 오로지 우리 나라 역사책만을 따른다면 성천(成川) 졸본(卒本) 되고 의주(義州) 국내(國內) 된다는 따위를 모두 따를 있겠습니까? 졸본은 전일에 말씀해 주신 졸빈(卒賓)이니 과연 전음(轉音) 뿐입니다. 《성경지(盛京志) 물산(物産)편에《당서(唐書)》에 칭한 , 세속에서 귀중히 여기는 졸빈의 [] 바로 지금의 봉천(奉天) 동남쪽 지방에서 생산되는데, 고려와는 겨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역시 요계(遼界) 있었을 것입니다.

신라의 김씨는 금궤에서 나왔는데, 김유신(金庾信) 수로(首露) 후손입니다. 신라의 국자 박사(國子博士) 설인선(薛仁宣) 비문을 찬하기를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후손이니, 신라 김씨와 동성이다.” 하였으니, 이에 의거하면금궤(金櫃)’금란(金卵)’이니 말도 모두 속인 말입니다. 다른 일도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그렇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의 괴설(恠們說) 사실은 있지 않고 이름만 있는데 모두 이름을 인하여 불려서 말하니, 이를테면 성이 김인즉 금궤니 금란이니 하는 일을 만들어 내고, 고을 이름이 영일(迎日)인즉 연오랑(延烏郞)이니 세오녀(細烏女) 하는 일을 만들어내고, 계림(鷄林)으로 고쳐 칭한즉 닭의 이상함이 있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이 ()이면까치가 지저귀었다.” 이유를 가지고 가탁하여 입설(立說)하니 모두 믿을 것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 나라 사람의 습관인데 고금이 다르지 않습니다.

옛날 처음 서울에 들어갈 때 길이 삼전포(三田浦)의 큰 들을 지났는데 ‘점고만평(點考萬坪)’이라 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광평대군(廣坪大君)이 여기에 궁(宮)을 지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궁’이라 하고, 이 들은 모두 그 절수(折受)인데 소작자가 점고하여 종자를 받은 것이 만이나 되었기 때문에 ‘점고만’이라 하였다.” 합니다. 뒤에 지지(地志) 상고하니, 들에는 옛날에 정금원(鄭金院) 있었는데, 들의 이름 얻은 것은 과연 때문이었습니다. 비로소 우리 나라 사람이 이름을 인하여 말을 만든 것이 모두 이런 따위임을 알았습니다. 어찌 이것으로 믿음을 전할 일을 삼을 있겠습니까.

말갈은 항상 신라와 백제의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신라기(新羅記)아슬나주(阿瑟那州) 땅이 말갈과 연해 있는데, 지마왕(祗摩王) 또한 군사를 일으켜 치려고 했었다.” 하였고, 백제기(百濟記)에는말갈이 우리 북쪽 지경에 연해 있다.” 하였으니, 숙신별부(肅愼別部) 혹시 영동(嶺東) 관북(關北) 사이에 있었던 것이 아닌지요? 고려 때 여진(女眞)이 혹은 배를 타고 쳐들어 오기도 하였고, 혹은 우릉도(芋陵島)를 노략질하기도 하였으니, 그것은 이와 같은 ()였을까요? 만일 바다를 건너와서 침범하였다면 신라 사람이 무엇 때문에 치려고 했겠습니까? 이것이 가장 없는 일이니, 또한 하교해 주십시오.

강례(綱例) 작은 종이에다 삼국부터 이후의 것을 약간 기록해서 올립니다. 만일 지적해 주시면 지적해 주신 뜻을 미루어 밝혀서 다른 것에도 미쳐 있을 것입니다병자년

[-D001] 절수(折受) : 

봉록(俸祿)으로 토지나 또는 결세(結稅) 떼어 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