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19. 16:48ㆍ백두산
북새기략
백두산고〔白頭山考〕
[DCI]ITKC_BT_1529A_0010_000_0050_2019_001_XML DCI복사 URL복사
백두산은 무산부(茂山府) 서쪽 306리에 있다. 옛 이름은 불함산(不咸山)이다. 중국 사람은 장백(長白), 동방 사람은 백두(白頭)라고 부르니, 산이 아주 높고 사계절 항상 얼음과 눈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산해경(山海經)》에 “넓은 황야 가운데 산이 있는데, 불함산이라고 하며,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라고 하였다.
《진서(晉書)》에 “숙신씨가 불함산 북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불함산에 대해 살펴보건대, 우리나라 역사[東史]에 따르면 북옥저(北沃沮)와 말갈(靺鞨)이 모두 불함산 북쪽에 있었다고 한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우리나라 경내에 불함산이 있었던 듯하나, 어느 산이 옛 불함산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백두산을 불함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근거에 따른 것인가.
《위서(魏書)》에 “물길국(勿吉國) 남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나라 말로는 ‘태백(太白)’이다. 호랑이, 표범, 곰, 이리 등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이 이 산을 용변으로 더럽힐 수 없다 하여, 산을 지나가는 자들은 모두 용기에 담아서 간다.”라고 하였다.
《요지(遼志)》에 “장백산이 냉산(冷山) 동남쪽 1000여 리에 있다. 그 산 속의 금수들은 모두 하얗다. 사람이 감히 들어가지 않는데, 그곳을 더럽혀 뱀에게 물리는 해를 입을까 두려워서이다.”라고 하였다.
《금사(金史)》 〈세기(世紀)〉에 “그 북쪽으로 혼동강(混同江)과 장백산(長白山)이 있다. 혼동강은 흑룡강(黑龍江)이라고도 한다. 이른바 ‘백산(白山)과 흑수(黑水)’가 바로 이것이다. 대정(大定) 12년(1172)에 장백산신(長白山神)을 흥국영응왕(興國靈應王)에 봉하고, 그 산 북쪽에 묘우(廟宇)를 세웠다. 명창(明昌) 연간에 다시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에 책봉하였다.”라고 하였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장백산은 삼만위(三萬衛) 동북쪽 1000여 리에 있으니, 옛 회령부(會寧府)의 남쪽 60리이다. 너비는 1000리, 높이는 200리이다. 그 정상에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리이며,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 혼동강이 되며, 동쪽으로 흘러 아야고하(阿也苦河)가 된다.”라고 하였고, 《성경통지(盛京通志)》에 “장백산은 곧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隣)이니, 선창(船廠) 동남쪽 1300여 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명통지(明統志)》에 “동쪽으로 흘러 아야고하가 된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살펴보건대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것은 압록강,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것은 토문강(土門江), 북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것은 혼동강이라고 하니, 아야고하라는 이름의 강은 없다. 옛날과 지금의 호칭이 다르기 때문이다.
고전번역서 > 성호사설 > 성호사설 제2권 > 천지문 > 최종정보
성호사설 제2권 / 천지문(天地門)
오국성(五國城)
[DCI]ITKC_BT_1368A_0030_010_0380_2002_001_XML DCI복사 URL복사
금(金) 나라는 여진의 흑수부(黑水部)로 우리나라의 북도와 가장 가깝다. 송(宋) 나라의 황제가 잡혀 와서 오국성(五國城)에 구금되었으니 반드시 우리 국경과 서로 가까웠을 것이다. 흑수부 지역에서 가장 깊고 들어가기 어려운 곳은 오랄성(烏喇城)이다. 오(烏)와 오(五)는 우리 음으로 비슷하니 ‘오국’은 아마도 오랄의 잘못인 듯하다. 오랑캐족들의 땅 이름이나 사람 이름은 대부분이 음으로 하고 글자로 쓰지 않기 때문이다. 《일통지(一統志)》에 보면, “삼만위(三萬衞)에서 1천 리 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오랄이 바로 그곳이다. 《성경지(盛京志)》에는, “오랄 지역에는 이름이 없는 성이 많다.” 하였으니 어느 곳이 오국이었는지는 알 수 없고, 다만 이 지역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의심할 뿐이다.
오랄에서 동남으로 토문강(土門江)까지가 7백 30리인데 토문은 곧 두만강(豆滿江)이다. 이것도 음이 비슷하여 잘못된 것이니 우리나라와는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다. 옛적에 불함산(不咸山)을 백두산(白頭山)ㆍ장백산(長白山) 또는 백산(白山)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일년중 언제나 춥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그러면 냉산(冷山)도 백두산을 가리킨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역사에 송 고종(宋高宗)이 사절을 보내어 우리나라를 경유하여 두 황제에게 문안을 드리려 하였는데 우리나라는 금 나라가 두려워서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한다. 그렇다면 오랄이 우리와 가까운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 경성(鏡城)에 있는 큰 무덤을 가지고 황제의 무덤이라 하고 그 땅을 곧 오국성이라고 하는 이도 있으나 그것은 잘못이다. 《원사(元史)》에도 “혼동강(混同江)이 회령부(會寧府)를 경유하여 오국두성(五國頭城)으로 통하여 동북쪽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오국이 오랄임이 틀림없다.
[주-D001] 오국성(五國城) :
《類選》 卷1下 天北篇 地理門. 《林下》 卷11 文獻指掌編1.
[주-D002] 일통지(一統志) :
《원일통지(元一統志)》ㆍ《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ㆍ《청일통지(淸一統志)》 등이 있는데 중국 전체의 지리를 기술한 책임. 《원일통지》는 책이 전하지 아니하고, 《청일통지》는 성호가 미처 보지 못했을 듯하니 여기에 인용한 것은 《대명일통지》일 것임. 명(明) 이현(李賢) 등이 국가의 명으로 편찬한 것임.
[주-D003] 두 황제 :
북송(北宋) 말기의 임금인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의 부자가 금 나라 사람에게 붙잡혀서 오국성에 구금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음.
> 고전번역서 > 해동역사 > 해동역사 속집 제13권 > 지리고 > 최종정보
해동역사 속집 제13권 / 지리고(地理考) 13
산수(山水) 1 경내(境內)의 산(山)과 도서(島嶼)
○ 백두산(白頭山) -혹은 불함산(不咸山), 개마산(蓋馬山), 태백산(太白山), 도태산(徒太山), 백산(白山), 장백산(長白山),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隣)이라고도 한다.
《산해경(山海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황(大荒)의 가운데에 산이 있는데 이름을 불함산(不咸山)이라고 한다.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
《후한서(後漢書)》 동옥저열전(東沃沮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개마는 현 이름으로 현도군(玄菟郡)에 속하며, 그 산은 지금의 평양성(平壤城) 서쪽에 있다. ○ 《대청일통지》에 이르기를, “개마대산은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 《한서(漢書)》 지리지를 보면, ‘현도군에 서개마현(西蓋馬縣)이 있다.’ 하였는바, 산을 인하여 현을 이름한 것이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이는 《후한서》 주석의 잘못된 설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후위서(後魏書)》 물길열전(勿吉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물길국의 남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魏)나라의 말로는 태백산(太白山)이라고 한다. 그 산에는 호랑이, 표범, 큰곰, 이리가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산에서는 대소변을 보지 못하므로 산을 지나가는 사람은 모두 대소변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간다.
《괄지지(括地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말갈국(靺鞨國)은 옛 숙신이다. 그 나라에는 백산(白山)이 있는데, 조수(鳥獸)와 초목이 모두 희다.
《금사(金史)》 고려열전(高麗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옛 숙신의 지역에 산다. 그곳에는 산이 있는데, 백산이라고 한다. 대개 장백산(長白山)은 금나라가 일어난 곳이다.
《행정록(行程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주(同州)에서 40일을 가면 숙주(肅州)에 이르는데, 동쪽으로 대산(大山)이 바라보인다. 금나라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곳은 신라산(新羅山)이다. 그 산속에서는 인삼(人蔘)과 백부자(白附子)가 산출되며 고구려와 경계를 접하였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산은 바로 장백산이다.
섭융례(葉隆禮)의 《요지(遼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냉산(冷山)에서 동남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는데, 백의관음(白衣觀音)이 사는 곳이다. 그 산에 사는 금수(禽獸)는 모두 흰색이며, 사람들은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 산속에서 대소변을 보았다가 뱀 따위에게 해를 당할까 두려워서이다. 흑수(黑水)가 이곳에서 발원한다. 옛날에는 속말하(粟末河)라고 불렀는데, 태종(太宗)이 진(晉)을 격파하고서 혼동강(混同江)으로 고쳤다. 그곳의 풍속에는 나무를 파내어서 배를 만드는데, 길이가 8척가량 되며, 모양이 베틀의 북[梭]과 같이 생겼으므로 사선(梭船)이라고 한다. 배 가장자리에 노를 하나 매달아 놓았는데, 단지 고기잡이를 하는 데 쓴다. 수레를 건넬 때에는 두 척의 배를 나란히 잇대거나 혹은 세 척의 배를 잇댄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길림(吉林) 오라성(烏喇城)의 동남쪽에 있으면서 1000여 리에 걸쳐 길게 뻗어 있다. 동쪽으로 영고탑(寧古塔)에서 서쪽으로 봉천부(奉天府)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산이 모두 이 산에서 발맥(發脈)한다. 산꼭대기에는 못[潭]이 있어서 압록강(鴨綠江), 혼동강(混同江), 토문강(土門江) 세 강이 발원한다. 옛 이름은 불함산이며, 또한 태백산이라고도 하고 백산이라고도 한다. 《산해경》에는 “대황(大荒)의 가운데에 산이 있는데 불함산이라고 한다.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 하였으며, 《진서(晉書)》에는 “숙신씨는 불함산 북쪽에 있다.” 하였으며, 《후위서》에는 “물길국의 남쪽에는 도태산이 있는데, 위(魏)나라 말로는 태백이라고 한다. 그 산에는 호랑이, 표범, 큰곰, 이리가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산에서는 대소변을 보지 못하므로 산을 지나가는 사람은 모두 대소변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간다.” 하였다. 《금사》 세기(世紀)를 보면, “그 북쪽에는 혼동강과 장백산이 있다. 혼동강은 흑룡강(黑龍江)이라고도 부른다. 이른바 백산(白山)이니 흑수(黑水)니 하는 것은 이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하였으며, 또 예지(禮志)를 보면, “대정(大定) 12년(1172)에 장백산신(長白山神)을 봉해 흥국영응왕(興國靈應王)으로 삼고는 그 산 북쪽 지역에 묘우(廟宇)를 세웠다. 명창(明昌) 4년(1193)에 다시 책봉하여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로 삼았다.” 하였다. 섭융례의 《요지》를 보면, “장백산은 냉산(冷山)에서 동남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그 산에 사는 금수(禽獸)는 모두 흰색이며, 사람들은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 산속에서 대소변을 보았다가 뱀 따위에게 해를 당할까 두려워서이다.” 하였다. 《대명일통지》를 보면, “장백산은 삼만위(三萬衛)에서 동북쪽으로 1000여 리, 옛 회령부(會寧府)에서 남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다. 1000리에 걸쳐서 길게 뻗어 있으며, 높이가 200리이다. 그 산꼭대기에는 못[潭]이 있는데, 둘레가 80리이며, 못의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다. 남쪽으로 흐르는 것이 압록강이고, 북쪽으로 흐르는 것이 혼동강이고,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아야고하(阿也苦河)이다.” 하였다. 《성경통지(盛京通志)》를 보면, “장백산은 바로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隣)이다. 선창(船廠)에서 동남쪽으로 13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대명일통지》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아야고하이다.” 하였는데, 지금 상고해 보건대, 서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압록강이고, 동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토문강이며, 북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혼동강으로, 아야고하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는바, 고금의 명칭이 다르게 변한 것이다. 금나라 때 세운 묘우는 무너졌으며, 조선조에서는 높여서 장백산지신(長白山之神)으로 삼았다. 사당은 길림성의 서남쪽에 있는 온덕항산(溫德恒山)에 있는데, 보름에 제사 지낸다. 강희(康煕) 17년(1678)에 황지(皇旨)를 받들어서 대신(大臣)인 각라오목눌(覺羅吳木訥) 등을 파견하여 장백산에 올라가 형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이들이 산에 올라가다가 산기슭 한 곳을 보니, 사방에 수풀이 빽빽하게 우거진 가운데 둥글고 평평한 지역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초목이 자라지 않았다. 숲을 나와서 1리쯤 가자 향나무가 줄지어 자라고 황화(黃花)가 향기를 자욱하게 풍기고 있었는데, 산 중턱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위로 올려다볼 수가 없었다. 이에 여러 대신들이 꿇어앉아서 황지(皇旨)를 읽자, 구름과 안개가 확 걷히면서 산의 형세가 환하게 드러나, 작은 산길이 있어서 올라갈 수가 있었다. 그 중간에 섬돌 모양으로 된 석대(石臺)가 있었는데, 평탄하여서 사방을 둘러보기에 좋았다. 산꼭대기는 둥근 형세를 이루고 있었는데, 눈이 쌓여서 환하게 밝았다. 그 위에 올라가 보니 다섯 개의 봉우리가 부(府)처럼 빙 둘러 솟아 있었고, 남쪽에 있는 한 봉우리가 조금 낮아서 문(門)과 같았다. 그 가운데 있는 연못은 몹시 깊었는데, 절벽에서의 거리가 50장(丈)가량 되었으며, 둘레가 40여 리 정도 되었다. 산의 사방 주위에서는 수많은 샘물이 분출하였는데, 바로 세 개의 큰 강이 발원하는 곳이었다. 강희 23년(1684)에 다시 주방협령(駐防協領) 늑출(勒出) 등을 파견하여 다시금 주위를 돌면서 산의 형세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너비와 길이 및 길게 뻗은 것이 《대명일통지》에서 말한 것과 같았다. 산꼭대기에는 다른 나무는 자라지 못하였고, 풀들은 대부분이 흰 꽃이 피어 있었다. 남쪽 산기슭은 길게 뻗어 엉켰다가 두 줄기로 나뉘어졌다. 그 가운데 서남쪽을 향한 한 줄기의 동쪽 경계는 압록강이고, 서쪽 경계는 통가강(通加江)인데, 산기슭이 다한 곳에서 이 두 강이 모였다. 다른 한 줄기는 산의 서쪽을 돌아서 북쪽으로 수백 리를 뻗쳐 있는데, 여러 물이 나뉘어지는 곳이므로 구지(舊志)에서는 이를 통틀어 분수령(分水嶺)이라고 하였다. 지금은 서쪽으로 흥경(興京) 주변에 이르기까지 수목이 무성하고 빽빽하여 하늘의 해를 가리는데, 그 지방 토착민들은 이를 납록와집(納綠窩集) -삼가 살펴보건대, 와집(窩集)은 바로 수림(樹林)을 칭한다.- 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부터는 서쪽으로 흥경의 문(門)에 이르러서 마침내 개운산(開運山)이 된다. 납록와집에서부터 북쪽으로 뻗은 한 산등성이는 그 길이가 40여 리나 되는데, 토착민들은 이를 가이민주돈(歌爾民朱敦) -삼가 살펴보건대, 가이민주돈은 바로 장령(長嶺)의 칭호이다.- 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영액변문(英額邊門)으로 들어가서 마침내 천주산(天柱山)과 융업산(隆業山)이 되는데, 빙빙 돌면서 굽이져 뻗어 호랑이가 웅크리고 용이 서린 것과 같다. 그 사이에는 땅을 인하여 이름을 지어 산(山)이 되고 영(嶺)이 된 것이 한두 곳이 아닌데, 그 모두가 장백산의 지맥(支脈)이다. 장백산의 신령스럽고 기이함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일컬어져 왔거니와, 신성(神聖)한 황조(皇朝)가 발상(發祥)하여 지금에 와서 흥성해졌는바, 억만년토록 영원할 크나큰 왕업은 이 산과 더불어 끝이 없을 것이다. 살펴보건대, 《통지(通志)》에 이르기를, “선창(船廠)에서 동남쪽으로 13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는데, 지금 상고해 보니, 이 장백산은 실제로는 주(州)에서 동남쪽으로 600리 되는 곳에 있다.
《대청개국방략(大淸開國方略)》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높이가 200여 리이고, 1000여 리에 걸쳐서 뻗어 있다. 웅대한 모습으로 우뚝하니 높이 솟아 있어 영기(靈氣)가 모인 곳이다. 산 위에는 못[潭]이 있는데, 달문(闥門)이라고 한다. 못은 둘레가 80리이며, 근원이 깊고 흐름이 넓어 압록강, 혼동강, 애호강(愛滹江) 세 강의 물이 나온다. -삼가 살펴보건대, 애호강은 바로 아야고하(阿也苦河)의 음이 변한 것이다.
《강희기가격물론(康煕幾暇格物論)》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오라(烏喇)의 남쪽에 길게 뻗어 있다. 장백산의 사방 주위에는 수많은 샘물이 솟아나와 송화강(松花江), 압록강(鴨綠江), 토문강(土門江) 세 큰 강의 근원이 된다. 그 남쪽 산기슭은 두 개의 큰 줄기로 나눠지는데, 서남쪽으로 향한 한 줄기는 동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통가강에 이른다. 대개 고려의 여러 산들은 모두 그 지맥(支脈)이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북쪽 달단(韃靼)의 남쪽 경계에는 큰 산이 있는데, 이름이 백두산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백두산은 회령부(會寧府)에서 서쪽으로 7, 8일 걸리는 곳에 있다. 옛날의 불함산으로, 중국 사람들은 장백산이라고 한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광종(光宗) 10년(959)에 압록강 바깥쪽의 여진(女眞)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내 살게 하였다.” 하였는데, 백두산이라는 칭호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후한서》에 이른 바 개마산(蓋馬山) 역시 백두산이다. 《대명일통지》와 《대청일통지》에는 평양의 서쪽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고, 《대청일통지》에는 또 지금의 개평현(蓋平縣)이 그곳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고려의 윤관(尹瓘)이 여진의 갈라전(曷懶甸)을 격파하고 9성(城)을 설치한 곳이 지금 함흥(咸興) 북쪽 지역인데, 임언(林彦)의 구성기(九城記)를 보면,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북쪽은 개마산에 끼어 있고, 남쪽으로는 장주(長州)와 정주(定州)에 접하고 있다.” 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개마가 백두산인 것이 분명하다.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은 일찍이 개마산을 백두산이라고 하면서, “참으로 개(蓋)의 초성(初聲)은 실로 해(奚)와 같은데, 우리나라의 음은 백(白)을 일러 해(奚)라고 하고, 마(馬)를 일러 말[摩尼]이라 하고, 두(頭)를 일러 역시 머리[摩尼]라 한다. 개마(蓋馬)란 것은 해마니(奚摩尼)이며, 해마니는 백두(白頭)이다.” 하였는데, 이 설이 그럴 듯하다..
고전번역서 > 다산시문집 > 다산시문집 제15권 > 서 > 최종정보
다산시문집 제15권 / 서(敍)
대청 세계략(大淸世系略)
[DCI]ITKC_BT_1260A_0150_010_0210_2000_007_XML DCI복사 URL복사
만주(滿洲) 개국의 유래. 《개국방략(開國方略)》에,
“장백산(長白山) 동쪽에 포고리산(布庫哩山)이 있고 그 산 밑에 포륵호리(布勒瑚里)란 연못이 있는데, 전하는 말에 ‘하늘의 선녀(仙女) 불고륜(佛庫倫)이 내려와서 이 연못에서 목욕을 하는데, 신작(神鵲)이 붉은 과일 하나를 물고 와서 선녀의 옷 위에 놓고 갔다. 그 과일을 입에 넣고 삼킨 선녀는 드디어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성(姓)은 애신각라(愛新覺羅)이고 이름은 포고리옹순(布庫哩雍順)이다. 장백산 북쪽 아타리성(俄朶里城)에 살면서 국호(國號)를 만주라 하였다.’한다. 수세(數世) 동안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하였으므로 국민이 반란을 일으켜 애신각라의 종족을 해치자, 어린 아들 하나가 황야로 도망하여 목숨을 건졌다.”
하였고, 《황조문헌통고(皇朝文獻通考)》에는,
“우리나라는 장백산에서 발상(發祥 천명(天命)을 받아 천자(天子)가 될 길조(吉兆)가 나타나는 것)하였다. 먼 조상이 세 성(姓)의 난을 평정한 뒤로 아막혜(俄漠惠)의 야악다리성(野鄂多理城)에 살았으니, 지금의 영고탑(寧古塔) 서남쪽 3백여 리 지점에 있다. 국호를 만주라 했다.” 여지고(輿地考)
하였다.
살피건대, 명 나라 때 여진(女眞)의 땅을 나누어 건주(建州)ㆍ해서(海西)ㆍ모련(毛憐) 등 세 위(衛)를 설치하였더니, 청 나라는 건주위에서 일어났다. 건주위는 지금의 흥경(興京)으로 혁도아랍(赫圖阿拉)이란 곳이 바로 그곳이다. 동사(東史 우리나라 사책(史冊))를 상고해 보면 명 나라 영락(永樂) 때 알타리부락(斡朶里部落)의 맹가첩목아(孟哥帖木兒) 관독(管禿)이라고도 한다. 가 알목하(斡木河) 지금의 회령부(會寧府) 에 들어와 살았는데, 선덕(宣德 명 선종(明宣宗)의 연호) 7년 7성(姓)의 야인(野人)이 알목하를 공격할 적에 맹가가 피살되고 오직 범찰(凡察)과 이이(耳伊) 등만 죽음을 면하였는데 이들은 경원(慶源)으로 옮겨 살기를 청하였다. 《무비지(武備志)》에는 ‘맹가가 피살되자 그 동생 범찰과 아들 동창(童倉)이 조선으로 도망하였다.’하였고, 《박물전휘(博物典彙)》에는 ‘동창이 산 곳은 건주의 조상이 살던 곳이다.’하였으니, 《개국방략》에 말한 아타리성(俄朶里城)은 바로 동사(東史)에서 말한 알타리부락(斡朶里部落)이고, 《개국방략》에서 말한, 종족을 해치자 어린 아들이 황야(荒野)로 도망하였다는 것은 동창이 우리나라에 귀순한 것을 일컫는 듯하다. 또 동사를 상고하건대 ‘선덕(宣德)ㆍ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 때 건주위지휘(建州衛指揮) 이만주(李滿住)가 파저강(婆豬江) 내외의 땅을 점거하고서 우리의 국경을 자주 침범하므로 드디어 여연(閭延)ㆍ무창(茂昌) 등 4군(郡)을 폐하였다.’하였는데, 지금이《개국방략》에 조(肇)ㆍ흥(興)ㆍ경(景)ㆍ현(顯) 등 4조(祖)는 파저강 내외의 부락들과 연관이 있었을 듯하니, 이들은 아마도 만주를 이어서 일어난 것인 듯하다.
'백두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철령 너머엔 항시 눈이 온다는데 / 鐵關以外恒飛雪 (0) | 2022.10.27 |
---|---|
황룡국과 광평대군 궁 (0) | 2022.10.19 |
금나라 황성 (0) | 2022.10.19 |
극동아시아 우랄산과 알타이산 동쪽의 토지는 모두 아시아에 속하며 (0) | 2022.10.18 |
삼수(三水)는 매우 추워 4월에 풀이 돋아나고, 8월에도 눈이 내리므로, (0) | 2022.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