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19. 16:41ㆍ북경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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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역상집 제3권 / 의상〔儀象〕
《금사(金史)》
금(金)나라는 변경(汴京)을 함락하자 모든 것을 연경(燕京)으로 옮겼다. 그러나 천륜(天輪)ㆍ적도(赤道)ㆍ아거(牙距)ㆍ발륜(撥輪)ㆍ현상(懸象)ㆍ종고(鐘鼓)ㆍ사진(司辰)ㆍ각보(刻報)ㆍ천지(天池)ㆍ수호(水壺) 등의 의기는 모두 오래도록 버려두어 훼손되었고, 오직 동혼의(銅渾儀)만이 태사국(太史局)의 후대(候臺)에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변경에서 연경까지는 1천여 리나 떨어져 있고, 지세(地勢)의 높이가 달라서 망통(望筒)으로 북극성을 관측하는 데에는 약간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4도를 낮추고서야 비로소 북극성을 관측할 수 있었다. 명창(明昌) 6년(1195) 8월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우레가 진동하고 번개가 번뜩이더니, 용(龍)이 혼의(渾儀)의 오운(鼇雲)과 수부(水趺) 아래에서 일어나면서 받침대가 갑자기 부러졌다. 그 때문에 혼의가 받침대 아래로 떨어져서, 급히 담당 부서에 그것을 수리하도록 하여, 다시 받침대 위에 올려 놓았다. 정우(貞祐 금(金)나라 선종(宣宗)의 연호, 1213~1216) 연간에 남도(南渡)하면서 혼의를 녹여서 다른 물건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차마 훼손시킬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온전히 보존하여 운반하려고 해도 수레에 싣기가 곤란하여 마침내 그대로 내버려두고 떠나버렸다.
흥정(興定 금나라 선종의 연호, 1217~1221) 연간에 사천대(司天臺)의 관원이 받침대의 가운데에 혼의가 설치되어 있지 않고, 또 측후인(測候人)의 수가 부족하므로, 의상(儀象)을 제작하여야 하고 관측인원을 여러 명 보충해야 제대로 관측할 수 있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선종(宣宗)은 예부 상서(禮部尙書) 양운익(楊雲翼)을 불러들여 묻자, 양운익은 대답하기를, “나라에서 이전부터 구리의 사용을 매우 엄격하게 금지하였기 때문에, 비록 공사(公私)가 소유한 것을 모조리 모은다 하더라도 의기를 만들기에는 부족할 것입니다. 지금 나라에 씀씀이가 한창 많고 재용(財用)이 부족하니, 아직은 시행할 만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훗날 황제가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였으나, 측후 인원 두어 사람을 보충하는 데 그치고, 의기를 제작하는 문제는 끝내 쑥 들어가고 말았다. 처음에 장행간(張行簡)이 예부 상서가 되어 사천감을 통솔할 때에, 일찍이 연화루(蓮花漏)와 성환루(星丸漏)를 만들어 황제에게 올리자, 장종(章宗)이 연화루는 금중(禁中)에 안치하고, 성환루는 거가(車駕)가 순행할 적에 사용하도록 명하였다. 정우(貞祐) 연간에 남도(南渡)하면서 연화루와 성환루를 모두 변경으로 옮겨 두었는데, 변경이 함락된 후에 망가져서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주-D001] 삼가성색(三家星色) :
무함(巫咸)ㆍ석신(石申)ㆍ감덕(甘德) 3가(家)의 성도(星圖). 청색ㆍ황색ㆍ적색의 세 가지 색깔로 구별하였음.
[주-D002] 자궁(紫宮) :
자미(紫微). 자미원(紫微垣). 북두성의 북쪽에 있는 별자리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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