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19. 19:01ㆍ북경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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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경당일사 제2편 / 오화연필(五花沿筆) ○ 을묘년(1855, 철종 6) 11월[17일-27일]
17일(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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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음. 대석교(大石橋)를 지났다.
여기서 장성(長城)을 바라보니 꿈틀꿈틀 여산 허리를 달음질쳐서 마치 뱀이 기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비단을 걸어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점점 각산(角山)을 향해서 동쪽으로 가는데 종자가 말하기를,
“이것이 진시황 때에 쌓은 만리장성입니다.”
하였다. 팔리포(八里鋪)를 지나서 강녀묘(姜女廟)에 들어갔다. 이 사당은 들판 바위 언덕 위에 있었다. 동남쪽으로는 바다를 굽어보고 서북쪽으로는 들판을 바라볼 수 있는데 우뚝하게 복판에 있어서 사방을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참으로 산해(山海)의 절경이다. 사당 안에는 강녀의 소상(塑像)이 있는데 처절하게 울고 있는 모습이 완연하다. 시녀 2인이 흰옷을 입고 손에는 화대(畫帶)와 화산(畫傘)을 받쳐 들고 좌우로 갈라 섰다. 건륭의 편액(扁額)에 ‘방류요수(芳流遼水)’라 쓰고 벽에는, ‘이변국속(而變國俗)’이라 써서 걸어 놓았다. 주련(柱聯)에는,
진시황이 어디에 있는가 / 秦皇安在哉
부질없이 만리성으로 원망만 쌓았네 / 虛勞萬里築怨
강녀는 죽지 않았으니 / 姜女未亡也
여태껏 빗돌이 남아 꽃다운 이름 남겼네 / 尙留片石遺芳
라 하였고 또,
천고에 무심히 절의를 자랑하였고 / 千古無心誇節義
한 몸이 죽어서 강상을 위하였네 / 一身有死爲綱常
했다.
이는 섬서(陝西) 사람 범칠랑(范七郞) 이름은 식(植), 서안부(西安府) 동관(同官) 사람이다. 혹은 이름이 영(寗)이라고도 한다. 이 만리장성을 쌓으려 부역을 갔는데 그 아내가 성은 허(許) 이름은 맹강(孟姜)이다. 찾아 성 밑에까지 가서 울다가 죽으매, 후인들이 사당을 짓고 제사하였다 한다. 명(明), 청(淸) 이래로 비를 세우고 기록한 것이 많았다. 사당 뒤 돌무더기 위에 ‘망부석(望夫石)’이라는 3자를 새기고 돌을 쪼아서 두서너 발자국 높이를 계단처럼 만들었으니 매일 남편을 바라보기 위해 올라갔던 곳이라 한다.
바윗돌 위에 또 조그마한 정자가 있고 편액을 진의정(振衣亭)이라 하였는데 매우 깨끗하였다. 석벽에는 건륭(乾隆 청의 고종)ㆍ가경(嘉慶 청의 인종)ㆍ도광(道光 청의 선종) 등의 시가 있고, 또 내각(內閣) 하정좌(賀廷佐)가 쓴 ‘작여시관(作如是觀)’이라는 4자가 새겨져 있다. 정자 옆에는 관음각(觀音閣)이 있고 3개의 불상을 안치해 놓았다. 동쪽에는 행궁(行宮)이 있었는데, 황제가 심양으로 갈 때에 유숙하던 곳이다.
묘문 밖에는 비석이 있고 크게 ‘지차석(止此石)’이란 3글자를 새겼는데, 자체가 예스럽고 힘차나 누가 쓴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가경 갑자년과 을축년(1804~1805) 사이에 조선 사신이 이 비석을 보았는데, 옆에 ‘삼한 강희맹 입(三韓姜希孟立)’이라는 6자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어루만지며 자세히 보아도 끝내 흔적을 볼 수 없었다. 50여 년 동안에 비석의 마멸된 것이 이러하니 한번 탄식할 뿐이다. 시를 읊었다.
돌로 넋을 삼고 돌로 몸이 되어 / 石爲精魄石爲身
이 공산에서 몇 번이나 봄가을을 보냈던가 / 辛苦空山幾度春
강물은 출렁출렁 숲 속에 달 떨어지니 / 江水茫茫林月落
두견새 울어울어 행인을 보내누나 / 子規啼血送行人
위원성(威遠城)을 지났다. 오른편 기슭에 네모진 대가 있는데 벽돌로 쌓아 높이가 10길이나 된다. 즉 척계광(戚繼光)이 쌓은 것인데 바라보니 마치 연대와 같았다. 안에 여성(女城)을 만들어서 군사를 숨길 수도 있고 멀리 바라볼 수도 있다. 대 위에 올라가면, 산해(山海)의 온 성안을 손바닥 펴놓은 것처럼 들여다볼 수 있다.
또는 ‘한이대(汗伊臺)’라고도 하는데, 한이가 관내(關內)의 동정을 탐지하기 위하여 하룻밤 사이에 이를 쌓았다 하고, 혹은 ‘오왕성(吳王城)’이라 일컬으니 즉 오삼계(吳三桂)가 쌓은 것이라고 한다. 만력(萬曆) 연간에 웅정필(熊廷弼)ㆍ양응창(楊應昌) 등이 수만금의 재물을 써 가면서 수년 만에 이루어졌다 한다. 관내가 기각(掎角)의 형세가 되게 하기 위하여 땅속으로 길을 뚫어서 안팎을 통하게 하였던 것을 지금은 메워서 사용하지 못한다. 전해 내려온 말이 어느 것이 참말인지 알 수 없으나, 웅정필과 양응창이 쌓았다 한 것이 적실한 소문인 듯하다.
환희령(歡喜嶺)을 지났는데 관문과 5리 거리이다. 산해관에 도착하니, 관장ㆍ부도통(副都統)ㆍ독리(督理)ㆍ장경(章京)ㆍ서령(署領)이 다 관아에 벌여 앉아서 보단(報單)을 상고해 보고 인마를 점검했다. 세 사신의 가마가 창 앞으로 지나가는 것은 책문에서 하던 예와 같이 했다.
대개 이 관문은 7겹이며 문루는 3층인데, 각산의 끝진 곳에 있다. 바다와 멀지 않아서 산해관이라 한다. 하늘이 만들어 놓은 인후(咽喉) 같은 곳이며, 몽고ㆍ야인과 조선 등 여러 나라가 모두 이리로 출입하므로 기찰과 검사가 엄중하다.
산해관 청국 말로 찰객관(札喀關)이며 한어로 변관(邊關)이다. 은 즉 옛날의 유관(楡關)인데 서 중산(徐中山)이 북평(北平)을 진수(鎭戍)했을 때에 여기에 옮겨 설치하였으며, 오화관(五花關)이라고도 한다. 동서에 나성(邏城)이 있어서 관문의 나성과 연해서 다섯 곳이 둘러 있으므로 오화성이라 한다. 당 태종 때부터 거란족을 장악하기 위하여 이미 이런 이름이 있었다.
몽염(蒙恬)이 쌓은 것을 노변장(老邊墻)이라 하고, 중산이 쌓은 것을 신변장(新邊墻)이라 한다. 동가구(董家口)에서부터 쌓아서 징해루(澄海樓)까지 온 것이 즉 지금의 관성인데, 성첩이 튼튼하고 초루(譙樓)가 굉장히 크다. 바깥 편액을 산해관(山海關)이라 하여 제1문 홍예(虹蜺)ㆍ석미(石楣)에 새겼다. 혹은 이사(李斯)의 글씨라고 하는데 요동벌 밖에서도 액자(額字)를 바라볼 수 있다는 말은 모두 허황한 소리여서 믿을 수 없다. 혹은 이사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라고도 말하나 진(秦) 나라 때에도 요즈음 글씨체가 있었던가? 제2문에 이르니 장사꾼들과 행인들이며, 크고 작은 수레와 말들이 한꺼번에 폭주해서 문과 길이 꽉 막히었다. 세 사신과 함께 문 옆으로 걸어서 나갔다. 안 문미(門楣)에는,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 썼다. 제3문에 이르니, 4거리에 패루를 세우고 밑에는 십자로(十字路)가 있는데, 시가에는 집들과 물화들이 역시 대도회를 이루어 성경(盛京) 다음은 된다. 편액에, ‘상애박상(祥藹搏桑)’이라 하였으니, 건륭의 글씨다.
청의 학자 목재(牧齋) 전겸익(錢謙益)이 산해 독사(山海督師) 원숭환(袁崇煥)의 시를 화답한 시에,
임유는 지금 곧 우리나라 울타리인데 / 臨渝今是國儲胥
만 대의 병거(兵車)로 동문을 잠그도다 / 鎖鑰東門萬革車
하였는데 그의 자주(自注)에 ‘산해관은 옛날 임유(臨渝) 땅으로 속칭 유관(楡關)이라 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였다. 상고하여 보면 이러하다. 척 무장(戚武莊)이 융경(隆慶) 때 요계(遼薊)에 있으면서 황제에게 이뢰기를,
“변경에 둘린 성 2000리를 벽돌로 고쳐 쌓고, 여러 수자리 사는 군사에게 땅을 재어서 공정(工程)을 받아 성을 걸쳐서 대(臺)을 만들되, 대의 높이는 다섯 길로 하고 가운데를 비워서 3층의 대로 만들면 100명의 군사가 잠잘 수 있으며, 기계와 군량도 함께 둘 수가 있습니다. 오랑캐가 오거든 방어해서 지키게 하고 오랑캐가 물러간 뒤에는 차례로 쉬게 합니다.
먼저 1200좌(座)를 쌓되, 한 고을에서 10만 민(緡)씩만 내게 하면 그 공비 120만 민이 넉넉하겠습니다.”
하였다 한다.
남쪽 익성문(翼城門)으로 나가서 망해정(望海亭)으로 향해 가니, 차부와 하인들이 뒤따라오지 못했다. 곧 말 한 마리를 타고 고삐를 놓아 달리니, 며칠 동안 수레만 타서 노곤하던 터에 마치 두 어깨에 날개를 붙인 것 같다. 남쪽으로 5리쯤 가면 성이 10여 장(丈)쯤 헐린 곳이 있었다. 전하는 말로는, 오삼계(吳三桂)가 무너뜨리어 청병을 끌어들인 곳이라 한다. 순치(順治) 원년 갑신 4월에 오삼계가 성을 헐고 청병을 받아들였다. 강희(康煕 청 성조)의 유언에 의해서 수축하지 않고, 황제의 행차가 있으면 꼭 이리로 길을 잡는다 하니, 아마 청인들의 흥왕(興王)의 자취를 기념하는 것인가 보다. 쇠그물로 가로막고 붉은 난간을 둘렀다 했으나, 쇠그물과 붉은 난간은 현재 있지 않고 단지 몇 사람의 파리한 군졸이 막사를 지어 지키고 있을 뿐이다.
또 남쪽으로 10여 리를 가니 길가에 2개의 대포를 언덕 위에 그대로 드러내 놓았다. 길이는 두 발 남짓하고 무게는 80근이나 되며 표시해서 새기기를 ‘도광 2년 주조함[道光二年所鑄]’이라 하였다. 생각하건대, 대포의 제도가 저같이 장대(壯大)하니 이것으로 성을 격파하면 어느 성인들 이기지 못하겠는가?
망해정(望海亭)에 도착하였다. 일명 징해루(澄海樓)인데, 즉 산해관 남쪽에 있는 장성의 동쪽 막다른 곳이다. 명 나라 때에는 관해정(觀海亭)이라 하였다. 정자의 헌함(軒檻)과 기둥이 썩어서 붙들고 올라갈 수가 없었다. 정자의 남쪽 성의 뿌리가 바로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 밑에는 쇠를 녹여서 가마솥을 엎어 놓은 모양을 만들었고, 그 위에 큰 돌로 쌓아서 성의 끝이 그 위에 맞닿고 있으니 이른바 노룡두(老龍頭)라는 것이다. 바람이 이니 물결이 용솟음쳐서 거센 파도 소리가 진동하매 쭈뼛하여 오랫동안 서 있을 수 없었다. 동남방에 있는 큰 바다는 아득해서 끝이 보이지 않고, 간혹 돛대만 하늘빛과 같은 퍼런 물결 위에 오락가락 한다. 동쪽을 향해서 5리쯤 되는 바다 가운데 돌이 하나 높이 섰는데, 구름 위에서 솟은 것 같다. 이것이 갈석(碣石)이라 한다. 내가 말하기를,
“이는 믿을 수 없다. 옛날 오른쪽의 갈석이 지금에는 왼쪽에 있단 말인가?”
하였다. 서쪽으로 향해서 수십 리 지점에 모래 무더기가 바다로 달려 든 것을 진황도(秦皇島)라 하는데, 진시황이 동쪽으로 바다 위에서 놀던 곳이라 한다.
정자의 뜰에 비석 2개가 있으니, 하나는 ‘천개해악(天開海嶽)’이라 씌어져 있고, 하나는 ‘일작지다(一勺之多)’라 씌어져 있는데, 천계(天啓 1621~1627) 연간에 월(越) 땅 사람 유영기(劉永基)의 글씨라 한다. 전에 들은 바에는 명 나라 서화가 난우(蘭嵎) 주지번(朱之蕃)이 쓴 ‘천풍해도(天風海濤)’라는 글씨가 있다더니,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정자 동쪽 벽에는 건륭(乾隆) 계해년(1743, 영조 19)에 장소(張炤)ㆍ양시정(梁詩正)과 더불어 지은 갱재시(賡載詩)가 있고, 서벽에는 갑술년(1754, 영조 30)에 임유돈(任由敦)ㆍ유윤(劉綸)과의 갱재시가 있고 그 뒤 무술년(1778, 정조 2)에 또 우민중(于敏中)ㆍ양국치(梁國治)ㆍ동고(董誥)와 더불어 읊은 시가 있고, 또 도광(道光) 기축년(1829, 순조 29)에 허내보(許乃普)ㆍ조진용(曹振鏞)ㆍ양국치의 연구(聯句)가 있다. 시 주에,
“진 나라 때 장성이 바다에 들어간 것이 1리 남짓한데, 세상에서 40리라 한 것은 거짓말이다.”
하였다. 이로 보건대, 중산(中山)이 수축한 것이 몽염이 쌓은 옛터대로 한 듯하다. 지름길로 해서 심하(深河)를 건넜다. 내가 서장관에게 말하기를,
“저 심하의 고목이 된 버드나무가 요동백(遼東伯)이 활을 걸었던 버들이 아닌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니, 서장관의 대답이,
“이것은 심하(瀋河)이고 그 심하(深河)는 북방 흥경(興京) 지방에 있소.”
한다. 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심(瀋)과 심(深)이 비록 분별하기 어려우나, 여기도 관문을 당해서 하수를 뒤에 지고 있으므로 역시 한바탕 싸움할 만한 곳이니, 내가 그때를 당하였더라면 한 번 요계(遼薊)의 사이를 횡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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