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왕 때에 태조가 공(功)으로 화령백(和寧伯)에 봉해졌습니다. 무릇 국호를 세울 때에 반드시 그 근본을 들어서 국호를 삼기에 그러한 것입니까?

2023. 6. 16. 18:08이성계의 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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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전집 제26권 / 서(書)

안백순에게 답하는 편지 병자년(1756, 영조32) 〔答安百順 丙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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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도 아득하고 서신도 끊겨서 노쇠한 여생에 심사가 즐겁지 않았는데, 문득 인편(人便)에 전해 온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내용이 참으로 정중하여 세 번을 읽고 보니, 또한 무릎을 맞대고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흉년이 들어 형편이 어렵다고 사람들마다 똑같이 호소하고 있습니다. 나의 생각에, 우리들의 운명은 날이 갈수록 더 궁색해지고 있습니다. 20, 30년 이래의 사정과 비교하면 마치 비탈길을 달려 내려가듯이 빠르고 점점 악화되고 있으니, 앞으로 과연 죽음을 면하여 지난날의 일을 돌아보며 말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복상(服喪) 중에 몸을 잘 보중하고 계시다는 점이 위로가 됩니다. 나는 전염병을 피해 거처를 옮겨서 자질구레한 일로 무료하게 지냈습니다. 중간에 학질(瘧疾)의 증상으로 거의 죽을 뻔하다가 다시 소생하여 꼼지락거리고 있습니다. 예부터 내려오는 말에 늙으면 죽고 병들면 죽는다는 말이 있지만, 반드시 모두 준거(準據)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죽을 먹고 채소를 씹어도 엿처럼 달게 먹는 형편입니다만, 날이 가물고 바람이 쌀쌀하여 보리가 신명(神明)의 은택을 입지 못하니, 끝내 이 험난한 상황에서 헤어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일상(日常)을 검약하게 생활하는 것에 대해 비록 언급한 글이 있지만, 그것도 고갈되는 지경까지는 아직 이르지 않은 사람을 두고 해야 할 말이지, 이미 극한 지경에 있는 사람에게는 또한 아무 소용이 없고 한바탕 비웃음만 초래할 뿐이라는 것을 알겠으니, 어찌한단 말입니까. 만약 근신(謹愼)하는 훌륭한 선비가 사전에 먼 앞날을 염려한다면 혹시라도 조금의 보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예(禮)에 나라가 사치하면 검소한 것을 보인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세상은 사치와 참람함이 이미 극에 달하였습니다. 빈한한 서민은 눈을 밝게 뜨고 행동을 신중히 하여 서로 패가망신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백순께서 이미 채택하여 쓰기를 원하는데 어찌 보내 드리지 않고자 하겠습니까만, 아직도 날마다 첨삭(添削)하는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여 제 수중에서 빼어 보내 드리기에 합당하지 않으니, 훗날을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편찬하는 일은 반드시 두서(頭緖)가 있어야 세도(世道)를 위해 다행일 것입니다. 무릇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은 갑(甲)이 하지 않으면 을(乙)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찌 옛날과 지금, 남과 자신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한스럽게도 나는 정신이 이미 없어서 함께 상의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닙니다.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에 대해 나도 어떻게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일찍이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습니다. 선비산(鮮卑山)이라는 산이 본래 중국의 동북쪽 변경 바깥에 있습니다. 동호(東胡)의 한 종족이 그 아래 거주하는데, 부락(部落)도 번성하여 선비(鮮卑)라고 이름을 붙인 곳이 매우 많았습니다. 지금 동쪽 변경의 여러 산은 모두가 이 산의 줄기로서, 그중에 가장 동쪽이 바로 우리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인해 조선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구려(高句麗)의 유리왕(琉璃王)이 선비와 전투를 벌였으니,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조(聖朝)에 이르러 처음에 조선과 화령(和寧)으로 국호를 청하였습니다. 화령은 과연 어디를 지칭하는 것일까요? 《고려사(高麗史)》 〈식화지(食貨志)〉를 상고해 보니, 신우(辛禑) 9년(1383)에 태조(太祖)가 안변책(安邊策)을 올려 “동북(東北)의 일도(一道)는 땅이 좁고 척박한데, 화령은 도내(道內)에서 땅이 넓고 비옥하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공양왕(恭讓王) 10에는 동계(東界) 화주(和州) 승격시켜 화령부(和寧府) 삼았으니, 이곳은 바로 영북(嶺北)에서 왕업이 일어난 곳입니다. 공양왕 때에 태조가 공(功)으로 화령백(和寧伯)에 봉해졌습니다. 무릇 국호를 세울 때에 반드시 그 근본을 들어서 국호를 삼기에 그러한 것입니까?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명(明)나라 홍무(洪武, 1368~1398) 초에 천자(天子)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고 하면서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장주(長州), 정주(定州), 고주(高州), 화주(和州)는 본래 개원(開原)에 속하는 지역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곳은 바로 함흥(咸興) 이남의 몇 개 고을입니다. 상고해 보니, 영원현(寧遠縣)은 개원의 서남쪽에 있고, 다시 그 남쪽은 남강(南康)이고, 다시 그 남쪽은 합란부(哈蘭府)이고, 다시 그 남쪽은 쌍성(雙城)입니다. 쌍성은 바로 지금의 북로(北路)의 영흥(永興)입니다. 그 경계가 고려에 근접해 있었으니, 총관(總管) 조휘(趙暉) 일에서 증험할 있습니다.당시에 다행히 박의중(朴宜中) 대처하는 바람에 중지될 있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한 번 일어나야 했던 논의인데, 만약 그렇게 되었더라면 북쪽으로 한 방면은 다시는 우리나라의 소유가 되지 못했을 것이니, 역사를 저술하는 사람이 뜻을 기울여야 할 바입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고려조의 합단(哈丹)과 근세 병자년(1636, 인조14)에 침입한 청(淸)나라의 대병(大兵)은 모두 철령을 통해 침입한 것이니, 저들이 어찌 육진(六鎭)을 통해 돌아서 침입했겠습니까. 지금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의 물은 북쪽으로 압록강에 흘러드는데, 높거나 깊은 험지(險地)가 없으니, 필시 빠른 지름길이 있어서 곧바로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도무지 조사하여 검증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또한 이해해야 합니다.

열수(洌水)는 패수(浿水)와 같이 호칭되니, 간혹 이러한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저탄강(豬灘江)의 벽란정(碧瀾亭)이 매우 명확한 증거입니다. 중국(中國)의 책에서 비록 혼동하여 칭했다 하더라도 본토(本土)에 있는 지명은 마땅히 구별해야 하니, 필시 두 강을 병칭(竝稱)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대동강(大同江)을 패수라고 단정한다면, 당시 사람들이 저탄강을 가리켜 이름이 없다고 여겼겠습니까. 이것은 어떻게 헤아려 보느냐에 달린 문제입니다. 유민(流民)을 남읍(南邑)으로 이주시킨 사실이 다루왕(多婁王) 10년에 보이는데, 고구려에 쫓겨서입니다. 다시 두루 상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삼한(三韓) 이전에 삼남(三南)은 변방이었으므로 기자(箕子)의 나라와는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기준(箕準)에 이르러 마한(馬韓)의 왕을 축출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니, ‘한(韓)’이라는 명칭은 호강왕(虎康王) 이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한(韓)나라가 진(秦)나라와 가장 가까웠으므로 한나라의 백성들이 먼저 움직였으니, 이에 대해서는 《전국책(戰國策)》이 있어 근거할 수 있습니다. 진나라를 피해 오는 사람들은 필시 서하(西河)로부터 중국을 거쳐 심양(瀋陽)과 요령(遼寧)을 둘러서 영남(嶺南)에 들어오지는 못하였을 것이니, 그들이 바다를 곧바로 건너왔을 것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한나라의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어찌 반드시 앞사람이 스스로 이름을 붙인 것을 뒷사람이 따라서 세 나라가 함께 칭하게 될 수가 있었겠습니까. 나의 생각으로는, 장량(張良) 시대에는 삼한을 창해(滄海)라고 칭하였을 것입니다. 장량의 역량은 해외에서도 충분히 일을 주관하였으므로, 때때로 갑자기 튀어나와 철퇴로 시황(秦始皇) 저격하기를 마치 자신의 손아귀에서 희롱하듯이 수행하여 어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아득하여 자세히 상고할 수 없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중국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파악할 안목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백성들도 고정된 사고(思考)의 근원적인 이유를 깨닫지 못하였으니, 생각해 보면 참으로 한바탕 웃음이 나올 만합니다.

이른바 기자(箕子)의 판도(版圖)에 대해서는 자세한 사실을 상고할 수 없습니다. 뒤에 서쪽의 영토 수천 리를 연(燕)나라에 잃었으니, 요령(遼寧)과 심양(瀋陽)이 바로 그 지역 안입니다. 삼국(三國)의 말기에 신라가 그 지역을 제어하지 못하고, 발해로 하여금 그 땅을 차지하여 동쪽으로 바다에까지 세력이 미치다가 뒤에 거란에 멸망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우리나라가 요(遼) 지역을 잃게 된 시말(始末)입니다. 고려의 태조가 요나라의 사신을 막고서 장차 옛 영토를 회복하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상고해 보니, 서희() 소손녕(蕭遜寧)에게 답하기를귀국의 상경(上京) 본래 우리나라의 영토이다.”라고 하니, 소손녕이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요 땅 전체가 본래 순(舜)이 처음 설치한 12주(州) 가운데 들어 있었습니다. 상고해 보니, 유주(幽州) 의무려(醫巫閭)라는 산이 있고 물고기와 소금이 산출되니, 요해(遼海)가 아니고 어디이겠습니까. 단군(檀君)과 기자의 나라가 압록강의 안팎을 차지하여 요순(堯舜)의 교화를 함께 입었고 기자에 이르러 팔조(八條)를 더하였으니, 전해지는 삼조(三條)는 바로 한 고조(漢高祖)의 약법삼장(約法三章)으로, 오륜(五倫)과 합하면 여덟 단락이 되는데, 그 의미는 마치 부절(符節)을 합쳐 놓은 듯이 들어맞는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생각건대, 한(漢)나라의 책략(策略)은 모두 장량이 정한 것인데, 혹시 창해(滄海)에 전해 오는 전통에서 얻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에 대해서는 감히 아직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단군은 요컨대 요순과 같은 시대였고, 순은 동이(東夷)의 사람이었으니, 모두 태평한 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성스럽고 신령한 분이 처음 나오면 반드시 그 소문이 가까이에 자자할 것입니다. 박달나무는 향나무입니다. 그러므로 후인들이 묘향산(妙香山)을 처음 내려온 곳으로 여겼던 것이고, 옛 역사책에는 “신인(神人)이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와서 아들을 낳으니, 단군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최치원(崔致遠) 글을 상고해 보니, 발해가 북쪽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지하였다고 하였으니, 태백산은 요(遼) 땅에 있는 것입니다. 설은 모두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환웅(桓雄)이니 환인(桓因)이니 하는 등의 말은 허황되어, 버려도 됩니다. 그는 결국에 아사달산(阿斯達山)으로 들어갔는데, ‘아사’라는 말은 속어(俗語)로 아홉이라는 의미이고, ‘달’이라는 것은 속어로 달입니다. 구월산(九月山)이 그것에 해당된다고 한다면 거의 옳습니다. 지금 그 산 아래에 당장경(唐莊京)과 삼성사(三聖祠)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전하는 말에, 단군의 세대에 기자를 피하여 여기로 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자는 어질고 성명(聖明)한 인물인데, 어찌 남의 나라를 함부로 점유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필시 저들이 이미 쇠망한 뒤에 황폐해진 옛터를 닦아서 나라를 새로이 열었던 것입니다. 혹자가 단군이 아사달산으로 들어간 때가 바로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이라고 한 것이 이치에 가깝습니다. 단군의 후손도 신(神)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기자의 봉지(封地)는 남기(南箕)의 별자리에 해당합니다. 자(子)는 오등(五等)의 작위 가운데 하나이니, 그가 주(周)나라의 작명(爵命)을 받았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홍범(洪範)〉에 이른 ‘기자’라는 것은 바로 사관(史官)의 기록이니, 아마도 이전에 이미 이렇게 봉해진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기자가 아뢴 〈홍범〉은 바로 〈낙서(洛書)〉를 부연하여 만든 것입니다.〈낙서〉의 자리는 2 8 위치를 바꾸었습니다. 곤(坤)과 간(艮)은 마주 대하여 위로 은하(銀河)에 응합니다. 은하는 본래 회전하는 것인데, 지금 중국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다만 머리인 간에서부터 꼬리인 곤에 이르기까지일 뿐입니다. 간(艮)은 기(箕)와 미(尾)의 별자리에 해당합니다. 지금 압록강 이서(以西)의 물은 모두 간방(艮方)에서 곤방(坤方)으로 흘러 〈홍범〉의 글과 부합하여 그 일이 마치 귀신이 도운 것과 같으니, 매우 기이합니다. 그러므로 순이 유주를 처음 설치한 뒤로 백이(伯夷)가 가서 살았으며, 공자(孔子) 바다로 떠나가고자 하였으니, 동쪽의 노(魯)나라에 뗏목을 띄운다면 지향하는 곳이 기자의 나라가 아니고 어디이겠습니까.

옛날 성인(聖人) 주나라 말기에 태어나 기둥 사이에 앉아 제사를 받는 꿈을 꾸고 나서나는 은나라 사람이다. 지금 천하에 누가 나를 종주(宗主) 받들겠느냐.”라고 하였으니, 근본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조선 사람들이 큰 관(冠)을 쓰고 흰옷을 입는 것을 통해 아직도 은나라의 질박한 유속(遺俗)을 지키는 것을 왕왕 증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하늘의 뜻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일찍이 《시경(詩經)》의 〈도인사(都人士) 시를 읽으면서 띠풀로 만든 갓과 말아 올린 머리털이 마치 동도(東都) 선비와 여자를 보는 듯하였으니, 어찌 아득히 당시를 상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죽은 아들이 생시에 예조(禮曹)에 오래 근무하면서 사신을 접대하는 업무를 관장하였는데, 하루의 책임이라도 다하기를 생각하면서 《접왜역년고(接倭歷年攷)》라는 책을 짓고 자신의 견해를 많이 첨부하였습니다. 그 내용 중에 참으로 채용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본래 여러 동지(同志)에게 부치고자 하였으나, 편지를 전하는 인편에 부칠 만한 것이 아니어서 일단 그만두었습니다. 예부터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한 의론은 대체로 모두 엉성해서 볼만한 것이 없습니다. 역사를 저술할 때에는 천고(千古)의 면모(面貌)을 드러내고 손질하여 더욱 정중하게 표현하되, 진부한 옛 기록을 답습해서는 안 됩니다. 병을 앓은 뒤에 손이 가는 대로 어지러이 써서 말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만, 조용히 살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주-D002] 공양왕(恭讓王) …… 삼았으니 : 공양왕이 재위한 기간은 3년에 불과하였으며, 화주(和州)를 승격시켜 화령부(和寧府)로 삼은 것은 공민왕(恭愍王) 18년(1369)의 일이다. 따라서 ‘공양왕 10년’이라는 말은 잘못이다. 《高麗史 卷58 地理 東界和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