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일식(日食) 132회와 혜성이 지나가거나 떨어진 것은 대부분 《송사(宋史)》, 《원사(元史)》와 부합한다.

2022. 11. 30. 15:52대륙조선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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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집 10 / 잡저(雜著)

사천고론 - 《휘찬여사》 〈천문지〉에서 나왔다 - 〔司天考論 出彙纂麗史天文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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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라. 《서경》 〈요전(堯典)〉에서 사시(四時) 정하고, 〈우공(禹貢)〉에서 구주(九州) 서술하여 천지가 자리를 잡았다. 우리나라가 비록 견문이 좁다고 하지만, 어찌 증거 것이 없다.’고 하겠는가. 지금 반드시 알려고 하는 자가 있을 것이기에 빠뜨릴 수 없어 사천직방고(司天職方考)를 짓는다.

사천(司天)은 일월(日月), 성신(星辰)의 현상을 관측하여 계산하는 일을 담당하는데, 길흉(吉凶)과 재상(災祥)을 관찰하여 점(占)을 치며, 해시계로 그림자를 재고 기후와 월삭(月朔)의 영허(盈虛)를 징험하여 역(曆)으로 삼는다. 역(曆)이란 일상적인 수(數)를 따지는 것이고, 점(占)이란 일상적이지 않는 조짐을 따지는 것이다.

무릇 국가를 다스리는 자가 정월 초하루를 기준으로 세울 때는 반드시 천지(天地)의 원기(元氣)를 근본으로 하고, 정교(政敎)를 시행하여 공과(功過)를 평가할 때는 반드시 그 해를 기준으로 하고, 모든 농사와 온갖 직업에 대해서는 반드시 사시(四時)에 맞추고, 해야 할 여러 일들에 대해선 반드시 일월(日月)을 따른다. 이 때문에 성인이 천명을 받으면 반드시 역수(曆數)로 다스림을 경전에서 볼 수 있지만, 후세에 이르러 그 학문은 한결같이 음양가(陰陽家)에게서 나왔다. 그러나 천지의 운행은 차이가 있어서 그 차이가 매우 미세하지만 끝내는 크게 어긋난다. 그렇기 때문에 역(曆)에 정밀한 중국 사람들도 늘 그 차이를 고민하였는데, 하물며 우리나라의 계산법이 정밀한 역가(曆家)들조차 중국에 훨씬 미치지 못함에랴. 그렇기 때문에 그 법이 더욱 차이가 나니, 이는 잘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고려에서는 별도로 역법(曆法)을 제정하지 않고 당나라의 《선명력(宣明曆)을 받아서 썼다. 《선명력》은 장경(長慶) 연간에 제작된 것으로, 고려 초에는 만든 지 이미 백 년이 지난 뒤였으며, 당나라는 고려에 도입되기 이전에 이미 역법을 개정하여 이로부터 모두 22차례를 고쳤는데도, 고려에서는 그대로 사용하였다. - 가우(嘉祐) 4년(1059) 1월 병신일에 일식이 있었는데, 고려조에서는 병신일이 전년 12월 그믐이니, 그 차이를 알지 못함이 이 정도에 이르렀다. - 충선왕 대에 이르러 원(元)의 《수시력(授時曆)을 바꾸어 사용하였으나, 개방(開方) 방법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교식(交食) 일절(一節)은 여전히 구식인 《선명력》을 따랐다. 이에 일식, 월식을 예보하거나 오차를 보정함이 천시(天時)와 부합하지 않아 천문관(天文官)이 날짜 계산에 실수를 범한 것이 오래되었지만, 고려가 망할 때까지 끝내 고칠 수 없었다.

황도(黃道)를 고찰하고, 그믐과 초하루를 살피며, 운행의 늦고 빠름을 비교한 것은 비록 역경(曆經)에 실려 있지만, 후세의 법으로 삼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우선 생략한다. 저 일월(日月), 오성(五星)의 근접과 침범, 가득 참과 오그라듦, 기후의 조짐(兆朕) 같은 것은 요컨대 너무 아득하고 까마득하여 미루어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길흉(吉凶), 재상(災祥)은 중국과 관련된 것도 있고, 오로지 우리나라에만 해당되는 것도 있으니, 그 학문에 정밀하면 중국의 안위(安危), 성쇠(盛衰)는 앉아서도 알 수 있다. 천하의 근심을 먼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나라가 대응해야 할 바를 미리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부터 하늘이 작은 우리나라를 인애하는 마음을 품어 간절하게 꾸짖는 데까지 또 어찌 소홀하게 여겨 살피지 않을 수 있으랴.

고려 시대에 발생한 일식(日食) 132회와 혜성이 지나가거나 떨어진 것은 대부분 《송사(宋史)》, 《원사(元史)》와 부합한다. 예를 들어 현종(顯宗) 15년(1024) 5월 정해(丁亥)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어야 하는데 일어나지 않았으니, 천성(天聖) 2년(1024) 갑자에 송조(宋朝)에서 여러 신하들이 표문(表文)을 올려 하례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고려 정종(靖宗) 6년(1040) 정월 병진일에 일식이 있자 거란(契丹)에서는 연회를 그만두었고, 송의 황제는 깊이 뉘우쳤으니, 세 나라에서 일월성신의 역법을 추산함은 똑같았다. 공민왕(恭愍王) 2년(1353) 9월 을축 초하루에 원(元)에서 일식을 알려왔으나, 일식이 일어나지 않았다. - 이날 원의 수도〔大都, 연경(燕京)〕에서는 일식이 있었다. -

문종(文宗) 30년(1076) 11월에 혜성이 진수(軫宿) 나타난 것은 송나라 희령(熙寧) 9년으로왕안석(王安石) () 올려 무제(晉武帝) 일을 인용하며 천변은 두려워할 것이 된다고 했다. 숙종 2년(1097) 7월에 화성이 여귀성(輿鬼星)에 들어 간 것은 송나라 소성(紹聖) 4년의 일로, 장돈(章惇) 권력을 멋대로 하고 간신배들이 조정에 가득 찼으므로 태사(太史) 도적이 임금 곁에 있다고 아뢰었다. 6년(1101) 정월 초하루 임술일에 적색의 기운이 동북쪽에서 일어나 서쪽까지 미치자, 점을 쳐보니 ‘요(遼)와 송(宋) 사이에 병상(兵喪)이 있을 조짐이다.’라고 하였고, 임백우(任伯雨) () 올려 오랑캐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날 증거라 했다.

예종 원년(1106) 정월에 혜성이 서남쪽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10자쯤이었다. 《송사(宋史)》에 혜성이 서쪽에 있었고, 길게 하늘 끝까지 닿았다.’라고 했는데, 변경(汴京) 서쪽이 송도(松都)의 서남쪽이기 때문이다. 5년(1110) 6월에 혜성이 자미원(紫微垣)으로 들어갔을 장상영(張商英) 재상에 임명하자 혜성이 사라지고 비가 왔다. 충렬왕 19년(1293) 10월에 혜성이 태미원(太微垣) 왼쪽 액문(掖門)에 나타났으며 길이는 1자 5치쯤이었는데, 《원사(元史)》에 혜성이 자미원으로 들어가 북두칠성에 닿았으며 빛줄기가 1 남짓이라고 기록하였으니, 우리나라에서는 비스듬히 바라보이기 때문이다. 비록 북두칠성과 액문(掖門)을 잘못 구분하였지만, 송도(松都)와 연경(燕京)은 거리가 가깝고 분야(分野)가 같기 때문에 관찰한 자수(尺數)가 매우 비슷했으며, 변경(汴京)과 송도는 조금 멀기 때문에 장단(長短)에 차이가 있었다.

송이 남쪽으로 천도한 이후에 일식과 별의 변괴가 대부분 서로 상응하지 않음은 바다로 만 리나 떨어져 있어 별이 담당하는 범위가 아주 멀어서 그런 것인가? 하늘의 형세는 오르내림이 있는데 시력이 미치지 못해서인가? 아니면 역법에 심한 차이가 있어 추산함이 정밀하지 못해서인가? - 나중에 살펴보니, 남송 이종(理宗) 말년의 혜성과 도종(度宗) 대의 일식은 《고려사》와 합치되었다. -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추산할 수 있는 해와 별의 근접과 온 세상 사람들이 함께 혜성을 본 것은 그 길흉(吉凶)ㆍ선악이 오로지 우리나라에만 해당되지 않음이 분명하다. 햇무리ㆍ요상한 기운ㆍ모든 기후의 조짐ㆍ태백성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현상과 유성(流星) 같은 것은 각 나라마다 있다. 예를 들어 적색 햇무리가 있은 숙종(肅宗) 반란을 모의했으며낭성(狼星) 나타나고서 정중부(鄭仲夫) 난을 도모한 것이니, 이런 유들은 또 다 기록할 수 없다.

이른바 ‘하늘의 뜻이 우리 작은 나라를 꾸짖는다.’라고 하였으니, 왕 노릇하는 자는 더욱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덕을 닦아야 마땅하다. 우리나라에는 별을 보고 점을 치는 사람이나 예언서를 신묘하게 풀이하는 술사(術士)들도 분야(分野)를 확인하여 피차가 어디에 속하는지를 아는 자가 본래 없었기 때문에, 대개 재앙이 있으면 임금의 생각을 앞질러 생각하여 과오에 빠지게 하거나 말을 숨기는 자는 일체 다른 나라에 핑계를 대고, 화란을 일으킬 마음을 감춘 자는 경험해보지도 못한 말을 과장하여 백성들의 귀를 격동시켰으니, 이는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고종 조에 《명종실록(明宗實錄)》을 편찬할 때 상서(尙書) 권경중(權敬中)이 위술(緯術)에 두루 잘 알았는데, 논의가 핵심을 가장 끄집어냈기 때문에 그의 저술을 덧붙였다고 한다. 그가 말하기를,

 

신이 삼가 《춘추》를 살펴보니, 일식은 기록하였지만 월식은 기록하지 않음은 아마도 태양은 꽉 차 있어서 빛을 기다리지 않고도 밝기에 군주를 상징하고, 달은 차츰 이지러지므로 빛을 받아야 밝기에 신하의 상징하기에 양(陽)이 이지러지면 변괴(變怪)가 되지만 달이 이지러지면 꺼릴 것이 없어서일 것입니다. 정미년(1187, 명종17) 7월의 일식은 그날에 바로 징험이 있었으니, 조원정(曺元正), 석린(石隣) 무리가 밤중에 궁궐을 침범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음(陰)이 양(陽)을 침범한 것으로, 신하가 임금을 범한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노 소공(魯昭公) 24년 5월에 일식이 있자 재신(梓愼)은 “수재가 날 것이다.”라고 했고, 소자(昭子)는 “가뭄이 들겠구나. 해가 춘분을 지났는데도 양(陽)이 여전히 음을 이기지 못하고 있도다. 이기면 반드시 심할 것이니, 가뭄이 없겠는가. 양이 음을 이기지 못함은 양이 쌓여서 모이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는데, 이 해에 과연 가뭄이 들었습니다. 이를 설명하는 자들은 “하지와 동지, 춘분과 추분에는 일식이 있어도 재앙이 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태양과 달이 운행할 때 춘분과 추분은 밤낮의 길이가 같고 궤도도 같아 일식이 있어도 가벼우면서 재앙이 되지 않고 홍수나 가뭄이 들 뿐이다. 기유년 2월의 일식도 춘분에 있었기 때문에 윤5월에 이르러서 가물었으니, 이는 그 징험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태양이 적색이 옅어져서 빛을 잃는 것, 해 곁에 배기(背氣)가 있는 것, 바깥은 적색이고 안은 황색인 것, 해의 동쪽과 서쪽에 고리〔珥〕가 있는 현상에 대해 《한서〔前漢書〕》를 살펴보니 태양 곁에 있는 () 중에 똑바로 대한 것을 () 하고, 태양을 향하는 것은 () 하고, 밖을 향하는 것은 ()이다. 배란 등진 형상이며, 기가 가서 압박하면 옅어진다.”라고 했습니다. 《진서(晉書)》에는 군주가 덕이 없고, 신하가 나라를 어지럽히면, 태양이 적색이 되고 빛을 잃는다.”라고 했으니, 하늘이 꾸짖어 경고함이 어찌 간절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조원정과 석린을 제거하였으나, 다시 동남쪽에서 난이 일어났기 때문에 꾸짖어 경고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이런 때에 깨닫고 뉘우친다면 어찌 아름답게 끝을 맺는 조짐이 아니겠습니까.

달이 묘성(昴星)을 가린 것, 달이 심성(心星)을 가린 것, 달이 심성의 앞별에 근접한 것, 달이 심성의 뒷별을 가린 것, 달이 심성을 관통하여 지나가는 현상에 대해 성전(星傳)을 살펴보니 “중국에 형벌이 알맞지 않은 일이 있기에 오랑캐 병사가 도읍을 짓밟고, 그 영향이 외국에도 미친다. 천왕(天王)이 자리를 잃으면 적서(嫡庶) 자손들이 뿔뿔이 흩어져 구원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벌로써 하늘의 뜻을 보인 것이 이처럼 많습니다.

세성(歲星)이 집법성(執法星)에 근접한 것, 태백성(太白星)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것, 형혹성(熒惑星)이 진성(鎭星)에 근접한 것, 진성(辰星)이 방성(房星)의 동쪽에 나타난 현상에 대해 천문지(天文志)에 보니, ‘인(仁)이 이지러져 체모를 잃으면, 벌(罰)로써 세성에 나타난다. 의(義)가 이지러져 말에 실수가 있으면, 벌로써 태백성에 나타난다. 예(禮)가 이지러져 보는 것에 잘못이 있으면, 벌로써 형혹성에 나타난다. 지(智)가 이지러져 듣는 것에 잘못이 있으면, 벌로써 진성에 나타난다.’라고 했습니다. 인ㆍ의ㆍ예ㆍ지(仁義禮智)는 신(信)을 위주로 하고, 체모ㆍ말ㆍ보기ㆍ듣기는 마음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네 별이 모두 잘못되어야 진성(鎭星)이 비로소 움직이니, 오성(五星)의 반응이 대개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인ㆍ의ㆍ예ㆍ지의 이지러짐과 체모ㆍ말ㆍ보기ㆍ듣기의 잘못은 과연 누구를 위해 말한 것이겠습니까? 장차 천하에 임금 노릇을 하는 자들을 위해 응하는 것이겠습니까? 한 나라를 천단(擅斷)하는 자들을 위해 응하는 것이겠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성전(星傳)에 달이 오성(五星) 가리면 나라가 모두 망한다.”라고 했는데, 그 나라란 분야(分野)의 나라입니다. 지금 분야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그 응함을 따질 수 없습니다.

또 성전에서 말하기를 태백성이 하늘을 가로지르면 천하에 혁명이 있어 백성들이 군주를 바꾼다.”라고 했는데, 모든 오성(五星)의 변괴(變怪)는 대부분 중국에 속하지 전적으로 우리나라〔고려〕의 변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氣)의 변괴에 대해 《주례(周禮)》에는 붉고 요상한 기운이라 했는데, 이것은 바로 근심의 기운이 반응한 것으로, 이때는 반드시 나라에 근심이 있어 반란을 모의했을 것입니다. 《진서(晉書)》에  무지개는 여러 재앙의 근본으로, 무지개에 안개가 끼면 간신들이 임금을 해치려 모의하는 것이고, 밤에 안개가 끼고 무지개가 나타나면 신하에게 근심이 있으며, 낮에 안개가 끼고 무지개가 있으면 임금에게 근심이 있다.”라고 했으니, 이것을 거울삼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나무〔木〕의 변괴(變怪)에 대해서 () 이르기를함부로 요역(徭役) 일으켜 백성들이 농사지을 때를 빼앗으면, () 성질을 잃어 변괴(變怪) 된다.”라고 했습니다. 성공(魯成公) 16 정월에 비가 와서 나무가 얼었는데, 유향(劉向)얼음은 () 왕성하여 물이 엉켜서 것이고, 나무는 () 적으므로 귀한 신하와 경대부의 형상이다. 사람들이 해를 입으려고 하면, 음기(陰氣) 나무를 위협하여 나무가 먼저 춥기 때문에 비를 맞고 언다.”라고 했습니다. 혹자는 “나무의 얼음을 딱딱한 껍질이라고 하는데, 딱딱한 껍질이란 갑옷이고, 갑옷은 전쟁의 상징이다.”라고 했습니다. 밤〔栗〕은 북방의 열매로 벌레가 잎을 먹으면 북방의 신하가 비방과 참소를 당하는 근심이 있고, 기둥에 벼락이 치는 것은 중요 직책을 맡은 신하가 흔들릴 흉조입니다.

불〔火〕의 변괴(變怪)에 대해서 전(傳)에 이르기를 “법률을 버리고 첩(妾)을 처(妻)로 삼으면, 불이 붙더라도 불꽃이 위로 올라가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그 설(說)에서는 “불은 남방에 해당하며 빛을 비춰 밝힘은 그것이 왕 노릇을 하는 이가 남쪽을 향해 밝은 데로 앉아서 다스리는 형상이다. 혹 빛나는 것이 헛되고 거짓되면 참소하는 이들이 창성하고, 간사한 자들이 올바른 이들을 이기니, 불이 그 성질을 잃어 재앙이 된다.”라고 했습니다. 명종(明宗)이 일찍 중전을 잃자 일곱 후궁들이 총애를 다투었고, 여자들이 궁궐 안을 어지럽혀 비밀이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추밀원(樞密院)에 불을 내려 꾸짖음을 보였습니다.

물〔水〕의 변괴에 대해서 () 이르기를종묘를 소홀히 하고, 사당에 기도하지 않으며, 제사를 폐하고, 천시(天時) 거스르면 물이 아래로 흘러 만물을 적시지 못해 본성을 잃는다.”라고 했습니다. ()에서는물은 북방에 해당하며 만물을 완성하고 갈무리한다. 노릇 이가 즉위하면 반드시 교외(郊外)에서 천지에 제사 지내고, 산천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내 모든 ()들을 회유(懷柔)했는데, 이는 음양을 순조롭게 하고 신과 사람을 화합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명종이 사시(四時) 제향을 몸소 시행하려 하지 않는 것이 여러 해가 되었기에 당연히 물로 인한 재앙이 있었다.

 

라고 했다.

기타 금석(金石)이나 조수(鳥獸)의 변괴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대저 세상이 잘 다스려지면 하늘의 변괴(變怪)는 적어지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하늘의 변괴(變怪)가 빈번합니다. 도가 훌륭한 임금은 하늘의 뜻으로 사람을 다스리는데, 덕이 쇠한 연후에 하늘이 또한 허물을 꾸짖고 경고합니다. 혹 천하를 다스리는 자에게는 천문 기상을 보이기도 하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자에게는 경계를 보이기도 하니, 천하와 국가를 소유한 자가 거울삼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구양자(歐陽子)가 말하기를 “《춘추》에서는 비록 일식이나 별의 변괴(變怪) 같은 유를 기록하였으나, 공자는 일찍이 그렇게 된 까닭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들이 후세에 이어서 서술할 수가 없었다. 성인이 죽고 난 뒤에 이단(異端)이 일어났는데, 진ㆍ한(秦漢) 이후로 학자들이 재이(災異)에 현혹되어 천문(天文)ㆍ오행(五行)에 대한 설이 대단히 번잡하였다. 《서경》에 이르기를 하늘이 보는 것은 우리 백성의 보는 것을 통해서 보며, 하늘의 들음은 우리 백성이 듣는 것을 통해서 듣는다.’라고 했으니, 인심(人心)이 아래에서 기뻐하는데 하늘의 뜻이 위에서 노하는 경우도 없고, 사람의 도리가 아래에서 거슬려지는데 하늘의 뜻이 위에서 순조로운 경우도 없다. 그런즉 왕 노릇하는 자는 천하의 임금이 되어 백성들을 자식처럼 돌보며, 덕을 베풀고 정사를 펴서 인심을 순하게 해야 하니, 이것을 일러 ‘하늘을 받든다.’고 한다. 삼신〔三辰, 해ㆍ달ㆍ별〕과 오성(五星)은 늘 움직이며 쉼이 없어서 차고 오그라들며 차질이 생기고 어긋나는 변괴(變怪)가 없을 수 없으니, 점치는 것이 맞기도 하고 맞지 않기도 하여 일정할 수 없기에 유사(有司)가 이 일을 담당한다.”라고 했다.

삼가 이 설을 살펴보니, 진실로 유자(儒者)의 논의로 터득한 것이다. 그러나 주자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저술하면서 하늘의 변괴에 대해서도 번번이 조심스럽게 기록하였으니, 또한 《춘추》를 기록한 의도와 같다. 대저 역사책은 천도(天道)를 받들어 짓는 것이니, 어찌 전적으로 유사(有司)들만의 일이 되겠는가. 대개 우리나라의 풍속은 천문 관찰을 천한 기예(技藝)로 여겨 사대부 중에 배우고 익히는 자가 전혀 없어 책에 수록된 것이 단지 지리멸렬하니, 매우 한스럽다.

권상서(權尙書) 어려서 벽곡(辟穀) 하고 신선술을 배웠는데, 이규보(李奎報) 시를 지어 이것을 꾸짖었다. 그러나 권상서는 스스로 맑게 수양하고 욕심을 적게 하여 도 있는 사람과 유사해졌기 때문에 그의 논의는 자못 탁월하고 그의 견해는 다른 사람이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태음(太陰 북극성)이 심성(心星)을 관통한 것을 보고 점을 쳐서 중국에 변괴가 있음을 헤아린 것은 또한 이치가 있었다. 명종 19년(1189)은 바로 송 효종(宋孝宗)이 광종(光宗)에게 선위(禪位)한 때로, 부자(父子)의 변(變)이 ‘극에 달했다.’고 할 수 있기에 이른바 천왕(天王) 자리를 잃으면, 적자와 서자가 모두 흩어진다.’라고 함은 ‘암암리에 부합된다.’고 하겠다. 이때는 송과의 관계가 끊어진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권공(權公)은 단지 그에 대한 상세한 것을 듣지 못했을 뿐이다.

구문장(丘文莊)이 말하기를 ‘자미성(紫微星)ㆍ북극성은 나라 밖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이것으로 권공의 말이 더욱 믿을 만함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심성(心星)은 동방에 있는 별자리 중에 하나이고, 세성(歲星)은 동방의 중심이 되는 별인데도 권공은 ‘모두 중국에 속해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또한 통론(通論)이 아니다. 아, 천도(天道)는 심원하다. 배움이 정밀하지 못하면 잘못되어 재이(災異)가 되니, 마땅히 구양수의 설을 옳다고 여겨야 할 것이다.

[-D001] 서경(書經) …… 잡았다 : 

《서경》 〈요전(堯典)〉에, “이에 역관 희씨와 화씨에게 명하여 하늘을 공경히 따라서 해와 달과 별자리를 기록하고 관찰하여 백성의 농사철을 공경히 내려 주게 하셨다.〔乃命羲和 欽若昊天 曆象日月星辰 敬授人時〕”라는 말이 있고, 《서경》 서(序)에, “우는 구주를 구별하여 산을 따라 냇물을 깊이 파고 토질에 맞추어 공물을 내게 했다.〔禹別九州 隨山濬川 任土作貢〕”라는 말이 있다.

[-D002] 증거 …… 없다 : 

공자가 “하 나라의 예를 내가 말할 수 있지만 하 나라의 후예인 기 나라가 내 말을 증거 댈 만하지 못하고, 은 나라의 예를 내가 말할 수 있지만 은 나라의 후예인 송나라가 내 말을 증거 댈 만하지 못하다. 그것은 문헌이 부족함 때문이니, 문헌이 넉넉하다면 내가 내 말을 증거 댈 수 있을 것이다.〔夏禮吾能言之 杞不足徵也 殷禮吾能言之 宋不足徵也 文獻不足故也 足則吾能徵之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八佾》

[-D003] 선명력(宣明曆) : 

중국 당대(唐代)에 서앙(徐昻)이 만든 역법으로, 822년 당나라에 채택되어 892년까지 사용되었다. 우리나라는 신라 말기에 도입되어 고려 충선왕(忠宣王, 재위 1309~1313) 때까지 이 역법을 썼다.

[-D004] 장경(長慶) : 

당나라 목종(穆宗)의 연호로 821년~824년이다.

[-D005] 가우(嘉祐) : 

송나라 도종(道宗)의 연호로 1056년~1063년이다.

[-D006] 수시력(授時曆) : 

원 세조(世祖) 18년(1281)에 허형(許衡) 등이 편찬한 역법이다.

[-D007] 개방(開方) 방법 : 

정방형을 계산하거나 제곱근, 세제곱근 등을 계산하는 방법을 가리킨다.

[-D008] 교식(交食) : 

일식과 월식을 일컫는 말로, 황도(黃道)와 백도(白道)의 교차점에서 일식과 월식이 생기기 때문에 교식이라고 한다.

[-D009] 고려에서는 …… 없었다 : 

《고려사》 권47 〈천문(天文) 1〉에서 인용하였다.

[-D010] 천하의 …… 마음 : 

이 말은 송(宋)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옛날의 인자(仁者)는 “천하의 근심을 남보다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남보다 나중에 즐거워했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고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D011] 천성(天聖) : 

송 인종(宋仁宗)의 연호로 1022년~1031년이다.

[-D012] 진수(軫宿) …… 9년으로 : 

진수(軫宿)는 28수(宿) 가운데 남쪽의 일곱 번째 별자리이다. 희령(熙寧)은 송 신종(神宗)의 연호이다.

[-D013] 왕안석(王安石) …… 했다 : 

왕안석이 송 인종(宋仁宗)에게 상소하기를, 진 무제 5년에 혜성이 진수(軫宿)에 나타나고, 10년에 패성(孛星)이 출현한 사실이 있는데, 천변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 사실이 《자치통감후편(自治通鑑後編)》 권82 송기(宋紀)82 인종황제 조에 보인다.

[-D014] 장돈(章惇) …… 아뢰었다 : 

장돈의 자는 자후(子厚)이며, 왕안석(王安石)의 사위로 왕안석이 그를 좋아하여 편수삼사 조례관(編修三司條例官)을 삼았다. 철종이 그에게 추밀원사(樞密院事)를 맡도록 하자, 유지(劉摯)와 소철(蘇轍)이 돌아가며 탄핵하였다. 고 태후(高太后)가 죽자 돈은 상서 좌복야 겸문하시랑(尙書左僕射兼門下侍郞)이 되어 자기 당파인 채경(蔡京), 채변(蔡卞) 등을 끌어들여 희풍(熙豊) 때의 정치를 회복하고, 원우(元佑) 때의 당인(黨人)들을 배척하였다. 본문의 내용은 《송사(宋史)》 권21 천문지(天文志) 제4에 보인다.

[-D015] 임백우(任伯雨) …… 했다 : 

임백우의 자는 덕옹(德翁), 시호는 충민(忠敏)이다. 경술(經術)에 밝았다. 《宋元學案 卷99》 임백우가 올린 상소의 내용은 《송명신주의(宋名臣奏議)》 권45 천도문(天道門) 〈상휘종논월운위묘필(上徽宗論月暈圍昴畢)〉참고.

[-D016] 혜성이 …… 닿았다 : 

이 말은 《송사(宋史)》 권487 〈채경열전(蔡京列傳)〉에 보인다.

[-D017] 변경(汴京) : 

북송의 도읍으로, 오늘날의 하남성 개봉부(開封府)에 속한다.

[-D018] 혜성이 …… 왔다 : 

여기서 자미원(紫薇垣)은 중국 천문학(天文學)에서 나눈 3원(三垣), 28수(二十八宿) 가운데 하나이다. 북극에 있어 소웅좌(小熊座)를 중심으로 약 170개의 별로 이루어졌다. 송(宋)나라 휘종(徽宗) 때에 날이 몹시 가물고, 혜성(彗星)이 갑자기 나타난 적이 있었는데, 장상영(張商英)을 재상으로 임명하자, 혜성이 그날 밤 즉시 사라지고, 그 다음날 비가 내렸다고 한다. 장상영(張商英)은 자(字)가 천각(天覺)이고, 호는 무진거사(無盡居士)이다. 《宋史 卷351 張商英列傳》

[-D019] 액문(掖門) : 

태미원(太微垣)에 있는 별 이름이다. 태미원은 사자좌(獅子座)의 서쪽 끝부분의 10성(星)에 해당하는 별자리로서 천자의 궁정(宮廷)이나 오제(五帝)의 자리 등을 상징한다.

[-D020] 혜성이 …… 남짓 : 

이 말은 《원사(元史)》 권487 〈천문(天文)〉에 보인다.

[-D021] 분야(分野) : 

중국 전국 시대에 생겨난 개념으로 중국 전토(全土)를 12성차(星次)와 28수(宿)에 분속시켜 나눈 지역을 가리킨다.

[-D022] 적색 …… 모의했으며 : 

고려 숙종은 문종의 셋째 아들로 조카인 헌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고려사절요》 권6 헌종공상대왕(獻宗恭殤大王) 을해 원년에 “봄 정월 무술일에 북풍이 건방(乾方)에서 불어 오고 햇무리〔日暈〕가 있었으며, 해의 양쪽 곁에 혜성(彗星)이 있었다.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새해 첫날에 바람이 건방에서 불어 오니 마땅히 근심이 있겠고, 해에 혜성이 있음은 근신이 난을 일으킬 징조이니 제후(諸侯) 중에 모반하고자 하는 자가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왕은 어려서 수성(修省)할 줄 모르고 다만 내의(內醫) 3, 4명을 인견하여 의학의 방서(方書)를 토론하고 때로는 서화를 익힐 뿐이었다.〔春正月戊戌朔 風從乾來 日有暈 兩傍有彗 太史奏 元日風從乾來 當有憂 日有彗 近臣亂 諸侯 欲有反者 王幼 不知修省 只引內醫三四人 討問方書 或時習書畫而已〕”라는 기록이 있다.

[-D023] 낭성(狼星) …… 것이니 : 

낭성은 천랑성(天狼星)의 준말로, 반란이나 전쟁을 상징하는 불길한 별이름이다. 낭성의 출현과 정중부가 난을 도모한 것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19 세가(世家)19 의종(毅宗) 24년 2월 갑신에 상세하다.

[-D024] 임금의 …… 하거나 :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임금의 잘못을 막지 못하고 그대로 따르는 것은 그 죄가 그래도 작다 하겠지만, 임금이 잘못을 저지르기도 전에 미리 그 길로 인도하는 것은 그 죄가 크다.〔長君之惡 其罪小 逢君之惡 其罪大〕”하였다.

[-D025] 권경중(權敬中) :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고종 때 상서 예부시랑 지제고(尙書禮部侍郞知制誥)가 되고, 《명종실록》을 편찬할 때 연도를 분담하여 집필하였다.

[-D026] 조원정(曺元正) …… 침범하였습니다 : 

조원정(?~1187)은 평민 출신으로 1170년 무신란 때 이의방(李義方)을 도운 공으로 정6품의 낭장(郎將)이 되었다. 1187년 문극겸(文克謙), 최세보(崔世輔) 등의 탄핵을 받고 공부상서로 치사(致仕)했다. 이에 이들에게 원한을 품고 석린(石隣), 주적(朱迪) 등과 모의한 후 가신(家臣) 고령문(高令文), 임춘간(林椿幹) 등을 시켜 밤중에 궁궐에 침입하여 추밀원사(樞密院使) 양익경(梁翼京) 등을 죽이게 하고, 왕에게는 두경승(杜景升), 문적(文迪)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무고했다. 그러나 고령문이 문초를 당하고 사실대로 자백함으로써 가산을 몰수당하고 살해되었다. 《高麗史 世家 卷20 明宗 2年》

[-D027] 태양 …… 옅어진다 : 

왕사정(王士禎)의 《거이록(居易錄)》에 본문을 인용하면서 ‘《한서》의 주석〔漢書注〕’이라고 했는데, 정확한 내용은 미상이다.

[-D028] 군주가 …… 잃는다 : 

이 말은 《진서(晉書)》 권12 〈칠요(七曜)〉에 보인다.

[-D029] 성전(星傳) : 

《한서》, 《후한서》, 《진서》의 오행지(五行志)를 가리킨다.

[-D030] 달이 …… 망한다 : 

이 말은 《한서(漢書)》 권26 〈천문지(天文志)〉에 보인다.

[-D031] 태백성이 …… 바꾼다 : 

이 말은 《한서(漢書)》 권26 〈천문지(天文志)〉에 보인다.

[-D032] 붉고 요상한 기운 : 

《주례(周禮)》 춘관종백(春官宗伯)에 ‘저침(眡祲)’을 설명하면서《춘추》 재신(梓愼)이 “나는 붉고 검은 요상한 기운을 보았다.〔吾見赤黑之祲〕”라는 말을 인용하여 저침이 재상(災祥)을 관찰하는 직무임을 나타내었다.

[-D033] …… 있다 : 

이 말은 《진서(晉書)》 권12 〈칠요(七曜)〉에 보인다.

[-D034] () …… 했습니다 : 

이 말은 《한서(漢書)》 권27 〈오행지(五行志)〉에 보인다. 유향(劉向, B.C77~6)은 전한(前漢) 때의 정치가로 음양재이설(陰陽災異說) 등을 주장했으며, 《홍범오행전(洪範五行傳)》등을 편찬하였다.

[-D035] () …… 것이다 : 

이 말은 《한서》 권27 〈오행지〉에 보이는데, 전(傳)의 출전은 확실하지 않다.

[-D036] 명종이 …… 있었다 :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휘찬여사(彙纂麗史)》 권8 〈오행지(五行志)〉 참고.

[-D037] 그가 …… 했다 : 

이 부분은 《고려사(高麗史)》 권101 열전(列傳)14 〈권경중(權敬仲)〉에서 인용하였다.

[-D038] 하늘이 …… 듣는다 : 

이 말은 《서경》 〈태서(泰誓)〉에 보인다.

[-D039] 구양자(歐陽子) …… 담당한다 : 

구양자는 북송 때의 학자 구양수(歐陽脩, 1007~1072)를 가리킨다. 본문은 구양수가 편찬한 《오대사(五代史)》 〈사천고(司天考)〉에서 인용하였다.

[-D040] 권상서(權尙書) …… 꾸짖었다 : 

권상서는 앞서 말한 권경중이다. 벽곡은 익힌 음식을 먹지 않고 생식(生食)만 하거나, 음식을 끊고 이슬 또는 약물 복용으로 영생(永生)을 꾀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규보(1168~1241)가 지은 시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14 〈시랑(侍郞) 이미수(李眉叟)가 박사(博士) 권경중의 벽곡을 나무란 시운에 차하다 3수〔次韻李侍郎眉叟寄權博士敬仲責辟糓三首〕〉에 보인다.

[-D041] 천왕(天王) …… 흩어진다 : 

《고려사(高麗史)》 권101 〈권경중(權敬仲)〉에 “이에 근거하여 중국에서 어떤 형벌을 부당하게 처결한 일로 인하여 호병(胡兵)이 중국의 수도를 유린하고 그 여파가 외국에까지 미치게 될 것을 말한다. 또 천왕(天王 심성)이 자기의 위치를 잃어서 왕실의 적계(嫡系), 서계(庶系)의 자손들이 산산이 유리되어 부진 상태에 빠지게 된다.〔據此而言 上國當有因刑罰失中之事 胡兵踐蹂天街 波及於外 又且天王失位 而嫡庶子孫蕩析不振者〕”라는 말이 있다.

[-D042] 구문장(丘文莊) : 

시호가 문장인 명대의 학자 구준(丘濬, 1418~1495)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