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4. 16:11ㆍ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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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 제8권 / 인사문(人事門)
차한일기(車漢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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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孝宗) 9년에 중국(中國 청(淸) 나라)이 우리에게 군사를 동원하여 중국을 도와 차한(車漢)을 치라 하였으니, 차한은 나선(羅禪)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는 혜산첨사(惠山僉使) 신류(申瀏)를 북우후(北虞候)에 이배(移拜)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싸움터로 가게 하였다.
이에 앞서 왈개(曰介)ㆍ개부락(介夫落)ㆍ퍅개(愎介) 등 세 나라가 조공(朝貢)을 바치지 않자, 청(淸) 나라에서 문죄(問罪)하니, 세 나라는 모두 말하기를 “소방(小邦 자기 나라를 낮추어 말하는 것)이 차한의 침략을 받아 난리를 구제하기에도 겨를이 없어서이지 어찌 다른 생각을 두겠습니까? 대국이 위엄을 보여 차한을 섬멸한다면, 대국은 소방을 구제하신 은혜가 있게 되고 소방은 사대(事大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의 정성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청 나라에서는 해마다 군사를 출동시켜 차한을 토벌하였으나, 번번이 차한에게 패하였다. 그러자 갑오년에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군사를 출동시키라 하였으므로, 우리나라에서는 북우후 변업(邊岋)을 장수로 삼아 총수(銃手) 1백 명과 기고(旗鼓)ㆍ화정(火丁) 48명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후통강(厚通江)에서 적을 만난 우리 군사는 많은 적을 사살(射殺)하고 호통(好通)ㆍ골지(骨地)까지 추격하매 적은 멀리 도망쳤으며, 변업은 한 명의 군사도 잃지 않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북변(北邊) 9읍(邑)의 총수 2백 명과 표하(標下)ㆍ기수(旗手)ㆍ화정 60명을 선발하여 3개월의 군량을 가지고 앞서 가게 하였다.
무술년 봄 3월 1일에는 두만강(豆滿江)을, 13일에는 어제강(魚濟江)을 건너고, 16일에는 모단강(毛段江)을 거쳐 19일에 영고탑(靈古塔)에 당도하였다. 영고탑까지 지나온 길은 숲이 하늘을 가렸으며, 인적(人迹)이 미치지 않아 사슴이 떼를 이루고 물고기가 사람을 피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잡아 군사를 배불리 먹였다. 영고탑은 성이 높고 호(濠)가 깊으며, 인구(人口)가 많고 가축(家蓄)이 들에 가득한데, 농지(農地)는 성 10리 밖에 있다.
후통강에 이르니, 강의 너비가 10여 리나 되었다. 또 10여 일 만에 몽고(蒙古)를 거쳐 4월 19일에 가리강(加里江)을 건너서 금천강(金泉江)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만리장성(萬里長城)까지 엿새 길이라고 한다. 퍅개(愎介)를 지났는데 그 나라 풍속(風俗)은 남녀가 같은 옷을 입기 때문에 수염으로 남녀를 구별한다. 5월 5일에는 왈개국(曰介國)에 도착하였는데, 이 나라는 본래 청(淸) 나라의 일종(一種)으로서 청 나라와 종족이 흡사하였다. 15일에는 송가라강(宋加羅江)에 도착하였다. 이 강은 흑룡강(黑龍江)과 합류(合流)하는데, 이 강이 바로 차한이 왕래(往來)하는 요충(要衝)이다. 차한은 배를 주택(住宅)으로 삼아, 농사와 길쌈을 하지 않고 노략질로 생업(生業)을 삼는 무리여서, 수전(水戰)이 아니고는 제압할 수가 없으므로, 전함(戰艦)이 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린 지 8일 만에 전함이 왔는데 큰 것은 길이가 50장(丈)이나 되고 작은 것도 길이가 13장은 되며 높이도 3~4장은 되는데, 내부(內部)를 3층(層)으로 만들고 판자(板子)로 칸막이를 하여, 하층에는 군량을 저장했고 중층에는 무기를 간직하였으며, 상층은 5백 명을 수용(收容)할 수 있었다. 전함마다 작은 배 5척을 거느렸는데, 매우 정교하게 제작되었다. 왈개의 군사가 길이가 5장이나 되는 큰 물고기를 잡았는데, 그 반으로 우리 군사들을 배불리 먹였다.
청 나라 원수(元帥)는 왈개ㆍ개부락ㆍ퍅개와 몽고의 군사를 거느리고, 6월 5일에 배를 출발하여 10일에 흑룡강에 도착하였다. 흑룡강은 너비가 2십여 리나 되고 깊이를 알 수 없으며, 빛깔은 숯처럼 검고 물 속의 고기와 강가에 짐승도 모두 검다. 사람들은 “송가라강은 만리장성 밖에서부터 흘러온다.”고 한다.
10일에는 적이 흑룡강 하류로부터 오다가 청 나라 군사를 바라보고 깜짝 놀라 일자(一字)로 나열하여 반(半)은 육지로 올라가서, 수륙(水陸)으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었다. 청 나라 원수가 군사를 놓아 두 번째로 적을 시험하게 하자, 적은 일제히 총탄을 퍼부어 과반수를 죽이거나 부상시켰다. 청 나라 원수는 우리의 부장(副將) 배시황(裵是熀)의 계책을 사용하여, 큰 배로 해상(海上)의 적이 육지의 적과 통과하는 길을 차단하고 철책(鐵柵)으로 성을 만들어, 수륙의 적이 서로 구원할 수 없게 한 다음 먼저 섬[島]의 적을 섬멸하였는데, 북군(北軍 중국 군대)도 많은 사상자(死傷者)를 냈다. 다시 전진하여 해상의 적을 공격하였으나, 전황(戰況)이 불리하여 5일 동안을 서로 버티게 되자, 사기(士氣)가 매우 떨어지게 되었다. 이때 우리는 화공(火攻)의 계책으로 청 나라 원수를 설득하였으나 원수는 적이 가지고 있는 화물(貨物)을 탐하여 듣지 않다가, 궁지에 몰린 뒤에야 허락하고 배시황ㆍ유응천(劉應天)에게 겹으로 된 갑옷을 입고 흐름을 따라 가게 하였다. 배시황ㆍ유응천은 서로 이르기를 “적선(賊船)은 모두 자작나무 껍질로 겹겹이 덮었으며 화약을 많이 싣고 있으니, 화전(火箭 불을 붙여 쏘는 화살)을 쏜 뒤에 빨리 피하지 않으면 사나운 불꽃에 타서 죽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적은 이 두 사람이 오는 것을 보았으나, 의병(疑兵)이라 생각하여 치려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탄 배는 적선에 가까이 다가가서 적선에 화전을 쏘매 일시에 불이 일어 배가 타니, 폭약이 터지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두 사람은 배를 돌려 급히 도망치다가 경황중에 서로 헤어졌다. 10여 리를 도망쳐왔는데도 파도는 여전히 높고 배는 기우뚱거리며, 전포(戰袍)는 다 젖고 바다에는 연기가 자욱하여, 꼭 죽을 것으로만 생각했더니, 한나절이 지나자 바람이 자고 파도가 멎으니, 마치 동녘이 밝아오듯 살 희망이 보였다. 며칠 만에 대군(大軍)이 있는 곳에 당도하니, 청 나라 원수 연(延)은 “사나운 파도가 갑자기 일기에 나는 너희들이 죽은 줄 알았다.”고 하였다. 그 다음 날 배를 몰아 적이 있던 곳으로 가서 보니, 적선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고 살이 타는 냄새는 차마 맡을 수가 없었다. 여러 나라 군사들은 모두 “적을 이처럼 섬멸한 것은 조선(朝鮮)의 힘이다.”라고 하였다.
적은 신장(身長)이 10척(尺)이나 되며 눈은 길고 깊으며, 털은 붉고 수염은 헝클어져 마치 해초(海草)가 어깨에 늘어진 것 같으니, 이는 아마도 거란(契丹)이 정벌했던 황두실위(黃頭室韋)인 듯하다.
적의 군기(軍器)는 화포(火炮)와 장창(長槍)이고, 총(銃)에는 화승(火繩)을 쓰지 않고, 만호석(㻴瑚石)을 화문(火門 화승의 불로 화약에 점화하는 곳)에 단단히 고착(固着)시키고, 또 용두(龍頭) 위에 금수(金燧)를 달아 놓았는데, 용두가 떨어지면 금수와 만호석이 서로 부딪쳐 불이 퉁기어 점화(點火)되며, 점화가 되면 곧 발사되도록 되어 있다. 배는 나무 판자(板子)로 덮거나 서까래를 걸어 떡갈나무로 덮었는데, 밖은 모두 자작나무 껍질로 두껍게 덮고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을 많이 내어 놓았다.
우리 군사는 8명이 전사하고 약간 명이 부상하였다. 7월 10일에 첩서(捷書)를 아뢰고 회군(回軍)하는데, 열 사람이 들어올리지 못한 철정(鐵碇 쇠로 만든 닻)을 포로로 잡은 차한 사람은 혼자서 마치 지푸라기 들듯 들어올리니, 그 완력이 이와 같다.
9월 27일에는 영고탑에 도착하였는데, 황제가 칙명을 내려 조선 장수에게 용골대(龍骨大)ㆍ부골대(副骨大)의 벼슬을 내리고 상(賞)을 차등 있게 주었다. 청 나라 원수는 배시황을 이끌고 집으로 가서 자기의 세 아내와 인사시켰는데, 세 아내는 한 팔은 올리고 한 팔은 내려 예를 하고서 앞으로 나와 제 얼굴을 배시황의 얼굴에 대었으며, 성찬(盛饌)으로 대접하였다. 생각건대, 한 팔은 올리고 한 팔은 내린 것은 천지(天地)를 가리킴이고, 사람의 마음은 사람의 얼굴처럼 서로 다르므로, 얼굴을 갖다 대면 마음도 합한다는 것을 뜻함인 듯하다.
11월 18일에 영고탑을 출발하여 12월 15일에 두만강에 도착하였다. 그 이듬해 청 나라에서는 공사(貢使) 편에 부탁하여 건사한 여덟 사람의 집에는 각각 은(銀) 30냥(兩)을 주고, 부상한 25명에게는 5등급으로 나누어 은을 차등 있게 주었다. 신류(申瀏)와 배시황은 모두 영남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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